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와 새로운 정치[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지난 3월 20일 서울시의회에서는 촛불혁명으로 어렵사리 진전시켜놓은 민주주의를 여지없이 짓밟는 폭거가 발생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야합해 서울시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안을 자기들 이해관계에 맞게 수정해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심지어 저지하려는 동료의원들에게 폭언을 한 의원도 있었다. 이로써 서울시에서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 비해 2인 선거구와 3인 선거구가 늘어나고, 4인 선거구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2개의 거대정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후보는 서울시의회에 진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소위원회는 3월 15일 회의에서 임기만료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참여해 두 번 모두 의석을 얻지 못하거나 100분의 1 이하의 유효득표를 하지 못한 경우 정당 등록을 취소한다는 내용의 정당법 개정에 합의했다고 한다. 정당 등록 취소는 과거 군사정권에서 소수정당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독소조항이었고, 지난 2014년 녹색당 주도로 헌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위헌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다시 이를 뒤집어엎겠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기득권을 가진 거대정당에 유리한 정치시스템을 가져가려는 속셈이다.


소수정당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면 다양한 의견들, 특히 소수자나 사회적·생물학적 약자의 목소리, 생태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는 지역 혹은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없고 정치는 오직 기득권자들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의 정치는 좌우를 막론하고 산업화 세력들의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지향성은 거칠게 말하자면 산업화의 결과물 분배방식을 두고 입장 차이를 보이고 경쟁을 벌일 뿐, 산업화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또 산업화가 초래한 환경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산업화 시대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접근할 뿐이다.


산업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기후변화, 미세먼지, 방사성 폐기물, 미세플라스틱 등의 심각한 환경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새로운 목소리가 기존 정치판에 들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거대정당에 포섭된 정치판은 최악의 미세먼지로 가득한 도시와도 같다. 여전히 대기업 및 토건세력과 유착되어 있는 거대정당들이 전횡을 일삼는 정치판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오기 어렵다.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실험이 시도되어야 하고,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정당들이 정치적 장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악몽 같은 미세먼지를 만들어낼 뿐인 산업화 세력에게 작별을 고하는 새로운 정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수정당이 진출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의 창이 지금보다 더 열려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_id=201804021517201#csidx225fa6797dcb96cb88ec988ac72df65 이 글은 주간경향 2018. 1. 23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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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말라버려 마실 포도주가 없을 거라고

 


박여라*




주변을 돌아보니 지금 내가 건사하는 생명체는 네 개다. 회사 책상 위에 놓은 화분 두 개, 그리고 집 마당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랑 포도나무. 회사에 있는 스투키와 자미오쿨카스는 크기가 작기도 하지만 그저 지겨운 일과에서 딴눈 팔게 하는 게 목적이자 존재이유다. 집에 있는 고양이와 포도나무는 존재감도 훨씬 무겁고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게 희노애락을 준다.


고양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는 것으로 하고 포도나무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 해 전 서울 강남 어느 와인학교에서 분양한다고 하여 하필 그날따라 종일 쏟아지는 비를 뚫고 가서 가져왔다. 그때 두 그루를 받아왔다. 화이트와인 만드는 샤르도네는 수도관 묻는 공사 와중에 땅 파는 삽에 뿌리가 패여 죽었고, 남은 하나는 까만 메를로인데 고맙게도 해마다 계절 따라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음을 뽐낸다.


그러던 지난겨울. 영하 10도를 훨씬 밑도는 날들이 여러날 계속되기를 몇 번 거듭하더니 봄이 오기도 전에 어느날 마당에 있는 대나무가 푸른빛을 잃었다. 추위가 심해지면 고양이가 자기 집에서 잘 지내는지 아침저녁으로 살피고 물그릇에 물이 얼어있으면 바지런히 새로 물을 떠다 주기만 했지 지난가을 잎이 다 떨어진 뒤 포도나무는 돌볼 일이 없었다. 청청하던 대나무가 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아, 포도나무도 얼어 죽겠구나.. 했다.


구약성서 요엘서는 무서운 심판이 온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요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에게 전한 말씀이다. 너네 계속 이딴 식이면 메뚜기떼가 다 쓸고 지나간다. “포도 농사가 망하였으니, 새 술을 만들 포도가 없다… 포도송이가 말라 쪼그라들고 포도나무가 말랐다.” 딸랑 세 장뿐인데 요엘서처럼 무서운 경고가 또 있을까. 마실 포도주가 없다니. 으어.


내 포도나무가 죽었다는 절망에 늦겨울까지 망설이다 3월 첫 주말이 되어서야 가지치기를 했다. 작년에 새로 난 가지에 하나, 둘, 마디를 세고 싹뚝 싹뚝 잘랐다.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가지를 자르며 단면을 만져보니 말라 있었다. 에고.. 얘 진짜 얼어 죽었네. 여러 해 키웠는데 이렇게 끝이라 생각하니 몹시 섭섭했다. 그래도 뿌리까지 얼어버린 게 아니면 한두 해 있다 어디서라도 순이 나오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풀리고 봄비가 내리니 그때마다 가지 몇 개 끝에 물이 올랐다. 너무 늦게 가지치기를 하면 이럴 때 감염위험이 있다고 하던데 모든 가지가 죽은 건 아니라서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무가 살아있었다.


