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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읽으며 떠올려본 몇 가지 기억들
 
 
유경종
(본 연구소 회원)

* 장면 1. 1985년 겨울
교회 청년 중에 대학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누나가 한 분 있었다. 교육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던 경기도 변두리 교회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패기있고 세련된 대학생의 기풍을 보여주며 동생들의 동경을 받던 선배였는데, 그 누님께서 어느날인가 방학을 맞아 심심해하는 내 또래의 중등부 친구들을 모으더니 연극을 한 편 만들자고 꼬드기는게 아닌가. 당시만 해도 교회를 들락거리며 뭔가를 꾸미는 일이 제일 재밌었던 시절인지라 우리들은 두 말 없이 누나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누나가 들고 온 작품은 <욥>이었다. 제목은 심플했지만 내용은 심각해서 욥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진지하게 그려낸 연극이었다. 누나가 대체 무슨 의도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인생의 쓴 맛 단 맛 다 본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작품을 들이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이해가 안가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내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한달여동안 꽤나 열심히 매달렸다. 하지만 곧 문제가 터졌다. 교회 어르신 몇 분이 우연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매우 언짢아 하셨고, 공연 자체를 막지는 않으셨지만 교회로부터 아무런 관심이나 협조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공연일이 되었지만 객석은 텅 비어있었다. 뭔가 막연히 폼나는 성취감을 꿈꿨던 우리들의 기대는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연기인생의 데뷔 무대를(^^*) 언더그라운드로 시작하게 된 나는 그 일을 통해 어렴풋한 교훈 한 자락을 얻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교회라는 동네에서 탈 없이 지내려면 욥이라는 양반이랑은 웬만하면 친하지 말아야겠구나, 라는 다짐 말이다.

* 장면 2. 몇 해 전 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다짐의 흔적은 무뎌지고, 몇 년 전 또다시 나는 욥 아저씨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두 번째 상처를 자초하고 만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선교회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세상과 교회의 돌아가는 꼴에 지긋지긋한 염증을 앓던 나는 뜬금없이 욥기를 다뤄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 즈음 나는 정병선 목사님이 쓰신 욥기 묵상집 <신앙의 마스터클래스>(대장간)를 꼼꼼히 읽으며 욥이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의 신앙에 새롭게 눈 떠 가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하필 욥?’ 이라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지만 맘에 안 들면 댁이 리더를 하시던지, 하는 심뽀로 무작정 밀어붙였다. 결과는 뻔했다. 구성원들의 열화와 같은 외면 속에 욥기 공부는 몇 주 만에 흐지부지 중단되었고 나는 교회 내에서 그나마도 근근하던 공신력에 적잖은 데미지를 보태야 했다. 역시나, 어릴 적 깨달은 교훈을 망각하는 인간 치고 잘 되는 인간 없다더니... 물론, 스터디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성급히 구성원들을 계도하고자 했던 나의 어쭙잖은 조급함에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하여튼 욥 이 분은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 교회의 주류 정서에서 여전히 왕따 신세를 못 면하는구나 생각하니 적잖이 씁쓸했다. 차라리 경륜있는 엘리바스나 근엄한 빌닷이나 열정적인 소발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적절히 발췌해서 신앙 강화 교재를 만든다면 한국 교회 성도들의 입맛에 딱 맞는 프로그램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소위 잘 나가는 목사님들께서 성서속의 별별 요상한 인간상을 그럴듯한 학습 모델로 잘도 포장해내면서 이건 왜 안하는지 모를 일이다.

* 장면 3. 몇 해 전 가을.
송 권사님은 우리 교회의 할머니 권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몸집이 작은 분이다. 그 작은 몸으로 한평생을 종종종, 교회와 집과 일터를 오가며 살아오신 분. 몸집만큼이나 성품도 온화하여 기도도 조용조용, 봉사도 사근사근, 한번도 누구랑 말싸움이라도 댓거리를 하는 걸 보질 못했다.
어느 저녁, 차량 운행을 하는데 마침 차에 타신 권사님들의 화제가 하나님에게 복받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다들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주신 복을 카운트하고들 계신데, 아무 말씀 없이 듣기만 하시던 송권사님이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내뱉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말 하나님이 나에겐 뭔 복을 주셨는지 모르겠어... 정말 나에게도 뭘 주시긴 주셨나...?"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어느 분이 아따, 송권사는 무슨 말을 그리 복없이 한댜? 라고 눙을 치자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뭐, 하며 허허 웃으셨다.
그저 흘러가듯이 하신 말씀이지만 그 고백이 내 마음에 한참동안이나 무겁게 남았다. 아마도 그건 권사님께서 평생을 두고 곱씹어 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전처의 자식이 있는 집에 시집을 와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시며, 그나마 바깥양반을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시며, 혼자 몸으로 남겨진 삼남매를 키워내시며, 진득이 집에 붙어있지도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도는 막내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시며, 얼마 전에야 병석의 시어머니 수발을 놓으시며, 고단에 겨워 눈거풀이 무겁고 마음이 시려 무릎이 꺾일 때마다 아마도 권사님은 같은 물음을 묻고 또 묻지나 않았을까.
하나님이 나에겐 뭔 복을 주셨을까나...? 교회서는 늘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배웠는데, 그럼 내 평생의 믿음은 대체 뭘까...? 

