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믿음

: Post Human, Post Religion 시대의 믿음에 관하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Science and Religion


   필자는 2014년 여름, 10년간의 시카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미국유학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인상은 각 분야에서 Interdisciplinary Study(한국말로는 학제간 연구, 융복합 등으로 번역되는)가 상식처럼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 학계는 시대적 요청, 자본의 논리, 학문의 발전 등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면서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학제간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 놀라운 성과물들이 학교로, 도서관으로, 그리고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비교적 보수적인 신학분야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미국내에서‘Religion & Science' 분야의 최고 연구기관 중 하나이자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Zygon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 Zygon 웹싸이트_ http://zygoncenter.org/ (줄여서 그냥 Zygon이라 부름)이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내에 있다. Zygon의 운영자이자 미국 '종교와 과학' 분야의 대부격 되는 인물 중 한분이 지금은 은퇴한 Philip Hefner이다. 훼프너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에 있는 테드 피터스(Ted Peters)와 러셀(Robert John Russell), 영국에서 활동하는 아서 피콕(Arthur Peacocke)과 폴킹혼(John Polkinghorne), 그리고 얼마 전에 타계한 이언바버(Ian G. Barbour) 등과 더불어 신학계 내에서 ‘종교와 과학’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과 함께 Co-Creator 지위로 까지 부상시켜 생태신학의 기반을 제공했던 중요한 학자이기도 하다. 훼프너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을 가지고 가서 겉표지에 싸인을 요청한 적이 있다. 너무 신기해하면서 기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테드 피터스가 편집을 맡아서 출간된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 (Westview Press, 1998)가 한국에서『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동연, 200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 필립 훼프너 교수의 논문인“생명문화적 진화와 창조된 공동 창조자”가 실려있다.      

   나는 시카고에서 석사과정 수학하면서 훼프너 교수가 개설하는 'Epic of Creation’(2005년)과 ‘Science & Ethics’'(2006년) 두 과목을 수강했었다. ‘Epic of Creation’(번역하면 ‘창조의 새 기원’쯤으로 해석되는)시간은 시카고에 있는 유수한 대학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진화 생물학자들을 초빙하여 우주의 창조 혹은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학적 의제의 폭을 넓히는 시간이었다. 빅뱅에 대한 이론을 과학자들이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구약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 시간에는 신약학자들이 신약성서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 다음 시간에는 물리학자들의 엔트로피에 대한 해설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한 학기 내내 창조부터 종말까지 과학과 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폭넓은 이슈들에 대한 논의들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수업이 바로‘Epic of Creation’이었다.


'뇌 과학'으로 바라본 Post Human의 쟁점들


   ‘Epic of Creation’을 마치고 다음 학기에 (2006년 봄 학기) 나는 회프너 교수가 진행하는 ‘Science and Ethic’을 계속 수강 신청해서 세미나에 참여하였다. 특별히 그해는 회프너 교수가 은퇴를 하던 해였던지라 대가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그 수업은 과학의 발전에 따른 윤리적 이슈들을 다루는 수업이었는데, 인간복제, 핵, 가상공간, 기술문명, 환경, 뇌 과학 등의 주제들에 대한 윤리적 담론 형성을 목표로 디자인 되었다.  

    ‘뇌 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내용은 학기 후반부에 배치되었다. 시카고 대학 의대에서 뇌신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와서 수업의 반을 책임졌고, 응용윤리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나머지를 담당했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감정의 매커니즘을 알아버린 지금, 이러한 지식이 인간의 윤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를 탐구하는 것이 강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 “9.11 같은 끔찍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녀들의 기억력과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약을 먹고 뇌의 특정 부위에 대한 시술을 받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뇌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직관은 무엇으로 보장받는가?” 그 강의는 이처럼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는 다양하고 묵직한 윤리적 함의들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하여 전통적 규범윤리학에 함몰되어 있던 나에게 윤리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시간이었다.

    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일어나는 회로를 파악하게 하였고, 그 지식을 토대로 인지능력의 개발과 보충을 가능케 하였다. 근육을 늘리고 강화하기 위해 무슨 약물들을 복용하는 것처럼, 기억력, 창의력,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문제는 어디까지 뇌 과학의 발전을 허용할 것인가? 인데, 이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최종적으로 조우한다. 왜냐하면 뇌 과학의 적용이 인간 조건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고, 호르몬 분배를 장악하여 인간의 감정과 기분을 통제, 조절하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될까? 과연 인간 마음 깊숙이에는 변하지 않는 정신의 숭고한 무엇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 것이 확실한가?

    그 밖에도 뇌 과학과 윤리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산적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뇌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발전이 그동안 전통적으로 간주되었던 인간의 이성, 감성, 자유의지 등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발생할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딜레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인데, 미국 내에서 뇌 과학과 윤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를 크게 두 분야로 나누는 것 같다.

   뇌 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개론적인 미국 책들을 읽을 때 두 가지 용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ethics of neuroscience이고 다른 하나는 neuroscience of ethics이다. 전자는 ‘뇌과학의 윤리학’이고, 후자는 ‘윤리학의 뇌과학’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뇌과학의 윤리학’은 뇌과학적 지식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절차의 문제들에 관심한다. 따라서 뇌 과학 자체의 윤리적 수행의 문제, 뇌 과학 연구자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 반면, ‘윤리학의 뇌과학’은 전통윤리학에서 다루어 왔던 윤리적 이슈, 예를 들어 자유의지, 선의지, 도덕성 등이 뇌과학의 등장으로 어떻게 다시 규정되는지? 에 대한 연구다. 즉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새로운 뇌 과학적 정의 혹은 버전이랄까. 윤리학 교과서를 뜯어서 다시 써야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뇌 과학자들을 윤리학자들에게 넌지시 농을 건다.

    미국 학계에서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뇌 과학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학제간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뇌 과학이 지니는 이런 저런 염려 때문에 뇌 과학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 우파진영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고, 뇌 과학의 발전으로 예상되는 우리 삶의 변화된 모습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가십성 기사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식있는 학자들은 차분히 여러 각도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성찰하면서 천천히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Post Human : 다시, 인간을 묻다


    결국,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 전망과 희망의 최종 종착점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으로 귀환한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을 정의해야 할까? 뇌 과학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엄격히 말하면‘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로 바꿔써야 맞다. 뇌 과학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뇌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뇌 활동의 산물이라고만 국한 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제기에 맞서 뇌 과학자들은 ‘육화된 마음이론(emboded mind theory)’과 ‘확장된 마음이론 (extended mind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는 인간의 마음이 온몸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론이고, 후자는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뇌와 몸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우주 전체가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적 문제는 또 다른 양상에서 전개된다. 외부와 맺는 관계의 양상, 관계의 법칙으로 확대된다는 말이다. 즉 나와 다른 타자와의 접속과 교감의 능력이 마음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또 한 가지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뇌 과학에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언젠가는 공상과학 영화 <블레이드러너>에서처럼 기억을 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부모에게서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고, ‘딸은 성장하여 멋있는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유학갔고 지금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라는 기억을 새로 심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위에 대한 설명, 미국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료, 딸의 연애과정, 결혼식 풍경, 공항에서의 이별 등 지금 살아 미국에 있는 그 딸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이란 단편적인 것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의 고리와 연쇄를 따라 통합적으로 구성되는 사건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총합이 마음을 직조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과학에서 말하는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가능하여 실제로 누군가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쓰라리고 고통스런 과거, 혹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사건들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만약 이런 기술이 완성된다면 사람들은 괴로움을 잊고 평생 평안한 기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아픔과 괴로움을 모르는 세상, 그런 세상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없는 세상일 것이고 아픔에 대한 연민도 소용없는 세상일텐데,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게 되는 그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들은 이제 공적인 가치를 상상하지 않으면서 정신과 양심의 가위눌림에도 반응하지 않는 쿨한 인간들이다. 그 어떤 충격과 놀라움이 밀려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간혹 쨉을 날리면서 자기만을 보호할뿐이다. 그들은 이제는 반성과 실천의 자 글이 다소 비관적인 관점으로 흐른 것 같은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뇌 과학이 지니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뇌 과학의 발달은 전통적 도그마에 갇혀있었던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다시‘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정직하게 대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인간은 어떻게 자리매김 될까? 솔직히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지만, 우리는 이 불쾌와 낯설움을 뱀과 같이 지혜롭게 긴 호흡으로 건너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등장하는 Post Human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았다. 인간種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도모되는 Post Human 시대에 인간 마음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종교 또한 Post Religion 의 단계로 진입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불손한 발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 그동안 스쳐지나갔던 숱한‘Post-’담론들이 떠오른다. Post Modernism, Post Structualism, Post Marxism, Post colonialism, Post Feminism, Post Human, Post Religion 까지... 왜, 이리도 많은 Post 담론이 그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Post 담론에 깔려 있는 정서는 불만과 불안, 그리고 위기의식이 아닐까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에 대한 위기의식이고, 포스트 맑시즘은 정통 맑스즘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왔다. 탈구조주의 역시 구조주의가 담지 못하는 의미의 결핍 혹은 균열에 주목한다. Post Human 담론도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창조되는 인간種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으로부터 나왔고, 지금부터 다룰 Post Religion 역시 인간 삶의 조건이 바뀌는 격동속에서 인간의 믿음을 다시 응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위기라 부를 수 있겠다.


