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사가 아닐 때





 김정원*

   

    취미가 '지질히' 고상한 나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좋아하여, 특별한 절기에는 꼭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날도 오르간 연주자 근처에 앉을까 하였지만, 이미 만석이라 비껴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영국말 설교'를 알아듣고자 했지만 영 쉽지가 않다. 나의 빈곤한 리스닝 능력에 더해 어디선가 스멀스멀 거리는 퀴퀴한 냄새를 맡고 난 뒤부터는 '영국말 예배'를 향한 집중력은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냄새의 발원지를 찾고자 큼큼거렸고, 곧 내 옆의 여성에게서 나는 냄새임을 알아차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미사 모습(사진 : Leon Neal/AFP/Getty)


    그녀가 노숙자라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느 노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서너 개의 큰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고, 보따리는 거뭇거뭇한 살림살이로 가득했다. 이제 예배는 물 건너갔다. 내 코를 비롯한 대개의 감각은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돌려 맨 푸른색 스카프가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내가 입은 그것들 보다 좋아 보였다. 순간 그녀가 노숙자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조금 과감해지기로 한다. 살짝 목을 돌려 그녀의 차림새를 더욱 찬찬히 살펴보니, 꼬질꼬질 때가 가득한 소매는 베이지색을 잃은 지 오래 돼 보였고, 영근 때가 머리카락에 드레드레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노숙자였다. 시간이 지나도 코를 자극하는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녀는 부산스러웠다. 예식이 많은 성공회 예배 절차를 따라 여러 개의 책자를 찾아 보느라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쪽수를 못 찾을 때가 많았는데, 나는 빤히 알면서도 그런 그녀를 돕지 않았다. 뒷자리의 미소 띤 백인 여성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아니, 실은 그 노숙자에게 미안한 것이기 보다는 그 미소 띤 백인 여성에게 민망스러웠다. 문제는 성찬식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영국의 성공회는 대개의 경우 배잔 없이, 하나의 큰 은잔에 담긴 와인을 차례로 나눠 마신다. 잔을 들고 있는 성직자는 총 네 명. 줄을 잘 서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내 옆의 그녀가 마신 잔을 나도 사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뿔싸. 나는 그녀 바로 뒤에 서 있었고, 난 그야말로 주의 '쓴 잔'을 마셨다. 쓴 잔이 지나자, 이번엔 서로에게 'peace be with you'라고 인사말을 건네며 악수를 나누는 시간. 본디 작위적이고도 어색한 그 시간을 즐기지 않지만, 그 날은 특히 그랬다. 거무튀튀한 그녀의 손을 잡는 게 영 석연치 않았다. 그렇게 온 감각이 그녀를 향해 쭈뼛 댈 때, 온통 예민해진 나를 향해 그녀가 손을 내민다. 나를 올려다 보는 그녀 얼굴에 함박 미소가 들었다. 못 돼 쳐먹은 나를 향한 그녀의 미소가 너무 환하여 금새 주눅이 들고야 말았다. 내 손을 꼬옥 잡으며 그녀가 말한다. "PEACE BE WITH YOU"


    영국 교회에 가면, 나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닐 수' 있다. 누구를 챙길 필요도 없고, 설교를 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소개를 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고, 어색한 칭찬을 건넬 필요도 없다. 몇 명이 출석했는지 알 필요도 없고, 분주할 필요가 없고, 찬양을 크게 부를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도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더 정확하게는 친절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 영국 교회에서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목사가 아닐 때'의 나, 즉 '참 나'를 마주한다. 오르간 연주는 핑계일 게다. 실은 소극적이고 폐쇄적이고 예민한, 그런 나를 만나러 교회에 갈는지도 모른다. 공간은 엄연히 교회당인데, 내 존재가 한국에서와는 참 다르게 머문다. 이곳에서의 나는, 노숙자의 냄새에 코를 찡긋거릴 수도 있고, 도움에 소극적 일 수도 있고, 예민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다만 가끔 '양심'의 소리가 내 속을 긁을 뿐, 그 낯설면서도 편안한 '참 나'의 시간은 모순적이지만 값있다.


    양심은 모순적이지만 값진 그 시간을 방해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완전한 해방감을 얻기가 영 쉽지 않다. '평화의 인사'를 건네는 그 노숙자의 미소 앞에서 양심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곧 죄책감을 몰고 온다. 친절과 환대를 머뭇거릴 때,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책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프로이트의 생각을 빌려오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는 양심을 사회적 압력이 만들어 낸 사회 규범이 우리 속에 내면화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억압이 빚어낸 친절을 가장하지 않았으니, 그러니까 '초-규범적' 인간일 수 있었으니 그리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다. 니체야 오죽하겠나. 그는 양심의 가책이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채무자가 느끼는 부채감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들이닥쳐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의 본래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하다. 신 안에서 늘 불편한 나에게 그의 말이 꿀 같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빚 받으러 몰아쳐 오는 채권자가 아닌 이상, 나는 억지로 '유죄판결 된 삶'을 살 필요가 없다. 물론 노숙자에게 친절과 봉사를 행하던 그 백인 여성이나 환하게 웃으며 휙휙 악수를 나누던 그 교회의 목사들 앞에서 기가 죽을 이유도 없다. 그들이 나를 '까칠한 아시아 여자'로 인식하더라손, 그 판단에 아쉬워 '목회적 마인드'로 갈아 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른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너무 자위적일는지.


    "노예의식을 갖는 개인들 사이에서 타자에 대한 승인은 여론이나 평판 혹은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허영심 있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 듣는 모든 좋은 평판에 기뻐하며, 모든 나쁜 평판에 대해서는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두 평판에 예속되어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복종이라고 하는 본능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니체 전집 VI 2, 281)."