* 다시 욥을 읽으며...
작년 말부터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는 터라 짬짬이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 주어졌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주로 슬렁슬렁 읽히는 잡지며 소설류를 읽곤 하는데, 요즘에는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챙겨 최형묵 목사님께서 쓰신 <반전의 희망, 욥>을 하루에 몇 페이지씩 천천히 알뜰하게 읽고 있다. 고즈넉한 새벽녘에 최 목사님의 웅숭깊은 글을 읽는 맛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랴. 
어릴적 선배 누나를 통해, 몇 년전 정병선 목사님의 책을 통해, 그리고 또 다시 최형묵 목사님의 목소리를 빌어 욥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논쟁할 때 알아봤지만 참 끈질긴 양반이다. 이쯤되면 나도 욥이 걸어오는 말에 진지하게 대답을 준비할 때가 된 듯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대답을 나는 송권사님 같은 분과 나누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랜 고민을 거쳐 건져 올린 대답이 송권사님 같은 분과 소통할 수 있을만큼 낮아진 목소리였으면 좋겠다는 바램 때문이다.
누군가는 역사의 격랑을 끌어안고, 어떤 이는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다. 각자의 십자가를 감내하며 나가는 이들에게 욥은 역설적 희망의 지표가 되어준다. 그런가하면 송권사님처럼 그저 소박하게 가족과, 이웃과,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를 섬기는 일을 자신의 십자가려니 여기고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그게 그 분들이 알고 있는, 또한 살아낼 수 있는 신앙적 삶의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방식이었기 때문일게다. 욥이 던져주는 반전의 희망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장삼이사의 필부들에게도, 심지어는 나처럼 한 인생 대충 방기하며 살아가는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에게도 평등하게 유효하리라. 대체 어떤 언어로 그 희망을 함께 나눌지는, 책을 마저 읽고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 웹진 <제3시대>




연구소가 기획하고 도서출판 동연이 펴내는 <성서_현대를 읽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성서와 더불어서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살피고, 오늘의 인간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이 시리즈는 욥기를 새롭게 읽는 첫 번째 책에 이어 앞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 책 소개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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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0 23: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유경종님. 다비아 인문학적 성서읽기모임에서 뵈었었는데 이렇게 글로도 뵙는군요. 좋은 글을 제 블로그에 발췌하겠습니다. 물론 코멘트도 달아서요.

[저자 초대석] '반전의 희망, 욥' 최형묵
"성경 속 욥은 순종의 인물이 아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항변의 상징"

유상호기자 shy@hk.co.kr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성경 '욥기' 8:7)

고린도전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말씀만큼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긍정적 메시지로 널리 쓰이는 이 말이, 본래는 "독선적 교리에 뿌리를 내린 언어폭력이었다"고 최형묵(48·사진) 천안살림교회 목사는 말했다. 그가 낸 <반전의 희망, 욥>(동연 발행)은 인내와 순종의 인물로 인식되던 욥을 도발과 항변의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세상의 부조리한 본질을 묻는 책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절규해도 세상은 굴러갑니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문제가 우리 시대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욥기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간의 오랜 물음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욥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부조리를 덮으려는 사람들에게, 그 논리와 상반되는 현실을 들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성서 해석에 따르면, 욥은 고난을 묵묵히 참고 견뎌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한 인물이다. 그러나 최 목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공평함을 말할 수 있는 현실은 부조리하며, 그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주장은 불온하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후략)

기사 출처 : 한국일보 홈페이지
전문 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9/h2009090503514384210.htm



연구소가 기획하고 도서출판 동연이 펴내는 <성서_현대를 읽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성서와 더불어서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살피고, 오늘의 인간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이 시리즈는 욥기를 새롭게 읽는 첫 번째 책에 이어 앞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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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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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서 욥은 누구인가?
 - 최형묵 목사의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을 보고 

정혁현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라 하면 대개 잠언과 전도서 또는 시편을 떠올린다. 물론 『욥기』도 지혜문학에 포함되지만 대중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전도서나 잠언은 솔로몬, 즉 성서의 인물 중 가장 지혜로울 뿐 아니라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인물이 쓴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도서의 저자, 즉 ‘전도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도서와 잠언은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인생관과 처세술이다. 적어도 솔로몬의 영화를 욕망하는 성공시대의 독자들은 이 지혜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그러므로 지혜서들은 요즘 서점에 가면 소위 ‘실용서’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대개 성공에 따른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실패자들에게 너그럽게 충고 한 마디 하는 책들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공’이라고 알려진 삶을 간절히 욕망하는 독자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며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고 다시금 성공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성공한 자가 자신의 삶을 성공 이후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아보며 정당화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과거의 선택은 대부분 성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현존하는 질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조건이었을 뿐 결코 변화시켜야 할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요즈음의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현상을 보면 씁쓸하다. 성공의 문은 좁아지며 남루한 삶은 늘어만 가는 현실에서 이런 실용서들이 실패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패한 이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성공한 소수의 영광을 더욱 더 빛내는 주제넘은 봉사활동만 하고 마는 격이 되는 것이다.

