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심범섭*



   스물 두 해 전 군대 시절 어느날 한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자신에게 “검은 옷을 입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젊고도 젊은 그 시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결심을 금방 잊어먹고 오랫동안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나에게 사색과 배움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까운 분이 작고하신 일이지만 아마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죽음을 더 많이 보고 들으면서, 또 내 몸의 노화를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점차 자라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몇 달 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대지서점에 갔을 때 사장님한테 죽음에 대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그렇다고 하시면서 몇 년 전부터 죽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 “100세 시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의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의학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심으로, 더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말한 이유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고령화 사회이므로’라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된다면, 한 사회도 평균 연령이 높아질수록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이전보다 감정과 종교 및 전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죽음은 강렬한 슬픔과 두려움과 연관되고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생각을 시작하기에도 생각을 지속하기에도 쉬운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방법은 ‘죽는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조금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일상적인 용법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경우에 따라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을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만약 당신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나에게 잘 죽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기간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또 늘 이렇게 산다면 죽음에 임박해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금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잘 살면 잘 죽는 것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수 많은 짧고 긴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만난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한 좋은 대답으로 내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를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1. 사랑과 생명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혼자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큰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이다”라고 말한다.

    두 학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랑과 생명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실재하는 존재이고 사랑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프롬은 사랑의 구성요소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사랑은 생명을 더 증진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사실 프롬이나 틸리히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를 뜻하는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과 조화하기 위해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인 듯 하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할 때에도 사랑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사랑이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과 조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힘이라는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최상급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랑


    앞에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했는데, 윤동주 시에서 “죽어가는”의 의미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것이 “서시”라는 시에 담긴 고양된 도덕적 정서 및 완벽주의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서 인지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에 이런 넓은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살아가는 과정, 곧 죽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과정에 고통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를 맞아야하므로 서글프지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괴로움이 많아서 또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신경쓰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보다는 당장 닥쳐온 구체적인 고민거리이다. 흔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생명은 위축되며, 그러므로 고통은 죽음에 더 다가선 상태이다. 우리는 생명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럴 때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면 우리는 하나되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달리 말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을 느끼는 것, 내 안에서 생명력이 더 증가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부족할 때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 이미 생명력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경험인 듯 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미 아쉬울 것 없는데 더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결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은 이것인 것 같다. 곧,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생명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넉넉할 때 누가 나한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보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고맙고 또 의미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가까이 간 존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거나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히브리 성서 <시편> 1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개인과 공동체가 좋은 삶을 추구할 때, 결여와 고통이 없는 것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50:4). 이 말을 하는 이사야도 위로하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지를 하나님이 알려준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축하의 말을 해야할 지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도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도 있다. 말보다는 적절한 행동적 조처나 물질제공이 더 시급한 경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등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방안이 말이든 다른 것이든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암시된, 말로 위로하기의 어려움은 사실 모든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얻었다고 하는데, 위로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동시에 “위로학”을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위로학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마태복음 10:16)과 폭넓은 공부와 면밀한 분석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 위로학에서 놓칠 수 없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위로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하듯 “인생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엄연한 진실로부터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싯구에 그 영혼이 공명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위로학의 길을 가고 훌륭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3. 보편적 사랑


    이어서 주어진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표현은 “모든”이 아닐까 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비범한 의식,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을 본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에 국한되기 쉽다. 마태복음 5:46-47에서 예수가 하는 말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가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랑을 결심하는 비범한 의식은 “서시”에서는 생명있는 존재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시인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간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또한 죽는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 죽는다라는 필연을 직시하는 데에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있는 존재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태어났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과 다짐에는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대의식을 힘있게 잘 표현한 문장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돈(John Donne 1572 ~ 1631)이 쓴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나 알아보려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이러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정의에 온전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이미 하나임을 상기할 때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사랑을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으로 정의한 다음, 이 연합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하는 것[이] 분리”된 다음 “재연합(reunion)”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이 통찰은 존 돈과 윤동주 두 시인이 말하는 넓은 사랑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넓은 사랑을 “모든”이라는 양적으로 포괄적인 표현과 어울리는 “보편적”이라는 또 다른 양적인 개념을 사용해 “보편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인 표현은 이런 사랑의 요건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질적인 특성을 간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질적인 특성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동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정한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흠 없는 통로일까? 누구도 완벽한 통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완벽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걸어가듯 계속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듯한 사랑의 동기에 이기적인 추구가 우려할 만큼 도사리고 있을 때 이런 사랑은 가짜 보편적 사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가 하는 말은 이런 가짜 사랑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힘을 합쳐 이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자원은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그 의지의 지향에서 “모든” 생명있는 존재(또는 모든 사람)를 사랑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한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다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 . .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10:35)라고 말한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함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자고 초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주막 주인에게 이 초대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환자를 돌보는 비용이 두 데나리온 넘게 들어 자기 돈을 썼는데 사마리아인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는 안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때 많은 경우 현실적인 손해를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초대를 우리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맺는 말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 ~ 1970)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어느날 밤 내연녀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이 지옥이 된 듯 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었는데 그날 밤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러셀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전한 두려움은 사랑을 내쫓는다.” 이 말은 요한1서 4:18절에 나오는 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를 뒤집은 것이다. 비록 러셀이 이 말을 한 상황은 격조가 없지만 이 말 자체는 요한1서의 진술처럼 사랑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이 인간의 모든 동기의 두 가지 근원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요한1서와 러셀의 이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의미있는 통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의지는 두려움과 죽음의 어둠을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쫓아내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시”는 조용한 독백처럼 씌여졌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이 빛을 확장하는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일깨울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영역을 더 축소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죽는 길로서 잘 사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주어진 싯구를 다루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가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를 논의에서 제외함으로써 내 해석 방식에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더해지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 이 수식어구, 그리고 (해당 문장과 함께 “서시”에서 시인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를 다루겠다고 계획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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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풀뿌리에서부터 의견을 모아서 미세먼지 대책을 수립해 가게 되면 화석연료 카르텔을 해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19대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들 대부분이 미세먼지 대책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미세먼지 문제는 대단히 구조적이고 복잡하며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첫째,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발전 방식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둘째, 강고한 이해관계 카르텔이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발전 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셋째, 미세먼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나라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을 살펴보면 2013년 기준으로 제조업 연소(미세먼지 66.6%, 초미세먼지 54.2%), 비도로 이동 오염원(미세먼지 12.5%, 초미세먼지 18.2%), 도로 이동 오염원(미세먼지 10.0%, 초미세먼지 14.5%), 에너지산업 연소(미세먼지 3.7%, 초미세먼지 4.7%) 등이다. 한편, 디젤 배기가스는 미세먼지 농도에 기여하는 정도는 적긴 하지만, 인체 건강에 대한 위해성은 매우 크다. 그래서 국제암연구소에서는 디젤 배기가스를 1군 발암물질로 지정하였다.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의존적인 우리나라 산업 및 에너지 소비구조와 생산방식, 토건중심적 개발 행태, 에너지 다소비적 생활양식 등을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하다. 관료들과 경제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저항이 있을 것이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필요한 일이라서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단시일 내에 실질적인 결과를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둘째, 화석연료 중심의 카르텔은 지대추구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기반을 다져가는 매우 강고한 집단이어서 해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서해안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인해 수도권 인구 2000만여명 중 연간 1144명이 조기 사망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앞으로 20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2030년까지 더 지어지게 계획되어 있다. 전기가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이미 2013년 이후 전력소비량 증가는 경제성장률 아래로 떨어졌다. 전력설비 예비율은 30%를 넘었으며, 신생 LNG발전소들의 가동률이 저조해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더군다나 기후변화에 대비하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온 힘을 다해도 모자라는 판국에, 온실가스 배출의 주원인인 석탄화력발전소를 왜 이렇게 많이 늘리는 것일까? 정부 스스로가 공언한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급조해서 만들어낸 방안이 해외의 배출권을 사오겠다는 것이었다. 그 돈은 누가 내는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기는 이득은 사업자가 가져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감축 비용은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또 있다. 국민연금은 신규 석탄화력발전 건설 관련 회사채 약 2조원어치를 인수했고, 민자 석탄화력발전에 프로젝트 금융 대출을 제공했다.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미세먼지를 발생시키고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함으로써 세금을 축내는 석탄화력발전소에 왜 국민연금이 투자를 하는가? 누가 이런 투자를 결정한 것일까? 이것은 공공성을 도외시한 화석연료 카르텔의 지대추구적 행위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셋째, 우리는 아직 미세먼지 특히 초미세먼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제조업 공장 굴뚝이나 자동차 배기가스와 같은 1차 발생원에서 나오는 것을 1차 생성먼지라고 하며, 질소산화물 등이 수증기·오존·암모니아 등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것을 2차 생성먼지라고 한다. 수도권의 경우는 2차 생성먼지가 전체 초미세먼지 발생량의 3분의 2나 된다. 그런데 이 2차 생성먼지가 발생하는 과정이 너무나 다양해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초미세먼지와 오존은 2015년부터 시행된 2차 수도권 대기환경관리 기본계획에서야 비로소 관리대상물질이 되었다. 축적된 관리 경험이 너무 적다. 기본적인 데이터를 생산하는 미세먼지 측정소의 위치도 문제다. 서울녹색당 정책위원회가 정보 공개를 청구한 자료에 따르면 25개 도시 대기측정소 중 17개 측정소가 10m를 초과하는 위치에 있으며, 마포는 23m로 너무 높은 곳에, 성동과 송파는 각각 0.5m, 0.8m로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실제로 숨쉬는 공기의 질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역간 차별도 있다. 2016년 8월 기준 한국의 총 262개소의 미세먼지 측정소 중 1000㎢당 서울은 41.3개소, 부산은 24.7개소, 인천은 14.3개소가 있는 반면, 강원도는 0.4개소, 경상북도는 0.7개소, 충청남도는 0.9개소로 나타난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미세먼지를 마셔도 끄떡없는 체질인가?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외국발 미세먼지의 영향에 대해서도 아직 신빙성 있는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이다. 결국 미세먼지 대책을 위한 기본적인 데이터의 신뢰성조차도 매우 낮은 셈이다.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2차 생성먼지 발생과정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기간에 신규 화력발전소 건설 중단, 낡은 발전소 가동 중단, 한·중·일 환경협약 체결 및 공조 강화, WHO 권고수준까지 기준 강화, 초미세먼지 기준 신설, 학교에 미세먼지 알리미 제도 도입,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 등을 미세먼지 대책으로 내어놓았다. 대체로 방향은 잘 잡았다고 본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구조적인 문제들이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첫 번째 장애물은 우리나라 산업구조 개편과 에너지 믹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장기적인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장애물이 가장 골치 아프다. 화석연료 카르텔들이 엄청나게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화석연료 카르텔들이 공익이 아니라 오로지 사익을 위해 시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들의 지대추구적 행태를 중단시켜야만 한다. 서울시는 5월 말쯤 광화문 광장에서 3000여명이 모여서 대기질 개선대책을 모색하는 대규모 원탁회의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하여 ‘서울형 대기질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새 정부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과학적이면서 외교적인 역량이 최대한 필요한 일이다. 미세먼지와 관련한 기초연구에 투자를 해야 하고,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해서 지역간 환경 협력이 다른 분야의 협력을 유도할 수 있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우리 모두 마음 편히 숨쉬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 2017. 5. 15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70515181823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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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회피로서 책 읽기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9




