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화해시대 그리스도교 평화운동의 과제[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남북정상회담 일주일을 남겨두고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종전선언’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1953년 7·27 휴전협정은 양 진영의 ‘전투 행위 중단’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하여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남북대화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왔다. 물론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닌 남한정부가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참여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남한이 사실상의 당사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여 남한정부가 북한과 함께 종전선언을 한다는 것은 국제법적 효력을 갖지는 못하겠지만 매우 중요한 변수일 수 있다. 이것은 곧 열릴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갈망하던 한반도 평화체제는 머지않았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6자회담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협정과 단계적 비핵화를 선언한 바 있다. 한데 새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사실상 이 공동성명을 부정했고, 북한은 제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한반도는 다시 냉전체제로 회귀했고, 그것이 남한에선 강경군부의 재정치화와 냉전주의자들의 정국 주도권 강화로 이어져 결국 박근혜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대중을 동원하여 박정희의 분신으로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는 정치신학적 분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두 정권의 정치적 자원의 동원능력의 차이를 읽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박근혜나 그 측근들도 스스로를 오인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주의적 지도자(즉 메시아적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처럼 정권을 운영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박정희와는 달리, 결코 절대일인으로서 충성경쟁을 벌이는 관료집단을 거느릴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이해집단들이 냉전주의적 정치지형 위에서 극우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결속한 것이 박근혜 정권의 내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이 정권은 스스로 내파될 것이 예측되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 이후 다시 기회가 왔다. 문재인 정권은 남북대화 기획을 재가동했고 ‘코리아패싱’이라고 조롱거리가 되었던 상황을 빠른 속도로 반전시켰으며, 한반도는 또다시 평화체제 출범 직전 단계에 도달했다. 아마도 현 정부의 지난 1년간의 정치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라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첫 번째 디딤돌을 성공적으로 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부가 앞서서 성공적인 평화의 디딤돌을 놓는 동안 시민사회, 특히 그리스도교계는 무엇을 했을까. 지난 1980년대, 남북한이 서로 강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대화의 돌파구를 연 것은 개신교 소수파인 진보세력이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막강한 국제 네트워크와 공신력을 이용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물론 가톨릭도 이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고 유능한 청년들이 경험을 쌓고 있었다. 현 정부의 남북대화 전문가들 중 이때부터 이 일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이들이 적지 않다.  

2018년, 남북화해시대가 꿈처럼 다시 도래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의 평화통일운동은 그 밑거름이었다. 한데 지금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문의했던, 두 종단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속에는 종단 내에 냉전주의자들의 위세가 훨씬 강해서 시대를 역진하고 있다는 우려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국개신교는 극우주의자들의 아성이다. 여기서 한국개신교에 대해 좀 더 얘기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개신교 다수파는 극우주의 성향이 너무나 강했다. 그러나 이후 개신교 다수파인 극우주의적 세력은 정치전선에서 한발 물러섰고, 소수파인 진보세력의 반적대 평화통일운동이 빛을 발했다. 그런데 1990년 어간 한기총의 등장은 극우주의적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당시 전무후무한 거대 바이블벨트가 형성되었고, 개신교 극우세력이 그 축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그 우파적 대연합이 붕괴하고 있다. 하여 극우 냉전주의적인 개신교 세력은, 여전히 그 위세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심한 위기의식에 빠져 있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위기의식의 퇴행적 반응이 지금 개신교 극우파의 행보를 특징짓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공세적으로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화해시대 개신교와 가톨릭 평화운동의 과제는 ‘증오연대의 해체’와 화해, 공존, 치유를 향한 실천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02053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4. 20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책소개_
‘적폐의 성역’이라 불리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신앙과 양심의 목소리를 저버리지 않고 교회개혁에 끈질기게 목소리를 내온 신학자 김진호를 비롯해 한국 교회를 안팎에서 통찰해온 전문가들이 교회 재정과 종교인 과세, 목회자 세습, 여성혐오와 반동성애, 태극기 집회에서 발견되는 광신도 현상의 근원, 구호개발형 선교 등 핵심 쟁점을 파고들며 교회개혁이 과연 가능할지, 개신교 집단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영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타진한다. 나아가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사회적 약자를 공동체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지 사려 깊게 전망한다.
목차_

책을 펴내며 한국의 파워엘리트를 만드는 교회

1장 기독교인은 왜 보수적인가: 후퇴한 민주주의의 표상 대담 | 대담/강남순

2장 대형교회, 그들만의 세상: 대체 불가능한 인맥 네트워크 | 대담/박노자

3장 예수천국 불신지옥: 반지성주의의 근원을 묻다 | 대담/한홍구

4장 욕망의 하나님 나라: 교회 공동체의 신뢰 회복을 위하여 | 대담/김응교

에필로그 권력의 대물림, 대형교회 패러다임을 넘어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기본권 주체, 국민을 넘어 '사람'으로[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약소국이던 고대 유다국은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 60여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번영기를 맞았다. 한데 이 시기 소농은 몰락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분배를 강조하는, 소농친화적인 개혁세력이 결속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원을 독과점해온 귀족 친화적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했다.

