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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성장영화의 윤리: <레이디 버드>(2018) (조은채)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4. 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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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영화의 윤리: <레이디 버드>(2018)



조은채*

 

※ 영화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는 “내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해?”라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보이스오버(V.O.)와 함께 시작된다. 가톨릭 교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보수적이고 조용한 새크라멘토에서 나고 자란, 하지만 도저히 자신을 그 마을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열일곱 살의 소녀.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원래 이름인 크리스틴 대신에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이 소녀를 설명하기 위해 내레이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소녀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나열한 일기장이나 편지를 읽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성장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론이 바로 내레이션이겠지만, <레이디 버드>는 처음 이후 단 한 순간도 라디오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잘 안다고 넘겨짚는 십 대 시절이 쉽게 언어로 가지런히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레이션은 주인공인 레이디 버드가 어떤 소녀인지, 그리고 영화가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단번에 예감하게 한다.


   <레이디 버드>가 ‘윤리적인’ 성장영화로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이 소녀를 알고 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겪었던 일 혹은 지나온 시기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과신한다. 그 순간을 겪고 있는 당사자, 흔히 나이가 어린 이가 말하지 않는 속마음이나 사정도 뻔히 다 안다고 착각한다. 다른 성장영화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주 헛발질을 하곤 한다. 인물에게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세심한 설계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어떤 성장영화들은 굳이 고심하지 않아도 그 시절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종종 일을 그르친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다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실체 없이 부풀려진 채 설명적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그 누군가는 대체로 감독이고, 그가 자신이 아직도 얼마나 소년 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과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이도 않아도 될 것 같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과시욕에서 비롯된 연출이 청소년기의 인물을 대상화해서 흥밋거리로 착취하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감독 그레타 거윅은 이 보편적이지만 다소 비윤리적인 성장영화들과 달리 <레이디 버드>에 넘겨짚은 추측이나 주제넘은 단정이 자리할 빈틈을 남겨두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만 다룰 수는 없고, 연출력을 뽐내며 인물의 감정을 과하게 극대화해서 담아내는 장면도 필요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대상의 불안 또는 기쁨에 이입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고 수록하는 중립적인 매체이다. 하지만 대상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는 필연적으로 감독의 가치판단을 수반한다. 이때 감독의 시선과 태도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을 다루는 영화라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그저 전시하고 때로는 미학화라는 명목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데다가 때로는 게으르기까지 하다. 반면, <레이디 버드>는 이미 성장한 자가 그 시기를 겪는 자를 관찰하는 데서 오는 불가피한 비윤리성을 인식하고 그 경계선을 넘지 않기 위해 매진한다.


  ‘철길 건너 구린 동네(the wrong side of the tracks)’에 사는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녹록하지만은 않다. 엄마는 매번 야근을 반복하지만 아빠의 실직은 쉽게 메꿔지지 않고, 부자 친구들과 비교되는 집안 사정에 자주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얼마간 관대한 보금자리이다. 레이디 버드는 학교 선생님의 채점표를 몰래 버려버리지만, 선생님은 범인을 색출하는 대신에 양심에 맡게 본인이 받은 점수를 적어내라고 한다. 다시 떠올리기도 창피한 거짓말을 친구에게 들켰지만, 레이디 버드는 동네방네 거짓말쟁이로 소문이 나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수적인 미션 스쿨의 성교육 시간에 임신 중단을 무조건 부도덕한 일이라고 서슴지 않는 강사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정학을 당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을 혼자 품고 사는(혹은 그렇다고 스스로 믿는) 소녀에게는 새크라멘토는 마냥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엄마는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의 학비까지는 지원해줄 수 없다고 못 박은 상태라서 떠날 가능성도 희박하게만 보인다. 레이디 버드에게는 엄마인 매리언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사건건 트집 잡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지 않아서 자주 부딪친다. 누구보다도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때로는 그냥 조금 멀리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다.


  <레이디 버드>는 흔히 가장 자의식이 과잉된 시기라고 여겨지는 십 대의 소녀를 다루고 있지만, 그 연출은 과잉된 감정이나 자의식을 극대화하는 대신 도리어 절제하면서 효과적으로 배가한다. 배우의 얼굴과 표정을 클로즈업해서 민망함이나 비참함, 슬픔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스크린 가득 전시하는 법도 없다. 그런 욕망이 들 법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도, 가상의 인물인 데다가 나이도 어린 이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을 최대한 존중할 수 있는 윤리적인 연출을 선택한다. 알고 보니 게이였던, 그래서 결국은 레이디 버드를 속인 것이 된 첫 번째 남자친구 대니와의 신(scene) 역시 그렇다. 레이디 버드는 대니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자신의 비밀이 들킬까 봐 무서웠다는 그를 이해하고 결국 함께 울어준다. 영화는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표출하며 우는 두 소년∙소녀의 얼굴을 과시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에 새롭게 싹튼 신뢰와 우정을 암시한다. 레이디 버드는 카일과 엉망인 첫 섹스를 마친 후, 자신을 데리러 온 엄마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비참함, 죄책감, 후회, 민망함, 서운함 같은 것들이 북받쳐 올라왔을 레이디 버드의 얼굴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아마 미세하게 떨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이디 버드의 다리를 내보이지도 않고, 서러움 울음소리를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으로 삼지도 않는다. 대신 일요일에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자고 레이디 버드를 달래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사지도 않을 집을 함께 보러 다니는 모녀의 즐거운 일요일로 화면이 금방 전환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특별하지만 평범한 레이디 버드, 혹은 모든 이의 소녀 시절을 조금이라도 더 윤리적으로 그리고자 한 고민의 연장 선상이다.


