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포도주가 전해지다

 



박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요한복음 14장 6절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길’ ‘진리' ‘생명'은 대체 무엇인가. 어떤 대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번 글에서는 ‘길'에 대해 나누려고 한다.


    예수의 출생이나 행적을 담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공관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추상적이고 함축적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말씀이 몸을 입었다는 말은, 몸을 가진 존재를 통해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표현이라면 비교해가며 앞뒤전후 상황을 살펴볼텐데 그렇지가 않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그러하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예수라니 무슨 길이고 어떤 길인가.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어로 트로포스(τρόπος)라는 단어인데, 우리말로 ‘길'을 뜻하기도 하고 ‘삶의 방식'을 뜻하기도 한다, 고 한다. 짧은 지식에 기대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트로포스는 길, 방식이란 뜻 말고도, 일시적 유행, 지나가는 바람, 변화를 뜻하기도 하고, 요령, 재주, 전환 등의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정적이며 가만히 있는, 그저 내 앞에 놓여있는, 나와 별 상관없는 그런 길이 아니라, 그리로 내가 나아갈, 나의 방향성과 움직임을 안고 있는 그런 동적인, 살아있는 길을 뜻하는 것 같다. (나는 언어학자도 성서학자도 아니므로 근거있는 이론은 결코 아니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아버지라 흔히 부르는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1713-1784) 신부는 1769년 샌디에고에 현재 미국 땅의 첫 미션을 세웠다. 그리고 10년 뒤인 1779년에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 미션에 심은 포도나무가 캘리포니아에 심긴 첫 와인 포도나무로 기록되어있다. 후니페로 세라는 북쪽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션을 여덟 군데 더 세웠다. (작년 가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 중에 성인 추대한 그 후니페로 세라 맞다. 캘리포니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공이 클 뿐 아니라 미국에서 이루어진 첫 성인추대식이라 특히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에게는 의미가 큰 행사였지만, 스페인제국의 막강한 패권으로 선교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강제노동을 시킨 신부가 성인이 될 수 없다는 강한 반대를 만나 논란이 크게 일었다.) 


    18세기 이후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은 캘리포니아 미션에서 재배한 포도로 성례전에 사용하는 와인과 일반 식사 와인을 만들었다. 이 포도종은 곧 캘리포니아 전역에 퍼져 19세기 중반까지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후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가져온 다양한 다른 포도종에 밀려 지금은 산타바바라 지역과 시에라네바다 산기슭 정도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미션에서 재배하는 포도라 하여 포도품종 이름이 ‘미션’이다. 2006년에 발표된 어떤 유전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 선교사들이 18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가져온 미션포도종의 원래 이름은 리스탄 프리에토(Listan Prieto)라 밝혀졌다. 리스탄은 스페인 헤레스(Jerez) 지역에서 만드는 셰리 와인의 주요재료인 팔로미노(Palomino) 포도종, 혹은 그와 매우 흡사한 종이다. 그러니까 미션포도종 리스탄 프리에토는 진한 색(prieto) 팔로미노라는 말이다. 


    리스탄 프리에토는 스페인 본토에서는 필록세라 (19세기말 유럽 포도밭을 초토화시킨 병충해) 때문에 거의 사라져버린 포도종이지만, 지리적으로 외딴 곳인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는 팔로미노 네그로 (Palomino Negro, 까만 팔로미노)로 불리는 같은, 혹은 매우 흡사한 포도종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카나리아 제도는 16세기에 신세계로 향하는 콘키스타도르, 선교사, 무역상 등이 주로 머물던 곳이며, 오늘날까지도 필록세라가 전해지지 않은 전세계 몇 되지 않는 지역이다. 


    유전자 연구는 이 포도종의 여정을 그려준다.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지역의 고유품종으로 알려진 리스탄 프리에토는 앞서 언급한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에 있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스페인 콘키스타도르의 움직임을 따라 칠레와 아르헨티나, 스페인 제국이 멕시코에 세운 수많은 가톨릭 미션, 현재 미국땅인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트로포스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스페인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고, 아르헨티나, 칠레에 뿌리를 내리고 멕시코 미션에도 뿌리를 내리고, 또 거기서 캘리포니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여정이야말로 미션 포도종이 밟아온 길이다. 트로포스는 단순히 선으로 그리는 길 뿐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시간, 새로운 땅과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실패, 사람의 정성과 눈물, 땀과 숨, 기쁨과 감사,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는 나의, 우리들의 트로포스에는 무엇이 담겨있고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더해야 할까. 지금의 기준으로는 미션 포도종으로 만든 와인은 아주 보잘 것 없다. 풍미가 좋거나 인상깊지도 않다. 그러나 그 포도주가 길따라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 길을 새해 아침에 다시 생각해본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포도주에 담긴 생명의 기운