    이왕 이렇게 된 거, 포이에르바하까지 가보자. 그는 신앙인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하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에게 우월감과 특수한 명예감을 부여한다고 지적한다. 하인이 주인의 품격을 자신의 품격으로 여기듯, 스스로의 본질을 어떤 다른 본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지금껏 교회 안팎에서의 나의 시혜적 행동은 신 혹은 목사라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인격을 꾸역꾸역 다른 인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도덕, 선, 평화, 사랑과 같은 개념들을 성취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신학(anti- theology)을 벗삼아 되묻게 된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고독했지만 강했고, 사랑했지만 배신당했고, 걷지 못했지만 자유로웠던 그녀의 자아가 둘로 쪼개져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맞닿아 있다.(두명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 1939)



    죄책감이나 특권의식이 만들어 낸 '친절한 나'를 까뒤집고 나면, 마침내 '폭로된 나'를 마주하게 된다. '폭로된 나'는 여리고 작고 보잘것없다. 호의를 가졌지만 그 호의를 베풀 용기가 부족한, 겨우 그런 여자일 뿐이다. 주목 받는 것이 두려워 큰소리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아량이 좁아 불쾌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탈-죄책감과 탈-노예의식을 선취했을지는 몰라도, 마주한 '참 나'는 부끄럽다. 반신학 위에 올라 타, 의기양양 했다면 좋았으련만- 가식과 허위를 벗겨낸 나의 모습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은폐된 나'의 폭로는 한줌의 자유로움과 곱절의 부끄러움을 몰고 온다. 목사를 벗고, 성도를 벗고, '신앙'을 벗고, 죄책감을 벗고, 양심을 벗고…… 그리고 난 후에 마주하게 되는 '참 나'는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다. 비로소 유한함의 고백이 터져 나옴에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 없이 신 앞에' 엎드려지는 기도의 시간이 얻어진다. 죄책감도 없고 참회도 없는데, 신 앞에 엎드려진다. 죄의 고백 없이 눈물이 나고, 선포 하나 없는데 자유롭다. 작은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신을 끌어온다. 이 때 나를 만나러 오는 신의 손에는 회초리도 율법책도 없다. 도덕군자의 형상도 아니요, 신실한 모습도 아니다. '신앙심이 깊고 친절을 베푸는 여자'가 아닌 '소극적이고 아량이 없는 여자'를 만나러 오는 그 신은, 나를 탓하지도 않고 타이르지도 않는다. 특권의식과 우월감을 내려놓고 신을 부르니, 신 역시 권위를 벗었다. 부끄러운 나와 함께 부끄러워하고, 자유로운 나와 함께 자유롭다. 부족한 '참 나'의 모습 속에 되려 신의 기운과 신의 고백이 들어찼다. 사랑과 자비의 기운 속에서 나와 신은 거듭 만나고, 그로 인해 역시 부끄럽지만 이내 자유롭다. 다시 모순이지만, 다시 값지다. 어찌 된 일인지 반신학의 조화가 요사스러워 다시 신학적이다. 내 교육과 내 설교에 죄책감을 느낀 이들에게 죄를 고백하며 새해를 부끄러움으로 연다.


    <이번 원고는 필자가 2017년 2월 에큐메니안에 게재했던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다시 목사'로 돌아온 이 때, 내 근거를 '참 나'로 삼을 것을 다짐하며 묵혀진 글을 함께 나눕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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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환경에는 유독 취약하다[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환경영향평가제도’는 토건개발 주도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맞서서, 미약하나마 환경보호를 위해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처음부터 있었다. 파괴적인 개발사업을 정당화하는 면죄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만들었던 ‘국민의 정부’나 뒤를 이었던 ‘참여정부’에서도 이런 약점은 크게 고쳐지지 않았다.


  국가를 수익모델로 생각했던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 약점이 적극 이용되었다. 4대강 사업에서 보듯이 환경영향평가는 졸속, 날림, 형식적 절차였을 뿐이었다.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스키 활강경기장 건설과정에서 환경영향평가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분산 개최하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결국 단 며칠 열리는 경기를 위해 500년도 넘은 원시림 5만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었다. 물론 복원하겠다고는 했다. 그러나 1972년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이후 40년이 넘도록 자생수종인 가문비나무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복원되지 못했고, 결국 붉은 가문비나무로 대체해서 복원하고 있다. 복원에만 3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설치사업에서는 양양군의 환경영향평가 작성과정에서 거짓 작성, 부실 조사, 고의 누락 등이 있었으며, 환경부가 이를 알면서도 동조했다며 시민단체가 고발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름 과거 정권들의 적폐를 청산하고 있으나 환경 부분은 취약하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은 정책 수립 과정의 민주성은 확보했을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역시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환경부가 강원도 삼척의 포스파워 석탄화력발전소 환경영향평가를 끼워 맞추기 식으로 동의해준 것은 패착에 가깝다. 그동안 포스파워 석탄화력발전소는 해안 침식과 대기 건강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완대책이 제시되지 않아 3차 재보완 협의가 진행 중이었다. 환경영향평가를 완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산업부가 고시한 공사계획 인가 시한까지 착공하지 못 하면 전기사업법상 허가 취소 사유가 발생하게 되는데, 산업부는 공사계획 인가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해주어서 특혜 논란이 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부가 환경영향평가를 동의해준 것은 국민 대신 대기업의 편에 서는 결정을 한 것이다. 심지어 환경운동연합이 지난해 12월 삼척시민 1191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54.1%가 석탄발전소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말이다. 왜 시민단체 출신 장관·차관이 환경부에 가서도 환경영향평가의 고질적인 한계는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맞닥뜨린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가 문제를 만들어냈을 때와 같은 수준에선 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적폐를 청산하면서 적폐를 만드는 것을 주도하거나 공모했던 사람들과 같은 수준에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좌파·우파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고, 발전주의에서 생태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환경영향평가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환경을 더 이상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수준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적폐 청산은 미완의 혁명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2018년 새해가 패러다임 전환의 첫 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_id=201801151525281 이 글은 주간경향 2018. 1. 23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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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구금은 다르다[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새해도 벌써 한 주가 지났다. 야심차게 계획한 새해 계획이 한번쯤 흔들리는 순간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더라도 필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불쑥 생기기 마련이고, 미리 계획한 일이 하루쯤 틀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은 결심이 굳지 못한 사람을 훈계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통계적으로 사흘에 한 번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 삶이므로 계획한 일을 사흘에 한번쯤 빼먹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의 한 주, 한 달, 한 해가 전혀 새로운 일 없이 미리 계획한 대로만 반복되고 있다면 이쪽이 더 걱정되는 일상이라 생각한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삶의 건강한 자유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중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이동할 자유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자유를 함께 빼앗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형벌(刑罰)로 정하고 있다. 우리 헌법도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을 받지 아니하며(제12조 제1항), 체포·구속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도록 하고(제3항),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그 적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제6항)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보호소’라는 이름을 가진 시설이 있다. 외국인 범죄자는 내국인과 동일한 절차에 따라 구치소 또는 교도소에 구금되므로, 범죄자를 가두는 구금시설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시설이다. 법무부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외국인보호소는 체류기간 만료 등 출입국관리법에 정해진 사유로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외국인 중에서 여권이 없거나 또는 교통편이 확보되지 못하여 즉시 출국할 수 없는 경우, 여권이나 교통편을 마련하는 기간 동안 머물게 하여 외국인을 ‘보호’해주는 행정기관이다. 설명만으로 보면 공항 한쪽에 마련된 라운지와 같은 편의시설을 생각하게 되지만 현실은 철창에 갇혀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구치소와 큰 차이가 없다. 외국인보호소에 입소한 외국인은 노란 철창으로 구획된 좁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한 공간에서 10명 이상이 공동생활을 한다. 화장실을 포함한 모든 생활공간은 CCTV로 감시되고, 외부인과 만날 때는 구치소와 같이 두꺼운 아크릴 판을 사이에 두고 전화기로 대화를 해야 한다.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도 없고, 휴대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없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용공간에 설치된 전화기 한 대가 유일하다. 출입은 제한하지만 보호시설 내에서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사생활이 보호되며 인터넷 등 외부와 소통도 자유로운 외국의 보호시설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열악한 시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호’라는 이름의 구금기간에 상한이 없어 장기간 보호소에 구금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의 신체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는 것임에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지위에 있는 기관이 인신구속의 타당성을 심사할 수 있는 절차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작년 3월에 발표된 법무부의 정보공개 결과를 보더라도 외국인보호소에서 1년 이상 장기 구금생활을 하고 있는 외국인이 20명이나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난민이거나, 갑작스러운 단속으로 국내의 법률관계가 마무리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기간을 떠나 구금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환자나 구금을 최후의 수단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아동들이 보호소에 갇혀 있기도 했다. 열악한 시설에 장기간 가두어 두면서 이를 외국인의 편의를 위한 ‘보호’라고 설명하는 것은 궁색하다. 보호와 구금은 전혀 다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07205203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8. 1. 7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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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시상식을 준비하며




