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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윤리(I) – “주체여, 안녕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

포스트모던 윤리학의 계보를 투박하게 분석하면, 니체로부터 기원하여 푸코, 들뢰즈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요근래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실재(the Real)의 윤리를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맑스와 라깡의 세례를 받은 이 그룹에 속한 학자들에는 21세기 최대의 스타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지젝과 칸트에 대한 라깡적 독해를 시도한 <실재의 윤리>의 저자 주판치치가 있다. 요약하면, 포스트모던 윤리는 크게 세가지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자기의 윤리, 레비나스와 데리다로 대변되는 타자의 윤리, 그리고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실재의 윤리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논의의 집중을 위해 전자의 두 경우에 포커스를 맞추어 내용을 전개할 것이고, 새롭게 등장하는 실재의 윤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과제로 넘긴다.

우선 두 그룹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서구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개별자를 향한 동일자의 무차별한 폭력에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많은 경우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성급하게 포스트구조주의[각주:1] 계열의 학자로 묶여서 알려지게 된다. 물론 해체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초기 데리다를 포스트구조주의 계열로 분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적어도 90년대 이후 자신의 해체주의적 이론을 윤리적 테마로 이행하던 시기의 데리다는 오히려 레비나스를 닮았다. 레비나스는 애초부터 니체-푸코라인과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계보를 따라 레비나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특별히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이 그의 문장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려왔던 양 진영은 서구 형이상학이 지니는 전체성의 폭력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략적인 면에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은 자기의 해석학으로 치달았고,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는 타자의 발견에서 그 해결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 니체에 기대다!

영어원서를 읽다보면 Subject 라는 단어를 만날 때 만큼 모호하고 이중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체, 실체, 자아, 주제라는 뜻 이외에, ‘신민(臣民), 신하, (집합적)국민이라는 뜻도 Subject 안에 들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급기야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복종하는, 지배를 받는, 당하기 쉬운,…에 빠지기 쉬운으로 해석을 해야한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주체, 강철과도 같은 불패의 정신을 지녔던 그 주체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전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주체의 숨은 뜻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이렇듯 가려져 있었던 주체를 수면위로 강하게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니체였다. 기본적으로 니체에게 있어 세상이란 더 이상 나를 어떤 합리적 구조에 가두는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디오니소스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은 나의 욕망이 끊임없이 활기치는 놀이터 같은 곳이 된다. 우리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듯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밝힌 주인의 도덕이란 이러한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삶을 긍정하고, 그런 삶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생성시키는 윤리이다. 이는 근대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투명하고 통합된 주체의 도덕도 아니고, 엄숙하고 너무나도 체제 순응적인 노예의 도덕일수도 없다. 어떤 에네르기에 의해 분열되고 그래서 앞날이 불투명하고 혼돈에 쌓인 그런 주체를 위한 도덕인것이다.[각주:2]

이렇듯 니체의 사상 안에 함의된,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진 주체에 대한 거부는 집단에 대한 딴지와 개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모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니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것처럼 거대담론의 붕괴와 작은 이야기들의 발견으로 전승된다.[각주:3]  진정 우리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거대담론이니 공동체니 역사의 발전이니 하는 선언적인 구호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이야기들, 예를 들어 개인은 누구인가? 집단과 이념의 그늘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 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다.[각주:4] 이 질문은 완강했던 근대적 주체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술임과 동시에 새롭게 번역되는 주체에 대한 기대와 전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Episode: 내가 주체로 서기까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하고 있는 주체란 어떤 집단에 몸담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주체이고, 어느 특정 이념에 노출된 이후 형성된 그 주체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남자로서의 주체성을 담보하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한다. 병역미필자는 해외에 나갈 때도 제한이 있고, 이력서를 쓸라치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항상 꿀린다. 사람들은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그럼 군대 가기 전 사람과 군대갔다 와서 된 그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내 경우는 군대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체득해야 할 온갖 나쁜 것은 다 배웠다. 굴욕에 복종하는 법, 짜웅(아첨)하는 법, 여자를 오로지 즉물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법, 가라(허위)로 보고하는 법, 인간을 격멸하는 것까지그런데 세상은 그런 군대를 나온 남자를 사람됐다고 사회적으로 인정한다.