Post Religion이란?


    하지만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종교는 현실에서 위기의 종교였고, 그래서 어느 시대건 종교는 항상 위기의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예수의 자리가 공백으로 남겨진 이후 역사적 그리스도교는 항상 위기의 연속이었고, 교회는 항상 위기의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중세 교회 역시 표면적으로는 강한 도그마가 세상을 짓누르고 있었겠지만서도 그 수면 아래에서는 변혁에 대한 꿈과 상상을 욕망하면서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500년 전에 발생했던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있겠지만 어쨌든 중세천년의 교회전통에 대한 반동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카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위기의 현상학이었다. 고중세가 지녔던 온갖 신화와 미신과 주술에서부터 탈출한 근대는 또한 종교적으로 볼 때 얼마나 위기의 시대였나? 막스 베버는 이런 근대를‘주술과 신화로부터 벗어난 시대’라 평했을 정도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종교는 이신론에 입각한 자연종교의 경향으로 흘렀고, 유럽의 사회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해 급격하게 시민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종교는 시민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종교적 권위와 신적인 주술로부터 탈피한 근대는 어쩌면 역사상에서 종교적 파국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새로운 유사종교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시스템이다. 즉 사물이 지녔던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시장성으로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역시 그렇게 효용성의 원칙과 교환성의 원칙에 따라 서열화 되었다. 자본주의의 도래 전까지 인간을 지배했던 양식들, 예를 들어 우리의 전통, 관습, 역사, 윤리, 명예, 사랑, 대의, 양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까지도 자본주의는 화폐의 양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자본 특유의 마력 앞에서 각각이 지녔던 개별적 가치들은 화폐의 양에 따라 서열화 된 것이다. 모든 질적인 차이를 냉소하고 화폐의 양으로 등가시켜 버리는 자본주의 정신은 기존의 세상 법칙과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듯 매 시대마다 Post Religion을 둘러싼 논의는 존재했었고, 이는 당대의 종교 위기상황, 혹은 위기의 종교에 대한 대항 혹은 대응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Post Religion 논의가 지금 막 등장한 Hot하고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종교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현재까지, 종교의 위기가 운운되는 당대의 삶과 질서 가운데 늘 가시처럼 존재했던 것이 Post Religion 논의였고, 당대가 지녔던 종교적 위기를 전제하면서 그 위기에 대한 답변과 대안을 상상하고 제안하고자 했던 것이 Post Religion 담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에 대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상황속에서, 21세기 Post Human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세계속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온갖 기괴한 내공들이 인간정신의 흐름과 마음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조작과 변형이 가능해진 세상속에서 인류는 현재 인간種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커밍아웃(Coming Out)


    얼핏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21세기 믿음에 대한 물음은 이미 전 시대에 한 차례 홍역을 치룬바 있다. 니체가‘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충격적인 대목에서 우리는 이미 종교적 파국을 경험하였다. 21세기 믿음에 대한 문제로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잠시‘신의 죽음’이 선언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 흔히 정신분석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대타자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법과 가치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엄마로 부터 전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아이는 생의 어느 한 지점이 지나면서부터 밀려오는 불쾌와 공포에 눈뜨게 되고 그것의 원인에 대해 알아가다가 마침내 엄마의 정부인 아버지와 대면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상징세계(the Symbolic)와 맞닥뜨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가 당근이라면 아버지는 채찍이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육을 먹고 자라면서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는데......이것이 정신분석학으로 풀어쓴 범박한 인류학이다.

    신은 서구인들의 집단무의식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과 질서와 도덕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발언이 충격적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진정 의도했던 것은‘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두가 성인(成人)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신율(神律)이 작동되지 않는 허무의 상황속에서 인간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묻고 싶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는 다시 사회를 조직하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법은 무엇이고 그 법의 권위는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대타자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고 대타자의 균열을 감지한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자녀들이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근대의 비극성이 확인되던 무렵 니체에 의해 제기된 ‘신 없는 세상 속에서의 믿음’을 둘러싼 문제제기다.

    대타자 신의 죽음이 선포되고, 틈이 없어 보이던 실재에 균열이 생기고 빗금이 그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니체 이후 사람 인간들은 비록 커밍아웃은 안했지만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것 아닐까. 대타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의 神 대신에 서양에서는 힌두교, 불교,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명상, 힐링, 마음수련, 요가 같은 수행프로그램들이 확산되고 있고, 종교적 대상에 대한 숭배대신 스포츠, 연예인,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더 강력한 신도들을 거느린다.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드러났듯이 줄기세포 주사, 태반주사 등 온갖 첨단 의료기술을 이용한 성형과 생명연장의 욕망은 이제 우리시대 믿음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시대 믿음의 문제는 무신론자들의 믿음, 무신론자들의 신앙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자본의 명령만이 유일한 정언명령이 되어버린 21세기 세상속에서 그 명법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신론자 아닌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Post Human을 꿈꾸는 우리는 유물론자라고 해야 맞지 않나. 이 보다 더 어떻게 무신론자일 수 있겠고, 이보다 더 어떻게 유물론자일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은 날카롭다.

   지젝은“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 이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자의 믿음을 논한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패턴을 “믿음 없는 신앙(Faith Wihtout Belief)”이라 정의한다. 지젝의 이러한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보라. 수백 수천억원대의 교회당을 지으며 신앙을 물적인 양으로 환산하여 드러내 보이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유물론자들 아닐까. 오히려 신의 존재를 믿지않은 유물론자들이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신학적 논의들을 신학자들보다 더 밀도있게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유물론자들이 세상에는 물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무신론자들의 믿음은 무엇일까?


발터 벤야민, '유물론자의 신학'을 낳다.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거기에는 벤야민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인류는 유토피아를 주장했던 많은 이들과 만나왔다. 그들은 본인들의 종교적 확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에 빠져 자신을 불살랐던 강철과도 같은 이들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몇몇 실험들이 디스토피아로 변했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파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치일 것이고, 좌파 유토피아의 실패는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교조주의적인 공산주의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불러일으켰던 만행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십자군전쟁, 종교개혁에 이은 각종 종교전쟁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과정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만행들은 모두 유토피아를 내걸고 진행된 디스토피아 역사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다시한번 깨닫는 것은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는 세상’혹은 ‘도래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에는 ‘부재하나 있어야 한다’는 공리가 또한 공존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기대, 그리고 욕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류가 진보를 거듭해왔겠는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짝패인 셈이다.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부재하면서 존재해야만 하는 운명속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고, 유토피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것 일까?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유물론자의 신학을 태동하게 만들었다.


유물론과 신학의 공명


    지난 시절에 만들어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 혹은, 메시아의 도래를 둘러싼 믿음은 목적론적인 역사관에 영향을 받은바 적지 않다. 목적론적 역사관이 무엇인가. 제1원인과 제1목적이 있고 만물의 변화와 운동은 그들로부터 기획된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 아닌가. 그 종착점이 유토피아이고, 유토피아로 견인하는 작자가 메시아이다. 최종 목표인 유토피아는 이미 정해져있고 메시아는 그런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현실 속 우리를 강제적으로 그 길로 견인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신성모독일까.