김의환*

 


    서른 즈음의 쓸쓸한 감성을 채 만끽할 겨를도 없었는데 어느덧 서른 살의 막바지다. 평소에는 숫자와 그리 친하지 않다만, 뭐든 정리해서 기록하고픈 연말이면 날짜와 나이, 순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다. 특히 요새는 나만의 시상식을 여는 소소한 기쁨으로 겨울밤을 채워간다. 별 게 아니라 ‘2017년 올해의 00’에 해당하는 수상 부문과 후보를 선정하고, 뚜렷한 기준 없이 떠오르는 대로 수상 여부를 결정하여 메모장에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무엇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내 삶의 1번은 무엇인지를 돌아보며 남겨두려는 마음에 이 일을 시작했다. 이 시상식은 계속 변해가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기에 꽤 유용하다.


   주요 수상 부문으로는 올해의 인물과 책, 음반과 영화, 문장, 작가, 팟캐스트, 고마운 사람, 불편한 사람, 최고의 순간, 최악의 순간 등이 있다. 기타 부문은 올해의 커피, 맥주, 안주, 치킨, 수업, 공연, 맛없는 음식, 산책, 술자리, 득템, 돈지랄, 병맛, 예능, 민폐, 정치인 등이다. 예전의 수상 목록을 찾아보니 2014년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랍스터>가 올해의 영화 부문에서 공동 수상했고,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가 책 부문에서 단독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대다수 부문에서 매년 쟁쟁한 후보들이 등장해 각축전을 벌이지만 예외도 있다. 몇 년간 한 수상자가 독식한 부문이 있었으니, 바로 ‘올해의 고마운 사람’이다.


   3년 전인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어둡고 차디찬 자취방에 누워 MBC FM4U의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뜬금없이 문자로 이런 사연을 보냈다. “철수 아저씨, 아저씨는 올해도 제가 꼽은 가장 고마운 사람 1위에 선정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진심이었다. 변함없이 그 시간, 그 자리를 지켜주며 좋은 음악과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배철수 DJ가 늘 고마웠다. 특히 그해에는 1월부터 7월까지 홀로 미국과 중남미 배낭여행을 다니며 고독과 갈등에 허덕였던 터였다. 모국어와 음악이 더없이 간절했던 시절이라 ‘배캠 다시듣기’만 한 오아시스는 없었다.


    잠시 후 내 이름과 사연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철수 아저씨의 수상 소감을 그대로 옮겨본다. “허허허. 이거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한편 제가 뽑혔다는 게 저한테는 참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슬프네요. 김의환 씨 곁에 그렇게 고마워해야할 다른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다는 거 아니에요. 2015년에는 고마워해야 할 사람 1위가 다른 사람이 꼭 되기를. 저는 탈락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 10위권 밖으로 밀렸으면 좋겠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고마움이란 건, 이게 고마움이라면, 정말 눈곱만 한, 식사하시는 분이 계실까 봐 죄송합니다만 코딱지만 한, 그런 거가 됐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철수 아저씨가 더 좋아졌다. 동시에 조금은 슬퍼졌다. 언제부턴가 그 누구도 곁에 가까이 두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외로움을 나약한 이들의 값싼 감정이라 치부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할 바에는 혼자 있기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철수 아저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2015, 2016년에도 고마운 사람 부문은 여전히 그분의 몫이었다. 외로움이란 존재의 숙명이자 평생 달고 갈 친구라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도 지금 와 보니 그땐 어찌 그렇게 살았는지, 꼭 그래야만 했나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되고 신세 좀 져도 되는데,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관계란 라디오처럼 내가 듣고 싶을 때만 켰다가 일방적으로 다시 끄는 무언가가 아닐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고마운 사람’ 부문의 경쟁이 치열하다. 여러 이름들을 넣고 빼다가 이내 순위를 매기는 일이 부질없어 그만두었다.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이번만은 여럿에게 공동 수상을 하기로 한다. ‘올해의 인물’에는 내게 사랑을 알려준 얼굴들을 적어보았다. 책과 문장 부문도 각축전이다. 먼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비평의 아름다움과 정확한 문장의 힘을 느꼈다. 수시로 펼칠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책임지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책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려고 애써보았으나 끝내 실패한 자의 기록만 읽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느낌의 공동체>)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소설가의 일>은 소설론을 가장한 인생 예찬이다.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소설가의 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라는, 간결하고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올해의 소설로 정했다. 올해의 뮤지션은 가수 이승열과 밴드 ‘9와 숫자들’로, 올해의 노래 부문 후보에도 나란히 올랐다. “계절은 다시 돌아온대도 / 떨어져 버린 건 돌아오지 않아”(이승열–돌아오지 않아) “우린 항상 어둠 속에 있어 / 계절을 알아볼 수 없어”(9와 숫자들–드라이플라워) 올해의 노래는 Daughter의 ‘Youth’다. 무모하고 불안한 청춘의 고백(“We are the reckless. We are the wild youth.”)에서 당신과 나를 보았다. 눈물겹도록 빛난다.


