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9 : 묵시록의 영웅 트럼프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말을 듣게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를 미국의 어떤 정신의 몰락과 내가 아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탄식하는 일은 모두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선택을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심정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를 던져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문화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동성애 결혼 문제에 대한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오고 다수의 미국인이 이런 결정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른 진보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케어라 불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제도도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면서 진보적인 색체의 정치가 주류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에 따라 보수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권의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찾아나가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개표 직후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시골의 가난한 백인남성들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외되고 주류사회의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들이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이 반란이었다면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보다도 더 많은 81%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뿌리가 근본주의에 있고,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전천년설의 묵시록을 수용한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 웹진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그들의 신앙이 정치화 된 시기를 1970년대 말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나의 입장은 그 현상을 미국역사 전체에서 찾아야 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로 묵시록이란 개념을 여기서 쓰고 있다. 70년대 말 복음주의 신앙의 정치운동화가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성공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과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만남이 있었다. Frederick Hayak에서 Milton Friedman까지 ‘자유’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로 바꿀 꿈을 꾸고 있던 신자유주의에겐 유권자가 필요했고, 정치적 플랫폼이 필요했던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만큼 매력적인 용어는 없었다. (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이후 비대해진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암묵적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근본주의 신앙과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던 세력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앙운동이 바로 미국의 뉴라이트(New Christian Right)운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도덕관에 맛서는 순혈의 ‘도덕적 다수’라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은 미국의 묵시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몰락은 그 세계관의 토대였고, 세상은 적군과 우군으로 구분되었고, 적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폭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청교도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와 정치는 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만나 변신한 형태, 곧 70년대 후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해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 비극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늘 그렇듯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 테두리의 밖은 상상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일상과 접목된 보편의 철학이 된다. 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반민주적인 철학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인에 의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고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도박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건 비판이 아니고 혁명뿐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주된 텍스트는 묵시록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신자유주의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될 신자유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를 모르는, 아니 미래가 없는 묵시록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좀 더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한 이유는 진보적인 이슈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밖으로 내몰린 현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라는 면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인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 트럼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소외된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분노의 정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트럼프에게서 그들의 아바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도 없었고, 전통적인 도덕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세속의 인물인 트럼프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에 맞는 간명한 설명 하나가 가능하다. 그들은 트럼프를 묵시록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묵시록에 기초한 것이다. 세속화된 그의 묵시록에서 종교적인 언어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은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본주의 묵시록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세상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이해했고, 미국이라는 선과 테러라는 악의 두 축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싫어했다. 세상의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정치, 행동이 아닌 말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무질서와 테러의 위험 앞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지금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의 선언에서 진리와 예언을 읽은 사람은 의뢰로 많았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진단이고 묵시록의 예언이었다.  


    <Waiting for Armageddon>은 10년 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끝낼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약 5천만 명 정도라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비교적 편견 없이 그들의 신앙과 입장을 다룬 영화로, 묵시록의 신앙이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곧 파괴되어 없어질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정치화되어버린 현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선택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순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를 믿는다. 그 순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란을 겪게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림예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최후의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천년왕국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다. 이 묵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현실의 일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장르가 미국 영화의 대표적 장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록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천만 명이 되고, 그들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세한다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선과 악을 넘어선 니체적인 영웅이라면 무리가 있을까. 자신의 삶이 전통적인 종교의 선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악이란 개념도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윤리를 넘어서 묵시록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에 담을 쌓고자 했고, 불법채류자들에게 가혹해져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가는 한국은 한국의 문제이고 위대한 미국이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고, 완전히 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립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정치의 공식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암울한 공포의 디스토피아적인 비전만으로도 대통령이 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은 묵시록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영웅은 재림예수일 필요도 없고 적그리스도일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몰락을 상기시켜주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몰락의 사실을 자신의 말과 제스처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트럼프는 종교적일 필요도 없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신학의 본질은 이미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의 정신 속에 녹아져 있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는 21세기에 많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묵시록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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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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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작은 도시 공동체 이야기 4]



가치가 이끄는 삶


 

 

최규창[각주:1]

 


 

목적이 이끄는 삶


       제1세계의 유명한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이미 대단한 양적 성공을 거둔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 성공의 동력으로 제시한 이론은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근대적 합리성에 근거한 신앙성장 논리와 이를 따르는 교인들의 헌신, 그리고 현대 경영학적 전략과 전술을 잘 버무린 릭 워렌의 연작들은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목적이 이끄는 삶>에 와서는 마치 그 모든 성공의 비밀이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거룩한 목적’, 이것만큼 사람들의 욕망과 신앙을 불편하지 않게 조화시킨 말이 있을까. 우리의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지우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삶의 우선순위, 일상의 계획, 경제적 삶의 유지, 시간사용, 재정관리, 사람들과의 만남 등 그 모든 기저에는 ‘목적’이라는 엔진이 항상 구동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구는 둥글다’는 말처럼 의심되지 않는 명제였다.  

       그러나 목적은 항상 권력을 생산한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하고, 그러자면 의사결정 권한을 지닌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계급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데, 그것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그들간의 계약이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욕망에 의해 충동된 탈목적적 권력이 생겨나고 그 부산물들이 계급간의 억압을 생산해 내기 마련이다. 목적에 의해 도구적 권력이 정당화되는 대표적인 집단이 군대인데, 여기서는 합목적적 권력체계도 문제지만, 목적에서 벗어난 권력 남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권력의 작동이 억압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목적을 벗어난 지배가 생산되는 지점이다. 억압과 차별은 필수적으로 피억압자의 분노, 슬픔, 한, 울분을 낳게 되는데 그 대부분은 적정한 방법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자기멸시와 자기파괴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목적이 이끄는 사회에서는 억압되는 소수가 필수적으로 양산되고, 그들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 중에서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국가나 기업은 명확한 목표를 가진다. 국민의 보호, 시민의 정상적 삶의 영위,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것이 국가의 목표라면, 기업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업 내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웬만하면 참아낸다. 회사가 존립하고 이윤을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교회나 가정 같은 공동체는 (‘존재’가 아닌 ‘소유’의 의미에서) 목적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들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만약 이런 공동체들이 목적을 가지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권력과 계급의 생산이 다시 벌어지고 구성원들은 참된 안식의 공간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복음전도=하나님의 명령=우리의 삶의 이유'이라는 등식이 목표로 주어지면서, 총동원체제를 통한 권력구조의 공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것은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의미상 모순이다. 가정도 ‘자녀의 사회적 성공’, ‘경제적 풍요’라는 목적이 부여되면, 아버지의 경제자본과 어머니의 정보자본이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가부장제가 공고히 자리잡을 수 밖에 없고, 자녀는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한 채 목적을 위해 훈련되는 기계로 전락한다.