마실 포도주가 없다며 너네 다 망했다는 요엘의 경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바꾼다. 근데,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혹시 마음과 뜻을 돌리실지 누가 아냐? 그리고 마음 아파 하시고 너희를 불쌍히 여겨 비를 내리시고, 포도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고 포도주가 넘칠 것이라고. 그리고 심판의 때에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며칠 전 포도나무에서 새순이 하나 나왔다! 가진 것도, 알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참 보잘것 없으니 맡길 뿐이다. 내가 건사한다는 생명체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뭐가 있나. 비를 내리는 대신 물을 주는 정도다. 그냥 작고 볼품없지만 소박하게 흉내 내는 일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포도잎은 또 부쩍 자라겠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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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동성




강선구*

 


훤칠한 키에, 냉철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던 그는 말 그대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전문 통역사 이상의 동시통역으로 청중들에게 단순히 말을 전하는 감동 이상을 전해주는 그를 처음만났을 때, 나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았었다. 그의 카리스마와 냉철한 이미지는 쉽게 다가가 말을 걸기가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깊이있는 대답들을 전해줄 것만 같은 진중함과 단단함을 풍기는 사람으로 느껴졌기에 나도 모를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만난 그에 대한 첫 인상이다.

이후의 만남들을 통해 그는 기대이상으로 나를 비롯한 청년들에게 깊이있는 시각을 제공해주었고, 냉철한 사유 가운데에 흘러나오는 따스한 위로를 전해 주셨던 분이었다. 그는 내게 소중한 멘토이자 스승이었고 선배였다. 그리고 아쉽고 슬픈마음을 다 표현할 길 없게도 지난 3월 25일 마흔 여덟의 일기로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하신 김동성 목사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물론 그분을 많이 알지 못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의 아주 작은 한 조각만을 가지고있을 뿐이지만, 그분에게 받았던 감사한 가르침들을 글로 남기며 추모하고 싶다.



내가 동성 목사님을 두번 째로 만난 건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세계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사무실이었다. 목사님은 WCC에서 디아코니아 및 아시아 국장을 맡고 계셨다.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무엇이냐고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세계 1,2차 대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악에 대해 저항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다양한 교단들이 함께 신앙으로 일치되고 협력하기 위한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책으로만 배워와서 판타지만 가득했던 나는 그 곳에서 인턴을 하면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화려한 태동기와 부흥기만을 학습했던 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에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협의체로써 중재와 화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기관의 성격이 나는 소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의 중심을 흔들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는 힘을 갖기를 바랬었던 것 같다. 시민사회나 교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보편성의 담론을 주도하고 변화를 디자인해 내는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믿고 싶었었다. 나는 ‘운동’이 너무 하고싶었던 나머지 에큐메니칼에 대한 더 깊고 다양한 정의들에 귀기울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의미에만 집중하며 인턴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인턴 중 참여했던 크고 작은 회의들에서는 주로 다양한 소속 교단이나 사회, 종교단체들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의견을 조율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선언문을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많이 했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시대가 요청하는 일들을 함께 성찰하고 화해의 장을 모색하는 대화의 과정들은 모두가 다 소중한 배움의 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 더 현장성있는 실천적이고 가슴뛰는 운동이 하고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정의할 수 없으면서도 나는 나만의 잣대에 맞춰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평가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성목사님을 찾아가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저는 운동이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데, 내가 하는 대부분의 업무들은 행정일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업무들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모르겠어요.”

물론, 당시 나의 주요 업무는 한국에서 열리는 13차 총회 준비에 관한 업무들이었기에, 행정일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개인적인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그동안 나름 꿈을 가지고 걸어왔던 신학의 길도 그만 두고 싶었던 참이기도 했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아시는 목사님은 답해 주셨다.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추동성’이야. 사유를 멈추지 않고, 행동을 멈추지 않고, 연대를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추동성이야. 추동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죽은 운동이 되지. 살리는 운동은 생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함께 함을 살리게 되지만, 죽은 운동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해. 그리고 죽은 운동은 모든 것을 의미없게 만들지. 너가 있는 곳이 운동하는 현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추동성을 발견해보도록 노력해봐. 추동성은 어쩌면 한계에만 갖혀있던 내 생각이나 행동을 해방시키고 모두를 향한 운동으로 향하게 해 줄 수 있을꺼야. 그리고 어쩌면 그 작업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을꺼야.”


목사님의 조언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인 ‘추동성’을 발견하게 했다. 스스로 너무 당연한게 많아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나에게 목사님의 현명한 조언들은 큰 해방감을 주었다. 인턴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방황했던 내게 목사님은 우문현답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의미있게 만들어주셨었다.

목사님은 한결같이 정직했고, 현명하셨고, 열정적이셨다. 그리고 나에게 에큐메니칼 운동이 곧 목회라는 것을 환기시켜주셨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소중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목회가 곧 현장을 사랑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준 목사님의 태도이다. 2013년 제13차 WCC세계총회에서 동성목사님은 맡은 직무와 더불어 총회 총괄을 하는 부서와 협력하면서 더욱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계 각 교단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인종, 성별, 연령, 장애여부 등 반드시 한 집단의 사람들이 절대다수가 되지 않도록 골고루 대표단을 구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소중한 원칙이다. 열흘간의 총회기간동안 다양한 주제로 회의가 열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모임들이 진행된다. 해외에서 약 3천여명이 참가하고, 국내에서도 많은 인원들이 참가하기에 크고 작은 사고들도 어쩔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총회 기간 도중 해외참가자 중 장애를 가지셨던 한 분이 어지러움을 호소하시며 병원에 이송된 적이 있었다. 총회기간 내내 잠도 거의 못주무실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했던 동성목사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지에서 보호자 없이 홀로 두려움의 밤을 보내야할 뻔했던 그분의 병상 옆에서 밤새 함께 해주셨고 기도해주셨다. 다음날 있을 중요한 대표단 회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대신 간호를 부탁하고 먼저 자리를 떠나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소중한 원칙인 모두를 귀하게 여기는 목사님의 삶의 태도는 내가 총회현장에서 경험한 사건들 중에 가장 목회적이었고 가장 에큐메니칼 적이었다. 덕분에 나에게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장을 소중하게 돌보는 목회적 태도로 다가왔고, 그 태도를 잃지 않고 매순간 깨어있으려는 추동성이라는 값진 의미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소중한 길잡이가 되주셨던 분이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목사님을 애도하는 큰 슬픔들 가운데에서 그래도 그와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목사님이 세상에 남기시고 간 선한 흔적들이 아픔과 소외의 현장들을 위해 ‘함께 함’으로 추동되기를 소망해본다.