2016~2017년 한국의 촛불대중처럼 소농세력의 집합행동을 기반으로 해서 요시야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부가 들어섰다. 우리는 요시야 왕실이 추진한 성문법전에 대해 알고 있다. 성서의 ‘신명기’가 바로 그것이다. 필경 이것은 이후 거의 1000년 동안 조금씩 첨삭된 결과물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서에는 요시야 개혁정부의 법안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신명기 법전의 중심 기조는 소농 중심의 사회개혁에 있었다. 요컨대 소농의 몰락을 억제하고, 이미 몰락한 이들을 복원시키며, 나아가 그들이 몰락 과정에서 빼앗겼던 토지까지 되돌리려는 급진적 기획까지 다루어져 있다. 그뿐이 아니다. 신명기 법전의 안식일 법은 ‘쉼을 의무화’하고 있다. 신이 노동 후에 그렇게 쉬었으니 7일에 한 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누구를 향해 의무라고 말하고 있을까. ‘신명기’ 5.14~15는 이렇게 명시한다. ‘너희도 쉬고, 자녀도 쉬며, 노예도 쉴 것이고 심지어 가축도 쉬게 하라. 나아가 떠돌이 식객도 쉬게 하라.’ 여기서 이 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진 자는 자산가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자산가들은 자신에게 매어 있는 ‘권리 없는 자들’을 적어도 7일에 한 번은 쉬게 해야 한다. 이때 이들 ‘권리 없는 자들’에겐 안식일은 의무가 아니라 최소한 누려야 하는 기본권인 셈이다. (그보다 앞선 법전으로 추정되는 ‘출애굽기’의 안식일 조항도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추정컨대 이 텍스트의 현존하지 않은 원본은 필경 이웃의 선진국인 이스라엘국의 문서일 것이지만 현존하는 ‘출애굽기’ 십계명의 작성자는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추정으로는 ‘신명기’ 법전이 만들어지기 전, 타국의 법전을 개작하여 사용한 것이 ‘출애굽기’ 법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 법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요시야 왕실 법전의 독특성을 의심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주목할 것은, 안식일 법에 의하면 기본권의 주체는 귀족과 부농, 그리고 소농뿐 아니라, 노예, 가축, 떠돌이 식객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떠돌이 식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그 집에 들어온 유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개 이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노예는 인신이 주인에게 구속된 절대적 예속상태에 있지만, 그나마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조상대대로 주인에게 속해 있어 죽을 만큼 굶주리지는 않을 수 있다. 반면 ‘떠돌이 식객’은 그런 상태의 예속성조차 불안정한 존재다. 한편 이 기본권에는 가축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권에 관한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면 매우 진보적인 가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해왔던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국민이 우선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 정말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국민의 염원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한데 이번 청와대가 발의한 헌법 개정안의 기본권조항을 보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헌법 개정안에 대해 3일에 걸쳐 해설한 첫째 날(3월20일) 조국 민정수석은 (떠돌이 식객 같은 신세의) 외국계 이주민들이 포함되는 기본권의 주체를 명시하기 위해 ‘국민’에서 ‘사람’으로 표기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이렇게 진취적인 법안을 담고 있음에도 거대 야당의 반대로 이 헌법 개정안은 무산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개헌이 현 정부 시기에 가능하든 않든 향후 기본권을 둘러싼 논의에서 그 주체가 ‘국민을 넘어 사람’이라는 논점이 끊임없이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권과 인권 논의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런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을 기대하며 성서의 안식일법의 논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2800년 전의 한 개혁정부는 기본권의 주체에 가축까지 포함시켰다는 것을. 또한, 비록 문 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혐오의 대상처럼 동성애자를 말했지만, 그이들도 당연히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23211401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3. 23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왜 개신교에선 '미투' 운동이 이어지지 않는가[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미투’ 행렬이 사회 각 영역에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대충 짐작했던 것들이지만 그 가해자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파렴치했다. 더욱 놀라운 건, 가해자인 저들 ‘소왕국의 군주’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그이가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였거나 무관심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이가 ‘일그러진 영웅’에 다름 아니었음이 폭로되었다. 그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던, 있는 줄 알았던 날개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군주가 되어보지 못한 남자들, 내가 바로 그런 자의 하나인데, 그런 자들의 자숙의 시간이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들을 맹렬히 살핀다. 몇 개의 부역자 혹은 방관자 리스트가 머릿속에 작성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다지 뼈저린 아픔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염된 손을 씻는, 일종의 자기방어의 기술에 가깝다. 그래도 ‘미투’를 외쳤던 이들의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절절한 용기 덕에 그나마 소박한 자숙이라도 했겠다. 그리고 사회는 그 소박한 자숙만큼의 각성할 기회를 얻는다.

   사람들과 미투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불쑥 말을 던졌다. “개신교에선 소식이 없나요?” 모두가 궁금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던 것은 각자 그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마음속으로는 누군가 말해주길 바랐겠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 한 사람이 눈치 없이 말을 던진 것이다.  