파이를 나눌 생각을 하지 말고 키울 생각을 하라는 신자유주의의 지혜는 가진 자, 성공한 사람에게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의 몫까지 몰아주라는 말에 다름 아님이 밝혀졌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위기는 커진 것처럼 보이던 파이가 실상은 불면 꺼지는 투기 거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허황된 성공신화에서 깨어나 비록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맡은 바 직무를 기쁘고 성실하게 수행하며 소박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대다수 찌질이들의 삶을 재평가하고, 이들의 생활을 지속가능하며 발전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공신화가 정치권력까지 틀어쥐고 양극화를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굿판으로 난리법석이다. 성공한 자, 가진 자들이야 이런 현실이 그 자체로 잔치 마당일 터이지만, 대체 실패한 이들은 왜 남의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인가? 문제는 맘몬에 현혹된 정신이다.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참 지혜의 모범을 『욥기』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욥기』는 결코 쉽게 읽히는 문서가 아니다. 『욥기』는 구약성서 지혜전승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혜전승 중의 다른 문서들, 예를 들어 전도서나 잠언 등은 딱히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읽어보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대 『욥기』는 그렇지가 않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은 대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뿐이다. 더욱이 친구들이 욥의 회개를 촉구하며 던진 이런 발언들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어리석다”(42:8)는 핀잔을 듣는다. 반면 주인공 욥의 발언들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불경스러운 경우가 많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6:4)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7:16) 심지어 하느님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10:3) 도저히 의로운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다. 사정이 이러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욥기』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내 혼란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대체 『욥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 최형묵 목사에게 『욥기』는 성공한 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실패한 자들의 지혜이다. 욥이야말로 한 순간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척되었으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자신의 육체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하는 찌질이 중에서도 상 찌질이로 전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대 저자에게 욥은 성공한 사람들을 선망하면서, 그들의 충고에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욥의 정체는 “도발과 항변”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과 항변이야 말로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면,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언어”이다.  

『욥기』는 지혜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구약신학은 물론이요, 신학 전반을 넘어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와 해석이 축적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모든 자료들의 성격을 함부로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욥기』에 대한 관심은 대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집중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왜 이 세계에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신정론의 질문은 자비로운 하느님의 통치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궁지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악과 불의가 현존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욥기』에 관한 신학적 연구는 대개 이러한 궁지를 돌파하여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신 개념을 수호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논리를 돌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신도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도의 추상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형묵 목사의 책 역시 신정론의 문제의식 안에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욥기』가 지혜문학 중에서도 독특한 문서인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처하게 된 상황, 즉 의로운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삶의 상황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것임에 착안한다. 그 이유는 신정론이 제기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최형묵 목사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에 애써 눈감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하고 항변하는 욥 같은 인물에게서 기독교 신앙인의 한 모범을 본다. 따라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느님 개념을 수호하는 일에 조금도 애쓰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욥기』 안에서도 이러한 신학적 개념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모두 욥을 비난하는 그의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욥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핀잔을 듣는다.

반면 저자의 관심은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로 꽉 막힌 현실에서도 결코 저항과 항변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태도가 어떻게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내는가에 집중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 욥의 신앙은 주어진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음을 통탄하고 이를 저항과 항변을 통해서 구현하고자하는 불굴의 정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창조세계의 청지기 정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신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그 연구 대상인 『욥기』와 동일한 관심사와 방법을 가진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함부로 『욥기』를 요약 정리하여 그 핵심을 추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욥기』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이 구약성서의 독특한 지혜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 시대의 상황이라는 증폭기를 통해 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욥기』를 우리 시대라는 맥락에서 다시 쓴 2009년 판 『욥기』, 혹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의 『욥기』라 할 수 있다. 연구가 연구 대상과 동일한 시야를 확보했기 때문에 분출되는 생산성은 다양하지만, 이 책의 경우 두드러지는 것은 여느 『욥기』 연구서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대적 울림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반전의 희망”은 결코 주어진 현실에서 찌질이가 결국 ‘운 좋게’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성공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전은 욥의 저항과 항변이 초래한 현실 그 자체의 뒤집힘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회개’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회개는 단순히 신앙인이 주어진 현실 내부에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뒤집히는 사건, 지혜로운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높고 거룩했던 것들이 천하고 하찮아 보이는 세계 그 자체의 뒤집힘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는 대체로 자기 확신의 재확인에 그치는 수가 많다. 이 때 성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거울처럼 사용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며 이를 하나님으로 착각한다. 이를 나르시스의 성서읽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우리의 “아멘”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이런 성서 읽기는 폭 넓은 성서이해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 듣기 좋은 말씀만 반복적으로 읽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 신앙인들에게 『욥기』는 불편한 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식당개업식 문구가 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욥기』 안에서 결국 하나님의 핀잔을 듣는 발언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웃지 못 할 오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침묵시키고 나의 욕망이 원하는 발언을 하나님에게서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조심하려 하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성서 읽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신앙인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최형묵 목사의 책은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현직 목회자로 천안살림교회를 담임하는 저자가 교인들과 함께 『욥기』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보적인 신앙인의 수준에서 『욥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욥기』를 통해 신앙인이 들어야 할 말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의 탄탄한 민중신학적 입장과 목회적 경험을 버무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도 명확하게 표현해내는 깔끔한 문체 덕분일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질서를 거슬러 맘몬의 질서를 강요하는 배반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창조질서는 인내의 임계점에 서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위기를 깊이 자각하는 신앙인들조차 어디에서부터 출구를 찾아야하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절망의 장벽 앞에 선 인간이 세계와 함께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 최형묵 목사는 『욥기』를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신실한 신앙인의 씨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적인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 <기독교사상> 2009년 12월호 서평
자료 출처
 : 천안살림교회 홈페이지