공적차원에서 내 주체되기의 완성이 군대를 통과한 이후의 일이라면, 그것의 시작은 그 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도덕 시험이 그것을 외워서 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민교육헌장은 그 이후로 내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이어 통째로 암기하고 있는 세 번째 주문이 되었다. 당시 중간고사 시험을 보면서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장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를 쓰고 난 후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 자신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다는 것, 내가 민족의 역사를 창조할 일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그런 조국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다.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기만하다니! 어떻게 나라 전체가 이런 사기극에 집단적으로 공모할 수 있는가?

주체의 죽음! 주체여 안녕 !!

군대를 갔다오지 않아도 사람이 될 수 있고, 구태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아도 삶은 넉넉히 지속된다. 누군가가 창조하려했던 새 역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는지 우리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않은가! 병역을 필해야만 비로소 한국땅에서 남자 노릇 할 수 있는 그 주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되새기며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그 주체! 어쩌면 주체란 이런 필터링을 거친 후에 걸러진 찌꺼기가 아닐까? 그 필터는 군대일수도 있고, 국민교육헌장일수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가지 이름과 가능성으로 현존하며 그 다음을 대기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주체의 죽음이란 바로 그렇게 필터링된 주체에 대한 사망선고인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논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경계를 나누고 그것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필자가 보기에는 소모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주창자라 평가받는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라깡, 푸코 등의 학자들 스스로가 구조주의의 틀 안에 묶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 거부의 몸짓들을 투박하게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변별점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오히려 구조주의/탈구조주의 논쟁이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유익한 논의가 되리라 본다. 서구 근대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생각하는 나) 중심의 철학은 시대를 달리하며 현상학과 해석학, 실존주의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포물선을 그리게한 동력이었다. 물론 이것은 대상이 주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전 시대의 형이상학과는 차이가 있지만,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포섭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한 동일자의 폭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이에 맞서 인간의 인식과정이 결코 투명한 의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파악이 안되는 구조(언어, 문화, 역사, 무의식 등) 안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본다. 인간이 선천적 종합판단과 의지적 결단에 의해 행위하는것 같지만, 기실 그것은 어떤 짜여진 판에 의해 의도되어진 예상 가능한 함수라는 것이다. 이는 코기토적 주체에 대한 정면도전이라 할 만하다. 구조주의 처음 시작은 소쉬르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등 과학적 분석방법에서 출발을 했지만, 이는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서구사상 전반에 대한 비판(반이성주의, 반인간중심주의, 반민족중심주의, 반서구중심주의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일련의 과정을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이론, 이념, 주의등이 지닌 보편화의 가능성과 영토화의 음모를 의심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 더 나가서 근대성이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면서 공들인 체제 어딘가에 틈이 생겨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지금 실재라고 일컫는 것의 보이지 않는 어느 구석에 틈이 생기고 그 틈새로 무언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진짜 실재라고 말이다. 라깡은 이를 ‘증상’이라 말하고,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해체불가능자’이다. 지젝은 아예 대놓고 이를 ‘실재’라 부른다. 물론 구석에 난 틈과 그 틈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순물은 이론의 체계 내에서는 비합리적, 비이론적, 비학문적 요소이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오히려 이 부분을 통해 이론의 체계가 성립된 흔적을 역으로 추적하면서 이론에 주름을 내어 결론적으로는 이론의 표면적을 넗히는 역할을 한다. 기존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무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의 허위를 인정하지만 안고 나가는 애정이 포스트구조주의에 스며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대라고 일컬어지는 전 지역에서 파생된 문제에 대한 변론이자 땜질이며, 그러기에 그들에게 있어 사유는 단절과 봉합이 아닌 개방과 재서술의 형태로 미끄러져간다. [본문으로]
  2. 니체식 (흔들리는 혹은 욕동하는) 주체를 잘 드러내는 문장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나의 모든 의지를 다해 의지해야만 하는 곳에, 내가 사랑하고 또 소멸하기를 원하는 곳에, 하나의 상이 단지 상으로만 남아 있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 Friedrich. Nietzsche.「Thus Spoke Zarathustra」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235. [본문으로]
  3. J.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ans. Geoffrey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60. [본문으로]
  4.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자기의 의지와 욕망에 대한 한없는 관용이 냉전 종식 이후 몰아 닥친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교묘한 결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이야기들의 발굴을 통한 자기의 확장이 거대담론을 다시 복원하고 거시세계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낙관적 견해는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지? 이같은 지적은 90년대 초.,중반 사상계를 달구었던 중요했던 이슈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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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일곱 번째