공간확장과 장소의미화


      역사적으로 남성성은 '공간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다. 이윤의 극대화, 무한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남성성의 산물이다.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총과 칼을 들고 가든, 상품을 들고 가든) 다른 사회, 국가를 침범하고, 그 경계에서 분쟁과 충돌을 일으켰다. 경계의 충돌은 항상 전쟁의 양상을 띄게 되는데, 그 결과 '삶은 곧 전쟁'이 되고, 경계 내부의 사회는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다른 사회와의 충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전체주의, 가부장제, 소수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언어체계가 상징계를 장악하고, 젠더의 모순이 일상의 기저에 편재하게 된 것은 다분히 사회진화론 또는 구조결정론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가정에서 남녀의 가사 분담을 주장하는 여성들도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성이 동등한 기회를 얻는 것은 반대한다. 기업에서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남편을 그 회사로 보내는 전업주부들에게는 위험요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내부의 체제는 구조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데 그 구조라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남성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협박범’이 된다.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해' 젠더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런 거대한 구조에 대한 반성은 전지구적 혁명과 같은 변혁을 겪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렵다. 결국 유럽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나서야 다른 관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다른 관점이란 바로 공간확장과 권력체계에 대한 의존성에 회의를 품는 것이었다. 서구에서 젠더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다. 외부의 커다란 위협이 최소화되는 시점에서는 국가 전체를 지켜야 하는 목표가 보다 작은 단위로 분절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논리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남성성의 특징과 달리, 여성성은 제한된 '장소의 의미화'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1971)은, 아내가 없는 아파트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사내가 자신의 집과 어떻게 불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내가 없이는 밥을 할줄도, 세탁기를 돌릴 줄도,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남성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정'이라는 ‘장소'에서는 소외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책상이 움직이고, 시계가 말을 걸고, 우호적이지 않은 사물이 자신을 공격하는 환상을 경험한다. 목적이 지배하는 외부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해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잘 수행하는 이들이, 가정이나 교회 같이 뚜렷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가정이나 교회도 목적이 지배하는 남성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가 ‘자녀에 대한 과잉 기대’, ‘사교육 시장’, ‘전도열풍’, ‘교회 건물짓기’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남성은 목적이 없는 공간에서 소외를 느끼고, 자신이 역차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탈냉전시대에 냉전론자들이 느끼는 소외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공공의 적이 불확실하고, 공간확장성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삶을 ‘존재’의 가치로 들여다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2008년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이런 면에서 ‘장소의 의미화’를 추구하는 여성적 운동성이(그것이 비록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폭력시위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새롭게 정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남성적 시위는 공간의 확장성, 다시 말해 차벽과 경찰벽을 뚫고 나가 청와대라는 '목표'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진격의 대상만이 전부다. 그런데 촛불시위는 ‘시청 광장’, ‘광화문 광장’이라는 장소를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그 곳에 촛불을 들고 앉아 몇 시간씩 구호를 외치고, 노래와 연설을 듣고 해산하는 것은 '장소의 시위’이지 진격의 시위는 아닌 것이다. 장소는 쉬는 곳이고, 대화하는 곳이지 달성해야 할 목표를 갖는 곳이 아니다. 진격은 점령하고 부수어야 할 대상을 목표로 하지만, 장소는 그 대상의 소멸과 동시에 그 너머의 '존재의 양식'을 바라 본다. 촛불시위대가 바라는 것은 대통령의 퇴진이 아니라(이것이 최종 목표라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적인 국가일 것이다. 그러자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의미화 과정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곱가지 가치

 

       공동체에 대한 연재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장소의 의미화’, ‘탈목적적 공동체’라는 가치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사회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글들을 보면 대부분 현상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 관철을 목표로 한다. 예컨데, 교회 내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위해 장로로 구성된 당회보다는 다양한 성도들의 그룹을 대변하는 운영위원회를 둔다거나, 교회의 회계장부를 일반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게 한다거나, 목사의 전횡을 막기 위해 최고 의결기구인 공동의회의 의장은 목사에게 맡기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예로 든 이런 제도적 개혁의 더 본질적인 이유는 ‘돈’과 ‘권력’에 대한 이 공동체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다. 그 가치(value)가 제대로 자리잡지 않으면 제도는 다른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지난 14년의 공동체생활과 두 번의 공동체 세우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가치가 우리속에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치는 어떤 리더가 ‘이렇게 하자’고 선언하거나, 모두 모여 ‘우리는 이런 공동체가 됩시다’라고 결정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겪어 만들어진 공동체라면 이미 어떤 가치가 그 속에 만들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형식적이든 암묵적이든 이미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거쳐 그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이고,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수 십년 된 교회나 공동체의 개혁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가치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올 해 아홉 가정으로 다시 시작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대략 일곱 가지로 부를 만한 가치가 내부에 심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가치들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존재양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단순성은 자연의 원리다. 생떽쥐베리가 말했듯이 완벽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단순해진 상태’를 말한다. 교회, 공동체, 조직이 너무 많은 것을 갖추려고 하면(이것은 대부분 소수의 욕망이다), 자체 유지 자체가 큰 목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구성원에서 무의미하고 무리한 헌신을 강요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일요일에 시행되는 행사, 노동, 프로그램의 70%는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억압은 특히 ‘죄책’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고질적이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일요일에는 예배와 먹기, 수다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제안되고 모두가 동의해야 가능하다. 공동체의 첫번째 필요는 안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포기하고 많은 일을 계획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현명하지 않다. 이것은 일요일에 모든 사역의 역량을 쏟도록 훈련받은 사역자들과의 오랜 협의와 화해가 필요한 과정이다. 안식의 날짜와 패턴이 일반 성도들과 다르게 세팅된 모순이 일요일의 과도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역은 평일로 옮겨져야 한다. 따라서 평일은 더 거룩해져야 하고, 일요일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두번째 가치는 ‘구조’에 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이즈, 의사결정 구조, 건물의 크기, 목회자의 위상, 재산 등은 공동체의 정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사이즈가 큰 교회에서 사회적 영성과 도덕적 민감성을 기대하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이즈, 밀도가 구성원 개인의 도덕성, 영성과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점은 심리학, 사회학에서 이미 오래전에 연구가 마무리된 사실이다. 그 구조 안에 있으면(짐바르도의 표현대로 ‘사과 상자가 썩어 있으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직장의 전문인들, 상식적인 중산층, 평균 이상의 양심을 가진 성도들로 구성된 강남의 대형교회가 교회 살림(작정헌금 포함)의 5배에 달하는 빚을 지고 초대형 건물을 짓는 의사결정 투표를 무기명으로 했는데도 95% 이상이 찬성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정 구조 안에 있으면 누구라도 자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공동체는 물리적으로 적정한 규모를 넘지 않아야 하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고 평등하게 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아홉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가 원하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예배를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결국 두 교회로 나눠서 교제하기로 결정하였다. 작은 규모로 나누고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적정한 구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아무리 많은 공동체라도 적정한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다.  

       ‘통합’은 단순성과 구조의 가치를 실현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주로 가정, 생업(직장), 교회와 그 주변부로 구성된다. 이 공간들이 모두 분열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현대인은 이 공간들을 왕래하는데만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고, 모든 영역을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생의 시기별로 '선택과 집중’의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30대에는 직장의 안정화, 40대에는 자녀의 학업을 중심으로 한 가정경제의 유지, 50대에는 사회적 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관계망의 구성(교회, 취미동호회)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각 시기마다 포기하고 잃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주거가 통합되면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가 그 안에서 생겨난다. 기존의 교회에서는 주거까지 통합하면서 구성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라이프스타일이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50대 이후 직장에서 은퇴하고 생업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함께 계획할 수 있는데, 이것이 생업의 통합이다. 극단적으로는 함께 귀농하거나 농촌 노동공동체를 계획할 수도 있지만 도시에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함께 거주하는 가운데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실제적인 준비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도시는 삶을 점차 세분화시키고 분절시키는 양식을 가지는데, 이를 다시 단순화하고 통합해 가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고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주거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를 통합한 형태다. 그 정도만 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매우 많아진다. 통합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으므로, 경험상 돌아보건대, 30대에는 주거의 통합, 40대에는 교회의 통합, 50대 이후에는 생업의 통합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연재글에서 설명했듯이, 공동체가 항상 시대성, 역사성을 가지고 새롭게 구성된다는 말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도 공동체의 이해와 실천이 상이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지나가면 그 사이에 수 많은 용어가 생성되고 유행이 지나가며 사건과 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간의 관계와 역동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고, 정치적 상황과 시대정신도 새롭게 변화한다. 공동체는 자기 시대의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형태, 존재 방식이 계속 '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한 공동체가 한 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단(單)세대 교회론'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자녀를 자녀의 공동체로 떠나 보내고, 부모는 부모의 공동체에 머물게 하면서, 공동체가 공동체를 돌보는 형태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두 번째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기존과 달리 새로운 멤버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진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 진화는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직면하는 이슈와 관심사가 달라진다는 측면과, 새로운 멤버들의 참여로 공동체의 특징과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을 모두 포함한다.

