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도날드 트럼프 (Donald Trump)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날도 이제 열흘 남짓 밖엔 남지 않았다. 미국 대선 기간 내내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의 기독교 사회 윤리가 생각이 났다. 비록 나의 사회 윤리 관점이 니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며 발전해 왔지만, 니버 만큼 미국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한 기독교 학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니버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져올 불안감을 분석해 보고, 희망의 신학을 생각해 보고 싶다.


    니버가 쓴 많은 저서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 (Irony of American History)” 이다.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니버는 비판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을 분석하며, 이 사상이 미국 정치와 경제,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리고 미국의 국제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니버가 이 책을 쓴 1952년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2017년의 미국은 별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트럼프는 니버가 생각하는 최악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니버는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가, 기독교 칼빈주의의 입각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광대한 영토와 자원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윤리 사상은 브루조아 계층과 결합한 기독교 사상이지, 미국의 부를 설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미국은 이미 자연적으로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이 자산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가 모든 계층에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았다. 니버는 부의 불평등 만큼이나, 미국 사회에 팽배한 부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 또는 부를 바라보는 순수함 (innocence)이 도덕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 사회는 정치적 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억압적인 정부나 거대 정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반면, 경제적 힘에 대해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한다.


   이미 60여년전에 니버는 돈이 가지는 힘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정치 뿐만 아니라, 돈 또한 위험한 권력이며, 돈을 가진 자본계급이 정치권력까지 가질 때, 권력의 집중화로 인해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고, 권력의 균형 있는 분배 또한 어려워 진다.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니버가 우려한 것처럼 부의 권력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무지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부유해 진다는 진부한 믿음이 도날드 트럼프처럼, 어찌 보면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지도 모른다.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의 국제 정치에 대한 정책이 별로 없다. 아마도 정책의 부재는 지식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 같다. 니버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강대국이 된 미국이 힘의 정치가 판을 치는 국제 사회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해야한다고 경고했다. 니버에 의하면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피해야할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고립주의와 제국주의가 그 것들이다. 고립주의는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며,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지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제국주의는 국제사회의 반발 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니버의 세계관은, 소련을 경계하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7년은 니버의 세계와는 달리, 냉전체제를 벗어났지만, 냉전체제 보다 더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얽히고설킨 국제 정치 판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위험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니버의 눈으로 본다면, 트럼프의 국제 정치는 보호주의를 표방한 미국 고립주의, 힘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억누르려는 제국주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상당한 위협을 줄 수 밖에 없다. 트럼프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주한 미군 방위 분담금을 한국 정부가 더 부담해야 하고, 북핵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 없이 하는 그의 주장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미국 대중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전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과 미군부대가 세계 평화를 위한 자국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틀어 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 한데도, 이란과 북한과 같은 핵을 계발하는 국가들과 IS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만 비춰지고 있다. 미군기지 연구의 전문가인 아메리칸 대학교 (America University)의 데이빗 바인 (David Vine) 교수에 의하면, 비록 미 국방성에서는 686개의 미군기지가 자국 밖에 분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식,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크고 작은 기지들과 군사작전들을 생각하면, 전 세계에 위치한 미군기지들은 1000여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만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기지는 83개이며, 주한 미군은 2009년 현재 2850명에 달한다 (Base Nation: How U.S. Military Bases Abroad Harm America and the World, 2015). 미군 기지들은 해외에 거주하는 5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의 삶과, 그 기지 주변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삶, 주둔국들의 정치, 경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친다. 바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골프장, 리조트 시설, 아파트 단지까지 갖춘, 외국에 위치한 하나의 미국 사회인, 미군 기지는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오히려 미국의 국내 정치화 국제 정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미국은 마초주의에 입각한 힘의 정치, 군사 정치로 국제 문제에 접근한 확률이 높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을 생각하면, 국제 질서에 위협이 되는 힘은 실제로 미국이다. 니버는 이미 1952년에 미국이 세계 정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오히려 미국의 사회 운동 세력을 규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도, 대선 후,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도 여러 연설을 통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힘은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현재 트럼프의 내각은 위험할 정도로 부유한 백인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양한 사회 운동 그룹들이 그 내각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 운동의 힘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반전 운동, 소수 인종 인권 운동 등을 통해 다져진 힘이다.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버 석좌 교수였던,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 래리 라스무센 (Larry Rasmussen)은 이 힘을 “집단적 영성 (collective spirituality)”이라고 불렀다 (Earth-Honoring Faith: Religious Ethics in a New Key, 2013).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갈라 놓고, 군사주의가 자본을 보호하려고 들고, 자연이 인간에 종속되는 시대에, 집단적 영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민중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변화의 힘을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이끈다. 한국에서 불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은, 나에게 라스무센이 이야기한 집단적 영성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나는 집단적 영성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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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에 대해

: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 ( Reinhold Niebuhr)는 중앙으로 집중된 힘은 쉽게 타락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 권력은 다양한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사회는 윤리적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정치적 이익 집단들이 사용하는 힘을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버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련의 중앙통제식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삼권분립의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며, 대통령이나 어느 이익집단이 정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미국의 실용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주들과 임금 협상, 자신들의 권리 등을 논의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에 반해, 니버에 의하면, 소련의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이 힘을 견제할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 남용이 쉽게 이루어진다. 중앙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반 민중들이다. 그러므로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익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강대국들 또는 거대 사회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보다는 민중들이 힘을 되찾아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신학자들과 제3세계 중심으로 국제 정치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탈식민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앙권력형 정치구조가 억압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반민주적이란 니버의 주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덧붙여,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약자의 폭력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니버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급진적인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20세기 중반의 기독교 윤리학자 니버를 떠올리게 되었다. 니버가 활동하던 1930~50년대는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세계 대공항과 두번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죄성을 뼈져리게 느끼고, 노동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당시의 노동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힘은,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 노동자들와 민중의 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가 주장하는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자본가들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노동자들와 일반 시민들에게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은 라인홀드 니버가 끔찍해한 자본가들을 위한 미국, 책임을 회피하는 미국 고립주의, 그리고 미국 패권주의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미국의 모습도 문제지만, 현재 한국에서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니버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이다. 니버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정치 권력이 한 개인과 정당에 집중되는 것은 견제하고 두려워 하면서, ‘자본’은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보았다. 자본은 정치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권력형 비리는 자신들이 가진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재하고, 그 부를 사용하여 다시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한국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시국 선언과 광화문 광장을 밝히는 시민들의 촛불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유화한 권력이 실제로는 한국 민중들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지금의 대중 시위는 니버가 이야기 한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민중들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였던 힘을 되찾아 와서,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혁명의 몸짓이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의 죄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니버는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 이익 추구는 결코 윤리적 중립 상태로 존재할 수 가 없다. 이익 추구가 극대화 되면, 인간은 쉽게 이기적이 되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은 도덕적 양심이 있어서, 자비심, 동정심, 이해심 등의 감정을 통해,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이나 국가는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타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 가능한 방법은 힘의 균형을 통하여, 한 집단 또는 한 국가가 이익 추구를 위하여 다른 집단이나 다른 국가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여성 신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우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특히 여성)은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관계성을 통해서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이기적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이란 존재 전체를 규정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 집단 또는 국가가 그 집단과 국가 전체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국가의 이익이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동일시 되는 것은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국가의 이익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생각들—비록 그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끊임 없는 자기 반성, 윤리적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간과될 수 없다. 어떻게 주가 조작과 유령회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이 이타심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록 그 사람이 일요일 마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으로 봉사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일생을 공주처럼 떠받들여 살면서, 남에게 섬김만을 받고 그 섬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봉사와 희생정신을 찾고,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아무리 국가 구조가 삼권 분립과 권력의 분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일반 국민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 한다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도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즉 국가나 특정 집단이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집단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타집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버는 종교가 정치를 해석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치적 혼란과 윤리적 혼란을 일으킨다고 했다. 정치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할 때,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미국 패권주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억압하거나, 정치인들을 무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치 세력과 떨어져서, 비판적 관찰자의 입장을 갖는 것이 세상의 고통을 훨씬 더 덜어주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설명하려는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민중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세계 민중들은 도덕적으로 흠없는 정치자들을 원하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를 현실적으로 기대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쓰지 않는 것은 도덕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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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평화와 안보를 위한 기독교인의 발걸음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미국의 여성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의 책 ‘진정한 평화, 진정한 안보Real Peace, Real Security: The Challenges of Global Citizenship (Fortress Press, 2008)’는 평화에 관한 다양한 이론과 실천을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웰치는 특정 국가에 속한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계 시민인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종교적, 윤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제 사회가 인류에 대한 범죄를 막거나 벌할 수 있을까 (1)”라는 신학적, 윤리적 화두로, 이 작지만 힘있는 책의 서문을 연다. 쉬운 화두가 아니다. 특히 이 화두는 단순히 지적인 활동으로써의 평화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사색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 생각의 변화, 그리고 영성의 변화와 함께, 타성에 젖어 생각해 왔던 종교의 가르침과 하느님에 대한 생각까지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란, 넓게 보면 인간에 대한 폭력이고, 구체적으로 보면, 전쟁과 인종 학살, 집단적 성폭행이나 군위안부 같은 전쟁 범죄를 가르킨다. 구체적인 전쟁 범죄들은 인간의 폭력성이 환경에 따라 집단화, 광폭화되어 나타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집단적 폭력성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들 또한 해결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또한 아니다. 웰치는 이 제3의 길이, “우리 인간이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비심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공감력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란 사실을 묵상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2).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 잔인함의 DNA를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선과 악을 구별하거나,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충분히 선을 선택하고, 선을 만들어갈 능력이 있는 존재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약자와 타인에 대한 폭력과 잔인함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착각에서 시작된다. 제3의 길의 여정은, 아군을 절대선으로 포장하고, 적군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를 진리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구조적인 폭력과 인류에 대한 폭력적 범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100).


