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세번째[각주:1]


선교의 ‘웰빙-우파화’, 가능성과 한계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공격적 해외선교’에 대한 낭만주의, 그 끝자락


    1990년대 한국교회는 해외선교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한국개신교의 교세가 급작하게 꺾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해 우연히 발견된 ‘해외’라는 상상력은 역성장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출구로서 선택되었다. 그간 해외선교는 선교전문기관들이 교회와 불화하며 외롭게 이어가고 있었고, 교회는 거의 무관심했었다. 교단 선교국이 국제 기독교네트워크와 연대하여 극소수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한국교회가 수행했던 해외선교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국선교연구원의 한국개신교의 세계선교 현황 자료(2003).  이 통계에는 개별 교회의 선교사는 빠졌다한데 2천 년대에 오면 개별 교회 파송 선교사의 수가 적지 아니 늘었다


   그런데 1990년대는 사정이 달라졌다. 수많은 개별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고, 선교전문기관 파송 선교사에게도 교회들의 후원이 답지했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증가추세는 2천 년대까지 이어져, 2006년 세계 선교사 파송 순위가 미국 다음인 2위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007년 이후 증가율이 현저히 줄기 시작했고, 2012년 이후 감소 추세에 있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의 성장 정체를 세계로 향한 팽창주의로 만회하려는 성장지상주의가 점점 교회에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겠다. 피선교국이던 한국이 세계적인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는 자긍심은, 한국 내에서 지탄을 받았던 공격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선교방식이 피선교지역 주민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의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었다. 2004년 김선일 사건이나 2007년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피랍사건을 계기로 해외선교라는 낭만적 자부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언어능력과 독서능력이 뛰어난, 게다가 비판적이기까지 한 주권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적 해외선교에 얽힌 문제점들을 인지하게 되었다. 여전히 선교전문기구들과 여러 목사들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열렬히 부르짖었고, ‘미전도종족 입양’이라는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공격적 선교의 새로운 아젠다를 내걸었지만, 이제 해외선교라는 의제 자체만으로 교회 신자들을 동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호/개발 선교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 배낭여행 붐을 일으켰던 한비야 씨가 기독교계의 세계 최대 구호・개발 NGO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공격적 해외선교의 로망이 무너진 자리에 한비야 씨를 통해 전해진 새로운 해외선교의 가능성이 쑤욱 끼어들어왔다. 1950년 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원조의 대상이었던 한국이 이제 원조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더구나 정부의 해외원조업무의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구호・개발 NGO로 활동하는 한국 단체 가운데 기독교계 단체가 40% 이상이나 되고, 활동력이나 영향력 등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구호・개발 NGO들의 예산 총액은 국내 최대의 모금・배분기구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예산총액의 4.3배에 달하는데, 이는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들의 예산 총액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2~3배쯤 될 것임을 시사한다. 나아가 이 규모는 전 세계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 가운데서도 최대 수준이었다. 선교사 파송 순위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나 장한 일로 통할 것이겠지만, 해외원조 분야에서 최고라는 건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 우쭐해도 될 것이었다.

    이 구호・개발 차원의 선교는 공격적 선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선교 항목으로 떠올랐다.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에 기반을 둔 나눔을 실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눔의 대상에 대해서도 그들의 신념에 상처를 주지 않고 나아가 그들 자신의 자생력을 북돋고 그 인프라를 구축해주는 방식의 선교다. 확실히 구호・개발적 선교는 공격적 선교보다 진화한 것이었다. 적어도 주권교인들은 그렇게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교회의 자기 충족적 비용을 위해 자신들의 기부가 다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가치 있는 영역들로 나누어 기부를 실행했다. 

   하여 떠돌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대형교회가 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구호・개발 차원의 선교를 교회 활동의 하나로 수용하는 데 있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개별 교회가 모든 걸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원조가 필요한 사회를 찾아내고 그 사회에서 책임 있는 파트너를 찾아 그들에게 전달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수집・분석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구호・개발 전략을 기획할 수 있는 단체여야 한다. 또한 이런 활동은 개별 교회의 기부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많은 기부자들로부터 굉장히 큰 원조금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여 개별 교회는 전문적인 구호・개발 NGO와 연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과 캠페인을 통해서 주권교인들을 교회 활동에 동원하려 했다.

    동시에 이런 프로그램과 기획들을 통해 교회는 자교회 청년들에게 구호・개발 분야의 취업 기회(기독교계 구호・개발 NGO의 직원수가 1만 명이 넘는다)를, 그리고 해외유학을 원하는 청소년에게 대학입시를 위한 봉사활동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구호・개발 선교 프로젝트는 공공적 가치와 사적 이해가 ‘잘 결합된’, 가치 소비 시대에 걸맞는 종교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행의 전 지구적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과시적 성과주의보다는 그 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한 소비가 주권교인들의 신앙태도로 형성되는 데 구호・개발형 선교는 한몫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웰빙우파스러운’ 선교였다.