   실은 개신교에선 훨씬 먼저 ‘미투’ 운동이 있었다. 2010년 봄, 에 한 여성 신도가 삼일교회 담임목사인 전병욱에게 성추행당한 것을 제보하면서 시작된 사건은 개신교발 ‘미투’ 운동의 시작이었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회한 시인이나 연극연출가와는 달리, 전병욱은 비교적 신선한 이미지의 신세대 개신교 지도자로 각광받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이 사건의 충격파는 적어도 복음주의 계열의 개신교 안에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많은 제보자들이 ‘미투’ 대열에 참여했고 그들의 증언을 담은 책 <숨바꼭질>이 발간되었다. 또 수만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졌고, 그의 저작들에 대한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그의 성범죄에 대한 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고 그의 목사직 면직 청원운동이 벌어졌으며, 그가 속한 노회와 교단총회에 면직 안건이 상정되었다. 또한 여러 기관들에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목사의 성범죄에 대한 심포지엄들이 열렸고, 법원에 형사, 민사 책임을 묻는 소송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니 아직도 제대로 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점점 유야무야되고 있다. 그가 속한 노회도, 총회도 그의 성범죄를 확인하였음에도 당사자의 사과와 책임에 대한 이렇다 할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전병욱도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성범죄를 저지른 교회에서 권고사직 당한 지 1년 반 만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새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피해자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사력을 다해 보듬으며 용기를 내서 고발하였지만, 노회도, 교단도 그이들을 감싸주는 것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전병욱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는 피해를 증언한 그이들을 ‘이단’이라고 매도했다. ‘하나님의 종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 했던, 신도를 가장한 이단’이라고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목사 성범죄를 다루는 교회법을 어느 교단도 만들지 않았고, 피해자가 안심하고 상담하며 신고할 수 있는 기관도, 치유와 보상에 관한 교회법도 여전히 전무한 상태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피해자들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증언을 강요받았다. 2010년에 시작된 개신교발 ‘미투’ 운동은 이렇게 상처만 남기고 아무런 개혁도 일으키지 못한 채 지나가고 있다. 그러니 검찰, 극단, 문단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미투’ 행렬이 개신교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 이런 곳에서 용기 있는 증언은 상처만 남길 테니.  

    하지만 개신교 내부에서 피해자를 대신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또 논점을 제기하는 방식도 더 깊어졌고, 문제인식 또한 더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 교회권력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계획이 없는 것 같고, 특히 일부 극우파 개신교 지도자들은 더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다. 해서 교회권력을 향한 비판은 피해자가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없게 된 불임의 종교를 향해 보다 근원적으로 문제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232114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2. 23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개혁이 여전히 먼 이유 하나[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700만 촛불시민이 제기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사람이 먼저다”라고 답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 첫해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을 한갓 도구’로 취급해왔던 것들에 대한 청산이 진행되었다. 물론, 정권을 잃었음에도, 사회 구석구석 굉장히 많은 곳에서 적폐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쥐고 있기에 빠른 개혁의 속도에도 여전히 전체 사회는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갈 길이 먼 것은 적폐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들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개혁 슬로건,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슬로건에 열렬히 환호했던 우리의 심상(心想)에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갑질하는 특권층’ 대 ‘을로 전락해버린 시민/우리’라는 권력의 작동 방식일 것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슬로건이 지향하는 개혁의 중심적 함의겠다. 하여 갑-을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의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하나가 모호하게 취급되어 있다. ‘을’ 안에서 다시 ‘갑과 을’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자기 자신이 ‘을’이 되어버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가 또 다른 누구에게 ‘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를 말하는 데 급급하다 비시민으로 추락한 이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그리고 때로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이 ‘갑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이라는 문제 설정은 바로 여기에서 요청된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우리’와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이 망각되는 순간 일어난다. 가령, 1980~1990년대 대표적인 민중가요이고 내가 속한 교회의 찬송가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를 목청 높여 부를 때, 그 자리에 함께 노래했던 여성들을 ‘그날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누락시키고 있음을 남자인 내가 떠올리지 않는 그 순간, 인권유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타자란 이렇게 종종 우리의 심상에서 누락되곤 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릴 때 은연중에 사람에서 배제된 존재를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순간 개혁의 길은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종교성의 장소이자 글쟁이인 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주된 서식처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이 종교만큼 누군가를 타자로 만드는 일이 잦은 곳은 별로 없다. 그 안에는 적폐의 원흉이라고 할 만한, 증오의 전문가들도 숱하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은 특별한 증오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개신교 담론의 장치들에 세뇌되어 무심코 혐오주의적 언행들을 반복한다. 문제는, 증오의 전문가들은 개신교 대중을 그렇게 편견과 배제의 수행자로 만들어내는 주역이지만, 동시에 개신교 대중의 무성찰적 태도가 그런 증오의 사도들이 탄생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동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학교는 교수 한 사람에게 해임을 통보했고 학생 몇을 징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된 징계 사유는 ‘학교의 정체성에 위배된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성애 반대’라는 기조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학교는 동성애 혐오주의를 추구하니, 학교에 속한 이는 누구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해도 안 되고 그것에 대해 알려 해도 안 된다. 그것이 헌법 11조, ‘누구든 성별이나 종교, 신분 등이 이유가 되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위배되더라도, 이 학교의 구성원은 모두가 혐오를 정체성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이 경우 그런 혐의로 혐오주의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의 이런 반헌법적인 문제적 ‘정체성’, 그런 원리주의적 권력의 폭력을 지지한다. 물론,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혐오주의적 집단폭력을 초래할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혐오주의적 권력은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제도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한다. 하여 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의 부속품이 되게 하려 한다. 그사이 ‘사람이 먼저인’ 개혁은, 그 길은 그만큼 더 멀어져버리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192040015&code=990100#csidx0d097d5f31be59da5bbe287ddf67a0a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 19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교회의 권력세습과 한국 사회의 적폐[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명성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 사태를 주류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써 개신교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교회세습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로써 개신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더욱 냉담해졌다. 게다가 이것이 최근 부각된 특채비리 문제와 연결되어 이해됨으로써 ‘청산되어야 할 적폐세력’이라는 개신교회의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문제를 가장 열렬히 제기해온 개신교계 시민단체인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는 교회나 교회와 재산권이 연결된 연관단체를 아들이나 사위에게 세습하는 것을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다. 이런 관점은 명성교회 사태를 보는 개신교계 안팎의 시각이기도 하다.

