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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함석헌 생각(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8. 2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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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생각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 생각”이란 제목은 함석헌의 생각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을 함석헌 사상의 독특한 면을 담아내는 개념 또는 고유명사로 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지적인 작용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의 지향성과 방법론까지 드러내는 개념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생각’만이 아니라 함석헌의 글에서 등장하는 몇 개의 단어들을 부각시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폭넓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 다룰 단어들은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철학,’ ‘소리’, ‘자리’, ‘생각’ 등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이해하는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굴곡진 고난의 역사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특히 4.19 혁명 이후 한국을 위한 사상과 철학의 전통을 유산으로 남기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이 제대로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느낌도 이 글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은 함석헌 사상의 현대성을 모색하고 그의 사상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는데 있다.




함석헌과 철학 (1)


    2008년 세계철학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1900년에 처음 개최되어 4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철학대회였지만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렸다. 개최 국가의 철학적 전통을 소개하는 특별한 분과모임에선 함석헌과 유영모의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발표됐다. ‘현대철학의 재고’라는 그 대회의 주제가 철학을 서양이라는 개념의 영토를 벗어나 이해하자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함석헌과 유영모를 다룬 논문들은 대게 두 사상가의 학문에 담긴 철학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 두 사람의 학문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저술은 많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결국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면이 있었다. 철학이 무엇이고 또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질문은 지금도 묻게 되는 철학사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철학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정의와 이해가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지만, 다양성이 철학적인 작업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제적인 철학대회가 철학성을 증명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다. 이 부분을 면밀히 다루지 않으면 철학적인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그 용어로 지칭되는 서구 사상의 전통을 말한다. 그 전제 하에 함석헌이 철학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과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함석헌 사상의 철학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의 글을 어떻게 철학적 행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함석헌의 사상은 학문적인 근거지가 없었다. 철학이라 하기엔 엄밀함이 떨어졌고, 신학이라 하기엔 다원주의적인 종교학 측면이 강했고, 역사학이라 하기엔 추상적이었다는 게 흔히 듣는 이유였다. 나름 근거가 있는 이유들이지만, 그 근거는 전공 중심적인 학문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함석헌이 이루어놓은 학문적 업적은 오히려 근대적인 대학에서 전공을 중심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전공 분야의 방법론에 고립시키는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함석헌은 근대 학문의 인위적인 경계에 갇혀있지 않았고 거기서 출발한 방법론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함석헌은 종교적으로는 다원론을 견지하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을 지향하고, 사실의 증거에 충실하면서도 영적인 증언의 진리를 믿었고, 현실정치의 변혁을 위한 운동가의 역할과 예언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었다.


    함석헌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어디서부터 할까. 이 질문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함석헌이 자신이 철학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이런 입장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부정한 것은 철학적 자아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학문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로서 규정되길 거부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적인 자기부정은 함석헌과 철학의 문제를 철학적 자아의 관점에서 접근할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함석헌의 글 속에 ‘철학’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가 1960년대에 쓴 글 가운데 철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은 함석헌 자신이 때때로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철학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1960년대 초반은 그의 사상이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무르익었던 시기였다. <생활철학>과 <누에의 철학>이 그 시기의 글이었고, <저항철학>은 몇 년 뒤 1968년에 쓴 에세이였다. 60년대 초반에 쓴 또 다른 의미 있는 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에 쓴 서문이다. 1965년에 출판된 4차 개정판을 내기로 결정하고 본문을 수정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이었다. 당시 그의 완숙해진 사상적 직관의 능력이 그 개정판의 구성에 잘 투영되어 있다. 철학이란 단어가 제목에 없지만 철학적인 의미와 비중이 있는 글로 “한국의 발견”과 “우리민족의 이상”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함석헌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재발견할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글들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이지만 그가 1960년대 초반에 그런 글들을 쓰게 된 것은 4.19 혁명을 한국 역사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한국을 위한 철학을 만들고 실천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 함석헌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적 성과는 미국의 에머슨이 19세기 미국의 정신적 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의 학문을 제창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앞으로 다룰 예정이다.