    웰치는 국제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세가지 노력을 소개한다: 평화 유지 (peacekeeping), 평화 만들기 (peacemaking), 평화 건설 (peacebuilding)이다 (8). 평화 유지는 인종청소나 대규모 전쟁에 국제 사회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인류에 대한 폭력 범죄를 막는 것이다. 평화만들기는 전쟁이나 분쟁에 개입된 두 국가나 집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평화조약이나 협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여기서 UN이나, 미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중재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평화건설은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진행중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사회구조, 즉 무력분쟁, 경제적 착취, 그리고 정치적 소외계층 등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을 담고 있다.


   평화유지, 평화 만들기, 평화 건설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주로 UN 평화 유지군이 개입하는 “평화 유지 (peacekeeping)”는 강대국의 이익이나, 분쟁 주변국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분쟁 초기 개입이 늦어져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 전쟁이나, 르완다 학살, 수단 다푸르의 인종청소, 시리아 전쟁은 모두 초기 개입이 늦어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특히 현대전은 내전이나 시민전이 아니라, 다국의 이익이 개입된 국제전임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일어 나고 있는 지역의 국가 자주성을 이유로, 국제사회는 초기 개입을 꺼린다.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을 위한 윤리적 가이드 라인은 R2P로 알려진 “Responsibility to Protect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무)”이다. 대량 학살이나, 대규모의 전쟁이 임박했을 때,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최소화하거나 막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지역의 정부가 개입을 반대하거나, 인종 청소나 대량 살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때, 국제 사회의 개입은 어렵다. 또한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은 서구 국가들의 신식민주의와 윤리적 우월감의 남용이란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더불어 기아와 인종차별, 종교적 박해, 성차별 등등 서서히 진행되는 학살적 폭력을 막는 국제 사회의 물리적 개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평화 유지는 분쟁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물리적 분쟁을 일시적으로 막아서 분쟁 당사자들이 대화하고, 장기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40).

  
   21세기에 들어 평화 만들기는 단순히 국가간의 평화 협정 뿐만 아니라, Track 2 Diplomacy (민간 외교)로 알려진, 다양한 시민, 종교 단체 간의 평화 운동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시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류는, 문화적 이해와 종교의 다양성에 관한 이해, 서로의 고통에 대한 진실성 있는 공감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평화 협정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각 국의 정부 지도자들이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한 민간 외교는 여러면에서 정치적 구속력을 갖기가 힘들다. 비근한 예로, 한-일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10억엔 배상은, 두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여 정치적 구속력을 갖게 된 비윤리적 행위이다. 한-일 민간 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이 그동안 원폭피해와 군위안부 문제 등을 포함하여,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묻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온 역사를 철저히 무시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한-일 협정이 의식있는 많은 시민 단체를 결속시켜, 반대 운동을 전개시키게 만든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민간 외교를 무시하고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평화 건설은 장기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평화실천 운동이다. 사회 불평등과 불만 등,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미리 알아채고, 해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비폭력적 방법으로 분쟁에 대항하는 사회적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목과 분열 관계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과 국제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변화 시키려는 제도적 장치와 실천이 요구되며, 과거의 실패를 분석하여 새로운 전략과 실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평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평화 운동을 시작하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공동체 형성이 크게 도움이 된다. 평화란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가 실현된 사회, 분쟁이 폭력이 아닌 대화와 비폭력으로 해결되는 사회를 의미하며, 그러한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평화 운동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실천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여러가지 사회/평화 운동들을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종교들이 축적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지혜, 인내와 함께 적극적으로 용감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 그리고 구조적 폭력과 전쟁에 고통받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덕목이 평화를 위한 제3의 길을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이 제3의 길은 또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의 (self-righteousness)”에서 해방되고, 적군이나 힘을 가진 억압자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회적 갈등과 반목, 국제 사회의 폭력 행위와 전쟁 등을 보며, 웰치의 책이 갖는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사드 (THAAD)배치에 비폭력적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성주 군민들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반대 운동 때에도,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 때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때에도, 세월호 진실 규명 운동 때에도 던졌던 질문이다. 우선 웰치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만을 놓고 보았을 때, 한국 정부와 미국의 결정은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 세계 평화에 위해를 가할 비윤리적인 결정이다. 왜냐하면 북한을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오만함,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과 사회 불만을 어설프게 숨김과 동시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세계 패권주의와 우월감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는 국제 사회에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 러시아의 불만을 고조시켜,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만들려는 세계 시민들의 노력을 억압하고 있다. 북한이 일으키는 공포감이 적극적인 비폭력 운동을 통해,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희망보다 더 큰 것일까? 더구나, 사드 배치를 통해 고통받을 사람들과 계속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세계 민중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려는 평화의 정치보다, 군사 무기를 통해 이루려는 평화가 더 값진 것일까?


    사드는 미국의 록히드 마틴 (Lockheed Martin)사가 개발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다. USA Today에 의하면 록히드 마틴은 2011년에만 약46.5 억 달러 어치의 무기를 전세계에 팔아치운,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고 있는 무기회사다.[각주:1] 모든 전쟁은 자본가들의 이익이 걸린 사업이다. 미국의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 (Smedley Butler)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미 1932년에 “전쟁은 사기다 (War Is a Racket)라는 책을 통해, 미국이 관여한 모든 전쟁이 소수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사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 사기는 소위 말하는 소수의 내부자들이 공모하고, 각본을 짜서,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상영하는 사기극이라, 외부자들은 그 전말을 알기가 힘들다. 사드는 누구를 위한 평화이며, 누구를 위한 안보일까? 기독교에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은, 소수의 내부자들이 주장하는 평화와 안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외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 운동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의에서 벗어나고, 사드 배치와 같은 결정을 한 정치 지도자들까지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듬으려는 노력까지도 포함한다. 웰치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평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으로써,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서울 시청 광장에서 만난 많은 일반 시민들과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 군민들은, 정부의 결정을 규탄하지만, 그 결정을 한 정치가들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치인들이나 경찰, 주요 언론사들은 이들 시민 운동가들을 ‘빨갱이들’, ‘전문 시위꾼들’, ‘북한 동조세력들’로 부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집시법 위반으로 벌금을 물리는 것을 본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광야에서 ‘회개하라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자기비판과 성찰을 하라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해도, 예수를 죽여도, 광야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지난 2000년 동안 끊어지지 않은 것이, 평화와 정의를 향한 기독교의 지혜이고, 힘이고, 열망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satoday.com/story/money/business/2013/03/10/10-companies-profiting-most-from-war/19709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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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남성성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일주일 동안 미국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게이 나이트 클럽, 펄스(Pulse)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현재까지 49명이 죽었고, 53명의 부상자들이 발생한 이 사건은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보여 주고 있다. 총기 규제, 동성애자들을 상대로한 증오범죄, 이슬람혐오주의, 테러와의 전쟁, 인종 차별주의, 남성 폭력 문제, 문화 충돌과 이민법 개혁과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등.이 대량 살상 사건으로 인해, 세계는 올해 11월에 치뤄질 미국 대선, 이슬람 국가 (ISIS)와 전쟁을 치루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이익으로 인해 후폭풍을 맞고 있다. 


          다수의 시민들과 여성, 어린이, 소수 인종,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폭력행위는 절대로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펄스 나이트 클럽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도, 단순히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이슬람 과격주의에 영향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이민 2세인 오마르 마틴 (Omar Mateen)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로만 보기에는, 그 밑에 깔린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적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마틴이 살아온 삶 자체가 폭력으로 물들어 있다. 마틴의 삶을 파헤친 다양한 기사들을 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자잘한 싸움과 폭력행위에 휘말려, 정학을 당하거나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폭력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 여성들을 무시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이런 그가 경호원이란 직업을 택하고, 경호 훈련과 총기 사용 훈련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경찰이나 군인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랬다면, 그는 아마도 합법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오마르 마틴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한 숨어있던 동성애자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도 마틴의 성정체성을 의심했지만,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마틴 스스로도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설이다. 오마르 마틴이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명예를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프가니스탄 가족 공동체에서 커밍 아웃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강경하게 그의 게이설을 부인하고, 그가 동성애자들을 증오했다고 확언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문화에서 보면 당연하다.  