청년들과 나누는 말씀 한 자락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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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엔 자유분방한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이 많다. 목사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들먹이면서 교회공동체에 동참하라고 했다가는 바로 정의의 날쌘 검을 들이대어 잘못된 권력행사를 꼬집어 주거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라며(요한 8:32) 새처럼 멀리 날아갈 청년들이다. 이런 청년들이 매 주일 모여서 뭔가를 한다. 그리고 당시 전임전도사였던 나에게 주일청년모임 자리에서 함께 나눌 것들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든, 기도든, 뭐든 해 보자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뭔지 늘 고민하는 나는 뭔가 하느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슴프레한 새벽 같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왔다. 이른 새벽, 저 멀리서 어둑어둑 밝아오는 여명(黎明)은 밤의 스산한 공기를 바꾸고 생명의 싹을 틔운다. 그 때 우리 몸은 깨어나고, 모든 존재들이 기지개를 편다. 생의 약동이 일어난다. 명징한 언어로 이런 모든 것을 설명해 내기란 참 어렵지만 뭔가 거기서 그 때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참(眞理)”이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희미하고 모호하겠지만 주일청년모임에서 말씀 한 자락 가지고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 아니겠나 싶어 함께 하기로 했다. 신학을 전공했고, 목사가 되는 길을 밟고 있지만, 갈수록 신앙이 뭔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헷갈리는 일개 전도사가 제 멋을 추구하는 청년들과 떠드는 수다 속에서 뭔가 일어나길 기대하며 그 첫 시간을 열었다. 주제는 “종교체험!”  
 
“종교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청년주일모임의 포문을 연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더 이상 종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시대에 여전히 교회에 오고,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 종교는 아편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여전히 진리의 맥락에 설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체험 또는 종교체험이 인생에 아주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종교 장사꾼들에 의해 맘몬과 결탁되어 있고, 심리적 위로와 조작된 감성에 주로 호소하는 왜곡된 하느님 체험과 종교체험을 성찰할 기회를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체험, 또는 실제 경험한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그날의 모임을 열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시간이라 청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고, 여기에 그 풍경을 그려본다.
한문덕: 종교체험을 한 적이 있나요? 뜨거웠던 경험?

ㄱㅅ: 저는 그렇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종교체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이야기를 하면 힘을 받고 좋아져요. 그래서 교회를 더 나오게 되고...

ㅈㅇㅇ: 저는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주변에서 병이 낫거나 한 경우 말이죠. 의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제 어머니 같은 경우도 암이 걸리셨는데 수술 없이 신앙으로 나시기도 하는 등의 경험이 있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참 저도 모태출석(모태신앙이란 말은 어불성설인 느낌이 들어서 모태출석이라는 말을 사용)인데, 어렸을 때 사소한 경험들이 있어요. 혼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갑자기 손님이 오신다던가 하는 경험.... ^^(웃음).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참석률은 저조했지만 교회 안다니던 애들이 ‘마음이 편해진다’, ‘눈물이 난다’ 그러더라고요. 대학교 가서는 내가 선택한 종교가 아니다는 생각에 교회를 안 나갔었어요.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신문사에서 일할 때, 회사에 뻥을 치고 교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부활절 예배. 그런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교회를 가는 게 좋다고 느껴지더라고요. 향린교회 나오기가 부담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너에게 기도를 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어’라고 하시면서 내 상황에 너무 잘 맞게 기도를 해 주셨어요. 이런 것들이 제가 느꼈던 종교체험 같아요.

