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 국가안보와 두려움의 상관관계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영어 단어 security는 한국어로 안전, 보안, 안보 등으로 문맥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security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개성 공단을 폐쇄하고,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사드 (THAAD)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하는 한국 정부. 이 틈을 타서, 국제적 문제아인 북한의 핵 위협에서, 자국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하려는 일본. 한반도에서 커지는 미국의 군세력을 자국 안보의 위협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침묵하는 북한.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계 평화는 고사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와 협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안보의 정의도 군사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한 영토 수호와 자국 국민들 보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박근혜, 김정은, 시진핑, 오바마가 가진 세계 안보와 평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만약 21세기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이 곽퓌란 (Kwok Pui-Lan)과 요그 리거 (Joerg Rieger)가 “종교를 정복하라 (Occupy Religion)”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미국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한 대한민국 국가 안보라는 시스템에 어떤 자극을 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기독교 사상가인 시모니 웨일 (Simone Weil)은 securit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전 (security)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전은 영혼이, 짧은 순간이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공포나 테러의 무게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비록 영속적인 공포는 잠재적 상태만으로 존재해서, 그것의 고통스러운 효과는 거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병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준마비 상태이다 (Simone Weil, The Needs for Roots, 1952).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웨일은 반전 운동가는 아니였지만,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열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식민지 민족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포와 테러에서 자유로운 안보/안전은 군사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세속적 왕국이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지는 못 하더라도, 지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영토와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세속 왕국의 지배자가 해야할 의무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예방적 전쟁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상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도 동의하듯, 어거스틴에게 있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만 한다.  


         전쟁은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포심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1.4 후퇴 때,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한 후에, 공산당에 의해 아시아가 무너지면 미국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는 곧 미국이 하느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산당을 악마와 동일시 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또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었다. 인류의 반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이라크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사담 후세인도 사라지고, 대량 살상 무기도 이라크에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이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사실 전쟁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자체가 평화 운동이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략과 정치, 경제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 무역 불균형, 국가 간 경제 제재 등 갈등의 근원을 파악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근원을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갈등 상황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성 평화 운동을 연구한 영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코번은 반전운동은 공포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그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전쟁 그 자체가 일반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해가 너무 크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미군과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지역들의 성폭력과 조직화된 기지촌 성매매, 전쟁 중의 집단 강간,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폭력, 여성 군인들의 업적 비하 외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등 여성들이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전쟁의 폐해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적국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주는 비열한 전술이다. 여성이 겪은 전쟁 폭력은 전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는 경우가 많고, 알려진다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회 화합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예가 거의 없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본과 협상한 대한민국 정부, 내전 기간 동안 집단 강간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의 기념비 건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 지역 주민들과 정부. 이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그 영혼 깊숙히 공포와 테러를 심어주어서, 준마비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예이다.  


          코번이 방문하고 인터뷰한 여성 반전 단체들이 전쟁의 공포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단체들은 전쟁과 군사화가 약속하는 평화가 인간 사회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거짓이며, 알 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란 공포심에서 벗어나, 함께 반군사화 운동, 군비감축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말 그대로 국제 정치가 남성중심의 힘과 공포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지속 가능한 안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2008. 한국어로는 평화학자 김엘리가 번역한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다양한 단체와 학자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미군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 연구들 중 하나가 과연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 행동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국제 안보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dnt)가 이야기한 것 처럼 폭력은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힘을 잃기 시작할 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집단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계속 복종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1970). 아렌트의 논리대로 라면, 더이상 힘을 가진 집단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미국은 제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써의 힘을 더 빠르게 잃기 시작한다. 사회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또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들면서,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제개한 군사행동은 군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Real Peace, Real Security, 2008). 미국은 군사행동을 통해 오히려 반미정서를 전세계에 퍼뜨렸으며, 이슬람 국가 (IS)같은 급진적 테러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괌, 사이판 등의 태평양 섬들과 호주를 잇는 거대지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군사지역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이 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명문을 찾고 있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하며,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사드시스템 배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는 군사 폭력을 통해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결국 일반 한국시민들이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한국의 건설업체들에게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안보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세상에 무관심해져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불합리한 제도와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Silent Cry, 200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국 정부와 미국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두려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의 공포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북한의 핵이 두렵다. 그러나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핵, 원자력 발전소 뒤에 숨어있는 핵,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는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핵이 더 무섭다. 그리고 한국의 안보는 이미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정신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한일협상이 이루어졌을때, 이제 할머니가 된 생존자들에게 죽기 전에 일본을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애국어머니연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사용자 중심의 노동법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강요할 때, 등등의 순간에 끝났다. 국가안보는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치적, 종교적, 성적위협, 재난과 재해, 경제적 억압과 착취, 성차별 등으로 부터 지키는 인간중심의 안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지킬 능력도, 지킬 마음도 없을 때, 또는 지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더이상 국가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국가 안보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도 상상하기 어렵다. 심판의 칼을 든 하느님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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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송민원

(시카고 대학 고대근동학과 Ph.D. Candidate)


 

