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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혀
- 공정사회 비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어느 때쯤, 자기가 ‘야고보’라고 주장하는 이는 세계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글을 씁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예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문서의 저자가 그 인물 자신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선 3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과 시차가 너무 큽니다. 그리고 이 문서의 저자는 헬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고, 유대주의보다는 지중해권의 대도시 문화에 보다 익숙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 문서 속에는 야고보의 그림자가 도처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 우리는 실존인물 야고보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기에 이 문서에서 그의 체취가 얼마나 배어있을지에 대해서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주의 형제 야고보와 관련이 있든 없든, 이 문서는 독자적인 그리스도 공동체인 교회가 어느 정도 제도화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보는 주의 교회들은 부자에게 공동체의 관심과 신의 축복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반세기 전, 아직 주의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공동체가 아닌 때에 바울이 관여했던 공동체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격차는 훨씬 더 큰 듯합니다. 요컨대 바울 당대에 부자는 도시에 집을 가지고 있는 정도인 듯한데, 「야고보서」에서는 시골에 소작을 준 꽤 큰 땅이 있는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4인 가족이 빠듯하게 살며 경작할만한 소작지가 대략3천 평 정도라고 하니, ‘착취당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5,4)라는 표현은 최소한 수만 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다수 있었다는 뜻일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50년 전의 바울과 대조되는 주장이 이 문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적 신학이 그의 선교관을 넘어서, 하나의 교회의 신학으로 정착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면서 주류의 교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교회관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건이 바로 이 문서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로, 양자는 모두 부자와 가난한 자의 화해를 강조하지만, 바울은 양자의 화해를 위해 ‘사랑의 가부장주의’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서로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하지만 위계질서 자체는 문제시하지 않는 방식의 화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아마도 종말론적 급진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오히려 그는 그 때가 올 때까지 급진적 모험주의를 자제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수평적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의 역전이 필요합니다. 하여 그는 역전의 수사를 도처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의 처지가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부자는 자기의 처지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1,9~10)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2,5)

바울의 현상주의는 부자들을 향하여 ‘배려의 윤리’를 강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야고보의 변혁의 이상은 가난한 자들의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가능성을 도모합니다. 즉 약자들이 수동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향해, 부자를 향해,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차이는,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의 믿음론에 대해 이 문서는 실천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회당의 유대주의와 율법관이 주변부 대중을 이방인화하는 배제의 신학적 메커니즘임을 비판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짐을 상징하는 언표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의 문제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에 대한 해체의 언술이며, 스스로는 비어있는 말, ‘공백의 기표’인 것입니다. 개념화할 수 없는 말, 개념화를 거부하는 말이지요.

이것은 훌륭한 신학적 성과이지만, 바울 자신도 그 공백의 기표를 더 해명해야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갈수록 이 공백의 기표는 ‘채움의 기표’로 전환됩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라고......

이제 믿음은 ‘새로운 율법’이 됩니다. 특히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적 윤리를 수행하는 것이 된 것이지요. 예전(禮典)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규율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 비어 있는 기표인 믿음의 의미로 채워진 것입니다.

한데 그럴수록, 의미가 단단히 규정될수록 믿음은 다른 것들을 가리는 언어가 됩니다. 가령, 믿음의 자녀들 사이의 계층적 차이와 그들 사이의 현실적 삶의 갈등 같은 것은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보는 그러한 현실의 갈등에 대한 무심함은 바로 이런 이유 탓이지요.

「야고보서」는 바로 이 점을 먼저 각인한 문서인 듯합니다. 저자는 믿음은 실천을 통해야만 살아있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때 믿음은, 위에서 본 것처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교회적 윤리에만 몰두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실천은 이 문서가 내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려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문서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혀의 주체는, 저자 자신과 같은 존재, 곧 ‘교사’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식인 같은 자입니다. 지식인의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지식이라는 권력자원을 가지고 군림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여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욕적이며 악마적인 지혜”입니다.(3,15) 

부자가 화폐라는 자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면, 지식인은 지식, 곧 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무엇보다도 이 길들여지지 않은 혀를 강조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이라는 단어를 무려 10회나 사용했습니다. ‘공정한 사회’라는 말을 새로운 국정의 아젠다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때 ‘공정사회’란, 대통령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분야에 기회를 균등하게 주자는 것이고, 그 ... 결과에 대해선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사회입니다.

