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팅 바울 - 권리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지은이 : 김진호

펴낸날 : 2013년 8월 16일
페이지 : 240쪽
정  가 : 14,000원
펴낸곳 :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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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낯선 바울’ 읽기, 바울을 리부팅하다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프로테스탄트의 마르틴 루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 그리스도교 신학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세 사람의 신학은 바울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서 자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2성서(신약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다. 이는 1세기 말경에 이미 그리스도의 공동체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는 다름 아닌 바울의 문서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바울의 시선에 의해 규율된 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이들은 대개 바울을 비판했다. 니체는 바울이 예수를 교회의 도그마로 왜곡, 전락시킨 장본인으로 보았고,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은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정통주의의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신학자 루이제 쇼트로프는 바울을 남성 쇼비니스트라고 비판했으며,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김창락의 바울 연구를 접하기 전, 바울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바울을 다시 주목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그런 시선들은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의해 바울이 왜곡되었음을 문제제기하고 바울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비판적 성서학 연구자의 하나인 도미니크 크로산도 그중 하나고, 대표적 급진주의 성서학자들인 리처드 호슬리나 닐 엘리엇, 그리고 퀴어신학의 개척자이자 이론신학의 대가인 테드 제닝스 등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밖에도 무수한 비판적 신학자들이 교회에 의해 왜곡된 바울과는 ‘다른 바울’을 얘기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좌파 사상가들인 알랭 바디우, 조르지오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도 바울을 재해석하였다.
한편 민중신학도 바울에 대한 재해석의 대열에 가담했는데, 그 대표적 학자는 김창락이다. 바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안병무도 제자인 김창락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 바울을 재평가하였다. 하지만 김창락의 연구는 신학계와 교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함으로써 그 가치가 간과되었다.
지은이 김진호는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는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 기존의 주류 그리스도교의 바울 이해나, 그리스도교 비판가들의 바울 비판, 그리고 바울을 재해석하고자 했던 여러 논의들을 ‘리부팅’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김창락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울의 현장신학적 관점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바울에 대한 대개의 재해석들은 바울을 로마제국 전체와의 대결구도 속에서 보고자 했다. 그것은 고전적인 바울 연구들이 바울을 유대교와의 대립구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한데 이런 논쟁은 모두 바울의 서신들이 담고 있는 투쟁 현장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반면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 현장임을 밝혀낸 것이다.
김진호는 김창락을 계승하면서도 그가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 그리고 그런 논의의 연장에서 김창락의 관점을 수정한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한데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한데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다. 김진호가 재해석한 바울의 현장과 그의 담론투쟁은 이랬다.
이렇게 김진호는 고전적인 바울 해석과 최근의 바울 재해석을 리부팅하는 김창락의 견해를 계승 보완하면서, 1세기 지중해 지역 대도시들 한 가운데서 활동했던 바울이라는 인물을 읽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의 이야기이다.

고대사회의 인권선언, 바울의 의인론 / 고대의 급진적 인권운동가, 바울

김진호는 이 책에서 바울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도록 전개되었던 기독교의 바울 수용사를 접고, ‘기독교 이전’의 바울, 곧 기독교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실존했던 인물 바울의 활동을 현장신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봤다. 바울의 현장 이해에 핵심적인 논점은 ‘유대주의’ 문제다. 바울은 거의 모든 곳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든 연구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의 신앙을 ‘유대교’라고 명명했다. 김진호는 이를 현대 시오니즘의 유대 중심적 관점에 의해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았고, 이를 바로잡아 ‘이스라엘 종교’라고 썼다. 그리고 다양한 이스라엘 종교 현상과 운동들이 공존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안식일과 절기의 준수, 할례 등을 주장함으로써 순혈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 종교를 재해석하려는 집단을 ‘유대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회당 사회 주변부 대중, 곧 대개가 개종자들인, 특히 버림받은 노예들인 민중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러한 유대주의자의 담론의 효과를 잘 이해하지 못한 많은 이들, 심지어 베드로나 야고보같이 예루살렘계 그리스도파의 유력한 지도자들조차 이러한 운동에 동조하곤 했다. 바울의 전향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스라엘 신앙에 속한 사람으로 유대주의자의 일원이었다가 그 반대편의 지형으로 생각과 실천의 축을 옮겨간 정치적인 전선의 이동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담론에 대항하면서 성적, 인종적, 계급적 민중담론을 폈다.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이런 투쟁의 무기로 제기된 신학적 언술이다. 다음은 투쟁교설로서의 의인론의 사회사적 해석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기원후 1세기 중반은 해안지역 노동자의 30퍼센트에 달하던 노예경제가 붕괴되고 무수한 노예들이 속속 방출되던 시기였다. 신분은 노예인데 소유주가 없는 이러한 방출 노예들은 마치 유기견과 같은 존재가 되어 생존의 정글 속에 내던져진 ‘말하는 짐승’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 방출 노예들은 도시의 하층 노동시장을 크게 교란시켰고, 이는 방출 노예들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 적대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혈통으로도 피부색으로도 언어로도 어느 하나 동질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로 들끓는 도시, 이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사적 연줄을 만들었고, 해방노예나 난민 등 하층민들은 그 연줄망의 변두리에라도 속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런 맥락에서 로마제국 내에서 사법권, 제의 준수권, 조세 징수권 등 특권을 누리는 격조 있는 결사체, 즉 도시 사회 속의 또 하나의 사회로 기능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결사체에 속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치 결사체에 편입된 비이스라엘계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테오세비오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개종자다.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를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 교포사회를 보호하였던 이들인 테오세비오스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교포 사회에서 별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기부금을 낼 처지도 못 되고 품격도 갖추지 못한 개종자는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성이 강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이방인’ 또는 ‘헬라인’으로 불리며 하위주체로 대상화되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고 하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이다.