* 필자소개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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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율아,

오늘 다시 첫 등굣길에 오르는구나. 우선, 엄마가 상의 없이 갑작스레 학교를 옮기게 되어 정말 미안해. 첫 학교에서 적응하느라 많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힘든 과정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니 엄마도 마음이 많이 아파.

우리 가족이 새 터전으로 옮길 때, 엄마와 아빠는 율이가 폭신한 잔디가 깔린 학교운동장에서 실컷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했어. 그런데 입학 첫 날 다녀온 학교는 확장공사로 운동장 출입도 어렵고, 같은 반 친구들도 기대보다 많아서 조금 실망했지. 그래도 공사는 일 년 안에 끝난다하고 율이에게 친구들이 많은 건 좋은 일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지낸 이야기를 시시콜콜 풀어놓지 않는 네가 어느 날 하굣길에 이런 말을 했어.

       “엄마, 나 오늘 벌섰다.”

       엄마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벌’이란 단어에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엄마보다 더 묘한 표정의 너에게 다시 물었지.

       “율아, ‘벌’이 뭐야?”

       그랬더니 조용히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씩 웃더라.

       “아, 그게 벌이야? 그럼 벌은 왜 서는 거야?”

       “음, 복도에서 뛰어서.”

       “복도에서 뛰면 왜 벌 서?”

       “다칠까봐,”

       “아, 그렇구나. 복도에서 여러 친구들이 뛰면 다칠까봐 선생님이 벌을 주신거구나. 율이도 알고 있었어? 복도에서 뛰면 벌 받기로 선생님이랑 약속한 거야?”

       너는 대답을 않고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지.

       입학한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어. 네가 벌을 받았을 그 순간만큼이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단다. 몇 주 뒤 선생님과 상담 중에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말이야.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지만, 현재 학교 여건상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 위험요소가 많아요. 그래서 복도에서 뛰는 행동은 벌을 주기로 1학년 선생님들과 정했어요. 아마, 율이가 복도에서 장난치다 다른 반 선생님께 혼났나봐요.”

       그래, 선생님의 이야기는 당연해. 사실, 맨날 이 산 저 산 뛰며 놀러 다니던 네가 복도를 날아다녔으면 날아다녔지, 설마 발뒤꿈치까지 땅에 대고 얌전히 걸었을까. 부주의한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등하굣길 만나는 엄마들에게 ‘단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으면서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학교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해. 특히 1학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복도에서 여러 사람이 뛰어다니면 위험하듯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안전과 편의를 위해 서로 지켜야 할 약속과 규칙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야.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그런 과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많은 곳에서 율이가 지냈으면 좋겠어. 먼저 배운 어른들의 편의를 위한 규칙을 어떤 방식으로든 강요하는 것은 너와 친구들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빼앗는 거라고 생각해. 더욱이 그 방식이 어린 너희들의 몸을 힘들게 하고 수치심을 자극해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학교를 찾게 됐어. 체육관은 없지만 마음대로 뛸 수 있는 운동장이 있고, 화려한 놀이기구는 없지만 하교 후 심심한 친구들이 모여드는 놀이터가 있더라. 함께 뛰어 놀 친구를 찾는 너에겐 최고의 조건이지. 음, 솔직히 선생님은 어떤 분일지 모르겠어. 그래도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은 좀 더 여유롭지 않을까? 엄마와 아빠는 그럴 거라 믿기로 했어.

       그런데 모든 결정을 마치고도 또 다른 고민을 생겼어. 과연 이곳은 너에게만 힘든 곳이었을까? 이 학교에 남게 될 다른 친구들은 괜찮을까? 왜 나는 선생님한테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묻지 못했을까, 왜 너의 적응을 핑계로 작은 학교로 옮겨야겠다고 했을까? 새로운 학교에 너를 데려다 주고 홀로 앉아 마시는 커피가 꿀맛일 줄 알았는데, 커피는 여전히 쓰고 엄마 마음을 어지럽힌다.

       율아, 오늘 학교는 어땠니? 잘 지내고 있는 거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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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골탈태: 콩은 청국장이 되고, 포도는 와인이 되고

 


박여라*




    지금 나는 '홍어 과다'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먹은 홍어는 내 평생 그 이전까지 먹은 홍어보다 훨씬 많다. 가리는 음식이 없어 뭐든 잘 먹지만, 그리고 홍어는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날 홍어가 먹고 싶다든지, 먼저 나서서 먹으러 가자고 주창할 정도로 홍어가 내게 우선순위가 높은 음식은 아니다.


    작년 겨울 몇이 모여 홍어삼합에 애탕을 먹고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 만날 때 고른 홍어집 명단에서 다른 곳들도 가보자고 한 게 발단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홍어 먹은 얘기를 하다가 그 모임에서도 홍어를 먹으러 갔다. 급기야 몇 주 전 원래 모임 사람들과 홍어 기행이라며 영산포엘 다녀왔다.