아동결연 선교


    이러한 구호・개발 선교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은 대중의 참여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동결연 사업이다. 가난한 제3세계 아동 1인에게 매월 3만 원 정도를 후원한다는 것인데,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활동으로 유명해진 한국컨패션(Compassion Korea)을 포함하여 240여 개 단체에 무려 600만 명에 달하는 기부자가 참여하여 전 세계에서 67만 명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이중 개신교 단체와 기부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에는 무려 30명의 제3세계 아동과 결연을 맺었다는 차인표・신애라 부부뿐 아니라, 105명과 결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정애리, 무려 2백여 명이나 된다는 션・정혜영 부부 등, 공격적 선교를 지양하고자 하는 많은 유명 개신교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대형교회들이 아동결연 캠패인을 벌이고 있는데, 분당우리교회는 3000명의 제3세계 아동과 1:1 결연을 맺기로 한국컴패션과 약정을 맺었다.

    이러한 아동결연을 매칭하는 NGO들은 주기적으로 후원아동의 성장을 체크하여 후원자에게 공지해주고, 때로는 서신교환 및 만남을 주선하며, 나아가 후원아동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해당 지역사회의 개발에도 관여하고 이를 후원자에게 알려 준다.


한국컨패션이 후원하는 필리핀 아동들과 이 단체의 홍보대사 신애라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는 제3세계 아동 3000명과 1:1 결연 계약을 한국컨패션과 맺었다.



    이러한 사업은 후원의 일회성과 익명성을 지양하고, 개인후원과 사회개발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른 것들보다 한층 진일보한 선교다. 또한 적은 기부금액으로도 기부효과가 작지 않다는 상각에 이르게 함으로써 대중성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프로젝트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강남과 분당 지역의 대형교회들이다. 주권교인들의 기호에 대한 맞춤형 선교의 압박이 더 컸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공적 가치를 소비하게 한다는 점에서 웰빙적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진공포장'된 선교


    그러나 이러한 구호・개발형 선교는 너무 ‘진공포장’되었다. 현지의 고통에서 철저히 차단된 사치스런 선교다. 그럼에도 구호・개발 선교기구들과 교회는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기부자에게 최고의 립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동결연자에게 ‘입양자’라는 칭호를 주고, 후원자의 현지방문을 ‘단기선교’로 명명하곤 했다. 가벼운 참여를 ‘부모 되기’ 혹은 ‘선교사 되기’와 연결시키는 과장된 자의식과 결합된 주체는, 현지에서 벌어지는 난감하고 불편한 진실로부터 그들이 차단되었을 때만 그 ‘자뻑’형 착시를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구호・개발 사업을 벌이는 NGO들은 현지에서 종교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재정의 15% 가까운 지원을 받았다. 이 정부지원금이 이들 단체들의 운영기금으로 활용됨으로써 참여자들의 기부금 거의 전액이 현지에 전달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점점 기독교계 구호・개발 NGO들의 종교색이 노골화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교회들의 후원금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권교인들의 바람을 수용하여 구호・개발 선교에 끼어든 교회들은 구호・개발 선교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치열하게 하지 않았다. 단지 교인들의 바람을 교회에서 흡수하기 위한 전략에만 몰두했다. 이것은 동시에 주권교인들의 ‘자뻑형 착시’가 일으키는 주체 효과와 상응관계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권교인들은 ‘먼 곳’의 수혜자를 타자화함으로써 현장의 복잡한 고민에서 거리를 둔 ‘깨끗한 선교’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진리의 수행자로서의 자의식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현지의 복잡한 정보를 단절시킨 ‘진공포장된 선교’를 만드는 구조적 요인의 하나였다.

    아동결연 사업도 그 사회의 성장 인프라 구축이라는 사회구조적 요소를 포함한 선교기획이지만, 사회구조의 문제는 개별 구호・개발 NGO가 담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축적된 연구와 활동의 기반을 갖고 있는 기독교계 국제네트워크들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들과 협의하고 연대하며, 현지 시민사회 및 정치 단체와도 공조하며 진행해야 할 것이었다. 이런 거시적인 협의와 연대 없이 진행되는 사회 인프라 구축 기획은 성공하기 쉽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아동결연 사업 참여자는 그 아동이 겪을 혼란과 갈등에 얽히지 않은 채 자신의 안전한 기부가 성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들이 원한 것은 시시콜콜한 현지 사정이 아니라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여 웰빙-우파적 주권교인들의 ‘깨끗한 선교’ 욕구는 선교 현지의 사회적 복잡함에 대한 외면과 은폐를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격적 선교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타자화’에 다름 아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 1199호(2016 11 01)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3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6100416403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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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3]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맹세의 쇠퇴, 거짓말의 전성시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알바생을 대상으로 거짓말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알바생들이 1위로 꼽은 사장님의 거짓말은 “일 잘하면 월급 올려줄게.”(28.1%), 알바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32.0%)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1]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연인 사이 거짓말’도 있다. 국내 한 결혼정보업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는 “이제 집에 간다.”(44.3%), 여자는 “화 안 났다”(39.2%)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각주:2]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거짓말과는 달리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짓말도 있다. 타인의 삶을 위기와 파멸로 몰아넣는 거짓말이다. 선거철 공약(公約)은 결국 ‘공약’(空約)에 불과하다는 반복 학습의 결과 정치권의 말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의 말로 인식되고 있다.[각주:3] 또한 비리를 일삼는 이른바 ‘지도층’의 말을 감싸고도는 듯 보이는 형사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법원과 검찰, 경찰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낙제점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각주:4] 여기에 종교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말은 구태여 보태지 않겠다. 믿을 말이 없다. 바야흐로 거짓말의 전성시대다.  