 김정원*

   

    존재물음이 그칠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왜 사는가?’ 와 같은 다소 궁극적인 물음을 그만두고 싶어 질 때 말이다. 그만두기를 작정한 적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존재물음은 그쳐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거의 다 잃어버리는 때, 그러니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때,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으리라.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누구는 신을 찾으라 하고, 누구는 연애를 하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심리치료를 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믿음도 사랑도 또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와 다름 없기에, 그러한 조언들은 힘이 없다. 오히려 친밀하고 내밀했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어지는 일이며, 바로 그 관계야 말로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박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친밀했던 대상들을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크게 실감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그녀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많이 노력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비움은 채움이 사라졌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삶의 가치를 성취하고자 했다. 정의를 공부하고 공동체를 꿈꾸며,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을 삶에서 실험해보기도 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도 놓치지 않았다. 사회적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분리시켜 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용히 들여다 보는 시간도 성실히 가졌다. 그랬던 그녀는 어느 틈엔가 그 모든 성취와 물음을 그만 두기로 한다. 아니, 그만두기를 의식적으로 바랐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모든 물음에서 빠져 나와 있었다. 즉, 그 물음들의 ‘바깥에’, 다시 말해 그녀가 걷던 그 길의 ‘바깥에’, 그녀가 머물던 사회적 관계의 ‘바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다만 그녀는 원인을 묻지만 – 부모의 죽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상실, 사회적 열등감 등- 그저 희미하다.

    의미를 잃었다 말은 웃음을 잃었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어느 날, 웃음을 그친 그녀에게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다가와 장미를 건넨다. 그녀는 고맙게 장미를 받아들이지만, 장미의 아름다움이 퍽 당황스럽다. 또 다른 날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여자가 다가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녀는 조용히 그 눈물을 닦아주지만, 그 눈물은 버겁다. 장미의 아름다움과 눈물의 따뜻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들에게 마땅한 답례를 하지 못하는 그 사태 전반이 괴롭다. 고마운 그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낙담하여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자책감으로 살아온다. 그녀는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우리는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지만, 그들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늘 먼저 덮쳐온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고마운 사람들 속에서 따뜻함을 선물로 받는 것이 아프다.

    그녀가 잃어버렸다는 그 의미는 죽음과 함께 엮어져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미를 잃어버렸기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조금 복잡하게 말하면 그녀가 추구했던 정언적 욕구들을 포함한 그녀의 가치, 요구, 욕망 등 그녀의 지향점이 사라져버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산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만약 우리가 시간이라는 한계를 지니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민할 이유가 거의 없다. 내일은 무한히 돌아오고, 욕구 특히 정언적 욕구는 실패가 아닌 유예로서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다. 역시 시간이라는 한계가 없다고 할 때, 우리에게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 속에서, 우리는 그 미성취된 욕구를 간혹 선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장차 올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 보았다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그 무한한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면 어떠할까? 건조하여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삶을 지속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른 것일까? ‘무의미’의 늪에 빠져 무한을 살아야 하는 것은 축복일 수 없다. 되려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 무의미한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 즉 가장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묻는 한, 이제는 죽음이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살기를 결단한다. 무기력할 틈이 없다. 의미를 향한 역동성은 우리를 생으로 내달리게 한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선과 악, 무소유와 소유, 이기심과 이타심, 좌와 우 등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다. 각 자의 지향에만 적합하다면 죽을 이유는 없다. 지향하는 대상 혹은 지향하는 세계로의 초월을 꿈꾸며, 아니 이미 그곳으로 초월 돼 있기에 그들은 생으로 나아간다.

    다시 그 의미를 잃어버린 여자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녀가 겪는 ‘바깥’의 경험은 무얼 뜻할까? 바깥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추방되었을까? 여기서 세계는 열려 있는 공간,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세계는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다. 궁극적 가치, 가령 역사의 의미라던가, 실존의 의미 혹은 선善의 의미를 성취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내가 얼마나 대상들을 지배하거나 관리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립된다(박준상). 다시 말해 사물을 지배할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과 관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혹은 어떠한 이치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닫혀있다. 그러기에 세계의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다는, 사물들에 대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상을 갖는다”(블랑쇼). 이는 그들이 겪어 낸 불행과 고통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추방, 타인의 죽음 등 몸에 누적된 고통은 세계와의 관계를 결렬시킨다. 이는 다시 나와 나 사이의 결렬로 이어지고, 종국엔 자아의 파기를 야기한다(박준상).         

    이처럼 자아의 파기에 이른 바깥의 사람들에게 장자처럼 죽음에 초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아주 비싼 샴페인을 처음 마셔보는 사람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그는 샴페인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어 달갑진 않지만 비싸고 좋은 것이라는 주변의 말에 엉겁결에 들이켜 본다. 그러나 그 맛이 좋은지 아니 좋은지를 분별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다들 비싼 샴페인을 품평하지만, 그는 맛없음과 맛있음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기에 그 가치(의미) 또한 알 길이 없다. 그는 이내 샴페인을 둘러 싼 사람들을 떠나 바깥에서 서성인다. 즉, 眞人이 되면 생사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장자의 주장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현존 자체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혹은 죽음을 ‘실존의 본래성에 도달하는 기반’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의미를 잃고 불안해 하는 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초연하다는 말처럼 비인간적(반자연적)인 말이 어디 있는가! 되려 ‘세계의 집에 존재하지 않음의 체험’(하이데거)이라는 묘사야 말로 위로이자 복음일 수 있다.