2013년 서울, 바울을 호출하다

지구화 시대 세계는 무수한 유민과 난민들로 들끓고 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최소한의 특권도 갖지 못한 쓰레기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을 더러운 자, 처분해 버려야 할 자들로 간주한다. 하여 그들은 배제와 차별, 증오가 혐오의 대상이 된 자들이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바울의 세계들도 그랬다. 기원전 3세기 이후 국제무역이 전례 없이 활발해졌고,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려는 제국들의 전쟁이 잇따랐다. 그 과정에서 종족국가 단위를 훌쩍 넘어 지중해 전역을 단위로 하는 문화적, 종교적, 인구적 혼합 현상이 극심해졌다. 무엇보다도 유민과 난민의 행렬은 지중해 지역 대도시들을 혼융성(하이브리디티)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한데 지중해의 기원후 1세기는 고대적 지구화의 양상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 선언 이후 해안 지역 노동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던 노예경제가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수한 노예들이 방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유기견과 같은 존재인 이들이 결국 몰려든 곳은 해안도시들이었다. 이곳에서 이들 부유하는 방출노예들은 가장 심각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하여 김진호는 1세기 활동가인 바울을 21세기 서울로 불러내 읽는다. 바울이 활동한 도시들, 특히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과 21세기 도시 서울은 많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중 혐오적 양상에 있어서도 양자는 닮은꼴이다. 도시국가 서울이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바울의 도시들은 ‘1세기적’으로 지구화하던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었다. 돌진적 근대화로 치닫던 1970~1980년대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과는 달리, 농촌의 독자성이 거의 괴멸되어가는, 서울에 귀속된 부속도시들과 촌락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 여기가 지은이가 바울을 묻는 시공간이 된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 밖에서 배척된 이들을 이웃으로 삼는 일에 몸 사리지 않는 ‘서울의 바울’을 찾아내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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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

지은이 : 최형묵

펴낸날 : 2013년 5월 31일
페이지 : 220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이야기쟁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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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권력의 중심에서 이익 집단처럼 행동하는 주류 한국 기독교에
진정한 기독교와 교회의 길을 묻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 아래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왔으며, 권력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권력에 영합한 주류 기독교는 주 5일 근무제, 양심적 병역 거부, 사립학교법, 차별금지법 등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쟁점마다 스스로의 기준을 절대적 기준인 양 내세우며, 자기 이해에 민감한 태도를 보여 왔다. 이와 같은 교회와 기독교의 폐쇄적인 태도는 일반 대중에게 기독교가 종교보다는 이익 집단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춰졌고, 이러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개정 출간된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은 현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상황을 진단하고, 우리 기독교와 교회가 앞으로 걸어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근대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한국 기독교

 기독교는 이미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한국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깊이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은 한국의 근대화와 대부흥 운동, 광주 민주화 항쟁, 17대 대선 등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급성장한 주류 한국 기독교가 지니게 된 여러 문제점들을 살피고 있으며,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또 다른 기독교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한국 기독교와 그 변화에 얽힌 한국 사회의 단면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내부로부터의 뼈아픈 성찰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걷는 진정한 길 찾기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은 주로 외부의 시선으로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아쉽게도 기독교와 교회 내부의 사정까지 자세히 다루기는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은 기독교인으로서 수십 년간 기독교의 올바른 길에 대해 고민해 온 저자가 안에서 겪고 바라본 교회와 기독교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비판보다 생생하게 와 닿는다.
저자의 우리 기독교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과 끊임없이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은 ‘타자를 위한 개방성으로서의 신앙과 윤리’, ‘사회 문제를 회피하는 장소가 아니라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장소로써의 교회’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삶의 기쁨을 향유하는 신앙’으로 책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시도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의 길을,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새로운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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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지은이 :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펴낸날 : 2013년 6월 1일
페이지 : 576쪽
정  가 : 18,000원
펴낸곳 :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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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한겨레 2013.06.2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뉴스셀, 민중언론 참세상

 책 소개

사건 발생(2008.12.6) 5년째인 지금,
왜 다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인가?