연구소가 기획하고 도서출판 동연이 펴내는 <성서_현대를 읽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성서와 더불어서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살피고, 오늘의 인간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이 시리즈는 욥기를 새롭게 읽는 첫 번째 책에 이어 앞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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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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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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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두번째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
- 살아계신 예수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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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설교를 “하늘뜻펴기”라고 합니다. “설교”라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풀어서 써 본 것이지요. 세간에서는 “잔소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설교하지 마라”라고들 합니다.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들어있지요. 그러나 목사인 저는 하늘뜻펴기를 할 때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땅에 두 발 딛고 사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인 제가 어떻게 감히 하늘뜻을 펼칠 수 있을까요? 제 입을 통해서 나오는 문장을 어떻게 무한의 깊이를 지닌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다만 제가 떠드는 말이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굳이 해석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청중은 설교자의 말씀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듣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자율성! 저는 이것이 하느님이 설교자들에게 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으면서 저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늘뜻펴기 준비를 합니다. 기도를 하고, 하늘말씀(성서)을 곱씹어 읽고, 주석도 찾아보고, 성서가 담고 있는 세계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도 생각해 보고 더불어 그런 맥락에서 성서가 하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처한, 특별히 저의 경우는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처한 상황에서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모든 일상의 사건이 하늘뜻펴기의 소재와 의미가 되고, 제 머리 속에서 그 의미들이 이렇게 저렇게 얽혀지면서 얼개를 잡아갑니다. 칠흙 같은 어둠을 만난 듯, 복잡한 세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에게 저의 하늘뜻펴기가 한걸음 내딛게 하는 용기를 줄 수 있을지, 희미하나마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 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려 갑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하는 말이 감히 하늘의 뜻이라고 할 만한 것인지 고민고민하며 찾아 들어갑니다. 가까스로 설교 한편이 완성되면 읽고 또 읽으면서 고치고 잘라내고 꿰매기를 또 수십 번 합니다. 마지막 교정이 끝나면 미리 시연을 해 봅니다. 하늘뜻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상대의 귀에 들려야 하니까요. 문어체이거나 어려운 단어는 다시 바꿉니다. 

하늘뜻이 제대로만 펼쳐진다면 아마도 청중의 삶 즉 교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귀에 들려진 말씀이 가슴을 때리고 그것이 손과 발까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지요. 한 숟가락에 배부르지 않겠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것을 모르듯이 어느새 하느님의 뜻을 새기는 사람들이 되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라면 저 또한 그 말씀으로 삶을 다잡으며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저는 지난 2월부터 3월까지 5편의 하늘뜻펴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는 담임목사나 부목사나 6년의 시무를 하면 1년의 안식년을 갖는데 담임목사의 안식년이 되어 부목사 둘이 나눠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번 이야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당시 목사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풋내기 목사였고, 이런 상황에서 연속으로 5편의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지만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무식한 용감함으로 하늘뜻펴기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중 4편의 하늘뜻펴기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4편을 연재하는 이유는 제가 4복음서와 저희교회의 4가지 창립정신을 연결시켜서 설교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늘뜻펴기에서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하늘뜻펴기는 분명히 구체적인 현장에서 전해지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현재의 담임목사는 3대째 목사이고 그의 첫 임기 6년을 마친 상태였기에 저는 부목사로서 다시 한 번 교회의 창립정신을 되돌아봄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4복음서를 택한 이유는 거기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이 녹아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의 주역이었던 처음 제자들, 곧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의 성립과정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복음서는 예수를 주로 믿은 공동체들의 삶의 현장에서 고백된 고백의 언어들이기에 오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함께 비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앞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그럼 첫 번째 하늘뜻펴기를 적습니다. 4편의 하늘뜻펴기 연재가 끝마칠 무렵, 다양한 해석과 비판과 논의가 오고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이야기가 날 것 그대로 들어가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1)
살아계신 예수를 따라
미가 6, 6- 8 ; 마태복음 25, 31- 46