  4. 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두 강 사이”라는 뜻으로, 지역적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와 그 주변지역을 가리킵니다. 두 강이 주는 풍성함으로 이 지역은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문명 중 가장 오래된 문명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5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되는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기원전 2000년대에서 시작하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문명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아있는 문헌과 유적의 풍성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물고기 뼈다귀처럼 생긴 쐐기문자(설형문자)로 된 그들의 문헌은 한 명의 학자가 평생 읽어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현재 국제정치적인 이유로 이 지역의 발굴과 탐사가 어려워졌지만, 아마도 땅을 파는 족족 엄청난 것들이 계속 출토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Ancient Mesopotamia>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우리와 아주 멀게 느껴지는 문명입니다만, 사람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닥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시카고대학에서 바빌로니아 문헌을 배우고 있을 때 교수님은 각 학생들에게 손바닥만한 진흙판 하나씩을 나눠 주었습니다, 조심해서 만지라는 경고와 함께. 그 안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글자들을 여덟 시간 안에 해독해내는 것이 기말시험이었죠. 햇볕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글자 하나하나를 종이에 손으로 옮긴 끝에 그 내용을 파악하고는 그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문헌은 초기 바빌로니아어(Old Babylonian)로 되어 있는데,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1600년 경으로, 달의 신을 섬기는 신전의 여사제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이런 저런 신들에게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극히 전형적인 안부인사로 상당히 점잖게 시작하는데, 본론에 가서 그 톤이 확 바뀝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왜 먹을 것을 보내주지 않냐며, 배가 고파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너희들 잘 먹고 잘 살려면 내가 여기서 계속 기도를 해야 하니 빨리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사실 20세기 말미에 이를 때까지 서구인들이 바라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온갖 “비정상”적인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제임스 프레이저 경(Sir James Frazer)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을 “풍요 숭배(fertility cult)”와 “성전 매춘(temple prostitution)”으로 규정한 이래로 후대 학자들의 상상력이 계속 덧붙여졌습니다.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난나/이쉬타르(Inanna/Ishtar)는 그 상상력을 자극한 핵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이난나로 분장한 여사제와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신과의 합일을 통해 신성을 얻게 된다는 “성혼식(Sacred Marriage rite)”이나, 성적 결합을 통해 신도들을 구원, 혹은 정결에 이르게 하는 성전의 남녀 사제들,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거나 혹은 그 둘의 성적 상징을 모두 갖고 있는 “양성구유”적 사제, 그리고 황홀경 속에서 스스로를 거세하는 의식 등, 그동안 서구학자들은 그들에게 낯선 “동양의 문명”을 더욱 낯설게 만들었습니다.   


<Babylonian Marriage Market (Edwin Long, 1875)>


    이런 “동양에 대한 서구적 시각”은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년 한 번씩 각 마을의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을 한 곳에 집합시킨다. 남자들은 둥글게 그들 주위를 둘러싼다. 여자들은 한명씩 이름이 불려지며 경매가 시작되는데, 가장 예쁜 여자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나면 그 다음으로 예쁜 여자가 경매 대상이 된다. 이렇게 모든 여자들이 아내로 팔린다. 바빌로니아의 부유층 남성들은 미모가 빼어난 여성들을 두고 경쟁을 하는 반면,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서민들은 못생긴 여자들을 금전적 보상(결혼지참금)과 함께 얻게 된다. (경매에는) 원하는 사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아주 먼 시골에서까지 와서 경매를 통해 아내를 맞이한다.” (히스토리아이 I: 196) 


    하지만 실상은, 그 수많은 메소포타미아 문헌들 속에 이런 상상력들을 확증할 만한 자료는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기에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남편이 있는 여자가 바람을 핀 것으로 보이는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면 여자는 “강의 신에게 데려가져야” 합니다. 즉, 물에 빠뜨려서 살면 여자의 무죄가 입증되는 것이고, 죽으면 신의 정당한 형벌을 받은 것이 되는 셈이죠.[각주:1] 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들을 얕게나마 읽은 저의 시각에서는, 배고픔을 호소하던 신전 여사제처럼, 그들의 삶이 4000년 뒤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입니다. 출토된 유적들도, 문화관광부가 19금 판정을 내릴 만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는 다르게, 대부분 기껏해야 15금 정도입니다. 



<Erotic Plaque 1, 2>


    물론 수위를 좀 벗어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아래는 성행위와 음주를 동시에 즐기는 남녀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조차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고 상당히 덤덤히 묘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Old Babylonian Clay Plaque (Israel Museum)>


    심지어 신들마저 우리 시대에도 흔히 벌어질 만한 사랑을 합니다. 


그녀(여신 이난나)는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처럼 그녀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애인을 만난다. 그녀 자신처럼 빛나는 별들 아래서 그녀는 그의 애무에 몸이 서서히 녹아든다. 시간이 한참 지나(직역: “밤이 전진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것을 대체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를 보내줘요. 집에 가야 해요. 나를 보내줘요, 두무지(Dumuzi).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한답니다. 대체 어머니에게 어떤 거짓말을 해야할까요? 어떤 거짓말을 어머니 닌갈(Ningal)에게 해야할까요?” 그러자 두무지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어머니에게 가서, 여자친구들이 춤추러 가자고 꼬셔서 할 수 없이 갔다고 하라고.[각주:2] 


<Inanna and Dumuzi>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의 독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결혼제도”의 중요성과, 그 결혼제도에서 벗어난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를 들 수 있겠습니다. 


    두 남녀가 한 집에 살면서 시작되는 고대 이집트의 “간략한” 혼례와는 다르게,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결혼은 여러 금전관계가 얽혀 있는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약혼 시에 신부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옵니다. 이 지참금은 남편의 소유로 귀속되지 않습니다. 혼인관계가 종료된 경우 (사별이나 이혼 등) 이 결혼지참금은 여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종잣돈이 됩니다. 여자가 죽고 나면 이 지참금은 남편이 아닌 그녀의 아이들의 재산이 됩니다. 예비신랑은 약혼 시 일종의 “보험금”와 신부 측 부모에게 줄 “혼인비용(보통 “bride-price”라고 합니다)”을 지불해야 합니다. 만약 예비신랑이 마음이 바뀌어 혼인을 취소하고 싶어지면, 보험과 혼인비용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만약 신부 측 아버지가 약혼을 취소하고자 하면, 신랑이 가져온 혼인비용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야합니다. 만약 다른 집안 사람들이 신부 측 아버지를 찾아와, 그 남자 말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고 설득해서 약혼이 취소된다면, 신부 측 아버지는 응당 혼인비용의 두 배를 물어줘야 하는 것뿐 아니라, 파혼의 원인을 제공한 집안과의 혼사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만약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성전에 속한 여사제가 되기로 한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지참금만큼의 재산을 그녀에게 주어야 합니다.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도 아주 세밀한 차이들을 보이는데, 결혼지참금이나 혼인비용 등을 낼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인 경우, 또 그에 따른 아주 복잡한 계산법이 존재합니다.