ㅅㅈㅇ: 저는 여러 교회를 등록 안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다른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교회 나가게 되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떠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종교는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ㅅㅁㅈ: 저는 엄마의 체험의 결과물이에요. 신앙 좋으신 엄마가 기도해서 얻은 아이니까~ 어렸을 때 방언도 받았어요. ‘한얼산 기도원’ 같은데도 다니고. 초등학교 때 방언을 받았는데, 방언을 구분해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맞다고 해 주더라고요. 중학교 쯤 이게 가짜가 아닐까 생각되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안 되더라고요. 어머니는 꿈을 잘 꾸세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어머니는 귀신같이 아세요. 그리고 작은 사소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체험을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느낌이 친구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고요.

문덕: 여러분이 이야기 하신 것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종교체험은 분명 삶의 위로가 되었고, 변화를 주었다. 둘째,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참 낯선 것이고 이해가 안 되는데, 사실이다. 방언, 영의 분별 등과 같은 현상이 그런 것 중에 하나인데, 이런 것을 통해 하나님이 있나보다 라고 느꼈다는 것 같아요.

종교체험이 무엇이냐?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하면 참 어려워집니다. ㄱㅅ 교우가 “종교체험이란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종교란 무엇이고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의 궁극적인 핵은 어디에 있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오전에 교회학교 진급예배를 드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한 어린이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을 등치시키죠.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서구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보았고 예수님도 도적적인 모델로 생각했죠. 계몽주의 이후 특히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말한 후, 여러 종교학자들이 종교체험의 특성과 종교의 본질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토가 성스러움을 말한다든지, 요아킴 바흐가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를, 윌리암 제임스가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등을 종교체험의 특징 또는 본질로 말한 것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말한 종교체험도 이들이 말한 어떤 것과 연결되기도 하지요.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시도했던 멀치아 엘리아데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시간의 변화, 세월의 흐름을 무척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군요. 그렇겠지요. 오늘 현대인들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고대인들이 큰 나무나, 바위, 놀라운 자연환경 등 어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시간이 정지되고, 변하는 가운데 불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그 때 그 순간, 또는 장소는 거룩한 곳이 드러나는 곳이 되는데 이것을 엘리아데는 히에로파니(聖顯)이라고 불렀고, 고대인들의 이러한 거룩함의 체험을 통해 불안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고대인들이 느꼈던 어떤 거룩한 공간 또는 시간을 창조해 주는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종교체험과 오늘 성서에서 여러 인물들이 만났던 하느님 체험과는 무엇이 다르고 또 성서는 하느님 체험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모세와 이사야, 그리고 예수와 바울의 종교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남용하고 있는 종교체험을 살펴보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4명의 하느님 체험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종교체험이 반드시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종교체험이 삶과 유리된 황홀경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야기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 종교체험 후의 삶의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 공적 영역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이야기는 이들의 종교체험을 매우 극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로 꾸미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의 삶의 변화는 상당히 점진적이었으며, 이성적인 반성을 동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40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집트 사람이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다 그만 살인을 저지릅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40년간 목동으로 살다가 타지 않는 가시떨기의 현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히브리의 해방이라는 엄청난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갖게 됩니다. 태양신 라를 섬기던 이집트 제국 밑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히브리들은 태양의 힘에 의해 한 순간에 자연발화 되어 타버리는 가시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가시떨기는 태양의 힘으로 불사르려 해도 타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모습을 모세가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다가 실패했던 과거의 경험과 노숙한 신앙의 단계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고 하는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의 종교체험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40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민족의 사활을 고민해야 했던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하는 천상회의를 듣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민족을 놓고 오랜 동안 고민한 사람이 아니면 즉 준비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긴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와 광야에서의 시험, 그리고 갈릴리에서의 첫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나 마태와 누가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광야 시험은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요구하는 사탄의 시험, 어찌 보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영원한 욕망을 극복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갔다고 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보신 예수의 이성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직접 쓴 편지에서는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자신이 예수 체험 이후 아라비아 선교에 곧 바로 뛰어든 사실을 언급합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교를 다각도로 분석하였고, 처음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가, 스데반의 죽음과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과의 부단한 갈등을 겪은 후에 결국 예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종교체험을 보면 분명 놀라운 데가 있고, 그 종교체험의 진정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문제는 종교체험이 감정의 고양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혹 넘어선다고 할 때에도 그 행동의 변화가 교회에서 원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간증에서 머물고 말지요. 오늘 제가 택한 4명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 모두 종교체험이 역사적 현장과 연결된다는 사실이고, 역사적 현장과 연결되는 것은 이 사회와 문화와 정치경제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이성적 반성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신비경험이 있고, 예수님도 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면서 존재론적 변화의 경험이 있지만 결국 그 분들이 활동한 장소는 산 아래 낮은 곳이며, 이 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 만나는 먼 길을 가슴 -> 손발 -> 머리 -> 가슴 -> 손발로 표현했지요. 신영복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손발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깨달음의 진정성과 실천을 말씀하신 거지요. 그런데 종교체험은 가슴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가슴을 때리기 때문에 바로 손발로 실천하지요. 그런데 손발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슴을 울린 감동이 절에 들어가서 불상에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행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합니다. 중세 신비주의와 영성을 대표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만 해도 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졌고, <팡세>라는 수상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파스칼도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교신 선생 같은 분은 사람들이 성령체험을 한다면서 뜨거워질 때 마다 거기에다 찬물을 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슴에서 손발로 손발을 움직이되 머리로 성찰하고, 다시 가슴이 울리고, 그래서 손발로 내려가는 순환 속에서 차츰 신앙은 성숙할 것입니다. 뜨거운 감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명의식으로 체화되고 소명의식을 계속 떠올리면서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뜨겁지 않다는 거지요? 하느님 체험 자체가 없다는 것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고, 이전엔 뭔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자체가 없어서 종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것! 이것이 고민된다 이겁니다. 특히 뭔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더욱 더 그렇지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 체험은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오늘은 이 정도 하지요? 혹시 질문이나 추가로 함께 나누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고요~