    다른 부문에서도 좀처럼 단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 공동 수상이 많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기억하고픈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유독 2017년에만 전에 없던 좋은 사람, 좋은 책이나 노래를 많이 만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좋은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다. 내 눈과 귀가 닫혀 있어서, 마음이 비좁고 분주해서, 게을러서, 공허해서, 가라앉아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내년에는 만남과 관계가 더 풍성해지길, 여기서 발생하는 경험과 느낌, 기억을 더 소중히 여기길 희망한다. 여담이지만 ‘올해의 고마운 사람’ 부문에서 드디어 철수 아저씨가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나셨다. 아저씨의 당부대로 고마운 사람이 늘었다고, 3년 전 그때보다 덜 슬프게, 조금 더 밝게 지낸다고 문자 사연을 보내야겠다.



*필자소개

청춘을 허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한량. 어두운 자취방의 혁명가. 문학과 영화, 음악과 라디오에 기대 하루하루 때우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21c39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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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차
    2017.12.21 23: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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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철, 김연수... 9와 숫자들...좋아하던 책들과 문장들 노래를 여기서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Daughter의 ‘Youth’는 함 찾아봐야겠단 생각.

    (클래식에펨의 명연명음 정만섭 선생이 몇년째 고마운 사람이긴 했지만 ㅎ
    저 역시 정신 없이 보내버린 올해 나를 숨 쉬게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던가 문득...
    차분하고 재미난 글 감사합니다.ㅎ)
  2. 이승하
    2017.12.23 10: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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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바빠 시간 가는지 모르고 지내다, 이 글을 보고 연말이 왔구나. 깨닫고 나의 2017년을 돌아봅니다.

    고마움을 느껴도 고맙다는 표현을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표현할 수 있을때, 또 그런 마음이 들때 표현하는 태도를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철수 아저씨도 참 유연한 분이신것 같네요. 저런 유연함을 간직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고 싶은 일이 많은 2017년이라는 말이 참, 듣기 좋습니다 ^^
  3. J
    2017.12.25 18: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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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잘 읽었어요^_^



마음의 준비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얼마 전 큰 아이의 아랫니 두 개가 빠졌다.

       어릴 적, 하얀 무명실을 조심스레 감는 긴장한 엄마의 손끝과 온기가 기억났다. “엄마가 ‘하나, 둘, 셋!’하고 뺄게”하고는 “하나~아, 둘!!”하고는 사정없이 실을 당겨버렸던 엄마의 기민한 작전.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스럽고 살짝 억울한 기분도 잠시, 혀끝으로 느꼈던 이 빠진 곳의 비린 맛과 생경했던 잇몸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아이의 생일이 늦어 그런지 또래 중 이가 제일 늦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방 아이들이 빠진 이를 자랑하며 맹구 미소를 지을 때 마다 ‘아, 나도 엄마처럼 내 손으로 직접 율이 이를 뽑아줘야지’했지만 막상 흔들리는 아이의 이를 보니 겁부터 났다. 게다가 덜렁덜렁 뿌리만 겨우 붙어있는 듯한 이가 본디 위치를 틀어 아이가 불편을 호소하니 바로 치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며 부들부들 떨며 누운 아이의 두 손을 꼬옥 잡고 발치의 과정을 목격했다. 의사는 아이의 눈에 안 보이게 팔을 멀리 내저으며 묵직한 펜치를 턱 밑으로 가져가더니 쓰윽 이를 뽑아 올린다. 아이가 움찔하더니 신음소리를 내며 “그만! 그만!”이라고 목으로 외치는데, 의사는 아랑곳 않고 두 번째 이를 또 쓰윽 뽑아 올린다.

       “율아, 이제 다 끝났어.” 긴장으로 마디마디가 하얘진 아이의 주먹을 토닥여줬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억울한 얼굴이 울음을 쏟아내려고 하는 찰나, 의사는 이 빠진 자리에 지혈용 솜뭉치 재갈을 물린다. 그새를 못 참고 솜을 물고는 웅얼웅얼 이 뽑은 소회를 밝히는 얼굴이 어째 더 억울해졌다. 뿌듯한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빠진 이 두 개를 선물로 받고는 씨익 웃는 율이도 이제 영락없는 맹구다.

        솜재갈을 푼 아이는 재잘재잘, 빠진 이를 들고 당장 어린이집으로 향해 친구들과 선생님한테 자랑하고 싶다고 설레발인데, 내 마음은 뭔가 휑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 처음 발견한 이였다. 내 눈엔 보석같이 반짝반짝하던 아이의 첫니. 이제 막 빼꼼히 잇몸 위로 드러난 이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든 찍어서 자랑하고 싶었다. 지금 율이처럼 말이다.  

       그 보석 같은 이가 뚝 떨어져, 지금은 식탁 위 작은 봉투에 있다. 