    나주 기차역에 내려서 영산포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온 동네에 홍어 기운이 공기에 가득했다. 좋다고 하기도 싫다고 하기도 모호하고 오묘했다. 문득 오래전 만들었다 망한 청국장이 떠올랐다.


    먹고 싶은 것은 다 만들어 보던 시절, 좋은 콩 구해다 무쇠솥에 푹 삶고 정성 들여 뜸 들였다. 그리고 꼬마 불이 켜 있어 늘 미지근한 구식 가스 오븐에다 청국장을 띄웠다. 끈끈이가 잘 떠서 보기에 모양은 좋았는데 냄새가 좀 청국장 더하기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더 있었다. 온도가 너무 낮았을 수도 있고 그 오래된 오븐 안에 오만가지 잡균이 있어 다같이 콩에 들러붙어 함께 번식했을 수 있다.


    그래도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한 덩이씩 빚어서 양념을 얹고 이쁘게 포장했다. 막상 청국장을 끓이니 냄새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들인 정성이 아까워 연거푸 몇 끼를 끓여 먹다 결국은 나머지를 버렸다. (정성은 정성이고, 청국장은 사 먹는 걸로!) 문제는 그 뒤로 며칠을 두고 부엌에만 들어가면 풍기던 그 청국장인 듯 청국장 아닌 청국장 같은 냄새가 영 없어지지 않았다. 홍어를 먹으러 간 영산포구에서 이때가 떠올랐다.  


    콩이 청국장(또는 된장)이 되는 과정은 환골탈태(換骨奪胎)다. 한자어 뜻 그대로는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내는 그런 변화다. 뒤져보니 중국 송나라 때 무슨 문헌에 적혀있기로는 시 쓰는 방법을 설명하는 말이란다. 옛 시문을 따다 뜻은 그대로 두고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환골'이고, 자기 표현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탈태'라고 한다.


    발효는 환골탈태 같은 변화과정이다. 콩이 청국장이 되는 과정도 그렇고, 흑산도 홍어가 영산포 삭힌 홍어가 되는 과정도 그렇고, 포도가 와인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온도, 습도 같은 조건이 잘 맞아야 하지만, 재료는 단순하고 꼭 필요한 효모는 공기 중에 있다. 그리고 환골탈태하여 알아볼 수 없이 다른, 더 좋은 것이 된다.  


    나주 내려가는 길에 일행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우리 다른 것도 먹으러 다녀요." 그럼 냉면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은 어떨까 하다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영산포구 수많은 홍어집 가운데 아무 데나 들어가 앉았는데, 막상 먹다 보니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한 3년은 먹자"는 말에 크게 호응을 보내진 못했지만, 충분히 이해는 가더라는! 아이고야, 다음번엔 와인을 한 병 가져가야겠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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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사가 아닐 때





 김정원*

   

    취미가 '지질히' 고상한 나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좋아하여, 특별한 절기에는 꼭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날도 오르간 연주자 근처에 앉을까 하였지만, 이미 만석이라 비껴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영국말 설교'를 알아듣고자 했지만 영 쉽지가 않다. 나의 빈곤한 리스닝 능력에 더해 어디선가 스멀스멀 거리는 퀴퀴한 냄새를 맡고 난 뒤부터는 '영국말 예배'를 향한 집중력은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냄새의 발원지를 찾고자 큼큼거렸고, 곧 내 옆의 여성에게서 나는 냄새임을 알아차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미사 모습(사진 : Leon Neal/AFP/Getty)


    그녀가 노숙자라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느 노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서너 개의 큰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고, 보따리는 거뭇거뭇한 살림살이로 가득했다. 이제 예배는 물 건너갔다. 내 코를 비롯한 대개의 감각은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돌려 맨 푸른색 스카프가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내가 입은 그것들 보다 좋아 보였다. 순간 그녀가 노숙자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조금 과감해지기로 한다. 살짝 목을 돌려 그녀의 차림새를 더욱 찬찬히 살펴보니, 꼬질꼬질 때가 가득한 소매는 베이지색을 잃은 지 오래 돼 보였고, 영근 때가 머리카락에 드레드레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노숙자였다. 시간이 지나도 코를 자극하는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녀는 부산스러웠다. 예식이 많은 성공회 예배 절차를 따라 여러 개의 책자를 찾아 보느라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쪽수를 못 찾을 때가 많았는데, 나는 빤히 알면서도 그런 그녀를 돕지 않았다. 뒷자리의 미소 띤 백인 여성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아니, 실은 그 노숙자에게 미안한 것이기 보다는 그 미소 띤 백인 여성에게 민망스러웠다. 문제는 성찬식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영국의 성공회는 대개의 경우 배잔 없이, 하나의 큰 은잔에 담긴 와인을 차례로 나눠 마신다. 잔을 들고 있는 성직자는 총 네 명. 줄을 잘 서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내 옆의 그녀가 마신 잔을 나도 사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뿔싸. 나는 그녀 바로 뒤에 서 있었고, 난 그야말로 주의 '쓴 잔'을 마셨다. 쓴 잔이 지나자, 이번엔 서로에게 'peace be with you'라고 인사말을 건네며 악수를 나누는 시간. 본디 작위적이고도 어색한 그 시간을 즐기지 않지만, 그 날은 특히 그랬다. 거무튀튀한 그녀의 손을 잡는 게 영 석연치 않았다. 그렇게 온 감각이 그녀를 향해 쭈뼛 댈 때, 온통 예민해진 나를 향해 그녀가 손을 내민다. 나를 올려다 보는 그녀 얼굴에 함박 미소가 들었다. 못 돼 쳐먹은 나를 향한 그녀의 미소가 너무 환하여 금새 주눅이 들고야 말았다. 내 손을 꼬옥 잡으며 그녀가 말한다. "PEACE BE WITH YOU"