ㅇㅎㅎ: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것도 종교체험 중에 하나 아닙니까?

한문덕: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은 아주 중요한 종교체험 중에 하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민족의 문제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행위 자체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간구와 기도는 있게 마련이고 그 종교전통에서도 문제해결이 되지요.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무속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요. 심지어 종교전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혼자서 자기 암시 비슷하게 계속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이 종교체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기도를 드렸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 기도인가 하는 문제지요.

ㅇㅇㅈ: 성경에서 종교체험이 있으면 공동체가 변하잖아요. 그럼 그처럼 공동체에 변화를 이루면 제대로 된 종교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요?

한문덕: 삶의 변화, 행위의 변화 궁극적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종교체험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했느냐’이겠지요. 성서의 언어는 고백적 언어이기 때문에 다소 과장되고 급격한 면이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끝나지요. 전혀 모르는 여성과 남성이 극적인 상황에 만나서 어려움을 겪고 결국 사랑하고 결혼하잖아요. 영화는 거기서 끝나죠.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그 때부터 지지고 볶고 하는 가정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하루에도 3천명씩 변화를 받았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은혜롭고 감동이 되지만 변한 3천명의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선 성화(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의 문제라고나 할까요.
 
ㅅㅁㅈ: 차라리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직접 만나 주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고 말씀해 주시면 정말 편할텐데~

ㅇㅌㅇ: 그 때 당시 사도 바울도 우리처럼 고민 많이 했을 걸!

한문덕: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지금 세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한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특히 종교인들이 그렇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시나요? 바로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진리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지요.  