    저 복음은 책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늘의 죽음에 관한 단상들은 대부분 현상학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몹시 난해하고도 지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철학자들의 책에 들어차 있다. 신도, 가족도, 친구도, 정의도, 평화도, 그리고 사랑도…… 이들이 지니고 있는 전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겨우 ‘책 읽기’라는 것에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바다. 어쩌면 ‘책 읽기’는 바깥의 경험을 다시 겪게 할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책감, 책이 주는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감, 사회적 요구의 재청으로 인한 불안감,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우울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실패로 인한 박탈감 까지를 몰고 와 우리를 세계의 바깥으로 한 번 더 밀어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잃은 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그들의 특성에 기인한다. 거의 모든 대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마음을 ‘내가’ 지금, 잘 안다는 것이 근거라면 근거이겠다. 은폐 속으로 첨벙, 하고 뛰어들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특히나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의 심각한 책을 읽는 그 순간에는 은폐 속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정확하게는 은폐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책과 나만이 있다. 수동적인 상태의 책과 내가 함께 있음으로써, 나 역시 수동적일 수 있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다. 책은 영화와 드라마 보다 한결 수동적인 상태로 나에게 말 걸어오기에 나 역시 역동적이게 관계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책을 이해하는 과정, 즉 몰입의 순간에는 간혹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블랑쇼의 말처럼 몰입함으로써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최소한 나를 괴롭히는 여러 현실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책 읽기로의 몰입은 이로써 동요, 불안, 우울, 죽음의 공포를 잠깐 비워낼 시간을 준다. 그런데 이 때, 역설적이게도 그 몰입의 순간에,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의미이자 궁극적으로는 결렬되었던 ‘나’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그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찾게 될 내용은 다시 의미 지평에 관한 책일 것이다. 죽음에 관한 것이거나 존재에 관한 것들… 그러한 것을 미간을 찌푸리며 읽어나감으로써 자신의 의미 상실의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동시에 의미 물음을 다시금 하게 된다는 말이다.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빨려 들어갈 때, 더 극단적으로는 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철학자들에게 묻는 그 순간에 삶의 의미는 갱신된다. 의미 상실로부터 도피하여 책 속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결국 거기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이다. 수동적이기만 했던 책은 이제 살아 움직이고 그녀의 부서져 버린 의미들의 파편을 무섭게 끌어온다. 그 파편들의 조합이 삶이 될지 죽음이 될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급했듯 자살이 의미 없음과 결부되지 않을 뿐더러, 일단은 의미를 다시 묻게 된 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는 운 좋게 사르트르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녀의 공허함과 결핍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한, 결국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계속해서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 없이 의식하는 한,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일 수 없다. 내가 내 전부를 나만으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나와 언제나 불일치의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결핍이고 불안이며 때로는 고통이며 피곤함이다. 그녀가 이를 숙명이듯 받아들이게 되면 좀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내려놓음 아니겠는가. 물론, 남는 문제는 언제나 있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등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시 찾게 된 의미는 이전에 소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기에, 이번엔 그 고마움마저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녀 안에 새롭게 정립된 의미들이 고마운 사람과 어떻게 엮일지는 진정 모를 일이다. 또한 여전히 그녀는 세계 바깥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과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닫혀진 세계가 책 읽기로 격파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의미 물음이 바깥에서 서성이는 그녀를 구원해 오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바깥에 머물며, 그 바깥과 그 바깥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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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단상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1. 

       한달 전, 뉴딜 청년 일자리사업에 지원하였다. 서울시가 공공서비스 일자리를 일정기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민간 일자리 취업 연계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특별히 만18세부터 39세까지의 청년을 대상으로 하기에 취업준비생부터 나 같은 경력단절여성 지원자들이 많다.

        운 좋게 합격을 하고, 같은 기관에 배속된 각기 다른 부서의 동료들과 1박2일 워크숍을 가게 되었다. 동료라고는 하지만, 많게는 열여섯 차이가 나는 친구부터, 대부분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넷에서 일곱 사이의 친구들, 아니 한참 아래의 동생들이다. 물론 기혼자에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게다가 최고령자로 기관에서 함께 따라온 직원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2. 

      어디가서 웬만해서는 잘 쫄지 않는 성격이지만, 동료들의 자기소개를 다 듣고 나니 뭔가 계속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입을 열면 꼰대 소리 들을까 겁나서 가능한 조용히 동료들 이야기 듣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생소한 신조어, 줄임말을 들을 때면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고 검색창을 열었다. 마치 낯선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동료들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난 대안교육을 받았다. 스스로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후회는 없다"는 패기 넘친 목소리를 내는 친구도 있고, "갑작스레 찾아온 엄마의 투병생활로 2년제 대학을 선택했고 조금 빨리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스물두 살 친구도 있었다. "알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남 이야기하듯 "그땐 세상이 너무 싫었다"는 생기 가득한 그의 얼굴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한 친구는 축구장 한 켠에 수많은 후보선수를 그려놓고는 "나는 일터에서 이 많은 후보선수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후보들이 가득하고 감독은 짧은 경기시간 동안 선수교체를 수없이 반복한다. 난 언제 벤치로 돌아갈지 모르는 신세다"라고 이야기한다. 곳곳에서 박수가 나오길래, 나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3. 

        전시를 위해 작가와 미팅을 했다. 기획안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나니, 그가 "그러면 제가 얻는 것은 뭐죠?"라고 묻는다. 전시를 통해 작가가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잠시 고민하다 아티스트 피(fee)를 이야기했다. 내가 일하는 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빠듯한 예산에 몇 번의 협의를 거쳐 최대한 작가를 배려한 거라 생각했던 금액을 이야기했다. "저는 받은 만큼만 일해요. 제시하신 금액은 제겐 딱 열정페이 수준이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다시 한번 협의 후 연락 드리겠다"하고 성급히 그를 보냈다. 내가 그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 건가? 오후 내내 체기가 가시질 않았다. 


4. 

        십여 년 전, 공공미술관에서 일급 8천원을 받고 일했던 적이 있다. 보통은 대학원 석사과정 이상이 지원하고 그것도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만 할 수 있는 인턴쉽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미술관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뽑혀 일을 하게 되었다. 나보고 일을 해보라 권했던 담당 직원은, 하루 8천원을 주면서도 나에게 세상에 다신 없을 기회를 준 것 마냥 당당했다. 그리고 나도 그 직원에게 "정말 감사하다. 열심히 일 해 보겠다"고 꾸벅 인사를 했었다. 나는 정말 감사한 일로 알았다.


5. 

        24시간을 끌고는 작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내게 "그럴 줄로 알고 있었다. 괜찮다"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어제 그의 대답이 더 고마웠다. 나는 아티스트 피(血)를 먹고 살고 싶지 않다. 


6. 

        꼬박 6년만의 출근이다. 솔직히 며칠은 살림과 육아 걱정 없이 매일 외출하는 기분이었다. 내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내 일터는 십여 년 전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웃는 모습이 마냥 내 아이들 같은 동료들에게 "젊음은 그런 거야. 무조건 부딪히고 견뎌보는 거야"라고 말 할 수 없다. 한번 잘못 부딪혔다간, 한 사람의 인생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시스템이 가득하고,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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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라!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욕망으로의 초대


   근대 주체철학의 신화가 완성되던 무렵 근대성 일반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 천재들이 19세기에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맑스(Karl Marx, 1818~1883)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들은 각기 서양 주류철학이 걸어왔던 관념과 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맞서, 물질과 무의식과 반이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욕망담론은 무의식과 반이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던 그때로부터 1세기가 흐른 현 21세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욕망에 대한 사유는 전통 사상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깡, 그리고 근래 지젝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 내지 윤리화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욕망인가. 이 대목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부터 논의하게 될 욕망담론은 자본의 무한질주에 따른 소비에 대한 욕구와 충동을 격려하고 뒷받침하는 이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21세기 현실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언명법은 자본이다. 거대하고 막강한 자본이 선사하는 강제로 인해 지구촌 인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지만, 지옥과도 같은 자본의 압제를 벗어날 전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에 욕망이론이 현실 저편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넘어가는 에너르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혹시 자본의 막강한 벽에 균열을 가하거나, 그 벽을 타고 넘을 힘을 제공하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사람들은 욕망이론을 펼쳐든다. 그럼 지금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탑승하기로 하겠다.


욕망이 출몰하기까지


   정신분석학의 기본명제는‘모든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는 것이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욕망은 억압의 산물이고 귀환을 일으키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욕망이 담론사에서 정식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걸출한 정신분석가로 부터가 아닐까 싶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어났던 예수운동이 바울을 통해 세계화되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했듯이, 이념으로서의 맑시즘을 실천철학화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견인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학의 발전과정에서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계도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라면, 라깡의 경우는‘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와 규범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남근(pennies)은 라깡의 남근(phallus, 팔루스)과 다르다. 전자가 단순한 생물학적 성기라면, 후자는 상징계(the Symbol), 즉 사회적 인정과 권위를 나타내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는 생물학적 성기에 대한 제거의 공포라기보다는, 자기의 사회적 자리와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박탈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고, 이것이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남겨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적 해석의 틀로 확장시킬수 있었던 원인은 그의 언어관에 있었다.