   한데 명성교회 사태를 둘러싼 교회세습에 대한 논의들에는 서로 섞이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두 가지 시선이 뒤얽혀 있는 것 같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과 최근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현상으로 나타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영역인 국가, 기업 그리고 개신교회에는 박정희, 정주영, 조용기로 대표되는 카리스마적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장을 위한 총동원 체계를 주도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자원을 자녀에게 세습하려 하였는데, 민주화의 물결은 이러한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권력세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수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작동하는 영역에선 끊임없이 낡은 권위주의적 세습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민주화와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는데, 이 시대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도덕적 위상의 격하 현상을 동반했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무수한 삶의 현장에서는 시민사회적 제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장(fields)에서 사람들은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연줄맺기다. 한데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연줄은 직계로 축소된 혈통주의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로운 혈통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원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을 위한 경쟁에서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특권적 행위자들이 제도를 활용하는 능력을 더 많이 발휘했다. 그래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 현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삼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가 조사한 교회세습의 사례는 2017년 11월10일 현재 143건이다. 이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국 교회 숫자로 계산하면 0.2%에 불과하다. 물론 이 조사들에 포착되지 않는 세습교회나 교회 총수는 더 많겠지만 그 비율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교회세습은 담임목사의 권력이 압도적인 교회들에서나 가능했다. 요컨대 교회세습이라는 개념은 위의 두 가지 시선 중 첫 번째와 깊이 관련된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담임목사의 위상이 점점 격하되는 추세다. 해서 목사의 압도적인 권력을 전제로 하는 교회세습 현상은 향후 점점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너무나 퇴행적이고 추잡해 보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화의 문제를 포착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보다 ‘교회의 권력세습’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교회세습은 세습의 행위자를 담임목사에 국한시킨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압도적인 권력을 장악한 일부 목사들에 한정된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목사든 특권적 신자든, 소수의 권력집단이 담임목사의 청빙을 결정한다. 이때 교회 대중은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경우 신임 담임목사는 이들 특권집단에 의존하는 목회사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즉 교회는 특권집단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장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는 권력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기 전, 일반재정과 구별되는 800억원의 비자금을 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도 소수의 특권적 엘리트들은 사회 각 영역에서 작동되는 무수한, 불공정한 사적 네트워크를 교회를 매개로 하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목사는 그러한 부조리한 연줄주의의 주요 행위자들의 ‘영적 세탁’을 담당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력세습 문제는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적폐의 핵심에 맞닿아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42115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1. 24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개혁의 몸짓 '변방의 교회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2015년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2005년 인구센서스의 결과가 이번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무려 123만명 정도나 증가했고, 최대 종교였던 불교를 처음 앞질렀다. 

   문제는 사회적 신뢰도에선 개신교가 다른 두 종교보다 크게 밑돌았다는 데 있다. 불교와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각각 3배와 4배나 더 신뢰받는 종교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2005년과 2015년에 별반 차이가 없다. 한데 시민사회가 불신하는 종교임에도 2015년에는 신자수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 이상한 현상의 비밀이 개신교의 적극적인 ‘신자마케팅’에 있다고 보았다. 2000년대 이후 개신교는 일종의 대상에 대한 ‘맞춤형 프로그램들’을 적극 개발했다. 연령별, 직업별 프로그램들뿐 아니라 비혼자, 1인 가족, 입시재수생 등 집단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05년 무렵처럼 과거청산의 기조가 강한 시대에는 그다지 효력이 높지 않았던 반면,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의 위기에 휩싸여 있던 2015년 무렵에는 그것들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활용한 주체는 단연 강남, 강동, 분당 등 중·상위계층이 많은 지역에서 급부상한 신흥 대형교회들이다. 이들 교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반면 새로운 신자마케팅 방법들을 활용할 만한 자원이 부족했던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은 지속적인 역성장의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여 2000년대 이후 개신교회의 양극화는 한결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중·소형 교회뿐 아니라 대형교회에 대해서도 시민사회는 사라져야 할 적폐에 다름 아니라는 따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들에 따르면 이런 비판적 인식은 개신교의 자폐적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세금 내지 않는 목사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탈법과 편법을 마구 써대는 교회들, 편견과 배제를 부추기는 개신교도들의 언행들 등등이 그렇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삼는 무례한 종교라는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교회들의 교세가 빠르게 팽창했다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성공’일 뿐이다.

    한편 가장 위기를 적나라하게 체감하는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형교회’들이다. 그들 중 많은 교회들은 예배당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어느 곳이든 예배당다운 공간으로 치장하기도 쉽지 않다. 어떤 교회는 다른 이들과 공간을 ‘셰어’해야 하고, 또 다른 교회는 이중 기능의 공간(가령 교회이면서 어린이 공부방)으로 활용해야 한다. 목사가 스스로를 성스럽게 치장하기엔 교인들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 심지어 교회당 문을 열면 바로 시장통이고 위층엔 술집이 있고 옆집엔 식당이 있다. 종교적 성스러움을 과시할 만큼의 이웃과의 거리가 해체되어 버렸다.   

   이런 교회당과 목사의 현실에 부합하는 교회 전통이나 신학은 전무하다. ‘거리두기’를 기반으로 하면서 발전했던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해석들은 소형교회들의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있다. 하여 오늘 소형교회들은 ‘변방으로 떠밀린 유민들’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방의 교회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현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목사와 신자의 거리두기가 해체된 교회는 수평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예배 형식과 내용을 발전시켰다. 또 예배당을 종교적으로 변별된 공간이 아니라 삶과 뒤섞인 공간으로 채워갔다. 나아가 이웃들과 간격 없이 직면한 교회는 이웃과 ‘밥’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는 생활의 동료로서 살아가려 한다.