    아감벤(G. Agamben)은 그의 책『언어의 성사(聖事)』에서 우리시대를 ‘맹세의 쇠퇴기’로 명명한다.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던 맹세가 쇠퇴한 이 시대를 아감벤은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 있”[각주:5]는 위기의 시대로 진단한다. 맹세가 사라지는 한편에는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the living being)의 들리지 않는 말이, 다른 한편에는 책임을 벗어던진 ‘말하는 존재자’(the speaking being)의 공허한 말이 메아리친다. 자기 말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오직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하는 존재자’의 시대를 떠도는 말은 ‘그냥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해야 돼서 하는 말’, 즉 빈말이다.


    신앙(신학)의 문제는 빈말이 지배하는 맹세의 쇠퇴기가 ‘독신의 시대’(the age of blasphemy)라는 데에 있다. 아감벤은 “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각주:6], 즉 신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대고 쌍욕을 해대는 사람보다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사람이 ‘시원적 형태의 독신’에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오늘날 교회 안의 얼마나 많은 말들이 맥락으로부터, 혹은 말의 사태로부터 분리된 채 허투루 불리고 있는가? 말과 사태와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충실한 맹세의 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 말이라야 언어는 성사(聖事)가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이렇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니, 딱하다고 해야 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의미화의 연관으로부터 풀려난 신의 이름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 곧 독신이 되며, 바로 이렇게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와 부적절하고 사악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각주:7]이라는 아감벤의 일침은 전문가로서의 목사 혹은 직업으로서의 신학자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말함과 피함 사이


    빈말, 특히 남을 해할 목적으로 한 거짓말의 병폐를 보여주는 성서의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포도원’(「열왕기상」 21:1-19) 이야기 일 것이다. 농민 대중의 몰락을 억제하고 그들의 지위 복원에 정치적 관심을 기울였던 요시야 개혁세력의 관점을 반영하는 문서인 「열왕기상」에 실린 이 이야기는 법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김진호)를 시도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문제, 특히 ‘말’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해석적 개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동안 스스로를 ‘말’의 주체로 여겨 온 왕과 귀족과 사제세력의 모순과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대중을 말의 주체이자 통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그들 개혁세력의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망한 북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요시야 개혁세력의 문헌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나봇의 토지에 대한 강탈은 ‘거짓 증언’을 매개로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아합이 나봇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문제해결사로 나서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이런 ‘지령’이 담겨 있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시오.” ―「열왕기상」 21:9-10


    이세벨의 계략은 성공했고, 나봇은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아합은 포도원을 거저 얻었다. 무고한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일로 ‘이세벨’(Jezebel)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서양문화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한 고발은 타종교인, 여성,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성서적’ 근거로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성인 이세벨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가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봇의 이야기는 말의 주체로 여겨져 온 이들의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농민대중을 ‘말’과 ‘법’(통치)의 새로운 주체로 호명해 내기 위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놓인 정치적 우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이세벨은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게 아닌가? 절대 주권자인 왕의 아내이자 종교‧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왕의 아내로서의 ‘마땅한’ 권한행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실익(實益)을 양보해야 할 어떤 명분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세벨의 정의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세벨이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것이라면 나봇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행했고, 나봇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법의 말과 '아마도'의 정의


    빈말, 혹은 거짓말에 둘러싸인 진실을 헤쳐 정의에 이르는 길이 험난한 까닭은 그 ‘말’이 ‘거짓’임을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준, 혹은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 We Live By)에서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nson)은 언어학과 철학에서 주류로 여겨져 온 ‘객관주의’(objectivism)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은유’(metaphor)를 새로운 사고와 행위의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각주:8]이었다는 그들의 반성은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현실의 단면에 대한 어떤 숙고를 요청한다.


