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숭배에 관한 자서전적 초상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1. 근본주의적 신앙, 과학, 그리고 타종교


     원불교대사전에는 근본주의가 이렇게 제시되고 있다. “근본주의는 넓게는 18ㆍ19세기 미국의 보수적인 신앙운동 경향인 복음주의(evangelicalism) 전통 안에 일어난 신앙운동이라 볼 수 있다. 개신교의 근본주의자들은 1911년 《근본주의(The Fundamentals)》라는 책자에서 밝힌 다섯 가지 교리인 《성경》의 축자영감무오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ㆍ대속ㆍ육체적 부활ㆍ임박한 재림 등을 기본 사상으로 체계화했다.”라고 말이다. 기독교도 아닌 원불교대사전에 이렇게 실려 있는 것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해진다. 하지만 이 사전이 타종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기에 서로 다른 종교들 간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친다면 묘하다는 느낌은 분명 잘못된 일일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지적하는 근본주의 5대 강령은 내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10대 때까지는 말이다. 이 5대 강령 중 핵심은 다른 무엇도 아닌 축자영감무오설일 것인데, 왜냐하면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강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중고등학교 시절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나름 지성적이라 여겨졌던 IVF에서 활동한 교회 선생님께서 성경공부 시간에 “창세기 1장 1절이 믿겨지면 신앙은 다 정리된다.”고 하셨다. 이 말에 반박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말씀하신 배경이 교회이기도 했지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할 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1절이 믿겨지면 전체가 다 믿어진다는 논리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논리적으로야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성서의 모든 기적들이 믿겨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한 아이는 교회라는 공간에서만 살지 않는다. 이미 세속화된 세계에서, 그것도 진화론이 열심히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가르쳐지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학교에선 진화론이 교회에선 창조론이. 이러한 공존할 수 없는 두 대립되는 세계에서 10대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사실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교회에선 진화론을 이야기하면 창조론을 말할 것을, 한 예로 과학시간 시험에 진화론과 관련한 문제가 나오면 틀릴 것을 주장하는 그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유포되는 장소에서 말이다. 대안은 정신분열적 증세를 겪으며 견디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철이 먼저 든 친구들은 데미안이라는 책을 내게 주며 “야 이 전도사 그리 고민하지 말고 좀 솔직해져봐라” 라고 했다. 학교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나였기에 친구들은 가끔 전도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전도사라는 별칭에도 자신은 분열증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런 나를 구해주려 무지 애를 썼다. 물론 그들 중 몇몇은 서서히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들은 편지로 때론 대화로 나의 신앙에 흠집을 낸 것이다. 성서가 너무 믿기지가 않아 힘들었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마다 나는 “아 이러면 곤란해 신앙으로 무장해야지”라며 스스로 체면을 걸던 때도 있었다. 흔들린 신앙은 참석한 전도 집회 때마다 “자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없으면 지금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런 분들은 일어나세요” 라고 외치는 목사님의 말에 일어서도록 만들었다. 확실히 과학은 나의 신앙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자연히 성서의 말씀은 믿어지기 않게 되었고 이와 함께 찾아온 회의적인 신앙은 구원의 확신마저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사영리에 나오는 영접기도를 남몰래 교회에 가서 수십 번 기도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주술로 전락한 기도 문구는 흠집이 난 신앙을 고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한데 과학만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과학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은 철학이나 신화로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니체가 말이야 혹은 다른 신화를 보면 말이야 하는 식이었다. 성서만 부지런히 읽고 QT생활을 즐기던 내게 철학이니 다른 종교의 신화니 하는 이야기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으나, 진화론으로 인해 갈등을 겪은 후로는 그래 그런 것도 말은 되겠구나 하는 쪽으로 변하도록 만들었다. “어 닮았네 그렇다면 과연 성서의 하느님은 맞을까 혹은 있을까” 하는 물음을 묻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이야기에도 창조설화는 얼마든지 있었다. 단지 교회는 그것은 사탄의 이야기이고 다른 종교가 말하는 허탄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기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성서는 무오한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진리였던 반면에 다른 종교경전은 사탄이 뿌린 씨앗에 지나지 않았기에 말이다. 간단히 말해,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진리가 없다고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다른 종교 경전의 이야기를 듣도록 해주었다. “아 다른 종교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신기하네. 그렇다면 뭐지”라고 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었다는 점이다. 내 종교의 무오가 옳다면 다른 종교의 무오도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은가. 그런데 누가 옳은지를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점차 종교다원주의라는 문제로, 그래서 공부를 한다면 비교종교학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마 내가 종교학을 공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아 종교학을 통해 내가 다른 종교를 좀 더 잘 알고 그렇게 되면 내 신앙도 풍부해지고 열린 마음을 가진 목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목사나 선교사가 되기로 하느님께 서원한 상태였기에 말이다.