ㅇㅎㅎ: 제가 종교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 그 것은 고등학교 때일 거예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의사가 된 것이거든요.

ㅅㅁㅈ: 그런 것도 있는데.... 좀 디테일 좀 주시면 좋겠어~

ㅈㅇㅇ: 디테일은 자신이 계속 찾아가는 거고, 계속 찾는 과정 속에서 그와 같은 계시가 필요하고, 또 실제로도 있다는 것이지. 나는 일상 속에서 그 같은 경험을 많이 체험하거든.

ㅅㅁㅈ: 나도 그런 경험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것이 힘들더라고.

문덕: 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것이 있죠. 기도와 말씀. 이건 다음 주에~ 숙제 꼭 해오시고요~. 오늘은 이것으로 마칠까요~
짝짝짝~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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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용하였던 청년신도회 주일 모임 자료
제 1 강 종 교 체 험
 
2월 3일 한문덕 전도사

1. 기도(위대한 기도문을 통한 성숙한 기도 배우기)            

Pa,ter( 아버지, (누가복음 11장 2절 일부) [각주:1]
Pa,ter h`mw/n o` evn toi/j ouvranoi/j(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장 9절 일부)[각주:2]


2. 마음 열기
- 교회 나온 이야기 나누기
-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

3. 하나님을 만나는 먼 길: 가슴→손발→머리→다시 가슴으로→손발   
1) 성서의 인물들
- 모세(출애굽기 3장 1-10절)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태양신 라(Ra)도 스네(가시떨기)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르지 못한다. 
- 이사야(이사야 6장 1-13절) : 천상회의를 듣고 자기를 보내달라고 하는 이사야(소명의식)
- 예수(마가 1장 9-15절) : 하늘과 소통(11절 참조 마 3;17), 세 가지 시험, 삶의 세계로 투신.
- 바울(갈라디아서 1장 11-17절) : 바울의 열성, 종교체험, 선교활동
- 성서 인물들의 하나님 체험의 특징: 성스러움의 체험(전체성, 두려움, 궁극성, 강렬성 등등), 소명의식(이성적 차원), 행위로 연결(실천) 
2) 하나님 체험(종교체험)에 대하여:
- 쉴라이어마허: 절대의존의 감정(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다):
-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 - 두려움(Tremendum)과 매혹(Fascinas)의 신비(mysterium)
- 요아킴 바흐: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
- 윌리암 제임스: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 멀치아 엘리아데: 히에로파니(聖顯), 고대인의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변하지 않는 무엇 즉 본질 추구-> 시간이 멈춘 순간의 경험 
- 이길용: 종교란 세계설명 체계와 인생문제 극복체계, 완전함의 추구-완전함의 발견-완전함의 고양

4. 보살핌과 결단   
- 현재 나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의 강렬함은 어느 정도인가? 냉장고인가? 용광로인가?
냉장고 ---------------------------------------------------------- 용광로

5. 삶의 적용 모색/기도   
- 자신의 소명을 찾아보자. 하나님이 이 시대에 나를 왜 부르셨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본다.
- 어떻게 하면 나를 추동하는 하느님 체험을 계속 할 수 있을까?

6. 다음 모임 알림(2월 10일) “주제: 기도”  

- 자신의 기도체험을 반영하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도란 이런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적어오세요.
- 자신이 요즘 드리고 있거나 이전에 했던 기도제목들을 모두 적고, 하나님에 관한 것, 자신에 관한 것, 이웃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봅시다.
※ 참고문헌
『종교론』슐라이어마허/최신한, 대한기독교서회, 2002.
『기독교신앙』슐라이어마허/최신한, 한길사, 2006.
『성스러움의 의미』루돌프 옷토/길희성, 분도출판사, 1987 초판.
『Religionswissenschaft: Prolegomena zu ihrer wissenschaftstheorethschen Grundlegung』<종교학: 학문이론적 토대를 위한 서설> Joachim Wach, 1924 초판.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김재영, 한길사, 2000.
『종교학의 이해: 쉽게 풀어쓴 종교학 입문서』 이길용, 한들출판사, 2007.
  1.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나? 우리의 존재 근원에 대한 성찰(인간성의 문제). [본문으로]
  2. 하늘에(초월성, 전적타자, 낯섬, 구원의 가능성) 계신 우리(내재성, 친밀함, 근접, 돌봄과 배려), 예수의 아버지 개념과 어머니 마리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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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담는 그릇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다시 펜을 듭니다.