        돌 즈음, 등을 보이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 모습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마냥 내 품으로만 향하던 발걸음이 나를 돌아서는 순간, 내가 아이와 이별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현실로 다가왔다. 발달의 단계마다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다독이듯, 삶의 단계마다 스스로 해쳐나가 바로 설 수 있게, 아이가 부모와 이별해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서 돕는 게 부모구나 싶었다. 아이는 부모의 둥지에서 떠나야 할 운명인 것, 부모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엄마가 주었던 서든 어택의 짜릿한 추억을 율이에게 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나는 다시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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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바라보며 와인 한잔하다

 


박여라*




    사람들이 와인에 대해 불평할 때 뭐 이리 많고 복잡하냐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 얼굴을 생각해보자. 지구에 인구가 75억인데 그 사람들 얼굴이 다 다르게 생겼다. 똑같은 얼굴은 정말 하나도 없다. 나무도 돌도 꽃도 고양이도 다 다르게 생겼다. 자연이다.


    와인이 셀 수 없이 많고 복잡하고 다양한 것은 자연에서 왔다는 증거다. 그리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머무르지도 않는다. 물론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도 다른 개체이기에 엄밀하게는 다 다르다. 와인도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된 경우는 거의 그러하다. ‘참이슬’처럼. 그러나 한 사람이 같은 나무에서 거둔 포도로 만들어도 작년 와인과 올해 와인은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같은 포도종이어도 어디에서 어떻게 키웠는지 그해 날씨에 따라 다른 와인이 되는 것은 두말해 잔소리다.


    복잡하고 너무 많다 뭐랄 것이 아니라 다양해서 좋다고 할 일이다. 길을 걸어가는데 사람들 얼굴이 다 똑같다면 상상만 해도 징그럽다. 그리고 무섭고 끔찍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뱉어내는 수많은 말로 유난히 피곤한 계절을 보냈다. 같은 이야기도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들인 대로, 이해하는 대로,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했고 그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은 또 각기 여러 버전으로 퍼져나갔다. 돌아 돌아 나에게 다시 들리는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달라서 혼란스럽고, 이런 방식이 여러 번 반복되니 힘겨웠다.


    바벨탑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말이 다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하늘 높이 탑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을 서로 다르게 하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 같으면서도 신화 같으면서도 성서에 담긴 이야기.


    그렇다.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 뒤섞였다고. 내가 이것이 저러하다고 말할 때 그 똑같은 단어가 남들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 같은 뜻으로 쓰냐고.


    좋아하는 장난감 ‘옥스퍼드 와인 컴패니언’(잰시스 로빈슨)을 집어 들었다. 와인 언어는 세 가지 단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맛을 보고 향을 맡는다, 와인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분명치 않다, 고객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이상한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이 부분을 읽으며 그렇지! 맞다! 했다. 또한, 우리가 뭔가를 묘사할 때 표현하는 말과 평가하는 말은 다른데, 와인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이 구별이 쉽지 않다는 점도 특징이란다.


    바디감이 있다, 가 대체 무슨 말이냐고. 몸뚱어리(body)가 있다는 거냐. 무거운 느낌이 있다는 거냐. 와인 언어는 한 번에 듣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정말이지 너무 많다. 영어로도 full body의 반대말이 empty body가 아니고 light body인지 이상한데, 우리말로 옮기려면 더 이상해져서 그냥 풀바디, 라이트바디다.


    어떤 향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이끼 냄새라니. 누가 이끼 냄새를 맡냐고. (물론 와인 오타쿠들은 제대로 알고 표현하려고 돌멩이도 핥아본다.) 이끼도 장소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향이 날 것이다. 분명히 묘사하려면 자세히 설명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 있겠다. 언제나 그럴까? 문맥이 복잡할수록 더 공감대도 많겠지만, 그래서 더 오해의 여지도 클 것이다.


    와인이 복잡한 이유는 바벨탑 건설현장에서처럼 말이 뒤섞여서인가. 백과사전에 ‘와인 언어’에 대한 부분 끝에 ‘와인 철학’을 더 읽어보라는 안내가 있다. 과연 와인은 언어만 문제가 아니었다. 와인 경험이 객관적일 수 있냐가 큰 물음표를 달고 버티고 있는 문제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대해 논의는 아니라는 점, 그런데도 괜찮은 와인이라는 건 어떤 와인인가, 맛의 기준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 완전 내 취향이다.


    사람들이 같은 와인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 와인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한다기보다는 흥미롭게 한다. 이야기를 나눠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얼마큼 떫은맛이 느껴져야 아주 떫은지 약간 떫은지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신맛에 민감한 편인지 단맛에 민감한지 관심도 없었는데, 무엇을 잘 느끼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과정이 신기하다. 혼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론적으로 괜찮은 와인은 향과 맛이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하며, 시고 달고 떫고 하는 요소들과 알코올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잘 어우러져 있으며, 여운이 길게 남는 와인이다. 그런 기준들을 두고도 내가 좋아하면 좋은 거다.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시비를 가릴 수는 없지만, 와인이 맛있는 때는 그 자리의 이야기가 좋을 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 와인은 옳다. 다른 주류에 비교해 와인이 그 역할을 잘 한다. 밥상을 물리고 차 한두 잔 더 마시는 것처럼 느긋하게 이야기 나눌 때가 어울린다.


    다시 성서로 돌아와 창세기 11장을 보면, 거기엔 ‘바벨탑’이라는 말은 없다.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을 쌓았다. 야훼께서 땅에 내려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싶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말을 뒤섞었고, 사람들은 도시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1장 9절, 공동번역) 여기에 붙은 각주도 전에 없이 눈에 들어왔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뒤섞어 놓는다’는 말과 소리가 비슷해서 ‘혼란’이라 해석되었는데 갈대아어로는 ‘신의 문’이라는 뜻이란다.


    바벨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이었을까? 사람들의 말이 뒤섞인 것은 벌일까, 축복일까? 둘 다 아니지만, 굳이 고르자면 축복으로 보고 싶다. 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혼란 속에서 서로 도우며 함께 하나님께 이르라는 뜻 아닐까, 맘대로 갖다 붙여본다. 하다못해 와인도 말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알기 어려운데, 하나님은? 그러니까 저 아는 대로 재단하고 저 좋은 대로 제한하지 말라고. 경험과 이야기를 나눠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문에 함께 이를 수 있게 서로 도와주자고.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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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존재’와 가능성을 주는 ‘사랑’




강선구*

 


한 남자가 처참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며 결국 죽음밖에 답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에 그는 '아무 의미'가 없는 스스로의 존재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에 한번만 더 만나고픈 여자에게 찾아간다.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같은 존재이며, 무언가의 '의미'를 가진 그런 신성한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향해, 그녀에게 정처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들을 고백한다.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고백하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몇초간의 침묵 뒤,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나요?"  