윤창중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온갖 군대 내 성폭력, 조직 내 성폭력 문제도 뒤이어 불거지고 있다. 한국사회에 이런 사건이 없는 때가 언제인가 싶을 정도다. 사건은 끊이지 않는데 이에 대한 구조적 성찰과 반성은 없고 일상의 성폭력 ‘문화’는 공기처럼 인식도 못하게 퍼져 있다. 역시나 가해자 ‘한 사람’만이 비정상적이고 ‘변태’라는 식의 선정적 보도 행태 또한 그대로이며, 피해생존자들의 입장을 온전히 반영한 성폭력 관련 서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는 ‘공동체’ 전체가 조직적으로 나서서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집중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의 가치를 표방하는 운동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각 조직은 정반대로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 결국 이 사건은 지금껏 ‘미해결 상태로 문제를 쌓은’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및 2차 가해 사건과 전교조 2차 가해 사건으로 번지며 심각성을 더해갔다. 민주노총은 사건 평가 보고서 등 형식적 처리 절차를 했지만 성평등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후속 조치를 제출하지 않고 있으며, 전교조는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조직적 은폐 조장 행위로 첫 단추―사건 초기 대응―부터 잘못 끼웠던 악수를 반복했다. 내부의 뼈 아픈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는 소수 의견으로 묻혔다. 피해생존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겪은 기억을 없앨 수는 없고 이 끝없는 악몽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견디며 살아낼 힘을 얻어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치유일 텐데, 치유와 활동 복귀는커녕 조직적 2차, 3차 피해를 입으며 방어하기만도 역부족이었다.

그 속에서 피해생존자와 피해자 지지모임(지지모임)은 사안마다 알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기는커녕 일일이 묻고 구걸하듯 요청하고 확인하고 수습해야 했다. 크레인에 올라간 것도, 농성장 천막을 마련한 것도 아니지만, 피해생존자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 ‘생존’하는 자체가 지상과제이자 목숨을 건 투쟁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처벌을 받은 듯 ‘유령’처럼 존재가 삭제되고 있었다. 이에 지지모임은 그동안 조직 내 공론화와 올바른 해결 촉구를 위해 싸워오면서, 묻혀온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피해생존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놓으며 그간의 싸움의 과정을 기록하는 백서를 기획하였다. 원고를 준비하던 중 전교조에서 사건 처리를 무마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정진후 당시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공천이 확정되었고, 지지모임은 이에 항의해 비례대표 철회 투쟁을 하는 데 또 집중해야 했다. 결국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요 ‘진보’ 세력인 전교조-민주노총-(당시)통합진보당은 꿋꿋이 정진후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이 사건을 한층 더 무거운 과제로 만들었다.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 활동 이후 운동사회 반성폭력 운동은 계속해서 (적어도 절차적으로)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이 사건의 지난한 ‘처리’ 과정은 우리의 반성폭력 감수성과 공동체의 변화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성폭력 사건 처리 내부 규정 매뉴얼은 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피해자중심주의와 피해생존자의 권리를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했음을 절감하게 되는, 반성폭력 운동 역사에서 충격적인 단면이 다. 규정으로만 존재하며 막상 현실의 실천, 공유, 인지로 연결되지 못하는 반성폭력 운동 성과를 이제는 제대로 직면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는 이 사건의 피해생존자에게뿐 아니라 ‘여는 글’에서 말하듯 “조직 문화가 여전히 그런 한 앞으로도 나올 수밖에 없을 또 다른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절박하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간 1639일과 칼끝 같은 일 분 일 초,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하다Speak Out’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수많은 말이 어느 시점 묶인 책이라는 물건이 낱낱이 밝히는 진실의 무게는 오죽하랴.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노래나 책을 금지하고 불태우며 진실을 말하는 입을 막았던 것일 터다. 5년의 시간을 거쳐 말을 걸어온 그 사건도 그랬다. 서러움을 다 담아내기엔 무거운 한 자 한 자, 눈물과 아마 한 바가지의 욕이라도 거들지 않고는 책장이 넘어가기 어렵다. 그 욕은 ‘그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읽는 내가, 이 사회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최소한의 양심의 크기를 마주친다. 아프고 흔들리는 만큼일 것이다. 마음에 돌덩어리와 그을음 같은 것을 안겨주는 말들의 무게,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견뎌내야 했을 시커먼 연기, 숯, 아니 재가 된 마음, 그 상처 자국의 시간이란.

어떤 사건, 겪은 당시에는 어떤 일인지 미처 파악도 안 될 정도의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어떤 일을, 단지 ‘모두 사실임’을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관심을 환기라도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같은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수많은 경우에 가르쳐가며 ‘구걸’하느라, 셀 수 없는 밤을 고민과 망설임, 싸움, 울음으로 새워야 한다.

어떤 경우는 그 일이 성폭력(2차 가해)이 맞는가 아닌가로, 성폭력(2차 가해)이라고 명백하게 규정된 이후에도 그것이 어떤 정도의 폭력인가, 어느 만큼의 사람들이 책임을 함께 져야 할 일인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일의 사실관계에서 피해생존자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가, 믿을 만한가를 가지고 수없이 싸워야 한다. 치유와 보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실인가 아닌가’ 시비에 걸려, 피해생존자는 자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끊임없이 이 무심하고 무례한 거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와 몸을, 수많은 날의 삶을 소진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재 이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척박한 현실에서 더 귀중한 피해생존자의 진실된 날것 그대로의 말하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거울 보듯 되물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고 아픔을 아프다고 말하는 자에게 물리는 재갈, ‘왕따’라는 처벌, 웃을 수도 울 수만도 없는 이 잔혹한 한 편의 현실 극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는 이 사건의 피해생존자가 아닌가? 또한 가해자가 아닌가? 과연 이로부터 진정 자유롭고 해방된 자는 누구인가? 우리 안의 어떤 것이 그 ‘유령’을, 말하지 못하는 족쇄를 만드나? 한국 운동사회는 속속들이 스며든 스스로의 가부장성을 보지 못하고 정작 살아 있는 목소리, 살려야 할 가치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빈 껍데기로 ‘운동’이니 ‘사회 진보’를 운운하지는 않는가?