그 직후 터져 나온 외교부 장관 딸의 특채비리, 그이고 연이은 유사사건들은 우리사회가 그 핵심부에서부터 대통령이 말한 공정사회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당사자들은 이런저런 변명으로 정당화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길들여지지 않은 혀의 저주’는 그들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공정사회 주장은 한편에선 공허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뼈를 깎으면서까지 제기되어야 할 꼭 필요한 의제임에 분명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MB 정부가 그토록 거리두기 하려고 애썼음에도 결국 참여정부가 강조한 ‘특권 없는 사회’론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MB 정부가 집권 직전부터 강조한 ‘선진화’ 주장이 긴 우회로를 지나 이렇게 도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집권 직후,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뭐든 이전 정부의 것을 청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 결과, 일종의 무뢰배정치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여댔다가, 우여곡절을 격은 뒤 이제야 ‘선진화’의 내용을 이렇게 채워가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MB 정부 집권 직전 ‘선진화론’이 나올 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들의 주장을 예의 주시해 왔습니다. 필경 이 정부 내에는 선진화론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들은 한국 보수주의 정치를 미학화하는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보수주의가 미학화되면 보수적 가치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도화할 수 있는 동력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진보정치는 더욱 어렵게 되겠지요.

공정사회론은 아직 대중으로부터 깊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주장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정사회 주장 자체는 새로운 국정 아젠다로서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청와대 참모진이 그 연설문을 가지고 한 달 가량 20회 가까운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니 이 의제는 용의주도하게 기획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혀’처럼 쉽게 드러나는 권력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이전보다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정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데 공정사회론이 주장하는 가난해도 공부할 기회를 공정하게 얻을 수 있고 아프면 진료를 차별 없이 받는 사회는 가난한 이가 왜 주어진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지, 왜 여전히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습니다. 가난은 단지 가진 것이 없는 현상만이 아니라 ‘무력함’을 동반하기에 동등한 기회만으로 공정성, 곧 정의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여, 「야고보서」가 하듯이 약자의 자존성 회복에 관한 담론적, 제도적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화려한 수사는 단지 ‘길들여진 혀’의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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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혁아범
    2010.09.28 10:5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신앙과 정치상황을 빗대어 그것이 분리될 것이 아니라

    곧 해결해야하는 문제의 장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단순히 대통령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한번 좋은글 감사합니다.

강제병합 100년, 무엇이 남았나?

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세계NGO역사포럼 운영위원장)