         아프가니스탄 이민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오마르 마틴의 유년 시절도 평탄하지 않았을 것 같다. 폭력적인 성향이 어렸을 때부터 나타났고, 그의 학교 교사들이 끊임없이 마틴의 행동 장애를 가족에게 알렸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그러한 보고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폭력성을 보이는 아프가니스탄계의 문제아였던 마틴의 학교생활과 교우관계가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가 왜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는지, 왜 행동장애에 대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오마르 마틴의 복잡한 인생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대량 학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펄스 나이트 클럽 총기 난사사건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미국에서의 총기 규제가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이 총기 사건과 관련하여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폭력과 총기류와 같은 무기에 기대어 생명력을 유지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hegemonic masculinity)이다.  


          미국에서는 총기류의 소지를 규제하려고 할 때마다, 전미 총기 협회 (National Rifle Associations)와 같은 단체가 전방위로 규제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펴왔다. 그들의 로비는 1977년 카터 대통령이 총기규제를 강화하려고 할 때부터, 더 조직화되었고, 강해졌다. 현재 미국에는 인구 100명당 88정의 총이 존재하지만, 총을 한정 또는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22%에 불과하다 (자료ProCon.org http://gun-control.procon.org/view.resource.php?resourceID=006436).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총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총이 나오기 전엔 칼과 창이 남성의 상징물이였다).남성성을 연구하는 호주의 학자, 코넬 (R. W. Connell)은 총기 소유를 방어하는 입장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Connell, Masculinities, 2005). 여기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진정한 남성은 ‘이러저러한 성향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사회 관습적 규범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부합되지 않는 몸과 행동, 생각 등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탄압의 대상이 된다. 서구화된 대부분의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가부장적인 남성, 강인함, 지도력, 카리스마, 폭력성 또는 가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용맹성, 경쟁심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총기류의 정치학에서는 남성성이나 젠더가 보이지 않는다. 주로 토론되는 주제들은 국가 안보, 군수 기업의 이익, 가족의 가치, 종교적 신념, 개인의 자유, 과학 기술의 진보와 같은 것들이다.  


          코넬은 가장 합법적으로 무기와 폭력을 사용하는 군조직이야 말로 유럽과 미국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한다 (Connell, 2005). 군대 조직과 더불어 미디어에서 생산해 내는 전쟁 드라마, 군 영웅 이야기등을 통해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확대 재생산되고, 진정한 남성에 대한 기준이 세워진다. 남성 영웅은 군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게임에서, 만화에서 다양한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 영웅들 사이에는 묘하게 닮은 성향들이 존재한다. 바로 영웅이든 악당이든 폭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이들의 남성성은 주로 폭력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남자라면 당연히 폭력적이라고 믿는 듯하다. 좋은 의도에서건 아니건, 폭력과 연계된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위태롭다. 여성들의 생존은 남성과 같은 수준의 폭력을 보이거나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던지, 아니면 남성의 보호를 받던지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선택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가부장적인 남성상위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여성은 폭력의 주체가 되기도 힘들고, 생존을 위한 선택의 주체가 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즉 권위있는 남성들이 보호받을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구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것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연구가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구조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헤게모니는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유지되기 마련이다. 또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직접적인 이슈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생각을 맞추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소수의 남성 엘리트 그룹의 이익만을 지켜줄 뿐이다.  


          코넬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 경제, 종교, 이데올로기, 성담론의 주도성을 유지하려는 (소수의) 이성애자남성들은 활발히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방어하려고 한다 (Connell, 2005). 비록 그들이 드러내 놓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방어하거나, 이것에 대해 의식화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계 정치가 경쟁적이고, 주도권 쟁취에 바탕을 둔 남성성에 의해 지배되는 한, 폭력과 전쟁, 자연 파괴와 같은 파괴적인 지속될 것이라고 코넬은 경고한다 (2005).  


          나는 코넬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작게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 넓게는 국가 간의 관계까지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이 영향력은 여성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남성들에게 까지도 악역항을 끼친다. 그렇기에 벨 훅스 (bell hooks)와 같은 흑인 여성 운동가는 남성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남성성의 변화가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흑인 여성 신학자 숀 코퍼랜드 (Shawn Copeland)는 더 나아가, 예수의 삶이 대안적인 남성성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자비심, 공동체 중심적인 삶, 여성들과 남성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받아들인 삶 등이 과연 남성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예를 제시해 줄 수 있다 (Copeland, Embodied Freedom, 2008).

  

          성소수자가 아닌 이상, 펄스 나이트 클럽 총기 난사사건을 퀴어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 공포, 절망 등등.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총기 규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동성애 혐오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상, 9/11 테러와 펄스 학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사회로 부터 느끼는 증오, 압박감과 공포를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들의 종교가 폭력의 종교로 규정되고, 이슬람교도 모두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겨지는 한,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은 더욱더 극복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또 다른 폭력과 희생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공포를 남성들이 이해하기 어렵듯, 여성인 나또한 한국 사회에서 미국에서 남성으로, 특히 한국인 남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제 17개월된 내 아들이 어떠한 남성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다. 나는 내 아이가 타인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폭력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이 남자임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모든 인간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은 지금보다 더 강한 총기 규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강력한 총기 규제법 못지 않게, 사회의 폭력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폭력성을 극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대안적인 남성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실천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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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부활절이 지나고,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할렐루야”와 “평화”이다. 예배형식과 교회 절기, 그리고 거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공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할렐루야”를 입밖으로 내지 않는다. 40일 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할렐루야는 부활절 새벽 (또는 부활절 직전 토요일 일몰 후)에, 말 그대로 부활한다. 부활절부터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전까지, 교회에서는 일곱번의 주일을 부활절로 기념한다. 이 기간 동안 읽혀지는 각기 다른 복음서 대부분은 부활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예수의 죽음 후에, 일상이 파괴되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현실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평화가 너희들과 함께 하기를” 하고 기원하는 예수의 인사는 무언가 황당한 것 같으면서도, 시기적절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은 평화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되고, 그 소중함을 갈망하기 보다는, 전쟁과 폭력 등 평화가 없는 상황과 반평화를 경험하면서, 평화를 상상하게 되고 지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진 베스케 엘쉬타인 (Jean Bethke Elshtain)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신학적 고전이 된 “여성과 전쟁 (Women and War)”이란 책에서, 평화는 전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정의되고, 상상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평화 운동은 반전운동으로, 마치 전쟁이 존재하지 않으면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lshtain, 1995).  