  알고 보면 레이디 버드와 엄마 매리언은 서로 무척 닮았다. 둘이 서로 닮았다는 사실은 대사로 직접 주어지기도 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연출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사과하러 왔던 대니는 당황했기 때문인지 되려 레이디 버드에게 그녀의 엄마가 무섭다고 험담한다. 레이디 버드는 발끈해서 엄마는 따뜻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항변한다. 대니는 그녀의 엄마가 무서우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라고 결론지어버리고, 레이디 버드는 무서운 동시에 따뜻할 수는 없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대니를 몰아세우다가도 이내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주기까지 한다. 곧바로 레이디 버드의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신부님이 간호사인 레이디 버드의 엄마에게 자신이 우울증을 털어놓는 장면이 이어진다. 엄마는 신부님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연민한다. 영화는 ‘무섭지만 따뜻하다’는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말이 진실일 수도 있음을 레이디 버드와 엄마의 모습을 통해 증명한다.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엄마는 때로는 신경질적이지만 강하고 따뜻한 사람, 즉 닮은 사람이다.


  졸업을 앞둔 레이디 버드는 학교 수녀님에게 그녀의 대학 지원 에세이에 새크라멘토에 관한 애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을 듣는다. 레이디 버드는 그럴 리 없다고, 그저 관심을 가진 것뿐이라고 부정하지만, 수녀님은 관심과 사랑이 같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레이디버드는 프롬 드레스를 함께 고르던 엄마의 지적에 크게 상처받는다. 엄마가 나를 좋아해 줬으면 한다는 레이디 버드에게 엄마는 당연히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자신을 좋아하냐고 되묻는다. 엄마는 쉽게 답변하지 못하고 네가 언제 어디서든 최고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어쩔 거냐는 레이디 버드의 말에, 수녀님 앞에서의 레이디 버드처럼 엄마의 말문도 막힌다. 닮은 두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대면하자 똑같이 침묵에 잠긴다. 레이디 버드는 고향이 지긋지긋하기만 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깊이 사랑했고, 엄마는 레이디 버드를 몹시 사랑하지만 소녀의 지금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둘은 일견 반대되는 깨달음은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이 누구보다도 닮고 서로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맞물리는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과 애정, 사랑함과 좋아함 사이의 미묘한 차이 속에서 그들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관계는 앙금을 남긴 채로 멈춰버린다.


  엄마 몰래 지원했던 뉴욕의 대학에 결국 합격하면서 모녀 사이의 관계는 더 틀어진다. 자신이 반대하던 일을 슬쩍 저질러버린 레이디 버드에게 엄마가 단단히 화가 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레이디 버드와 대화를 내내 거부하고, 그녀가 뉴욕으로 떠나는 공항에 데려다줄 때도 게이트까지 배웅해주지도 않는다. 엄마가 뒤늦게 후회하고 울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레이디 버드가 알 길은 없다. 엄마가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언제나 가장 많이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까지도 좋아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레이디 버드는 뉴욕에 도착한다. 이때 레이디 버드가 수녀님에게 자기도 몰랐던 새크라멘토에 대한 애정을 들키게 한 대학 에세이처럼, 아빠가 엄마 모르게 가방에 넣어둔 엄마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등장한다. 엄마의 내레이션으로 이 편지가 읽히고 레이디 버드가 펑펑 눈물을 흘리는 식의 효과적이겠지만 진부한 장면 대신, 그저 엄마가 편지에 쓴 문장 몇 개가 화면을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마지 못해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주기는 했지만 늘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던 엄마가 쓴 “레이디 버드라는 네 예명 참 예뻐.”라는 문장은 그 절제된 연출 속에서도 스크린 밖까지 잔상을 남긴다.


  뉴욕에 도착하고 엄마의 편지를 읽은 후에야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이름인 ‘크리스틴’이 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것은 고향이든 심지어 이름이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열일곱 살 소녀에게도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떨어져야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듯이, 이제 레이디 버드에게는 고향과 엄마 모두를 사랑하는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디 버드는 고향 집의 자동응답기를 통해 엄마에게 크리스틴이 참 좋은 이름인 것 같고, 사랑하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아직 영화상에서는 엄마에게 도착하지 못한 이 메시지는 둘 사이의 관계 역시 성장하리라고 암시한다. 미숙해서 혹은 너무 사랑해서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으며, 서로를 좋아하는 일이 가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좋아하고 싶어서 매번 삐걱대다가 멈춰버린 둘 사이의 관계도 비록 영화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내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크라멘토에서도 “보기에 추한 것이 꼭 부도덕한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소녀는 뉴욕에서는 아마 더 자주 세상과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앞으로 성장할 엄마와의 관계가, 그리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무엇이든 성장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소녀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레이디 버드>의 결말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부터의 졸업, 또는 ‘크리스틴’과 ‘레이디 버드’ 사이의 화해와 같은 쉬운 말로는 봉합되지 않는다. 성장이 결코 완료된 후 닫히는 개념이 아니라고 믿는 감독 그레타 거윅은 엄마에게 소녀의 메시지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누군가의 소녀 시절을 전지적인 위치에서 하나의 분명한 결말로 종결하는 대신,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끝마치는 것이 더 옳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까지 <레이디 버드>가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성장영화의 윤리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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