내가 언제부터 일제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인 1997년이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총무로 일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맨 처음에는 적대감 가득한 울분이 내 마음에 가득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또 다른 연민이 나를 감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식민지로 살았던 36년간의 세월은 일본이나 한국 모두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심각한 상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증후군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스며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 일컫는다.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인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 강제동원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들, 한국인으로 일본의 포로감시원이 되었다가 BC급전범으로 내몰린 사람들 등등 수도 없는 피해자들 마음속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종종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종종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과격한 민족주의적 반응 역시 트라우마의 한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해자인 일본정부 역시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까지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트라우마의 왜곡된 현상 아니겠는가? 역사적 트라우마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과거를 직면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2010년 8월 강제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과거 100년은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 밑바탕에 있던 트라우마의 아픈 모습이라면, 앞으로의 100년은 질적으로 다른 전환점을 요청받고 있다는 인식이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다. 그 전환점이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동안 일본정부는 무라야마 총리, 고이즈미 총리, 칸 나오토 총리에 이르기까지 사과담화가 발표되었으나 정작 한국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한 부분이었고, 또한 사과에 따른 법적 조치가 병행되지 않아 말뿐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당연히 정부가 해야할 몫에 관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가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한일시민대회에 녹아있다. 일제 피해자문제를 가지고 활동해왔던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140여개 단체들은 각각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2년간 활동해왔다. 8월 22일 1000여명이 참석한 일본 개막식을 시작으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과 한일시민대회 폐막식이 주요행사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3500여명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8월 한달 내내 역사현장 기행, 전국단위의 달리기 행사 외에도 두 개의 문화공연, 표석제막식과 특별전시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일시민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2001년 더반 선언에서 나타난 식민지배와 식민주의가 반인도적인 범죄라는 선언을 이어받아 한일과거사 문제가 식민지 지배에 따른 범죄이며 동시에 더반 선언문이 제기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보편성을 제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구조에서 벗어나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한일시민공동선언이 더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실천력을 담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본총리들의 수많은 담화와 선언이 무색한 것은 그야말로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일시민사회가 역사적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를 선언문에 담았으니 더도 말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역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일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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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신학 체류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필자는 작년(2009) 6월부터 한 달에 한번 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웹진 <3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 하고 있다. 연구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삐대고 있던 나를 연구소로 끌어들인 김진호 목사의 제안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내게 이제 글을 써야겠다는 동력을 제공했던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었다. 나는 비록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고인의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이곳 시카고에서 신학공부하는 유학생들과 함께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추모예배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면서 몸과 마음이 화석화되고 박제화되어 버린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지금 단계에서 내가 현실세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가운데 연구소에 글을 쓰겠노라고 덜컥 말해버렸다. 그것은 <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가 걸어왔던 지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감사에 대한 내 나름의 뒤늦은 표현이기도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매월 글을 기고하는 가운데 몇 편의 글을 통해 이루어졌던 독자와의 대화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내지 공공성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어 글에 대한 평을 해주었던 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이 어느 정도 모아진 지금, 그동안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들을 하나씩 읽어보던 중 (물론, 언제나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마치 전날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쓴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 명료한 정신으로 읽는 기분이랄까) 문득 지금까지 매월 단편적으로 올렸던 글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Key-word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비록 내용상으로는 일관되게 흐르는 맥락이 없다손 치더라도 글쓴이로서 의당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심리적 상태 내지, 글에 임하는 심기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탈경계라는 말이 떠올랐다. 요즘 많이 쓰이는 용어이다. 탈경계의 문화, 탈경계의 사회학, 탈경계의 인문학 등등…. 그렇다면, ‘탈경계의 신학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호기심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탈경계의 신학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에 앞서 21세기 초 미국 신학계의 동향과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시카고의 신학적 분위기를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탈경계 신학이라는 말이 현재 미국 신학계의 전반적 흐름과 고투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용어일 수 있기에 그렇고, 그 체험이 내 글에 녹아있으리라는 예감에서이다.

 

미국 신학의 지형도[각주:1]

 

작금의 미국 신학계 흐름을 간략히(거칠게) 정리하자면, 전시대의 보혁구도에서 탈피하여 Mainline진영과 Evangelical 진영으로 재편된 채, 전 시대보다는 양자의 신학적 입장이 서로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이고, 호환 가능한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근본주의(Fundamental) 진영도 존재하는데 그 부분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미국 내 학문적 영역의 장에서 논의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복음주의 진영의 놀라운 진화라 할 수 있다. 즉 전시대 보수주의 진영이 지녔던 경직되고 편파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의 틀이 많이 무너지고 유연해 졌다는 말이다. 단적인 예로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가늠했던 과학과 종교의 문제, 타종교와의 대화문제, 인종과 문화에 대한 개방도 등에 있어 복음주의 진영은 Mainline 진영 못지않은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허물어짐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Mainline 진영 신학교에서 Ph.D 과정을 밟고 있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석사 과정 때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학생들이라는 사실은 미국 신학계의 섞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렇듯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는 양 진영 사이에도 2%의 차이는 상존한다. 그 차이란 누가 얼마만큼 더 미시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달리 표현하면 누가 더 소수자에 대한 구분을 조밀하고 치열하게 해내고 그에 반응하는가? 예를 들어, 성과 인종, 계급의 문제, 문화와 종교의 문제, 요 근래 예민하게 논의 되는 동성애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주류담론에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약자들의 아픔을 날카롭게 분석해 내고 신학적 진단과 예단을 해낼 수 있는 기민함의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그 2%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Mainline 진영에 속한 신학교들은 여전히 복음주의 진영의 학교들에 비하면 이러한 이슈들에 더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라 하겠다.[각주:2]  