아파서 몸부림치기, 함께 울고 감싸 안기… 싸움의 장, 운동이 시작되는 점은 바로 여기여야 하지 않을까?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에서부터 운동은 움트고 시작되어야 한다. 온갖 구호와 변명이 넘치는 세상, 겪은 일을 담담히 적은 피해생존자의 글은 고통을 말하는 글이지만, 피울음으로 얼룩진 그 글이 오히려, 가치를 버리고 ‘세’를 택하는 데 익숙해진 운동사회를 포함한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하고 맑은 물 같은 존재다.

사건 ‘처리’ 과정의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기록
―피해생존자의 글, 사건 처리 과정 평가, 지지모임 활동, 지지하는 목소리, 인터뷰, 사진 자료

각 조직에서 사건은 어떻게 일사천리로 ‘해결’(이라 쓰고 ‘처리’라고 읽는다)되었나? 성정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피해생존자를 포함한 지지모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 조직 내에서 저항하느라 고군분투했는가?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각기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접근하고 ‘처리’했으며, 그 둘은 어떻게 닮았나? 이 부조리는 어떤 식으로 반복되며 확대 재생되는가? 소수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묻히고, 힘을 가진 자는 어떻게 조직에서 밀어주는가? 어떤 쪽이 결국 ‘정의’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수 있는가?

 

 

이에 답하는 지지모임 사람들이 함께 쓴 평가들이, 피해생존자의 글 뒤로 이어진다. 그간의 활동을 기록한 집회나 공식 회의(대의원대회 등), 토론회, 문서 등 사진 자료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과 이야기로 다양하게 적어 보낸 ‘지지하는 목소리’, 현장에서의 생생한 인터뷰, 피해생존자가 직접 나서서 조합원들에게 호소한 글, <한겨레> 허재현 기자가 취재한 팟캐스트 방송 내용 등 사건의 진실을 모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을 골고루 담았다. 그 밖에도 이 책에 지면상 다 싣지 못한 기사 스크랩, 성명서 등 추가 자료는 지지모임 카페http://cafe.daum.net/anti-sv의 ‘자료 신청 게시판’에 신청하면 받아 볼 수 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공식 백서가 아니라
지지모임이 발로 뛰고 교육노동자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함께 만든 자발적인 책

이 책은 지지모임에서 지지와 후원을 모아 함께 쓰고 만들었다. 조직 내 공론화와 사건 해결의 일환으로 백서 작업을 결정하고 발간 지원을 요청했으나 조직이 지원을 거부한 탓이다(2013년 바뀐 전교조 집행부는 일부 지원을 약속했다). ‘여는 글’은 “집회에서 백서 발간 후원금을 모금할 때 앞자리를 차지한 정치인이나 핵심 간부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데 선뜻 일어나 호주머니를 털어 꾸깃꾸깃, 한 푼 두 푼 쥐여주신 나이 드신 청소노동자 분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살뜰한 후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피해생존자 동지가 그동안 받은 상처로 뼈를 깎는, 죽을 듯한 고통에서 일어나 이 자리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힌다. 피해생존자를 포함한 지지모임 사람들의 피해자 중심주의적 철학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은 책이 될 수 있었으나, 앞으로 남은 공론화와 사건 해결, 조직 내 성평등과 반성폭력 문화 확산이 중요하게 남은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

 

 

차 례

추천의 글  성폭력, 여성들의 투쟁, 그리고 ‘남성 중심적 진보’의 갈 길 | 허성우 
               이 책은 백서가 아니다 | 권김현영

여는 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1부 피해생존자, 나를 말한다

1장 잔설에 핀 노오란 복수꽃 ― 차갑고 따뜻했던 내 삶의 이야기 | 심촌

지지하는 목소리 ― 첫 번째 _ 조성웅 | 오창익 | 정상용 | 문임순 | 김인숙 | 김성보 | 전인애 | 재현

2부 ‘공동체’가 택한 것과 버린 것, 싸움으로 바꿔내기

1장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경과

2장 피해자 권리보다 우선한 조직 논리
― 민주노총의 사건 처리 과정 평가

3장 2차 가해 인정이 피해생존자 치유의 시작이다
― 전교조의 사건 처리 과정 평가, 첫 번째
* [참고 자료 1] <교육희망>에 실린 피해생존자의 글
* [참고 자료 2] 전교조‘ 성폭력 예방 및 처벌 규정’

4장 전교조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 전교조의 사건 처리 과정 평가, 두 번째

5장 피해생존자의 목소리와 함께한 지지와 연대
―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활동 평가
* [참고 자료 1] 지지모임 전교조 관련 활동
* [참고 자료 2] 지지모임 민주노총 관련 활동
* [참고 자료 3] 지지모임 전체 활동 일지