형!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의문부호였던 것이 나중에는 느낌표가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어느새 자학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단어들을 잃어버렸다고. 그렇죠. 매주 설교 강단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저의 단어들이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 무덤이었던 거지요.

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나’라는 자아를 가지고 바깥세상과 어울리며,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살핀다고 했죠. 그런데 그 자아(의식)속에는 ‘우리’라는 집단적 견해, 집단적 가치관 또는 행동규범이 들어와 있답니다. 사람들은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규범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집단속에 살아가는 가운데 그 집단이 요구하는 태도, 생각, 행동, 규범을 행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심리학은 ‘페르소나’(persona, 가면)라 부릅니다. 결국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썼다 벗었다 하며 사람은 집단에 적응해 갑니다. 참 재미있어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person이라는 단어에 겨우 한 글자가 더해져 <연출된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어 진다니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스위스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폴 투르니에’도 그의 책에서 이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몸에 붙은 위선의 껍질을 벗기고 인격을 보다 순수한 모습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충고합니다(폴 투르니에 ‘인간 그 가면과 진실’, 문예출판사). 인간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존재이니까요.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연출된 이미지들에 덧씌워져 있는지요. 그것을 보고는 ‘그를 안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하는 ‘실수투성이들’ 말입니다.

설교단에 서 보셨으니 짐작하시겠지만. 저처럼 채 익지 않은 설교자의 단어라는 게 얼마나 건조하고 메마른지요. 그 제한된 단어들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이라는 단어 없이 설교할 궁리도 해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 터미놀로지’를 이식하는 일 자체가 독선처럼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로우’의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저를 향해 직격탄을 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인간의 불안에 어필하고, 신은 인간의 거룩한 존재 ‘영혼’에 어필한다. 신과 종교를 리버스(reverse)시키지 말아야 하며, 신을 종교에 귀속시키지 말아야 하고, 나를 신과 종교 어느 편에 세우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가 아니라 ‘신과 나’이다. ‘나는 너’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도솔)

신과 나이다! ‘영혼이 주뼛 서는 것 같았다’던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처럼(욥기 4:15) ‘신과 나’라는 새삼스런 인식이 잠들어 있던 영혼을 깨워줍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살아온 저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겁니다. ‘나는 너이다!’

이제, 이 편지를 쓴 이유를 밝혀야지요. 상암동 하늘공원에 갔었습니다.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어요. 우선, 하늘공원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장호 감독의 영화 ‘바보선언’에서 보았던 그 쓰레기 무덤이 한강을 지날 때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바람개비들’과 함께 초록 숲으로 변해있는 거지요. 여기에, 하나 더. 미군 폭격장으로 사용됐던 ‘매향리’를 방문했을 때 한참동안 시선을 잡아끌었던 그 조형물 - 미사일 탄피와 잔해들로 만들었다는 ‘자유의 신 in Korea'의 작가 임옥상 선생이 아주 멋진 그릇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담는 그릇

광활한 대지에 올라 하늘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땅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풀을 만지고 또 만졌습니다.
하늘공원에서 희망을 보는 일이란 자연 그 자체를 보는 일입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 이곳에서 희망을 보는 일이란,
죽었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다는 것처럼
마음속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씨앗을 뿌리내리게 하는 일입니다.
희망전망대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해야겠습니다.
자연과 함께 어울리고 춤추고 노래하게 해야겠습니다.