 

 

미국 신학의 광맥, 시카고[각주:3]

 

<시카고 남부 Hyde-Park에 위치한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전경[각주:4]>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다. 시카고 경제의 3D 업종은 (불법) 멕시코 이주노동자들과 흑인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고,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아시안 이민자들은 택시운전, 세탁소, 음식점, 슈퍼마켓, 주유소 등지에서 고된 일상을 책임진다. 그 밖의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고 각자의 특성을 발휘하며 협력과 경쟁을 통해 시카고는 지금껏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각 인종별, 국가별 문화적 특색이 형형색색으로 분포된다. 뿐만 아니라, 시카고는 종교적인 분포도 다양하여, 그리스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운전을 하다 보면 이슬람 사원(모스크)을 보는 것도 다반사이다. 또한 백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유대교를 신봉하여 금요일 오후에 가족들끼리 유대교 회당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울러,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흑인인권 운동의 도시이자, 동성애 옹호의 목소리가 강한 도시 중 하나이다. 마틴루터 킹 제시 잭슨 목사로 이어지는 흑인인권 운동의 계보가 시카고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각종 게이, 레지비언 단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면서 레인보우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 또한 시카고이다.

 

시카고의 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풍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들은 저마다 실천신학 분야에서 Urban Ministry를 모토로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도시 시카고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민신학, 세계화 시대의 도시 빈민을 위한 복지신학, 다원화된 시대에 걸맞는 예배 예전 발굴과 회중의 효율적 조직화를 위한 여러 실험들에서 그와 같은 성과들을 목도할 수 있다.[각주:5]

 

특별히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위한 노력은 아주 구체적이다. 이슬람권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어 유치하여, 코란과 성경, 예수와 마호메트 등의 과목을 개설하기도 하고, 유대교 랍비를 신학교 교수로 임용하여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3대 종교간 (이슬람, 유대교, 그리스도교) 분쟁에 대한 연구와 대화모색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카고 신학교내의 LGBTQ 센터는 Queer theology 담론 생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내에는 미국에서도 과학과 종교간 대화에 있어 그 권위를 인정받는 Zygon Center가 있다. 이 밖에도 신학과 인접학문, 신학과 사회적 이슈들을 연결하는 다양한 센터들이 시카고에는 산재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시카고 신학계는 쟝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와 공방으로 일년 내내 떠들썩 하다.

 

종합하면, 시카고의 신학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요약될 수 있다. 시카고가 지닌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상황속에서 시카고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 대해 철저한 제 학문간 연대와 제휴를 통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빛깔과 무닉를 연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단초는 위에서 언급한 시카고의 신학적 토양과 깊은 연관이 있다. ‘, 탈경계의 신학인가?’에 대한 물음, 이를 위한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다음 번 숙제로 미룬다.