    이렇듯,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결혼은 양가 집안뿐 아니라 차후에 생길 후세에까지 이르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이 제도의 바깥에 존재하게 되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섬세한 보호망을 구축하게 됩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잘못) 불리는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은 “정상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각주:3] 몇가지 예를 들자면, 


128. 한 남자(“아윌룸”)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나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니다. 

130.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약혼녀를 범했을 경우, 그 남자는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여자는 죄가 없다. 

134. 한 남자가 전쟁포로로 잡혀간 후 그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아내가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그 여자는 죄가 없다. 

136. 만약 한 남자가 가출해서 도망가버려 아내가 다른 집으로 시집갔는데, 후에 그 남자가 돌아와 아내를 되찾고자 한다면, 그가 자신의 집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아내는 (전)남편에게 돌아갈 의무가 없다. 

137. 만약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는데 그들 사이에 아이들이 있다면, 여자가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그녀의 (결혼 시에 가져온) 지참금에 더하여 남자 자신의 동산 및 부동산의 일부를 떼어주어야 한다. 그녀가 아이들을 다 양육했다면, 아들 한 명에게 줄 유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재산을 여자에게 상속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직역: “그녀의 마음의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 

142. 만약 여자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당신은 나에게 결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고발한 경우,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옳다고 입증되면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지참금을 가지고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Code of Hammurabi 1&2>


    물론 함무라비 법전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 특히 여성의 권리는 체제유지를 위해 희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혼관계나 혼인관계 파탄의 귀책사유가 여자에게 있지 않는 경우, 고대 바빌로니아 사회는 여성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이고 경제적인 보호장치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사회보장제도는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나, 의지할 아들이 없는 여성들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결혼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독신의 성전 여사제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Code of Hammurabi 3>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결혼제도” 밖에 존재하는 동성 간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보테로는 사회적인 낙인이나 법적 제재를 전혀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로이 동성과의 관계가 존재했을 거라 주장합니다.[각주:4] 이렇게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법이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관계에 대한 제재가 없으니 아마 자유로웠을 것이라는 셈인데, 사실 보테로가 찾지 못했을 뿐, 꽤나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리’라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국가의 왕 짐리-린(Zimri-lin)의 아내가 쓴 편지에는, 남편 짐리-린과 함무라비 왕 둘 다 남자 애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문 연감(Almanac of Incantations)”이란 문헌에는 각종 다양한 사랑에 대한 기도문이 열거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랑, 여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남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도 같은 정도의 중요성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각주:5] 흥미롭게도 여성 간의 동성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슘마 알루(Šumma ālu)”라 불리는 문헌은 사람의 성적 행위가 그의 미래에 미치게 될 영향을 예측하는 일종의 지침서인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 경우의 동성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각주:6]


1. 만약 한 남자가 자신의 “친구(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와 성적 관계를 갖는다면 (직역: “뒤에서 성교를 한다면”), 그는 그의 동료들 중에서 으뜸이 될 것이다. 

2. 만약 감옥에 갇힌 남자가 성적 욕구가 넘쳐 남성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진다면, 그에게는 불운이 닥칠 것이다. 

3. 만약 남자가 남성 사제와 관계를 가지면, 근심에서 벗어날 것이다(?). 

4. 만약 남자가 궁정관리와 관계를 가지면, 일년동안 근심에 쌓일 것이나, 그 후엔 괜찮아질 것이다. 

5. 만약 남자가 노예와 관계를 가지면, 아주 험난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각주:7]


    사실 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양의 메소포타미아 문헌들 중 동성관계를 언급한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동성관계가 일반적이었다는 식의 보테로 같은 해석은, 몇 안 되는 문헌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슘마 알루를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1번의 경우만 분명히 긍정적이고 나머지는 부정적입니다. 3번의 경우는 해독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기 앗시리아 시대(기원전 15세기 경)의 법률은 ‘아윌룸’이 동등한 사회적 신분의 다른 ‘아윌룸’과 동성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경우, 즉 아윌룸이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동성이든 이성이든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언급이 없다는 것이 곧 그런 사회적 관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슘마 알루에 나타난 동성관계에 대한 표현들이 대부분 부정적이긴 하지만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까지 취급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슘마 알루가 법률문서가 아니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태도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관심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근간인 결혼관계에 거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혼은 두 개인 사이의 관계를 한참 벗어나, 양가의 모든 구성원들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세들까지 고려해야 하는, 게다가 혼인관계가 중단되거나 파탄나는 각종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의 “노예”들을 생산하기 위해 무조건 아이만 열심히 낳으라는 어느 나라의 미혼 대통령과는 다르게, 이 고대인들은 결혼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복지까지 걱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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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함무라비 법전 132. [본문으로]
  2. Jean Bottéro, Everyday Life in Ancient Mesopotam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2), 109. 여기서는 보테로의 번역을 의역했음을 알립니다. [본문으로]
  3. 함무라비 법전의 연대를 BC 1726년 정도로 잡는다면, 우룩아기나(Urukagina)의 법전은 그보다 600년 가량 앞선 BC 2375년, 우르남무(Urnammu)는 2100년, 에쉬눈나(Eshnunna)는 1750년 경의 것으로, 함무라비의 법전은 어떤 독창적인 성과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성문법과 관습법을 정리한 것입니다. 만약 발굴이 더 진행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증거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본문으로]
  4. Bottéro (1992), 100. [본문으로]
  5. David Greenberg,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126. [본문으로]
  6. 슘마 알루는 120 여개나 되는 판에, 천 개가 넘는 주문들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7. Martti Nissinen, Homoeroticism in the Biblical World: A Historical Perspective (Augsburg Fortress, 1988), 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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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기다리는 시간




오영애



    삶은 늘 불투명합니다. 