 참으로 어려운 시절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자태를 보여준 자가 있다면, 자기를 베고 찍고 상처를 내는 자들을 향해서도 향기를 발하는 향나무에서 무언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던 자가 있다면, 한평생 그 사람을 따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일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바로 그러한 한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쓰인 문서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4주 동안 복음서를 본문으로 연속 하늘뜻펴기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글을 썼지만(루가 1:1) 우리가 가진 성서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고, 각각의 복음서는 그 복음서를 쓴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른 네 복음서를 텍스트로 하면서 동시에 향린신앙공동체가 처음 세워졌을 때의 4개의 창립정신도 더불어 살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첫 교회들의 모습과 56년 전 향린의 초기 모습을 회상함으로써 우리의 오늘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 내일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마태오 복음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1세기 후반 유대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복음서들을 기록한 이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66년부터 72년까지 진행된 유대-로마 전쟁입니다. 유대-로마전쟁은 전쟁의 참혹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70년에는 로마군에 의해 거룩한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60만이 죽었다고 하고, 요세푸스에 의하면 110만이 죽었다고 합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공략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 반-영구적인 진지를 구축하여 성 높이만큼의 벽을 쌓아 성전을 나와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잡아 십자가에 매달았고, 전쟁이 마무리 될 때쯤 예루살렘 주위는 만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과격파 유대인들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높이기 위해 모든 식량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려서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군인들이 굶어 죽었으며, 성전을 약탈한 로마군은 도망가는 유대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규군만 6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투입했습니다. 이 로마 군대는 진압작전을 펴면서 수만 명의 식민지 청년들을 징발했으며 이들은 로마군을 따라 무자비한 학살자 대열에 끼어야 했습니다. 같은 동족을 죽여야 했던 유대인들은 유대-로마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신은 파괴되었고, 온갖 병과 전쟁의 충격에 의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대로마 항전에 실패하고 잿더미가 된 유대사회를 복구하기 위해 바리새파 계열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얌니야에 율법학교를 세우고 유대인의 단결을 외쳤습니다. 그는 온건파로 전쟁에 반대했던 인물이었으나 2대 수장이 되었던 가말리엘 2세는 전쟁에 가담했던 행동파 바리사이 랍비 출신으로, 전임자보다 훨씬 공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엄격한 율법규정을 적용하여 모든 유대공동체의 신앙의 표준을 세우고, 이 가르침과 실천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집단을 구별해 내어 추방하고 잡아다 매질하였습니다. 이 때 18개조의 기도문이 만들어 지는데, 이 기도문의 제12조에는 예수를 따르던 회당 내의 사람들인 ‘나자렛 도당에 대한 저주’가 실려 있었고, 랍비적 바리새파의 숙청작업의 표적이 된 대상은 바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만난 예수에게서 전혀 다른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줄파산이 나든 줄도산이 나든 말든 오히려 백성에게 김석기 시대의 물대포를 쏘아 대면서 자신은 한가로이 유인촌이라는 동네에 놀러가 어청수를 끼고 BBK 치킨과 ‘소망교’회를 안주로 배불리면서 ‘주가폭’락이라는 락음악이나 즐기는 명박도의 왕과 귀족들[각주:1]이 아니라, 애굽 왕이 히브리 어린이들을 죽이듯이 로마의 주구가 되어 자기 백성을 학살하는 헤롯 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함을 짊어지는 새로운 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멍에를 함께 메어주어 백성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고 백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왕이었습니다(11:30).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습니다(12:17-21).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이방인의 갈릴래아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시작합니다(4:12-17). 그래서 어둠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며(4:16),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겁니다(12:21). 당시의 모든 왕은 군마를 타고 입성하지만 예수 메시아는 나귀와 나귀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들어옵니다(21:5).[각주:2] 그래서 그는 하느님이 택한,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왕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왕은 전쟁으로 땅을 빼앗는 이가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5:5)라고 말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로마의 군주들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아들딸이라고(5:9) 말하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를 따랐기 때문에 로마의 핍박을 받은 것은 물론 같은 유대인 동족에게 끌려가 어떤 이는 매를 맞아 죽었고, 어떤 이는 집안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한 마을에 같이 살던 유대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야 했고, 어떤 이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동료를 밀고해야 했습니다. 때론 밀고하고도 함께 추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서로 배신감에 분노하였고, 또 배신한 자신을 저주해야 했습니다. 온 동족을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로마의 거대한 폭력, 또한 같은 동족에게도 수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은 마태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안팎으로 가득한 전쟁의 흔적과 폭력의 잔재들을 없애야 했습니다. 원수를 향한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공동체, 그러나 복수할 대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복수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공동체가 마태공동체였습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표출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자기 안에 생채기를 내거나 자기보다 더 약한 이에게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이나 사회에서 상처받은 가부장은 아내에게 폭력을 행하고, 남편의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아내는 다시 자녀를 때리고, 그 자녀는 학교에 가서 이른 바 ‘왕따’를 괴롭히는 폭력의 먹이사슬이 이어지게 됩니다.

마태오 공동체는 로마가 제공한 폭력의 먹이사슬에서 마지막희생양이 되었던 예수의 죽음을 기억했기에, 자신들이 그 폭력의 사슬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폭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윤리적 힘을 자신들의 자아 정체성으로 삼고 견고한 자아구축을 시도합니다.

“겸손한 사람[각주:3]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5:3).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입니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예배하러 갈 때[각주:4]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교회에 가기 전에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예배를 드리십시오”(5:22-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앙갚음 하지 마십시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십시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 주십시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원수마저도 사랑하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5:38-42, 44).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5:10).

이들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놀라운 도덕적 가치를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늘 자신들의 곁에 계시다는 임마누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의 처음을 장식하는 예수 탄생이 임마누엘의 약속의 성취로 시작되고(1:23),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끝이 납니다.(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공동체는 미가야 예언자가 외친대로 날마다 정의를 실천하고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매 순간 다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오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끝 날의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왕으로 오시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25:45) 