2. 종교학, 신화학, 역사비평학


     다시 원불교대사전으로 돌아가 보자. 성서를 숭배하는 신앙, 즉 성서무오설을 견지하는 근본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9세기 신학계를 주도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고 기독교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전개된 개신교의 보수주의적ㆍ복고주의적 종교운동이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10대 때에 그토록 잘못된 연구 잘못된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자들이 자유주의자라고 들었던 진영으로 나는 서서히 발을 옮기고 있었던 셈이다. 종교학은 사실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다른 종교에 눈을 뜨게 해주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신앙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뜨도록 해주었다. 자기 종교에 메스를 들이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가 믿는 신앙에 수술을 집도하는 행위는 엘리아데가 말한 바와 같이 우주의 중심이 무너지는 경험을 갖게 하는 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과학으로 인해 일어난 갈등은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영역인지를 탐사하도록 만들었다. 종교학은 다른 종교에도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으며, 때문에 항상 종교연구에 있어 연구자는 자기신앙을 괄호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특히, 엘리아데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아 가진 영적인 풍요로움을 기독교 교리에 맞추지 않고 그 자체를 보게 함으로써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종교적 인간은 기독교에만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생겨날 수 있고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우주의 중심을 찾고 있었음을 가르쳐주었다. 성현의 변증법을 겪는 인간인 호모랠리기우스는 어디서나 체험될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교신화학은 서구중심적인 시각을 깨트리고자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레비스트로우스를 읽으면서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은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이 이야기들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 이야기들이 원용되어 성서에 들어왔는지를 묻도록 해주었다. 대학원 2학년 1학기에 만난 배철현 선생님과의 만남은 결정적이었는데, 그때 들었던 고대근동 신화와 창세기에 대한 강의는 성서를 보는 나의 눈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종교 신앙의 확산과 그 영향에 관한 강의는 10대 때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신 믿음만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언어학에 근거한 역사비평학은 한 마디로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점차 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 즉 근본주의가 그토록 싫어하던 역사비평학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셈이다.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항해하는 선원처럼, 하지만 먼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선원처럼 나는 그렇게 비평학이라는 학문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신대원으로 갔다. 불행히도 신학교에서의 수업은 그리 감흥이 있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들 간의 비교나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비평적 주석 달기 수업이기보다는 대체로 교양정도의 수준에 그치는 마는 터라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논문을 준비하면서 공부하게 된 신약학의 여러 학자들을 통해 새삼 역사비평학과 문학비평이 가져다준 자유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신화비평을 전개하는 학자들은 큰 영향을 끼쳤는데 - 불트만은 마가복음서를 그 방향으로 전개하도록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고, 이후의 다른 학자들을 뒤지면서 - 특히 19세기 네덜란드의 래디컬 그룹과 그 그룹의 비평을 이어받은 신학진영 바깥의 사람들을 통해 나는 성서를 연구하는 자유가 짜릿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로버트 프라이스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비로소 나는 성서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성서란 성서무오설이 말하는 것처럼 글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다른 의도와 의미들이 숨겨진 문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역사의 세계가 아닌 이념들의 세계, 즉 슈트라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관념들이 지닌 정신의 세계를 꿰뚫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이념들의 역사가 펼쳐지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3. 해석학과 탈식민주의