   불투명함은 밤이며 집 없음이며 들떠 있음이며 열려있음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늘 제 자신을 고뇌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와 사회변혁에 관심이 있던 제게 자비와 정의의 선명함과 대조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불투명함에 대한 분노이며 슬픔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안으로 파고드는 자발적 유폐와 유랑의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세상 속으로, 다시 서울에 온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대학원에서 예술심리치료를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작년 일 년 동안 예술치료 임상 겸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정신병동의 조현병·조울증 환자들, 중도입국 새터민 아동들, 발달지체 성인들... 다양한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운명과 신, 그리고 저의 신앙의 내용과 수준에 대해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현재의 상황이 이르게 된 이유에 대해 집착하고 온갖 이론과 학설을 적용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습이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원인이 너무 복합적이고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새터민 아이를 만나고 있자면 저 아이의 엄마는 무슨 이유로 탈북했으며, 중국 남자와 만나 결혼하고 왜 헤어졌을까? 한국에 홀로 와서 센터에 아이를 맡기고 막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녀의 삶은 운명지어진 것인가. 한 아이의 지난 생애와 미래가 힘겨운 서사로 머리속으로 그려지면 마음은 더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운명과 업, 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환청· 환시로 고생하는 조현병 환자들도 , 발달지체로 1-2세의 인지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성인들과 그 가족의 삶을 생각해도 그냥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 느낍니다. 이제 다시 고민은 그들을 치료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는가. 약물과 상담, 예술매체 등의 방법으로 과연 그들이 얼마나 더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가 하는 고민이 듭니다. 어쩌면 어떤 이에게는 치료기법보다는 경제적 지원이, 어떤 이에게는 정보와 지식의 제공이, 어떤 이에게는 곁에 함께 있음이 필요한 듯합니다. 


    이렇게 끝없이 고민하다 보면 새벽이 옵니다. 요즈음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상담기법, 예술치료, 명상치료, 기치료, 스포츠치료 등 모든 취미 분야에 치료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삶처럼 치료도 불투명하고 모호합니다. 조금은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이 불투명함에도, 오랜 고민 끝에 오는 작은 깨달음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누군가를 돕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돕고 있음을 그냥 알아준다는, 이해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더 건강해지고자, 편안해지고자,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그저 신뢰한다는 것,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그들은 내게 다가온 인연이고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신의 형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피부색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성별을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커서는 신의 덕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유, 평등, 존엄, 자비, 정의...... 


    이제 제가 누군가를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이해하려, 제 자신을 도우려 노력하며 누군가의 곁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 다음은 신께 맡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육체가 건강할 땐 탐욕이 생기는 경험을 합니다. 지식이 과할 땐 교만과 아집이 드러나는 경험을 합니다. 의식이 풍족하고 마음이 편안할 땐 우둔해지고 권태로워집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영혼으로 이러한 상들을 점검하도록 신의 이름이 있는가 봅니다. 


   몸이 조금 아프고 지식이 조금 모자라고 마음이 가끔은 애통한 상태에서 영혼은 제 기능을 합니다. 본향에 다다르기까지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이 불투명함 속에 이 유랑 속에 늘 열려있기를, 기다림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게 신의 형상은 ‘기다림’으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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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이 되어가는 세계



 

백승덕*


 

          장모님 회갑을 맞아 처가식구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이라곤 일본으로 다녀온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10년 전에 가톨릭학생회에서 한국 대표로 아시아 지역 총회에 참가하느라 말레이시아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이나 날아가 본 경험이 없었다. 한 달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방문했으니 그 나라들을 깊게 볼 수는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해서 사진을 찍고 숙소 주변을 걷는 정도의 일정을 겨우 소화했을 뿐이다.  

          그래도 몇 가지 광경들은 인상에 남았다. 그 중 하나는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군인들이었다. 한국의 군사주의가 예외적으로 대단하다고 하지만 총을 든 군인들을 일상에서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반면 로마나 파리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는 중에 군인들을 참 많이 만났다. 여행이 끝날 무렵엔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에 서서 직접 검문을 하는 모습이 익숙해지기도 했다. 주요 지하철 역사 내부에도 이런 군인들이 경계를 펴고 있었다. 작년 말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 이후에 유럽에선 이런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총을 들고 지하철을 탄 군인들을 만났던 것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출근시간이라 사람들로 꽉 채워진 지하철에서 공교롭게도 군인들 바로 옆에 서다보니 총구에 옷깃이 스쳤다.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내가 손을 조금만 뻗으면 움켜쥘 수 있는 거리에 총이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군인들이 총을 들어 장전할 공간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총을 들고 지하철에 탈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웬만큼 큰 상점들에는 입구에 선 경비들이 방문객들의 가방을 열어 보이라고 요구했다. 고객들은 너무도 순순히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가방이나 핸드백 속은 가장 사적인 공간일 텐데, 경찰이 아니라 사설 경비원이 일일이 확인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낯설었다. 한국에선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민주화의 상징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권리와 권한과 관련해 유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내가 경험한 유럽은 예상과 적잖이 달랐다.


익숙한 베를루스코니의 인기


         IS 테러 위협 이전에도 이런 광경이 펼쳐졌던 때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테러를 염려하지 말라며 비슷한 선례가 있었다며 소개해줬다. 2000년대 중반에 소매치기를 박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베를루스코니가 명소마다 군인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특공대들을 투입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주민들과 집시들이 이 때 곤욕을 많이 치렀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런 '단호한' 정책으로 승승장구를 했다.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여기까지 이야기해주며 소매치기 역시 많이 줄었다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안심시켰다.

         숙소에 돌아와서 기사를 검색을 해보니 가이드의 말은 대부분 맞았지만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2010년까지 베를루스코니의 인기는 대단했고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기 어려웠다. 2010년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자신의 스캔들 상대가 소매치기 혐의로 검거 당하자 베를루스코니가 경찰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소매치기 단속을 위해 특공대씩이나 투입했던 그의 단호한 모습과 너무 모순된 행태였다. 마치 국민들에게 단호한 안보태세를 요구하면서 방위산업 비리로 엉터리 무기를 채워 넣은 한국의 군부를 보는 듯하다. 안보와 치안의 위기 그리고 군대 투입 결정과 높은 지지율까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흡사했다.