    법의 통한 대중의 주체화를 모색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꿈’과는 달리 현실에서 법(의 말)과 정의(의 말)의 관계는 어느 한 편의 손을 온전히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그리 단순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법과 정의의 관계는 모호하다. 적어도 그것이 펼쳐진 삶의 관계성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러하다.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J. Derrida)는 “법은 정의가 아니”[각주:9]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각주:10]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각주:11] 한단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난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되는 정의는 결국 통치자의 독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중을 법의 주체로 호명해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실패는 법, 혹은 법의 말을 통한 대중 주체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빈말, 혹은 거짓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마도’의 정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드러난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진실에 둘러싸여 있다. 면(面) 위에 찍힌 점 하나가 공허(空虛)에 둘러싸여 있듯 겉으로 드러난 한 점의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는 막막한 진실의 표면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나봇’, 즉 억울한 죽음을 향해 내몰린 이들에 대한 편파적 옹호는 신학의 마땅한 지향점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의 화신인 저 ‘이세벨’의 말을 향해서도 ‘아마도’의 정의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 이미 형성된 ‘올바름’의 잣대로 참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 채 무책임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 부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난과 옹호 사이로 난 작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거기에서 ‘올바름’의 내용을 구성하는 지난한 길에 나서야 한다. 정의는 법치의 철폐도, 그것의 실현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아마도’의 가능성에 머문다. 그래서 정의는 오직 목숨을 건 ‘맹세’가 아니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맹세의 쇠퇴기에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김기석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제9계명의 의미를 ‘참된 말을 하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한다.[각주:12]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법의 말’을 통해 대중을 변혁의 주체로 호명해 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이상은 우리 시대에 완수되어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들, 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 제 할 말을 하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신중함과 어리석게 옹호하지 않는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법의 말’을 넘어 참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보호를 위해 세워둔 확실성의 옹벽을 철거하고, 타자의 말(증언)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법의 말’을 넘어서 참말이 도달해야 할 곳은 나와 타자의 삶이 놓인 바로 그곳,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이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 글은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가제)에 실린 원고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경향신문, 「사장님 거짓말 2위 “가족 같은 분위기” 1위는?」, 2015. 4. 1. [본문으로]
  2. 한국일보, 「미혼남녀 10명 중 9명, 연인에게 거짓말 경험」, 2015. 12. 9. [본문으로]
  3. 한국일보, 「특임장관실 국민 여론조사 65%가 “사회 지도층 불신한다”」, 2011. 5. 5. [본문으로]
  4. 법률신문, 「법원·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 경찰보다 낮다」, 2016. 3. 7.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언어의 성사: 맹세의 고고학』,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45쪽. [본문으로]
  6. 앞의 책, 89쪽. [본문으로]
  7.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8. G. 레이코프 ‧ 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수정판), 노양진 ‧ 나익주 옮김, 박이정, 2006, 270쪽. [본문으로]
  9.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37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37쪽. [본문으로]
  11. 앞의 책, 59쪽. [본문으로]
  12. 김기석,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2015, 2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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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이후 선교는 가능한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가련하고 빈궁한 사람들이 물을 찾지 못하여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탈 때에, 나 주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 「이사야서」 41장 17절


지난 3월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고로 1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20년 동안 방사능오염으로 사망한 20만 명의 다섯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그 방사능 유출의 양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방사능보다 무려 168배나 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13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시사하는 하나의 전조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 같은 재앙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파괴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대규모 전쟁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욱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2011년 3월 11일 이후 후쿠시마는 ‘문명발전의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후쿠시마 이후’는 인류의 발전지상주의적 문명에 대한 성찰의 절대적 요청에 직면한 시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이후’에 대하여 더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반핵 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지금은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날 때까지 원전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하여 거의 알지도, 문제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사고가 나고서야 히로세 다카시가 말한 것과 같은 정보가 비공개되고 있다는 걸 문제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보의 독점이 시민사회가 위험을 감지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원전은 하나의 신화처럼 일본 시민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관리국가이고, 따라서 원전은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원전으로 말미암아 일본 같은 초일류국가의 발전은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모한 확신은 정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된 정보로 말미암아 시민사회가 원전의 위기에 대해 무지함으로써 지탱된 것이었음이 사고 이후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충동질하는 발전지상주의 체제에 자신의 욕망을 함께 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회의 종말이 ‘후쿠시마 이후’가 시사하는 성찰의 내용인 것입니다.

한데 한국사회 또한 이점에서 일본사회와 쌍생아적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전두환 정부는 미국과 신규원전 건설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은 그 해에 있었던 전 세계의 유일한 원전 수주계약이었습니다. 또 올해 3월 후쿠시마 사건이 발발할 즈음, 대통령 이명박은 아랍에미레이트와 맺은 원전 수출 기공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원전은 발전을 상징했고, 실제로 한국사회가 이룩한 성공은 원전이 제공한 전기 능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원전 의존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시민들도 일본의 시민만큼이나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원전에 관한 정보는 국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회는 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입니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보다는 국가적 발전주의가 시민이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밑그림을 이루는 사회인 것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를 휩쓸었던 1990년대에 이르면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가 이러한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를 추구하지만, 특히 일본과 한국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도 그런 지향성의 사회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발전 지상주의는 국가와 기술엘리트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화되었습니다. 기술엘리트는 이른바 과학적 맹신주의를 퍼뜨리는 주역이었고, 국가는 이러한 기술엘리트의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안전의 신화를 성공주의와 결합시켜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하여 시민은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는 기술문명의 요소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키워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신화가 후쿠시마로 인해 여지없이 붕괴된 것입니다. 