   그런 교회들이 자신의 명칭을 ‘작은 교회’라고 불렀다. 이들 ‘작은 교회’는 자폐적 성공을 추구하고 큰 교회가 되려 하기보다는 작음 자체를 향유하고 이웃과 공공적 가치와 삶을 나누는 운동을 벌인다. 그런 신앙운동을 각각의 지역에서 벌이는 교회들이 매년 모여 박람회를 열었다. 5회째 되는 올해엔 그런 경험들을 전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나누고자 대회 명칭을 ‘작은 교회 한마당’이라고 바꾸었다. 여기엔 신학대학이나 교단 기구들로부터 어떠한 서포팅을 받지 못한 ‘작은 교회’들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재야단체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올해엔 작은 교회를 주제로 하는 신학자들의 책이 발간되었다.

   성장이 아닌, 이웃과 가치 있는 삶을 나누고자 하는 작은 교회들의 소박한 움직임이 이렇게 변방의 교회들로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개혁의 진정한 몸짓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10272102035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10. 27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한백교회 탐방기[각주:1]



박제우*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교수(성공회대)와 고 박영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남편이신 고 안병무 교수(한신대)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신학을 목회철학의 기초로 삼고 1987년 10월에 설립한 나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한라산의 한과 백두산의 백)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난 5월 오늘교회에 탐방을 갔을 때 멤버 중의 한 분인 최규창 대표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교회인데, 마침 지난 주일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신 김진호 목사님께서 새길교회에서 설교하신 덕에 미리 탐방하고 싶다고 말씀 드릴 수 있었고, 오늘 11시에 시작하는 주일예배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한 50 m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엔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있고, 길 왼쪽 편엔 1층에 안병무홀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는 걸 지난 8월 교회개혁실천운동 회원과의 티타임 때 알았는데, 아무래도 주차가 용이하진 않을 것 같아서 경의선 전철로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왔다.


   전철 시간 계산을 잘 못해서 일찍 도착하질 못하고 정확히 11시에 예배처소인 안병무홀에 도착하니 예배 때 함께 부를 노래를 미리 불러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친절하게도 남자 성도 한 분이 바로 옆 자리로 오셔서 예배 순서 중에 어떻게 노래집과 주보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지 간단하고 빠르게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철 목사님이셨다는...)


    한백교회의 trade mark에 해당하는 한라산의 검은 돌(좌측)과 백두산의 검은돌(오른쪽) 그리고 한반도 어느 지점에서 주워 온 아주 흔한 흰색 조약돌 두개가 그 사이에 담겨 있는 접시가 예배 인도자 뒷쪽 벽에 놓은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언젠가 부터는 노란 리본도 얹혀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예배 인도를 맡은 자매님과 하늘뜻나누기(설교)를 해 주실 정나진 목사님, 그리고, 한백교회의 담임을 맡고 계신 이상철 목사님께서 자리 배치의 앞부분에 앉으셨다. 찬양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과, 삶의 고백을 해 주신 분들은 목사님 맞은 편에 앉으셨다. 한백교회의 예배는 주보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평균 출석 예배자가 50명 안팎인 정도의 규모이다 보니 새길교회 처럼 매주 주보, 광고 사항, 예배 실황 등이 정기적으로 잘 update되지는 않았다. 특히 요즈음엔 창립 30주년 기념 활동들을 준비하느라 많이 분주한 것 같다. 오늘의 주보는 아래의 사진과 같고, 홈페이지에 올려진 가장 최근 주보는 9월3일자 주보였다.




    예배 중의 노래는 대부분 "한백의 노래"라는 자체 제작한 노래집에 있는 것을 불렀는데, 한백의 노래는 그동안 7차례 개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교회 홈페이지 한백과 찬송에 게재되어 있다. 이제 청년들이 많아지고, 새롭게 증보하고 싶은 노래도 많이 있어서 조만간 몇 곡을 추가하는 증보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예배는 일전에 섬돌향린교회 예배 시에 보았던 울림주발(Singing Bowl)이 맑은 울림 소리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첫 순서인 묵상 후에 기도라는 노래를 기리는 노래로 함께 불렀다. 나는 (부끄럽지만) 처음 접한 노래라 함께 부르질 못하고 멜로디를 들어가며 가사를 읽었는데,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사랑과 신에게 간구함과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노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 보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1집에 실린 노래이다. 가사는 김소월 시인의 싯구이고, 곡은 노찾사에서 지은 것 같다. 이런 좋은 글과 멜로디의 노래가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불렀다고 찬양이 아니고, 예배 때 부르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깔뱅이 시편찬송만 불렀듯이 지금도 시편찬송만 예배 중에 부르는 교회가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이런 노래를 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교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각각의 교회는 각자의 신앙고백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리라.




    일반 교회에서는 교독문을 주로 읽는 순서에 한백교회에서는 마침 오늘이 추석 연휴에 있는 주일인 까닭에 (천상병 시인이 아마 1070년 가을에 지은 시인 것 같은데...) "소릉조 - 70년 추일에"라는 시를 교독하였다. 누가 이런 참 적절한 시를 찾아 내어서 선정하는 지 모르겠는데 역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백교회 다운 글 선택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1971) -  


   이어서 삶의 고백 시간에는 최근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고, 많은 생각을 하시고 계신 형제님께서 정말 진실한 문체와 내용으로 자신의 삶을 함께 나누어 주셨다.