          반면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폭력을 사용한 가해자가 무슬림이거나 이슬람과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논리가 달라진다. 즉 이들의 정신 상태나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분노가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이란 제도화된 종교가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문제이다. 이슬람이 폭력을 조장하는 비윤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이 종교에 심취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들이거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다. 더 나아가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보다 높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는 반이슬람 정서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면,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종교가 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비종교인들도 충분히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테러리스트는 종교 논리 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고, 인간들의 본질적인 폭력성이 해결되지 않는한, 테러는 항상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극단주의적 이슬람 교도들이 (또는 극단적인 기독교, 유대교, 불교 등등의 신봉자들)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기 전에, 이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또는 정신 상태,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등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테러리스트들을 행동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쟁의 역사는 항상 거대 담론으로 기록되어 왔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지만, 왜 일어났는지, 누가 전쟁을 결정했는지, 병사들은 어떻게 조달되었는지, 병사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전쟁을 견디었는지, 일반 사람들은 전쟁을 어떻게 버텼는지, 전쟁이 끝난 후에 병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평화 담론도 전쟁 담론과 마찬가지로 거대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화 담론이 전쟁이나 전쟁 가능성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암묵적 전재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군사전략, 군대 재배치, 전쟁 무기와 국경 안보 등등이 평화와 안전을 위한다는 정치 담론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시민 평화 운동권에서 들리는 언어들도 대부분,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자,” “군비 감축하자,” “군대 축소하자,” “군사시설을 줄여라,” “주한미군 감축” 등등 군사화되어 있다. 평화에 대한 논의, 언어가 군사화가 되어 버리면, 평화를 위한 정치적 결정들이 일반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여기서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평화를 위한다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즉 전쟁의 피해자들도, 평화의 피해자들도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 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결정할 때,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누가 이익을 얻게되고, (또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전쟁이 사회 구성원들 (또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 정책과 평화 담론 또한 비슷한 방식의 분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화 유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군사정책에는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전쟁 담론에서 자유로운 평화는 어떠한 평화일까’이다. 어떻게 전쟁과 군사화에서 자유로운 평화 담론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부활한 예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란 단순히 개인의 믿음과 영성 차원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관상 기도와 묵상, 통성 기도 등등의 영성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과 기쁨, 평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종교체험은 중요하다. 그러나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가 기독교 신비주의의 연구를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 영성가들은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제대로 보고 맞서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화를 화로 다스리고 악을 악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다스려 평화로운 인간 관계, 사회 관계를 체화하려고 하였다 (Silent Cry, 2003). 즉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셀 수 없는 수많은 관계 속에 사는 존재이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관계의 회복이야 말로 우리의 영성이 향하는 방향인 것이다. 소중히 여기는 관계가 깨어질 때 겪는 상실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감정적 고통이 크다. ‘나’의 고통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보이지 않는 세상의 관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영성 훈련을 통해 연마된다. 그런데, 이 관계성과 영적 훈련으로써의 자기 성찰은 ‘일상’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몇 해전 경기도 평택의 햇살사회복지원을 방문해서, 우순덕 원장님께 평화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햇살사회복지원은 평택 기지촌에서 양공주라 손가락질 받으며 일생을 보내신 할머니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쉼터도 제공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도 제공하고, 힐링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작은 공동체이다. 원장님이 말씀하신 평화에는 미사일도, 군대도, 한미 관계도, 국경 봉쇄도 없었다. “할머니 한분 한분이 진정한 인간으로써 존중받는 것, 따뜻한 밥 한끼를 매일 드실 수 있는 것, 죽을 때 혼자 죽지 않는 것이 평화입니다.” 십년도 더 지난 예전에 뉴욕 무지개 집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지개 집은 국제결혼 여성들의 쉼터로 출발한 공동체인데,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미군과 결혼하여 한국을 떠난 기지촌 출신 여성들이다.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언어 장벽, 가정 폭력, 미군 남편의 외상 후 스테레스성 장애 등으로 인하여, 많은 여성들이 미군 출신 남편과 이혼하거나 버림을 받고, 다시 성매매를 하거나 걔 중에는 홈리스로 전락하기도 한다. 무지개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은, 마약에 중독되어 살다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무지개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답게 사는 법은 “남들처럼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쉬고,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인데, 폭력과 전쟁으로 파괴된 일상을 되돌리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같다. 폭력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겪은 사람들, 폭력으로 가족을 잃어 버린 사람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 번 무너져버린 일상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처럼 멀리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4월 16일은 세월호가 침몰하여 304명이 수장된지 2년된 날이다. 작년 세월호 1주기때,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지인이 한국에서 보내주었다. 책에 실린 세월호 유족들의 글은 소중한 가족 구성원들을, 자본주의 탐욕과 버무려진 재앙으로 잃고 난 후에, 무너진 일상, 바뀌어진 일상 속에서 겪는 고통의 기록이였다. 이 고통 속에서 유족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교회의 역할을 묻고, 사회 지도층의 책임감에 의구심을 던지며, 무엇보다 명백한 희생자들이 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회 부조리를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호는 유족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일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세월호 전과는 달라졌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 이전의 세월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이전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세월호 사건은 이미 예견된 인재였는지도 모른다. 재작년 마지막으로 방문한 강정 평화 운동지에서, 평화 운동가들이 이런 의견을 나누어 주었다. 미군 기지 건설을 위해 평택 대추리를 밀어버리고 원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기지 건설과 원주민 이주 반대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한 대추리 사태 (2006), 용산 재개발 과정 중 무리한 강경 진압으로 철거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을 화재로 죽게 만든 용산 화재 사태 (2009), 강압적인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은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와 결탁한 군사주의, 생명보다 개발 우위의 논리, 위로 부터의 의사결정 방식, 이념으로 분리된 사회 구성원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세가지 사건을 깊이 분석해 보면 “주한 미군”이란 연결 고리도 찾을 수 있다. 이 사건들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일상이 무너진 시민들, 일상이 바뀐 시민들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과 이들 사건들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방산 비리로 인하여 싸구려 무기를 지급받고, 군생활 중 사고로 죽은 젊은 군인들과, 세월호 사건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상관관계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비리 뿐만 아니라, 군사문화에 기반한 사회 전반에 퍼진 위계구조, 계층과 성별 사이의 갈등 등등. 모든 억압적인 사회 문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강정마을 평화 운동이 세월호 기억과 진실 운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세월호 운동이 다른 종류의 평화 운동과 다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들은 오리무중인 한국 사회에서 평화란 무엇이며, 예수의 평화는 어떻게 상상되어질 수 있을까? 우선 나는 평화란 “일상”을 지키는 행위라고 본다. 나와 내 가족만의 일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난 “일상”을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한 폭력과 전쟁, 억압으로 인하여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이 다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힘들어도 폭력의 역사, 거대 담론이 아닌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3월 시카고에서 Pacific Asian North Asian American Women in Theology and Ministry모임이 있었다. 이번 모임은 특별히 시카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시안 사회 운동가들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시카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온 통계학자 김지인님 이였다. “만약 세월호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사회 운동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월호 모임에 동참한 후부터는 시카고 지역의 다른 사회 운동에도 연대 차원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지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월호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더이상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살기 위해서, 나의 일상을 회복하고, 세월호 유족들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유족들이 원하는 것을 지지하고, 세월호 사건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이들의 일상도 변하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 중에 존재하는 평화의 씨앗을 볼 때, 우리는 예수가 이야기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서로의 일상을 지켜주고, 이 일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이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에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기억해 주는 노력일 것이다. 마포구 정신대 대책 협의회 아래층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박물관, 강정마을의 평화 도서관, 세월호 기억의 숲, 제주 4.3. 평화 박물관 등등. 한국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노력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의식적으로 찾고, 기억하고, 일상화 시키자. 우리도 다른 일상을 살 수 있다. 노란색의 일상,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노란색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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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 국가안보와 두려움의 상관관계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영어 단어 security는 한국어로 안전, 보안, 안보 등으로 문맥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security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개성 공단을 폐쇄하고,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사드 (THAAD)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하는 한국 정부. 이 틈을 타서, 국제적 문제아인 북한의 핵 위협에서, 자국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하려는 일본. 한반도에서 커지는 미국의 군세력을 자국 안보의 위협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침묵하는 북한.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계 평화는 고사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와 협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안보의 정의도 군사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한 영토 수호와 자국 국민들 보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박근혜, 김정은, 시진핑, 오바마가 가진 세계 안보와 평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만약 21세기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이 곽퓌란 (Kwok Pui-Lan)과 요그 리거 (Joerg Rieger)가 “종교를 정복하라 (Occupy Religion)”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미국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한 대한민국 국가 안보라는 시스템에 어떤 자극을 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기독교 사상가인 시모니 웨일 (Simone Weil)은 securit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전 (security)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전은 영혼이, 짧은 순간이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공포나 테러의 무게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비록 영속적인 공포는 잠재적 상태만으로 존재해서, 그것의 고통스러운 효과는 거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병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준마비 상태이다 (Simone Weil, The Needs for Roots, 1952).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웨일은 반전 운동가는 아니였지만,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열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식민지 민족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포와 테러에서 자유로운 안보/안전은 군사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세속적 왕국이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지는 못 하더라도, 지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영토와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세속 왕국의 지배자가 해야할 의무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예방적 전쟁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상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도 동의하듯, 어거스틴에게 있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만 한다.  


         전쟁은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포심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1.4 후퇴 때,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한 후에, 공산당에 의해 아시아가 무너지면 미국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는 곧 미국이 하느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산당을 악마와 동일시 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또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었다. 인류의 반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이라크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사담 후세인도 사라지고, 대량 살상 무기도 이라크에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이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사실 전쟁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자체가 평화 운동이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략과 정치, 경제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 무역 불균형, 국가 간 경제 제재 등 갈등의 근원을 파악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근원을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갈등 상황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성 평화 운동을 연구한 영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코번은 반전운동은 공포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그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전쟁 그 자체가 일반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해가 너무 크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미군과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지역들의 성폭력과 조직화된 기지촌 성매매, 전쟁 중의 집단 강간,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폭력, 여성 군인들의 업적 비하 외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등 여성들이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전쟁의 폐해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적국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주는 비열한 전술이다. 여성이 겪은 전쟁 폭력은 전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는 경우가 많고, 알려진다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회 화합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예가 거의 없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본과 협상한 대한민국 정부, 내전 기간 동안 집단 강간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의 기념비 건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 지역 주민들과 정부. 이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그 영혼 깊숙히 공포와 테러를 심어주어서, 준마비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예이다.  