곧 우리 곁에 있던 보잘 것 없던 그 사람이 우리와 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보잘 것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굶주리게 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강한 자만이, 원래 가진 것이 많았던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헐벗고 병들기 쉽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가 되어 길바닥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정당한 항의라도 하려고 하면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들은 민주시민이 아니라면서 감옥에다 집어 넣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누가 보잘 것 없습니까? 어린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은 어린 녀석이 뭘 아냐면서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집니다. 생명 살리는 가사노동은 돈이 되는 직장의 노동보다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머리 쓰는 일보다 몸으로 하는 일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몸으로 일하는 사람도 역시 보잘 것 없는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존재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활개 치는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는 역사의 모진 풍상을 겪은 어르신들의 경험이 무시되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보잘 것 없음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발견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가장 화려한 문명의 제국인 로마의 폭력과 그 폭력에 희생된 한 유대 청년의 작은 삶을 통해 바로 모든 폭력과 모든 억압이 바로 더 뛰어난 것, 더 강한 것, 더 효율적인 것,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온 물을 흐려놓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위해서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는 것 또한 공동체가 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8:10-14). 그래서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18:19-20), 공동체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용서를 빌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21-22). 제국의 폭력이 자신에게 전염되었을 것을 염려하여, 가장 무력한 존재인 어린아이를 받아들여 늘 자신을 낮추는 연습을 하였고(18:1-5), 보고(눈) 만지고(손) 걸어가는(발) 모든 행동이 누군가에게 악으로 작용할까봐 노심초사 하였습니다(18:6-9). 일상의 삶에서 녹아나는 진실과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 겉으로는 옳은 척하고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보다 더 철저한 자기수행을 하였습니다(5:20, 48-6:4). 

참으로 어려운 시절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자태를 보여준 자가 있다면, 자기를 베고 찍고 상처를 내는 자들을 향해서도 향기를 발하는 향나무에서 무언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던 자가 있다면, 한평생 그 사람을 따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일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자신의 주변에 언제나 함께 있었던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들 속에서 하느님을 봄으로써, 그들을 품어 안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참으로 어려운 시절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큰물에 요동하지 않는 자태를 보여주었습니다.

 향린이 처음 세워 질 때, 이 땅 곳곳에는 식민지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온 산하는 참혹한 전쟁 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를 세운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방주인 교회를 통해 자신들과 이웃이 구원받으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말씀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도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남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이 그 사태에 휘몰려 갈 것 같았습니다. 우선 우리가 탈 방주, 그리고 우리와 인연이 된 이들을 건질 방주를 만들자! 그리고 남은 무리들에게도 이것을 권해서.... 절망한 저 무리들에게 살 수 있는 산 모델로서 보여야겠다. 우리 교회는 남을 위하기 전에 스스로 살고 싶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여 구한다는 일과 유리될 수는 없었습니다.”[각주:5]

남을 살리기 전에 스스로 살고 싶어 세운 향린공동체는 폐허가 된 삼천리 반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산 모델이 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하루를 새벽기도회로 열고 저녁에도 성서공부 시간을 갖은 것은 삶 전체와 연결되는 신앙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까맣게 잊고 살다가, 기도와 명상 등 영성생활에는 등한하다가 주일날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마는 것은 무력한 신앙으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창립정신을 세운 것은 삶 전체가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향린이 태어난 1950년대부터 매 십년 단위로 각 년대를 대표하는 단어를 떠올리라고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를까요? 1950년대는 물론 한국전쟁일 것입니다. 1960년대는 4․19와 5․16, 1970년대는 유신헌법,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90년대는 IMF, 2000년대는 촛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쟁으로 시작해서 잠깐 민주화의 바람이 불 것 같다가 군인들의 폭압정치에 이어, 군인에 의한 국민학살, 급기야 경제혼란과 촛불 정국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도 폭력의 흔적과 죽음과 억울한 원성의 소리가 이어지는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삶의 신앙은 향린교회로 하여금 그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현장의 목소리로 울려 왔습니다. 향린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나서 60-70년대 독재에 맞서 싸웠고, 80-90년에는 민주화와 민족분단의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였으며, 2000년에 들어서는 사회의 약자들과 억울한 죽음, 가진 자들의 횡포에 맞서서 촛불을 드는데 앞장 서 왔습니다. 이만 하면 잘 해왔다라고 나름 자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 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꿉니다. 한순간 자만하고 안주하면 이런 꿈이 탐욕과 욕망으로 물들 수 있지만, 얼을 올곧게 하고 정신을 차리면 이런 꿈이 탐욕과 욕망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이 땅에 이루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더욱 더 우리를 단련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주일만 잠깐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교인(Church goer)은 아닌지, 우리 안에 세상에서 물들어온 경쟁과 폭력의 잔재는 없는지, 혹시 형제자매에 대해 껄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 지, 어린이/청소년 교우에게 향린의 신앙을 잘 전수하고 있는지, 일상의 삶에서 신앙의 향기가 계속 피어나는지, 불의를 보고 과감하게 나갈 힘이 남아 있는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신속하게 옮기고 있는지, 매일 기도와 성서읽기를 통해 내공을 쌓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연기로 온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김연아 선수의 감각만큼이나 살아 계신 예수를 따라 가는 우리의 감수성이 발달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퇴계 이황은 지인(知人)들에게 보낸 편지글 22편을 뽑아 “자기를 살핀다”라는 제목의 책 <자성록>을 쓰는데 그 서문의 첫 구절에 논어를 인용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을 적게 한 것은 몸이 따라가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서이다. 지금 친구들과 학문을 강구하느라 서신을 서로 나누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하였지만 그래도 그 부끄러움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겠다. 더구나 이미 말한 뒤에 저 사람은 잊지 않았는데, 내가 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저편과 내가 다 잊은 것이 있으니, 이것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거의 기탄(忌憚) 없음이 되는 것으로서 두렵기 그지없다.”