   일반 교회에서 설교라고 하는 "하늘뜻나누기"는 이번 주 중에 3년 간의 박사 논문 작성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정나진 목사님이 고별 설교로 본인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준비하는 Autoethnogaphy(자아문화기술지)와 관련된 내용을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서 미리 모든 예배자에게 주보와 함께 배포된 설교문을 중심으로 최근 6개월간 탈북자 정착도우미로 섬겼던 사건과 창세기 31장 1~2절의 말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을 기반으로 한 민중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환대 태도, 그 과정에서 직접 체험하는 당사자들과 민중의 상호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셨다. 하늘뜻나누기 시간 후반부엔 정목사님의 발표에 대해 궁금한 점과 추가적인 토론을 하고 싶은 것들을 예배 참여자들이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건 정말 여느 교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예배 순서를 언제부터 해 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30년 된 교회에서 이런 순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설교 후에는 설교 중에 언급되었던 김민기 작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함께 불렀다. 유일하게 나도 익히 알고 불러 보았던 노래이다.


   이어서 물질을 드림(봉헌) 시간이 있었고, 예배 인도자인 자매가 드리는 기도를 했는데, 이 자매는 한백교회에서 오늘 처음 예배 섬김이로 봉사를 하게 된 것 같다.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자매님이 새롭게 안착한 한백교회의 교회 공동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함께 예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매님도 이들과 함께 한백교회를 통해서 믿음과 세상 속에서의 삶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눔과 섬김의 삶을 더 활짝 펴며 살기를 기도한다.

   예배는 12시 45분이 넘어서야 한백신앙고백으로 공동체의 다짐을 하고, 마침 묵상을 한 후 마치게 되었다. 마침 묵상 후에 친교 마당 시간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안내 말씀을 해 주시면서 나에게도 소개할 시간을 주셔서 짧게 내 소개와 교회 탐방을 하게 된 과정을 말씀 드렸고, 가능하다면 이후의 모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후엔 기존 보수교회에서 40년 넘게 섬기시다가 40대 후반(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대에...) 한백교회로 오신 후 지금은 한백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오늘 예배 전에 찬양 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점심 식사(애찬)를 함께 하였다. 4개 조로 나눠진 성도들의 모임이 매주 돌아가면서 (즉, 한 달에 한 번 씩) 애찬 준비와 배식과 설거지를 섬긴다고 한다. 애찬 전에 아래 동영상과 같이 아주 재밌는 애찬 노래를 배설된 음식을 보면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이번 주에 생일을 맞으신 여성도님을 축하하는 시간도 있었다.



   점심 식사 중엔 김진호 목사님께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주셔서 한백교회의 창립 때부터 자신이 담임목사로 섬기신 때부터 양미강 목사님과 지금의 이상철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백교회가 이사한 얘기, 계속 향린교회를 섬기신 박영숙 최고위원께서 정말 요리를 잘 하셨고 손이 크셔서 한백교회 식구들 전체에게 맛난 요리를 자주 해 주셨다는 얘기, 박성준 교수님과 안병무 교수님 모두 목사는 아니셨다는 얘기, 최근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 하시고 잘 챙겨 주셔서 한동대 출신 청년들과, 한신대 신학생들, 그리고 이런 저런 교육과 강연을 통해 한백교회를 접한 많은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교회가 많이 젊어 지고 있다는 얘기 등을 해 주셨다.


   애찬을 얼추 마친 후엔 (좀 재미있게 표현해서 1부 예배, 2부 점심 식사에 이어) 3부 순서로 수다를 떨기 위해(주보 광고에는 장년부의 대화모임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안병무 홀에서 약 200 m 정도 길 위로 올라가면 있는 "Caffe Cammello"로 시간 여유가 있는 교인들과 함께 갔다. 이 카페의 주인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백교회 분들을 좋게 보아 주셔서 매주 이렇게 장소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신다고 한다.


   이 카페의 안쪽 방에서는 10월28일(토) 저녁 6시에 공연할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 준비팀이 대본 강독을 하고 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2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청장년들 10여 명이 함께 앉아, 동성애, 외국인 노동자, 정나진 목사님의 설교 내용, 앞으로 펼쳐질 독일 생활, 한 자매님의 액티브한 유럽 1달 여행기, 한동대의 보수성과 개혁성 등 등 이야기 주제가 따로 정해진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참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상철 목사님으로부터는 주날개늘교회의 남오성 목사님을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서로 알고 지냈다는 반가운 얘기도 들었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헤어지기 전에 이상철 목사님과 찰칵!


오늘 애찬 시간부터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찰칵!



   한백교회는 10월에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다른 모든 교회 활동과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담임목사나 누구의 강력한 인도나 요청이 없는데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여러가지 활동들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에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역시 10월마지막 토요일(10/28) 저녁 6시에 안병무홀에서 공연되는 연극인 것 같다. 50명 안팎의 출석 교인들의 절반 정도가 참여한다는데, 정말 기대가 된다.