ⓒ 웹진 <제3시대>


  1. 미국신학의 지형도와 시카고의 신학적 분위기를 소개하는 대목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인 『세계와 선교』 195호(2008년 봄호, 90~95쪽)와 196호(2008년 여름호, 82~89쪽)에 기고했던 필자의 졸고 「세계 신학교 동향: 미국신학의 광맥, 시카고지역 신학교 소개」를 수정, 보완한 내용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2. 미국에는 천 개가 넘는 신학교와 종교관련 학과가 있다고 한다. 그 중 대부분은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계열의 학교들이다. 반면, Mainline 진영에 속한 학교들은 손으로 꼽는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보진영에 속한 신학자중 미국에서 유학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Mainline진영에 속한 학교들에서 신학수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미국에 있는 Ph.D 학위를 수여하는 Mainline 진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학교들은 다음과 같다. (제가 미처 몰라 누락된 학교도 있을 수 있으니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유명한 보스톤 컬리지, 노틀담, 로욜라 같은 카톨릭 대학들은 빠져있습니다) - 동부: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뉴욕 유니언 신학교, Drew, 보스톤 /중부: 시카고, Garrett 신학교, 시카고 신학교,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서부: GTU, 클레어몬트 /남부: 에모리, 듀크, 벤더빌트, SMU [본문으로]
  3. 시카고는 전미 최대의 신학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시카고 지역의 가장 큰 신학적 특색은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11개의 신학교가 연합체(ACTS: The Association Of Chicago Theological Schools, http://www.actschicago.org/) 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ACTS에 속한 신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어느 학교에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노스웨스턴대학, 로욜라대학, 드폴대학, 위튼대학, 시카고대학 등에 있는 종교학, 철학과와도 연관을 맺어 필요에 따라 언제든 수강이 가능하다. ACTS에 소속된 학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Mainline진영(진보적)의 학교와 Evangelical 진영(보수적)의 학교, 그리고 천주교 학교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ACTS에 소속된 전임 교수는 400여명, 학생은 3천 여명, 1년에 개설되는 강의는 총1000여 강좌에 육박한다. ACTS는 또한, 11개의 멤버 학교 외에 Zygon Center (Religion & Science), LGBT Center (Queer theology), Christian-Muslim Studies, Christian-Judaism Studies, Center for Study of Black theology, 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 등 신학과 각 분야 연구를 위한 10여 개가 넘는 센터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쟝르와 주제를 넘나드는 신학적 대화와 공방이 일년 내내 현기증 날 정도로 펼쳐지고 있다. – 위의 각주는 지난 웹진 "제3시대" 제23호에 게재되었던 ‘신학, 시대와 통하라!: 데리다로 신학하기를 위한 서론’ 중에서 인용하였음. [본문으로]
  4. 오바마의 정치적, 사상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남부 Hyde-Park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인 제시 잭슨 목사, 오바마의 멘토로 유명한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 등이 모두 시카고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위의 사진은 Hyde-Park에 위치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전경이다. 우측 하단에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건물이 시카고 대학을 건립한 록펠러를 기념하여 세운 록펠러 채플이고, 바로 건너편 빨간 벽돌로 높이 솟아있는 탑이 시카고 신학교이다. 사진 중앙을 가로 지르고 있는 길이 University Ave이다. 그 길 건너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카고 대학이 펼쳐진다. 좌측 중앙에 보이는 회색 건물이 시카고 대학 메인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뢰겐스타인 도서관이다. University Ave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학자 폴 틸리히가 자주 갔다는 맥주집이 길 모퉁이에서 아직도 성업중이다. 저 멀리 시카고 다운 타운이 보이고, 사진 상단 파란부분은 남한 땅이 풍덩 빠져도 남는다는 미시건 호수이다. [본문으로]
  5. 이를 통칭해서 ‘congregation ministry’라 부른다. 이 개념은 교회 운영과 관리,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다이나믹을 둘러싼 갈등해소와 관련해서 한국교계에 통상 ‘leardership’ 분야라 알려진 것과 혼동이 될 수도 있다. leardership 분야가 근본주의 진영의 목회 스타일, 즉 목회자와 교인간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고 지탱하는 전략적 목회전술의 개발에 포커스가 가 있는 반면, congregation ministry 분야는 기본적으로 시카고와 같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상황을 전제한다. 미국내에서 양자는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도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리더쉽 분야는 미국 남부 바이블벨트라 불리는 지역들에서 발전하는데, 이는 부시로 상징되는 미국 기독교우파에게 신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반면, congregation ministry 분야는 이와는 반대 진영에 있는 입장을 대변한다.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전시대의 획일적 리더쉽과 이를 바탕한 교회운영이 아닌, 각각의 개체들, 즉 다양한 교회회중들의 움직임과 전통과 발상이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고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위한 모색과 연구가 바로 요즘 미국 mainline 진영 실천신학분야의 새로운 이름인 congregation ministry인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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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를 넘어서
- 공정사회 담론에 대한 단상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공정사회’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인터넷 글들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한나라당의 현기환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화두로 던지는 순간 진보, 좌파세력에게 졌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폴리뉴스 2010.9.9)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모든 분야에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그런 후에 결과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며 ‘공정사회론’을 새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그런데 위 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해 현 의원이 “공정보다는 ‘품격’이라든지,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화두를 던졌어야 했다”며, “품격이라는 것은 혜택을 본 사람이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또 성공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물론 기사를 더 읽어보면,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정의로운 자기희생적인 모습의 공정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예비한, 지문 닳도록 손바닥 비비는 소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공정사회’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를 묻는 상황에서 나온 이러한 주장은 다소 엉뚱한 듯하면서도 어떤 핵심을 사유하게 해준다. ‘공정사회론’을 읽는 그의 독법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공공의 것’을 상상하기 위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독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다른 지점으로 논의를 옮겨가보자. 소위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거칠게 정리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공정하게 할당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주어진 몫’이란 자연적(=우연)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과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이 판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개인을 ‘몰역사적’인 자리에서 발견하려 하고, 개인이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 때문에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의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덕’을 먼저 구축하고자 하며, 공동체 구성원의 연대와 협력, 상호존중을 통해 정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서로 상반된 전제를 갖고 있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이론은 한국에서 이를 소비하는 담론 속에서 손쉽게 통합되고 있는 듯하다. 박세일 등의 학자들이 말하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보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공통분모를 찾아 두 이론의 급진성을 탈각시키고 통치의 논리로 전환하는 동물적 감각이 엿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이론적 ‘통합’의 가능성은 두 이론을 수용하는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반(反)갈등주의’적 성향 때문에 애초에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이론적 대립이 정치철학적 관심에서 형성돼온 것을 생각할 때, 두 이론의 반갈등주의적 성향은 ‘정치’의 자리를 합의와 타협의 자리에서 발견하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정치란 (자유주의자에게든, 공동체주의자에게든) ‘갈등축소의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는 현실 속에서 많은 경우 갈등을 은폐하는 기술로 손쉽게 전환되고 그래서 그 근본에는 더 큰 갈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번 호(제27호) 웹진의 시평 “길들여진 혀 - 공정사회 비판”[각주:1]에서 김진호는 ‘공정사회론’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기회의 평등’에 “가난한 이가 ...(중략)... 왜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단지 가진 것이 없는 현상만이 아니라 ‘무력함’을 동반하기에 동등한 기회만으로 공정성, 곧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시평은, 정의를 둘러싼 근래의 논의들이 ‘무능력한’ 주체가 재생산되는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해 유지되는 불공정한 사회의 문제에 해답을 주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는 데 그 함의가 있다.