         흔히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라서 일상이 병영처럼 꽉 막혀버렸다고 하지만 어느 사회든 금세 전쟁 태세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만큼 자유의 토대는 취약하다. 사설경비에게 가방을 순순히 열어 보이는 파리 시민들이나 베를루스코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단호한 군사적 조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며칠 전 프랑스 의회는 지난 파리 테러 직후에 선포한 국가비상사태를 3개월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안보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혐의만 있어도 영장 없이 수색과 구속할 수 있는 조치가 5월 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뜻밖에도 낯선 유럽에서 국가보안법이란 익숙한 형체를 만났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의 한계


         물론 안보 위협에 직면해 사회가 병영화된다고 해도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치렀으니 유럽이나 다른 지역과 다른 고유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분단사학’이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들은 이처럼 고유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했던 새로운 시각이었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유독 민족을 내세우며 독재를 강화하던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경제위기를 겪으며 곤란에 빠져있었다. 정부가 나서 차관을 가져다 키운 기업들 중 절반 가까이가 부실화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탈냉전 국면에서 미군 철수라는 안보 위기도 겪게 되었다. 1971년 대선에선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에도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가 야당 후보인 김대중에게 근소하게 이길 만큼 정권의 안정성이 떨어져있었다. 1972년 시작된 유신체제는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내세워서 권력 안정성을 확보하려던 일종의 쿠데타였다. 유신헌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능률의 극대화”나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 같은 말들은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피치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독재자의 수사였다. 

         국가권력의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저항적 지식인들 중 일부는 민족을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로 새로이 발견했다. 이들에게 한민족의 얼굴은 독재자 박정희가 아니라 전태일처럼 찢기고 갈리고 빼앗기고 신음하는 민중이었다. 그러니 민족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독재를 포함한 현실을 바꾸는 주체일 수 있었다.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민족과 자주에 기반을 둔 평화통일원칙을 정권 차원에서 내세움으로써 민간 차원에서도 민족의 분단이 민중의 처참한 현실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을 가졌던 지식인들은 그 직후 선포된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강만길의 ‘분단사학’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은 이와 같은 정치적 지형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과 관점을 공유했던 리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단은 한국사회를 “비정상과 일그러짐”으로 이끈 근원이었다. 요컨대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은 독재정권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민중 모두가 민주주의를 매개로 삼아 민족사회의 주인이 되는 이상향을 향하고 있었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분단시대의 극복’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 수립’이나 ‘올바른 근대화’ 등의 과제와 연관된다.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 역시도 민족통일이 그 자체로 평화나 인간해방의 최종적 단계라고 보지 않았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문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해결하는 가장 근원적인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은 민족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가 오히려 민중들의 현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작년 초 전국건설노조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불법 고용 근절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국건설노조 관계자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쿼터를 지키기는커녕 불법체류자도 감독하지 않아 정부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이라며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불법체류자들 중에는 조선족 ‘동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동질성 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법체류자 중 한민족의 피가 섞였다고 볼 수 있을 사람들을 분리하여 구제해주는 식의 대처는 오히려 갈등만 더욱 키울 것이다. 국가주의를 넘어서 민중 전체의 해방을 꿈꿨던 저항적 지식인들의 바람도 그와 같은 ‘그들만의 민주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을 병영사회로 몰아가고 있는 테러 역시 ‘그들만의 민주주의’ 바깥에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 이민자들에 의해 자양분을 얻고 있다. 현재 기한 없이 연장되고 있는 프랑스의 국가비상사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처음 선포된 것은 10년 전이었다. 파리 외곽에서 경찰의 검문을 피해 변압기 쪽으로 피했던 10대 이민자 2명이 감전사를 당한 것에 분노한 도시 외곽 지역 청년들이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나선 ‘방리유 사태’가 그때 벌어졌다. 국가의 강력한 진압과 국민 대다수의 지지에 힘입어 이민자들의 봉기는 금세 진압되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차별에 대한 분노는 10년 만에 테러라는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테러에 관련된 자들이 대부분 도시외곽지역 이주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이 분단을 극복하겠다며 민족동질성 회복만을 강조한다면 오늘날 유럽이 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근원적 해결책일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여행 중에 접한 유럽은 온통 테러에 맞선 비상사태였다. 프랑스에선 ‘빅 브라더 법안’이라고 비판받을 만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이 작년 11월 테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시행 중이었다. 이 법안은 정보기관이 법원의 승인 없이도 전화를 감청하고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등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며 피의자의 기록은 기소만 되어도 40년 간 그대로 남게 했다. 이처럼 강력한 조치가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벌어지기 반 년 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테러를 막지는 못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 인해 또다시 비상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북한의 돈줄을 끊기 위해 개성공단 운영을 중단해버렸다. 또한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압력을 넣고 있다.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나오더라도, 이 정부는 언제나처럼 그저 밀어붙이고 있었다. 북한과 전쟁을 막기는커녕 사드를 도입해서 중국과도 갈등을 키우고 있다.

         어디를 가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대다.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딱히 탈출할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근원적인 해결책이 절실하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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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둘. <으스름달밤에 나는 너와 걸었다.>




 김정원*



         희끄무레한 으스름달밤이다. 약간 찬바람이 코를 훔치고, 두어시간 전에 비는 그쳤지만 땅은 충분히 젖었다. 그야말로 런던의 밤 같은 그런 밤에 사람도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함께 걷는 이’는 말이 없다. ‘함께 걷는 이’가 말이 없으니 ‘걷는 이’도 말이 없다. 둘 다 말이 없으니 손에 든 봉다리가 바지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비니루봉다리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봉다리 속 아이템들끼리 부대끼는 소리마저도 또렷해진다. 또각또각하는 구두가 젖은 땅을 때리는 소리는 그 소리들의 중심이 된다. 여러 소리들이 쟁쟁한 가운데, 걷는 이 둘은 말이 없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둘은 말이 없다. ‘걷는 이’는 말수가 적은 여자가 아니지만 지금 이 밤에는 잠깐 침묵하기로 한다. 어색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하여 그런 것이다.

         이들의 친밀함은 ‘이해’를 그 근거로 한다. 의미가 결여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둘은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침묵한다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은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서로에게 개방시켜 나간다.