          코번이 방문하고 인터뷰한 여성 반전 단체들이 전쟁의 공포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단체들은 전쟁과 군사화가 약속하는 평화가 인간 사회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거짓이며, 알 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란 공포심에서 벗어나, 함께 반군사화 운동, 군비감축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말 그대로 국제 정치가 남성중심의 힘과 공포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지속 가능한 안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2008. 한국어로는 평화학자 김엘리가 번역한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다양한 단체와 학자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미군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 연구들 중 하나가 과연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 행동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국제 안보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dnt)가 이야기한 것 처럼 폭력은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힘을 잃기 시작할 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집단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계속 복종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1970). 아렌트의 논리대로 라면, 더이상 힘을 가진 집단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미국은 제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써의 힘을 더 빠르게 잃기 시작한다. 사회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또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들면서,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제개한 군사행동은 군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Real Peace, Real Security, 2008). 미국은 군사행동을 통해 오히려 반미정서를 전세계에 퍼뜨렸으며, 이슬람 국가 (IS)같은 급진적 테러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괌, 사이판 등의 태평양 섬들과 호주를 잇는 거대지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군사지역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이 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명문을 찾고 있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하며,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사드시스템 배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는 군사 폭력을 통해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결국 일반 한국시민들이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한국의 건설업체들에게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안보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세상에 무관심해져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불합리한 제도와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Silent Cry, 200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국 정부와 미국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두려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의 공포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북한의 핵이 두렵다. 그러나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핵, 원자력 발전소 뒤에 숨어있는 핵,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는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핵이 더 무섭다. 그리고 한국의 안보는 이미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정신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한일협상이 이루어졌을때, 이제 할머니가 된 생존자들에게 죽기 전에 일본을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애국어머니연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사용자 중심의 노동법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강요할 때, 등등의 순간에 끝났다. 국가안보는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치적, 종교적, 성적위협, 재난과 재해, 경제적 억압과 착취, 성차별 등으로 부터 지키는 인간중심의 안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지킬 능력도, 지킬 마음도 없을 때, 또는 지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더이상 국가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국가 안보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도 상상하기 어렵다. 심판의 칼을 든 하느님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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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과 반이슬람주의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11월 13일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공격. 그리고 12월 2일 열네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나디노에서 있었던 총격 사건.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전세계적인 인도주의 목소리가 이 두 사건으로 묻혀 버린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2001년 9월 11일,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공격한 테러 사건 이후로, 지난 십여년 동안 세계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행한 테러 공격이다. 파리와 샌 버나디노 사건이 서구 미디어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은연 중에 반이슬람 메세지를 퍼트리는 이유는, 이 사건들이 소위 말하는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반이슬람 정서가 뿌리 깊은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종교적 관용이나 다양성에 대한 관용 정신은, 이슬람이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테러리스트들, 총기 난사범들로 인해 사라졌다. 그나마 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들 조차도, “모든 무슬림들이 테러리스트들은 아니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무슬림이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상당한 헛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샌 버나디노 총기 난사 사건을 대하는 FBI의 태도에서 보듯이, 총기 난사 사건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가 일어났을 때, 가해자가 백인이거나, 비무슬림인 경우에는 주로 가해자의 정신 상태에 대해 먼저 감정을 한다. 즉 사회 부적응자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외톨이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 하고, 불특정 다수들, 주로 약자들을 대상으로 분풀이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썩은 사과 이론’이다. 사회는 별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몇몇의 썩은 사과들이 사회 질서를 위협하므로, 이 썩은 사과들을 벌하고 골라냄으로써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반면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폭력을 사용한 가해자가 무슬림이거나 이슬람과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논리가 달라진다. 즉 이들의 정신 상태나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분노가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이란 제도화된 종교가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문제이다. 이슬람이 폭력을 조장하는 비윤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이 종교에 심취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들이거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다. 더 나아가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보다 높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는 반이슬람 정서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면,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종교가 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비종교인들도 충분히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테러리스트는 종교 논리 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고, 인간들의 본질적인 폭력성이 해결되지 않는한, 테러는 항상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극단주의적 이슬람 교도들이 (또는 극단적인 기독교, 유대교, 불교 등등의 신봉자들)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기 전에, 이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또는 정신 상태,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등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테러리스트들을 행동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인권 운동가이자, 팔레스타인 해방 신학센터인 사빌 (Sabeel)을 만든,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 (Naim Ateek)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자살 폭탄 테러를 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아랍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덜 폭력적이지도, 더 폭력적이지도 않다”고 이야기 한다 (A Palestinian Christian Cry for Reconciliation, 2008). 그렇다고 아틱 신부가 테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테러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더 강화하고, 더 큰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테러가 왜 일어나는지 그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의 조직화된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필수적인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에서 보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모욕을 당해서, 친구나 친척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되거나 상해를 당한 복수심 때문에, 억압적인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한 억울함으로, 직업도 구할 수 없고 점령지에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한 울분으로, 고문을 당하거나 수감되었던 것에 대한 억울함, 희망없는 삶과 인종차별 등에서 생겨난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자살 폭탄 테러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결국 이스라엘의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점령이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군사화된 이스라엘의 폭력이 강해질수록, 팔레스타인의 폭력적 대항과 자살 폭탄 테러는 더욱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미디어나 일반 대중들은 국가나 공권력이 행하는 조직화된 폭력과 민간인 학살 보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더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는 것 같다.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테러리스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르침들이 있다. 이렇게 사용된 종교적 해석은 사회적으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다른 무슬림들이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들을 순교자들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테러의 목적이 적을 교란시키고, 적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적을 죽이는 것이 테러의 목적이 아니라, 무슬림 형제 자매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거룩한 전쟁’으로 번역되는 지하드 (jihad)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하여, 신의 뜻인 정의를 세우고, 남은 형제와 자매들이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권위있는 이슬람 학자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지하드는 육체적 전쟁과 영적 전쟁으로 나뉘어 지는데, 영적 전쟁인 지하드를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영적 지하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께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이다. 그렇기에 이슬람에서 ‘다섯개의 기둥’이라 알려진 종교적 의식이 중요한다. 이 기둥들은 유일신인 하느님과 (알라 Allah는 유일한 하느님이란 뜻의 아랍어) 선지자 모하메드가 그의 메신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께 드리는 다섯번의 기도, 라마단 기간 동안 하는 낮동안의 금식,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 메카로의 성지 순례이다. 이들 다섯 가지는 모두 무슬림들이 영적인 지하드에서 승리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또한 살인을 금하고 있으며, 순교 행위 또한 살생이나 종교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를 포함하면 안 된다. 굳이 이야기 하자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무슬림들의 인사가 서로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인사이듯이. 내가 지금까지 만난 무슬림들은 모두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친절하고, 여성들을 존중한다. 이들 중엔 소말리아 난민 출신도 있고,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보스니아 난민 출신도 있다. 이들이 기꺼이 난민의 대열에 합류하여 미국에 정착한 이유는 폭력과 테러리즘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만약 서구 사회에 정착한 난민들 중에, 또는 그들의 자녀들 중에 자발적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서구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차별과 난민들에 대한 편견, 반이슬람주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등의 사회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이러한 부정의한 구조들을 고쳐 나가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건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장을 만드는 것,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정치 구조, 정의로운 경제 구조, 존중과 관용, 배려에 바탕을 둔 다문화주의 등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구조를 만들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이 있어야, 테러를 막을 수 있다. 국제 사회는 IS, 탈레반, 알카에다, 보코하람, 남미의 마약 군주 등등의 테러조직들을 벌하고 응징하는데에만 급급하지 말고, 국제 사회 전체가 힘을 합쳐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지, 어떻게 분쟁 지역에 무너진 사회 구조를 인류애 차원에서 재건설할 것인지, 국가 권력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된 안보와 평화를 이루어나갈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로, 중동지역은 정치적으로 더 혼탁해졌고, 군사적으로는 더 폭력적이 되었다. 아랍의 봄이 실제 안정적인 평화 구조로 귀결되지 못 하고 있는 이유도,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반이슬람주의가 계속 힘을 얻어 가고 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고 있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또는 오만한 우월주의와 엘리트 의식에 빠져, 민중을 먼저 생각하는 평화 협상은 하려고 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이란 종교를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평화를 위한 해법이 되기 보다는 위협이 된다.