    벤야민은 일단 기존의 유토피아 이론과 메시아에 대한 믿음에 의심의 해석학을 들이댄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변증법적 시간관과 다르다. 본래 그것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 Ibid., 261. 이라 표현하였다. 유물론자는 그런 비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벤야민은 다시한번 논리를 비튼다. 지금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던 유토피아는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 고 말이다.

    벤야민의 발언은 Post-Marxism이 걸어가야 할 바에 대한 아포리즘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혁명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단절된 상황속에서 황망해하고 있는 맑시스트들에게 혁명이란 인간의 하부구조뿐 아니라 그동안 혁명의 요소에서 도외시 되어왔던 인간의 상부구조, 즉 정신, 신화, 무의식, 그리고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런 상상은 이후에 등장하는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견인하는데 중요한 모멘템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굳이 메시아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재하면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자들의 갖는 믿음에 대한 고백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점근선에 위치하는 존재일는지 모르겠다. 수학에서 목표를 향해 무수히 무한히 접근하지만 닿지 않는 상태의 운동을 점근선이라고 한다지. 유물론자들은 계속 해서 그 점근선을 그리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21세기 무신론 시대의 믿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자본의 무한질주가 유일한 삶의 원칙이 되어버린 사회속에서 우리의 신은 맘몬이다. 조물주인 맘몬이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인간에 대한 리빌딩에 들어갔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는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나리오다. 미래를 소재로 한 공상과학영화(혹은 서적)들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SF영화 속 장면들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의 상황은 영화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예민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신학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종교에 대하여 On Religion』에서 지금 시대의 종교상황을 “Religion without Religion 종교없는 종교” 이라 표현하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종교와 독단적 진리를 해체하는 가운데 새로운 실천적 차원의 진리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 카푸토의 과제다. “...the name of God in may post-modern Itinerarium is the name of infinity questionability...나의 포스트모던 순례에서 신의 이름은 무한한 질문가능성이라는 이름이다 ... God is a how, not a what 신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이다.”-Ibid.,134- 135. Post Human 시대를 맞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요청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당연히 변화된 인간상에 걸맞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상상, 즉 Post Religion에 대한 담론을 마련해야 한다. 카푸토‘Religion without religion’은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을텐데,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How) 현실의 삶에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런지는 또 다른 문제다.

   카푸토는 어떻게(how)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적용하여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차연(differance)은 차이(differ)와 지연(defer)의 합성어다. 차연으로서의 신은 세상과 차이가 나는 신이지만, 신의 임재와 도래는 무한히 지연된다. 신은 인간의 믿음, 행위, 고백, 이성적 판단 안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있는 이러한 가능성들과 대립하는 불가능한 형식으로 도래한다. 신으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이란 신의 현재화를 드러내는 표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화 될 수 없는 잉여를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무엇이다. 사건의 결과 신은 현재화 할 수 없는 절대 미래, 절대 타자의 자리로 내몰린다. 그것이 카푸토로 하여금 “Religion without Religion”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 사건의 이름을‘사랑’이라고 카푸토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신의 의미는 사랑의 다양한 움직임안에서 규정된다....사랑은 정의되어야 하는 의미가 아니라 행하고 만들어야할 무엇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각각의 삶의 공간과 조건과 현실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사건 속으로 개입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가하면 라깡의 욕망이론으로 바라본 사랑은 파괴적이다:“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파괴합니다.” 이 경우 사랑은 주체의 대상을 향한 전유, 혹은 집착의 형태가 된다. 이 사랑은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옆에 있는 이웃을 살피거나 뒤쳐져 있는 타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만족을 모르고 전방만 주시하는 리비도의 돌진 앞에서 인간은 온전한 향유의 대상에서도, 관심과 배려의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사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카푸토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서사는 다르다. 사랑과 욕망의 변증법 안에서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이 운동의 동력이 되지만, 사랑과 타자의 법칙성 안에서는 오히려 ‘당신 안에 있는 상처와 결핍’이 사랑의 원칙이 된다. 전자가 자기를 채워나가는 증산의 사랑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비워가는 감산의 사랑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욕망이론 속 사랑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고 선포한다면, 카푸토식 사랑은 ‘내 안에 너 있다’라고 속삭이며 그(녀)를 품는다.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파편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 그리고 사건의 조각들이 우리의 구원으로 들어올 것이다. 구원이란 언젠가 도래하리라 믿어지는 환상 속 메시아의 단 한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 보존되어 있던 사건들이 어떤 시점과 계기에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되살아나는 그것이다. 그 날은 분명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갖고 이 땅에서 투쟁하던 각각의 인민들이 지니는 서사가 특별한 계기에 우발적으로 맞아 떨어진 그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거리거리들에서는 사랑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노라고 누군가는 기록하겠지.


에필로그


    Post Human, Post Religion 시대의 믿음이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근대이후 전개되었던 ‘신의 죽음’, 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확인된 ‘신의 침묵’은 ‘신의 무능’서사로까지 번지면서 무신론은 공공연한 진리가 되어버렸고, ‘무신론자의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테마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존의 신관념에 대한 변화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상상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카푸토의 조언에 용기를 내어 최종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무신론자의 믿음이란 대타자인 신의 음성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믿음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우리를 지탱케했던 상징계의 법칙과 교리의 강제와 도그마의 환상을 버리게 한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이 일으키는 변혁의 사건들을 지지하는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자리란 모든 개별적 존재가 지니는 차이와 다양성을 자본이라는 등가의 원칙으로 서열화한 세상이고, 그 자리란 생명에 대한 존엄이 무너진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곳은 성의 차이로 인한 혐오가, 계급의 차이로 인한 소외가, 종교의 차이로 인한 적대가 넘치는 그곳이고, 거기는 또한 새로운 인간種의 탄생으로 인한 파국 예상되는 이곳 지구다. 그 파국의 한가운데서 다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신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근대에 대항하는 도구로서의 이상 단편소설(2)


: 식민지 조선 근대에 대한 이상의 인식  



신윤주*


    촌과 들은 마치 白晝의 슬픈 점괘에 서버린 채 굳어버린 畵幅이다.

 昏睡와 같은 문명의 魔術에 드디어 꾸벅꾸벅 조는 것일까. 

이 촌에 행복 있으라.[각주:1]


    명백한 담론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지만 문인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 대중사회 속에서 문학의 자리에 관해 고민해야 했다. 이즈음 독자층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문학 작품 뿐 아니라 다양한 잡문을 생산해야 하는 ‘문필가’의 위치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문인들은 고급과 저급, 문학과 비문학 등의 층위를 벗어나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일군의 고급독자가 아닌 최소한의 문자해독력만을 가진, 취미와 인식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저급한 수준의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각주:2]

    이상이 수필을 발표할 당시에 수필은 하나의 장르로서 ‘隨筆’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으되,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적 입지는 갖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이상 자신이 문학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이상[각주:3]이 높았던 만큼 그에게 수필은 대중문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의 시에서 나타나는 실험적인 성격과 압축적인 표현, 소설에서 사용된 고도의 은유와 상징 뒤에 가려져 수수께끼처럼 건네지는 작가의 진의와 정서를 짐작하는 일이 수필에서는 한결 수월하다는 면에서 이상의 수필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참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1934년 6월에「혈서삼태」로 첫 수필 작품을 선보인 이후 『매일신보』에 1937년 4월과 5월에 걸쳐 「공포의 기록」을 연재하기까지 이상은 생전에 15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사망 직후에「권태」와 「슬픈이야기」가 추가로 발표되었다. 이 중 이상이 단편소설 창작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한 1936년 6월 이전에 발표된 수필들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이는 이상이 단편소설 창작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하기 이전 시점에 발표된 수필들에서 이후 단편소설로 이어지게 될 이상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자 함이다.