       일상의 삶을 중심에 놓는 것 역시 공동체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 모든 훈련 프로그램을 하루에 몰아 넣고, 일요일+교회건물+목사 중심으로 삶과 신앙을 이분화시키는 형태로 유지되어온 한국 기독교는, 일상의 삶에서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을 별다른 고민없이 수용해 왔다. 그 결과, 특정하게 구별된 날, 절기, 사람, 장소만을 거룩하게 만들고, 나머지는 세속적 영역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일상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들(유동성, 추상성, 가변성, 운동성, 실존성)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해, 한 사회의 발전과정을 통해 꾸준히 진화해가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의 개념도 확실하지 않던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이 오늘날에도 절대 진리, 문자적 진리로 자리잡으면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생략한 채 변경불가능한 고정된 진리로 탈바꿈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온 현실은 사실 삶의 이원화 외에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신학이 일상을 붙잡고 지탱해야 한다는 말과 초역사적 신학의 견고함은 양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는 것은 자본의 견고한 지배 하에 일상의 위대함을 잃어버리고 매일 반복되는 비참함과 지루함을 인생이라 여기고 살게 된 현실에서, 그나마 진정한 삶의 돌파구를 꿈꾸는 시도들이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보편적 기준이나 진리는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데 반해, 피지배되는 대상 즉 우리의 일상은 실재하며 물질성과 관계성을 지닌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관념으로서의 진리는 이전 시대를 대표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으며 우리가 아닌 이전 타인들의 일상을 표상한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 관념은 몸과 물질성을 지닌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공통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다(네그리, 하트, 아감벤, 블랑쇼, 바디우, 르페브르). 공동체는 일상과 비일상이 만나는 곳이고, 일상이 다시 복구되고 의미를 회복하는 공간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는 일상의 한 가운데 있어야하며, 먼곳에서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일상의 사건들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해석을 개입시켜 일상을 비일상화(신성화)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비일상은 일상이 그 한계에 이를 때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목사도 한 명의 시민이며, 교회도 사회의 한 기관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주거와 가정의 통합을 통해 공동체 역시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일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고, 그 지배가 시작된 시점을 19세기 경쟁자본주의의 태동부터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이 때부터는 대량생산된 상품의 세계가 열리게 되며, 개인과 공동체의 고유한 양식(style)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작품'이 없어지고, 축제가 사라지고, 저항이나 주체적 혁명 역시 드물어졌다. 공중의 권세(엡2:2)는 일상을 장악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예수의 인생은 결국 그러한 일상의 비루함에 비일상적 권위를 가져와 잔치를 벌이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 임하는 것이다(눅11:20). 일상의 비참함 속에서 이익을 취하는 교회는 결국 시대의 지배적 권력 아래서 '유기적 지식인'(그람시)으로 생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벌여야 할 잔치는 무엇일까.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일상을 지탱하고 변화시키기는 커녕 일상을 탈(脫)일상화시키는 일부터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거창한 수식어들을 동원해 스스로를 구별하고 타자를 배제하면서 세상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분명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목표 보다는 과정으로,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으로, 외재적이기 보다는 내재적으로, 대립적이기(세상은 악, 교회는 선) 보다는 변증법적으로, 양보다는 깊이로, 사람 중심이기 보다는 모든 피조 세계 중심으로, 단일하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섯번째로) '해석'이다. 한국 기독교는 성서 해석의 권한을 안수받은 소수의 설교자와 신학자들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삶의 결합인 설교 역시 이들이 몫으로만 남아 있다. 목사의 설교에 대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기껏해야 약간의 인상비평 수준을 넘지 못하며, 다른 해석은 금지된다. 해석이 금지된 공동체는 각 주체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고, 다시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해석'의 차이로 수 많은 종교 전쟁과 종교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해석은 군중(성도)를 결집시킬 수 있었고, 그 군중을 배경으로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을 압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폴 비릴리오의 말대로, 국가가 종교와 분리되고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무기의 발달로 소수의 군대가 군중을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막강한 절대국가가 탄생한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이 시기에 와서야 해석의 차이는 학살을 면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오늘날도 '경전'으로 취급되는 성서의 해석독점은 교회 내에서 수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 나는 예전에 출석했던 몇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설교자들의 다양화를 주장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주장하는 나에게는 몇 번의 설교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것은 내가 바라던 해석의 보편적 자유가 아니었다. 토론이 아닌 일방향식 설교가 보편화된 오늘날 예배 형식에서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가 아닌 사람이 설교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 내의 큰 위협으로 간주된다. 현재 우리 거주 공동체 교회에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그대신 설교를 마치고 그에 대해 설교시간의 두 배 가량의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해석하고 토론한다. 그러다보면 다양한 관점을 만날 수 있고, 성서의 텍스트가 수용자 중심으로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일상의 삶에 적용하기에 무리 없는 범주로 해석이 모아지는것을 느낀다. 신기한 것은 예전의 일방향식 예배에서는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던 사람들이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예배시간을 별다른 무리없이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도 점점 대화에 대등하게 참여하게 되었고, 심지어 부모가 아이의 고민을 공동 예배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자기의 해석이 공유되고 피드백 되는 경험은 연령을 초월하여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우정은 공동체의 중요한 존재양식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은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모든 인류,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정작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소질이 없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아가페보다도 필레오(우정)가 더욱 어려운 사랑의 형태가 된다. 리젠트 칼리지의 설립자인 제임스 휴스턴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정의했다. 증여나 환대가 여전히 증여자와 수혜자라는 계급성, 부채의식을 제거할 수 없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정의 가치야말로 현대사회가 회복해야할 가장 의미있는 돌파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김현정의 말대로 우정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고, 우리 역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수많은 타자들 앞에 서 있다.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동질집단 내에서 발현되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자기확인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그것을 위협하는 경계를 만날 때 흔들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우정을 통해 다시 진화한다. 놀랍게도 나의 경험으로는 이런 방식의 우정이 생존하기 힘든 가장 어려운 환경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사회보다 더 많은 가면과 위장을 갖추어야 하는 공간이고, 자신을 드러내기 힘든 장소다. 특히 목사와 교사들(리더들)이 가지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설교와 교육의 방식을 통해 종교담론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을 열어보임으로써 다름을 드러내고 인정하면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대부분 배제된다. 나는 은퇴한 후 적정한 우정의 자리를 찾지 못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목사들을 자주 보았다. 그들에게는 '제자들', '양떼'라고 부르는 이들은 많이 있으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희귀해진 것이다. 공동체를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자'도 좋고 '성직'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친구'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한복음15:14). 친구란 계급관계가 상정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다. 스승-제자, 상사-부하, 부모-자식, 선배-후배 관계 조차도 서열과 계급의 지배를 받는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는 언제 만나도 친구고 동등하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말이다. 그 관계는 그저 서로의 존재로 만족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부모도 가정에서 목적을 제거하고 자식의 친구로 존재해야 한다.

 

인과론과 목적론을 넘어선 일상

 

       이러한 일곱가지의 가치(단순, 구조, 통합, 진화, 일상, 해석, 우정)는 우리 공동체가 오랜 기간동안 교회, 가정, 사회생활을 통해 갈구하던 삶의 양식들을 언어화한 것이다. 가치가 구현되면 현상적인 것은 그 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실 여러 교회를 다녀본 나로서도 이 중 두 가지 이상을 지닌 교회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차라리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가정-교회-생업-활동(사역)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럴 경우 전체 비용은 감소하고 효과와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통합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생업의 통합과, 우리와 유사한 공동체와의 연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뚜렷한 목적이나 권력관계가 상정되지 않는 작은 공동체들의 연대가 앞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는 13명의 사망자를 낸 충격적인 고교생 총기난사사건의 원인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총기를 쉽게 소유할 수 있도록 정부와 시민을 설득하는 '군산복합체'의 음모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원인과 주범들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고 관객들 역시 이에 설득당한다. 동일한 사건을 묘사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아무 목적도, 일관성도 없이 희생된 12명 학생과 1명 교사의 사고당일 일상이 지루하게 묘사된다. 그런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당혹스러운 무작위 총기 발사 장면이 갑자기 등장한다. 산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외에, 그들의 잘못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은 그 날 희생자들이 친구들과 대화하고,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고, 다른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 일체의 인과론적 설명을 거부한다.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제의 원인이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되는 권력의 부산물과 그것의 재생산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공동체는 부유하게 된다. 사회는 목적을 가지더라도 내부의 공동체들은 탈목적론적인 가치를 보유해야 한다.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인과론은 결국 목적론과 연결된다. 목적을 향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 인과성으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가치들은 우리의 일상이 인과론도, 목적론도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에 선 이 공동체는, 아마도 긴 매너리즘을 거쳐 다시 새로운 목적에 사로잡히고, 서로 분열되기 시작할 때, 다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이 공동체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50대에 접어들 것이고, 이 시대, 이 장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와 직면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을 온통 기존 교회에 바치느라 분주한 우리 선배들의 무관심 탓에, 우리에게는 '가보지 않은 길'이겠지만, 우리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다. 목적없는 공동체가 가능할까. 리더 없는 리더십이 가능할까. 리더십 없는 공동체가 가능할까. 우리의 실험은 계속된다.