         이 둘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비단 침묵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말하고 듣고’, 또 ‘말하고 듣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서로의 사정과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즉, 서로 많은 말을 나누던 사이가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땐, 아마도 틀림없이 더 본래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해의 정도는 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들이 침묵하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내용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저 둘이 나누었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그 둘은 조만간 닥칠 미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수차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지점에 이르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큰소리가 오가기도 하고, 분노가 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말함과 들음’의 과정에 성실히 참여한다. 비록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화제를 이해하게 된다. 대화를 마친 이 둘은 이제 으스름달밤을 걸어간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이들은 더 많은 낱말을 쏟아낸다고 해서 서로의 주장이 보다 명료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요~ 땡! 지금부터 침묵 시작!’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충실한 대화 후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의 대화 속에 동의, 순종, 협조가 들어차 있지는 않았지만, 진실한 대화와 경청은 이 둘 모두를 침묵으로 이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침묵에 없는 것은 단지 소리 일뿐, 이해나 관계 맺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성실하고 진실하게 ‘진정성 있는 말’을 주고 받았다면, 둘은 본래적으로 침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각주:1] 자신을 활짝 열어서 보일 때(開示), 둘은 침묵의 달밤을 어색함 없이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대화는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너는 나와 달라. 나는 너를 통제할 수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야. 결론이 나지 않아 너는 오늘도 속상해 하고 있어. 네가 속상하니까 나도 속상해져.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지.’


         어쩌면 그 둘은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보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남자를 원하는지를 아름다운 어구를 사용해가며 부단히 설명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쉬 믿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개시한다. 서로 듣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여자와 남자는 ‘새로운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자는 ‘그 남자를 간절히 원하는 여자’라는 새로워진 존재로서 그 남자 앞에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간절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한 남자’로서 그 여자 앞에 나타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롭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즉, 이 둘은 여자의 진실한 ‘말하기’와 남자의 ‘경청’을 통해 새롭지만 ‘공동의 존재’들로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이 서로의 의도나 욕망 혹은 거절 등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녀의 애달픈 마음을 그가 단박에 받아들여줬음 더 없이 좋겠지만. 또, 으스름달밤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이겠지만 여하튼.) 즉, 두 사람은 ‘둘만이 알고 있는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그 남자를 원하는 여자로, 그 여자의 고백을 들었던 남자로, 그 둘은 관계를 맺어간다. 

         이윽고 둘은 침묵하며 으스름달밤을 걷는다.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둘 모두가 듣게 되는 신비의 순간에 머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서로의 존재가 아주 또렷하게 드러나버리는 침묵의 공간에서- 두 남녀는 대화를 이어간다.


         결국 진정성 터지게 ‘말하고 듣기’ 후에 찾아오는 침묵에 관한 이야기이다. 긴밀하고도 본래적인 침묵 뒤에 오는 대화는 보다 커진 이해를 틀림없이 동반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본래적 침묵은 결국 사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각주:2] 속이 ‘빈말’ 역시 걸러지게 된다. 생떼를 쓰며 주장했던 것들도 침묵 속에서는 이내 사그라져버린다.

         그러니까- 그 날 밤에, 그 으스름달밤에, 겨울비가 내린 그 밤길에, 또각또각 소리가 나던 그 찬거리에서 그 두 남녀가 침묵 속에서 들었던 것은, 비니루봉다리의 버석거리는 소리가 아닌, ‘함께 걷는 이’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p 224~ 참고. [본문으로]
  2. p 229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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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원리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쌍문동


  1988년 겨울 쌍문동 아파트에 입주하여 그 곳 주민이 되고 결혼 후 또 쌍문동서 애 키우고 살던 나로서는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가 시작되고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한 인기를 얻으면서 드라마 속에서 또 각종 매체에서 ‘쌍문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불려 질 때 마다 마치 내 이름이 공식적으로 불려지고 회자 되는 듯한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응팔 여주인공 덕선이가 다니던 쌍문 여고의 모티브 격인 정의여고는 딸아이가 다니던 곳이고 드라마 중간 중간 방학동이니 광산슈퍼 사거리 같은 지명과 감포 면옥, 20-2번 버스 등 골동품 같은 쌍문동 아이템들이 TV속에서 나오니 왜 아니 신기 할까. 쌍문동서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 ‘아기 공룡 둘리’일 뿐인, 언제 주목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서울 북쪽 끝 변두리 일 뿐이었던 곳이었으니 세간의 주목이 어색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응팔의 여주인공 덕선이가 성인이 된 후 결혼한 불알친구 택이와 나누는 대화에서 언제 우리 한번 쌍문동 찾아가 보자는 택이의 제안에 이제 그 동네는 더는 옛날 모습이 아니라며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완전 다른 동네가 됐다는 덕선이의 대답은 정말 어색함을 넘어 무안하기 까지 했다. 이유인 즉 드라마가 재현했던 쌍문동 골목은 그야말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지금 쌍문동에 있는 아파트나 주상 복합 건물은 덕선이가 살던 그 때도 이미 있었고 다른 말로 하면 그 만큼 오래된 것들이고 다른 뭔가가 더 이상 들어서지도 않았고 그래서 쌍문동은 목동도 분당도 판교도 아닌 그냥 조용한 쌍문동일 뿐이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 덕선이네가 쌍문동 지하 셋방을 떠나면서 같은 동네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고 판교로 이사 갔으니 이제 덕선이네는 여보란 듯이 살고 있을 게다. 쌍문동 주민들이 하는 우스갯소리로 쌍문동은 한 번 들어오면 못나가는 곳이라 말하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가는 동네 집값이 천정 높은 줄 모르고 고공행진 하는 동안 쌍문동 집값은 제 자리 걸음만 했으니 서울 주소 딱지 붙이고 시골 땅값 내역으로 사는 곳이기에 쌍문동 집값으론 서울 번듯한 곳 어디에도 이사 갈 곳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고 교육에 관심을 갖던 가정에선 으레 아이가 성장하기 시작하면 좀 더 힘 보태서 이사 가는 곳이 큰 학원가가 형성된 중계동이었고 교육에 올인 하겠다고 작정한 가정은 집 팔고 돈 더 보태서 대치동 전세로 가는 것이 90년대 중 후반부터 내가 겪던 쌍문동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그 마저도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아이를 키우며 그야말로 쌍문동에 남겨진 사람들은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고 엄마들끼리의 모임에서도 ‘쌍문동 블랙홀’ 같은 자조 섞인 농담들이 오가 곤 했었다. 남겨진 나 같은 몇몇 극성 엄마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무섭게 차로 삼사십 분 걸리는 중계동 학원으로 아이를 내 돌렸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렇게 사는 내내 쌍문동은 대한민국 뜨거운 화두인 ‘강남’의 그림자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덕에 늘 고요함 그 자체였다. 