한데 저는 ‘후쿠시마 이후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사회에 관하여 제기한 논점입니다. 왜냐면 알다시피 발전 지상주의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과 교회의 고도성장은 시기와 양상을 같이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의 성장지체와 교회의 선교 위기도 서로 겹쳐 있습니다. 요컨대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서로 엮여 있습니다. 이것은 발전지상주의를 극복하려는 모든 개혁적 시도에 발목잡고 있는 주된 사회적 세력의 하나가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우리사회에서 교회는 성공에 미친 사회를 추동하는 역사적 세력임에 분명합니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가 ‘부채 의존형 사회’의 위기에 빠져버린 것도 발전지상주의 정책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정부와 서울시의 발전지상주의 정책은 과도한 토건주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부동산 거품으로 만들어진 발전/성공의 신화를 공모하는 사회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체제가 위기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나락으로 먼저 떨어진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고, 점차로 전 국민이 함께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제를 충동질했던 이들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떨어지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토건주의적 발전지상주의에 교회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는 뻥튀기된 욕망을 교회건축을 통해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그런데 과도한 교회건축은 전 교인을 이 과도한 교회건축에 총동원해야만 가능한 사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앙은 끊임없이 발전지상주의를 정당화하면서 제도화됩니다. 즉 한국교회의 신앙체계는 발전지상주의를 체현한 신자들을 양산합니다. 즉, 발전지상주의에 익숙한 신자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발전지상주의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시민-성도, 발전지상주의를 욕망함으로써 신앙과 세속의 성공을 함께 누리는 자들을 양산하는 장치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여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가장 발전지상주의에 열렬한 광신자들의 온상입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또 교인이 되는 과정은 그런 이들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교회담론 속의 권력의 구조도 한몫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담론에서 하느님과 성도는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성도를 구원하고 축복하는 신은 성도에게 그러한 구원의 말을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계자들을 통해 합니다. 그것은 그 중계자들이 신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정보를 독점하고, 이러한 정보 망각상태에서 이뤄지는 시민의 거품 욕망의 체계가 한국과 전 세계의 발전지상주의의 담론 구조인 것과 유사한 형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지상주의는 엄청난 재앙을 낳았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계기적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우리 시대에 시민의 성찰은 ‘후쿠시마 이후’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찰을 가로막는 주요 장소인 것입니다. 하여 교회는 오늘날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인습, 낡은 욕구의 체계가 잔존하는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교회는 선교 대신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성장지상주의의 키워드가 들어 있는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하며 후쿠시마 이후를 성찰한 새로운 모색들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첫걸음은 성장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작은 교회’의 추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사회 속의 작고 빈궁한 자의 축복을 위한 신앙과 교회의 모색에 있다고 봅니다. 후쿠시마 이후의 선교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텍스트는 그러한 신앙의 한 전거입니다. 발전지상주의를 추구했던 다윗왕조의 신학은 국가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다윗왕조만이 신의 축복을 백성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국가신학이 낳은 재앙입니다. 한데 식민지 시대 유배지에서 과거 다윗왕조의 신학을 위해 성전에서 일했던 일단의 사제와 하급성직자들이 새로운 개혁의 구호를 외칩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 텍스트에 담겨 있습니다. 신은 다윗계 왕의 기도에 응답하는 이가 아니라, 가련하고 빈궁한 이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의 시대에 개혁은 바로 이와 같이 국가의 성공을 추구하는 신학이 아니라 작은 자들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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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네번째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
- 잃은 사람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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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교회의 사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지속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이고, 이들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기선교”라 이름 붙인 한국교회의 선교 풍조는 외국에 가서 적당히 관광을 즐기면서 형식적인 전도를 하는 것이거나 배타적 신앙관 속에서 타문화에 대한 이해나 존중 없이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심히 무례한 종교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식의 선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점은 실제로 많은 교회가 제 몸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와 세상을 향한 봉사도 실은 제 몸을 불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기에 교회가 존재해야할 본래의 모습은 자꾸 사라져 가는 듯 보여 안타깝기만 한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최소한의 생존은 해야 하고, 바울 사도의 말대로 일꾼이 삯을 받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자비량 선교를 하였던 사도들의 뜻을 살펴볼 때 양적 교회 성장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타인을 위한 존재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아야 합니다. 그 정신에 비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만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참으로 역설적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내어 줌으로 부활하셨듯이 말이죠.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인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참된 선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 이번 하늘뜻펴기입니다.


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3)
향린의 선교 - 잃은 사람들을 찾아
요나 4, 9- 11 ; 루가복음 19, 1-10