ⓒ 웹진 <제3시대>

 

  1.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 곳에 오래 매여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 수치가 세상변혁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한 부담과 지나친 민감함에서 나온 혼란이었음을 깨달은 후에 나는 비로소 자연스럽게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톱니바퀴로부터 일탈하여 나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소박한 대안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십여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친 후 시작된 법인사업과 생활대안운동은 아직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과정 중에 있지만, 그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해가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웹진을 통해 앞으로 4차례에 걸쳐 그 가치생성의 과정을 일부 나눌 예정이다. (주) 포리토리아 대표,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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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4)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4) 남한 사회의 내부합의의 동요와 붕괴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3. 남한 사회에서의 ‘무능력자’와 ‘무자격자’ 형성의 구조

     (1) 민주화 시대 ‘시민’의 출현

     (2) 남한 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변화

     (3) ‘시민’ 내부의 사회적 배제와, ‘무능력자’와 ‘무자격자’의 낙인이 찍힌 ‘비시민’의 출현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의 야당은 반공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고, 박정희 정부 때부터 등장한 민중운동은 반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포용했던 반면에,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거래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인 자유주의적 ‘시민’은,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야당과 민중운동 양자 모두에 대해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한 ‘시민’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사회의 규칙으로 수용하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과도한 반공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기존의 사회운동, 특히 민중운동에도, 자신들에게 과도한 도덕적 부담을 강요한다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각주:1] 그리하여,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상식’을 아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표준의 담지자임을 자처했다.[각주:2] 이 ‘시민’들은, 정부가 자신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불순한 것으로 비난했을 때, 즉 자신들의 ‘상식’이 정부에게 거부당했을 때, 촛불 시위나 인터넷 청원 등의 사회적 의례를 개발하고 실행함으로써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해 냈는데, 김진호는 이런 의례들을 ‘한국적 시민 종교’[각주:3]라고 칭했다. ‘시민’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은 이러한 ‘한국적 시민 종교’를 개발해 내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했다. 자유주의적 입장의 ‘시민’들에 의해 이러한 ‘시민 종교’가 개발된 이후, 보수주의적 입장의 시민들도 저런 ‘시민 종교’를 모방하여, 친미 시위를 개최하거나 카톡을 통해 루머를 퍼뜨리는 등의 의례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1) '무자격자' 창출 현상


   그런데 이러한 ‘시민 종교’ 의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무자격자’로 치부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광범위한 대중을 포괄하는 인터넷에서의 의례가 반복되는 중에, 이명박이나 박근혜 등의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일본식 이름으로 칭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그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외부인”, 즉 남한 사회 바깥의 인간으로서 남한 사회에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으로 간주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보수주의적 정당과 언론에 대한 자신들의 과거 조사를 통해 그들의 과거 식민권력에 대한 협력 사실을 찾아 내고 이에 근거해 그 정당과 언론들을 “친일파”로 칭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적 ‘시민’과 정당들은 상대편을 “친북주의자”로 칭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심지어는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호칭을 쓰는 경우도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을 ‘적’으로 간주해 증오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종북주의자’라고 욕하는 자유주의적 ‘시민’들 역시, 북한을 ‘이상한 타자’(식민주의적 뉘앙스까지 담긴)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 양쪽 모두 상대편을 ‘친일’/’친북’으로 딱지붙임으로써, 상대편을 ‘외부인’, 즉 한국에 살 자격이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윤형은 남한의 사회구조가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각주:4] 이는 남한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 모두,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상대편을 ‘북한인’과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런 ‘외부인’ 창출 현상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주의적 시민들이 이전부터 그런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에게도 그러한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적대감의 주된 명분은 그들이 ‘불법체류’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민’들만 받아야 하는 복지혜택을 일정하게 받는다(혹은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경우에 따라서 결혼 이주자들에게까지 확대되는데, 이자스민의 경우가 한 예이다.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자로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이자스민은 그의 당적과 전 국적으로 인해 비난받았다. 그가 이주노동자들의 ‘불법’체류 여부에 상관없이 그 자녀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주권과 복지를 보장하고자 하는 법안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이 법안이 ‘불법’ 이주노동자들이 합법 신분을 얻는 데 악용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보수주의적 시민들도, 그의 당적에 대한 비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비난을 그에게 퍼부은 것은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은, 그들의 상대편이나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 등을 남한 사회의 ‘합법적’ 주체로서의 ‘국민’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져서는 안 되는 ‘무자격자’로 간주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남한 사회의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해 내는 기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자격자’ 창출 현상은 젠더편향적이기도 한데, 이를 드러내는 현상으로는, 여성들이 특히 병역 문제로 인해 남성들(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양쪽 모두)에게 동등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 


   2) '무능력자' 창출 현상


   남한 사회의 직업 안정성이 약화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노동시장의 경쟁이 극심해졌다. 그에 따라 남한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직업을 가질 만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대한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었고, 특히 생계 전선에 막 뛰어든 청년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중해졌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상당히 힘들지만, 그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힘든 것은 자신들의 능력부족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능력을 푸대접하는 사회에 저항하기보다는 더 많은 능력을 갖추는 데 집착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리하여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직난을 자신들의 능력부족으로 돌리게 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자신들이 불의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즉, 어떤 이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고용이나 노동 조건 등을 요구할 때, 많은 남한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할 능력이나 자격도 안 되는 주제에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개선이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할 때, 많은 청년들은 그들은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며, 만약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반응한다.[각주:5]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장애인, 노숙자, 실업자, 노동빈곤자 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의 ‘능력 부족’을 명분삼아 정당화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능력 부족자’로 간주되는 이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적 상태는 점점 더 많이 중첩된다. 필자는 이러한 중첩을 “무능력자”의 창출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정된 고용의 감소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변화에 기인한 경제적 양극화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더 많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안정된 직업을 얻기는 상당히 어려우므로, 그들이 “무능력자”라는 딱지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무능력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효율성을 성취할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되므로,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없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게 된다.[각주:6] 그러므로, 이러한 “무능력자”와 “잉여인간”의 딱지는, 흔한 생각대로 장애인이나 실업자 같은 소수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경제에 깊게 연루된 한국 사회의 누구에게라도 붙을 수 있는 딱지임을 알 수 있다. 


   3) "비시민"들의 공통점


   “무자격자”와 “무능력자”의 공통점은 둘 다 “시민”들에 의해 배제당하는 존재라는 점이며, 이 때 그 배제가 “외부인”이나 “능력 부족” 등의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범주를 “시민”에 의해 배제되는 “비시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합치고자 한다. 이 때, 앞에서 “무능력자”를 다루면서 언급했듯, “비시민” 현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무자격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무자격자”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어떤 이가 “비시민”으로 간주될 때, 그가 어떤 일을 겪는지를 살펴 보는 데에는 소수자들의 고통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참조가 될 수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각주:7] 


  • 소수자의 고통은 사회적 문제로 인정된다. 

  • 그러나 그런 인정이 존재한다고 해서, 소수자들에 대한 불법적이고, 위험하며, 무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한 배제의 정당성이 의문에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 심지어 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일부 시민들에게 그러한 배제의 정당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므로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 역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을 확고하게 정당하고 있다. 

