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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어찌 할꼬” (노일경)

시평

by 제3시대 2009. 6. 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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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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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경
(월곡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의 문제점들을 묻기 전에
요즘 초등학생들이 느끼는 한국의 문제점들을 사회자가 말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5위 : 정치인들이 맨 날 싸운다.
4위 :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 것 같다.
3위 :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왜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2위 : 어른들은 공부를 잘해야만 알아준다.
1위 :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 나온 자료인지는 모르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뭇 놀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배이게 되었을까 ?
싸움과 갈등, 긴장과 왜곡, 분열이 배어버린 것이라면 걱정이다.
아니면 평화와 평등, 존중, 화해의 꿈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를 주도하는 힘이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상대에게 철저히 인색한 정치는 더욱 피폐한 싸움을 예상케 하고
빈부의 양극화는 일정한 추세를 넘어 당연지사로 삼고 있다.
여전히 무소불위 성장경제의 환상은 민족주의를 너머서고, 한편, 낡은 좌우의 빗금을
쳐대며 반쪽짜리 민족주의를 들이댄다. 통일은 커녕 전쟁이 우려되는 위기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꿈이 들어있을까 ? 멍이 들어 있을까 ? 참 쉬운 문제가 아닌가 ?

노무현의 죽음이 슬프다.
그를 죽게 한 세력들은 움추린듯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중요한 변수가 될까 ?
좌향우라고 비판하며 일찍이 정치적 기대를 저버렸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슴이 아프지만
뭐라 보탤 말이 없다.
백무산이 노래한다.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말뿐인, 허세뿐인 우리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열 번 스무 번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나니 난데없는 철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바위벼랑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었습니다.
...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내의 외침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패배가 여러분의 승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피에 굶주린 자들에게 당신을 먹이로 던지고 피의 잔을 나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 슬픈 선지자의 꿈이여... 당신은 정치가가 아니었습니다. ‘(백무산)
안도현도 노래한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맞추어 일어나야
우리가 흩으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안도현)

이 독실한(?) 정권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픈 전직 대통령에게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교회 밖에서 선연한 성서의 이미지들이 뿜어내고 있다.
소위 ‘성령충만’ 하다는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외침들을 어떻게 들을까 ?
‘욕심충만’ 한 성공의 신화 속에 예수를 끼워 파는 자들은 어떻게 들을까 ?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멍은 비극의 전조일 수 있다.
아니 ‘바위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 같은’ 삶이 민중의 현실이 될 수 있다.
욕망의 성전들이 정의의 강물을 삼켜버리는 ‘하마’로 보일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 이 정권이 강요하는 희망의 황폐보다는 더 낫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어른들을 심판하는 그림자가 멍울져 있다.
가난한 시인들이 첨탑의 꼭대기들을 부끄럽게 한다.
강령도, 전술도 없는 촛불 속에, 등 떠밀지도 않는데 나선 조문의 행렬 속에
성령의 바람이 실려 있다고 한다면, 너무 비신학적인가 ?
성령이 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 눈먼 자, 갇힌 자에 자유를 숨 쉬게 하고
서로 다른 이들이 소통하며, 함께 살아갈 길을 트게 하는 것이 아닌가 ?
이 소중한 추상을 오늘 우리 삶에 어울리는 구상으로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표현으로 ‘어찌 할꼬 ?’ 이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 ?
기만과 허위의 이념, 언론장악의 맹목, 전쟁의 위기, 치졸한 권세의 폭력을 거슬러
가는 길은 무엇일까 ? 
살면서 물어야 한다. 살아서 그려가야 한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때까지 물어야 한다.
열세와 약세와 한계와 작음에서도 물어야한다.
우울과 비관과 역겨움과 설움에서도 그려가야 한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희망이, 또 하나의 기쁨이, 또 하나의 용서가
이 슬픔과 좌절과 분노의 복판에 일어나기까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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