     분명 교회의 신앙의 이념들의 역사가 펼쳐진 공간의 극적인 양식은 약속과 성취일 것인데, 이것은 신약의 구약 인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교회는 구약을 원래의 문맥과 전혀 다른 뜻을 적용해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결국 해석학으로 옮겨오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서 로버트 포울러는 가장 흥미로운 학자였는데, 그는 마가복음서가 하나의 독자반응비평으로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임을 증명해냈다. 원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인용하고 적용하며 나름의 이야기를 구축해내려는 종교적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는데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나로 하여금 이것은 해석학이라는 문제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인간이란 원래의 텍스트를 들이대면서도 이 텍스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고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임을 말이다. 때문에, 성서무오설은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러니, 패러디, 수수께기 말놀이와 같은 일종의 전유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상호텍스트성에 관한 관심을 열어 제친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전유의 문제라면, 내가 사는 공간은, 다시 말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은 어디이며, 또한 그 공간에서 자라고 있던 종교적 유산은 무엇일까에 관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신약학에서, 특히 복음서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삶의 자리에 관한 물음은 역사비평학이 탄생했던 서구가 아니라 식민지적 세계, 식민지적 종교세계에 내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텍스트를 전유하는 문제가 선교이고, 그 선교가 복음서라는 텍스트를 탄생시켰다면, 더 이상 서구의 자리에서 내가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탈식민의 자리에서 성서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피어났던 셈이다. 성서무오설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구약이 말하는 바와 같은 유대인의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약이 말하는 서유럽의 세계도 아닌 동북아 지역에 살고 있으며 여기서 성서라는 문헌을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아무리 성서무오설을 외친다 해도, 인간이란 시대와 장소에 의해 중개되는 존재이기에 원래의 텍스트가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말은 자기기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마치 내가 10대 때 과학으로 인해 신앙에서 정신분열증을 앓아야 했던 것과 거의 흡사하다. 그러므로 성서를 숭배하는 일은 더 이상 가능치가 않다. 그것도 문자적으로 숭배하는 일은 말이다. 차라리 숭배가 아니라 전유하는 일이고, 이 전유를 통해 새로운 생성을 말해야 하는 과제가 더 진실한 신학적 물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탈식민적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응구기와 치옹고처럼 그것은 우선은 정신을 탈식민화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두베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탈식민은 불가능하다. 서구적 독법들을 소화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대위법적으로 넘어서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성서를 제대로 전유하는 일이 아닐까. 성서를 비판적으로 복원하는 자리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일이 생산적인 것이라면 - 물론 비판적 복원과 전유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쌍둥이일터인데 - 서구가 전유하는 방식과 나의 존재론적 공간인 동북아가 전유하는 방식은 원래 달라야 하며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서구적 성서읽기에 목을 매다는 나의 열등감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성서문자숭배가 전하는 길과는 다른 길에 서 있는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성서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그러한 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이미 문자는 죽은 것이고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더구나 공관복음서를 긴밀하게 검토해보면 이것은 동일한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을 담은 텍스트임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서와 큰 차이를 보이는 요한복음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전을 읽으면 이미 서로 다른 유파들이 예수에 관한 서로 다른 이해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1세기의 신앙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해석의 자유를 누리며 그 나름대로 복음에 관한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주려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자무오설은 애초에 유지될 수 없다.

     문자숭배. 하나의 프로테스탄트적 노력이지만 노예적으로 전락한 신앙을 파괴하도록 부추긴 그러한 숭배이다. 사실 역사비평학은 이러한 문자숭배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숭배는 결국 전유의 문제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트의 문자숭배로 인한 역사비평학은 복원이 아니라 전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텍스트들 간의 병행과 치환 및 접속과 탈구는 말하고자 하는 이의 욕망과 맞물려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종의 놀이일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놀이란 경박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놀이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나의 행로는 신앙은 문자를 지키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유이고 의미생성임을 가르쳐 준 그러한 것이었을까. 16세기 이후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의 문자숭배, 다시 말해 중세의 4중적 해석을 물리치고 문자숭배를 최고로 간주한 구호, 즉 ‘오직 성서만으로’는 나로 하여금 신앙은 문자에 있지 않고 그것을 전유하고 누리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원래의 의미가 아니라 전유하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자유를 말이다. 복음을 전해 준 백인에 대한 종속적이고 열등한 감정, 특히 그들의 과학적인 신학적 주석 방법에 대한 열등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 왜냐하면 서로 엮여 있는 세계이고 순수의 세계는 없기에 - 더 이상 구속이 아닌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표의 미끄러지기 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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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취지