 


   4) 남한 사회와 민중신학에 대한 탈식민적 고찰의 실마리인 "비시민"


   한국 민중신학의 독특한 언명 중 하나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서남동에 따르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이유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등의 진면목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의 고통 앞에서 폭로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구원받을 지 못 받을 지가 바로 그 고통 앞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각주:8] 서남동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원이란 오직 고난받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걸림돌이 되어, 그 걸림돌에 걸린 사람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구원의 길을 탐색하는 핵심 통로는 고난받는 이들, ‘민중’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각주:9] 

   앞에서 논의했던 ‘비시민’은 민중신학이 증언하고자 하는 ‘강도 만난 사람’, 곧 ‘민중’의 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시민’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이들이 ‘비시민’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광범위하게 공유한다는 점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비시민’으로 규정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은 배제를 폭로하고 그 배제의 명분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일이 되고, 거기에서부터 배제의 시스템이 깨지기 시작한다. 즉, 증언은 ‘비시민’을 배제하는 바탕 위에 서 있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의 시작인 것이다.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이 “사회를 보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라”라면, ‘비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은 “사람을 보호하고 사회를 폭로하라”이다.[각주:10] 

   ‘비시민’의 배제에 동참하는 ‘시민’들은, 그 배제를 정당화하는 근거, 특히 내셔널리즘이나 자본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미국/일본이나 북한을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주된 근거의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세계화된 경제에 참여하려는 ‘제국의 눈’을 갖고 있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내면화한 자본주의는 ‘무능력자’의 창출과 배제에 주된 근거가 된다. 따라서, 남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배제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배제 안에 뿌리박혀 있는 남한 사람들의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적 욕망 양쪽을 모두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식민 사상과 운동은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을 모두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각주:11] 천 꽝싱의 주장은 남한 사회의 현실을 분석, 비판하는 데 좋은 참조점이 된다. 특히, 천 꽝싱이 제안하는 ‘비판적 혼합’과 ‘타자 되기’의 방법론, 즉 식민화를 겪은 주체들끼리의 상호 동일시를 통해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론은 민중신학에도 좋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각주:12]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비시민’은 남한 사회 내의 ‘강도 만난 사람’들, 즉 민중이며, 따라서 구원의 시금석이 된다. 따라서 남한 상황에서의 민중신학의 주 임무는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남한 사회의 타자인 ‘비시민’의 배제의 현실을 증언함으로써 그 배제를 거부하고 그 타자와 연대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비판적 혼합’의 방법론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4. 결론


   노암 촘스키의 한 강연에서 어느 MIT 학생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바람직한 발전의 모델을 이룬 나라가 현실 세계 중 어디라고 보십니까?” 촘스키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한국(South Korea)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딛고 일어나서,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동시에 독재 정권에 항거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해 냈습니다.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와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할 정도로 첨단 기술이 온 국민들에게 골고루 퍼졌고, 2002년에는 네티즌의 힘으로 개혁적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정도로 풀뿌리민주주의가 발전했습니다.”[각주:13] 

   이 에피소드에 촘스키의 반응이라고 소개된 내용에서는, 남한 사회의 자유주의적 ‘시민’의 관점인, 탈식민국가로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소망하는 나라로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소망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비전 중 하나로 공식화되어 있기도 하다. 민주화 역사 속의 많은 사건들이 현재 공식적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민소득 4만 달러로의 성장을 위한 경제적 기반 구축”이 공식적인 경제적 비전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마리 토끼 쫓기는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비시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비시민’의 출현은, ‘비시민’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도 ‘두 마리 토끼 쫓기’가 가능한 것인가라는 비판적 의문의 실마리가 된다. ‘비시민’의 존재가, 그들의 배제에 근거하여 남한 사회의 식민 이후의 경제적/사회적 구조가 유지되는 주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한, ‘비시민’은 남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실존의 가장 심층을 건드리는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비시민’에 대한 배제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실존의 급진적 변화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며, 이런 의미에서 ‘비시민’은 신학적 주제가 된다. 민중신학이 타자로서의 ‘비시민’의 이슈에 신학적으로 응답한다면, 남한의 타자로서의 북한이라는 이슈와, ‘시민’에게 내면화된 제국주의적 욕망이라는 이슈와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민중신학의 ‘비시민’ 증언 작업은 필연적으로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동시 추구라는 탈식민의 관점과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한윤형. 안티조선운동사(서울: 텍스트, 2010), 249~250 [본문으로]
  2. 위의 책, 247 [본문으로]
  3.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4. 한윤형 “종북과 극단적 민족주의의 차이는?”, 프레시안 2015년 3월 12일 게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610 [본문으로]
  5.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고양: 개마고원, 2013). 19 [본문으로]
  6. 최태섭. 잉여사회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3), 82~84 [본문으로]
  7. 졸고,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이다”-민중신학적 관점의 주체성 탐구”, 김진호/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서울: 삼인, 2013). 387 [본문으로]
  8.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07 [본문으로]
  9. Kim, Jin-Ho. "The Hermeneutics of Ahn Byung-Mu."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s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s, ed. Yung Suk Kim and Jin-Ho Kim.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3, 22 [본문으로]
  10.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1). 192~193 [본문으로]
  11. 천꽝싱, "세계화와 탈제국,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이정훈, 박상수 편, 동아시아, 인식지평과 실천공간(서울: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2010), 89 [본문으로]
  12. ______, 제국의 눈(창비: 2003), 153 [본문으로]
  13. 이원재,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서울: 원앤원북스, 2005), 177~1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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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여덟번째[각주:1]


돈과 신앙, '착한 동거'의 논리를 찾아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시대착오


    국가의 발전과 대형교회로의 성장, 그리고 보수주의, 이 세 가지 범주가 서로를 규정하며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1990년 어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국가는 저성장 상황에 놓였고, 교회는 정체 혹은 역성장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국가는 보수와 진보의 각축장이 되었고, 교회의 보수주의는 분화된 양상을 띠었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웰빙-우파’는 바로 이 분화된 보수주의, 그중 가장 뚜렷한 양상의 하나로 등장했다. ‘주권교인의 등장’이 이러한 분화를 읽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떠돌아다니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형교회가 된 두 개의 교회,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1990년대에 가장 주목받던 성장모델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교회의 캐릭터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2천 년대, 보수대연합의 시대에 교회는 단일대오로 뭉친 보수주의 동맹의 탄탄한 일원이 되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보수든 진보든 내부 개혁이 필요한 상황인데, 진영 갈등이 모든 것을 먹어버리는 정국이 대두했다. 그나마 진보는 내적으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며 성찰의 시간을 맞고 있었지만, 단일대오처럼 보이는 견고한 정치연합으로 엮인 보수주의는 권력연합으로서는 성공했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퇴화했다. 해서 이러한 권력연합이 집권하는 시대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지 않고는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시대가 되어야 했다.  

 

경품전도

 

   2010년 한 종교계 일간지는 최근 교회에서 ‘경품’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국민일보〉 2010.10.13.) 그 이후 몇 년 동안 개신교계의 여러 매체들도 같은 논조의 기사들을 쏟아냈고, 개신교계 원로들의 신년메시지나 기념강연 등에서도 배금주의라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말들이 잇따랐다.  

   교회의 경품의 사례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한 대형교회는 새 신자에게 스테인레스로 된 고급 냄비 세트를 선물할 것이고 교회를 계속 출석하면 성경책과 여행가방을 제공한다는 전단지를 널리 뿌렸다. 또 다른 대형교회는 교회 출석 알바 모집 공고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세 시간 근무, 2만원, 주차비 별도지급’이라는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말이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교회를 나오면 소개팅을 시켜줄 것이라는 전도지를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남성용과 여성용 전도지를 따로 만들어 남성용에는 여성교인의 사진과 신상이, 여성용에는 남성들의 사진과 신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전도왕에게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놓은교회, 성경 다독왕에게 해외여행 상품권을 내놓은 교회 등도 있었다. 