    영국 교회에 가면, 나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닐 수' 있다. 누구를 챙길 필요도 없고, 설교를 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소개를 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고, 어색한 칭찬을 건넬 필요도 없다. 몇 명이 출석했는지 알 필요도 없고, 분주할 필요가 없고, 찬양을 크게 부를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도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더 정확하게는 친절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 영국 교회에서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목사가 아닐 때'의 나, 즉 '참 나'를 마주한다. 오르간 연주는 핑계일 게다. 실은 소극적이고 폐쇄적이고 예민한, 그런 나를 만나러 교회에 갈는지도 모른다. 공간은 엄연히 교회당인데, 내 존재가 한국에서와는 참 다르게 머문다. 이곳에서의 나는, 노숙자의 냄새에 코를 찡긋거릴 수도 있고, 도움에 소극적 일 수도 있고, 예민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다만 가끔 '양심'의 소리가 내 속을 긁을 뿐, 그 낯설면서도 편안한 '참 나'의 시간은 모순적이지만 값있다.


    양심은 모순적이지만 값진 그 시간을 방해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완전한 해방감을 얻기가 영 쉽지 않다. '평화의 인사'를 건네는 그 노숙자의 미소 앞에서 양심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곧 죄책감을 몰고 온다. 친절과 환대를 머뭇거릴 때,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책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프로이트의 생각을 빌려오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는 양심을 사회적 압력이 만들어 낸 사회 규범이 우리 속에 내면화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억압이 빚어낸 친절을 가장하지 않았으니, 그러니까 '초-규범적' 인간일 수 있었으니 그리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다. 니체야 오죽하겠나. 그는 양심의 가책이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채무자가 느끼는 부채감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들이닥쳐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의 본래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하다. 신 안에서 늘 불편한 나에게 그의 말이 꿀 같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빚 받으러 몰아쳐 오는 채권자가 아닌 이상, 나는 억지로 '유죄판결 된 삶'을 살 필요가 없다. 물론 노숙자에게 친절과 봉사를 행하던 그 백인 여성이나 환하게 웃으며 휙휙 악수를 나누던 그 교회의 목사들 앞에서 기가 죽을 이유도 없다. 그들이 나를 '까칠한 아시아 여자'로 인식하더라손, 그 판단에 아쉬워 '목회적 마인드'로 갈아 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른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너무 자위적일는지.


    "노예의식을 갖는 개인들 사이에서 타자에 대한 승인은 여론이나 평판 혹은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허영심 있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 듣는 모든 좋은 평판에 기뻐하며, 모든 나쁜 평판에 대해서는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두 평판에 예속되어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복종이라고 하는 본능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니체 전집 VI 2, 281)."


    이왕 이렇게 된 거, 포이에르바하까지 가보자. 그는 신앙인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하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에게 우월감과 특수한 명예감을 부여한다고 지적한다. 하인이 주인의 품격을 자신의 품격으로 여기듯, 스스로의 본질을 어떤 다른 본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지금껏 교회 안팎에서의 나의 시혜적 행동은 신 혹은 목사라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인격을 꾸역꾸역 다른 인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도덕, 선, 평화, 사랑과 같은 개념들을 성취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신학(anti- theology)을 벗삼아 되묻게 된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고독했지만 강했고, 사랑했지만 배신당했고, 걷지 못했지만 자유로웠던 그녀의 자아가 둘로 쪼개져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맞닿아 있다.(두명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 1939)



    죄책감이나 특권의식이 만들어 낸 '친절한 나'를 까뒤집고 나면, 마침내 '폭로된 나'를 마주하게 된다. '폭로된 나'는 여리고 작고 보잘것없다. 호의를 가졌지만 그 호의를 베풀 용기가 부족한, 겨우 그런 여자일 뿐이다. 주목 받는 것이 두려워 큰소리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아량이 좁아 불쾌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탈-죄책감과 탈-노예의식을 선취했을지는 몰라도, 마주한 '참 나'는 부끄럽다. 반신학 위에 올라 타, 의기양양 했다면 좋았으련만- 가식과 허위를 벗겨낸 나의 모습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은폐된 나'의 폭로는 한줌의 자유로움과 곱절의 부끄러움을 몰고 온다. 목사를 벗고, 성도를 벗고, '신앙'을 벗고, 죄책감을 벗고, 양심을 벗고…… 그리고 난 후에 마주하게 되는 '참 나'는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다. 비로소 유한함의 고백이 터져 나옴에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 없이 신 앞에' 엎드려지는 기도의 시간이 얻어진다. 죄책감도 없고 참회도 없는데, 신 앞에 엎드려진다. 죄의 고백 없이 눈물이 나고, 선포 하나 없는데 자유롭다. 작은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신을 끌어온다. 이 때 나를 만나러 오는 신의 손에는 회초리도 율법책도 없다. 도덕군자의 형상도 아니요, 신실한 모습도 아니다. '신앙심이 깊고 친절을 베푸는 여자'가 아닌 '소극적이고 아량이 없는 여자'를 만나러 오는 그 신은, 나를 탓하지도 않고 타이르지도 않는다. 특권의식과 우월감을 내려놓고 신을 부르니, 신 역시 권위를 벗었다. 부끄러운 나와 함께 부끄러워하고, 자유로운 나와 함께 자유롭다. 부족한 '참 나'의 모습 속에 되려 신의 기운과 신의 고백이 들어찼다. 사랑과 자비의 기운 속에서 나와 신은 거듭 만나고, 그로 인해 역시 부끄럽지만 이내 자유롭다. 다시 모순이지만, 다시 값지다. 어찌 된 일인지 반신학의 조화가 요사스러워 다시 신학적이다. 내 교육과 내 설교에 죄책감을 느낀 이들에게 죄를 고백하며 새해를 부끄러움으로 연다.