  
          테러를 대다수의 신학자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과 윤리학자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갈등이나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반인들이 테러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풀면, 전쟁에서 군인들은 무장한 적군을 죽일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무장을 한다. 그러므로 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거나 해를 가하는 것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인류에 가한 범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대전에서는 일반인과 무장을 한 테러리스트들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무장 군인들을 상대로 한 테러,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일반인들에 대한 테러 또한 증가하고 있어서, 누가 (총기 난사범이 아닌) 테러리스트이고, 어떤 행위가 테러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은 공포심을 먹고 살며, 정치 지도자들은 어떻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문구에 속아서, 국가와 공권력이 행하는 전쟁과 폭력을 간과하거나, 종교를 테러의 정신적 기반으로 몰아가는 일에 동조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종교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나약함을 먹고 공포스러운 괴물로 변질되기가 쉽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가 피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권력과 폭력, 사회 구조, 그리고 타인을 두려워 할 때 반복되어 왔다. 10여년 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사회 기반이 무너진 스리랑카에서는 평화의 종교로 알려진 불교가 군사 폭력에 앞장 섰고, 일본 불교는 오랜 동안 군국주의와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인도에서는 힌두 급진주의자들이 국가주의와 결탁하여, 무슬림들을 살해하는 일이 최근까지 계속 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를 버려야 할까? 무신론자들이 덜 폭력적이란 근거 또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어느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테러리스트로 불려질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베들레헴에서 아랍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났을 예수. 예수께서 만약 지금 똑같은 모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면, 그의 사진이 한국의 다음이나 네이버 뉴스에 뜬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불쌍한 아기. 너도 자라서 테러리스트가 되겠네.” 이 세상에 테러리스트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아기들은 없다. 그리고 테러를 지지하는 종교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아기 예수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때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증오 받는 테러리스트들도 한 때는 평화주의자로 자랄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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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난민들에 대한 짧은 생각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유엔 난민 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s for Refugee])의 통계에 의하면, 2014년 한 해 동안 전세계적으로 오천 오백만명의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오랜 내전과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들이다. 대한민국 인구수와 맞먹는 오천 오백만이란 숫자는 국제 난민들의 규모와 다양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실제로 유엔 난민 기구는 2015년 현재 약 7천만명의 사람들이 무력 충돌과 환경 재앙으로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각주:1] 
          내전으로 인하여 대규모의 시리아 난민들과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콩고, 소말리아 출신의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탈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지금, 우리는 난민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국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교회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난민 인권 문제, 특히 전쟁 난민은 국경, 국적, 국가 간 이익 문제 뿐만 아니라, 종교와 인종 문제, 성차별 문제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있다. 특히 “인종”이란 관점에서, 난민 문제를 살펴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에 옛 유고 연방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국제 정치 무대에서 리더쉽을 보여주려한 클린턴 행정부는 십육만구천여 명의 옛 유고 연방 출신의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중 대부분이 내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였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이였다. 현재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난민을 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태도와 비교해 볼 때, 유럽에 거주하던 보스니아 난민들은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서방 국가에 이주하였다.
          미국에 정착한 가장 큰 난민 그룹은 옛 소련 연방 출신들로, 이들 중 상당수가 유대인들이다. 현재 미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약 칠십만명인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 중 30%가 옛 소련 연방이 붕괴되기 전에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이고, 나머지 70%는 그 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난민들의 수는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수 보다 많다.
         보트 피플 (boat people)로 알려진 베트남 난민들은 국제 사회에서 난민들의 대표 얼굴이 유색인종으로 바뀐 사건이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베트남 정부나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약 14만 명 정도의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로 떠났다. 그러나 1978년 호치민 정부의 과거 청산 정책이 가속화 되면서, 화교 출신 등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 남베트남 정부에 가담했던 사람들 등등이 핍박을 피해 베트남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변 공산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사람들도 난민 행렬에 가담했다. 1975년과 1995년 사이 약 이백만명의 사람들이 베트남을 떠난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며, 이들 중 약 팔십만명이 해로를 통해 베트남을 탈출하여 안전하게 다른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 수의 사람들이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거나, 조악한 배가 파도에 뒤집히거나, 해적떼에게 약탈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보트 피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한 찬공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즉각적 종료를 원했다. 전쟁은 모든 베트남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 상처는 보트 피플로까지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베트남 주변국들은 보트 피플의 상륙을 허락하지 않아서, 난민들이 탄 배는 공해상에 머물러야 했다. 공해는 위험한 공간이다. 해적떼들과 높은 파도 때문에, 지치고, 양식도 부족하고, 병약한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베트남을 떠났지만, 살 수 있는 희망이 너무 적었다….호주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지 않아서, 미국은 비자를 내주지 않아서, 유럽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주변국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두 난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 주변국들은 유럽과 미국 국가들이 나서서 난민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유엔이 제한된 지역에 난민촌을 만들어 주고 나서야, 보트 피플의 일시적 상륙을 허락했다. 호주는 이민법을 바꾸어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면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미국과 캐나다, 북유럽 국가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무력 분쟁 지역을 탈출하여 국외로 간 모든 사람들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이주 자격을 허락한다. 이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은 난민 캠프나, 임시 수용소와 억류소 (detention center)에 머물러야 하며, 이 기간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영국과 같은 나라는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의 경제 활동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난민들은 영국에 이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호주는 지금도 해로를 통해 도착한 난민들을 심사 기간 동안 구금 센터에 머물게 하는데, 여기에 머무는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난민들이 난민 심사에 떨어지거나, 심사 기간이 길어져, 더 안전한 곳, 경제 활동이 가능한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지난 여름 터키 해안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세살 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 알랜 쿠르디 (Alan Kurdi)의 사진 한 장은 시리아 난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국가들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유럽 난민을 이야기하며, 시리아 난민에 대한 자국민들의 감정이입을 호소했다. 자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난민 쿼터를 늘리고, 난민 인권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동안, 미국은 올해 일만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2017년까지 삼만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몇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여기에 속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한국 언론들 뿐만 아니라 서방 언론들은 시리아 난민 발생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러시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정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발발 후,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중동 지역에 정세불안을 가져왔고, 군사화된 이 지역을 더 군사화시켰다. IS와 같은 극이슬람 주의와 군사화가 결합한 반군조직 (para-military)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러시아 무기를 수입하여 세를 불려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와 미국은 현재 IS에 대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고 있는데, 이 공습으로 인해, 난민들이 더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난민들을 받아 들이고, 난민 문제 해결에 앞장 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랑, 또는 국제 정세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한 난민들, 특히 시리아 난민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내 이웃으로 보기 위해서는 기독교 안에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우선 광범위하게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엔과 유럽 정부들, 그리고 언론들은 ‘난민 문제’에 대한 ‘짐 (burden)’을 전 세계가 함께 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를 종종 한다. 이러한 관점은 ‘난민’을 만들어 낸 전쟁, 미국과 러시아의 군수업자들, 독재 정부 등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즉, 난민들이 문제가 아니라, 난민들이 발생하도록 만든 국제 정치 구조와 전쟁이 세계 시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인 것이다.
          또한 난민들의 이주 비용에 유럽과 북미국가들이 막대한 사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난민들의 장기 이주와 이민이 오히려 이주 국가의 경제에 도움을 주거나, 최소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들의 이주가 마치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도, 이 보도에 의하면 오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 장벽 때문에 난민들이 당장 전문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당수가 소위 3D 업종으로 불리는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오히려 이 업종의 임금이 올라가고, 지역 경제가 살아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난민들을 받아들인 덴마크의 여러 지역들은,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이 난민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다. 난민들을 억류하거나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국가가 난민 관리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사용하여, 국가 예산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각주:2]

          조금만 더 깊이 살펴 보면, 난민들이 부유한 국가들의 사회 보장제도에 무임승차한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사를 넘나들며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고 여러 국경 지대를 통과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아온 난민들이, 이주 국가에서 사회 보장 제도나 바라는 사람들로 머물거란 생각은, 이들의 생존능력을 무시하는 편견이다. 더구나 난민들도 서구 국가들이 낙원이 아니란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본국의 분쟁이 끝나면 또한 많은 수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세계화된 인종 차별 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맞물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들이 환영받지 못 하는 시대에, 국제 사회의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각 국 정부들이 꺼내드는 카드가, ‘자국민을 위한 일자리 보호, 사회 안정 유지, 국가 예산 문제’ 등이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치인들이 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거나, 자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난민 문제를 감춰서,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은폐하려고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이 난민 발생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세계 정치를 분석해야 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하느님 나라는 국경이 없지만, 인간이 만든 나라들은 국경이 있고, 이 국경을 지키는 군대와, 국경을 다스리는 정부가 존재한다.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과 해외 여행의 자유화로 마치 우리와 타인을 구별짓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무역품들이 여러 나라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때, 각 국 정부는 오히려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통제하면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세계 시민들을 구분하였다. 시리아 난민들과 같은 대다수의 난민들이 종교와 인종, 출신국 때문에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고 있다. 난민 문제가 세계화되고, 전쟁이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는 ‘국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 안보의 중심이 국경이 되고, 국경을 지키기 위한 전쟁, 마치 국경이 없으면 국민의 안전도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안보 (human security)로 생각을 전환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마치 하느님의 나라가 국경으로 이루어지고 지배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국제 난민 인권 문제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가 ‘이슬람 혐오주의’이다. 이슬람 혐오주의는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트루쿠 제국, 이슬람 제국들과 국경 분쟁 등의 역사적 경험때문에 서구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이제 이 혐오주의는 유럽과 북미를 넘어, 기독교 세력이 강한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지 못 하는 것에 대해 집단적으로 혐오하고, 그 혐오에 편견을 더 하고,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테러리스트로, 여성혐오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은 기독교 사랑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퀴어 문화 축제가 준비되던 지난 여름,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영국의 ‘나라를 걱정하는 기독교인들 Christian Concern for Our Nation’의 대표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Andrea Williams)가 한국에 전하는 메세지라는 동영상이 공유되었다. 윌리암스의 메세지는 간단했다. 한국이 차별 금지법을 받아들이는 순간 동성애자들과 이슬람교도들이 거리에 넘쳐나서, 한국도 영국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지옥이 될 거라는 경고였다. 동성애와 이슬람이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로 표현하는 것도 비논리적이지만, 이슬람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살게 될 거란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화권 안에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기독교의 이슬람 박해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팽배해 지기 전에는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오히려 윌리암스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 무슬림들에겐 지옥이다. 기독교와 같이 제도화된 종교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항상 만들어져 가는 것인데,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제도의 노예가 되어서, 사랑이 아닌 증오를 전파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 (Aloysius Pieris) 신부는, 진정한 개종은 기독교라는 종교로의 개종이 아니라, 모든 부조리한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 (liberation)’으로 개종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1988) 이슬람이 가르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 칼럼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 모두,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집단들에 의해, 테러리스트의 종교도 될 수 있고, 서로에게 위협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다.
          지금은 종교와 폭력이란 주제에 대해 필독서 중 하나가 된 “Exclusion and Embrace”에서, 옛 유고 연방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Miroslav Volf)는, 현대 사회에서 죄악이란 타인을 배척 (exclusion)함으로써, 현실을 뒤틀어서 바라보고, 이렇게 뒤틀려진 현실 속에 살면서, 공포심을 가진 채, 타인을 향해 증오와 폭력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볼프에 의하면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타인과 평화로운 공존을 통해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어려운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열어 보이신 것처럼 타인도 똑같이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서도 온다.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1996) 볼프의 구원이란 관점에서 보면, 난민과 우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난민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들을 끌어 안으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독교인들 모두는 이 세상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자들이 아니라, 국경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려고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고, 이 땅에 주인이 아니지만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난민들 말이다. 우리가 난민들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국경을 폐쇄하고, 지구의 주인처럼 살면서,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난민이라 부르고, 우리 땅에 발을 딛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신분을 져버리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 교회가 난민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종교적 인종적 타자들을 끌어 안으면서, 스스로 사회에서 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열린 구원의 길이다. 


