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0)

힘든 교우들이 많다. 가장 많은 이유는 물질적인 어려움이고, 그 다음 이유는 직장생활이다. 덧붙이면 자녀걱정인데, 그 또한 물질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비밀스레 건네지는 교우들의 고민과 기도제목은 솔직히 ‘노골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놓는 ‘목회 노트’속 하나님은 풍요의 신이며, 수호신이고, 가끔 두려운 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설교강단은 한층 더 현실 언저리를 맴돈다. 삶과 신앙을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복음이 관념이 되고, 추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설교자의 고뇌는 더욱 깊어간다. 늘상 ‘생활신앙’을 외치고, ‘생명윤리’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즘’ ‘문화와 과학’ 등 21세기 신학적 화두들을 붙잡고 늘어지지만, 이를 설교와 목회로 추구되는 교회현장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엔 더 진지하고, ! 끈기 있는 ‘우려냄’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는 ‘삶과 신앙’을 평행시키는 ‘철로’가 되고, 목사는 점점 더 교인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아직 젊기 때문일까...’ 혼자 되묻는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직장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교인들에게 ‘잘 될꺼다’ ‘기도해보자’ 정도의 대답을 하고나면 찜찜하다. 그러나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 한번은 40대 후반 집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가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단다.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었는데  간부가 아니다보니 언제 정리해고를 알리는 이메일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에서 느끼는 불안이 고스란히 가정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들도 불안해 한다. 가장으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아내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도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은 ‘기도해주세요’였다. 


요즘 영화를 자주 본다. 대학시절 학보사 문화부기자를 맡으면서 취재를 빌미로 거의 매주 영화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장르불문. 닥치는 대로 보았다. 그 덕에, 나는 나만의 아마츄어 영화독법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 ‘감독은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영화 속 인물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심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사나 행위를 통해 설(說)을 푼다’ 요즘은 영화관련 사이트마다 관객이 적어놓은 ‘극중 명대사’들이 있어 재미가 감소됐지만, 1시간 30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물’이나 ‘대사’를 긁어내는 ‘숨은그림찾기’는 참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최근에 ‘도쿄소나타’라는 영화를 봤다. 예상대로 개봉관은 없었고, 1시간 가까이 골목을 헤매다 겨우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포스터는 헐리우드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연상케 한다. 어린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한 회사의 홍보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통해 본 이 영화의 일본판 포스터는 달랐다.  부모와 두 아들,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있다는 사실 말고, 그들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어떤 다른 이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일본가정, 일본사회, 21세기’를 함께 언급한다.
  
“내가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그것은 왜 우리가 이전 세기에 가졌던 미래의 모습과 크게 다른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는 그것이 나에게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현대 도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드라마를, 가능한 작은 과장과 함께 묘사하려 노력했다.” (무비위크 2009. 3)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켄지는 엄마가 건네준 급식비 봉투를 들고 피아노교습소를 찾는다. 엄격한 가장인 아빠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형은 출구 없는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외국인의 입대를 허용한 미군에 지원한 뒤 ‘신원보증서’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입대지원서를 들고 온 큰 아들의 질문에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녀는 외롭다. 빈 집, 쇼파에 홀로 누워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읖조린다. ‘누가 나를 좀 잡아줘’ 한편 제법 큰 의료기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아빠는 고학력 저임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직원들에 밀려 실직 당한다. 하지만 매일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동네 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백화점 청소용역 노동자가 된 아빠가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는 바다로 간다. 더 이상 길이 없는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운 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겼으면 좋겠어’ 같은 시간, 지나던 트럭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아빠가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그날 두 시간 여 동안, 나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큰 아들이 되고, 막내아들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가 우리의 분신 같았고, 미래 같았다. 권위를 상실해가는 아버지는 불안하다. 무관심에 길들여져 버린 엄마는 외롭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은 무기력하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말은 그들의 행동과 다르다. 켄지는 고립되어 간다.

결국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다시 묶어주고, 이들 각자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순간으로 엔딩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시작’은 혁명적이지도, 격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느리고 긴 호흡’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뱀은 몸이 자라고, 비늘이 닳게 됨으로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새 비늘옷이 낡은 비늘옷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동안, 뱀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눈꺼풀도 허물을 벗어야 하므로, 이 무렵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껍질이 완성되면, 낡은 허물을 장갑 벗듯 벗어버린다. 그제서야 눈도 다시 뜬다. 살아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때, 말하자면 낡은 허물을 벗거나, 벗어야 할 때 눈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았고, 내적변화를 겪었다. 이때 그는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던 순간,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변화가 필요할 때, 새로움이 간절할 때,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내 시선을 기다리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구고 있었다. 이어질지도 모를 죽음의 연좌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상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침묵과 공포의 순간, 이 폐쇄된 공간속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진 상황, 제자들에게 ‘평화(평강)’는 역설 중에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곤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령을 받아라’.