작년 한 해 향린교회는 선교비로 1억 6천만원 가량 사용하였고, 선교비는 총 결산의 약 28퍼센트의 구성비율이었습니다. 1994년 10월 교회갱신 실천결의문의 13번째 과제인 ‘적어도 예산의 30% 정도를 선교비에 할당하도록 한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향린교회가 선교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15년 동안 남북화해와 동북아 평화, 한미군사동맹 철회를 위한 평화통일 선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해치는 전쟁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성차별, 소수자 차별반대 등의 인권선교, 농촌교회와의 농산물 직거래, 생태기행과 아나바다 운동 등의 생명환경 선교, 독거노인 목욕봉사, 반찬 만들기, 노숙인과 도시빈민을 위한 복지선교, 민주화에 역행하는 제도와 정책에 맞서 싸우고 교회의 비민주적 구조를 바꾸는 민주화 선교, 민중교회 지원, 1인 1사회단체 후원, NGO 기구들, 이웃종교들과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선교를 해왔습니다. 목회자와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고, 교회의 예결산을 공개하고 있으며 더 투명한 재정운영을 위해 지금 복식부기 방식을 연구 중입니다. 또한 지역사회 발전과 교회의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교회 건물과 시설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출석교인 500명이 넘으면 분가하도록 하는 분가선교는 아직 논의 중에 있고, 장기적으로 사회선교센터를 세우는 것도 유급 사회선교간사를 두어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사회/선교부가 준비하고 있는 향린선교 정책 토론회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 교우를 합쳐 700명이 넘는 우리교회의 선교활동을 보면 정말 다양하고도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992년 공동의회 자료집부터 2009년 공동의회 자료집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두께가 점점 두꺼워 지고 있음을 볼 때, 향린의 선교와 활동이 더욱 다양하고 활발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도 처음 교회를 창립했던 이들의 입체적 선교, 또는 입체적 교회라는 뜻이 지금까지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입체적 선교/교회라는 창립정신은 교인들의 삶 전체를 선교에 헌신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키며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의 전선에 나서게 한다는 말입니다.[각주:1] 비록 향린교회 초기와 같이 교인 전체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 직업을 통해서 선교하는 일은 교인규모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하고 다원화 된 이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향린교회의 교인이 되어서 전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정신은 오늘날도 살아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선교활동을 위해 향린교회에서는 11개 신도회, 8개의 각부위원회, 7개의 평화나눔공동체, 3개의 소모임, 구역모임 7개, 선교부 산하 5개 위원회, 사회부 산하 4개 위원회, 예배부 산하 3개 부서, 교육부 산하 5개 부서, 장기발전위원회, 당회, 공동의회, 제직회, 목회운영위원회, 향린공동체협의회 등등 59개의 모임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은 1년에 한번 모이지만 어떤 모임은 월 1회, 또는 매주 모이는 모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새 교우가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의 저자 A. J. 제이콥스처럼 향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해보겠다고 큰마음을 먹는다면 한 10년은 꾸준히 다녀야 향린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루가복음을 탄생시킨 공동체는 마르코 공동체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다양성을 담보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루가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6:13 이하) 70인의 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10:1 이하) 이들이 모두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뽑힌 대표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들만 모두 82명이었으니 루가공동체는 아마도 59개의 모임이 있는 향린교회보다 더 큰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방인 지역의 한 변두리에 모여 작은 소종파를 이루었던 마르코 공동체와는 달리 루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난, 어쩌면 로마에 터를 닦고 있었던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섞여 있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으며, 열두 사도와 칠십인 대표와 같은 지도자들과 라오스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루가복음서 저자는 경건한 유대전통의 그리스도교 계열에서 만든 예수의 어록을 읽었고, 이방인과 소외된 계층이 그리는 예수의 복음이야기인 마르코 복음서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전에 자기가 들었던 예수 이야기와 이미 읽은 모든 이야기들을 가지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히 정리하여 한 로마관료에게 보냅니다(루가 1:3).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구석”(행 26:26)에서 일어난 불분명한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모든 사회 계층을 꿰뚫고 들어가며 다른 민족, 인종 및 계층의 벽을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제일 처음 유대인인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야기로 끝을 냅니다. 우리는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은 저자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신학자들은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붙여서 루가-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 사회에 하느님 나라 운동이 펼쳐진 것처럼, 이제 이후 제자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이방 세계가 변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평등 경험에서 비롯된 이 공동체에 부자들이 동참하고, 로마 사회에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떼거리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상태에서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요소를 제공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이제 루가는 예수 사후 그 운동을 이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계에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로마시민들이 좋은 황제로 기억했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보다 훨씬 더 낳은 평화를 만드는 나라임을 증명해보이고자 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핵심으로 삼는 향린교회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갔던 루가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닮아 있습니다. 향린교회 구성원들이 교양 있고 주체적 안목을 가진 신앙인들인 것처럼 루가 공동체도 중상류층 이상의 교양인들이 쓰는 헬라어를 쓸 줄 알면서 주변 세계와 자신들을 성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을 하고, 그에 따른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향린의 선교를 되짚어 보면서 루가 공동체의 경험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천신학자들은 흔히 교회의 역할을 보통 복음의 선포인 케리그마, 교육, 봉사, 친교 이렇게 네 가지로 봅니다. 이 중 ‘봉사’로 번역된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뜻하는 단어로 흔히 일반교회에서는 교회 내 봉사를 뜻하는 것으로 말들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선교의 기지가 되기 위해 교회 내적인 것도 잘 추슬러야 함은 당연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인식이 필요하고 자신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며 백번 맞붙어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의 경구처럼 외부와 내부 모두를 살필 줄 알아야 적절한 선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쌓아온 민주정신을 이렇게 저렇게 실험하면서 실수도 하고 또 부족하지만 나름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그 10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역사는 오히려 거꾸로 흘러 후퇴해 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국민들의 잘못이 큽니다. 투표권을 가진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가진 게 많고 그럴 듯한 학벌이 있고 힘이 있어 보이는 부자들이 나라 일을 잘 볼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일부는 돈이면 다된다는 생각에 물들어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의 경제적 위기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 때에, 정부와 여당은 계속해서 5~20%만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나머지 80-95%가 죽어나가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조차도 미국시민이 되려고 미국으로 가서 애를 낳는 원정출산이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부는 중산층에 들지 못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들에게는 관심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1980년에는 전쟁에서 외국의 침략에 맞서 자국민을 보호해야할 군인이 국민을 폭도로 몰아 죽이더니, 2009년에는 국민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켜줘야 할 경찰이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죽였습니다.