<에필로그>
          인천 국제 공항에 가면, 난민들을 위한 임시 수용소 (detention center)가 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앙 아시아에서 어려움 끝에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고, 난민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한국의 난민 심사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까다롭고 기간도 길며, 이 임시 수용소는 침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감옥같은 곳이다. 그나마 난민 자격을 얻지 못 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으로 쫓겨 나거나, 다시 지루한 법정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한다. 기독교 교회는 오랜 동안 난민들을 보호하고, 정착하는데 도움을 준 전통이 있다. 미국의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미국 정부에게 시리아 난민들을 더 받으라고 압력을 넣고 있고, 자신들의 공간을 난민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서원했다. 한국 교회가 이들 교회 운동에 동참하여, 난민 인권 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한국 국경 안에 들어와 있는 난민들의 이주에 적극적 관심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면, 한국 정부도 쉽게 난민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전쟁 동안, 우리도 수많은 난민들이였음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남 난민들을 바다로 내보낸 책임이 있음을, 중동지역 전쟁에 우리도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nhcr.org/5575a78416.html [본문으로]
  2. (Anna Swanson, “The Big Myth about Refugees: Refugees Can Be an Investment Rather Than a Burden,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blog/wp/2015/09/10/the-big-myth-about-refugees/?postshare=20714458158194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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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스러운 전쟁: 요한 계시록을 통해 본 폭력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6월 한국은 퀴어 퍼레이드에 반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단체 행동으로 시끄러웠다. 얼마 후 미국은 동성결혼이 헌법에 명시된 미국 시민의 기본 권리임을 대법원이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법원 판결이후, ‘동성결혼 반대’를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로 인해 약간의 소동이 있긴 했지만, 미국은 대체적으로 조용했다. 미디어들도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듯 했고, 오히려 동성결혼 합헌 판정에 기뻐하는 성소수자들의 동향을 전했다. 대법원이 합헌 판정을 내리는 기간에 내가 속해 있는 미국 성공회의 전국회의 (General Convention)가 유타주의 솔레이크 시티에서 열리고 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에서, 주교단과 대의원들은 교회법에 명시된 결혼의 정의를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서 ‘성숙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결정했고, 미국 성공회 역사상 최초로 흑인 의장 주교를 선출하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동성애 문제로 지역 성공회 교회들이 갈라지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신부들과 주교들이 교회를 떠나는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으니, 앞으로 교회가 계속 시끄러울 것 같다.
          동성애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을 보면서,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면서, 성소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중오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유독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전쟁의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억압—전쟁, 가난,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주의, 외국인 혐오주의 등등—은 그 근본을 들여다 보면, 모두 서로 얽혀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양분을 공급해주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동성애 혐오주의와 군사주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친밀 관계의 예를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부터 ‘퀴어 성서 주석 (Queer Bible Commentary)’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요한 계시록 주석을 번역을 위해 천천히 집중해서 읽다 보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 왔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연구하는 권위자로 알려진 티나 피핀(Tina Pippin)과 게이 신학자인 마이클 클락 (Michael Clark)이 함께 쓴 요한 계시록에 대한 퀴어적 해석은, 이 저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 나로 하여금 전쟁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했다.
          요한 계시록은 단순히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 전쟁에 관한 책이며, 전쟁과 섹슈얼리티 (sexuality)가 함께 하는 책이다. 신약학자들의 대부분은 요한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살았던 폭력과 전쟁, 귀족들의 무분별한 쾌락 추구와 억압으로 점철된 1세기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와 관련지어 읽는다. 제 3세계 신학자들은 제국주의 억압에 대항하는 해방의 메세지로 요한 계시록을 바라 보기도 한다. 제3세계 신학자들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피핀과 클락은 요한 계시록에서 해방의 메세지, 특히 성소수자들을 위한 해방의 메세지를 찾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전쟁과 파괴의 신이며,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는 침묵의 심판자이며, 그가 건설하려는 왕국은 하늘과 땅이 철저히 파괴된 후에야 등장해서 오직 선택 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동체이다. 피핀과 클락은, “왜 이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지? 이런 이미지에서 하느님을 해방시켜야 하지 않나?”라고 질문한다.
         실제로 요한 계시록은 하느님이 코디네이터로써 소리 없이 전쟁을 주관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네 천사가 지구의 네 귀퉁이에서 차례로 나팔을 불면, 전쟁과 기근 전염병 등의 재앙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 넣는다. 전쟁, 기근, 전염병은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농업 공동체와 지구의 파괴로 인해 기근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기근은 때로 전쟁과 무력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쟁과 기근으로 버려진 사람과 가축 시체로 인하여 전염병이 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문제는 전쟁을 일으키고 조정하는 자들은 전쟁터에서 보이질 않는데, 전쟁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죽음의 천사들도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며, 이 천사들에게 지구를 치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일어났는지, 누가 일으켰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이 피해자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 한채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어느 전쟁이나 희생양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희생양들은 여성들, 소수 인종들, 외국인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다. 피핀과 클락은 제리 파웰 (Jerry Falwell)과 같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종말론의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종말의 신호로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이들은 유럽 연합의 탄생을 적그리스도 왕국의 탄생으로, 심지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몰아가기도 한다. 1차 걸프 전쟁 때도 20세기말 종말론자들은 아마겟돈의 시작이란 억지 주장을 했고, 21세기 들어선 9/11 테러 사건, 이란의 핵무기 개발, 2차 걸프 전쟁 등이 곧 다가올 아마겟돈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는 말세의 질병으로. 그리고 에이즈 확산의 책임은 동성애자들, 특히 게이들에게 떠넘겨졌다. 결국 계시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동성애자들이 말세의 기승전결을 알려주는 황당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계시록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등장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잡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자색옷을 입은 바벨론의 창녀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모든 타락한 것들의 어미로 그려지고,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광야에서 해산을 하고 용에게 쫓기다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피난처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피핀은 다른 책에서 요한 계시록이 여성 혐오주의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선과 악의 대결로 점철된 요한 계시록에서 여성의 위치 또한 악녀와 선녀로 나눠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죽음 또한 참혹해서 그녀의 시체는 갈갈이 찢겨져 영원히 불타게 되고, 만국 백성들은 그 시체 위에서 기쁨에 넘쳐 축제를 벌인다. 반면에 선한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실제로는 모호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녀는 앞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남자 아이를 출산하기 때문에, 존재의 가치가 있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난 후, 광야로 사라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녀가 예수가 지상에 건설한 천년왕국에 들어 갔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1440명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각각 차출된 남자들이니까. 해와 달을 입은 여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천년왕국에, 그 후에 새로이 건설되는 새 예루살렘에 여자들도 있는지 조차 알 방법이 없다.
         바벨론의 창녀, 해와 달을 입은 여인, 하느님의 인치심을 받은 선택받은 남성들. 이들의 이야기들이 이상하리만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마치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인냥 바벨론의 창녀처럼 비난받는 여성들이 항상 존재하고, 아들들과 연인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꿋꿋이 삶을 지탱해 나가는 자랑스러운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감동의 전쟁 스토리를 보내오는 남성 군인들, 전쟁 영웅들이 있다.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 (Cynthia Enloe)에 의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국제 정치의 무대와 함께 실제 전시상황이 되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던 남성중심주의가 더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전쟁과 같은 급박하고, 때론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국제 정치의 장에서 이성적이며, 강인한 남성만큼 제격인 사람은 없다. 마치 요한 계시록의 하느님처럼 새로운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잔인한 전쟁도 불사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언제 질병의 나팔을 불지 (현대전에서 사용되는 생화학 무기 같은 것), 언제 융단 폭격을 가하고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한 방에 전쟁을 끝낼지를 냉철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데, 남성 지도자만큼 제격인 사람을 찾긴 힘들 것이다. 이 전쟁 지도자에게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받칠 선택받은 1440명과 같은 남성군인들이 있어야 하고, 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국가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들을 선택했느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이 모든 전쟁 시나리오에서 여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여성들은 그들이 어떤 남성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역사적으로 소위말하는 적군의 여성들 (enemy women)이 어떻게 다루어 졌는지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전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여성을 철저히 성적 대상화하면서 가능해 진다. UN의 전시 성폭력에 대한 최근의 보고서 (UN Report on Sexual Violence in Conflict)에 의하면, 성폭력이 전술의 하나로 사용된지 너무 오래 되었다.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무기력하게 만들고자, 또는 남성 군인들을 하나로 묶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전술적으로 사용된다. 오랜 동안 여성은, 출산과 양육이란 독특한 특성으로 인하여, 한 민족이나 나라의 땅과 문화와 동일시 되었고, 이러한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은 적군을 파괴하는 행위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는 보코 하람이나 이슬람 국가 (IS)와 같은 종교 신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과격한 테러 단체가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이미 전쟁으로 사회 안전망이 파괴되어 버린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제주 4.3 학살 사건과 같은 국가의 조직적인 폭력이 일어났을 때,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원의 가족이란 이유로, 공산당원으로 의심받는 가족의 구성원이란 이유로 많은 제주 여성들이 서북 청년 당원들, 육지 경찰,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거나, 그들과 강제 결혼을 당했다. 전쟁 중에 ‘우리편’에 속하지 않은 여성들은 (바벨론의 창녀와 같은) 위험한 여성들로, 전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여성들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합당한 벌은 강간하고 죽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 그들을 전쟁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이 전쟁이란 상황에서 (종말이란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 성폭력은 여성과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들, 남성들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레즈비언 여성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위한 강간 (corrective rape)’ 범죄가 보고 되고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 분쟁지역과 난민촌에서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한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사회 부조리와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들의 잘못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이들을 성적으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살인에 대해 극도의 도덕적 저항감을 느끼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분석한 데이비드 그로스만 (Ltd. David Grossman)은 그의 책 ‘살생에 관하여 (On Killing)’에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 하면서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피하는 분야가 전쟁(살생)과 성(sex)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의 책이 이 둘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 두 분야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전쟁과 성은 우리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윤리적 행동을 생각해 보는 것을 어렵게 하는 분야이다. 그렇기에 폭력과 성은 마치 공포영화처럼 인간들을 짜릿하게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두렵게 만들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스 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환상을 보았던지 간에, 그 환상은 사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 자유 남성 계층의 무분별한 성적 유희, 여성-노예-소년들이 자유 성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로마제국의 시대상과 사도 요한이 가지고 있던 가부장적 유대민족 독립운동사상이 맞물려 탄생한 책이 전쟁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 성폭력이란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미래에 다가올 종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지나온 역사가,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더 공포스럽다고 느껴졌다. 강제로 군위안부로 끌려가 이국 땅에서 일본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다가 죽어간 한국 소녀들, 미국 주둔군을 위한 성적 유희 제공자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어간 기지촌 여성들, 전국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304명의 단원고 학생들,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죽은 두살배기 팔레스타인 아기,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집단 강간당하고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살로네 등등. 이들의 이야기가 종말의 이야기이고, 가부장적 폭력으로 가득 찬 군사주의, 여성혐오주의, 동성애 혐오주의가 지구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묵시록적 증언이다.