  서사공간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외부에 존재하여 사건의 무대가 되는, 어떤 비어있는 틀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서사에서 공간은 인물과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가며 그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서사가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 내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그 서사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성서 서사공간의 분석을 위해, 지리학의 공간이론들이 유용한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르페브르, 하비, 매시 등으로 이어지는 비판지리학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지리학자 투안과 랠프의 현상학적 장소 이론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번 포럼에서는, 특히 르페브르의 공간생산 이론을 활용하여, 누가-행전이 서사공간을 어떻게 구성해내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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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2.01.03 04: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우리학교 제닝스 선생님과 겐스톤 선생님, 그리고 슈나이더 선생님이 이 소식들으면 좋아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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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신앙, 성서, 교회를 위한 기독교 신학』

지은이 : 허호익
판형 : 신국판(153*224)
쪽수 : 440쪽
분야 : 인문/종교/기독교
값 : 16,000원
출판사 : 도서출판 동연
출간일 : 2009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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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회원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 II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


• 강의 구성

제1성서(구약성서)의 기초가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유다 왕국 말기인 히스기야 왕 혹은 요시아 왕의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왕국의 역사 편찬의 일환으로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왕국의 역사와 제1성서의 많은 부분은 내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그리고 군주제 이전 시대인 부족연합사회의 여러 설화들로부터 왕국 역사의 큰 빚을 지고 있다.

이 강의는 팔레스티나의 두 군주국과 그 이전 부족연합사회의 역사와 제1성서를 함께 공부함으로써, 야훼신앙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 강의 구성

첫째 마당(10.22) |  유다의 역사의 시작
둘째 마당(10.29)  |  다윗은 존재하였는가?
셋째 마당(11.5)   |  이스라엘 왕국
넷째 마당(11.12)  |  유다 왕국
다섯째 마당(11.19) |  예언자들
여섯째 마당(11.26) |  부족동맹에서 왕국으로의 역사


강사_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 편집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예수의 독설』 『반신학의 미소』 『예수역사학』 등

• 교재_매 시간 배부

• 참고자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J. M. 밀러 & J.H. 헤이스 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W. 슈니디윈드 저; 에코리브르)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I. 핑컬스타인 저; 까치)

• 일 시: 2009.10.22~11.26(매주 목) 저녁 7:30~9:30

• 장 소: 한백교회당
        (5호선 서대문역 1또는 2번 출구, 신한은행-우체국 사이골목 30미터. 좌측 안병무홀<1층>)

• 수강료: 6만원(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CMS 후원 신규 신청자와 기존 후원자는 무료입니다.)

• 신청방법: 02-363-9190으로 전화하시거나 yminjung@chol.com으로 신청 메일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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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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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솔로몬 왕이 강제 노역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주님의 성전과 자기의 궁전과 밀로 궁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9장 15절