지지하는 목소리 ― 두 번째 _ 신은희 | 박덕준 | 조남규 | 김상정

3부 되풀이되는 부조리, 줄기찬 저항

1장 진보운동과 성평등, 함께 갈 수 있을까?
― 2012년 4·11 총선, 통합진보당 정진후 비례대표 후보 철회 투쟁 이야기
* [인터뷰] 칠월 | ○○○ | 조영원 | 이계삼 | 강민주
* [참고 자료] 통합진보당 정진후 비례대표 후보 철회 투쟁 경과

2장 반성 없는 운동사회가 다시 반성 없는 진보정치로 | 나영
― 정진후 사건을 반드시 되짚어야 하는 이유

지지하는 목소리 ― 세 번째 _ 오정희 | 봉화지회 운영위 | 백선영 | 곽이경

맺는 말  일방통행은 언제나 위험했다 ― 성찰 없는 사건 ‘처리’를 넘어서

지지하는 목소리 — 네 번째 _ 황미선 | 유현경 | 지원 | 조진희 | 이황현아 | 보짱

자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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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미국땅에서 ‘한.정.살림’의
통분 불/가능성을 묻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  James Newton Poling and HeeSun Kim

오늘날의 신학은 세계화된 세상속에서 차이와 다름에 대해, 다양성과 상이성에 대해서 열린 사고를 요청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신학들이 싹터 올랐다. 흑인신학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백인 페미니스트 신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흑인여성신학자들이 womanist theology를 이야기하고, 수 천년 동안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던 Queer 이론과 Queer theology도 밝은 광장에서 이제는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착민의 관점에서 서구 식민주의의 잔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 역시 이러한 대열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이는 서구 신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양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존 서구신학에 내재된 공허한 보편주의와 허위적 패권주의를 지적하고, 비어있는 그 곳에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하여 신학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동안 유행했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미국 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책이 출판되었다. James Poling과 김희선이 함께 쓴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이 그것이다. 이 책은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그로 인해 미국 목회상담계의 지평이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 집필되었다. 사실, ‘한, 정, 살림’은 미국학계에서 한국신학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한’은 민중신학의 핵심개념이고, ‘정’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쓴 Garrett의 Wonhee Anne Joh교수가, ‘살림’은 뉴욕 Union 신학교의 (정)현경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론신학의 영역에서 1세계 신학에 대한 저항담론으로 존재했던 ‘한. 정. 살림’이 종합되어 실천신학 파트인 목회상담에서 치유와 화해의 방법론으로 구체화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앞으로 미국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본서의 결론부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두 Chapter(6장은 폴링, 7장은 김희선 단독으로 씀)를 제외한 본문의 모든 내용들은 저자들이 마치 탁구 치듯이 서로의 입장과 앎의 지평을 교환하면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한 명은 진보 성향의 이미 유명하고 노련한 미국 백인 남성 신학자, 다른 저자는 목회상담과 포스트 콜로니얼 페미니즘을 전공하고 있는 신출내기 피가 끓는 젊은 한국 여성신학자이다. 이 둘이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런 우려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한국적 재료인 ‘한. 정. 살림’을 메인 테마로 가지고 오면서 불식되었다. 폴링 교수가 지닐 수 있는 한국적 소재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소박한 일반화의 우려는 김희선의 도움으로 극복되었고, 김희선이 갖고 있던 서구신학에 대한 날선 칼날은 폴링교수의 다독거림으로 다소나마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이 책에 ‘Dance of Han, Jeong, and Salim’라는 부제가 달렸다. 몇 해전,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Karen Baker Fletcher가 쓴 ‘Dancing with God’이라는 책을 출판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삼위일체교리를 Womanist관점에서 춤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풀어낸 작품인데, 기존의 정태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맞서 춤이 담고 있고 변화와 리듬, 율동과 조화를 새로운 삼위일체 해석학으로 제시했던 책이었다. Karen Baker Fletcher가 흑인여성신학의 관점이었다면, 이 책의 저자 폴링교수는 Constructive 입장에서,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포스트콜로니얼즘, 더 나아가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춤을 끌어 들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한, 정, 살림’을 함께 무대 위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Shall We Dance?” 

기본적으로 이 책은 미국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한. 정. 살림’과 이 책을 통해 전달될 미국사람이 알고 느끼게 될 ‘한. 정 .살림’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저자들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최대한 서로의 입장과 지식을 조율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이 어느 정도 미국 신학계에서 통분 가능할런지를 묻는다. 물론, 통약불가능한 부분도 눈에 띨 것이고, 양국간의 여러 차이로 인한 ‘한. 정. 살림’을 둘러싼 의미의 과잉과 차액과 잉여들도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문제점들의 등장이 이 책의 저자들이 노리는 진짜 속셈이 아닐런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미국 신학계 내에서 ‘한. 정. 살림’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역할도 물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 신학계를 향한 의미있는 도전이고 불편함이다. 