(임옥상, 하늘을 담는 그릇 제작 프로젝트 북, 디자인세보)




임옥상 선생은 지난 해, 서울시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늘공원 희망전망대’라 명명된 작품의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수없이 하늘공원을 오르내렸을까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는 전망대를 생각해낸 겁니다. 그 해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두 달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제 첫돌이 지났습니다. 작품명은 ‘하늘을 담는 그릇’이라 지었습니다. 철골로 지름 13.5미터, 높이 4.6미터의 그릇이 되었고, 바닥과 내부는 목재로 장식됐습니다.

장대한 스케일의 대지에 점 하나가 찍힙니다. 하늘공원을 찾은 사람이면 누구나 잠시 멈추어 쉴 수 있는 점. 그 점이 그릇이 되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지면 다시 버려 야 하는 그릇. 비우고 채우고, 채우고 비우고, 다시 비우고 채우는 순환의 축적이 바로 자연이지요. 그것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된 것입니다. 또한 이 그릇은 성배입니다. 쓰레기 위에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루는 과정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한 기원과 소망, 꿈이 담긴 그릇 말입니다. 그릇 주변에 뿌려진 등나무 씨앗에서 싹이 나면, 그릇은 초록빛 등나무 줄기가 벽이 되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어 버릴 것입니다.

임 선생은, 아홉 가지 생각들을 심어놓았습니다.

Thought_사상 : 낮은 자세에서 사물을 바라보다. Scale_크기 : 보란 듯이 우뚝 서 있기를 거부하다. Reconciliation_화해 :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땅에게 사과하다. Emptiness_여백 : 소유를 벗어난 비움, 부재의 미학을 실천하다. Space_공간 : 새로운 공간의 배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문제이다. Time_시간 : 천천히 축적되는 시간의 기록을 만들다. Landscape_경관 : 장대한 스케일의 자연을 떠받든다. Ecology_생태 : 최소한의 인공물로 자연에게 고개 숙이다. Moderation_절제 : 인간의 오만과 자만을 버리고 최소한의 것을 추구하다.

이 그릇은 벽이 없습니다. 등나무 줄기가 자라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자연과 어우러져 공생하는 중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완성’이라는 단어자체가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저는 또 거기서 교회당을 그려보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전을 만들 때, 벽은 높고 웅장하게 하되, 지붕을 얹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과 단절하되 오직 하늘을 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거룩과 세속’ ‘미와 추’ ‘선과 악’ ‘호와 불호’ ‘성공과 실패’라는 ‘종교의 아집’을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그릇은 종교 이상입니다. 하늘을 향해 활짝 열어젖힌 땅의 예배자이며 동시에 그 어떤 벽도 가지지 않은 ‘나는 너이다’입니다.

마치 제가 ‘하늘을 담는 그릇’의 전도사가 되어 버린 것 같군요. 한걸음 한걸음 목재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아 오르며, 철골구조물을 잇는 굵은 철사 줄에 매달려 있는 ‘열쇠들’을 보았습니다. 제각각 사람들의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남산에서도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한줄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들만 보였습니다. 열쇠들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곳, 그 골목길들을 말입니다.

요즘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들을 보시며 형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 며칠 후, 저게 말했죠. ‘쓸개 빠진 놈이 되고나니 뭐든 다 받아들여지더라고’ 실제로 우리 몸에 쓸개라는 것이 ‘판단작용’과 관계된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 분명 ‘극소수’일 텐데, 늘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한국교회’가 되어버립니다. 또 얼굴을 들 수 없는 소식들입니다. 불교 사찰을 찾아가 ‘여리고성 땅 밟기’를 재현했다는 이들. 기독교회 이름의 ‘은행’을 만들자며 ‘장충체육관’에 모여 ‘장로대통령을 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외쳤다는 ‘발람의 후예들’ 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당신 주먹으로 가슴을 치셨을 일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걸지 않고도, 세상과 소통하며, 신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예배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 몸으로, 그 삶으로 ‘생명’을 감사하고,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데. 도대체 교회는 무얼 하고 있단 말입니까!

김교신 선생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의 교훈을 자아의 주판으로 적당히 할인하여 믿으려 함은 차라리 믿지 않음만 못하다. 모두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하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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