   오늘 이목사님께서 10월22일(주일)에 있을 창립30주년 기념 감사예배나 28일(토요일)에 있을 연극 공연에 또 와 보라고 초청해 주셨는데, 정말 여건이 되는대로 한백교회를 궁금해하는 지체들과 함께 다시 와 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날 함께 하고 싶은 분은 02-364-6355로 문의전화 해 보시면 된다. (연결이 안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010-7180-9492) 오후 5시가 넘에 카페에서 헤어진 나는 원래 계획대로 작년에 못다녀본 안산의 남쪽 지역(경기대학교 쪽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을 산책할 목적으로 램블러 앱을 작동시킨 후 경기대 쪽에서 올라갔다가 추계예술대 쪽으로 내려오는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한백교회를 검색해 보면, 기존 보수교단이나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예배에 대해 깎아 내리는 글을 쓴 걸 많이 발견하게 된다. 참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관과는 다르다 정로만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많은 악담과 저주의 말을 다분히 왜곡된 정보와 판단을 기반으로 해서 써 놓은 걸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참 부끄럽다. 부디,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한백교회 공동체를 존중하고, 폭 넓은 신앙의 모습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요수엘(박제우)의 블로그에 실린 글 '한백교회 탐방기'를 편집하여 옮겼습니다. http://yosuel.tistory.com/71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이상철
    2017.10.12 09:3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를 검색하면 온갖 음해성 기사들로 넘쳐난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퀘이커교도인 박성준이 세운 교회, 민중신학의 괴수 안병무가 실세인 교회, 온갖 운동판의 배후들이 득실거리는 교회,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섬기는 교회, 심지어 지난번 박근혜 탄핵 주문을 낭독한 이정미 재판관이 다니는 교회, 작년 박근혜 탄핵 정국당시 검찰 내부 게시판에 박근혜 구속을 주장했던 이00 검사가 다니는 교회, 비전향 장기수 빨갱이들을 지원하는 교회 등...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웃기기도하고 슬프기도 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과도 같은 루머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3년차를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위에서 언급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들의 실체를 접한 적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백을 향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음해성 보도들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은 나보다 익숙하고 대범하고 내공이 세서 그런지 “목사님, 차차 적응되실 거예요”라고 하면서 내 어깨를 다독인다. 한백교회에는 거의 매주 교인이 아닌 낯선 분들이 예배에 참여해 섞여 있다. 일부러, 우연히, 지나가다, 계획하여, 소문(?)을 들어, 교수님들이 한번 탐방하라고 하여, 오늘 갈 교회가 없어서...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기윤실에 계시는 박제우 선생님도 그 중 한분이셨다. 종종 한백교회가 어떤교회인지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는데 그런 분들에게 이 기사를 토스해주면 되겠다 싶다. 귀한 기고 감사합니다.
  2. 최재훈
    2017.10.25 18:5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목사님 말씀처럼 저도 소문(?)을 듣고 8월의 어느 비오는날 찾아간 낯선(?) 사람입니다..^^ 감사하게 잘 예배드렸습니다. 다시 한국들어갈때 또 찾아가겠습니다



개신교 총회정치의 민낯[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9월 하반기엔 개신교 각 교단의 정기총회가 열린다. 최상층부의 교회정치가 불꽃을 일으키는 계절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누가 총회 대의원으로 선정될지를 둘러싼 경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총회장 등 교단을 대표하는 임원과 각 기관장 등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거의 전쟁에 가깝다. 총회 기간이 임박해지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금품이 살포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다. 또 계파 간의 정쟁과 합종연횡이 펼쳐진다. 한편 교단 산하 지역별 교회회의체(노회·지방·교구 등)나 사안별 기구들(위원회)에서 안건을 총회에 상정시키고, 그것에 대한 심의와 결의를 둘러싼 안건정치가 치열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예·결산 정치다. 물론 여기서도 공방의 강도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번 각 교단의 총회들에선 교단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시민사회에 비칠까? 거의 20년 동안 사회적 신뢰도가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꼴찌를 면치 못해왔고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 영역에서 여론주도층의 불신이 점점 커져 급기야는 파국적 상황이 머지않았다는 재앙담론이 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심각한 불신의 벽을 넘을 작은 가능성이라도 제시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라고 하면서, ‘개혁’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있다시피 한 올해 개신교 교단들은 과연 시민사회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만한 쓸모 있는 개혁의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예상한 대로 이번 총회들에서 주목할 만한 논점은 동성애 문제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파의 하나인 예장통합은 가장 강력한 반동성애 조치들을 결의했다. 동성애자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는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그리고 대학 등 산하기관의 직원이 될 수 없으며, 신학대학 입학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예장합신도 그 못지않은 강경안을 결의했는데, 동성애자는 물론이고 동성애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옹호행위를 한 이들을 면직과 출교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서도 또다시 ‘동성애연구위원회’ 설립 안이 부결되었다. 연구해 보자는 안건조차 거절된 것이다. 이 주제를 둘러싼 공적 토론조차 일절 안된다는 얘기다. 그나마 이런 안건은 다른 교단들에선 상정조차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최근 대법원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정국에서 드러난 것처럼 동성애자 문제는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에는 더 이상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양상이다.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있는 보수대연합을 극우주의 기조로 재구축하는 핵심 어젠다로 부상했다. 온건보수세력의 보수대연합 어젠다가 거의 무력한 상황에서, 극우주의적 어젠다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물으면 동성애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인권적 가치에 따라 관용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될 때는 극우주의적 혐오주의에 견인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막강한 자원을 소유한 개신교 목사들의 주류세력들이 동성애 혐오동맹으로 광범위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극적 관용조차 말할 수 없고 그것을 둘러싼 토론조차 불허되는, 거의 맹신적 합의가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엮어내고 있고, 이것이 보수주의적 정치권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개신교계 일각에서 회자되는 음모론적 얘기가 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관련 인사들이 교단정치에 관여하여 요직을 차지했는데, 그들이 바로 최근 동성애 이단론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국정원의 행보들을 보면 이런 음모론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든다. 