    1953년 라깡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치면서 본인 이론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라깡은 본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언어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특별히 그는 유아가 말을 배우는 시기인 6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울단계(mirror stage)’라 불렀다.

    라깡이 ‘거울단계’를 끌고 오는 이유는 분명하다.‘상상계(the imaginary)’를 언급하기 위함이다.‘거울단계’의 아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고, 정신적, 육체적 발달이 안 된 불안한 상태이지만,‘거울단계’아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낙관적이고 낙천적이다. 양육자(예: 엄마)와의 관계에서 100%의 쾌락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는 자신과 양육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이처럼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때리고도 자기가 맞은 것으로 오인하고,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울기까지 한다. 라깡은 이 시기를‘거울단계’라 부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유아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세상의 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유아와 양육자사이 형성되었던 2항 관계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깨지고 만다. 아이는 엄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하고 내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거대한 타자의 등장으로 폭로되고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때 아이는 자기의 성기가 색정의 원인이므로 아버지가 자신의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는‘거세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체념 속에서 근친 상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자신을 현실원리에 적용시키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시기가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시기와 겹친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면서 타자를 만나고, 내안으로 침입하는 타자의 개입을 참아내면서 아이는 자라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배우고,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시스템속으로, 즉 기호의 세계, 상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언어의 습득은 아이로 하여금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이전단계(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100% 쾌락이 붕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이때‘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이다. 이것은 사회를 작동케 하는 원칙들, 예를 들어, 도덕, 관습, 법, 관례, 예전, 이념 같은 것들이다.


욕망의 심층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심층으로 내려가보자. 라깡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너는 교수다!’ ‘너는 의사다!’ ‘너는 박사다!’ 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교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 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계에 남겨진, 혹은 상징계로 진입할 때 제거당한 내 마음 속 잔여를 향한 욕망이다. 어쩌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간직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 중 일부가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편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시카고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한백교회 담임목사이고, 한신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상철이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말로 나를 다 표현할 수 있나? 뭔가 헛헛하고 아쉽고 섭섭하고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상징계속 이상철, 현실 속 이상철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상상계속 자아의 일부를 상징계로 진입하는 도중에 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말한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낯선 타자와 직면하는 고통을 견뎌야 아기가 살 듯, 상징계의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상상계라는 제2의 자궁을 뚫고 나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은 드디어 인간(人間)이 된다.


슬라모예 지젝 曰 : "하지만, 이건 아니올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계속 나의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속 타자들의 욕망이다. 이를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결부시키면 이렇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역사를 회고해보라.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와 열사가 등장하여 조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가.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위해, 수출강국을 위해,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 진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가. 진보진영에도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보수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기표를 흠모하면서 행위했다. 대타자의 음성은, 그것이 보수의 목소리든 진보의 목소리든 간에, 현실의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를 뒤에서 조정하던 실세였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현재화할 때 사용되는 해석의 준거였고, 우리의 미래까지를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묵시였다. 욕망이란 대타자의 목소리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동되는 주술이라 보면 맞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대타자가 지니고 있다는 권위와 숭고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한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 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 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타자가 실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국제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국기 하강식을 하던 시절, 전 국민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부동자세로 태극기를 바라보던 장면이 영화에서 연출되었다. 그 영화 개봉 이후 누군가에 의해 국기하강식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다소 소란스러웠다.

    웬 국기하강식?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종북 좌파 빨갱이로 몰린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비록‘반공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비어있는 텅 빈 기표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세계인 대한민국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형태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근본주의는, 대타자를 향한 확고한 집단적 도착적 믿음위에서 탄생하였고, 그 믿음을 먹으면서 성장하고 나서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대상을 향해서는 광기를 표출하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중간정리) 쉽게 이해하는 욕망論: “라면 먹고 갈래요?” 


    앞서 우리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을 뜻한다고 배웠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완벽했던 양자합의 관계가 깨어지는 상실과 아픔을 경험한다. 누가 그랬던가 아픔만큼 성숙해진다고.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성숙이란 요구와 욕구사이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슬픔과 상실을 견디는 법이겠지만, 그 작업은 언제나 실패하여 욕망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욕망은 요구와 욕구사이의 함수관계에서 결정된다. 욕구는 보통 생리적 욕구다. 배고프면 먹고, 배설하고 싶으면 싸는 그런 욕구 말이다. 요구는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고시원에 혼자 사는 비정규직 열정 페이 청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배가 고파서 (텅 빈)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진다. 엄마가 차려준 집 밥도 생각나고, 하루 종일 일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오는 자신의 처지도 처량하다. 라면을 두 개나 먹어 배가 불러 욕구가 해결되었는데 뭐가 문제지? 아마도 그(녀)가 원했던 것은 라면이나 밥이 아닐런지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닐까.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안에 담긴 사랑 이라든지,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먹던 저녁상가에서 벌어졌던 수다와 웃음이라든지...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구의 영역이다.

    라면을 이용한 욕망계산법의 유명한 예화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 등장한다. 연상녀 이영애는 늦은 밤 문밖에 서있는 연하남 유지태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제안을 한다. 연하남 유지태는 정말 라면만 먹고 그 집에서 가만히 무사히(?) 있다 나온다. 정말 착한 교회오빠 스타일이다. 두 남녀가 이해한 "라면"은 서로 다른 의미였다. 연하남 유지태는 라면을 배가 고플 때 먹는 육체적 욕구의 대상으로 해석을 한 것이고, 연상녀 이영애에게 있어 라면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심리적 요구였다. 나의 허기진 마음을,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나의 이 쓸쓸함을 알아주고 만져주라는 싸인이 라면인데, 아직 세상을 몰랐던 유지태는 이영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나중에 둘은 헤어지고 마는데... 잘 헤어졌다!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따져 묻지만, 순수가 얼마나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지,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저열하고 구질구질하고 남루한 현상인지를 어린 유지태는 몰랐다. 그런 유지태가 여인 이영애에게는 버거웠던 것이고. 그 영화를 보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영애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도 속물이, 아니 성인(成人) 되어가나 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생리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헛헛한 무엇이 항상 나의 무의식을 맴돈다. 그것은 욕구와 요구사이의 차이 혹은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상상계에서 누렸던 요구의 100% 충족이 상징계속 대타자의 개입으로 깨어짐을 전제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욕망이 출현하는 진앙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해를 갖고 빨강구두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으로 넘어가보자. 거기에는 또 다른 욕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빨강구두와 죽음충동


   Google에서 ‘Red Shoe’를 쳤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급에로영화의 대명사인격인 잘만 킹 감독의 시리즈 포스터들이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사랑과 전쟁>의 미국판 19금 버전이랄까. <사랑과 전쟁>은 이혼직전 남녀가 변호사에게 찾아와 당신들의 입장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는 한 남자의 우편함으로 배달된 여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들이 겪었던‘사랑과 전쟁’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과 배신, 잘못된 만남, 어긋난 사랑, 뒤늦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성적 환타지를 아주 농익은 영상으로 수놓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빨간 구두’란 그야말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고 조절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미끄러져 가는 욕망의 기표다.

잘만 킹 감독의 <Red Shoe Diaries> 포스터


    안데르센 동화 <빨강구두>에 등장하는 소녀가 신은 구두가 그렇다. 마치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동하는 근육인 불수의근(involuntary muscle)과 같다. 심장에 있는 근육, 소화기관이나 생식기관에 있는 근육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소화의 촉진을 도우며, 성기를 빳빳하게하는 자동인형 같은 근육이다. 동화에서 소녀는 춤을 추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녀가 추는 춤이 아니다. 빨강구두가 추는 춤이다. 그녀의 춤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구두가 끼워져 있는 발을 잘라내는 것이다. 결국, 빨강구두는 나와는 상관없이 보이나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고,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로 하여금 끝없이 춤을 추게 하여 발을 잘라내야 한다는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 충동’과 상관한다.

    ‘죽음 충동’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겠다. 삶에 대한 충동인‘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생명을 끊으려고 삶의 에네르기와 단절하려는‘죽음 충동’은 그 제목부터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심지어는 엽기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죽음충동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의 전기사상이「꿈의 해석」(1889)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그의 후기 사상은「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와「자아와 이드」(1923)에서 언급하는 이드(Id)-에고(ego)-초자아(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에 관심한다. 특별히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욕망을 두 차원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에로스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와 반대적인 에네르기라 할 수 있는 죽음충동(타나토스)이다. 에로스가 삶에 대한 충동이라면, 죽음충동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에 반하는 에네르기인 셈이다.