James Poling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미국 목회상담계를 대표하는 학자이고 작년에 Garrett에서 은퇴하였다. 폴링교수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던 목회상담의 영역을 사회적 구조와 폭력의 상관성으로 확대시켜 목회상담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별히 각 그룹별, 민족마다 지닌 독특한 역사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폭력과 희생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주체들이 어떻게 그 한들을 정의하고 풀어(치유해)나가는지에 관심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미국 목회상담계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 를 고민하는 창조적인 신학자이다.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Poling 교수의 제자로 현재 시카고 인근 에반스톤 위치한 Garrett에서 목회상담으로 박사과정 중이고 현재 논문만 남겨놓고 있는 Ph.D Candidate이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았고, 지금은 뉴욕 Union 신학교에 있는 (정)현경 교수 이화여대 재직시절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 미국 유학 전 명지전문대학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였다. 김희선은 목회상담 이외에 Postcolonial Feminist Theology를 부전공으로 택하고 있다. 시카고 신학교에 있는 Beyond Monotheism의 저자 Laurel Schneider 교수와 여성신학을, Heart of The Cross를 쓴 Garrett의 Anne Joh교수와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아마존 책 소개 링크  

http://www.amazon.com/gp/product/1608995844/ref=cm_sw_r_fa_alp_I-3mqb0BYSM5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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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노동』
- 고통과 노동의 창조적 존재론

지은이 : 안토니오 네그리
옮긴이 : 박영기
펴낸날 : 2011년 11월 25일
분  야 : 인문 비평
판   형 : 신국판
정  가 : 13,000원
펴낸곳 : 논밭출판사

책소개

1982년 네그리가 감옥에 수감되 있으면서 쓰기 시작한 <욥의 노동>은 고통의 존재론과 메시아 계보학을 통해서 낡은 척도를 부수고 탄생하는 새로운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은 고달픈 노동과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이 억울한 고통일 때가 너무도 많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욥’이 된다.

고달픈 노동과 육체적 고통으로 절규하는 민중들, 절규하는 메시아. 네그리는 이 책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이 기존의 척도나 권력에 맞설 때 그 힘potenza은 신적인 것[메시아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과 노동, 사랑과 연민을 통해 구성된 메시아적 주체는 역사를 생성으로 전화시키고, 세상을 재창조한다.

보통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력)의 상품화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노동을 ‘타자를 위한 사용가치로서 육체적 활동의 대여’라고 개념 정의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의 상품화는 노동에 있어서 자율(자유)과 창조성, 연대성을 억압하고, 고달픔과 고통만을 증폭시킨다. 이런 생산의 지옥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해방의 길을 찾을 것인가?

네그리는 그 통로가 고통의 경험을 통한 주체화(메시아적 주체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모델이 바로 욥이다. 네그리에게 욥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 기존의 척도(변신론, 변증법)를 고발하고, 마침내는 척도에 대한 새로운 정초를 세우는 메시아의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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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몰락』

지은이 : 서보명
펴낸날 : 2011년 1월 31일
분  야 : 인문 / 교육
판  형 : 신국판 변형
페이지 : 264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 한겨레 신문 서평 보러 가기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대학,
어디에 존재하는가?

‘경계에 선 지식인’인 재미교포(1.5세대) 교수가 쓴 대학의 ‘철학사’이며, 자본에 함몰된 대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최근 지식의 위기와 대학의 몰락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 위기의 요체는 ‘대학의 자본화’에 있다. 대학이 자본과 지식의 중개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한국인이자 미국인으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경계에 선 지식인인 저자는 한국의 대학에서 방문교수 체험을 한 뒤에 이 시대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반향 없는 물음들이 솟아나왔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대학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현대의 대학들이 ‘경계선 위의 지식’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본에 함몰되어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미친 마차와 같다고 느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육공학의 전문적인 지식을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교육학의 이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원론으로 돌아가 자본에 함몰된 대학을 목도하고 우리 시대에 대학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물음은 우리 사회가 경쟁과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경쟁 사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물건 같은 ‘생산성 높은 학생’들을 만들어내면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라고 치부한 것들이다. 고갱이가 빠져나간 대학의 존재 이유를 다시 들추는 물음이기에, 이 시대가 외면하는 질문이기에, 저자 자신 또한 현실성 없는 물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본에, 체제에 종속된 대학의 자화상을 다시 원점에서 그리지 않으면, 대학의 역사가 현실과 대학의 미래가 없다는 저자의 진단은 ‘미래의 대학’을 꿈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 철학자의 아픈 반성이며, 시대가 함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협곡의 단층을 보여주듯 대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술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잃어버린 대학의 위상을 다시 찾는다.

취직도 어려운 마당에
구태의연한 고민을 해야 하나?