 

 

 

   2010년이라는 시간, 그 무렵은 이러한 배금주의가 교회에 만연한 현상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시기다. 알다시피 2002년에 광고 카피로 처음 등장한 이후 거의 일상어가 되다시피 한 ‘부자 되세요’라는 문구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IMF관리체제로부터 졸업했다고, 정부 당국과 언론들이 앞다투어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그 무렵이다. 이후 대부분의 TV 드라마, 오락프로, 서적 등, 무수한 매체들은 부자를 훔쳐보고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의 망상에 빠져들고픈 대중의 욕구를 한껏 증폭시켰다. 2007년 대선은 그러한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입증해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중은 그가 부패한 자본가이자 정치가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성공한 기업가이고 정치인이라는 걸 주목했다. 무수한 대중은 자기들도, 바로 그이처럼, 과정이야 어떻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감을 그를 통해 충족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그것을 국민들에게 선물할 메시아처럼 보였다.

    교회는 전례 없는 열광적 지지를 그에게 쏟아 부었다. ‘장로대통령을 만들자’라는 슬로건 속에는 기독교국가에 대한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들이 추구한 기독교국가라는 상상력은, 더 이상 IMF 재앙 같은 고난의 시대가 없는, 더욱 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와 겹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은 그가 이끄는 정권의 탄생으로 실현된 듯했다. 무수한 기독교 대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당시 위축되고 있던 교세에 대한 반전의 기대와 겹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한국개신교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팽창주의에 몰두했다. 교단마다 ‘몇만(천)교회 달성’ 같은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사후보자들이 목사가 되려면 (기성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 어간에 교회 설립 수가 크게 늘었다. 동시에 3년 이내에 폐업하는 교회 또한 그만큼 늘었다. 그것은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이에게 폐업하는 교회와 시설, 그리고 교인을 끼워 파는 이상한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것을 ‘공간비용+알파(일종의 권리금)’의 가격으로 중계하는 블랙마켓이 형성되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강도 높은 전도 캠페인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른바 경품전도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2010년, 그 어간은 그런 시기였다.  

 

청부론

 

    2천 년대 초, 한국개신교계를 강타한 용어가 있다. ‘청부론’이라는 개념어다. 2001년 교회를 설립한 김동호 목사가 그 무렵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 ‘청부론’을 제기하였고, 그 직후 ‘청부론이냐 청빈론이냐’를 둘러싸고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개념에 대해 교단의 통제를 받고 있던 신학대학들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반면, 교회 사역사들, 특히 젊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청부론이란, 말 그대로, 신으로부터 풍요를 위탁받은 것에 관한 주장이다. 과거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도 형식에선 유사한 틀이 있다. 하느님이 영적 구원을 베푼다는 것은 동시에 건강과 물질의 구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1+1’ 패키지로 모둠 선사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요컨대 세속적 풍요와 극적인 거리를 두면서 신앙적 다이내미즘을 추구했던 미국의 근본주의 신앙운동과는 달리, 조용기 류의 은사주의 운동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놓인 심대한 거리감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앙적 다이내미즘을 이끌어냈다. 초기 조용기(1950~60년대)의 경우는 서울 은평구 지역의 달동네에 살고 있던, 지질이 가난하고 심각한 건강의 위기에 놓여 있던 이들에게 영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축복을 베푸는 복음이 중심이었던 반면, 미국의 번영신학과 결합한 중후기 조용기(1970년대 이후)는 모든 대중에게 주는 영적이자 세속적인 축복의 메시지로 그 함의를 변형시켰다.  

    그런데 김동호의 청부론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거리를 해체하였다는 점에서는 조용기와 일견 유사성이 있지만, 그 맥락은 전혀 다르다. 초기 조용기의 대중은 모든 것을 상실한 이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의 은사주의의 핵심은 말 그대로 신이 준 물적 선물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중후기 조용기에게 있어 은사는, 그 대상이 ‘결핍된 대중’이 아니라 ‘욕구과잉의 대중’이라는 점에서, 세속적 선물에 대한 탐욕을 주체 못하는 배금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김동호에게 있어 청부론은, 선물에 대한 욕망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의 관리에 초점이 있다는 점에서, 조용기의 은사론과는 달리, 그것은 일종의 ‘윤리학’이다.  

    그의 윤리학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돈 자체를 악마화했던 근본주의적 신앙(그 한 예로, 미국 솔트레이트시티의 몰몬계 근본주의자들은 돈을 〈요한계시록〉의 666의 현대판 실체로서 해석하곤 했다. 그밖에도 이런 해석은 근본주의자들의 흔한 논리다.)과는 달리, 돈 자체를 중립적인 것, 쓰임에 따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도구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하여 그의 윤리학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버는 방식과 쓰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는 깨끗한 자본가를 롤모델로 하는 신앙윤리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이것은 유산을 자손에게 상속하지 않는, 기부의 메시지로 이어진다.(이러한 그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미화하는 담론에 지니자 않다는 반론을 낳는다. ‘청빈론’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부정축재나 세습 등의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부유층의 폐습들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게 되며, 그러한 개신교 사회운동 단체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교회 선교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교회적 웰빙운동으로서의 청부론

    한국전쟁 이후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했던,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논리였던 세대가 있었다. 그들에겐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이들의 자녀들의 시대는 달랐다. 그들 중에는 처음부터 중상위계층으로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소비자본주의를 체험했고, 그렇게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한 이들이다. 그들은 1990년대 말, IMF 관리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가장 탐욕스런 자본주의 질서의 화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중 일부는 그러한 욕구의 문화를 불편해하면서 성찰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때 후자, 특히 개신교도들이 바로 청부론의 주요 소비자들이었다.  

    당시 사회에선 웰빙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깨끗하고 건강한 소비를 지향하는 문화현상인데, 중요한 것은 이 웰빙의 삶은 어느 정도의 초과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웰빙 현상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계층은 중상위계층이다. 금숟가락 태생이면서 소비자본주의 문화를 체험하였으나, 그 게걸스런 탐욕의 메커니즘을 성찰하려 했던 이들이 바로 웰빙의 주요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이 계층이 집중된 곳에 웰빙 시장 형성이 용이했다.  

    웰빙은 먹거리 운동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청부론은 일종의 교회적 웰빙운동의 한 의제였다고 할 수 있다.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세뇌되어 버린 교회들에 마뜩치 않아 했던 주권교인들이, 그들의 일부가 교회를 떠나 김동호 목사가 시무하는 높은뜻숭의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교회는 2천 년대에, 자본주의적 욕구의 문화에 한껏 젖어 있던 교회들 사이에서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새로운 캐릭터로서 청부론을 제시했고, 많은 주권교인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교회의 배금주의 풍조가 최고조에 이르던 2010년 어간 새로운 캐릭터 대형교회로 탄생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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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심범섭*



   몇 주 전 11월 5일 토요일 박근혜 퇴진을 위한 집회(“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하려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아직 오후 4시 전이라 광장에서는 이 집회에 앞서 백남기 선생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중고등학생 약500명이 독자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중고생혁명지도부’라는 조직이 주최한 집회로 보였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원래 행진을 허락받은 한계 지점에서 길을 막아 선 경찰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한참을 대치하다가 결국 해산했고, 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이제 광장에서 진행되는 일반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을 눈물이 솟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의 맑은 한국어를 분노하게 했나 마음속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 열린 큰 일반 집회에서는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 없었다는 점이다. 곧, 이날 짧은 거리나마 청와대 쪽으로 행진한 단체는 이들 중고등학생들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사정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참여자들이 가장 과격한 행진을 실행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격동하는 최순실 정국에서 중고등학생들은 자기들만의 집회를 열거나, 일반 집회에 참여하거나, 일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학생 집회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한 신문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의사표현을 훼방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철거하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반대한 경우도 있었고, 공적인 장소에서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을 교칙상 징계하겠다고 언급한 경우도 있었고, 촛불집회 등에 참석한 학생들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자보 뜯고, 막고, 사찰까지 . . . 탄압 받는 중고생들 ‘시국선언’, 경향신문, 2016년 11월 9일.) 이 가운데 가장 내 시선을 끈 내용은 대구의 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와룡고등학교 학생회는 지난 8일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시국선언문 대자보를 게시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학교장에게 알렸지만 거부당했다. 학교 측은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기사)  


    학교 측이 제시한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표면적인 이유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맥락을 제쳐놓고 그저 이 이유의 표면적인 표현만을 읽는다해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 나는 동의할 수 없을까에 대한 생각은 우리 어른들이 다음 세대(아직 어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소박한 답을 내놓고자 한다. 