   ‘죽음 충동’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와 실재(the Real)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란 상징적인 세상 밖에 있는 초월적 실재(absolute being)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다르다. 내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그 무엇, 상징시스템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전제하고 이미 상징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상징시스템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빨강구두가 그런 것 아닌가. 내안에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나와 붙어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이고 그것이 빨강구두인 셈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역사의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주체는 어쩌면 근대성이 부여한 환상일런지 모른다. 우리를 완성된 주체로 만드는 요인은 빨강구두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우리조차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영역 때문 아닐까. 그 이질적인 것들이 출몰할 때 주체는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것 아닐는지.


파국의 욕망, 혹은 욕망의 파국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징계 속 주체는 결핍과 결여의 존재다. 상상계에서 누렸던 100% 쾌락을 거세당한 채 사회화과정을 밟으며 성장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은 드러나지 않지만, 인생의 고비고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멀스멀 올라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욕망은 어쩌면 그 결여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인간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욕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대타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망은 모른다. 돈을 많이 벌어도, 박사학위를 받아도 멋진 신랑 신부와 결혼을 해도, 성형수술을 해도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알고 싶어서‘케 보이(Che Vuoi)?’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죽음충동은 이 순간에 발동한다. 온갖 내공을 다 부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삶의 에네르기는 방향을 틀어 묻는다.‘죽어버릴까. 내가 죽어버리면 대타자는 만족하지 않을까. 죽으면 이 쓸쓸함과 공허와 이별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지친다. 죽자, 죽어버리자’어쩌면 우리의 근원적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의 진정한 의도는, 마치 수학(數學) 극한(Limit)에서 0을 향해 무한히 수렴(收斂)해 가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무한질주 아닐까. 그렇다면 욕망과 존재의 근원인 제로(Zero),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구원으로 이르는 계단 아닐까. 그 비상구는 에로스로 차고 넘치는 욕망의 거리에 있지 않고, 타나토스가 똬리를 틀고 앉은 욕망의 이면 어느 텅 빈 구멍 속 아닐까.

   정신분석학에서는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지젝은 라깡이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근거로 성령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우리가 성령 안에 우리의 위치를 정하면 우리의 존재는 성스럽게 변하고 생물학적 삶 너머에 이는 또 다른 삶으로 진입한다.” 성령을 죽음충동과 연관시킨 대목은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성령임재 사건들이 갖는 특징을 언급하라면, 한마디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상징계 속 기표와 욕망과 기억과 경력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득권을 어찌 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로 인해 역사의 물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무너질 것 같이 않았던 전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완고했던 시스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성령을 체험했던 모세에 의해 파라오는 무너졌고, 성령을 체험한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면서 제국의 기독교화는 시작되었다. 성령을 체험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과 흑인간의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넘었고, 성령을 체험한 문익환 목사는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성령, 즉 죽음충동이 임하자 자아는 사라지고 텅 빈 충만이 자리했고, 그 힘으로 그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욕망의 전복성


   요약하면, 욕망은 삶에 대한 욕동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한 욕동인‘타나토스’로 구분될 수 있겠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빨강구두’는 삶에 대한 애착과 환희를 향한 욕망인‘에로스’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발을 잘라내어야만‘빨강구두’가 추는 춤이 중단되어 원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죽음 충동’을 닮았다.‘빨강 구두’로부터 시작된‘죽음 충동’은 현실 속 그 무엇도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의 욕망은 현실 저편의(혹은 아래의) 무엇을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불신과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해왔던 완벽한 대타자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보편성의 중핵이 텅 비어있다는 욕망이론의 발언은 통쾌하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완고한 신자유주의의 보편성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놓고 골몰하던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의 제안은 현실의 원칙에 집착하는 욕망이 아닌, 상징계 너머에 존재하는, 아니 상징계의 텅 빈 중핵을 겨냥하는 욕망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이 21세기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에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틈을 통해 진입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노래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이 제안하는 욕망은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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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미 없는 나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8




 김정원*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1948 

   

    고개는 빳빳이, 보폭은 넓게, 표정은 당차게. 나는 지금 런던의 번화가를 걷고 있다. 부는 바람에 보라색 스카프가 흐느적댄다. 스카프가 날아갈까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걸어야 한다. 이미 몇 번이고 왔던 길이라 헤매지 않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지나가더라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 저 모퉁이만 돌면 익숙한 곳이고, 거기에 가면 나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좀 전의 그 거리보다 익숙한 곳, 학교의 건물이 보이자 나는 안도하며 3층 교실로 향한다. 계단마다 서 있는 조각상들은 그야말로 유럽풍이다. 현대적 조형물은 간데 없고, 중세풍의 것들만 진열 돼 있다. 게시판엔 공지들이 다닥다닥하다. 손글씨로 써 낸 대자보들은 며칠 째 제목도 읽어낼 수가 없어, 나만 공지를 못 알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친다. 교실 앞에 다다르자, 잠깐 숨을 고르고 문을 연다.

    먼저 온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향한다. 교실 안 모든 풍경이 오감을 건드린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낯선 그 냄새.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인데, 섬유 유연제 향과 초콜릿 냄새가 섞인, 달달 하면서도 느끼한 그런 냄새다. 다음으로는 나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그들의 말소리. 언뜻 들어서는 알아챌 수 없기에, 언어이기 보다는 마치 그네들만이 섭렵한 기호 같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모인 이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서로의 에세이 주제를 묻는다. 내 옆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바디우에 관해 연구 중이다. 내 주제와 동일하여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맞은 편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칸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칸트를 다시 읽었기에 몸을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이제 나도 입을 떼보려 하는 찰나, ‘바흐’를 진실로 사랑하는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이 칸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빠르게 진행되는 그들의 말소리에, 하려던 이야기를 접고 그냥 경청하기로 한다. 중간중간 고개도 끄덕이고, 눈도 맞추며 ‘굿 리스너’가 따로 없다. 강제된 경청인지 자발적 경청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경청이 다시 시작됐다. 

    교수가 들어오고, 현상학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후설을 지나 하이데거 이야기가 한창이다. 나는 하이데거가 너무 좋아 교수의 말소리에 애를 써가며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는 건 그가 쓰는 귀족적인 영어 강세(posh English accent)뿐이다. 속으로 그의 악센트를 따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사러 줄줄이 나가는 그들을 따라가본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무리들처럼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듯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다시 철학이거나 신학이다. 나는 그네들이 거론하는 모든 유럽 철/신학자들의 이름을 들어보았고, 심지어 그 중 많은 책을 이미 다 ‘읽어제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릴까 하다, 오늘은 집에 가기로 한다. 나풀대는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자 한결 편하다. 어깨에 들어간 힘도 빼고, 보폭도 줄이고, 표정도 풀고 나니 한 번 더 편해진다. 삼십여 분을 걸으며 그들을 고발한다. 고발자도 나고 듣는 이도 나다. 깊이깊이 속으로- 죄 없는 그들의 죄를 뇌까려댄다. 나 말고는 유색인종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학교의 폐쇄적 수용성을 까고, 신학함의 근본이 백인들에게 있다고 믿는 그네들의 결핍된 식견을 까고, 세계랭킹을 들먹이면서 유럽의 전시물만 죄 갖다 놓은 그들의 오만함을 깐다. 헤겔을 헤젤로, 아이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틀이라 주저 없이 발음하는 영어 중심의 사고를 까고, 워킹 클라스와 구분 짓기 위한 포쉬 영어를 끝내 구사하는 그들의 교만함을 깠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유럽철학뿐인 그들의 무식함을 까고, 마지막으로 유로센트리즘, 그러니까 서구를 본질로 생각하는 대학가의 망상가들을 힘주어 깐다.