“대학이 현실, 그것도 체제를 섬기는 하부조직으로 전락했을 때, 대학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대학이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주장하는 자율을 밥그릇 싸움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이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을 대학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대학이 현재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그런 가능성이 없을 때, 대학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이런 물음들은 시대에 이미 뒤떨어진 물음들이 됐다. 대학이 취업을 위해 이력서 한 줄 메울 수 있게 하는 곳으로 변질하고, 공부는 토플, 토익 점수를 높이거나 공무원 시험 예상문제 풀이하는 것으로 전락한 실정이기에. 그렇게 우리 시대는 대학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을 예전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드디어 대학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졌다. ‘김예슬 선언’이라 불리는 한 대학생의 <대학자퇴서>가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한편 그 붕괴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고 대학은 내부에서 자본화가 완결된 상태였다. 그것이 곪아 터진 것일 뿐,  과거에 시대와, 체제와 거리를 유지하며 찾았던 대학의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상황. 저자는 대학과 공부의 고갱이가 다 빠져나가는 위기 상황을 진단한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다.
“대학은 신학과 철학이 부여하는 이상에 의해 유지되어왔으며, 대학의 이상향으로 삼은 것은 한 시대, 그 문화권의 선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생산과 소비와 경쟁이라는 이념을 따라 대학이 움직이기를 요구한다. 학문의 이상은 인간에게 초월적인 숭고함이나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하지만, 자본주의 이념은 철저하게 물신주의의 이윤과 소비의 행위만 앞세우게 한다. 이와 같은 시대성에 함몰된 대학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대학의 학문과 제도를 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판매의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오래된 대학의 자의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필수이다. 철학 교수인 저자는 대학을 개혁할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앞세우기 이전에, 과거의 대학이란 어떤 곳이었고, 현재의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질문을 과거에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논의했다면, 과연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본질과 사명은 무엇인지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시대가 잃어버린 대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낡은 질문으로 보이지만 황량한 몰락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비상구이기에 절체절명의 물음인 것이다.

쓸데없는 공부,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은
꿈일 수밖에 없는가?

현재의 실상을 떠난 대학의 미래는 없다. 현재의 모습이 대학이 몰락하는 과정이라면, 대학의 미래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암울하다. 소위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대학들은 앞으로도 기업자본주의의 한 축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백화점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대학이 성찰과 비판의 공간으로, 지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의 덕목으로 인간을 형성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명을 더 이상 수행할 의지가 없는 대학을 ‘대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 시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이상을 잃지 않은 대학, 비현실적인 대학이다. 이 시대에 그런 대학을 생각한다는 것조차 “꿈꾸고 있네!”로 치부된다. 그 ‘꿈꾸고 있네’의 대학은 이렇다. 기업 정신을 멀리하는 대학, 건물 건축을 성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대학,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을 대학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학, 학생들의 지적인 성장과 인격 형성을 제일 중요하게 치는 대학, 수치와 소문을 통계 내어 대학 줄 세우기(서열화) 행태를 거부하는 대학, 사실과 가치만을 말하지 않고 진리도 생각하려는 의지가 있는 대학. 즉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시대의 이단이 될 의지가 있는 대학이다. 아마 그런 대학은 없다. 하지만 없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의 이상에 대해 시장이 된 대학 밖의 대학을 꿈꾸며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인간이나 이상이나 진리와 같은 한가한 주제들〉이 중요하다고 인식되려면,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학의 이상이 지켜나갈 대학이 있다면 그것은 대학 밖의 대학일지도 모른다(260쪽).” “배움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시대를 직시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은 시장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아고라’일 것이며,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이 존재하는 곳이리라(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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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1.02.26 07:1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연구소에서 기획한 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얼마전 시카고로 배달된 책을 교수님으로부터 한 권 받아 읽었습니다. 오래간만에 한국말 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으니 좋네요. 서보명 교수의 신간 <대학의 몰락>은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대학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직업연수원(혹은 직업소개소)로 전락해가는 대학의 현주소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구사회에서 발전되어 왔던 대학의 역사를 마치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듯 생생히 전해줌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는 미국대학의 변천과 한국대학의 타락을 맞물려 보여주면서 신자유주의가 지닌 파괴적 본성을 폭로합니다. 서교수는 이 책에서 단순히 대학이 몰락했다고 선언하지도 또 그것에 대해 탄식하지도 않습니다. 그 보다는 마치 협곡을 지나듯 서구 대학의 역사를 굽이쳐 가면서 오늘의 대학을 진단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혹은 대항하며) 올바른 대학을 구현하려 했던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 앞으로의 대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현재의 대학이 지닌 문제들을 다시 새롬게 발견할 수 있고, 아울러 '대학의 몰락'을, 아니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전개되는 삶의 몰락을 처방할 해법을 조심스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후 붕괴 시대, 아주 불편한 진실 조금 불편한 삶』

엮은이 : 한국교회환경연구소
펴낸날 : 2010년 12월 13일
분  야 : 인문 / 종교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440쪽
정  가 : 16,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기후 붕괴 시대 원년을 사는 청지기들의 대안

이제 기후 변화 시대를 지나 기후 붕괴 원년을 맞은 우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 재앙은 강 건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오늘의 뉴스’로 보며 그 폐해를 몸으로 느끼는 절박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미온적이고, 때로 그에 대한 대비도 사실 막막하기만 하다. 너무 커다란 변화에 대해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그저 무감각해지는 것으로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넘길 뿐이다. 허나 우유부단하고 임시변통적이며 뒤로 미루기가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럴 때 지구 위기의 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시대의 징조를’ 읽고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것’이 청지기들의 역할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여 시대의 징조를 말한다.

이 책은 기후 붕괴 시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실질적 대안을 함께 엮었다. 한국교회환경연구소는 지난 몇 년 동안 기후 변화 문제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이슈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성찰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단지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하여금 그 문제를 인식하고 실천하기를 위한 구체적인 묵상, 성경공부, 설교 등의 실천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즉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나와 우리의 사회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와 먹을거리 그리고 상품 소비 등이 어떻게 기후 변화와 직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온실가스를 줄이는 생태적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기후 변화는 신학적 문제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날씨 변화에만 관심을 쏟을 뿐,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성장 지상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무한 탐욕주의 사회체계를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상황은 절망스럽다.