<참고 문헌>
    Pippin, Tina and J. Michael Clark. “Revelation/Apocalypse.” In The Queer Bible Commentary. Edited by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06. Kindle Edition.
    Enloe, Cynthia. Bananas, Beaches, and Bases: Making Feminist Sense of International Politics, 2nd Edition.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4. Grossman, David. On Killing: The Psychological Cost of Learning Killing in War and Society, Revised Edition. Open Road Media, 2014. Kindle Edition.
    United Nations Office of the Special Representative of the Secretary-General for Sexual Violence in Conflict, “Key United Nations Initiatives to Address Conflict-Related Sexual Violence.” http://www.un.org/sexualviolenceinconflict/our-work/key-initiatives/
    오금숙.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사례.” 제주 4.3 연구소 엮음.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제주 4.3 제 50주년 기념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보고서.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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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폭력과 비인간화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최근 미국 미주리 주의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며, 저명한 흑인 학자 코넬 웨스트 (Cornell West)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일은 미국 내에서 흑인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 (Cornel West, Democracy Matters, 2005)” 코넬 웨스트는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이 행한 민간인 학살과 전쟁 포로의 인권유린이 미국 내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흑인 청년들에 대한 조직적인 경찰 폭력, 사회적 편견 등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웨스트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16세기 부터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흑인 노예 제도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천부 인권론 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서구에서, 노예 매매제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흑인을 철저히 비인간화 하며 지속되었습니다. 흑인 남성들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폭력적이며, 성욕과 같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이념화 과정이 그것입니다. 비록 흑인 노예제도가 1865년 남북 전쟁과 함께 종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해방된 흑인들은 그 후로 부터 100년 동안 짐 크로우 법 (Jim Crow Laws) 밑에서 인권을 유린 당하며 살았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공공 장소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합법화한 법으로써, 이 법 아래에서 흑인들은 법정 증언도 할 수 없었고, 공정한 재판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백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노예 제도나 짐 크로우 법을 주류 기독교가 오랜 동안 지지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짐 크로우 법 시대에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백인 기독교인들 이였습니다. 흑인 해방 신학자 제임스 콘은 린치 당하고 죽은 흑인이 매달린 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직화된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상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James Cone, The Cross and the Lynching Tree, 2011). 백인들의 기독교에 의해 철저한 인권 유린과 지속적인 국가 폭력을 경험하는 흑인들이 예수 안에서 자유함과 해방을 누리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 신학자인 숀 코플랜드(Shawn Copeland)가 이야기하듯,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그리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Shawn Copeland, Enfleshing Freedom, 2009). 그래서 흑인 해방 신학과 흑인 여성 신학은 백인 주류 신학이 이야기하는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약자와 함께 고통 받는 하느님, 체제의 부조리와 약자를 비인간화 하는 사회구조에 끊임없이 대항하는 하느님, 공동체와 약자를 힐링하는 하느님을 이야기 합니다.

          미국 남부 미주리주 퍼거슨 시에서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에게 여섯발의 총을 쏘아서 숨지게 한 사건은,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주의가 어떻게 공권력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현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벌리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과 군사 작전, 그리고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차별,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항하는 폭력 시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앞서서 이야기한 것 처럼, 인종 차별은 유색 인종을 비인간화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랜 동안 흑인들은 짐승 또는 ‘악(evil)’과 동일시 되면서 정복되어야할 백인들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실제로 유색인종에 대한 끊임없는 ‘타자화’와 ‘비인간화’의 연속입니다. 미국의 원주민 학자이며 사회 운동가인 안드레아 스미스 (Andrea Smith)의 책 ‘정복 Conquest’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어떻게 정착 초기부터 미대륙의 원주민들을 타자화 하고, 철저히 비인간화 시키면서 그들의 땅과 문화를 파괴해 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미국의 부와 권력은 수많은 원주민들의 죽음과 흑인 노예들의 죽음 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 없는 죽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대륙의 원주민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유럽의 여성 혐오주의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와 달리 여성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옷 차림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화 되고 비인간화 되었습니다. 비인간화된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것은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공동 소유의 원칙을 실천하는 원주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사유 재산화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동식물과 약품에 관한 다양한 지식도 사유화 하는데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성폭력과 함께 여성들을 대상으로한 피임약과 같은 약물 실험도 원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 폭력이였습니다. (Andrea Smith, Conquest, 2005)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에도 적으로 간주된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들은 타자화와 비인간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한국 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노근리 사건, 거창 학살 사건, 포항 피난민 학살 사건 등)과 베트남 전쟁 초기 부터 일어난 민간인 학살 (마이 라이 마을 학살 사건, 네이팜탄 사용 등)은 미국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 한 데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북한군들과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문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미개인들이 사용하는 군사 전략과 전술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개인들과 똑같은 외모와 언어를 가진 남한 사람들, 월남 사람들은 적군과 비슷한 이들이거나, 또는 자기 방어 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타자화된 동양인들의 생존은 미군의 자비심에 달려 있었습니다. 한편 개개인으로써의 미국 군인들은 끊임없이 왜 자신들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적군을 얼마 만큼 성공적으로 타자화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적군이 나와 다른 (또는 주류 사회와 다른) 성별, 인종, 언어, 종교,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면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쉬워집니다. 만약 군인들이 적군을 그들과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면, 적군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성공적인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인들로 하여금 적군을 증오하도록 만들고, 타자를 끊임없이 구별해 내며, 적군을 비인간화하는 정신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정신 훈련은 군인들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육체를 끊이 없이 정신에 복종시키는 작업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이 ‘적’이라고 판단된 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반사 신경’을 기르는 것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나 심각한 도덕성 장애(Moral Injury)로 일상 생활이 힘든 참전 군인들 대부분은, 군사 작전 중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 적군에 대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처럼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끼며, 지켜야할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군사작전의 일부분이란 사실이 감당하기 힘든 양심의 가책 또는 정신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쟁 중이였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성을 보면, 한국이 전쟁터 같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까지 사용하는 왕따 문제,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각양 각색의 성범죄들, 외국인들 대상으로한 차별과 폭력, 장애인이나 노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 감정 노동자들을 상대로한 무분별한 언어 폭력과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 골수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무분별한 이념 전쟁까지…… 이 모든 종류의 폭력은 희생자를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타자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만연된 사회에서 물리적 전쟁이 일어나면, 비 전시 상황에서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던 약자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 발발 시기에 보도 연맹원 학살이나, 서북 청년당이 ‘빨갱이들’과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이루어졌었기 때문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반 기독교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거룩한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 그 삶, 특히 사회가 죄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과 연대한 삶을 지금의 교회들이 그리고 내가 살아 가고 있는지 묵상하는 대림절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에 대한 저항은 타자화와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과 일맥상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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