    한참을 까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후련해짐과 동시에 아주 또렷하게 나를 덮쳐오는 것 하나, 다름 아닌 ‘나’였다. 다 까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롯이 아주 그냥 나 하나였다. 하루 종일 밖을 향해 있던 내 의식의 전반이 이제 나를 향한다. 나를 비추는 의식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자아 하나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관계의 경계 밖을 서성대며 낯설어 했던 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눅들던 나. 하하, 호호 웃을 수 없어 외로워 하던 나.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나. 소외에 맞서느라 잔뜩 긴장하던 나. 누구도 나의 의미를 물어주지 않아 절망하던 나, 내 지식을 드러내지 못해 억울해하던 나…... . 태생적으로 예민한 탓에 보다 야무지게 생채기가 난 내 가엾은 자아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도착도 못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마트에 들려 찬거리도 사고, 택배도 찾아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거짓 이성이 퇴각하자 진실한 몸이 사건의 진정을 드러낸다. 몸이 놓여 있는 ‘여기’-‘지금’의 진실은 눈물이고 절망이고 불안이었던 것이다. 내 몸에 새겨진 내 언어, 내 분위기, 내 역사를 꾹 누르고서,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려 애쓰던 몇 주의 시간이 눈물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무너졌으니 이제 세울 때가 왔다. 텅 비워냈으니 이는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존재(existence)의 어원이 ‘밖에 나가 서다’라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다면, 숱하게 경계 밖에 있었으니 실로 나는 ‘존재’했다. 나를 밖에 두기도 하고, 안에 들이기도 하며 남루한 나 자신 앞에서 엉엉 울어 봤으니, 나는 제법 실존적이었다. 이제 시불시불을 멈추고, 쫓던 것의 무상함과 그 안에 머물던 나 또한 얼마나 무의미 했는지를 응시하면 된다. 나를 일으킬 명제는 간단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와 ‘나는 무의미하다’면 충분하겠다. 나는 델포이 신전 앞에나 선 듯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해야만 한다’를 넘어, ‘하고 싶다’를 넘어 ‘나는 존재한다’로 나아가길 꿈꾸며 기도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내가 신봉했던 가치와 의미들이 찢겨 나간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깊이와 충만함이 내 안에 있음을 굳건히 믿어본다. 결핍된 존재인 것을 자각했으니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그 무의미성을 뚫고 들어가 가능성을 건져내 오면 된다. 암만 이 낯선 세계에 내팽개쳐져 있다고 하나, 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나의 외부로 존재를 몰아내고, 순간순간을 쥐어짜며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구토)” 때가 왔다. 정해진 것은 없다. 본질도 없고, 필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는 것은 ‘저주 받은 자유’로 들어 찬 몸뚱이 하나. 이 몸뚱이로 낯설고 불안한 생활세계를 단독자로서 기어이 살아내면 된다. 내 몸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고독에 그대로 고통스러워 하며, 내 몸의 한계와 유한성을 솔직하게 토해내면 된다. 낯선 세계 속에 단독자로 서게 됐으니 외롭고 불안했던 그 기분에 차라리 감사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로캉탱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다. …… 나는 눈 속을 걸어와 완전히 얼어붙었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온 사람과 같았다.”(구토)


    이토록 비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 가까스로 세워 놓은 나의 결단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파란 눈의 격차가 나를 다시 주눅들게 할 것이고, 나와 낯선 냄새의 격차가 나를 다시 불안하게 할 것이다. 빨간 2층 버스가, 기호 같은 말소리가, 고상한 악센트가 다시 나를 자극하면, 나는 다시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으려 머리를 빳빳이 들고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게 된다 한들, 부지불식간에 나를 덮치는 격차감으로 나는 다시 발버둥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발버둥은 빤히 예고 되어 있다. 세계 속에서 미래로 나를 던져가며 살아가는 한,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아프고- 초월하고-의 과정은 계속 될 것이고 그로써 나는 다시 비장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위의 고백은 이미 2년 전의 것인데, 그간 나는 무수히 무너지고 다시 비장했었다. 나를 만나고, 나의 외부를 만나고, 다시 밀려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은 지독한 ‘의미 물음’의 과정일 것이다. 무의미성과 의미성 사이에서의 발버둥. 시인 조은의 성찰이 나의 것이 되기를 간구해본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 조은, 생의 빛살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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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



심범섭*



   독서모임이라는 세계에 내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2013년 가을이다. 어썸피플(Awesome People)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하는 독서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다른 독서모임에도 나가보고 또 내가 직접 모임을 주최해보기도 하면서, 지난 3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독서모임 경험을 쌓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손안에 없지만 젊은 직장인이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지난 3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왜 젊은 사회인들이 독서모임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해하면서, 또 독서모임의 좋은 영향력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면서, 독서모임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독서모임이라는 활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고 싶다. 이런 긍정적 인식은 독서모임이 어떤 구체적인 시기 또는 상황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리는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이 활동을 바람직하고 격조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물론 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 의식에서 책의 권위 자체가 약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책의 권위란 무엇인가? 책의 권위에는 수준있는 정신활동의 권위와 글의 권위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이라고 부르는 매체에는 어느 정도 격조있는 정보 또는 지식 또는 지혜가 담겨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번호부를 책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그 생김새는 책과 같지만 그 내용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심화하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 읽기도 책 읽기와는 다른 활동으로 인식한다. 비록 신문에 실리는 어떤 글은 그 내용이 좋은 책의 내용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신문의 전형적인 기능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씌여지는 기사의 내용은 쉽게 ‘책’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라는 탄식이 일상에서 큰 저항없이 이해되고 수용된다. 사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내용은 책으로 읽는 어떤 내용보다 확실히 더 수준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정보가 책으로 전달되는 전형적인 정보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전제는 책이란 쉽게 쓸 수 없는 것,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과 이어져 있다. 책이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이란 진지하고 고상한 것이며, 훈련이 있고 긴장된 노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의 권위에는 이러한 내용의 수준에 대한 판단에 더하여 글이라는 표현방식에 대한 긍정적 판단도 관여한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어렵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는 말은 나도 모르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글은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글이 말보다 더 지적 에너지를 더 많이 함축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글을 제대로 쓰려면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논리적이고 정연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하고 생각이 더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글을 잘 쓰는 일은 어려운 일, 상당한 수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지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책의 권위가 뜻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책은 공부, 배움, 교육, 지적 권위 등과 매우 밀접하게 엮이어 있다. 똑똑한 것, 많이 아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체계있는 것 등에 대한 존중과 인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의 숭상, 지성 및 지혜의 숭상과도 이어져 있다. 책에 실리는 내용은 보존하고 전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판단은 글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전파성과 영속성에 의해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철학자 안병욱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극한 책 예찬도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고 있다.


책은 인간의 창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영원의 도시 로마는 망했지만 로마의 책은 남아 있다. 신라는 무너졌지만 원효의 책은 살아있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권력자들은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은 성서는 영원히 빛난다.[각주:1] 


    책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본 다음 이제 모임이라는 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떤 모임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쉽게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쉽게 나누도록 중매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솔직하거나 진지한 대화는 매개자가 있어야만 순조롭게 생성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가씨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이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매한 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소개팅을 주선해 준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이성으로 대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동무한테도 못하는 이야기를 생명부지의 정신과 의사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이 의사의 자격을 공인하는 사회가 중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어떤 공통 관심사 아래 모임이 열리면 비록 그 모임에 온 사람이 단 두 사람이라도,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사적으로 만나서는 할 수 없는 솔직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매개자가 이렇게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중매자를 신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어떤 모임에 와서 모르는 사람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모임이라는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은 진지한 대화의 중매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모임이라는 활동 자체에 부여되는 신뢰가 있는데다가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동무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기는 늘 쉽지는 않다. 눈치를 봐야하고 분위기를 따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이 장벽을 넘기 위해 같이 술을 먹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심각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서모임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책 안에는 여러가지 생각과 표현이 있기 때문에 심도있는 소통으로 가는 통로를 아주 다양하게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화는 동시에 ‘대청’이다. 독서모임은 깊이 있는 대화대청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흥미로운 사실은 독서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그 동기로서 듣고 싶은 바람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곧, 절대다수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배우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풀어서 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같은 책을 더 풍부하게 경험하고 나아가서 내 인식과 정서의 지평 자체를 넓히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독서모임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부터도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므로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것일 뿐,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듣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이런 욕구를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경청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독서모임에 온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철학자 이태수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중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면서 고맙게도 언급해 준다.


    인문학은 스타 강사 강연에 수천명이 모이는 빅 이벤트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인문학을 읽고 입을 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 . . 인문학도 유명 강사가 멋진 강연하고 박수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다. 유명 인사의 말만 듣고 감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스타 강사 없이도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지원해줘야 한다.[각주:2]


    이태수 교수가 부각시키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생산성(productivity)’ 개념을 통해 이해해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는데, 그가 이 개념에 부여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에서도 창조하는 사람은 자기 밖의 세계를 대표하는 그의 재료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 . . 모든 종류의 창조적인 작업에서 작업자와 그의 대상은 하나가 되고, 사람은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인 작업, 곧 내가 내 작업을 계획하고, 생산하고, 그 결과를 보는 경우에 대해서만 유효하다.[각주:3]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달리 말해 내 본질이 투여되는 일에서 나와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이런 일이 창조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프롬은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을 “내 얘기를” 하는 것에 적용한다면, 내 삶의 고유한 맥락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내 본질을 반영하는 이야기, 그래서 그 언어가 나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요, 창조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듣는 이로부터 깊고 진실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반응이 말하는 이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생산적인 일, 창조에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이 동반하며, 이러한 내적 경험이 일하는 사람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창조와 그에 따르는 보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의 예가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설화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 (1:1-31의 일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는데 그의 창조물이 그가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창조 대상에 대한 이러한 내적 반응이 진정한 창조의 한 조건이라고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생성 대상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낳는 작업만이 창조라는 의미를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너 달 전 어썸피플 독서모임에서, 이 모임에 처음 온 서른 살 된 한 여자분이 모임이 끝난 다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분들이 제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 분이 느낀 기쁨과 만족이 “내 얘기를” 함이라는 생산적 활동의 보람이요, 따라서 이 분이 이 모임에서 한 일을 창조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4]

