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미투’ 행렬이 사회 각 영역에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대충 짐작했던 것들이지만 그 가해자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파렴치했다. 더욱 놀라운 건, 가해자인 저들 ‘소왕국의 군주’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그이가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였거나 무관심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이가 ‘일그러진 영웅’에 다름 아니었음이 폭로되었다. 그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던, 있는 줄 알았던 날개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군주가 되어보지 못한 남자들, 내가 바로 그런 자의 하나인데, 그런 자들의 자숙의 시간이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들을 맹렬히 살핀다. 몇 개의 부역자 혹은 방관자 리스트가 머릿속에 작성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다지 뼈저린 아픔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염된 손을 씻는, 일종의 자기방어의 기술에 가깝다. 그래도 ‘미투’를 외쳤던 이들의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절절한 용기 덕에 그나마 소박한 자숙이라도 했겠다. 그리고 사회는 그 소박한 자숙만큼의 각성할 기회를 얻는다.
사람들과 미투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불쑥 말을 던졌다. “개신교에선 소식이 없나요?” 모두가 궁금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던 것은 각자 그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마음속으로는 누군가 말해주길 바랐겠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 한 사람이 눈치 없이 말을 던진 것이다.
실은 개신교에선 훨씬 먼저 ‘미투’ 운동이 있었다. 2010년 봄,
피해자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사력을 다해 보듬으며 용기를 내서 고발하였지만, 노회도, 교단도 그이들을 감싸주는 것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전병욱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는 피해를 증언한 그이들을 ‘이단’이라고 매도했다. ‘하나님의 종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 했던, 신도를 가장한 이단’이라고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목사 성범죄를 다루는 교회법을 어느 교단도 만들지 않았고, 피해자가 안심하고 상담하며 신고할 수 있는 기관도, 치유와 보상에 관한 교회법도 여전히 전무한 상태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피해자들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증언을 강요받았다. 2010년에 시작된 개신교발 ‘미투’ 운동은 이렇게 상처만 남기고 아무런 개혁도 일으키지 못한 채 지나가고 있다. 그러니 검찰, 극단, 문단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미투’ 행렬이 개신교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 이런 곳에서 용기 있는 증언은 상처만 남길 테니.
하지만 개신교 내부에서 피해자를 대신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또 논점을 제기하는 방식도 더 깊어졌고, 문제인식 또한 더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 교회권력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계획이 없는 것 같고, 특히 일부 극우파 개신교 지도자들은 더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다. 해서 교회권력을 향한 비판은 피해자가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없게 된 불임의 종교를 향해 보다 근원적으로 문제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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