팔레스티나에 철기문명을 선도했고 국가적 체제를 앞서 이룩했던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팔레스티나 거의 전 영역을 병합했으며, 요르단 강 건너의 모압과 암몬 족속을 예속화했고, 남쪽과 북쪽의 상당부분의 영토를 장악했던 나라, 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소제국. 성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가 이러했다고 말한다. 이만한 영토의 나라는 이 지역에서 이전이나 이후 누구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제국 이집트는 혼인관계를 통해 선린을 도모해야 했고, 지중해 문명의 최고봉을 장식했던 페니키아와도 대등한 국제무역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도성이 건설되었고, 헤롯의 성전에 비견되는 화려한 성전이 건조되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졌고, 특히 몇몇 요새도시는 훗날 아시리아 제국을 막아낸 아합의 군사력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예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솔로몬이 지었다는 시들은 대대로 성전 예배의 노래로 찬송되었으며, 나무와 풀과 동물의 분류학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예술이면 예술,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군사력이면 군사력, 어느 하나도 모자랄 것 없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가 기원전 11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부를 장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묘사에 걸맞은 다윗-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다. 솔로몬의 시편들이 그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그의 당대로 보이는 기원전 10세기 말경에 예루살렘에는 문자사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동식물의 분류학이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려한 성전이나 웅대한 궁전터도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에 세워졌다는 요새들은 적어도 한 세기 이후, 그것도 (유다 왕국이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것임이 밝혀졌다. 조잡한 도성의 흔적, 문자사용을 통한 체계적 통치술의 부재 등, 알 수 있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모로 보든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의 영토들을 병합한 전대미문의 제국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윗-솔로몬 제국 가설은 성서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또한 다윗-솔로몬의 나라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분열하여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는, 이른바 통일왕국 가설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 나라는 없었다. 다윗-솔로몬의 시대, 팔레스티나 남쪽의 지형이나 유적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이 지역에 등장했을 법한 나라는 기껏해야 아직 국가 단계라고 할 수 없거나 잘 보아야 국가로 막 진입한 나라, 그것도 북쪽의 나라들보다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잠시를 제외하면 이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약소국 가운데 하나로, 변변한 국가제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후진적 나라였으니, 그 시조인 다윗-솔로몬 시대가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였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역사비평학적 성서주석들은 아직도 낡은 가설을 전제로 하여 집필되고 있고, 신학교 학생들은 낡은 가설에 기초한 성서 해석을 역사적 해석처럼 배우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낡은 역사적 정보들과 긴밀히 결합된 신앙제도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새로운 역사적 성과들은 이제까지의 성서학, 성서교육, 신학교육, 신앙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다윗-솔로몬 시대만이 아니라, 제1성서(구약성서) 시대 전체, 그리고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서 역사학의 최근 조류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대안을 내놓으라고 반문한다. 사실 1990년대 이후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안정된 가설은 확립되지 않았다. 다수의 성서 역사가들이 그러한 대안 가설을 향해 매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하다.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자료가 축적될수록, 역사해석학적 인식이 발전할수록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 역사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백합화처럼 아름답지는 못합니다.’(「마태」 6,29) 이 말 속에는 솔로몬의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천년이 지난 예수시대의 대중과 예수 자신이 공유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시대에 대한 상상을 통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를 그리고 있다. 곧 예수와 대중은 솔로몬 시대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대를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 역사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시사되어 있다. 곧 역사학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학문적 논의여야 한다는 얘기다. 마치 안병무 선생이 「마가복음」이 그리는 예수전은 예수의 독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 대중이 나누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주-객 이분법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항거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는 과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간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예수와 마가공동체의 시간대화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선생은 ‘제2의 마가복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태일 사건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시간대화에 관한 예수전이다.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증언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은 그 신학운동은 바로 민중(오클로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며, 바로 이것, 한국의 민중-예수 이야기가 바로 ‘제2의 마가복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시간대화에 관한 현대 역사학적 문제설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성서해석은 바로 민중신학이다. 그것을 비록 학문적 언어로 세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오늘날 서구학자들의 대부분의 역사비평적 주석학이나 실증주의적 성서역사학은 학문적 세공은 있으나 역사적 문제설정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성서 역사학의 최근 동향이나 과제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의제와 만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와 대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유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성서 그 자체로는, 최근의 성서 역사학이 밝혀낸 것처럼 허황된 역사 이야기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성서 얘기를 더 해보자.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성서’라는 책이 신앙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는 점이다. 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제작비용이 저렴해짐으로서 책은 비로소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바로 국가 단위의 공교육이 제도화됨으로써 잠재적 독자로서의 문자대중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책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서양 근대를 대변하는 종교로 그리스도교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미 종교개혁기에 성서가 자국어로 번역됨으로써 근대어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후 신앙제도만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제도의 형성에 ‘성서라는 책’ 혹은 ‘책으로서의 성서’를 매개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나아가 근대의 지식과 성서의 이해는 상호 연관되어 발전하며, 지식 엘리트는 동시에 성서학자이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전망은 성서를 매개 삼아 대중과 교호하였다. 하여 서구의 사회는 기독교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의 종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기독교를 근대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한 매개이지만, 동시에 근대적 종교이기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위기의 핵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것은 바로 ‘독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책의 독서는 읽는 이의 체험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해서 사람마다 책에 대한 취향이 생긴다. 어떤 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대하 서사물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무협지를, 어떤 이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이더라도 책을 읽는 때마다 취향이나 기대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한데 독서가 독서하는 이의 삶, 취향 등과 얽힌다는 것은, 책이 그 자체로 의미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그때마다의 사정과 얽힘으로써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성서의 독서에는 개개인의 체험이 끼어들 수 없다. 성서는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전(Canon)이라는 성서의 외장(外裝)은 그러한 ‘선험적 완결성’의 다른 이름이다. 개인이 자기 삶을 가지고 끼어들어 해석하기 이전에 성서는 이미 답을 갖고 있으니, 개인이 할 일은 그 답에 준해서 자기를 돌아보면 될 일이다. 다르게 읽는다든가 항변한다든가 재해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러니 성서는 결국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인 셈이다. 아니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을 독점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이들은 그것이 마치 신탁을 수행하는 자처럼 자임함으로써 자신의 해석 행위가 해석이 아님을 주장할 뿐이다.