    이상은 시를 연작으로 즐겨 썼던 것처럼 수필 역시 연작으로 쓰거나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눈 단락들을 시의 연처럼 연결하는 방식으로 수필을 구성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후행하는 조각 혹은 연재글에 이르렀을 때 이전에 언급했던 대상에 대한 시선이나 판단을 전복하여 보여주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강점을 지닌다. 이상은 다음 단락 혹은 연작 수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차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고 새로운 서사의 장을 제시한다. 하나의 관점에서 이미 다룬 대상을 후행하는 글에서 다른 관계 속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평가를 유도하기도 하고, 대상의 포지션이 행위의 대상에서 행위의 주체로 바뀌었을 때 드러나는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여 기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방식은 사물의 의미나 속성이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견지를 빌어 설명하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 수필 속의 대상이나 사건은 의미의 관계망 안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궁극적으로 이상이 쓴 텍스트에서는 그것을 부분으로 삼는 전체 체계와 구조 안에서 대상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령 산촌의 ‘색시’는 도회지의 여인과 비교 선상에 놓였을 때는 가난하지만 무명같이 튼튼한 존재로 인식되었다가, 그 다음 장에서는 뽕잎을 따기 위해 조이삭을 짓밟는 존재로 뒤집힌다. 또 종로 거리를 오가다가 적선을 베풀면서 인간 노릇을 한다고 느끼던 ‘화자’가 다음 순간 자신보다 상위의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바로 거지와 같은 존재로서 인식될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것은 이상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자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제시하고자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식민지성과 근대성은 이상에게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물질과 상황으로 파편화되어 존재하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파편들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의 의미는 가변적이다. 또한 대상은 홀로 놓여있지 않다.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으며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것이 이상이 시와 수필을 연속해서 쓰는 것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효과이다.

    이상 수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현대’이고 ‘문명’이다. 또한 이상의 수필에는 이야기가 일어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즉, 시간성보다는 공간성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무대는 근대적인 것들이 담겨있는 ‘도회지’이거나 도회지와의 대조 속에서 근대성을 비추는 ‘산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도회지에서 일어나는 전근대적인 일들과 산촌에서 일어나는 현대 문명의 흔적들을 다루며 외떨어진 곳까지 침투해가는 문명과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신화적 무지와 인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인습의 흔적을 다루는 동안에도 이상은 그것과 상응하는 근대의 산물을 떠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더러 죽은 어머니를 살리는 수가 있다니 그것을 의학이 어떻게 교묘하게 설명해 줄지는 모르나 도무지 신화 이상의 신화다. 원체가 동양 도덕으로는 신체발부에 창이를 내는 것을 엄중히 취체한다고 과문이 들어왔거든 그럼 이 무시무시한 훼상을 왈, 중에도 으뜸이라는 효도의 극치로 대접하는 역설적 이론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 일종의 무지한 만적 사실인 것을 부정키 어렵다는 것 외에는 취할 것이 없다. 알아보니 학교도 변변히 못 가본 규중처녀라니 학교에서 얻어 배운 것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어른들의 옛이야기나 …… 아 전설의 힘이 이렇듯 큼이여. …… 이 양이나 다름없이 부드럽게 생긴 소녀가 제 손가락은 넙적한 식도로 덱걱 찍어내었거니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다만 그의 가련한 무지와 가증한 전통이 이 새악씨로 하여금 어머니를 잃고 또 저는 종생의 불구자가 되게 한 이중의 비극을 낳게 한 것이다. 「조춘점묘 2-단지한 처녀」 중에서


    「조춘점묘 2」의 주인공인 ‘단지한 처녀’는 이상의 막내 동생 옥희의 친구였는데, 그 처녀가 어머니를 여의고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식도로 자신의 왼손 무명지를 찍어 잘라낸다. 간혹 그렇게 해서 어머니를 살려내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믿은 것이다.

   이 글에서 이상은 이토록 독하고 한편 도덕적인 행위의 저변에 깔려있는 “전설”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 “학교” 교육의 부재했음을 같은 선상에서 보여준다. 손가락을 잘라내는 효의 실천은 “오늘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생활 시스템이나 사상적 프로그램으로 재어보아도” 안타깝지만 무지하고 미개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무슨 물질적인 문화에 그저 맹종하자는 게 아니라 시대와 생활 시스템의 변천을 좇아서 거기 따르는 역시 새로운, 즉 이 시대와 이 생활에 준구되는 적확한 이론적 척도”를 “의식적으로 입법해 내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겨야 할 것”이라는 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근대성을 선취하고자 하는 이상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의 눈에 이 단지한 처녀는 불행히도 “시대에서 비켜선 지고한 효녀”다. 그녀의 효심이 공경받아 마땅한 정성인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손가락을 잘라냈다는 사실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오히려 단지를 미워하는 심사 저 뒤에는 아주 근본적으로 미워해야 할 무엇이 가로놓여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지식이 아닌 신화와 전설을 상식으로 삼는 사회의 여전함을 못내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난 이 글을 통해 이상은 그가 속한 세계에 결핍된 ‘현대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현대성을 성취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일리는 없다. 현대성의 어떤 면을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이상이 ‘골동품’을 소재로 삼아 쓴 수필에서는 특히 “현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부상한 사물의 ‘교환가치’ 덕에 생기는 일들이 그려진다.

    이 글에서 이상은 골동품을 다각도에서 살펴본다. 골동품은 선대와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고, 예술품으로 인식될 수도 있으며, 고고학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거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위조하여 거래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가끔 아는 이에게서 자랑을 받는다. 내 이조 항아리 좋은 것 우연히 싸게 샀으니 와보시오-다. 싸다는 그 값이 결코 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보면 대개는 예술적 가치도 없는 태작인 경우가 많다. 그야 오늘 우리가 미쓰꼬시 백화점 식기부에서 살 수 없는 물건이니 볼 점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 볼 점이라는 게 실로 하찮은 것이다. 「조춘점묘 6~7-골동벽」 중에서


    이상의 눈에 그다지 예술적 가치도 없는 이조 항아리를 “얼싸안고 혀로 핥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진부한 “커트 글래스 그릇” 하나를 만들어내는 부지런함과 비교되는 나태한 습성일 뿐이다. 그는 골동품이라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 되려면 “같은 시대 것, 같은 경향 것을 한데 모아놓고 봄”으로써 구체적인 역사지식을 얻을 수 있을 때이며 어느 시대의 “생활양식, 민속, 민속예술”을 알고자 함이 없을 경우에는 골동품의 존재 이유가 소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상이 ‘사용가치’라는 개념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골동품들을 모아놓음으로써 그것이 속한 시대와 경향을 알게 하는 박물관과 병존할 때에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고 역설하는 것은 골동품의 쓰임에 주목한 것이므로 사용가치에 제한하여 가치를 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각주:4] 사용가치의 강조는 다음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골동품이 ‘교환가치’를 지닌 사물로 작동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전혀 오 전에 사서 백 원에 파는 것으로 큰 미덕을 삼는 골동가가 있으니 실로 경탄할 화폐제도의 혼란이다. 모씨는 하루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요전에 샀던 것 깜빡 속았어, 그러나 오 원만 밑지고 겨우 다른 사람한테 넘겼지 큰일 날 뻔했는 걸-이다. 위조 골동품을 모르고 고가에 샀다가 그것이 위조라는 것을 알자, 산값에서 오 원만 밑지고 딴 사람에게 팔아먹었다는 성공 미담이다. 「조춘점묘 6~7-골동벽」 중에서


    박물관에 기부하기도 애매한 위조 골동품을 유통하는 도회지의 세태[각주:5]는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리는 산촌의 어느 밤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산촌의 “시민”들은 ‘금융조합 선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활동사진회’에만 대단한 호응을 보인다. 그들의 무지는 그들 자신을 “경탄할 화폐제도의 혼란”에서 구원해주는 역설적 무기가 되었다.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로 시작한 모임은 “영화 감상의 밤”으로 끝났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 태서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었습니다. 10분 휴게 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 연설이 있었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사람도 박수치 않습니다-. 「산촌여정 <6>」 중에서


    ‘성천기행 중의 몇 절’이라는 부제가 붙은「산촌여정」이라는 수필은 이상이 자신의 보성고보, 경성고공 동기였던 원용석이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지역인 성천에 가서 며칠 지내며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각주:6] 이상이 ‘도회지’라고 부르는 ‘경성’에서 경험하는 근대성에 비해 산촌인 성천에 들어와 있는 근대성은 얼개가 허술한 채 존재하는 파편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오히려 “세숫비누에 한 겹씩 한 겹씩” 해소된다는 도회의 육향을 이상 자신이 묻혀내지 않았다면 드물게 발견되었을 근대의 파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특성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한다.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 빛 꼬꼬마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소조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니다. 「산촌여정<3>」 중에서


    고요한 밭, 바람에 옥수수가 서로 부딪혀 만드는 우수수 소리라야 겨우 적막을 깨는 공간에 장엄한 예포 소리가 들려온다. 산 너머 어딘가에서 흘러온 소리에 작은 새의 간이 떨어졌다. 이상은 작은 새의 두려움을 통해 현대식 무기가 조장하는 공포를 드러낸다. 그것이 아무리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발사한 공포탄일지라도 여전히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무기인 것이다.