    물론 나의 쌍문동 이야기는 어디 까지나 내가 겪었던 좁은 상황 안에서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쌍문동이 좋았다. 내노라 하는 대형마트는 하나 없어도 아기자기한 상권이 없는 거 없이 다 갖춰 있고 도봉산에 우이동에 연산군 묘에 청심천에 솔밭에 집에서 슬리퍼 끌고 나와도 산책할 수 있는 곳이 넘쳐나는 곳이다. 나는 그 곳에 그만 정이 들 때로 들어서 며칠 여행을 갔다가 집에 올 때면 멀 찌기 도봉산이 보이기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 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반면 늘 그 곳을 떠나고도 싶었다. 누가 대놓고 뭐라 한 적은 없었지만 쌍문동에 산다고 말했을 때 거기가 어디냐고 물을 때면 수유리 지나서 의정부 가기 전에 있다고, 서울이란 지역 내에서의 쌍문동 좌표를 적나라하게 말해야 할 때 상대적으로 중심가에서 얼마나 먼가를 고백해야 할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들어오곤 했다.  

    드라마 속에서 덕선이 언니 서울대생 보라가 학교 도서실서 깜빡 시간을 잊고 늦게 까지 공부하다가 고딩 남친 기다리는 쌍문동 골목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쌍문동서 서울대는 끝에서 끝 그것도 대각선으로 끝에서 끝이다.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강북 아주 많이 위 쪽 주민들에겐 자기 동네 이름에 스스로 변두리라는 이미지를 얹고 어느 정도의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1988년 쌍문동 아파트에 입주하던 시절을 떠 올릴 때면 꼭 생각나는 두 가지 그림이 있다. 하나는 우리 집 뒤 베란다서 보면 주변이 온통 아파트 공사판이었던 현장 한가운데 오두막 같은 허름한 집 한 채가 섬처럼 덩그러니 솟아있던 모습과 다른 하나는, 상가 건축현장 포크레인으로 깎아내린 작은 동산에 반쯤은 벼랑 밖으로 드러나고 반쯤은 땅속에 박혀있던 관짝이었다. 공사 중에 예상치 못하게 관을 건드리면서 꽤 오랫동안 작업은 중단되었고 그냥 그대로 시커먼 관짝이 대로변 언덕에 반만 박힌 모습은 정말 그로테스크했다. 

     섬처럼 남아 있던 허름한 집 한 채와 벼랑에 박혀있던 시커먼 관짝은 차라리 그냥 한 모습 같았다. 마치 아주 어렸을 적 아이들이 흙더미를 쌓아 단단하게 두드린 후 꼭대기에 긴 나뭇가지 하나 꽂아 놓고 한 사람 씩 번갈아가며 흙을 최대한 많이 씩 퍼 가다가 나뭇가지를 쓰러트리는 사람이 지는 흙 파기 놀이를 닮았다.

     조금만 더 흙을 퍼내면 쓰러 질 수밖에 없는, 안 쓰러지면 계속 파야 되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모습이 연상되었고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집을 짓고 이익을 맛보려는 공급자와 소비자에게 홀로 남은 집 한 채와 관짝은 그저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는 약삭 빠른 땡깡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1988년 쌍문동 봉황당 골목의 따스한 환타지는 적어도 쌍문동 아파트 현장에는 전무했다.


서부이촌동


    어찌어찌해서 지금은 용산구에 산다. 정확히 말하면 이촌2동 즉 서부이촌동에 산다. 한강대교 동쪽에 있는 이촌1동 그러니까 동부이촌동과 한강대교 서쪽 서부이촌동은 행정 명칭 상 같은 동네이지 사실상 같은 동네라 할 수도 없다. 무자비한 도로에 가로 막힌 것도 그렇고 부촌인 동부 이촌동의 편리함에 서부 이촌동을 비교 할 수 없다. 새남터 성지가 말해 주듯 조선시대 사형 터 여서 풍수 지리적으로 뭔가 일이 꼬이는 걸까 재개발도 안 풀리고 이곳은 묘한 분위기가 물씬하다. 변변한 가게나 병원도 없고 생활하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정말 별천지같은 곳이다. 동네 골목 구석구석 도저히 서울이 아니고 2000년대가 아니다. 불발된 재개발을 증명하는 거인 같은 가림 막들이 몇 킬로미터 씩 둘러 쳐져있고 굉음을 내는 한강철교 밑과 다듬지 않은 한강 변 들판이 내게는 영감을 주는 터전 처럼 느껴진다. 사진기 하나 들고 나서면 서부이촌동을 즐거워하기에 흡족하다. 부디 재개발의 광풍이 더디기를 부디 한강변에 잔디를 깔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서부이촌동의 주민들도 서울의 중앙에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나보다. 서울하고도 한 참이나 북쪽 쌍문동 부근의 주민들처럼 이곳의 주민들도 동네 이름에 스스로 무엇을 얹고야 마는 걸까 어느 택시 기사의 이야기인즉 주말 늦은 시간이나 연말 늦은 시간처럼 택시 잡기 어려울 때에 차창 밖에서 동네 이름을 외치는 손님들 중에 동부 이촌동 사람은 “동부 이촌동!”이라 외치고 서부 이촌동 사람은 “이촌동!”이라 외친다고 한다. 어떻게든 구별하고 싶은 쪽과 어떻게든 묻어가고 싶은 심리를 그 택시 기사는 간파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봐도 동부에는 없고 서부에는 누릴 수 있는 게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불꽃 축제다. 강 건너편에 63빌딩이 있는 덕에 불꽃놀이 명당은 서부다. 그런데 지난 가을 기대했던 뻑지근한 불꽃쇼가 벌어지고 어떻게들 명당인줄 알고 모여 드는지 아파트 앞 강변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텐트 쳤던 벌떼같은 구경꾼들이 빠져나가자 처녀지 같던 들판이 그만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억새 하나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폭격 맞은 벌판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쓰러진 억새와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 더 있었으니 축제를 위한 시설물들을 강위에 설치하던 조명 설치 업체 직원이 조명 장비를 옮기다가 그만 강에 빠져 익사한 사건이다. 더욱이 그의 시신은 불꽃축제가 끝난 다음 날 63 빌딩 인근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 누구의 꽃상여인가