저 또한 오늘 설교가 끝나고 여러분은 제 설교를 잊지 않았는데 제가 설교내용을 잊을까 두렵고, 여러분도 잊어버리고, 저도 잊어버리고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될까 더욱 걱정입니다. 설교가 저를 비롯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실 많은 고민이 됩니다. 이제 서 말이나 있는 구슬을 꿰는 일은 여러분에게 맡겨졌고, 진정한 예배는 예배실 밖으로 나가면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언젠가 신영복 선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 그리고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머리의 깨달음조차 없지요. 머리로 깨달으려 하면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윽박을 질러대는 목회자로 가득하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향린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묻고 싶습니다. 이미 많은 깨달음이 있는 향린의 식구들은 조심스레 하느님과 살아가기 위해 가장 먼 여행의 어디 쯤 가시고 계시는지요?

마지막으로 마태 공동체의 조언을 들으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며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명박 정권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수구꼴통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를 따라 가십시오.
 한 사람의 종교인이 되려고 애쓰지 말고,
한 사람의 참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성서의 밑줄을 그은 다음 이제 생활에 밑줄을 그으시오.
세상에 물들지 말고 세상을 변혁하십시오.


ⓒ 웹진 <제3시대>


  1. 이명박 정부를 빗댄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본문으로]
  2. 21세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면 아마 ‘에쿠스’ 대신 지금은 없지만 ‘포니’를 타고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에쿠스’는 ‘개선장군의 말’이라는 뜻의 라틴어이고, ‘포니’는 ‘작은 조랑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4. 원문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이지만 현재의 맥락에 맡도록 고쳤다. [본문으로]
  5. 향린 40년사 74.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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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각주:1]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우연찮게 TV를 켰는데 CNN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0년 1월 17일) 로마에 있는 한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기사는 교황의 이번 유대교 회당 방문이 1986년에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방문이었다는 사실과 (독일출신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만남이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앞으로 양자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데 공감했다는 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황이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며 마무리되었다. 표면상 별 특이한 사실이 없이 무난해 보이는 이 뉴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교황이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던 로마의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장소와 1982년 유대교 회당에서 자행된 극렬 팔레스타인 해방론자의 테러로 생명을 잃은 2살 난 아이가 죽었던 장소를 둘러보고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로마교황청은 전쟁 기간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물밑에서 여러 조치를 취하며, 조용하면서도 하지만 용기 있게 행동했었다”고 말이다. 교황의 이런 발언에 대해 유대교 회당의 대표 랍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했다고 전한다: “침묵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문득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나 아렌트에 대한 추억

2년 전 발터 벤야민을 다루는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신비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조화(혹은 긴장)을 파헤쳤던 유물론적인 신학자(혹은 신학적 유물론자)였고,[각주:2]  이는 후에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종교론에도 영감을 주어 유명한 데리다의 신학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3] 를 낳게끔 한 산파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또한 인테넷 시대를 예감이라도 한 듯 기술복제(시뮬라크르)시대에 발생하는 예술 작품의 아우라 파괴를 옹호하면서 아도르노의 예술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미학자이기도하다.[각주:4]
미국 진보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벤야민 원전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있어 그의 단편을 모아놓은 두 권의 책은 필수적이다. Peter Demetz가 책임 편집에 참여한 『Reflections』과 한나 아렌트의 서문으로 유명한 『llumiantions』이 그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례적으로 60페이지에 가까운 『llumiantions』서문을 통해 벤야민의 극적인 삶과 전복적이고 일탈적인 사상의 궤적을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필자의 벤야민 입문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해준 벤야민 지도(地圖)에 영향을 받았다. 나의 베냐민 읽기에 있어 한나 아렌트의 벤야민이 먼저인지, 아니면 벤야민 텍스트가 먼저인지 모를 정도니 말이다 (사실 이런 독해는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내 지식의 창에 벤야민이라는 통로가 놓이게 된 것은 한나 아렌트 공로다.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중에(그녀의 책은 난해하고 무겁기로 유명하다) 그나마 대중들에게 많이 소개되었고 가장 쉽게 쓰여진 책이 바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차 대전 전범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다는 혐의를 진 아이히만 (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이 남미에서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던 아렌트가 자신의 목격담과 생각을 엮어서 출판한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수 백 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본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라는 말로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한다.

실례로 어느 간수가 혹 불안과 초조에 빠져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히만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소설책 한 권을 전했다고 한다. 그 소설은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 남자의 성애를 다루는 책이었다. 아마도 그 간수는 아이히만 같은 희대의 살인마는 평범한 내용의 책이 아니라, 약간은 도착적이고 짜릿한 무언인가를 즐겨 찾을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아이히만은 그 책을 간수에게 돌려주며 ‘아주 비윤리적인 책’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잔혹한 악마도 아니었고, 별 이상스럽고 변태스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 역시 성실히 일하면서 승진을 꿈꾸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고, 그냥 평생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하며 원칙에 충실했던 표준적인 독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토록 아이히만 같은 모범적인 독일시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의 공범자들로 연루되어 있는 것이라면?

