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 저들의 폭력 배후에는 ‘텅 빈 앙심’ 밖에는 없다
기드온은 가나안 중부 이북의 이스라엘 부족들 사이에서 유포됐던 영웅설화의 주인공이다. 므낫세, 납달리, 잇사갈, 즈블론 부족 등은 부족연합 시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변두리 부족들이지만,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성서의 여느 영웅들을 압도하는 걸출한 스타임에 분명하다. 「사사기」에 나오는 다른 이들보다 분량도 길게 다루어져 있고, 막아낸 외적의 규모도 다른 사사들을 압도한다. 훗날 국가 이전 시대의 설화를 모아서 영웅전을 만들어낸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사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북방 변두리 부족들의 영웅을 자신들의 영웅보다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필경 기드온 이야기는 점차 북부 부족들의 차원을 넘어서 전 이스라엘 대중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진, 전승과정에서 이른바 ‘전국구 스타’가 된 덕이겠다.
이 글의 핵심 소재는 이 걸출한 영웅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베멜렉이다. 「사사기」에 의하면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후처의 자식이다(8,31). 하지만 「사사기」 본문이 그에 대해 악의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본처의 자식이 아닌 후처의 자식이라는 주장은 그리 믿을만하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아들이라는 점만 고려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비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70명이나 되는 배다른 형제들을, 요행히 살아남은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자기를 따르지 않는 족속들을 공격하고 무참히 학살한다.
설화의 배경은 아직 왕이 없던 때다. 아직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고, 공물을 수거하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마음대로 학살하는 왕권적 권력전통이 등장하지 않던 때다. 그럼에도 그는 아비의 권력을 세습하여 독점하는 자가 되었고, 마치 왕처럼 행세한다. 도대체 그는 이것을 어디서 배웠을까.
반면 그의 아비 기드온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는 미디안 족속이라는 강력한 유목집단의 침략을 막아낸 전쟁영웅이었음에도, 부족의 장로들이 그를 ‘군장’1)으로 위촉하려 하였으나 이를 물리치는 겸손함을 보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 「사사기」 8장 22~23절
게다가 ‘왕(군장) 없는 부족동맹’2)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에브라임 지파가 그를 의심하자 동맹의 정신에 대한 신실함을 보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8,1~3). 또한 그는 가문의 신상인 바알과 아세라 상을 부수고 야훼의 제단을 집안에 모신 신실함의 상징이기까지 하다(6,25~26). 요컨대 그는 충분히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사심 없는 겸허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아비멜렉은 업적도 없으면서 아비의 영웅적 공적을 도둑질한 존재다. 아비의 겸허함과는 반대로, 통치자의 오만함과 잔인함을 과시한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다 왕국의 사관들의 시각을 반영한 「사사기」 서사의 이면으로 들어가 보면, 텍스트 속에 힐끗힐끗 드러나는 이전 시대의 역사적 정보들은 기드온에 대해서 전혀 다른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우선 그의 집안은 동시대 다른 집단보다 훨씬 부유했고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6장 25~26절에서 그의 집단에 바알과 아세라 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정보다. 「사사기」를 쓴 유다 왕국 말기의 사관들은 예루살렘 성소 이외의 것을 사교라고 보면서 일종의 단일교적 신앙의 야훼종교화를 모색했다. 그런 시각에서 기드온의 신상 파괴 이야기는 우상 파괴의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기드온이 살던 사사시대는 단일종교사회가 아니었다. 많은 신들이 마을마다, 씨족마다, 부족마다 다양하게 숭배되었고, 어느 집안이 신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마을/씨족/부족의 중심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대다수 마을들은 바알과 그의 파트너인 아세라 신을 숭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스라엘 부족동맹은 야훼동맹이었다. 즉 야훼가 동맹을 추동하는 신이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다시 해석하면, 기드온이 바알-아세라 신상을 부수고 야훼 성소를 세웠다는 것은 기드온이 이제 자기 집안은 마을을 대표하는 집안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집안이라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제 그의 가문은 지파동맹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쟁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7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8,30). 군장이 이 정도의 아들을 두었다는 건 다소 과장되어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왕 없는 사회’로서의 지파동맹의 평등 가치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추정에 이르게 된다. 또 침입자인 미디안 족속을 무찌른 뒤, 전리품의 일부를 부족들로부터 수거하여 ‘에봇’이라고 하는 어떤 조각상을 만들어 가문의 상징물로 삼았다고 하는데(8,24~27), 이는 그가 일종의 왕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미디안 족속과의 전쟁 과정에서 자기에게 협조하지 않은 제3자인 숙곳 족속과 브누엘 족속을 학살하는 모습(8,16~17)은 잔인한 전제군주의 정복전쟁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의 모습과 기드온의 모습은 무엇이 다를까. 둘은 아직 왕이 없던 사회, 군주제 사회와는 달리, 아직 권력 집중을 향한 구심력이 그리 강하지 않던 사회, 특히 권력 집중보다 평등한 공존의 가치가 유달리 강했던 사회에서 이들 부자(父子)의 모습은 이스라엘이 추구하던 가치의 정반대를 향한 길의 최전면에 서 있는 존재로서 마치 하나처럼 닮아 있다. 「사사기」의 서사 속에서는 아들이 아비의 다른 자식들을 학살함으로써 아비와는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음에도, 아들은 너무도 정확하게 아비의 방식대로 사람을 대함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외가 친척이 그의 부탁대로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에게 그가 한 말을 모두 전하니,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 기울어져서 모두 “그는 우리의 혈육이다” 하고 말하게 되었다.