 

    더 먼 곳으로 흘러가지도 않고 그가 빠진 그 곳 근처 그대로 시신은 맴돌았을 것이고 그 곳 위에서 고스란히 행사는 당연한 듯 진행되고 우리는 그의 주검을 물속에 두고서 화려한 불꽃 쑈에 환호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뉴스를 접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불꽃 보며 지르던 비명과 웃음은 다 무엇인가. 축제를 준비하다 죽은 주검을 찾기도 전에 그 위에서 열리는 것이 축제라고 할 수 있는가. 유가족에게 그것은 분명히 가슴을 찢고 고막을 찢는 악마의 진혼곡이었을 터 내가 지른 비명이 자꾸만 내 귀에 다시 되 돌아왔다. 


상대성원리


    무엇이 축제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가. 혹은 무엇이 흙 파기 게임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가. 기어이 주검 위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땡깡쟁이로 모는 이 시스템은 무엇인가.

    세상은 온통 상대적 박탈감이란 신 빈곤의 늪에서 허덕인다. 그것은 무시하기도 버거운 무게로 현실적 고통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신 빈곤의 피해자들은 축제나 게임을 멈출 생각이 없다. 분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내가 나보다 잘난 상대 때문에 초라하듯 어느 순간 나보다 못난 상대 때문에 내가 빛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상대적 자리가 바뀌길 바랄 뿐이지 시스템에 불만 없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못 먹어도 고라는 말처럼 순응하지 않고 일단 들이 받는 기질이 있다고, 그런 아웃사이더의 무모함과 패기가 가까운 일본과는 다른 면이라는 말을 제법 했었다. 그런 말들 속에는 고래 힘줄 같은 한국의 에너지를 긍정하는 뜻이 담겨 있었는데 요즘 만들어지는 자기 혐오적 유행어에는 극단적인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상대적 하층에 속한 내 위치만 불행할 뿐인 거다. 그런 상대적 피해자 코스프레는 죽음이라는 ‘절대’를 보지 못하게 한다. 

    누가 죽어 나가도 누가 터전을 유린당해도 번쩍이는 불꽃 축제와 흙 파기 게임이 이 세상 전부이자 자연으로 알고 거침없이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수긍한다. 

    그리고는 응팔의 마지막 회를 넘기며 허망하게 한 마디 남기는 것이다. 


    “덕선이네가 판교로 이사 가듯 나도 그 때 그랬어야 했었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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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랜드마크 - 빛은 나를 경계한다








통일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쪽을 보는 것이 안보 관광인지 통일 관광인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안보도 통일도 관광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망원경으로 북쪽 산하를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저 너머의 허상에 불과할 뿐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었다. 


나는 이 한반도에 있으나 결코 가까이 가거나 볼 수 없는 북한에 대해 고민을 한다. 생각해 볼까?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분명히 한반도의 북쪽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곳, 보이지 않아서 더 궁금하고 그 실체를 알고 싶은 곳, 피를 나눈 형제라는 사실이 때때로 어렵고 두려운 곳…. 


경기도 1번 국도 일대에 설치되어 있는 탱크 저지선 구조물의 형상을 만들었다. 


 나는 인공위성이 촬영한 평양의 시가지를 출력해서 평양의 전체 지도를 만들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작은 지도가 아니다. 평양의 시가지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도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요즘의 구글 지도는 건물은 물론 자동차와 사람들까지도 보여준다. 그렇다고 완벽한 지도라고는 할 수는 없다.. 강과 길과 아파트와 여러 구조물들이 불규칙한 그리드 위에서 평양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약간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이 작품의 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도 위에 나는 평양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사회주의 랜드마크를 세웠다. 투명 아크릴 판 위에 마치 광고판처럼 불을 밝힌 사진들이 그 것들이다. 


그런 다음, 지도와 구조물을 사각의 밀러아크릴 박스로 덮어 놓았다. 관람객들은 저 멀리서 아크릴 박스 안에서 무언가 총천연색으로 빛을 밝히고 있는 이미지들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대략 3미터 전방까지는 그 박스 내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박스 내부가 아주 밝은 조명 있다. 


하지만 그 이상 가까이 가면 밀러아크릴 박스는 완전히 시커멓게 암흑천지로 돌변한다. 센서에 의해서 박스 내부의 조명이 꺼져 버리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의아해 한다. 왜 갑자기 꺼져 버렸지? 왜 안을 볼 수가 없는 거지? 가끔 관객들은 작품에 문제가 있다고 하소연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 여전히 금단의 구역이라 할 수 있는 평양, 언제쯤 그 곳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나와 평양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말하고 있다.왜? 그곳이 평양이니까요. 북한이니까요. 

 


 

박준식 作 (사진작가)


- 작가소개

독일 베를린 조형예술 대학교(U.d.K) 마이스터 졸업, 현재 성신여대에 출강하면서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치루었는데, 근래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2012년 DMZ 대성동 자유마을에서 '경계를 넘어서'라는 작품전을 기획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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