나는 이것을 ‘두번째 숨’이라 이름 짓고 싶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성령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의 혀’같이 찾아온 그 성령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때 그들 속으로 성령이 들어갔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반면 사도행전의 그 영은 ‘능력’이었던 것 같다. ‘생명’과 ‘능력’은 공존한다. 생명이 있어야 능력이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있음으로 생명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앞선다. 예수는 먼저 생명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형상 지어진 사람의 모양에 첫 번째 숨을 불어넣은 야훼처럼, 그도 두려움과 공포로 빚어진,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폐쇄된 자아들을 향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환상체험이었든,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겁고 답답한 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혹시라도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모든 분들께 ‘성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조심스레 건네 보는 것이다. 호흡을 불어넣은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언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 20:23)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평온히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낸 그 집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집사님 부부 데이트 한번 하시죠. 영화 어떠신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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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선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조익표
(예가교회 담임목사 | yega.org)

여럿의 개체가 그물망과 같은 관계 속에 하나의 독특한 질서를 생성하고 하나의 집합체를 이룰 때, 이를 유기체라고 부른다. 인간은 60조가 넘는 엄청난 수의 세포들의 집합체이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집합체는 얼마나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을 이루겠는가? 이 관계의 복잡성과 다양성의 정도가 높은 유기체를 고등유기체라고 부른다. 정신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의식은 고등유기체에 이르러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사회는 다양한 인간이 그물망과 같은 관계 속에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하나의 집단을 이룬다. 인간을 고등유기체라고 할 때, 인간사회는 고등유기체보다 한 차원 위의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사회는 물리적인 관계도 있지만, 주로 의식을 사용하는 정신적인 관계를 사용하여 관계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야 말로 고도의 정신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나’라는 정신은 자신의 몸보다 하나 위의 차원에 존재한다. ‘나’는 ‘세포→기관→몸→나’ 로 이어지는 차원의 정점에 놓여있고, ‘나’에 이르러서 하위의 차원 모두를 하나로 묶는 ‘정체성’이 결정된다. 그러나 ‘나’는 또한 계속해서 ‘나→지역사회→지구적 사회→우주적 피조물’의 질서로 이어지는 차원의 최하위 차원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적 피조물의 하위 차원 모두를 하나로 묶는 ‘정체성’을 결정한다.

‘나’는 정신을 통하여 ‘지역사회→지구적 사회→우주적 피조물→하나님’ 에 이르는 길을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과 자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깨달을 수 있고, 그 길 안에서 살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길을 가고 하나의 길에서 살아가는 것이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란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하나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그 길에서 살게 한다. 그 뿐 아니라, 교회는 ‘나’ 를 넘어선 하나의 사회의 기능으로서 역할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됨’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모든 성원들은 ‘나’를 넘어서야만 한다. 교회가 교회로서 기능하려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를 넘어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을 획득해야 한다. 성령은 ‘나’를 넘어서는 정신이다. 교회의 하나됨은 성령을 통한 하나됨이며, 성령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교회는 ‘한’ 성령을 호흡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직 ‘나’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교회는 단순한 교인들의 집합이며 교인들의 교인들을 향한 분열과 갈등의 영역일 뿐이다. 평화란 ‘나’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개개의 교인들이 ‘나’ 중심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교회’의 세계로 넘어섬으로써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것이다. ‘세포’가 ‘몸’의 생각을 알지 못하듯이 ‘나’도 ‘교회’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정신성은 ‘세포’의 정신성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다는 것이다. ‘나’의 정신성은 ‘너’와 ‘우리’의 정신성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나’를 넘어서는 일이야 말로 ‘영적인 일’이며, 성령을 통하여 ‘나’를 넘어서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나’를 넘어서는 일은 ‘기도’를 통하여 얻어진다. ‘기도’ 란 ‘나’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기도’는 ‘나’의 존재에 영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가 민감하다면, 매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나’의 존재를 볼 수 있고,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민감하지 못하다. 그러나 분명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나’를 선물하시는 방식이다. ‘기도’를 통하여 나는 새로운 ‘나’로 새롭게 창조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현재의 나’를 모두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나’를 모두 아낌없이 주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참된 기도는 한 인간의 ‘전부’를 바꿀 힘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때에 ‘나’는 나를 넘어선 존재로 변화할 것이고, ‘나’ 중심성에서 벗어나서 우주적 존재로 변화되며, 참된 자유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나를 넘어서는 강력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사랑에서 구현된다. 나를 넘어서는 사랑이란, 나의 존재의 변화를 증거하는 유일한 표지이며, 성령의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표지이며,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능력이다. 뜨겁게 사랑하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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