    현대적 이론과 생활 시스템은 신화와 전설의 세계에 빠져있는 무지한 대중을 구원할 수 있는 해법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또한 사물의 사용가치를 가리는 왜곡된 화폐제도나 침입의 형태로 나타나는 공포스러운 무기와 연동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은 이상에게 온전히 추구할 수도 추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가적인 대상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파시즘적 요소와 뒤섞여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각주:7] 근대의 이미지는 다면적이며, 근대는 다면성을 극에 달할 수 있게 하는 ‘위조’에 능하다. 이상은 백화점에서 안내방송을 맡은 라디오를 점원의 대표라고 보았다. 라디오에서 대표로 안내 방송을 하면 점원들은 일일이 손님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점원 개개인의 위조이다. 


비오는 백화점에 적! 사람이 없고 백화가 내 그림자나 조용히 보존하고 있는 거리에 …… 라디오는 점원 대표 서럽게 애수를 높이 노래하는 가을 스미는 거리에 …… 「산책의 가을」 중에서


    「산책의 가을」에는 ‘산보가을예’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글에서 이상은 가을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것들을 하나 하나 나열한다. 근대의 징후들의 예다. 캔음료의 따개를 열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장소를 따라 흘러간다. 백화점에서 과일가게로 다시 인쇄소로, 청계천으로, 맨 마지막은 롤러 스케이트장이다.

    백화점에는 사람이 없다. 백화가 ‘나’의 그림자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점원의 대표는 라디오다. 쇼윈도우 안에는 마네킹이 서 있는데, 마네킹에는 살결이 없다. 마네킹은 모델의 위조다. 유니폼을 입은 소녀들에게 볼 수 있는 피부는 포장지보다 온전한 포장지이지만, 유니폼은 피부보다 온전한 피부다. 유니폼은 피부의 위조다. 윈도우는 백화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일가게에도 있다. 과일가게의 내부를 들여다보니 과일 호흡이 어린 유리창 너머로 살짝 향초(바나나)와 복숭아가 보인다. 복숭아와 향초, 혹은 복숭아와 바나나다. 인쇄소로 넘어가자 직공들 얼굴이 모두 거울 속에 있고 모든 것이 다 ‘좌’다. 그렇기에 그들과 좌된 지식으로 대화하려 했더니 웬일인지 그들의 서술은 ‘우’다. ‘나’는 이렇듯 방대한 좌와 우의 교차 속에서 졸도할 것 같아 뛰쳐나왔다. 그러자 직공은 일제히 우로 돌아간다. 거울 속의 인쇄소 직공은 나의 위조다. 청계천에 이르렀다. 상공에는 비행기가 광고 삐라를 뿌리고 있다. 향국의 아이들(동해)은 삐라같이 삐라를 주우려고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 마지막으로 롤러스케이트장에 이른 이상은 겨울을 위조하는 빙판을 바라본다.


롤러 스케이트장의 요란한 풍경, 라디오 효과처럼 이것은 또 계절의 웬 위조일까. 월색이 푸르니 그것은 흡사 교외의 음향! 그런데 롤러 스케이트장은 겨울- 이 땀 흘리는 겨울 앞에 서서 찌꺼기 여름은 소름끼치며 땀 흘린다. 어떻게 저렇게 겨울인 체 잘도 하는 복사 빙판 위에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 「산책의 가을」 중에서


    내가 너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너보다 낫지 않느냐고 아우성치는 위조들의 틈을 지나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문제의식은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는 질문에 이른다. 근대 초기의 징후들이 자연으로부터 존재했던 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위조들을 늘어놓은 가운데 진정성에 대한 질문은 인간 존재에게까지 향한다.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는 질문은 인간 존재와 인간의 위조를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지만, 한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그 존재의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인간 모형’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마꾸닝 회충 구제 그러나 한 동해도 그것을 읽을 줄 모른다. 향국의 동해는 죄다 회충이다. 그래서 겨우 수채 구녕에서 노느라고 배 아픈 것을 잊어버린다. 동해의 양친은 쓰레기라서 너희 동해를 내어다버렸는지는 모르지만 빼빼 마른 송사리처럼 통제 없이 왱왱거리면서 잘도 논다.[각주:8] 「산책의 가을」 중에서


    아이들은 마치 뱃속의 회충처럼 내몰려져있다. 이상은 아이들을 내다버린 부모들을 쓰레기에 비유한다. 가장 약한 인간 존재인 어린이들이 유기된 상황을 통해 인간됨에 관한 질문을 끌어낸다. 인간이 위조한 사물들에 소외된 인간은 또한 서로를 소외시킨다. 「조춘점묘 5-도회의 인심」에서는 그런 도회의 인심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상의 단편소설 속에 종종 등장하는 룸펜 이미지는 흔히 이상 자신의 일상을 그린 것이었다고 읽히지만 「조춘점묘 5」에 묘사되고 있는 개개인의 모습을 바탕으로 고찰한다면, 룸펜 이미지는 도회지에 사는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의 이미지를 끝까지 밀어붙인 인물형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조춘점묘 5」는 이상이 전해들은 일화로 시작된다. 상해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상해에서는 아이(보통은 죽은 아이)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다고 한다. 새벽이면 쓰레기 치우는 인부가 일을 하는데 휘파람을 불며 쓰레기를 치우다가 죽은 아이를 발견해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쓰레기만 걷어 가느라 아이의 시체를 이리 저리 비켜놓고 하다가 그냥 놔두고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이 주목한 것은 아이를 버리는 일이 아닌 미화원에 반응, 곧 “다만 이것은 쓰레기는 아니니까 내가 치워 가지 않을 따름 어떻게 되는 걸 누가 알겠소” 하는 듯한 태도다. 쓰레기를 치우는 인부는 쓰레기만 치우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고도의 분업화의 부산물이다. 한편 버려진 아이는 그것이 유기된 사체일지라도 간단히 쓰레기로 분류되기에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흔적을 여전히 지닌 복잡한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도회의 인심이 “어느 만큼이나 박하고 말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로 뭉뚱그려진 문장 속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죽은 아이의 몸처럼 다루기 힘들고 그래서 그저 그렇게 방치되어있는 산적한 도회적 과제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숨어있다.