    <생활철학>은 1961년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단에 선발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함석헌은 그 글에서 당시 서구 철학에 대한 그의 인상이 담겨 있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단순하게나마 정리하고 있다. 현대의 철학이 분열적이고 논쟁적인 것으로 변한 것에 대한 비판도 했다. 철학의 과학주의가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도 파악했다. 함석헌은 철학이 분석과 대립을 넘어서 지혜와 생활과 삶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그에게 과학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는 기술적인 사고의 지배와 과학에 대한 믿음이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철학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힘의 철학과 폭력의 정치로 변모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의 법칙만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뜻과 정신과 절대를 이야기 했지만, 철학적으로 그 입장은 반-자연주의(Anti-Naturalism)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맛봄’이라는 미학의 경지로 이해했고, 함석헌에게 그것은 통합의 경지였다. (“나도 인생이야”라는 시에서 등장하는 “혀 아래 맛으로 듣는다”라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예리한 관찰력은 - 이 후에 다루겠지만 - 그의 사상이 추구했던 통합을 미적인 감각으로 이해한 예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철학이 상실한 삶과 통합의 지향성을 지적해주고 일깨워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함석헌은 철학과 종교가 이성과 믿음으로 나뉘고 절대적으로 다른 방법론의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끝없이 믿음을 얘기했던 이유는 그런 학문적 경향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유가 만든 정신적 혼란과 냉전의 위기로부터 세상을 건져낼 희망은 믿음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이 회의와 불신을 설명하는 이론이 되어가는 경향에 맛서 그가 제시한 믿음은 맹목적으로 선언된 믿음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과제이자 방법론이기까지 했다. 


철학과 한국


    함석헌이 요구한 한국 역사에 대한 반성은 철학적 반성까지 포함했다. 그에게 한국은 철학이 없는 민족, 아니 철학적 자기표현을 하지 못했고 그 의지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중국의 고전과 언어로는 한국의 정신을 드러내는 그런 자기표현을 할 수 없었다. 영어로도 한문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만든 민족의 혼이 있었다. 서구의 학문도 불교와 유교도 한국의 지적인 전통이 되기에 충분치 못했던 이유는 한국의 언어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사유와 전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1963년 영국의 한 퀘이커 대학에서 했던 <우리 민족의 이상>이라는 강연에서 60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중국과 서양의 개념으로 한국 역사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지적인 종속과 나태함을 질타했다. 사상의 빈곤은 수입된 개념과 모방을 통해 지식을 권력으로 행사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지식인들 때문이었다. 한문의 사유를 아직도 하고 있고, 영어가 등장해 지배적인 언어가 된 역사는 한국 민중들의 고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억압은 정치적인 무력행위만이 아니라 지식과 개념으로도 가능했다. 그 결과 민중들은 높은 뜻을 추구할 의지가 꺾인 채 숙명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에 철학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미래도 없었다. 어제, 그제, 오늘, 모레는 있지만 ‘내일(來日)’은 한자이고 고유한 한국말이 없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표현이었다. 철학 없는 숙명적인 세계관으로 사는 것과 ‘내일’이 없다는 것을 동일한 현상으로 본 것이다. 철학이 없는 게 아니라 철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내일이란 말을 상실한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의 발견>은 철학적 자기발견을 의미했고, 한국의 미래는 한국에서의 철학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게 철학이 없는 민족은 내일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가 찾았고 구현하고자 했던 새로운 한국은 내일이 있고 철학이 있는 한국이었다. 이 과정은 그에게 한국의 사상을 표현할 언어를 재발견하고 한국인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함석헌에게 민중의 언어와 민중의 방식으로 할 수 없는 철학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철학의 가치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기표현에 있었고, 이는 민중의 현실과 경험의 한 축이었던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었다. 함석헌에게 60년대 초반 한국에서 필요했던 것은 경제적 발전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혼이 담긴 언어로 구성된 새로운 철학이 필요했다. 함석헌은 된 자신의 강연과 글을 통해 그런 문제를 진단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철학을 예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고전 연구도 필요했다. 특히 한국인에게 적합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의 가르침이 아니라 동양의 고전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양의 고전이 한국의 고전이 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고전에 대한 색다른 이해를 내놓는다. 한국의 고전은 한국인 자신이었고 한국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서구 사상사에서 많은 고전에 대한 정의가 등장했지만, 함석헌의 내면의 고전이란 개념은 고전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마음속 혼에 있는 고전을 조명하여 발견하는 것이 자아의 발견이었고 영혼을 돌보는 행위였다. 자아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은 철학의 고전적인 의미에 속한다. 영혼의 돌봄은 다른 민족의 말과 개념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민족 고유의 언어를 찾고 다듬는 것은 그 자체로 영혼을 돌보는 철학의 행위라 할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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