결국 성서는, 성서를 둘러싼 책의 제도는 독서를 가로막는다.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성서의 의미 속에 엉켜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의미를 완결짓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전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의 책은 국가가 임의적인 법을 확정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임의적인 계약을 확정짓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즉 고대의 책은 구술의 해석적 기능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책은 읽는 이마다 저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즉 책은 근대에 와서 해석적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이다.

전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 그 전통이 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를 포박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 신앙제도는 교리라는 이름의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성서를 읽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경험을 개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독서일 수 없다. 해석이 불가능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원칙이 강고하게 작동할 때 사람들은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읽기라는 행위를 수행한다. 가령,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독서를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근대 이전에는 구술이 해석을 수행하는 매체였기에 신앙은 삶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책의 종교가 된 근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라는 책이 해석을 불허하게 된다면 신앙은 끊임없이 삶과 어긋나게 된다.

책의 종교에서 책(성서)을 해석하지 않으면 신앙은 삶을 표현할 수 없다. 전통에,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삶을 담아낼 수 있을 때 책을 매개로 하는 신앙은 가능하며 그것이 성찰에 이르게 한다. 매순간, 독서할 때마다 해석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순간 다르게 읽어야만 살아 있는 책이 된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만 성서는 하느님의 소리로서의 성서일 수 있다. 하여 그래야만 성서는 책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일상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성서는 매순간 다시 쓰여야 하며, 매순간 새롭게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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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여름 신학아카데미 탈/향 - 회원강좌>

성서ㆍ삶ㆍ신앙

■ 강사_ 김창락

■ 일정_ 2009년 7월 9일 ~ 8월 27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

장소_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수강료_ 8강 8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 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기존 CMS 회원 및 신규 CMS 후원 신청자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습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운영됩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 강의개요_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비난을 넘어 조롱을 당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다수의 기독교회 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자들의 편에 가담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그리스도교’라는 그 본래적 신앙 내용에 부합하는 것인가 타락한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 담겨 있는 성서에 비추어서 해답을 모색해 보자.

            첫째 마당 :    ‘성서’란 어떤 책인가?
            둘째 마당 :    ‘역사’란 무엇인가?
            셋째 마당 :    ‘예수 운동’이란 무엇인가?
            넷째 마당 :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다섯째 마당 :  ‘역사적 예수’ 문제란 무엇인가?
            여섯째 마당 :  초대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은 무엇인가?
            일곱째 마당 :  바울은 어떤 인물인가?
            여덟째 마당 :  그리스도교 복음/신앙의 정수는 무엇인가?

* 필요한 참고자료는 문서파일로 제공함.