    이상은 이사한 지 일 년쯤 되어가는 ‘나가야’에서의 생활에 대한 회고로 이야기를 이어간다.「날개」의 33번지 18가구를 떠오르게 하는 이 ‘나가야’의 한 들보 한 지붕 밑에는 박 서방, 김 씨, 이상, 최 주사 등 여러 사람이 칸칸이 산다. 칸마다 크고 작은 문패도 붙었다. 다닥다닥 붙은 옆 방을 옆 집 삼아 지내는 사이이지만 이들은 서로 사귀지 않는다. 특히 직업은 절대 비밀이다. 한 젊은 세대는 여름부터 그칠 줄 모르고 싸우다가 가을 초입 즈음에는 결국 헤어지고 둘다 집을 나갔다. “물론 이사를 하는 경우에도 이웃에 인사를 하는 수고스러운 미덕은 이 ‘나가야’ 규정에 없다.” 그 옆 칸에 사는 젊은 여자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고 평했다. 이 젊은 여자의 경우 젖먹이를 먼저 저 세상에 보내는 일을 겪었다. 이런 경우에도 부의를 하는 이웃은 없었다.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어 이상의 가족이 사는 칸의 반대편 이웃집에서 흰떡을 했다. 그 떡은 그 집 식구들끼리만 먹는다. 이상의 가족 역시 지짐이를 했지만 “흰떡 한 가락 안 주는 걸 뭘, 하고” 혼자 먹었다. 사 남매가 사는 바로 옆집의 경우는 처음부터 나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 집에서는 애초에 아무것도 부치거나 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흰떡과 지짐이를 그 이웃집에 기대하고 있는 수작이 아닌가” 해서 오히려 얄밉기까지 했을 뿐이다. 혹 누가 굶지는 않는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바로 옆 방의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진심으로 마음쓰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거슬리느냐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이상은 어느 만큼이나 박하려는지 알기 힘든 도회의 인심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도회의 인심이 박해진 것에 이유가 없을 리 없다. 한층 더해진 생활의 중압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을 짓누른다.


생활이라는 중압은 늘 훤조하며 인간의 부드러운 정서를 억누르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은 이 중압을 한층 더 확실히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교착된 강철과 거암과 같은 콘트리트 벽의 숨찬 억압 가운데 자칫하면 거칠기 쉬운 심정…… 그가 제철공장의 직인이건, 그가 외과의실의 집도인이건, 그가 교통정리 경관이건, 그가 법정의 논고인이건, 그가 하잘것없는 일용 고인이건, 그가 천만장자의 외독자이건 묻지 않는다. 그런 구구한 간판은 ‘네온사인’이 달린 다방 문간에 다 내려놓고 들어가는 것이다. 「추등잡필 3-예의」 중에서


    “강철”과 “콘크리트 벽의 숨찬 억압”이라는 공간의 느낌이 대변하는 생활의 무게 역시 무작정 지향할 수만은 없는 근대의 단면이다. 이상은 근대에 관한 이러한 성찰과 고민을 모두어 자신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 문학하는 행위로 나아갔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상의 수필을 통해 앞서 살펴본 근대를 둘러싼 문제의식들을 그의 문학하는 태도와 함께 고찰함으로써 이상에게 단편소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구성하고, 나아가 소설의 인칭과 인물들을 통해 그의 단편을 읽는 구심점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상, 「무제」, 김수영 역, 『현대문학』, 1960.12 [본문으로]
  2. 김승구, 「김기림 수필에 나타난 대중의 의미」, 『식민지시대 시의 이념과 풍경』, 지식과 교양, 2012, 75쪽 [본문으로]
  3. 사신6. “톨스토이나 국지관 씨는 말하자면 영원한 대중문예(문학이 아니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신듯 합디다.” [본문으로]
  4. 「날개」에서 ‘나’는 사용가치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화폐’라는 사물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복잡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제도와 화폐의 축적과 재생산, 사물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관한 고민은 수필「산촌여정」이나 단편소설「지주회시」에서도 나타난다. [본문으로]
  5. 본문에 미쓰꼬시 백화점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도회지의 에피소드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6. 나는 그후 갑인출판사에서 발행한 이상수필집에서 성천기행을 읽어보았다. 나는 그가 성천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동안 기진맥진하여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글을 쓰고 시를 썼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용석, 「내가 마지막 본 이상」, 『그리운 그 이름 이상』, 172쪽) [본문으로]
  7. 파시즘 권력에 대한 이상의 인식은 1936년 10월에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수필 중 「추등잡필 2-구경」, 「추등잡필 4-기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추가 정리 필요) [본문으로]
  8. 이상이 아이들을 ‘회충’에 비유하거나, 물고기 떼처럼 ‘잘도 논다’고 표현한 것은, 자칫 조소하는 듯한 어조로 읽힐 수 있지만 이상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를 바탕에 두고 읽는다면 조소하는 일말의 정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긍휼히 여기는 속내를 다른 텍스트 곳곳에서 드러낸다. 가령「조춘점묘」의 ‘동심행렬’ 편이나 완성된 원고의 형태로「권태」에 편입된 「이 아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이별의 이유



유하림*

 


   6개월 정도 만난 애인은 어쩐지 나를 답답하게 만든다. 그에게 귀엽고, 착하고, 애교많고, 철없고, 왈가닥인 나는 진지하고, 예민하고, 거칠고, 폭력적일 수 없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시작 전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가 엉덩이를 쭉 내민 자세의 운동을 하는 장면이 광고내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더 저렴하게 이용하자!’ 같은 카피가 나왔다. 광고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저렴한 가격이었는데, 내가 본 것은 한 여자의 몸매와 그것을 통한 섹스어필이었다. 화가 나서 “아니, 저게 무슨 광고야.” 하고 투덜댔다.


   “통신사 광고지.” 

   “그걸 내가 몰라서 물어?” 

   내가 어떤 의미로 말한지 뻔히 알면서도 눈치 없는 답을 하는 그에게 쏘아댔다. 

   “왜 또 짜증났어. 좋게좋게 하자.”   


   애인은 내게 자주 그렇게 말했다. 좋게좋게 하자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학교에서 있었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흥분한 채로 가해자를 욕했다. 애인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항상 그렇게 많은 곳에 열을 쏟으면 힘드니 진정하라고 말했다. 진정하라고? 같이 화내주지는 못할 망정, 진정하라니. 힘이 풀리는 말이었다.  

   비슷한 몇번의 사건을 겪고 나니 애인의 앞에 설 때면 자기검열을 하게됐다. 내가 흥분하며 말한 것은 아닌지, 좋은 우리 사이를 방해할 정도로 다른 일에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 그가 내게 좋게좋게 하자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혔다. 분노 해야 할 대상에게만 화내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애인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심지어는 그에게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누구는 싸움이 체질이라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니는 줄 아나. 좋게좋게. 나도 좋아한다. 그거 못해서 안하는 거 아니다. 이 세계는 나를 자꾸만 화나게 하고, 지금 나는 나의 정당한 분노를 대중적인 언어로 푸는 것에 한참 흥미를 느끼는 중이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에 대해서 신경끄기로 작정한 상태였는데 나는 다시 그를 상대 할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언어를 골라야만 했다. 그래서 말 수가 적어졌다.

   애인에게 몇번 말했다. 싸우지 않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잘 싸우는 게 중요하다고.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서로의 삶과 경험과 생각을 자꾸만 나누는 것이 관계를 맺는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역사와 역사가 만난다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 서로 오만해하지 말고 열심히 들어주자고. 그런데도 그는 그냥 싸우는게 싫단다. 서로 좋다고 말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왜 싸워야 하는건지 모르겠단다. 아니. 무작정 싸우자는게 아니라,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 하자는 거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알게된다면 당연히 못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상대에게 기대를 걸고, 그 기대에 못미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 안한단다. 본인은 그냥 나 자체를 사랑한댄다. 애인이 생각하는 ‘나’는 뭘까. 잘 모르겠다.

   그는 고양이를 예뻐하고, 뭘 먹든지 옷에 다 흘리고,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화내고, 때로는 거친 언어로 분노를 표현하고, 어떤 사람이든간에 적절치 못한 말을 한다면 신랄하게 까버리는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싫은 모습은 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연애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 그리고 상대가 그것을 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혹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고 보는 것. 그렇다면 내 정의로 우리는 연애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것을 하는 중이다. 그는 나의 분노를 보지 못하니까. 나의 분노를 예민함 따위로 취급하니까. 그래서 나는 애인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연애는 여기까지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과의 연애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아무 의미 없는 나




 김정원*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1948 

   

    고개는 빳빳이, 보폭은 넓게, 표정은 당차게. 나는 지금 런던의 번화가를 걷고 있다. 부는 바람에 보라색 스카프가 흐느적댄다. 스카프가 날아갈까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걸어야 한다. 이미 몇 번이고 왔던 길이라 헤매지 않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지나가더라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 저 모퉁이만 돌면 익숙한 곳이고, 거기에 가면 나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좀 전의 그 거리보다 익숙한 곳, 학교의 건물이 보이자 나는 안도하며 3층 교실로 향한다. 계단마다 서 있는 조각상들은 그야말로 유럽풍이다. 현대적 조형물은 간데 없고, 중세풍의 것들만 진열 돼 있다. 게시판엔 공지들이 다닥다닥하다. 손글씨로 써 낸 대자보들은 며칠 째 제목도 읽어낼 수가 없어, 나만 공지를 못 알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친다. 교실 앞에 다다르자, 잠깐 숨을 고르고 문을 연다.