그리고 비참하게 우는 그를 향해 다가가 포근하게 끌어안아준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죄를 저지른 그를 스스럼없이 받아주고 위로해주었다. 

예상대로라면 그를 혐오하고 비난을 해주던가, 슬금슬금 도망가버렸어여 할 그녀였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 위로가 그에게는 '의미없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은 그에게 자기 삶의 자유를 위해 지탱하고있었던 모든 합리화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거짓되게 만들었는지, 무의미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합리화로 인하여 그는 결국 스스로를 힘들게하고 죽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밖이었던 그녀의 위로는 그가 우상시했던 그 합리화들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정죄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녀는 많이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권력이나 학벌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몸을 파는 신세였다. 

외부적으로만 보면 초라한 신분의 그녀가 가진 내적인 힘은 바로 삶을 해석하는 태도였다. 

비참할 수 있는 삶의 환경들에 억눌린 가운데에서도 밝게 웃는 그녀를 처음 보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라면 자기의 끔찍한 죄들을 고백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가 된 그는, 비난 대신 위로를 받았다.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고, 받아지게 된 사건 가운데 그는 무의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거저받은 위로인 수동적인 사건 앞에서 그는 무의미의 세계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 앞에서 그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관에 참여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았다. 

개인적으로 나의 사랑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장면이다. 


한 존재가 더이상 존재함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생을 포기하려고 했을때의 고통을 상상해본다. 

그 고통은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는 불완전한 이해일수 밖에 없지만, 

스러져 가는 그 순간의 고통 앞에서 홀로 외로이 버텨내는 그장면을 떠올리니, 존재의 비참함에 버거워졌다. 


존재함이란, nothing 혹은 non-being이라는 '존재없음'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비참함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비참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함과 존재없음의 수동적 위치인 '사이'에서 인간은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반대말은 가능성 없음이다.  

존재하지 않는 현재 그 자체에 대한 가능성 없음이 아니다.  

아직 있지 않은 존재의 미래적 가능성때문에 '존재없음'은 발생한다. 

가능성 없음은 희망없음과 동의어이다. 

즉, 존재없음이란 존재에 대한 희망이 없음인 것이다. 

희망없는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원래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존재없음이라는 의미가 생성되면서 발생한다. 

존재함 가운데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존재없음 때문에, 존재는 결국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하지 않음은 의미의 죽음이고, 희망의 죽음이다.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는 현실적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죽음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을 hylomorphic being이라고 정의했다. 


복합체인 인간은 현실태라는 완전한 형태를 가질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복합체라는 의미이다. 이 한계때문에 인간은 존재없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된다. 하지만, 이 한계성 때문에 인간은 가능태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복합체 인간론은 존재론적 설명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한계성 자체가 인간에게 개별적 고유성individuality을 주고,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 개개인을 다양하고 특별하게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에게 한계를 주며 존재없음으로 향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존재없음 때문에 인간 개개인들은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향하게 할 가능성도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합체인 인간이 한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퀴나스의 creation이론을 통해서 마련된다. Creation이론은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과 수동적 가능성을 종합하는 학문적 기반이되며 존재함을 향한 기초토대가 된다. 


Creation이란, 순수 현실태 그 자체인 신으로부터 비롯된 out of nothing라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조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creation을 인식 할 수 있는 방법을 유추(analogy)라고 설명하는데,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한 신을 절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유추의 방식을 통해 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신은 이해하는 것(know)과 의지하는 것(will)을 통해 스스로 드러냄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재의 원인 되는 신의 지성을 본받아, 인간 역시 이해하고 의지하는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생산을 할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 진다. 

지성이신 신은 결국 피조물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스스로 존재함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유추는 수동적 이성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수동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인간에게 '능동적 이성'과 '수동적 이성'의 만남이라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즉, 존재에게 아무것도 아님이 아니라 혹은 무존재가 아니라, 존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신이 우리를 창조함의 의미라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창조론은 인간내부가 아닌 순수현실태인 신으로부터만 존재함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퀴나스의 인간론과 창조이론은 단순히 지성적인 '봄'으로써 존재의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참여'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의미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해야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단계처럼 점진 적인 것이 아니라, 변혁적인 전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없음에게 존재함이란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변화이다.    


아퀴나스의 창조이론이 존재없음으로부터 존재하도록 구원한다는 기반이라면, 

아퀴나스의 신을 인식함이란, 존재없음에게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게끔 돕는 지성적 기반이 된다. 

신이 존재없음을 존재하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의지적 사랑’때문에 인간은 가능성으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흘러넘친 사랑으로 인해 존재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의미는 단순한 인식적 차원이 아닌 삶의 참여로 획기적으로 전환될때 비로소 존재론적 가능성이 마련된다.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하게 만들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향하게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이론은 존재함과 이성에 대한 존재론적 가능성을 사랑으로 연결하는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비이성적인 사랑이나 그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이 의미를 부여해주는 지적인 사랑을 통해서 존재함의 의미는 존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통찰이 더 새로운 이유는, 인간의 몸과 물질성을 한계이자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현실적 물질성을 무시하는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수 있고, 

존재론적 가능성을 수동적 이성인  '사랑'을 통해서 유물론의 경계확장 가능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퀴나스가 현대적 의미의 유물론이나 관념론과 같은맥락으로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퀴나스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가진 인간론 (hylomorphic being)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변증법적 존재함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다시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으로 돌아가 존재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대단할 것 없어보이는 그들의 ‘사랑’은 왜 비참함으로부터 찬란함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을까? 

연약한 한계일 수밖에없는 인간들 가운데에, 서로를 향할수있도록 오는 신으로부터의 사랑은, 비참함 가운데에 있는 수많은 존재없음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랑'은 하나의 이론도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존재없음으로부터 존재함으로다가가기위한 '사랑'은 비참한 우리에게 살라고 주는 가능성이고 희망이다. 