    <이번 원고는 필자가 2017년 2월 에큐메니안에 게재했던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다시 목사'로 돌아온 이 때, 내 근거를 '참 나'로 삼을 것을 다짐하며 묵혀진 글을 함께 나눕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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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환경에는 유독 취약하다[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환경영향평가제도’는 토건개발 주도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맞서서, 미약하나마 환경보호를 위해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처음부터 있었다. 파괴적인 개발사업을 정당화하는 면죄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만들었던 ‘국민의 정부’나 뒤를 이었던 ‘참여정부’에서도 이런 약점은 크게 고쳐지지 않았다.


  국가를 수익모델로 생각했던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 약점이 적극 이용되었다. 4대강 사업에서 보듯이 환경영향평가는 졸속, 날림, 형식적 절차였을 뿐이었다.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스키 활강경기장 건설과정에서 환경영향평가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분산 개최하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결국 단 며칠 열리는 경기를 위해 500년도 넘은 원시림 5만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었다. 물론 복원하겠다고는 했다. 그러나 1972년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이후 40년이 넘도록 자생수종인 가문비나무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복원되지 못했고, 결국 붉은 가문비나무로 대체해서 복원하고 있다. 복원에만 3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설치사업에서는 양양군의 환경영향평가 작성과정에서 거짓 작성, 부실 조사, 고의 누락 등이 있었으며, 환경부가 이를 알면서도 동조했다며 시민단체가 고발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름 과거 정권들의 적폐를 청산하고 있으나 환경 부분은 취약하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은 정책 수립 과정의 민주성은 확보했을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역시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환경부가 강원도 삼척의 포스파워 석탄화력발전소 환경영향평가를 끼워 맞추기 식으로 동의해준 것은 패착에 가깝다. 그동안 포스파워 석탄화력발전소는 해안 침식과 대기 건강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완대책이 제시되지 않아 3차 재보완 협의가 진행 중이었다. 환경영향평가를 완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산업부가 고시한 공사계획 인가 시한까지 착공하지 못 하면 전기사업법상 허가 취소 사유가 발생하게 되는데, 산업부는 공사계획 인가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해주어서 특혜 논란이 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부가 환경영향평가를 동의해준 것은 국민 대신 대기업의 편에 서는 결정을 한 것이다. 심지어 환경운동연합이 지난해 12월 삼척시민 1191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54.1%가 석탄발전소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말이다. 왜 시민단체 출신 장관·차관이 환경부에 가서도 환경영향평가의 고질적인 한계는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맞닥뜨린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가 문제를 만들어냈을 때와 같은 수준에선 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적폐를 청산하면서 적폐를 만드는 것을 주도하거나 공모했던 사람들과 같은 수준에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좌파·우파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고, 발전주의에서 생태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환경영향평가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환경을 더 이상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수준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적폐 청산은 미완의 혁명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2018년 새해가 패러다임 전환의 첫 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_id=201801151525281 이 글은 주간경향 2018. 1. 23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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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구금은 다르다[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새해도 벌써 한 주가 지났다. 야심차게 계획한 새해 계획이 한번쯤 흔들리는 순간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더라도 필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불쑥 생기기 마련이고, 미리 계획한 일이 하루쯤 틀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은 결심이 굳지 못한 사람을 훈계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통계적으로 사흘에 한 번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 삶이므로 계획한 일을 사흘에 한번쯤 빼먹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의 한 주, 한 달, 한 해가 전혀 새로운 일 없이 미리 계획한 대로만 반복되고 있다면 이쪽이 더 걱정되는 일상이라 생각한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삶의 건강한 자유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중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이동할 자유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자유를 함께 빼앗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형벌(刑罰)로 정하고 있다. 우리 헌법도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을 받지 아니하며(제12조 제1항), 체포·구속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도록 하고(제3항),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그 적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제6항)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보호소’라는 이름을 가진 시설이 있다. 외국인 범죄자는 내국인과 동일한 절차에 따라 구치소 또는 교도소에 구금되므로, 범죄자를 가두는 구금시설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시설이다. 법무부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외국인보호소는 체류기간 만료 등 출입국관리법에 정해진 사유로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외국인 중에서 여권이 없거나 또는 교통편이 확보되지 못하여 즉시 출국할 수 없는 경우, 여권이나 교통편을 마련하는 기간 동안 머물게 하여 외국인을 ‘보호’해주는 행정기관이다. 설명만으로 보면 공항 한쪽에 마련된 라운지와 같은 편의시설을 생각하게 되지만 현실은 철창에 갇혀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구치소와 큰 차이가 없다. 외국인보호소에 입소한 외국인은 노란 철창으로 구획된 좁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한 공간에서 10명 이상이 공동생활을 한다. 화장실을 포함한 모든 생활공간은 CCTV로 감시되고, 외부인과 만날 때는 구치소와 같이 두꺼운 아크릴 판을 사이에 두고 전화기로 대화를 해야 한다.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도 없고, 휴대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없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용공간에 설치된 전화기 한 대가 유일하다. 출입은 제한하지만 보호시설 내에서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사생활이 보호되며 인터넷 등 외부와 소통도 자유로운 외국의 보호시설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열악한 시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호’라는 이름의 구금기간에 상한이 없어 장기간 보호소에 구금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의 신체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는 것임에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지위에 있는 기관이 인신구속의 타당성을 심사할 수 있는 절차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작년 3월에 발표된 법무부의 정보공개 결과를 보더라도 외국인보호소에서 1년 이상 장기 구금생활을 하고 있는 외국인이 20명이나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난민이거나, 갑작스러운 단속으로 국내의 법률관계가 마무리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기간을 떠나 구금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환자나 구금을 최후의 수단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아동들이 보호소에 갇혀 있기도 했다. 열악한 시설에 장기간 가두어 두면서 이를 외국인의 편의를 위한 ‘보호’라고 설명하는 것은 궁색하다. 보호와 구금은 전혀 다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07205203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8. 1. 7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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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시상식을 준비하며