    위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으로부터 창조자의 행복에 대한 해석을 끌어냈는데,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같은 표현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함을 뜻하며, 피조물이 보기 좋다고 한 것은 인간이 삶(생명)을 사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의미가 어머니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에도 적용한다. “약속의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젖은 사랑의 첫번째 측면, 돌봄과 긍정의 측면을 상징한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음의 행복을 상징한다.”[각주:5]

    비록 창세기 이야기에 대해 프롬과 나는 접근 방향이 조금 다르고, 또 프롬은 “젖과 꿀”을 사랑에 적용하여 해석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의 틀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 창세기 이야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젖’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긍정을, 창조대상이 좋게 보임과 ‘꿀’은 이에 따르는 행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젖과 꿀이 흐르는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태수 교수의 말에서 그는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듣기만 하는 것과 독서모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독서모임에서 말하기의 능동성과 참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지할 수도 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서른 살 된 젊은 여성의 소감에서도 이 분 개인의 과거 소통 경험과 우리 (여성)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소통체험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2, 30대 젊은이들도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실 지난 3년 남짓 내가 참석한, 젊은 직장인이 주로 참여하는 수 많은 독서모임에서 받은 인상도 이와 일치한다. 달리 말해 대한민국은 소통의 젖과 꿀이 매우 부족한 사회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쉽게 성사시키며, 너와 나가 함께 이루는 창조를 경험하게 하는,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는 훌륭한 독서모임이 더 많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첫머리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창조물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여섯 번은 (매번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창조 단계가 끝났을 때 나오고 마지막 표현은 창조세계 전체에 적용된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창조물에 대해 ‘좋다’라고 느꼈을 때 이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다음 단계 창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창조의 창조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경험하는 소통의 창조에도 이런 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이 넘쳐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고 더욱 흥성하기를 기원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미와 진실의 합창>, 삼육출판사, 1990, p. 59. [본문으로]
  2. 조선 비즈, 석학 인터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전병근 기자, 2014.10.25.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3. Harper & Row, New York, 1956, p.17. 번역과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4.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창조를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화대청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이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여자분이 말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행복은 듣는 사람의 경청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깊이 있는 말하기와 듣기는 개인적인 만남이나 책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창조적인 대화와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역시 위에서 말한 책에 결부된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사회적인 권위가 있는 한 책을 매개로 말하는 사람은 이 권위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권위의 성격과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책의 권위와 더불어 갈 수도 있고 거슬러 갈 수도 있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책의 권위에 편승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비판할 때 이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저자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의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책의 권위와 교섭하면서 얻는 권위가 그가 얻는 창조의 기쁨과 만족에 직접 관여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49. 번역은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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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에 48키로 여자 일기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7




 김정원*


    내 일상에 가장 깊숙하게 스민 욕망 중 하나가 ‘마른 몸’이다. 이 욕망의 출발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몸을 아름답다고 생각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아주 바짝 마른 여자아이였다. 키는 날로 크는데, 살은 당최 붙질 않았다. 키에 맞춰 교복을 입고 있었던 지라, 자루를 뒤집어 쓴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키는 170이 다 돼 가는데, 몸무게는 겨우 40키로에 그쳤다. 아빠는 ‘용든약’을 지어왔다. 약발이 좋았는지 겨우내 살이 올랐고, 고등학교에 갈 적엔 48키로까지 몸이 커져 있었다. 그거나 거기까지였다. 키는 172까지 계속 컸지만 몸에 살은 붙지 않았다. 다이어트커녕 한 끼도 놓치지 않고 꼬박 밥을 먹어도 ‘축복받은 유전자’ 덕으로 나는 계속해서 ‘마른 여자’였다. 그로부터 쭉 48키로는 어김이 없이 나와 붙어있는 숫자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에 들어가도록 몸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 48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48키로의 여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종이 인형이란 말을 듣고, 방아깨비 다리 같다는 얘길 들어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48키로였다. 주위에서 “살 좀 쪄~ 조금만 더 찌면 훨씬 건강해 보일 거야.” 라는 말을 백 번을 듣는다 한들, 나는 48키로의 여자로 살고 싶었다. 평생을 마른 여자로 살아왔기에 마르지 않은 몸을 갖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욱 솔직하게는 나는 계속해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고 싶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자 몸의 판도가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노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도 온전히 48키로였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진 여자라도, 자연의 파편일 뿐인 몸뚱이가 노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초 대사량은 떨어지고 먹는 양은 그대로이다 보니, 1키로가 늘고 다시 1키로가 늘어 몸무게는 50키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망언이겠지만, 50키로에 식겁한 뒤로 나의 일상은 변했다.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나는 이미 나 스스로를 퍽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그에 하나를 더한 것이다. 이제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러니까 내 정신과 영혼이 통으로 깃든 내 몸뚱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 다이어트 때문에 수선스러워 보이면 곤란하다. 나는 생태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고, 자본주의를 반대함은 물론, 목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싸질러 놓은 게 많기 때문이다. 복인지 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 저 자리에 불려 다니며 온갖 그럴싸한 말을 많이 한 탓에, 겨우 ‘다이어트나 하는 여자’로 보여져서는 안될 일이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당당한 여자’라는 주변의 기대를 져버릴 수는 없었다. 표준 몸무게를 훨씬 밑도는 몸뚱이를 가졌음에도, 하루 1500칼로리 이하로 식사량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로 많은 여성들이 불편할까 조바심이 났다. 전달했던 메시지들이 ‘구라’로 취급 당할까 염려됐고, 진정성 없는 여자로 전락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염려들은 다 몹쓸 것들이다. 사태의 핵은 다른 이들의 기대감이나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닌,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은폐되어야 할 것(되었으면 하는 것)들의 폭로, 즉 스스로를 ‘짜가’라고 인식되는 그 순간을 마주하는, 바로 그 좌절감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내 방구석에서 행해지는 다이어트지만, 그러니까 누구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나만의 은신처에서 일어나는 다이어트지만 불편한 마음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대신,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이 나와 함께 있었다.

    코르셋과 뽕브라 따위는 벗어 던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주워먹고 있는 내 꼬라지가 싫었다. ‘마른 몸’을 향한 욕망은 결국 시장의 논리에서 오는 것을 일찍이 알던 탓이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미의 기준을 표본삼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웰빙과 몸짱 아줌마는 다른 말이 아니다. 둘은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한 구미정의 표현이 비상하다.


주름살과 흰머리, 기미와 검버섯, 터진 배와 늘어진 뱃살은 그 자체가 자연이고, 역사이며, 실존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이 가감 없이 기록되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정직한 몸은 그 자체가 예술이고, 시이며, 영성이다. 그런데도 ‘젊고 탱탱한 몸’을 우상시하는 시장의 논리 앞에서 정직한 몸은 당장에 추한 몸으로 전락하니, 이 무슨 횡포인가 싶다(구미정, ‘몸의 신학’, 2006).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라는 외침은 페미니즘의 기조와 같은 것이며 나아가 그 자체로 생태적이다. 노화에 마냥 달가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화야 말로 자연의 섭리를 온 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몸을 포용하는 일이야 말로 사람과 사랑을 배우는 일이며, 정직함을 성취하는 길인 것이다.


    하! 알면 뭐하나. ‘지금, 여기의 나’는 그저 마른 몸 따위를 지향하고 자빠져 있는데…… 속을 파 보면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예쁜 여자’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하질의 에코페미니스트인 것을. 누가 아는 것을 힘이라 했나. 앎은 그저 고뇌이고 고통이며, 죄책감이자 우울감이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이 늘수록, 살도 함께 늘어난다. 영국에 머물며 살은 조금 더 붙었고, 덕분에 조금 당당해질 수 있었다. 키로 수가 조금 늘 때마다 나의 진정성도 늘어간다. 아무도 모르게 살이 찌고, 아무도 모르게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살이 찐 만큼 페미니스트로서의 진정성이 회복되고, 허벅지가 통통해진 만큼 생태주의자에 보다 가까워진다. 단, 죄책감이 덜어지고, 진정성을 얻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살이 찌면 못생겨진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른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왜곡된 기준에서 온다. 그렇다면 이제, 왜곡된 미의 기준을 갈아 마시면 될 일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바꿔 보려 노력해도 이게 쉽지가 않다. 나는 다시 우울감에 젖는다. 이 때, 내 맘 속의 제일 가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이 탄로 난다. 그게 아니고서 살이 조금 붙었다고 이리 우울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순간 위로가 되는 것은 “나의 육체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육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니체의 말이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주장은 육체를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정신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을 비판한 것이지만, 나의 고뇌와 실존적 물음들이 ‘몸뚱이’를 통한 것이라고 할 때, 그의 말은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나의 우울감은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소유물, 우리의 가장 확실한 존재, 요컨대 우리들의 자아로서의 육체”를 곱씹으며 발생한 것이기에 나는 그나마 철학적이었다. 그냥 그렇다 치자.