    먼저 온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향한다. 교실 안 모든 풍경이 오감을 건드린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낯선 그 냄새.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인데, 섬유 유연제 향과 초콜릿 냄새가 섞인, 달달 하면서도 느끼한 그런 냄새다. 다음으로는 나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그들의 말소리. 언뜻 들어서는 알아챌 수 없기에, 언어이기 보다는 마치 그네들만이 섭렵한 기호 같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모인 이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서로의 에세이 주제를 묻는다. 내 옆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바디우에 관해 연구 중이다. 내 주제와 동일하여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맞은 편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칸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칸트를 다시 읽었기에 몸을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이제 나도 입을 떼보려 하는 찰나, ‘바흐’를 진실로 사랑하는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이 칸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빠르게 진행되는 그들의 말소리에, 하려던 이야기를 접고 그냥 경청하기로 한다. 중간중간 고개도 끄덕이고, 눈도 맞추며 ‘굿 리스너’가 따로 없다. 강제된 경청인지 자발적 경청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경청이 다시 시작됐다. 

    교수가 들어오고, 현상학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후설을 지나 하이데거 이야기가 한창이다. 나는 하이데거가 너무 좋아 교수의 말소리에 애를 써가며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는 건 그가 쓰는 귀족적인 영어 강세(posh English accent)뿐이다. 속으로 그의 악센트를 따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사러 줄줄이 나가는 그들을 따라가본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무리들처럼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듯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다시 철학이거나 신학이다. 나는 그네들이 거론하는 모든 유럽 철/신학자들의 이름을 들어보았고, 심지어 그 중 많은 책을 이미 다 ‘읽어제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릴까 하다, 오늘은 집에 가기로 한다. 나풀대는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자 한결 편하다. 어깨에 들어간 힘도 빼고, 보폭도 줄이고, 표정도 풀고 나니 한 번 더 편해진다. 삼십여 분을 걸으며 그들을 고발한다. 고발자도 나고 듣는 이도 나다. 깊이깊이 속으로- 죄 없는 그들의 죄를 뇌까려댄다. 나 말고는 유색인종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학교의 폐쇄적 수용성을 까고, 신학함의 근본이 백인들에게 있다고 믿는 그네들의 결핍된 식견을 까고, 세계랭킹을 들먹이면서 유럽의 전시물만 죄 갖다 놓은 그들의 오만함을 깐다. 헤겔을 헤젤로, 아이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틀이라 주저 없이 발음하는 영어 중심의 사고를 까고, 워킹 클라스와 구분 짓기 위한 포쉬 영어를 끝내 구사하는 그들의 교만함을 깠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유럽철학뿐인 그들의 무식함을 까고, 마지막으로 유로센트리즘, 그러니까 서구를 본질로 생각하는 대학가의 망상가들을 힘주어 깐다.

    한참을 까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후련해짐과 동시에 아주 또렷하게 나를 덮쳐오는 것 하나, 다름 아닌 ‘나’였다. 다 까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롯이 아주 그냥 나 하나였다. 하루 종일 밖을 향해 있던 내 의식의 전반이 이제 나를 향한다. 나를 비추는 의식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자아 하나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관계의 경계 밖을 서성대며 낯설어 했던 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눅들던 나. 하하, 호호 웃을 수 없어 외로워 하던 나.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나. 소외에 맞서느라 잔뜩 긴장하던 나. 누구도 나의 의미를 물어주지 않아 절망하던 나, 내 지식을 드러내지 못해 억울해하던 나…... . 태생적으로 예민한 탓에 보다 야무지게 생채기가 난 내 가엾은 자아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도착도 못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마트에 들려 찬거리도 사고, 택배도 찾아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거짓 이성이 퇴각하자 진실한 몸이 사건의 진정을 드러낸다. 몸이 놓여 있는 ‘여기’-‘지금’의 진실은 눈물이고 절망이고 불안이었던 것이다. 내 몸에 새겨진 내 언어, 내 분위기, 내 역사를 꾹 누르고서,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려 애쓰던 몇 주의 시간이 눈물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무너졌으니 이제 세울 때가 왔다. 텅 비워냈으니 이는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존재(existence)의 어원이 ‘밖에 나가 서다’라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다면, 숱하게 경계 밖에 있었으니 실로 나는 ‘존재’했다. 나를 밖에 두기도 하고, 안에 들이기도 하며 남루한 나 자신 앞에서 엉엉 울어 봤으니, 나는 제법 실존적이었다. 이제 시불시불을 멈추고, 쫓던 것의 무상함과 그 안에 머물던 나 또한 얼마나 무의미 했는지를 응시하면 된다. 나를 일으킬 명제는 간단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와 ‘나는 무의미하다’면 충분하겠다. 나는 델포이 신전 앞에나 선 듯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해야만 한다’를 넘어, ‘하고 싶다’를 넘어 ‘나는 존재한다’로 나아가길 꿈꾸며 기도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내가 신봉했던 가치와 의미들이 찢겨 나간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깊이와 충만함이 내 안에 있음을 굳건히 믿어본다. 결핍된 존재인 것을 자각했으니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그 무의미성을 뚫고 들어가 가능성을 건져내 오면 된다. 암만 이 낯선 세계에 내팽개쳐져 있다고 하나, 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나의 외부로 존재를 몰아내고, 순간순간을 쥐어짜며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구토)” 때가 왔다. 정해진 것은 없다. 본질도 없고, 필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는 것은 ‘저주 받은 자유’로 들어 찬 몸뚱이 하나. 이 몸뚱이로 낯설고 불안한 생활세계를 단독자로서 기어이 살아내면 된다. 내 몸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고독에 그대로 고통스러워 하며, 내 몸의 한계와 유한성을 솔직하게 토해내면 된다. 낯선 세계 속에 단독자로 서게 됐으니 외롭고 불안했던 그 기분에 차라리 감사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로캉탱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다. …… 나는 눈 속을 걸어와 완전히 얼어붙었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온 사람과 같았다.”(구토)


    이토록 비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 가까스로 세워 놓은 나의 결단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파란 눈의 격차가 나를 다시 주눅들게 할 것이고, 나와 낯선 냄새의 격차가 나를 다시 불안하게 할 것이다. 빨간 2층 버스가, 기호 같은 말소리가, 고상한 악센트가 다시 나를 자극하면, 나는 다시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으려 머리를 빳빳이 들고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게 된다 한들, 부지불식간에 나를 덮치는 격차감으로 나는 다시 발버둥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발버둥은 빤히 예고 되어 있다. 세계 속에서 미래로 나를 던져가며 살아가는 한,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아프고- 초월하고-의 과정은 계속 될 것이고 그로써 나는 다시 비장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위의 고백은 이미 2년 전의 것인데, 그간 나는 무수히 무너지고 다시 비장했었다. 나를 만나고, 나의 외부를 만나고, 다시 밀려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은 지독한 ‘의미 물음’의 과정일 것이다. 무의미성과 의미성 사이에서의 발버둥. 시인 조은의 성찰이 나의 것이 되기를 간구해본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 조은, 생의 빛살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곳에서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개역개정)