머리 속에 삽만 들은 지도자가 국정 운용의 기조를 ‘실용주의’로 잡아 성과와 효율만 내세우고, 군인이 정권을 잡고 무식하게 독재를 펼치던 시절의 ‘하면 된다’라는 군대식 사고로 국정을 운영하려고 하기에 모든 정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경쟁의 소굴로 몰아넣고, 언론과 한 통속이 되어 나쁜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이라도 하면 사진 찍고 누명 씌워 끝까지 잡아들여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못하고,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기에 조세희 작가는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 하는 자는 도둑 아니면, 바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 70-80년대를 통해서 독재자의 말로를 보았고, 그들의 권력이 누구의 피땀을 착취한 것인지 온 몸으로 느끼고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이 시기에 권좌에 있는 자들의 권력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루가공동체는 로마대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로마의 황제가 마치 자신들이 신인 양 제 맘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쓰이기 전의 로마를 다스리던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한 첫 번째 로마황제였는데, 유대인의 세금을 따로 거두기 위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90세 노인조차도 바지를 내리고 할례를 받았는지 조사하는 악독하고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였고, 루가는 이렇게 교만한 황제의 죽음 속에서 “권세 있는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루가 1:51-52) 하느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권력이기에 직접적인 정면대결은 못했지만 예수의 시험이야기에서 마귀를 로마황제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사도행전 12장 20절 이하에서는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을 신격화 시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루가공동체는 정치적 권력이 신성화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셔서 그 어른을 존중하고 그 어른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며칠 동안 명동성당에서 퇴계로까지 줄을 서서 조문하였습니다만, 그의 삶을 진정으로 되새기는 길은 그분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와 역사를 위해 촛불을 들거나 남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눈을 기증하시고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을 했다는 데, 그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되살렸던 예수의 불꽃을 계속해서 되살리는 길이 진정한 추모입니다. 루가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남기면서 바울의 순교를 적지 않습니다. 그가 우상처럼 떠받들어질까 염려한 것입니다.[각주:2] 오히려 하느님 나라 운동이 왕성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마치는 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선교 금지를 당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행 4:19-20) 이렇게 말하고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조상이며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떠들어 대고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의 그리스도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고 군주들이 함께 작당하였다.’”(행 4:24-26) 후에 다시 산헤드린이 이들을 호출하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를 실행하려고 하는 향린교회는 이 정부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향린교회는 왜 촛불 들고 거리로 나갑니까? 다른 교회들은 장로님이 대통령 되셨다고 한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데 향린교회는 어찌하여 설교시간마다 MB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까? 다른 교회들은 은혜로운 복음성가와 찬송가로 노래하고 교회도 크게 짓고 목회자들을 많이 두어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데 왜 향린교회는 좁고 낡은 건물에서 어려운 국악찬송을 부르게 하고 평신도들을 설교까지 하게 하는 불편함을 감수합니까? 그것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좀 더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보다 하느님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바른 길로 가고, 그리스도교가 예언자적 종교가 되어 사회에 정의의 외침이 살아나게 하기 위해 향린교회는 화살촉과 같은 역할 즉, 민족문화의 수용, 교회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통일, 생명과 인권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더욱 투철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 내야 합니다. 향린교회의 존재의의는 바로 이러한 선교적 사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향린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고 큰 품을 가져야 합니다. 루가는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두 강도를 구별합니다. 한 강도는 로마병사처럼 예수를 조롱합니다만 다른 강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예수의 무죄를 변호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루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회심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루가 23:40-43).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거절하는 사람도 루가에게 있어서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혹시 압니까? 누가 압니까? 이명박 장로님도 회개하실지~.