존재하게 만드는 사랑을 향하여, 존재를 살리는 사랑을 향하여, 

오늘 나는 그 사랑에 삶을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 필자소개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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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어치운 진보





 김정원*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있다. 평화, 정의, 교육, 생명 등등 흔히 한신에서 신학을 했던 이들이라면 빈번하게 접했던 그리 그리한 내용의 것들 말이다. 그 중 ‘진보’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는 거의 언제나 옳았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판에서 끊임 없이 말해져 왔던 진보란 무엇이었을까? 대중없이 나열해 보자면, 양성 평등, 나아가 성 평등, 요즘 말로는 성정의. 다시 말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에 열려 있는 자세가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또 하나는 타 교단과의 일치, 일명 에큐메니칼, 이 역시 지평을 넓혀 보자면 종교간 대화, 다른 신앙에 대한 존중까지. 그리고 성서 해석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시도. 뿐만이랴, 역사적 예수, 민중 예수, 안병무, 문익환, 김재준, 문동환, 민중, 민주, 통일, 역사적, 사회적……. 여기에 학생 운동과 사회참여, 더 구체적으로는 세월호의 노란 리본, 박근혜 반대, 성명서, 촛불, 반미, 시청 앞 광장 등등을 더하면 얼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진보’는 완성되는 듯 하다.


    만약 이것이 ‘진보’라면 나는 비교적 꽤 진보적인 여자임이 분명하다. 나는 최근까지도 퀴어 페스티벌에 참석하였고, 학창시절 반민주적 상황에 분노하여 광화문에 자주 나가있었고, 4.20도 가고, 4.30도 가며, 만나는 후배들에게 내가 아는 만큼의 진보를 떠들어댔었다. 예를 들면 노동문제, 통일문제, 생태계 문제 등등. 어느 날엔가는 총장에 반대하고, 여느 교수의 행보에 저항하며 성명서를 내기도 했으며 바로 얼마 전까지도 무슬림들과 기꺼이 만나며,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종교간 이해를 돕기 위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관련 설교도 하며 그렇게 살았다. 가난을 ‘노래’하고 가난한 삶을 결심하기도 했었다. ‘민중 교육’을 지향했기에 따라서 민중지향적 삶 역시 지향했었다. 나는 적어도 진보적이기 위해, 진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의미 물음에 있어서 만큼은 게으르지 않았음을 자부할 수 있겠다.


    자, 여기까지가 진보적인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한 부분의 나는 어떠할까? 나는 용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 번 한적이 없었고, 등록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학점 관리에 무참히 소홀했다. 다른 동기들이 그것들에 몰두할 때, 그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며 속으로 비웃었고, 그들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이 없는 무지랭이들이라고까지 폄하했었다. 지금 이라크에 파병을 보낸다는데, FTA가 성사된다는데, 농민들이 죽겠다는데, 왜 저들은 저리 A+에 안달이 난 걸까. 저들은 왜 반대하지 않을까. 저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 걸까. 저들은 왜, 저들은 왜. 집회에 한 번 참석하고 우월감 한 번을 선취하고 나면, 명품 가방과 하이힐을 하고서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학생들에게는 버거울 가격의 밥을 먹었다. 남들보다 더한 열정으로 조직을 하고 교육을 하고 글을 쓰고 나면, 여지없이 (남들)보다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를 상찬하였다. 신발장과 옷장은 터져나갈 상태였고, 칼로리를 계산하며 몸매 관리를 했다. 이미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상태라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남들이 취업 걱정에 안달이 나는 것을 보며 속물이라고 얕보았다. 게다가 목사가 되지 않으려는 동기들을 보며 의식이 부족한, 혹은 기독교교육에 대한 열의가 부족한 이들로 치부했고, 보다 풍족한 삶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오해해버렸다. 


나는 정말 모두를 위해 그렇게 뜨거웠을까? 

정말 그 열정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이었을까?


    내 배움의 분열, 내 실천의 분열, 내 일상의 분열 곧 나의 분열. 분열 속에 여실히 놓여 있던 내 삶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새 꽤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얻고자 하던 이미지, 그놈의 ‘진보’를 나는 성취했다. 비록 시간도 들이고 공도 들이고 열정도 들였지만, 때때로 욕도 먹고, 은따도 당하고, 오해와 미움도 샀지만, 결국 내가 손해 본 것은 없다. 나는 ‘진보적인 여성’이 되고 싶었고, (남들)보다 우월한 의미에서의 깨어있는 여성이 되고 싶었으니까.


많이 떠들면 많이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걸까? 

광화문에 많이 나가면 평화를 실천한 인간이 되는 걸까?


    니체는 질문한다. ‘한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딜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진리를 무릅쓸 수 있는가?‘ (안티크라이스트 중). 우리가 무언가를 대의를 위해 감당하고 있다고, 혹은 타인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 다시 말해 진리를 위해 그에 따른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고 말할 때 니체의 질문은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는 대답한다. ‘모든 단계의 지식의 진전은 용기, 즉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부터 유래한다.’라고. 나에 대한 엄격함은 나의 분열을 고백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동시에 말해져 왔던 ‘진보’앞에서 물러나게 한다. 나는 그 ‘진보’로 소비되고 싶었다. 교회 현장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분열의 김정원이 아닌,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 팔아왔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해지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꼭 그렇게 평가되고 싶었다.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즉 진보를 높은 단계의 진리로 생각하는 이들의 강한 신념은 과거 금욕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욕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신을 더 높여서 금식, 철야, 수행, 묵언을 통해, 한마디로 하자면 적극적인 경건 (제사, 희생, 기도 등)의 행동보다는 궁핍 (privations)을 통해 특별한 신성성(sanctity)을 얻는 사람들이다 (뒤르켐). 즉, 금욕주의자들의 고행과 궁핍을 통해 신성성을 얻었듯이,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 보다 적극적인 진보 이념의 실천을 통해 그들은 진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의 신성성, 진보성을 권력이라 칭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 신성성과 특이성이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 지는 소위 진보 지식인들을 통해 실로 확인하고 있으니까. 니체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시대의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억압 받고 가장 결핍된 사람들 가운데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이때의 억압은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현재 억압받는 이들을 칭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엄격함이 결핍된 이들을 향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 진보성을 획득한 자들은 되려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이들을 지배하기 쉽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이들은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니까, 억눌린 자들의 슬로건을 함께 외치니까. 이런 방식으로 고난 받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 아주 착하게 지배하는 것, 이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내고자 하는 그놈의 ‘진보’는 진보에 있어 가장 결핍되고 진보에 억눌린 이들에게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착한 위선’이 아닐까?