―「사사기」 9장 3절
그런데 이 세습되는 ‘나쁜 피’에 관한 역사적 악취가 지금의 세상 속에서도 풍기고 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글을 쓰는 동기다.
사사시대는 대략 2백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한국의 민주화는 고작 20년 정도 제도화의 길을 모색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민주적 제도화를 향한 본격적 모색은 훨씬 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주화’는 그것을 열망하던 대중에 의해 기각되었다. 오늘 우리 시대 대중의 피로감의 근저에는 물론 좌절된 민주화에 대한 실망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또한 지구적 자본의 난폭성에 대한 두려움, 민주화는 그것의 대안이 아니라는 대중적 인식이 그 주된 원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하여 너무도 빠르게 민주화 대신 ‘포스트 민주화’의 문제가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가 권력집중 체제에 대한 해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면, 포스트 민주화 담론은 새로운 사회적 통합의 가능성에 지대한 관심을 함축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 성장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크게 의존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실용정부’를 기치로 내건 MB체제가 대두한 것이다.
하여 처음엔 ‘실용’이라는 것이 이 체제 해석에 화두라고 생각했다. 비판자들인 우리만이 아니라, 심지어 현 정부의 주역들 또한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 참신한 용어로 자기를 해석하려 했을 것이다. 한데 그것은 실제를 구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말장난임이 곧 드러났다. MB정부는 처음부터 ‘원한의 정치’에 몰두하였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그들은 마치 민주화의 주역들이 구상했던 것 일체를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인양 10년간 삐거덕거렸던 빈약한 제도적 흔적들을 난폭하게 지워버리려 했다. 심지어 민주정부의 주역들은 권력형 비리 혐의로 정치적 존재의의를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단지 10년일 뿐인데,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된 식민지 체제 이후부터 계산해도 권위주의 시대가 1990년대 말의 이른바 IMF 체제까지 거의 한 세대동안 계속된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만 반권위주의적 제도화가 그나마 삐거덕거리며, 어찌 보면 위선적으로 진행되었을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참을 수 없는 모욕감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누가 일사분란하게 지휘한 결과라기보다는 기득권집단이 도처에서 무차별하게 원한의 정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의 수많은 정치적 행동들 속에는 원한의 정치가 분리할 수 없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원한의 정치가 작동되는 동력은 ‘복수’다. 복수할 수 없는 이의 앙심은 자기 내적 병증을 낳지만, 복수할 능력을 갖춘 이의 앙심은 심각한 폭력을 낳는다. 하여 복수의 정서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되갚아주어야 할 것을 갑절로 되돌려주는 폭력만이 남을 뿐이다.
도대체 그 짧은 기간이 왜 저들에게 그토록 모욕감을 주었을까. 그 빈약한 민주적 제도화의 시도가 그렇게 치명적이었을까.
이른바 저 ‘잃어버린 10년’ 간 한국의 기득권 집단은 전례 없는 비대칭적 부를 축적했다. 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빈부격차가 가장 극심해졌다. 특히 일부 재벌이나 몇몇 기업은 정부를 압도하는 권력자원을 독과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서 천박하든 고상하든 귀족주의적 문화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원한의 정치가 잔인하게 춤을 춘다. 도대체 무엇을 잃었기에 모욕감을 느끼고 앙심을 품게 된 것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겨우 10년간, 기나긴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뿌리 깊게 ‘지배자 의식’이 훼손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은 시혜를 베풀지언정 피지배자의 요구에 대화하면서 자원을 나눌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지배자의 자존심이 민주화, 그 삐거덕거리는 10년 동안 상처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최근의 국가폭력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비록 불충분하더라도 민주화를 거친 사회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야만의 행실’을 보인다. ‘나쁜 피’는 다시 비시민으로 추락한 이들의 목을 옥죄고 있고, 시민의 영혼과 육체를 잠식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뿌리 내린 ‘나쁜 피’가 다시금 시대의 혈관을 관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다시 활개 치는 그럴듯한 이유는 없다. 단지 사소하게 다친 권력자들의 앙심이 이유라면 이유다. 거기에는 정치가 부재하며, 정책의 일관성도 없다. 다만 폭력이 그리운 이들의 나쁜 피가 앙심 때문에 자제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하여 다시금 직면하게 되는 것은 나쁜 피가 다시는 흐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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