    감사, 영광, 기쁨 찬양과 같은 송영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들은 그 무게로만 따지자면 사랑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언어이지요. 감사와 찬양, 기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 분을 향한 무한한 긍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송영의 언어는 존재론으로는 하나님이 ‘신’으로서 누리는 독점적인 지위를 밝히 드러내는 말이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늘 상기시키고,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실상 지금 우리의 생활과 기독 공동체 안에서는 정작 송영의 신학은 천박한 인과율의 굴레 안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이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사업이 술술 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언어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맴도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송영은 번영신학과도 강력히 결합되어 우리의 기존 신앙 체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번영신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송영의 언어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나님, 이번에 제가 일본여행을 계획했는데, 마침 다른 일로 취소되어서 못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가려던 그 곳에 지진이 난 겁니다. 그 곳에 가지 못하게 막으신 당신의 계획이 놀랍습니다!’ 라든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만약 몰랐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와 같은 언어는 결코 우리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인과율의 송영이 녹아든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18:11~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인과율 송영’의 전형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말이죠. 이는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이미 천년도 더 이전에 부정하셨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교회 안에서는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송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제대로 된 송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의 제목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온전한 감사가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하박국 본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입니다. 내게 키우는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인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열매는 달린 것이 없습니다. 내게 우유를 제공하고 고기를 제공해 주는 자산 중의 자산, 양과 소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음에도 내게는 구원의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사건이 진행될지라도, ‘통념적인 감사의 제목’들이 사라질지라도 내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찬양과 감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앞에서 살펴본 인과율의 송영보다는 훨씬 송영의 본질에 가까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 찬양 등 송영의 언어는 성서 곳곳에서 나타나듯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소망과 믿음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러한 기도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나는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비와 그 당사자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던 인과율의 연줄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오직 그가 맹인인 이유는 그 날 그 순간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도하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게 하려고 생긴 일이라 설명하십니다. 즉, 송영이란 현실의 당면한 문제, 가시적인 개별 현상을 뛰어넘어 드려지는 것이며, 소망과 믿음의 이름으로 영원 불멸한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감사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윗의 탄원 시편이라든지 오늘 읽은 하박국의 본문에서 등장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신학은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도 그러한 송영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신앙의 순전함을 강력하게 보장하는 송영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에서도 이런 송영을 장려하지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마치 어디를 가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답’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겠지만,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라. 하나님이 계시는데 대체 불평할 게 무엇인가?”라는 당위적인 선언으로 그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과율의 송영보다 더 억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역사 속에서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무화(無化)시키는 결과를 빚어냅니다. 이러한 송영과 송영의 장려가 지금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매만져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당장 내 주머니에는 소유한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이라는 ‘백지수표’를 소유했다는 말은 마치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끌어 쓰는 신용카드와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존재하지 않아서 끌어쓰는 감사는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채우는 것’으로서의 감사라는 매커니즘은 더욱 공허한 종교적인 허무를 초래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횡행하는 힐링의 담론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는 식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도 황폐한 우리 마음에 더욱 큰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은 무엇일까요? 다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있지도 않은 티끌만한 감사의 이삭을 줍고 또 주워 감사와 찬양의 제삿밥을 짓는 그런 류의 송영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다짜고짜 감사해야 합니까? 왜 감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름만으로 감사하라는 공허한 기계적 감사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송영의 첫걸음은 송영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영에 앞서 잠잠해지는 것, 달리 말하면, 그 감사의 제목, 그 자리가 비어 있음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섣불리 비어있는 송영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히지 않는 것 말입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가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어서 하나님을 송영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정의 자리에 홀로 서서 송영을 멈추고 결연히 견뎌야 합니다. 이육사의 시 ‘광야’는 이렇게 불가능한 송영 앞에 서서 그 모욕과 부정의 시간을 견디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에 대해 황현산 선생이 내린 해석과 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송영의 대안에 대해 연결지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은 산맥들도 차마 범하지 못한 그 광야,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렸지만, 결코 그 곳만은 길닦기를 포기한 그 광야를 닮았습니다. 송영이 가능할 리 만무한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큰 강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 강물, 부지런히 계절을 피고 진 인류 전체의 고고한 역사의 강물은 흐르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마치 이소라가 노래한 것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고 고백할만큼의 고독이 강렬합니다. 그 강물 앞에서 나란 존재는 광야 앞에서 찌질한 삶을 견디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한 인생 살다 지는 티끌이 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화자는 말합니다. 눈은 내리고 있고, 매화 향기는 홀로 가득하다구요. 매화 향기는 작지만 고결하고, 단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매화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부끄러워하지만, 오히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된 세월의 아득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결국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결심하고 있습니다.[각주:1]

    가난한 노래의 씨, 이것이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이 아닐까요? 줍느니만 못한 감사의 조각들을 주워 연명하는 인과율적인 송영을 그만 두십시오.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라는 허구적 이름으로 치환하여 지금을 위무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에게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감사할 수 없음에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송영의 자리를 비워 두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면, 천고의 뒤에 광야에서 목을 놓아, 진정한 초인(들)[각주:2]이 부를 그 송영을 꿈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웹진 <제3시대>


  1. 이 단락의 내용은 황현산의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8~19쪽의 내용을 요약, 각색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이 ‘초인’에 대한 설명 또한 황현산의 해석으로 읽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노래를 마음 놓고 “목 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9쪽)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환경그림책 시리즈 II  「소금밭」1


 

  1990년대 후반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시화호 방조제는 대부도를 육지와 연결하면서 어촌민에게 교통의 편리함을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지락의 보고였던 갯벌이 말할 수 없이 훼손되었고 식생들도 변하였습니다. 섬 아이들은 사라졌고 노인들만 남았습니다. 이제 80이 넘은 노인들의 여생도 그리 많이 남아있진 않지요. 바야흐로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의 환경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섬의 기억을 간직한 연장자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섬 노인의 인생사는 오롯이 대부도의 역사이며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기반으로 기획된 「환경그림책 시리즈」는 시간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을 함께 전달하고자 합니다.

 

기획 자우녕

2013년 경기창작센터 기획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하면서 공공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대부도 오래된 집 프로젝트와 아시아 글로벌 커뮤니티_캄보디아, 황금산 프로젝트, 선감이야기길_선감역사박물관, 내가 이웃이 될 때 등을 진행하였습니다.


글: 자우녕 

사진: 최영주, 자우녕 

디자인: Damien Manuel 

인쇄 : 2016년 9월, 인간의 기쁨

 




* 이 글은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동에 있는 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를 기초로 지어졌습니다. 염전이라는 하나의 공간은 두 염부의 기억으로 중첩되며 재구성됩니다. 나는 이를 두고 기억의 지리학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여우살이


섬이 다가온다.

세 살배기 큰아이와 쌍둥이 아기들을 품에 안은 채, 곱디고운 인천 댁이 해무에 가린 섬을 바라다본다. 가는 비가 흩뿌리듯 밀려오는 안개는 남편의 처진 어깨를 넘어 아기엄마 얼굴에 와 닿았다. 다가오는 듯 멀어지는 듯 여전히 흐릿한 섬의 풍경이지만 저곳에서는 먹고살 수 있으리라. 막연한 희망을 물안개 속에 풀어놓고는 출렁거리며 열리는 하얀 바닷길에 몸을 맡긴다. 한 가족을 실은 작은 배가 인천항을 떠나 대부도 방아머리에 도착하는 섬의 풍경은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다. 이때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간절함’이 어떤 서사를 만들어도 그것은 섬이라는 자체 안에서 소멸된다는 어느 문학비평가의 말을 떠올린다. 


 섬은 상징이 되고 상징은 섬이 된다.



 



 


자우녕 作 (미술작가)


- 작가소개

프랑스 마르세이유 조형예술대학에서 Fine Arts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Master's Fine Arts과정을 이수, Diplome를 받았다. 2016년 한국복지예술인재단에서 파견되어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였으며 경기만에코뮤지엄의 <선감이야기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그 곳이 공사 중임을, 그 곳에 분명한 소유주가 존재함을 알리는 가림막은 추상화된 도시 공간을 걷는 거리산책자를 더더욱 둔감하게 만든다.

   2017년 질곡진 한국 현대사의 축도인 용산은 자본의 논리가 숨고르는 공간마다 중성의 흰 가림막을 세운다.


 

    벤야민에게 도시 공간은 여러 시대의 시간 층이 얽혀 있는 곳이듯이 용산에 거주하는 내게도 그 곳은 개인의 감각과 집단의 역사가 중성화를 거부하고 흰 '막' 위에 쓰여지는 곳이다. 

   

    그리하여 무언가가 완공되면 이내 사라질 막 위에, 그 임의의 면적에 기억과 시간을 소환한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2,578
Today : 62 Yesterday :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