루가는 바리새인들을 구별해서 볼 줄 압니다. 루가복음서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지만(루가 11:37-54), 루가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행 5:35 이하). 우리가 생각하는 답답한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또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분명 향린의 정신을 흠모하고 거기에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있고 생길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루가 9:51이하), 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루가 10:25-37)과 감사하는 신앙(루가 17:11-19)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분들도 계시고, 하느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자진해서 나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루가는 정부와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이는 악한 놈일 뿐이고(루가 3:19 이하),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루가 13:31 이하)일 뿐이고,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사형집행을 하는 폭군(루가 23:4, 14, 22)일 뿐이지만,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접하고(행 13:4-12)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해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향린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상당한 학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지 못한 탓에, 성공한 모든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된 것으로 알고 그들을 일거에 부정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다는 것을 향린교회에 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청년은 자기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오면서 “존경할 만한 어른을 보려거든 우리교회에 와 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전문성과 성실성, 바른 생각, 진정한 실력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관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루가 공동체가 그러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향린교회의 선교 현실이고 가능성이고 잠재성입니다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선교의 핵심은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선교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에토스인 예수 그리스도 휴머니즘을 발견합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잃은 사람들 당시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당하고, 때로는 여론에 의해 매도당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눕니다. 우리는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선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루가-행전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으라”(루가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라고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이들은 ‘오클로이’ 즉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 말은 속옷 두 벌을 가지고 두 사람이 공유하며, 먹을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함께 서로 어깨를 기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루가-행전의 후반부의 주인공인 바울은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행 20:33-35) 이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신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면 부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고별연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바울은 경제적 독립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으나, 그 권리를 희생합니다.  즉 그는 부양받기 위하여 일하기보다, 오히려 주기 위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였고, 그럴 때만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욥바와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음으로써(행 9:36-43)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단순히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 세리들은 로마의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폭리를 취하기 일쑤였기에 세관의 우두머리라면 그런 혐의에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캐오가 남을 속여먹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8절에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부자였고 세관장이었기에 매도를 당했던 자캐오가 오늘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예수는 그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던 자캐오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그로 하여금 나눔의 기쁨을 맛보게 함으로써 살 맛 나게 만들어 줍니다.

세례요한의 충고, 바울의 연설, 자캐오 이야기가 이루어 낸 선교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수평적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산주의(Communism of Love)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누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노동에 의해 자신의 경제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부자 될 권리를 포기하고 남에게 주기 위해 노동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모두가 구원을 이루는 선교에 동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하느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이 루가가 꿈꾸던 선교였고 이상이자 목표였던 것입니다. 

개개인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돕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선교이든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만 고통을 지우는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는 선교이든지 이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모두가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이라면 모두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이루도록 도전할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청남 수련회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해 함께 공부했던 것, 지난 주 우석훈 선생을 모시고 강의를 듣고 토론했던 것 모두가 그런 노력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장기와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각양의 모양대로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쓰실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땡전뉴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괘종시계가 9시에 가서 “땡”하고 울리면 제일 첫 소식이 전두환 씨의 소식이었기에 땡과 전두환 씨의 성을 따서 땡전뉴스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땡전뉴스에 나오는 전두환 씨의 호는 “오늘”입니다. 언제나 뉴스에서 오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어쩌구 저쩌구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아내 이순자씨의 호는 다들 아시겠지만 “한편”이었지요. 그럼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무엇일까요? 제가 최근 한겨례 21을 읽고 안 사실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한때”가 아닐까 합니다. 지난 1년간 이명박 대통령이 쏟아낸 말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도 한 때 기업해봐서 안다.” “나도 비정규직 노동자로 출발해 최고경영자가 된 터라 태생적으로 노동자 프렌들리다.” “나는 여러분 환경미화원의 대 선배다.” “나도 질문자 나이 때 황학동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했다.” “나도 학생 때 학생회장 하면서 데모를 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끊어야 한다. 내가 산 증인이다.” “나도 한 때는 여러분처럼 노점상인이었다.” “나 자신이 한때 철거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디 가서든지 “나도 한때는”이라는 말을 늘 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선교의 현장에 서야 할 때 가장 주의할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나도 한 때는 무엇 무엇 해봤다~”. MB처럼 한 때에 무언가 해 봤다고 떠드는 사람은 거의 현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주의해야 할 단어는 “앞으로”입니다. “지금은 좀 어렵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 하겠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과거와 대비해서 지금은 좀 어렵고 미래에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한 때 잃은 사람을 찾아 선교를 했다고 지금 잃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분명히 말합니다. 지금 잃은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거의 찾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루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한번 더 읽겠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잃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제 목숨을 잃는 사람 즉 미래에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목숨을 잃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한 때”나 “앞으로”가 아니라 매일 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때 십자가를 졌던 사람입니까? 앞으로 질 사람입니까? 아니면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까?

하느님은 요나 같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땅 조선반도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수백만이 되고, 뭇생명들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하여 이 땅을 아끼지 않겠느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돈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불의한 재물로 사람을 살리시오.
가난하더라도 떳떳함을 잃지 말고
부자가 되더라도 하느님 두려운 줄 아십시오.
고통 속에서도 넘치는 평화를 맛보고
눈물 속에서도 그리운 자유를 누리시오.
매일 그대들의 자리에서 예쁜 사람꽃 하나 피어나게 하시오!


ⓒ 웹진 <제3시대>


  1. 『향린40년사』, 79p. [본문으로]
  2. 사도행전 14:11이하에서 군증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생각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당황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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