    아무튼 국정원이 개입했든 아니든 개신교 주류권 목사들의 동성애혐오론, 토론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저 맹신적 확신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던 2014년에도, 동성애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이들과 아니라고 보는 이들의 비율은 47.1% 대 23.1%였다. 심지어는 개신교 신자의 경우도 39.9% 대 29.6%로 크게 차이가 났다. 그런데 주류 개신교 목사들은 압도적으로 동성애혐오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의 생각을 담지 못하는 소수 의견이 개신교를 과잉대표하면서 극우적 보수대연합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미움과 공포를 퍼뜨리는 목사들, 다수의 반대 생각조차 경청하지 않으려 하는 목사들, 공존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포기하고 적대를 퍼뜨리는 그들이 과잉대표하는 교단의 총회, 그것을 시민사회, 아니 합리적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총회정치로 대변되는 개신교의 재앙은 이미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2204901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9. 22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김영호
    2017.09.28 03:0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동성애에 대한 반대 논쟁이 지금, 이 상황(진보적-비수구적- 가치관이 활개하며, 그 대표격인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70%를 오가는 사점)에서 퍼져 나가는 이유를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의 설자리를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상호 결탁 하에 마련하기 때문이다"라고 읽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보수주의는 언감생심 기독교 근본주의자 축에도 낄 수 없는 21세기 한국 기독교 이단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으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그 끝이 다른 이단. 그 끝에는 자신의 천박한 정치적 입장이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제2의 종교개혁'에 대하여[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기독교인 대상의 강연을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개혁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이니 종교개혁이 적잖은 주목의 대상이 될 것임은 예상된 바다. 그래도 목사나 장로, 그밖에 열성신자들 정도나 관심을 갖지 않겠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기념일을 두 달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그 현상은 생각보다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학술단체들이 기획한 각종 포럼과 강연, 출판 등이 실행되고 있고, 교단별 혹은 연합행사로 준비된 기념행사, 교육프로그램, 연구모임, 기도회, 각종 경연대회 및 문화행사 등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기념연주회, 전시회, 기타 공연 등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금의 기념주화, 크루즈 여행을 포함한 종교개혁투어 상품을 비롯해서 에코백, 머그잔, 텀블러, 배지 등 다양한 기념상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교회별로도 전 교인 대상 프로그램과 소모임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데가 많다. 그리고 목사들은 종교개혁을 다루는 설교를 수없이 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영향력은 개신교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종교개혁을 되새기는 각종 기획들을 시작했고, 비개신교권 출판계와 여행업계도 상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또한 정치인들도 도처에서 비교적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그 평가는 유보하고, 현상만을 보면 개신교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양상이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고 기능에 있어서도 다양한 주체들이 영역들을 각기 점유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주체성 또한 상당히 높은 종교여서 도처에서 독자적이고 자발적으로 추진되는 다중적 기념 프로그램들은 굉장히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 효과인지, 웬만한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개혁에 대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적잖은 정보를 갖고 있고 또한 관심도 많은 편이다. 아마도 내게도 이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 것은 그런 현상의 일부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념행사를 주도하는 이들은 압도적으로 보수적 개신교 세력인데, 준비 양상이 보수주의 일색은 아닌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 성향이 강한 목사, 신학자, 평신도들도 종교개혁을 호교론적 기회로 삼기보다는 ‘오늘의 실패’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이 적잖다. ‘제2의 종교개혁’ 운운하는 주장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쇄신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현재 한국 개신교가 그 지도자들 다수의 관점인 호교론적 태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전히 사회 전반에 비해 개혁의 의지나 수위가 낮은 편이지만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제2의 종교개혁에 관해 의견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게 질문한 사람들의 요지이기도 하고, 사회 일반보다 결코 적지 않은 적폐를 가진 종교임에도 개혁의 의지나 수위에서 부족한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개혁적 담론들이 표방하고 있는 주장들 위에 의견 하나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500년 전의 종교개혁이 서양의 근대를 추동하는 계기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후 서양 사회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으니, 서양의 근대는 세계의 근대이기도 하다. 여기서 서양의 근대가 무엇인지를 내가 충분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국경의 탄생’이라는 특징으로 근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가령 전근대의 국가에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변경지대가 있었지만 근대국가에는 국경이 있다. 변경지대가 면(面)이라면 국경은 선(線)이다. 즉 면으로서의 변경이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경계가 명료하지 않은, 일종의 대화적 중간지대를 의미한다면, 선으로서의 국경은 그 불명료함을 최소화하는 단절의 경계를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인권이든 복지든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들이 국경 ‘안’에서 형성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도 국가종교로 발전했고,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도 국가와 종교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이 변화의 출발점에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런데 지구화 현상은 그런 국경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제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요소들이 사회 속에 가득하다. 그중엔 국경을 넘는 이주민, 양분화성 성(sex)의 국경을 넘는 다양한 성(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등도 있다. 인권의 수많은 요소들은 이렇게 국경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국경의 해체 시대를 준비하는 종교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최근 성소수자나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을 강조하는 신앙은 가장 대표적인 종교적 개혁 대상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8252025015 이 글은 경향신문 2017. 8. 25일자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97)
특집 (10)
시평 (102)
목회 마당 (65)
신학 정보 (146)
사진에세이 (45)
비평의 눈 (71)
페미&퀴어 (29)
시선의 힘 (151)
소식 (158)
영화 읽기 (39)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6)
새책 소개 (38)
Total : 444,601
Today : 72 Yesterday :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