1


    첫번째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강릉군 상산면 관음리에 사는 최영택의 집에는 출가했던 딸이 첫 아이를 해산하려 친정에 와 있었다. 딸은 아들을 낳았고 환갑이 지나 외할아버지가 된 최영택은 아기를 보러 들어갔다. 이때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곧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었고 갓난 아이에게는 큰절을 올렸다. 외손자에게 이런 예를 다한 것은 “새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때 외할아버지에게 큰절을 받은 아기가 우리 아버지이다. 곧 최영택이라는 특이한 인물은 우리 아버지의 외조부였다.) 최영택 어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분에게는 갓태어난 아기의 새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단지 외손자라는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태어남의 신비, 새로운 사람을 낳는 인간의 힘, 새로운 생명이 함축하는 가능성과 희망, 새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 등을 구현하는 사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창하게 말해서, 최영택 어른이 방금 태어난 외손자에게 큰절을 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에게 절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일화를 빌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새로운 생명, 어린 생명에 대한 경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아기든,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인 이상 우리 어른들과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인 생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새로움과 이에 동반하는 더 큰 가능성에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경의는 창조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의는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한 필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면 당연히 어린 사람의 새로움에 대해 경의를 품는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면 어린 생명도 경외하라.’ 


2


    둘째,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내 아이를 키우지도 않고 일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2014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일산 동구 장항동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라페스타라는 상업 구역에서 중고등 학생을 많이 보게 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늘 서로에게 아무 상관없는 남이었다. 서로 말 한 마디 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길거리에서 많이 마주치는 중고등 학생들이 이제 달리 보였다. ‘저런 애들이 죽은 거야! 저 생떼 같은 애들이 죽은 거야!’ 저런 애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어린 사람들을 위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면에서 어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직 어른 아닌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미숙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사회 전반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만18세가 되어야만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고, 2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극장에서 성인영화를 볼 수 있다. 또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고, 1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인터넷 성인영화를 볼 수 있고, 자기 명의로 재산 등록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혀 그들을 통제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아직 20년 가까이 살지 않은 사람들을 미숙하게 간주하는 것에는 경험적으로 자명한 이런저런 근거가 있다. 이 경험적 근거는 많은 경우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 공통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더더욱 자연스럽게 ‘미성년자’라는 범주 설정을 수용하게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성장하는 방식이 이러한 공통점의 이유가 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사람 뇌의 전전두엽 피질은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 판단을 내리고 충동을 억제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능, 즉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구별 짓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물리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약 25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부위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늦게 성장이 완료된다고 하므로 사실 사람은 25세쯤 되어야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열 아홉살된 사람들이 스물 여섯 살 된 사람들보다 대체적으로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생물학적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책임의식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대목을 나름대로 해석해 이 생각과 연결시키려 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첫째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27-28, 1:31-2:3) 


    이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였고, 하나님은 그 다음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 이야기가 구축하는 세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 맞은 날은 안식일이었다. 곧, 비록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일한 것도 없이 우선 안식일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먼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한 흥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간 존재의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각 사람과 세대의 경험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새로이 태어난 세대는 안식일을 먼저 경험해야 하며,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이 안식일이 하나님이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로써 체험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3


    셋째,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에게 때로 어른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게 (어떤 때에는 사실 어른보다 월등하게) 현실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위에서 두번째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전반적으로 어른보다 미숙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반론일 뿐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정밀한 분석력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더 많이 살고 공부한 어른의 판단이 더 믿을만 하겠지만 어떤 현상의 선악정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 같이 근본적인 가치 판단을 제대로 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어른이거나 경험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더 현명하지는 않다. 기독교 성서에는 나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견해가 실려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구절을 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 98-10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 6-9)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 1936-2005)이 쓴 책 <잘 가지 않는 길을 더 따라가서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에는 저자가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하는 내용이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백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교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교회는 우리 집에서 몇 블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는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그의 일요일 설교는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쉽게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처음 갔던 교회 목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저명한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버트릭(George Butrrick)이었고,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그가 거룩한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간파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 다섯 살 된 내 빈약한 머리는 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 당시 가장 유명한 기독교 목사가 있었지만, 내가 열 다섯 살 때 판단하는 한, 영적인 성장 면에서 나는 이미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기독교 교회에 분명 나보다 여러 광년 앞선 또 다른 목사가 있었다.[각주:1] 


    이 글에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밖에 안된 아이의 내적 능력은 적어도 두 차원에서 어른들과 대조되고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아이와 당대 가장 유명한 목사의 영적 수준이 대비된다. 그리고 암시적으로 목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 면에서 이 소년과 기독교인 어른들이 대비된다. (이 어른들이 소년 스캇만큼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가짜 목사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어른을 능가하는 소년의 영적 수준과 판단력은 그가 이전에 기독교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열 다섯 살 난 스캇은 과연 열 다섯 살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어린 소년은 알고 보면 사춘기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대망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내용과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 50대 후반에 이 글을 쓰는 스캇 펙은 40여 년 전 자신의 판단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신뢰할만한 어른으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중학생이 많은 어른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소년 스캇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철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라는 대구 와룡고등학교 일부 어른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의 가치를 그것이 어른에게서 나왔는가 아닌가를 따져서 판단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를 들어 문학이라는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 현대시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조지훈이 열 여덟 살 때 쓴 작품이다. 요즘 학제에 따라 말하자면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미성년자가 썼다고 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언도, 그리고 어떤 분야의 어떤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초등학생의 표현이라도 말이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고등학생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이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문제를 다루지만 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권면의 말씀에 담긴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세대에게 어른의 언행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의감, 선악판단 능력, 공정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말씀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언행에 노여워할 때 이에 귀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암시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노여워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와룡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노여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또 한번 노엽게 한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이 한 살 차이에도 의미를 두는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자격 없이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특히 미성년자들의 생각과 느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와룡고등학교에서도 일부 어른들이 그렇게 답답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어린 사람들)은 분명 미숙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숙한 건 아직 새로워서이며, 이 새로움은 우리 안에서 잠든 생명력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영혼이 치유된다.” 

    그리고 신약성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말씀과 비슷한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면 “낙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낙심은 무거운 마음이요, 낙심한 마음은 안식하는 마음일 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분별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먼저 안식일을 누리도록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 아이들이 낙심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Touchstone, 1998, p.120. 위의 인용문은 1998년에 나온 책에서 옮긴 것이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3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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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김경래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필자는 '자유의지'가 모든 종류의 지성체가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함축적인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에는 한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또는 이미 인격체로 인정된 모든 이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는 철학사와 기독교 교리사에서 그 초기부터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논쟁되어온, 하지만 아직도 첨예하게 대립하여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는, 20세기 후반부터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에서의 놀라운 발견들에 의해서 더 혼탁해진, 여전히 매우 민감하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은 주로 결정론과 조화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우선 가장 이해하기 쉬운, 하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은 강한 결정론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그것은 인간의 뇌작용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뇌에 종속된 정신 또는 의식도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우리의 정신 작용이란 지각된 외부 정보에 자연법칙에 종속된 뇌신경세포들이 현재 체내 상태를 기반으로 물리법칙을 따른 생화학적 반응을 하고, 그 결과들이 우리의 의식속에 생각이나 느낌, 감정으로 나타나며,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조차 자연법칙에 따른 기계적 반응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안에서 자유의지란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18세기에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가 가정했던 것처럼, 우주의 모든 자연법칙과 현재 상황을 아는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와 같은) 초지성체가 있다면, 그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과 상태, 우리의 생각까지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 우주의 시작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는 것 조차, 이미 빅뱅(Big Bang)의 순간에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면,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비결정적이기 때문에, 우주의 시작 순간에 자연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되었다.