앞서 언급한 한나라당 의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의 공정사회론 독법을 보면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담론적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공정’을 ‘평등담론’과 등치시키고 그것을 좌파의 몫으로 분배했다. 그리고 ‘품위’는 ‘혜택을 본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몫으로 할당하고 있는데,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그가 대비시키고 있는 구도 상에서 이들은 성공한 우파를 지칭한다. 그는 ‘좌파’와 ‘성공한 사람’ 등의 동일성 혹은 정체성을 가정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행위하게 됨을 전제하고 있다. 즉, 주체의 정치적 행위는 그의 정체성이나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갈등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속성을 변경해야 하는데, 이러한 담론 양식에서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주체를 정의하는 방식 자체가 그의 고유한 속성을 주체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속성을 변경한다는 것은 주체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속성이 변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이때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는 강자가 약자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기술 또는 주체 간의 차이를 은폐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기술과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이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스스로 인정할 때에만 공동체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는 무력한 이들의 고통을 은폐함으로써 ‘불공정한 사회’를 정당화하는 기능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공되는 ‘공정한 기회’는 정작 그 기회를 누려야 할 주체가 침묵할 때에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공정사회에 대한 논의는, 무능력한 이들을 재생산하는 '갈등축소 기술'을 넘어, 상대와의 근본적 적대를 은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와 공존 혹은 연대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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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지은이 : 하비 콕스
옮긴이 : 김창락
펴낸날 : 2010년 8월 25일
페이지 : 349쪽
정  가 : 17,000원
펴낸곳 : 문예출판사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1988년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힌 하비 콕스 교수가 그간 자신의 종교 인생을 집대성하는 의미로 펴냈다. <종교의 미래>는 21세기 종교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답을 예수의 시대와 제3세계에서 새롭게 발흥하는 종교적인 실천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예수로부터 시작한 기독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교조화 되었는지, 미국 근본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해방신학과 평신도 종교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개괄할 수 있다. 특히 하비 콕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하늘에 존재하는 천국을 말하는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의 삶에 기반 한 새로운 기독교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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