동사무소에서 성실히 근무했던 말단 공무원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자전거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돌리듯 유대인들에게 소집통지서를 섬심껏 전달했을 것이고,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나를 기차의 운행 시간을 주로 야간에 편재하기 위해 많은 역무원들이 전면적으로 기차의 운행 시간과 배차 간격을 조정하느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 수 백만 벌의 죄수복을 만드는 공장에선 나라에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우리를 위해 일자리를 창출해 줬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며, 그러니 더욱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했으리라. 살인가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내려온 화학식에 맞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일정한 비율로 원소들을 섞었을 뿐이다. 죽은 유대인들의 시체에서 짜낸 기름을 갖고 비누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그 기름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나라에서 원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으니 우리 열심히 값싸고 좋은 비누를 만들어 국민위생 증진에 공헌하자며 두 주먹 불끈 쥐었겠지. 그들 모두 하루하루 성실히 근면하게 살아온 죄 밖에 없다. 관료사회의 믿음직한 성원으로 집단의 원리에 충실했던 것이 죄인가?

내 안의 아이히만

나치 정권하의 독일 인민들은 칸트의 후예답게 의무론적 윤리에 충실했고, 의무론적 윤리의 최정점에 있는 선의지에 맞게 행동했다. 불행이라면 그 집단의 정점에 히틀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선의지가 교묘하게 히틀러로 치환되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그 음모를 대중들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분절화 시켰고, 분절된 개인들을 전체의 틀에 가두어 전체(선의지)와 개인(도덕적 주체)간의 네트웍에만 몰두하게 하고 분절된 개인과 개인끼리의 소통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하나하나 살펴보며 나름 선량한 개인들이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일에 주저함이 없이 행동하도록 길들여졌다. 아이히만은 집단이 자기에게 부과한 일만 숙지했지 그 집단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나하면, 집단은 선이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집단의 명령이 유대인(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라 명명하였다.

취향과 전문화의 정도가 심한 현대 사회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분야(혹은 취향) 이외에서 일어나는 증상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렇게 파편화된 개인을 움직이는 현재의 유일한 원리는 오직 자본의 법칙뿐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뜨거웠던 이념들은 모두 자본안으로 흡수된 지 오래고, 대통령을 뽑을 때도, 대학 총장을 뽑을 때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모두 자본의 법칙에 순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제1 관심사이다. 나머지 평가 항목의 총량을 다 합하여도 자본의 원칙 한 종목을 넘지 못한다. 나치가 독일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통용되었던 국가적 의지의 극대화였다면,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자본은 바야흐로 21세기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세계 시민의 의지이자 숭고함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의 명령 앞에,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명령앞에서 그랬던것처럼, 철저히 무사유한 상태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에필로그

“전체는 거짓”이라고 아도르노가 말했던가. 결국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집단은 악’이라고 말한다. 집단은 자신의 의지를 극대화 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항상 시달린다. 문제는 모든 집단의 모든 의지는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극대화되면 악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죽음의 제목들을 기억해보라: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순수의 이름으로……그리고 이제 자본의 이름으로!  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 오르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졸고의 제목은 그 부제를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2. 이에 대한 글을 참조하려면 아래의 벤야민 단편에 주목하라.&#10;「Theological-Political Fragment」 in 『Reflections』, Edited by Peter Demets.(New York: Harocurt Brace Jovanovich, 1978), &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Gil anidjar. (New York: 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4.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예술작품에 있어 아우라의 보존이라는) 미학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벤야민의 예술관이 드러난 대표적 글쓰기가 바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다.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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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바쿨
    2016.10.08 15:1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잘 쓰시네요. 착하고 정의롭고 미적이고 인간의 부조리함과 세상의 어둠을 밝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올려주시기 기대합니다.

“이 물질은 제겐 면죄부이자 노동의 고통입니다”

최종봉
(IT산업 노동자, 88만원 세대)

나는 내일 아침 9시 30분이면 아마도 1000원의 교통비를 내고 회사에 도착할 것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일을 시작할 것이며, 아마도 내일 하게 될 일은 보험과 대출에 대해서 광고글을 만드는 것일 겁니다.

보험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행복한 4인 가족에 위기를 만들어, 되도록이면 많은 보험가입상품을 유치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며, 당신은 이런 위험성으로부터 준비되지 않았음을 경각시켜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쓸 때마다 사회악적인 담론은 만들어 내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그렇게 오전의 일이 끝나면 저는 점심으로 약 3천 원에서 4천 원 정도의 식사를 하고 다시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계가 여섯시 반을 가리키면 저는 다시 집으로 1000원의 교통비를 내고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5일 한 달에 25일을 일하게 되면 저는 각종 보험과 세금을 제외한 110만 원 가량을 수령하게 됩니다. 통장에 찍힌 액수에 이번 한 달도 잘 버텼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돈이 다른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거기에 속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돈입니다. 이런 돈을, 이 물질을 주님이 어떻게 받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돈은 나를 위한 돈이 아니라며 받지 않을실지, 어렵게 번 돈을 드리니 기뻐하실지 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고작 만원을 가지고 과연 이런 기도를 드려도 되는지도 사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그렇기에 지금 드리는 이 헌금은 제겐 면죄부이자 노동의 고통입니다. 부디 뜻대로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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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한국교회』

지은이 : 이원규
출간일 : 2009년 12월 29일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판형 : 신국판
쪽수 : 280쪽(본문 2도)
값 : 12,000원
분야 : 종교,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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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선』

지은이_ 브라이언 다이센 빅토리아
옮긴이_ 정혁현
펴낸곳_ 인간사랑
펴낸날_ 2009년 11월 20일
크기_ 223*152mm (A5신)
값_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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