김의환*

 


    서른 즈음의 쓸쓸한 감성을 채 만끽할 겨를도 없었는데 어느덧 서른 살의 막바지다. 평소에는 숫자와 그리 친하지 않다만, 뭐든 정리해서 기록하고픈 연말이면 날짜와 나이, 순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다. 특히 요새는 나만의 시상식을 여는 소소한 기쁨으로 겨울밤을 채워간다. 별 게 아니라 ‘2017년 올해의 00’에 해당하는 수상 부문과 후보를 선정하고, 뚜렷한 기준 없이 떠오르는 대로 수상 여부를 결정하여 메모장에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무엇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내 삶의 1번은 무엇인지를 돌아보며 남겨두려는 마음에 이 일을 시작했다. 이 시상식은 계속 변해가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기에 꽤 유용하다.


   주요 수상 부문으로는 올해의 인물과 책, 음반과 영화, 문장, 작가, 팟캐스트, 고마운 사람, 불편한 사람, 최고의 순간, 최악의 순간 등이 있다. 기타 부문은 올해의 커피, 맥주, 안주, 치킨, 수업, 공연, 맛없는 음식, 산책, 술자리, 득템, 돈지랄, 병맛, 예능, 민폐, 정치인 등이다. 예전의 수상 목록을 찾아보니 2014년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랍스터>가 올해의 영화 부문에서 공동 수상했고,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가 책 부문에서 단독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대다수 부문에서 매년 쟁쟁한 후보들이 등장해 각축전을 벌이지만 예외도 있다. 몇 년간 한 수상자가 독식한 부문이 있었으니, 바로 ‘올해의 고마운 사람’이다.


   3년 전인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어둡고 차디찬 자취방에 누워 MBC FM4U의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뜬금없이 문자로 이런 사연을 보냈다. “철수 아저씨, 아저씨는 올해도 제가 꼽은 가장 고마운 사람 1위에 선정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진심이었다. 변함없이 그 시간, 그 자리를 지켜주며 좋은 음악과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배철수 DJ가 늘 고마웠다. 특히 그해에는 1월부터 7월까지 홀로 미국과 중남미 배낭여행을 다니며 고독과 갈등에 허덕였던 터였다. 모국어와 음악이 더없이 간절했던 시절이라 ‘배캠 다시듣기’만 한 오아시스는 없었다.


    잠시 후 내 이름과 사연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철수 아저씨의 수상 소감을 그대로 옮겨본다. “허허허. 이거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한편 제가 뽑혔다는 게 저한테는 참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슬프네요. 김의환 씨 곁에 그렇게 고마워해야할 다른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다는 거 아니에요. 2015년에는 고마워해야 할 사람 1위가 다른 사람이 꼭 되기를. 저는 탈락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 10위권 밖으로 밀렸으면 좋겠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고마움이란 건, 이게 고마움이라면, 정말 눈곱만 한, 식사하시는 분이 계실까 봐 죄송합니다만 코딱지만 한, 그런 거가 됐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철수 아저씨가 더 좋아졌다. 동시에 조금은 슬퍼졌다. 언제부턴가 그 누구도 곁에 가까이 두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외로움을 나약한 이들의 값싼 감정이라 치부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할 바에는 혼자 있기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철수 아저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2015, 2016년에도 고마운 사람 부문은 여전히 그분의 몫이었다. 외로움이란 존재의 숙명이자 평생 달고 갈 친구라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도 지금 와 보니 그땐 어찌 그렇게 살았는지, 꼭 그래야만 했나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되고 신세 좀 져도 되는데,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관계란 라디오처럼 내가 듣고 싶을 때만 켰다가 일방적으로 다시 끄는 무언가가 아닐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고마운 사람’ 부문의 경쟁이 치열하다. 여러 이름들을 넣고 빼다가 이내 순위를 매기는 일이 부질없어 그만두었다.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이번만은 여럿에게 공동 수상을 하기로 한다. ‘올해의 인물’에는 내게 사랑을 알려준 얼굴들을 적어보았다. 책과 문장 부문도 각축전이다. 먼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비평의 아름다움과 정확한 문장의 힘을 느꼈다. 수시로 펼칠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책임지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책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려고 애써보았으나 끝내 실패한 자의 기록만 읽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느낌의 공동체>)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소설가의 일>은 소설론을 가장한 인생 예찬이다.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소설가의 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라는, 간결하고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올해의 소설로 정했다. 올해의 뮤지션은 가수 이승열과 밴드 ‘9와 숫자들’로, 올해의 노래 부문 후보에도 나란히 올랐다. “계절은 다시 돌아온대도 / 떨어져 버린 건 돌아오지 않아”(이승열–돌아오지 않아) “우린 항상 어둠 속에 있어 / 계절을 알아볼 수 없어”(9와 숫자들–드라이플라워) 올해의 노래는 Daughter의 ‘Youth’다. 무모하고 불안한 청춘의 고백(“We are the reckless. We are the wild youth.”)에서 당신과 나를 보았다. 눈물겹도록 빛난다.