    나는 흔히 ‘촛불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지난 박근혜 탄핵 즈음부터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떼어버렸다. 이재명이 “언제부터 노란 리본 달고 다녔냐?”라고 호통치며 으스대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행위에 담긴 나의 신념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의식 있음과 의식 없음은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누군가 묻더라. “학생 운동을 하는 학생과, 전혀 하지 않는 학생 중 누가 선하냐? 혹은 누가 더 의식 있는 학생이냐?”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위와 같은 반성을 통해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다시 또 진보적인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어하는 것인가? 거참, 그러게나 말이다. 다만 영어 과외 자리에 온 맘을 써가며 보내는 요즘, 가난, 그거 ‘노래’할 거 아니란 것 하나는 알게 되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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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의 황금률[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최근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우리나라에서 삼겹살이 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1970년대에 경제성장으로 육류 소비수요가 늘어난 일본에 수출을 하기 위해 대형 양돈산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안심과 등심만 수입해 갔기 때문에 나머지 부위, 즉 삼겹살, 족발, 머리, 껍데기, 내장 등은 헐값으로 국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일본에서 대형 양돈을 하지 않고 고기를 수입해 간 이유였다. 돼지 배설물 처리가 너무 고약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우리나라 사람은 돼지 배설물 치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우리나라 물과 땅은 오염되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게 일본의 이기적인 행태에 대해 부아가 치밀다가 조금 지나지 않아 낯 뜨거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얼마 전에 돼지 배설물 치우는 일을 하다가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소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네팔 등지에서 온 젊은 청년 몇 사람들이 7000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경북 군위의 한 농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돼지 배설물 치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매일 지하 2m의 배설물 저장통으로 사다리를 이용해 내려가서 바가지에 배설물을 담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돼지 배설물에서 발생하는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두 명이 사망한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온 청년들을 기다린 것은 돼지 배설물을 바가지로 퍼내는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육식 소비를 위해 운영되는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왜 이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돼지 배설물 때문에 대형 양돈업을 우리에게 떠넘겼다고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런 질문을 떠올리던 중에 원진 레이온 공장 사례가 생각났다. 원진 레이온 공장은 1960년대 일본 동양 레이온에서 중고 기계를 수입해서 비스코스 인견사를 만들던 곳이었다. 이 공장은 작업과정에서 치명적인 유해물질인 이황화탄소와 황화수소 가스가 발생하여, 노동자들이 중독되고 사망하기도 했던 산재의 대명사였다. 노동부는 무재해기록증을 발급하는 등 감시마저 소홀히 했다.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과 시민사회의 치열한 투쟁으로 인해 결국 이 공장은 1993년에 폐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온 생산 기계들은 그 이후에 중국으로 (나중에는 북한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우리에게 유독했던 기계들을 중국이나 북한에 떠넘기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을 했으면서도 왜 제국주의적 행태를 답습하는 것일까? 식민지 시절에 경험한 제국주의가 내면화된 탓일까? 우리가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려면 우리가 그러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받고자 하는 대접 그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사회의 황금률이다. 점점 심해지는 기후변화, 방사능 오염, 미세먼지, 새로운 화학물질 등 보이지 않는 다양한 위험이 점점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사회에서도 이 황금률은 지켜져야 한다. 위험을 특정한 민족, 계급, 집단, 지역에 돌려놓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별개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위험이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을수록 우리는 더 연대하고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황금률을 지켜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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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708211451291#csidx7b2f76b7009a05db511a332cfc5197a 이 글은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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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이 다르다고[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피부색이 다르다고 일하다 다친 상처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다르다고 작은 휴대전화 화면 속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그리움이 묻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땀 흘려 일하고 난 뒤 느끼는 바람의 싱그러움을 모르지 않는다. 월급날이면 괜히 마음 한쪽 두둑해져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만나보면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일하려면 피부색이 다르면 아픔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지난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다 다칠 확률이 내국인보다 6배 높았다. 문진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이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산재보험에 가입된 내국인 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은 0.18%인 반면 외국인 노동자는 1.16%로 6배 높았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2012년 0.59%에서 2016년 0.49%로 낮아졌지만 같은 기간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6.9%에서 7.4%로 오히려 증가했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일터가 안전해지고 있는데,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들이 일하는 일터만 오히려 더 위험해지고, 더 쉽게 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처리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일하다 다치고도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못한 경우까지 보태어 보면 사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올해 초 대구·경북지역에서 이주노동자 378명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 중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한 경우가 37.9%, 회사에서 치료비를 지급받은 경우가 35%로 조사되었다. 산재보험으로 치료받은 경우는 27.1%로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다치더라도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올해 5월 한 달 동안에 양돈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이주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작업하던 양돈장 정화조는 악취뿐만 아니라 몸에 치명적인 황화수소나 암모니아 등 유해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하거나, 제대로 된 보호 장비가 지급되어야 했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월급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 추석을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공식 확인한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액은 515억원을 넘었다. 2012년 240억원이던 임금체불액은 5년 만에 두 배를 넘었다.

    얼마 전 1960~1970년대 독일로 이주했던 한국 간호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를 관람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또 다른 분단국가 독일, 특히 분단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낯선 한국여성으로 삶을 꾸려가고,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이주민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들이 당시 독일 사회에서 여성인권과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한국의 짙은 가부장제 그늘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기도 했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오고 있다.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한국의 모습은 이에 비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다. 고향을 떠나 먼 한국땅에서 마주한 열악한 노동환경, 장시간 저임금 노동, 높은 산재 발생률과 만성적인 임금체불은 이주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에게 차별과 고통이 아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삶의 경험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10152101025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7. 10. 15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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