■ 강사소개_
본 연구소 소장. 표준새번역 성서 번역위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독일 Johannes Gutenberg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미국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객원 교수, 한신대학교 평화연구소장, 한국신약학회장, 한국민중신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 무엇이 일어났는가?>, <갈라디아서 주석>, <성서읽기 / 역사 읽기>, <새로운 성서 해석과 해방의 실천>을 비롯해, 바울과 예수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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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학아카데미 탈/향 봄학기 개강


2009년 봄을 맞아 신학아카데미 탈/향을 개강합니다.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02-363-9190으로 연락하시거나, yminjung@chol.com으로 수강자 성함/연락처/송금자 이름를 적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수강료를 입금하실 통장은 신한은행 110-233-305565 (예금주 : 김진호)입니다.

*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수강신청을 미리 하지 않고 오시는 경우 수강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강좌 하나
 바울과 현대 - 현대 철학과 현대 성서학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사도 바울 탄생 2000년을 기념해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으로 바울을 인문사회학과 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강좌를 마련하였습니다.

• 장   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 수강료 : 6강 6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마지막 7강은 열린 토론회로 따로 참가비를 받지 않습니다.
• 일   정 : 2009년 4월 3일 ~ 5월 15일(매주 금요일) 저녁 7:30~9:30


      - 1강   4.3   박진우 (사도 바울과 현대사상 I : 벤야민, 바디우, 아감벤의 바울 독해)
      - 2강   4.10  박진우 (사도 바울과 현대사상 II : 벤야민, 바디우, 아감벤의 바울 독해)
      - 3강   4.17  한보희 (무신론적 기독교와당파적 보편성- 지젝의 바울 독해)
      - 4강   4.24  김학철 (전장: 1세기 그레코-로만 세계 제국의 ‘복음’과 변두리의 갱신운동)
      - 5강   5.1   김학철 (사도: 바울의 삶과 그의 복음 배경, 내용, 구조)
      - 6강   5.8   김학철 (승전보: 바울의 복음과 ‘다른 복음들’)
      - 7강   5.15  왜 바울인가?(인문학과 신학의 만남) - 열린 토론회

• 강사 소개
   - 박진우 :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 파리5대학 사회학 박사
                 조르조 아감벤 저 <호모 사케르> 역자.
   - 한보희 :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당대비평 편집위원.
                 슬라보예 지젝 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역자.
   - 김학철 : 신약학 / 연세대 신학 박사.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신약분야 최우수논문상 수상. (주제 : 사도행전의 바울)

• 미리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는 자료
   - 1강 :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새물결, 2008
   - 2강 : 조르조 아감벤, <남겨진 시간 :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 코나투스, 2008
   - 3강 :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길, 2007
   - 4강 :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동연, 2009
   - 5강 : 게리 윌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돋을새김, 2007
   - 6강 :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강좌 두울
 포스트 예수운동의 사회사 - 역사로 읽는 성서I

지난해 말 출판기념회로 소개해드린 바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를 토대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강좌입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교   재 :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
• 장   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 수강료 : 8강 8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CMS 후원 신규 신청자와 기존 후원자는 무료입니다.)
• 일   정 : 2009년 3월 17일 ~ 5월 19일(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


       첫째 마당      3.17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경제와 사회
       둘째 마당      3.24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1)
         (휴강)        3.31          (휴강)
       셋째 마당      4.7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2)
       넷째 마당      4.14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3)
       다섯째 마당   4.21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1)
       여섯째 마당   4.28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2)
         (휴강)         5.5          (휴강)
       일곱째 마당   5.12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3)
       여덟째 마당   5.19   지중해 세계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상황
 
• 강 사 :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편지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예수의 독설』,『반신학의 미소』,『예수역사학』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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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09.03.31 06:0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울과 21세기 사상가들과의 대화’는 현재 미국내 진보신학 진영 내부에서도 뜨거

    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이슈입니다. 20세기 사상계를 지배했던 일군의 프랑스 철

    학자들 (라깡, 알튀세,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등)이 사라진 지금, 그들의 대를

    잇는 바디유,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 21세기 사상가들은 공히 기독교, 특히 바울

    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미국 사상계 내에서는 Standford 대학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바울에 대한 현

    대사상가들의 해석을 꾸준히 생산해 내며 그 열기와 관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

    즘 많이 읽히는 바울과 현대사상과 관련한 서적중에서 대표적 저작이라 할 수 있

    는 바디우의 <St. Paul>, 아감벤의 <Time that remains>, 제닝슨의 <Reading

    Derrida/Thinking Paul>등이 모두 Standford 대학 출판사에서 시리즈물로 나온 작

    품들입니다.