    다른 부문에서도 좀처럼 단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 공동 수상이 많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기억하고픈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유독 2017년에만 전에 없던 좋은 사람, 좋은 책이나 노래를 많이 만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좋은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다. 내 눈과 귀가 닫혀 있어서, 마음이 비좁고 분주해서, 게을러서, 공허해서, 가라앉아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내년에는 만남과 관계가 더 풍성해지길, 여기서 발생하는 경험과 느낌, 기억을 더 소중히 여기길 희망한다. 여담이지만 ‘올해의 고마운 사람’ 부문에서 드디어 철수 아저씨가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나셨다. 아저씨의 당부대로 고마운 사람이 늘었다고, 3년 전 그때보다 덜 슬프게, 조금 더 밝게 지낸다고 문자 사연을 보내야겠다.



*필자소개

청춘을 허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한량. 어두운 자취방의 혁명가. 문학과 영화, 음악과 라디오에 기대 하루하루 때우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21c39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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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차
    2017.12.21 23: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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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철, 김연수... 9와 숫자들...좋아하던 책들과 문장들 노래를 여기서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Daughter의 ‘Youth’는 함 찾아봐야겠단 생각.

    (클래식에펨의 명연명음 정만섭 선생이 몇년째 고마운 사람이긴 했지만 ㅎ
    저 역시 정신 없이 보내버린 올해 나를 숨 쉬게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던가 문득...
    차분하고 재미난 글 감사합니다.ㅎ)
  2. 이승하
    2017.12.23 10: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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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바빠 시간 가는지 모르고 지내다, 이 글을 보고 연말이 왔구나. 깨닫고 나의 2017년을 돌아봅니다.

    고마움을 느껴도 고맙다는 표현을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표현할 수 있을때, 또 그런 마음이 들때 표현하는 태도를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철수 아저씨도 참 유연한 분이신것 같네요. 저런 유연함을 간직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고 싶은 일이 많은 2017년이라는 말이 참, 듣기 좋습니다 ^^
  3. J
    2017.12.25 18: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글 잘 읽었어요^_^



마음의 준비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얼마 전 큰 아이의 아랫니 두 개가 빠졌다.

       어릴 적, 하얀 무명실을 조심스레 감는 긴장한 엄마의 손끝과 온기가 기억났다. “엄마가 ‘하나, 둘, 셋!’하고 뺄게”하고는 “하나~아, 둘!!”하고는 사정없이 실을 당겨버렸던 엄마의 기민한 작전.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스럽고 살짝 억울한 기분도 잠시, 혀끝으로 느꼈던 이 빠진 곳의 비린 맛과 생경했던 잇몸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아이의 생일이 늦어 그런지 또래 중 이가 제일 늦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방 아이들이 빠진 이를 자랑하며 맹구 미소를 지을 때 마다 ‘아, 나도 엄마처럼 내 손으로 직접 율이 이를 뽑아줘야지’했지만 막상 흔들리는 아이의 이를 보니 겁부터 났다. 게다가 덜렁덜렁 뿌리만 겨우 붙어있는 듯한 이가 본디 위치를 틀어 아이가 불편을 호소하니 바로 치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며 부들부들 떨며 누운 아이의 두 손을 꼬옥 잡고 발치의 과정을 목격했다. 의사는 아이의 눈에 안 보이게 팔을 멀리 내저으며 묵직한 펜치를 턱 밑으로 가져가더니 쓰윽 이를 뽑아 올린다. 아이가 움찔하더니 신음소리를 내며 “그만! 그만!”이라고 목으로 외치는데, 의사는 아랑곳 않고 두 번째 이를 또 쓰윽 뽑아 올린다.

       “율아, 이제 다 끝났어.” 긴장으로 마디마디가 하얘진 아이의 주먹을 토닥여줬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억울한 얼굴이 울음을 쏟아내려고 하는 찰나, 의사는 이 빠진 자리에 지혈용 솜뭉치 재갈을 물린다. 그새를 못 참고 솜을 물고는 웅얼웅얼 이 뽑은 소회를 밝히는 얼굴이 어째 더 억울해졌다. 뿌듯한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빠진 이 두 개를 선물로 받고는 씨익 웃는 율이도 이제 영락없는 맹구다.

        솜재갈을 푼 아이는 재잘재잘, 빠진 이를 들고 당장 어린이집으로 향해 친구들과 선생님한테 자랑하고 싶다고 설레발인데, 내 마음은 뭔가 휑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 처음 발견한 이였다. 내 눈엔 보석같이 반짝반짝하던 아이의 첫니. 이제 막 빼꼼히 잇몸 위로 드러난 이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든 찍어서 자랑하고 싶었다. 지금 율이처럼 말이다.  

       그 보석 같은 이가 뚝 떨어져, 지금은 식탁 위 작은 봉투에 있다. 

        돌 즈음, 등을 보이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 모습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마냥 내 품으로만 향하던 발걸음이 나를 돌아서는 순간, 내가 아이와 이별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현실로 다가왔다. 발달의 단계마다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다독이듯, 삶의 단계마다 스스로 해쳐나가 바로 설 수 있게, 아이가 부모와 이별해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서 돕는 게 부모구나 싶었다. 아이는 부모의 둥지에서 떠나야 할 운명인 것, 부모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엄마가 주었던 서든 어택의 짜릿한 추억을 율이에게 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나는 다시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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