여성생태신학자 샐리 맥페이그의 말을 빌리면 “기후 변화는 신학적 문제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이 공통의 관심사인 기후 붕괴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신학적인 성찰을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인간 중심주의에 길들여진 기독교의 폐해를 본질에서 파헤친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널리 번성하라고 하신 말의 뜻을, 인간 종種만이 지구를 자기 소유인 양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돌보는 청지기 역할을 맡기신 것이다. 허나 이즈음까지의 그리스도인들은 청지기가 아니라, 성장 지상과 물질 만능이라는 사회구조를 더욱 가속했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의 가슴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근세사를 비견하면 근대화가 산업화의 동일어로 여겨지듯이 서구화와 기독교화 또한 동일어로 여길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물질 만능과 인간 중심의 사상의 책임을 회개해야 한다. 여기가 기후 붕괴 시대와 그리스도교 신학적 성찰이 만나는 지점이다.

기후 붕괴의 문제를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지식과 기술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인식과 태도 그리고 실천의 문제이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접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의 의식을 전환해서 신생대에서 ‘생태대Ecozico’로 넘어서지 않으면, 이 시대에 희망이 없다는 시대의 사명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노아의 방주를 만들 듯이,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인 몸실천이 없다면 기후 붕괴 시대를 넘길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 불편한 삶으로 온 생명과 더불어 살기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희망일까? 만약 그것이 진정한 희망이라면 거기로 가는 구체적인 길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요엘 2:12-13)

이 책은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청지기 책임을 맡은 우리가 화석연료에 기댄 문명에 서 있는데, 이 문명이 과연 축복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성장만이 살 길이라며, 모든 것을 경제적 효율성으로 평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돌이켜야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파괴하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품고 있는 우리의 친구요 형제자매로 느끼며, 우리 모두가 생명의 끈으로 엮여 있음을 깨닫고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전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마음을 찢는 회개라고 한다.

눈앞에 다가오는 지구적 규모의 근본적인 기후 변화를 겪으면서 인류는 생존의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고 한다. 앞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이 닥쳐온다면 재난이 초래하는 위협 그 자체보다 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새로운 인간성을 획득한다면 기후 변화가 몰고올 고통스러운 시험을 통과하고 한 단계 도약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만일 재난을 겪고 있는 인류 공동체가 서로 돕고 나누며 극복하려 한다면 비록 많은 손실은 있겠지만 인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뒤에 보여준 무지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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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 서용문 목사 순교 60주년 추모문집

지은이 : 서광선 서인선 서철선 서만선 홍경만
펴낸날 : 2010년 10월 23일
분  야 : 에세이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48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7-2 03200


주요검색어 : 순교자/아버지/박해와 순교/추모 에세이/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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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한국을 염원하며

올해는 6・25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 당한 기독교인들의 순교 60주년이기도 하다. 고 서용문 목사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탄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건너갔고, 그후 해방을 맞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북한공산당에 맞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다가 남한과 UN군의 평양 수복 때 후퇴하는 북한군에 의해 총살로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아버님의 순교 60주년을 맞아 슬하의 5남매 중 남한에 피난 온 4남매가 추모문집을 엮었다. 유족을 대표한 맏아들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아버지의 순교 60주년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 되고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는 날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전쟁을 치룬 세대는 평화통일의 날을 맞이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대동강을 넘어 한강에 와서 60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통일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가 건너지 못한 요단강 강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 책 제목을 [대동강 건너, 요단강을 바라보며]라고 붙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반공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세대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펴 낸 것이다. 그래서 서광선 박사는 머리말에 “이 책을 요단강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 한국을 바라보며 이를 위해서 노심초사 통일 운동과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사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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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두 진리』
-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

지은이 :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옮긴이 : 김희헌
펴낸날 : 2010년 12월 9일
분  야 : 인문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64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8-9 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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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이 책은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지은이의 책이다.

근대 이후 그 골은 더욱 깊어져,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서 때때로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그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온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 또는 그것이 정당하게 전제해 온 형태의 자연주의와 기독교 복음이 지닌 본래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 온 기독교 신앙 이 둘 사이에 본래적인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유신론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적대적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리핀은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그리핀은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전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져 가던 18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신학 방법론이 열정의 진실함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해명의 깊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만일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Naturalismsam)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도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기독교 신학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라고 하겠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으로, 독립의 순수만으로,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이안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들은 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어가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될 것이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될 것이며,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서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갈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primary doctrine”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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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지은이 : 하비 콕스
옮긴이 : 김창락
펴낸날 : 2010년 8월 25일
페이지 : 349쪽
정  가 : 17,000원
펴낸곳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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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988년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힌 하비 콕스 교수가 그간 자신의 종교 인생을 집대성하는 의미로 펴냈다. <종교의 미래>는 21세기 종교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답을 예수의 시대와 제3세계에서 새롭게 발흥하는 종교적인 실천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예수로부터 시작한 기독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교조화 되었는지, 미국 근본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해방신학과 평신도 종교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개괄할 수 있다. 특히 하비 콕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하늘에 존재하는 천국을 말하는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의 삶에 기반 한 새로운 기독교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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