      코펜하겐 해석에 기대는 비결정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듯 하지만, 존재론적 비결정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은 거시세계가 아닌 단지 미시세계를 서술할 뿐이고, 전자(electron)의 물리량(운동량과 위치)이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우연성만을 보장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적이 없는 무작위적인 우연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여 세계의 비결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현대의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들에 주목한다. 1980년대 해묵은 자유의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던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유명한 실험이나[각주:1] 뇌 좌우 반구를 잇는 뇌량(corpus callosum)이 끊긴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을[각주:2] 예로 들며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그 미래도 예측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란, 이러한 불확정성을 포함하는 자연법칙의 결과이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뇌신경 안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들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경험은 이러한 반응들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이 관점의 약점은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의식경험이 도대체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결과들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조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립론자(compatibilist)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선택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욕망이나 목적이 있는 선택은 그 선택 주체가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이나 욕망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에 충분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은 옳은 것이고, 선택하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에 억눌리거나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욕망이나 목적에 따라 선택한다면 그것은 원인이 있는 자유의지의 행사이다.   

       그런데 이처럼 양립론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한 선택이 충분한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면, 단지 이것이 어떤 다른 외부적 요소에 의해 강요되거나 방해 받지 않은 결정이라고 해서, 이러한 선택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충분한 원인에 의해서 그 상황 속에서는 가능한 미래가 하나뿐이라는 것인데, 어떤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와 결정론 이 두 개의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그저 둘 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조화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들이 양립론자들을 비판하는 지점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이런 결정론을 지지하는 듯한 연구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출발한 이 세계의 존재론적 비결정성을 바탕으로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선택과 숙고와 결정의 의식 경험을 근거로 여전히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이나, 무의식에서 올라온 충동이나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엔 그것들이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각주:3] 하지만 의식 안에서 두가지 이상의 욕망이나 목적이 서로 경쟁하여 그것에 대해 숙고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경우에는 "달리 할 수 있었던," 즉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믿음 안에서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설명하려 노력한다. [각주:4]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대전제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해석하는 자유의지론자들의 모습은, 교리를 위협하는 과학적 발견들을 신에 대한 믿음안에서 해석하려 노력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때로 그들의 설명은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에 위배되는 억지스러워 보이는 가정의 탑을 쌓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숙고와 계획, 선택의 의식경험들이 단지 신기루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보다는, 그 경험들이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단순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리고 의식경험은 그저 환상이며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면, 이 가정들은 곧 우리를 "인간에게 과연 영혼은 있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으로 이끈다.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에서는, 우리는 단지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며, 우리 안에 영혼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혹시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해도, 그것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기계에 갇힌, 육체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없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꼭두각시놀음일 뿐 진정한 순종,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그래서 자유의지론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오랜 기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의 역사 안에서의 자유의지 논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들과 분명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관심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자유의지 논쟁에서 결정론의 원인이 자연법칙이라면, 신학에서는 그것 말고도 하나님이라는 무엇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1)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가 미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가? 2) 하나님의 전능(omnipotence)이 인간의 생각도 조작 가능한가? 3)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의 방식이 개입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개입하시는가? 4)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을 미리 예정(predestination) 하시는가?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과 유기(reprobation)될 사람은 만세전에 결정되어 있는가? 5)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고 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응답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는 일인가? 등의 질문들을 만들어 낸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시대별 논쟁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통칭 리벳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은 벤자민 리벳이 1983년에 실행한 실험이다. 리벳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시계를 보다가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되 그 마음을 먹은 순간을 표시하도록 부탁했다. EEG(Electroencephalography 뇌전도) 스캐너로 피험자들의 두뇌를 확인한 결과 참가자들이 실제로 보고한 시각보다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eadiness Potential 준비전위)가 나타나는 시각이 평균 0.3초정도 앞섰다. 이 실험 결과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선택했다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였고, 철학, 심리학, 과학, 그리고 신학까지 자유의지에 관련된 수 많은 학문 분야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본문으로]
  2.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는 좌뇌와 우뇌가 정보를 교환하는 뇌량이 끊어진 분할뇌환자들에게서 구술언어를 담당하는 좌뇌가 우뇌의 선택과 결정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어떻게든 설명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분할뇌환자에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시야에는 눈이 내리는 그림을 보여주고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쪽 시야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울리는 그림을 고르라고 했을 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손은 삽 그림을,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 손은 닭 그림을 선택하였다. 환자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질문을 던지자 환자는 왼손의 삽을 보고서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다는 대답을 했다. 분명 그 환자의 우뇌는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삽을 선택했을 텐데, 그 정보가 좌뇌에 전해지지 않자, 좌뇌는 우뇌의 선택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합리화 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본문으로]
  3. 자유의지론자들에게 있어, 우리의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진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원인들에 의해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달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론자 로버트 케인(Robert Hilary Kane)의 개념을 빌리면,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면적 자유(surface freedom)에서의 선택의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충동이나 욕망이 발생하는 현재의 성향은 선행된 자기형성행동(SFA: Self Forming Action)들의 결과이기 때문, 즉 과거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아니라 시계를 보는 행위가 뇌 상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2) 판단이 시작되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0.3초가 걸렸을 가능성 3) 판단을 내리기 위해 뇌가 준비되어야 하는 상태에 대한 신호가 포착되었을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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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촛불집회는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큰 맘 먹고 아이들과 집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촛불집회에 가보고 싶다는 여섯 살 첫째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하긴 했는데, 갑자기 남편 일정에 변동이 생겨 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로 광화문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승하기 직전 잠이든 두 녀석들. 첫째는 겨우 깨워 손을 잡고, 깊이 잠든 십팔 킬로그램의 둘째는 어깨에 둘러업고 환승을 합니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고,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내가 이러려고 집회가나 싶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남편과 일행을 만나 서대문에서 광화문,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 걷고 다시 광화문으로 청계광장으로 두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큰 아이는 곧잘 걸었지만, 낯선 분위기 때문인지 둘째 아이는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런 아이들을 안고 업고 목마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 아이들이 집회에 나온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는 어른들이 초콜릿, 사탕, 귤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LED 촛불을 얻었는데, 그걸 본 첫째 녀석이 자기는 왜 촛불이 없냐고, 촛불집회인데 촛불은 언제 주냐고 혼자만의 시위를 시작합니다. 아빠를 이리저리 끌고 동동거리며 '나에게도 촛불을 달라'는 촛불시위를 시작한 거죠. 한참을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지친 남편은 결국 광화문에서 천원을 주고 촛불을 삽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형님의 진짜 촛불이 갖고 싶은 아우가 또 울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집회가 다 이런 거 아니겠냐며 저희 부부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어루만지며 따끈한 음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율아, 오늘 촛불집회 어땠어?" 아이는 언 몸이 녹는 중인지 그저 멍하니 아무 대답도 안합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집회가 어땠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는 그저 촛불을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기대보다 싱거운 반응에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큰 아이의 친구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노는 아이들이 조용하다 싶더니, 태극기를 그려 나와서는 흔들며“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며 밥상 주변을 뛰며 돕니다. 한창 어수선한 세상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른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른들이 집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집회에서 본 건 있어서 참견하려면 뭐라도 적어 들고 해야겠는데 두 녀석 모두 까막눈이라 태극기라도 들고 나가보자 했나봅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물으니, 박근혜가 누군지도 ‘하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답니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뛰느라 숨이 찬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묻는 말에 “몰라,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그린 태극기를 다시 봅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합니다만 제법 건곤감리도 흉내 낸 모양입니다.(어쩌면 순서가 뒤바뀐 모양이 꼭 지금의 우리나라 같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흔적입니다. 집회 때 어른들의 모습도 그렇게 살폈겠지요. 어른들이 무엇을 외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태극기의 색과 모양을 새기듯 마음에 새겼을 겁니다. 광장 곳곳에 나부꼈던 태극기. 태극기가 우리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여섯 살 꼬마도 압니다. 엄마, 아빠가, 그리고 많은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고 짐작해주길 바랄뿐입니다. 

        어른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사태를 아이에게 나쁜 임금의 허튼 짓쯤으로 설명하기엔 저도 이제 더 이상 화가 나서 못 하겠습니다. 겨울 추위 속에 더 이상 많은 사람 고생 않게 하루 빨리 정신 차리고 방 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세월호 7시간! 박근혜를 구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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