    미국내 신학교 중에서는 제가 재학중인 시카고 신학교가 드물게 현대사상과 신학

    의 대화를 정식 학과목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단일 신학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니

    체, 데리다, 맑스, 푸코, 레비나스, 지젝 등의 사상가들과 신학과의 대화를 도모하

    는 과목들이 개설됩니다.

    시카고 신학교에서 바디우와 아감벤, 지젝등 바울관련 이슈들을 다루는 과목은

    Marx class입니다. 지난 학기 <Reding Derrida/Thingking Paul>의 저자

    Jennings 교수님의 Marx class에 참여했는데 맑스의 저작들과 레닌의 저작들을

    읽고 나서, Post Marx에 관련된 독해를 David Harvey의 <condition of

    postmodernity>, 로쟈 룩셈베르그 <자본축적론>, 알튀세 <맑스를 위하여>, 데리

    다의 <맑스의 유령>, 그리고 바디우, 아감벤, 지젝 순으로 진행했는데, 그때 읽었

    던 책이 바디우의 <St, Paul> 과 아감벤의 <Time that remains>, 그리고

    <theology and Zizek>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유령처럼 부활하여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가? 작년 맑스세미나의 후반부 주제이기도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된 상황이고, 아울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

    료된, 오직 자본의 논리만이 보편적 질서로 자리 잡은 상황이라고 가정할 때, 이러

    한 극단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보편주의 속에서 인류가 해방이라는 원칙과 그를 위

    한 혁명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바람에서 바울에 대한 독해는 다시 시

    작되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 사건과 주체, 그리고 보편을 이야기 하면서 말입니

    다.


    저도 탈/향 강좌 <바울과 현대>에 참여해 배우고 싶어지는군요.

    나중에 자료 나오면 제게도 한부 보내주십시오.


    Peace


    시카고에서 이상철

많은 분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탈/향 강좌가 드디어 개강합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겨울 강좌는 개설하지 않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간 연구소 내실을 다지며 '각오'를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만큼 2009년 봄 강좌는 전보다 더 알차고 더 좋은 강좌로 준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봄 강좌는 총 2개의 강좌가 열립니다.

강좌 하나. 포스트 예수운동의 사회사 - 역사로 읽는 성서 I

지난해 말 출판기념회로 소개해드린 바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를 토대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강좌입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강사 :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 수강료 : 8만원 (CMS 후원자 무료)
     ■ 장소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일정 : 2009년 3월 17일 ~ 5월 19일(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

           << 더 자세한 강좌 안내를 원하시면 click!! >>


강좌 두울. 바울 강좌 (가제)

천주교의 사도 바오로의 해(2008년 6월 28일 ~ 2009년 6월 29일)를 맞아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한 바울 강좌는 두 파트로 구성돼 있습니다. 현대 서양 사상가들이 왜 바울에 관심을 갖는가를 서양 사상사적 맥락에서 설명하는 전반부 강좌(1~2강, 박진우), 바울의 복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사적, 신학적 시각으로 설명하는 후반부 강좌(3~5강, 김학철). 6강은 열린강좌로 진행되며, 두 강사님을 모두 모시고 자유롭게 대화 및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강사 : 박진우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 김학철 (신약학)
     ■ 수강료 : 미정 (추후 공지)
     ■ 장소 : 한백교회
     ■ 일정 : 2009년 4월 3일 ~ 5월 8일(매주 금요일) 저녁 7:30~9:30

(현재 바울 강좌는 강좌명과 수강료에 대해 <우리신학연구소>와 협의 중입니다. 결정되는 대로 공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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