    오늘 아침 몸무게를 달아보니 51키로를 조금 넘어간다. 3키로어치의 에코페미니즘과 진정성을 얻었다. 물론 3키로어치의 우울감도 함께 얻어왔다. 그러므로 나는 저녁으로 닭가슴살과 토마토를 먹을 것이고, 당분간 라면은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며 나는 다시 죄책감을 느낄 것이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라면을 먹을 것이다. 먹고 빼고, 먹고 빼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아주 미친년이 널을 뛴다. 앎과 삶의 분리가 주는 형벌이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는 한, 적어도 ‘다이어트 하는 여자’로 사는 한, 나는 제 명에 못 살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를 누가 구원하겠나. 결국 더한 각성과 반성과 결단 밖에는 없다. 그게 안 된다면 스스로를 좀 놓아주면 되는 일이다. 나약한 나에게 그러한 용기가 작동된다면 말이다. 다만 이 상태가 어느 방향으로든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기에 나는 내가 몹시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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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소연
    2016.12.29 09:2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이어트는 마른여자든 뚱뚱한여자든 여자들의 평생숙제라하잖아요

    저는 최근 7개월간 다이어트를 해서 10킬로는 감량했는데
    일하는 곳에 원장님의 질투도 엄청 났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담니다.

    저는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꺼같아요
    죄책감을가진다는건 주의보는눈인데
    솔직히 여지로 태어나 예쁜몸매가지는게 소망이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자기관리중하나입니다.
    건강한생각을 가지고 스트레스는 받지마세요
    화이팅



예쁘지 않아도 돼



유하림*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난 뒤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말이다. 가느다란 팔 다리에 잘록한 허리,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큰 눈과 오똑한 코, 빨간 입술, 매끄러운 피부.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쁘지 않은걸까? 그럼 나는 예쁘지 않은거네. 근데 나는 꼭 예뻐야만 하는걸까? '예쁘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만들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4kg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어딜가나 덩치가 큰 편이었고 덩치가 큰 사람들에겐 으레 따오르는 별명들이 내게 붙여졌다. 엄마는 소아당뇨나, 이른 초경을 걱정하며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도록 먹던 밥을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큰 돈을 들여 다이어트 약을 사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옷을 사야 할 시간이 오면 꼭 우울해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내가 입고 싶은 짧은 치마나 무늬가 화려한 옷들을 고르면 엄마는 ‘뚱뚱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옷들을 사주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래도 사달라며 졸랐던 것 같은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이내 엄마 말에 수긍하게 됐다. 싸우기도 싫었을 뿐더러 엄마 말 처럼 뚱뚱해보이는 옷은 입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무난하고, 덜 뚱뚱해 보이는, 그리고 사이즈가 맞는 옷을 찾아서 구매했다.   

   어린 시절은 내 몸에 대한 혐오와 덜 뚱뚱해 보이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예뻐지고 싶었고, 뚱뚱한 사람은 예쁘지 않으니까. 음식을 보고 식탐이 생길 때는 죄책감이 들었고, 입안 가득 달달한 음식을 먹을 때면 불안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그나마 타고나게 낙관적인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는 빠지겠지, 뭐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중학생 정도 되니 대놓고 ‘뚱뚱하다’고 놀리거나 면박을 주는 애들은 없었다. 그러나 예뻐지고 싶은 욕구는 날이 갈 수록 강해졌다.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 20명 남짓한 기숙형 대안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각각 10명씩 있었다. 언제인가 그 10명의 남자애들끼리 모여 여자애들의 얼굴, 몸매, 성격 같은 것들로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고 했다. 여자애들은 화가 나서 다같이 남자애들에게도 똑같이 순위를 매기고, 칠판에다 그 순위를 적어놓았다. 나도 화가 나기는 했지만 실은 남자애들한테 왜 매력적으로 보이지 못할까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아마 그때 그 경험이 내가 내 몸을 더 혐오하는 계기이자, 예뻐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한 동기가 되었던 듯 싶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혐오에서 아주 조금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 애는 학교의 신입생이었고, 자신을 잘 챙겨주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1년 정도 연애를 하며 뚱뚱하지만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뚱뚱하진 않다는 말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래도’ 매력적이라는 말로 용기를 가졌다. 그러나 스스로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마음 속에는 날씬한 몸과 예쁜 얼굴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삶은 앞서 말했듯 태생적으로 낙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성향 덕에 견뎌낼 수 있었던거지 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내 몸을 계속해서 혐오하고 있었다. 정작 나는 내 몸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 사람들은 자꾸만 내 몸에 대해 말했다. 통통하게 나온 배나, 친구들보다 한 사이즈 옷을 크게 입어야하는게 걱정스런 일이 된건 그런 주위사람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내게 해방이고 곧 구원이다. 세상이 만들어낸 ‘예쁨’의 기준 따위에 내가 나를 맞춰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부터 갑자기 내 몸이 자랑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 혐오하지 않음으로서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사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많이 편해졌다.  

   뚱뚱함은 상대적인 기준이지만, 어쨌든 난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뚱뚱한 여자다. 근데, 뭐, 어쩌라고.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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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촛불집회는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큰 맘 먹고 아이들과 집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촛불집회에 가보고 싶다는 여섯 살 첫째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하긴 했는데, 갑자기 남편 일정에 변동이 생겨 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로 광화문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승하기 직전 잠이든 두 녀석들. 첫째는 겨우 깨워 손을 잡고, 깊이 잠든 십팔 킬로그램의 둘째는 어깨에 둘러업고 환승을 합니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고,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내가 이러려고 집회가나 싶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남편과 일행을 만나 서대문에서 광화문,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 걷고 다시 광화문으로 청계광장으로 두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큰 아이는 곧잘 걸었지만, 낯선 분위기 때문인지 둘째 아이는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런 아이들을 안고 업고 목마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 아이들이 집회에 나온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는 어른들이 초콜릿, 사탕, 귤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LED 촛불을 얻었는데, 그걸 본 첫째 녀석이 자기는 왜 촛불이 없냐고, 촛불집회인데 촛불은 언제 주냐고 혼자만의 시위를 시작합니다. 아빠를 이리저리 끌고 동동거리며 '나에게도 촛불을 달라'는 촛불시위를 시작한 거죠. 한참을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지친 남편은 결국 광화문에서 천원을 주고 촛불을 삽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형님의 진짜 촛불이 갖고 싶은 아우가 또 울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집회가 다 이런 거 아니겠냐며 저희 부부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어루만지며 따끈한 음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율아, 오늘 촛불집회 어땠어?" 아이는 언 몸이 녹는 중인지 그저 멍하니 아무 대답도 안합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집회가 어땠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는 그저 촛불을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기대보다 싱거운 반응에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큰 아이의 친구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노는 아이들이 조용하다 싶더니, 태극기를 그려 나와서는 흔들며“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며 밥상 주변을 뛰며 돕니다. 한창 어수선한 세상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른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른들이 집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집회에서 본 건 있어서 참견하려면 뭐라도 적어 들고 해야겠는데 두 녀석 모두 까막눈이라 태극기라도 들고 나가보자 했나봅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물으니, 박근혜가 누군지도 ‘하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답니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뛰느라 숨이 찬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묻는 말에 “몰라,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그린 태극기를 다시 봅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합니다만 제법 건곤감리도 흉내 낸 모양입니다.(어쩌면 순서가 뒤바뀐 모양이 꼭 지금의 우리나라 같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흔적입니다. 집회 때 어른들의 모습도 그렇게 살폈겠지요. 어른들이 무엇을 외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태극기의 색과 모양을 새기듯 마음에 새겼을 겁니다. 광장 곳곳에 나부꼈던 태극기. 태극기가 우리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여섯 살 꼬마도 압니다. 엄마, 아빠가, 그리고 많은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고 짐작해주길 바랄뿐입니다. 

        어른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사태를 아이에게 나쁜 임금의 허튼 짓쯤으로 설명하기엔 저도 이제 더 이상 화가 나서 못 하겠습니다. 겨울 추위 속에 더 이상 많은 사람 고생 않게 하루 빨리 정신 차리고 방 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세월호 7시간! 박근혜를 구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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