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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10] 무소의 뿔처럼 갈 것이냐(김정원)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7. 8. 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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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갈 것이냐





 김정원*

   

    오늘도 ‘우는 여자’는 어김이 없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워 울다가, 곧 자신의 처지에 아파하며 다시 울었다. 그녀를 마주한 이들, 그러니까 그녀의 친구들은 그 눈물에 무뎌질 때도 됐건마는, 오늘도 그 눈물과 함께 아파한다. ‘우는 여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불확실성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가 쏟아 낸 눈물처럼 자신도 쏟아져버릴까 봐, 그렇게 흘러내릴까 봐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작정한 것처럼 보였던 그녀였지만, 자명한 불확실성이 덮치자 마치 격정과 예술성을 포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자신의 욕동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그녀의 다짐은 마치 선언과 같았기에, 그녀 앞에 둘러 앉아 있는 근심 어린 얼굴들은 그녀의 다짐에 균열을 낼 수 없음을 직감한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게 한다”고 말하던 바타유가 그녀 속에 들어 앉았나 보다. 그녀는 그 ‘진실’ 그러니까 그녀의 언어로는 ‘나’를 찾아 떠나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 죽일 놈의 ‘나’ 찾기. 그거 좋게 말하면 ‘자기 완성’이겠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팔자 사나운 년 되는 거 아니겠냐.”


    쓴 소리를 자주 하는 그녀의 한 친구는 이번에도 쓴 소리를 날린다.


    “너를 좀 붙들어 매. 꼭 그렇게 불안전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겠어? 뭘 그리 고생을 사서해. 얼마나 또 쳐 울려고, 꼭 그 지랄을 해야 존재가 완성이 된다니…… 너 얼마나 대단한년 될 건데! 안정성이란 안정성은 죄 쌈 싸먹고 얼마나 잘 되려구!”


    ‘쓴 소리 여자’의 쓴 소리에 ‘우는 여자’는 역시나 죽죽 울며 대답한다.


    “나는 내가 팔자가 사나운 것이 좋아. 나는 자꾸 묻고, 고민하고 자빠지고 하는 내 삶이 좋아. 아프지만 후회가 적으니까. 무섭고 불안하지만, 나는 성숙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 그 고통의 시간이 반가워. 이러다 죽겠구나- 하다 보면 그것은 이미 지나있어. 그리고 나는 ‘나’에 조금 다가와 있지.”


    그녀는 쾌락을 향유하는 만큼 고통스러워했었고, 자유를 누리는 만큼 망가졌었다. 그 시간을 지나온 그녀는 다시 그 시간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분명 담담한 면이 있었고 그 시간 속에 다시 자신을 던질 준비 역시 돼 있었다. 이제 올 시간은 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친숙한 언어도 없기에 보다 더 아플 것이 명증했다. 없고, 또 없을 시간. 열 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스무 개가 없을 그 시간. 있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꿈과 더 희미할 가능성, 그리고 쾌감과 정념과 눈물과 고통 즉, 끝없을 쥬이상스…… 담보 되지 않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그녀는 환희와 불안, 그 어중간한 위치에서 떨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유독 행복에 집착했었다. 강산은 변했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가 눈물과 함께 떨구는 행복은 ‘나’, 혹은 ‘고통을 감각하고자 하는 나’인가 보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힘이 필요하다. 시로서 구원받고자 했던 김수영의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든 진리는 평범하다 

요는 죽음을 가슴에 새기고라도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항상 외국에 온 사람 모양으로 내 나라에 살고 

외국어를 하듯이 내 나라말을 하고 

여자들을 모두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 

가슴 속에 깊은 자유가 파묻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밀의 용기가 필요하다. 

앵무새의 발언 같은 허위를 태워 버리고 

발코니 위에 나서면 밤이 슬프지 않으냐

 … 

수많은 수인이 해방된 아침같이 

밤하늘에 떠도는 보랏빛 안개 

거리여 기립이여 설운 기립이여 

나는 완전히 너를 결별한 사람


- 김수영, 미제, 유고시(1958)


    ‘우는 여자’는 자기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다. 가슴에 박혀있는 자유를 파내고 있었고, 반복되는 언어를 태우고자 했고, 밤을 온전히 갖고자 했다. 그녀는 실로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다. 외국에 온 모양새로 사는 것이 아닌, 실제로 외국에서 제 나라와, 제 말과, 제 벗을 잊어 먹은 여자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살기를 김수영만큼이나 원한다니, 이제 더는 ‘쓴 소리’로 다그칠 수가 없다.


    ‘그래, 가라. 밥이나 잘 챙겨 먹고-’


    그렇지만 사실 ‘쓴 소리 여자’는 ‘우는 여자’가 흠모하는 그 강렬한 욕구가 미화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혹 그 욕구는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의미만으로도 이미 몹시 아름다워 그저 고결할 것만 같은 그것, 자기 완성! 내뱉기만 해도 내뱉는 그 순간으로부터 곧장 심장을 파고드는 그 숭고한 이름, 자유! 오, 자기 완성이여! 오, 자유여!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과대평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피노자까지를 들먹이며, “과대평가란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에티카).”라고 그녀의 귀에 때려 박고 싶었다. 스피노자가 다른 이를 사랑할 때 상대에게 과한 점수를 주는 행위를 문제 삼았다면, ‘쓴 소리 여자’는 ‘우는 여자’가 상대방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너무 과한 점수를 준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을 향한 사랑, 즉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이어서 결국엔 빈곤 터지는 ‘나’ 사랑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나아가, 그녀가 사랑하는 ‘자기 완성’과 ‘자유’ 역시 과대평가 된 것은 아닌지 또한 따져 묻고 싶었다.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에 취해 그것들을 향한 그녀의 과대평가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적어도 ‘쓴 소리 여자’보다는 ‘우는 여자’는 삶에의 권태로움에 늘 민감했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쓴 소리 여자’는 권태로움에 후려쳐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끝내는 권태를 부정하며 살았었다. 백날 카뮈를 읽어도 의식이 죽어 있으니, 삶에의 부조리는 부정되기 일쑤였다. 가끔 고개를 쳐드는 의식은 잘 달래어 저-기 멀찍이에 두어야만 했다. 부조리를 향한 적극적 반항은, 구조의 부조리는 물론 자신의 비겁함 역시 폭로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권태로운 자기 존재를 들춰보기를 주저해왔었다.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열심히 찾는 척했지만, ‘쓴 소리 그녀’의 가슴은 내리 차가웠고, 사회적 질서와 관습 속에서 아늑함을 성취하고자 했다. 그에 비해 ‘우는 여자’는 날 것으로 깨어 있었다. 즉, 삶의 의미 없음에 반항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식 있음’ 앞에서 ‘쓴 소리 여자’는 따져 묻기를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약간 니체의 초인 같기도, 약간 시시포스 같기도, 혹은 김수영 같기도 한 그녀를 그 측면에서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가라. 밤 길은 좀 조심하고-‘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등장하는 세 여자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골치가 아프다. 한 여자는 아이를 잃고 이혼을 하고, 한 여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고, 나머지 한 여자는 의사인 남편의 잦은 외도로 분노한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이 의존하던 것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 내용 중 일부이다. 그런데, 팔자 센 그녀들이 종국에 선택한 것은 정말 무소의 뿔 같은 치열함이었을까?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던 그녀들은 결국 온전한 자기를 불안정성 속에서 건져내 왔을까?


    여전히 ‘쓴 소리 여자’에게 자유, 즉 불안정성은 불가능으로만 주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주는 위로로 글은 마쳐져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 위로가 가히 무겁더라도 떠나는 그녀와, 곧 떠날 ‘그대’와, 더불어 그 욕망과, 그 불안과, 그 불가능을 지지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었으므로.


“현실주의는 내게 오류의 느낌을 준다. 오직 폭력만이 그런 현실주의적 체험의 빈곤감을 떨쳐버린다. 숨통을 막고, 끊는 힘은 오로지 욕망과 죽음에만 있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도록 해준다. … 인간 앞에 펼쳐진 두 가지 전망이 있다. 한쪽은 격렬한 쾌감, 공포, 죽음 – 정확히 시의 전망-, 그 정반대 쪽은 과학 혹은 유용성의 현실 세계, 유용한 것, 현실적인 것만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것을 외면하고 유혹을 택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진실이 우리에게 권한을 행사하고, 심지어 전권을 휘두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은 아니되, 그 모든 권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에 응답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전권을 휘두르는 진실을 지움으로써, 소멸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닿을 수 있는 저 불가능에 대하여.”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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