 



박여라




    어려서 교회에서 배운 노래 중에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를 참 좋아했다. 히브리민요 곡조에 오소운 작사로 알려진 이 노래는 흔한 서구의 찬송과는 음색이 달라 묘한 매력이 있었다. 되돌이표도 없는데 노래가 무한히 반복될 것같은 느낌이었다. 이십여 년 뒤 미국에서 나의 라틴어 선생 도미니칸 수사에게서 배워 족히 수백 번은 외웠을 주기도문(Pater Noster)처럼 주술같은 기운이 있었다. 곡조도 곡조이지만, 이사야 35장 말씀으로 그린 ‘그 나라'의 모습이 참 좋았다.

    찬송가 중에선 ‘빈 들에 마른 풀같이'를 특별히 좋아했다. 에스겔 34장 26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씀으로 만든 찬송이다. 어린 시절 무슨 갈급한 마음이 있어 성령의 단비가 내게 쏟아지기를 기도했던 것 같지는 않고, 지금 돌아보니 메마른 땅에 비가 내려 사방이 촉촉하게 젖고 생기가 도는 메타포가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흙냄새가 피어오르면 좋아서 하던 일을 멈춘다. 무언가 이루어진 것 같은 편안함이랄까.

    어른이 되어 꽤 긴 세월을 캘리포니아 북부 (교포들 말로는 ‘북가주')에 살았다. 거기서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다. 실제로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하늘과 태양, 바람과 땅도 그 곳이다. 그 곳은 사계절이 아니라, 일 년이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와인지역에 갈 때면 어느 계절이든 모습이 달라 다 장점이 있다. 포도를 거둬들이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는 때엔 그 냄새가 온통 진동하니 해가 뜨거워도 좋고, 좀 더 지나 가을이 되면 포도나무가 종류별로 화려하게 단풍이 져서 이쁘다.

    난 우기의 끝 즈음이 좋다. 날이 아직 추워 포도나무에 순이 나오기 전이다. 잎이 무성한 여름과는 달리 벌거벗은 나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비는 거의 그쳐서 다니기도 크게 불편하지 않고, 줄줄이 늘어선 포도나무들 사이사이로 머스터드 노란 꽃이 가득하다. 비단 와인지역 뿐 아니라 북가주를 관광하기엔 산과 들에 머스터드, 주황빛 양귀비, 싱싱한 들풀까지 더해져 그 때가 가장 아름답다. 건기가 다시 시작되어 6월쯤 되면 풀이 다 말라 구릉의 골에서 자라는 나무들만 푸른 빛이고 온통 건초다. 다시 비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해엔가부터 매일 사하라 사막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사막에서 정처없이 걸어가는 내 모습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주어진 하루를 세어가며 언제고 사막에 가리라 새로 다짐했다. 아침저녁으로 주기도문 챈팅을 몇번씩 읊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을까.

    나에게 당장 ‘비교적' 가까운 곳은 데스벨리(Death Valley)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여행지는 좋으면 질릴 때까지 계속 가곤 하는데, 그런 여행지들은 대개 아무리 반복해서 가도 질리지 않는다. 데스벨리가 그렇다. 죽음의 골짜기라니, 이름 참 무섭다. 19세기 중반,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향하는 무리 중에서 이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떼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살아서 이 계곡을 빠져나간 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안녕, 죽음의 골짜기!” 했다나. 

    이 이야기로만은, 그리고 그 곳엘 가기 전까지는, 왜 거기가 미국의 59개 국립공원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여름 휴가철에 캘리포니아를 찾은 이들이 그곳이 유명하니 가겠다고 하면 늘 뜯어말렸다. “덥고 황량해. 가지 마!”

    사하라사막은 아니지만, 내가 꿈에도 그리던 사막을 데스벨리에서 드디어 처음 만났을 때에야 사람들이 왜 그곳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사막엔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 나를, 사람을 뛰어넘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죽어있는 땅이 결코 아니었다. 악조건을 버텨내는 생명으로 가득했고,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적막함이 품고 있었다. 이내 그 간절함에 매료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모습일텐데, 이 곳에선 비가 하나님의 축복이다. 소낙비처럼 내려주마 약속하신 에스겔 34장 말씀처럼 말이다. 데스벨리의 연평균 강수량 60밀리미터다. 우리나라에서 봄 가을 건조할 때 한 달 강수량이다. 그것도 대부분 우기, 그러니까 11월에서 3월에 내린다. 비가 좀 넉넉히(?) 내린 우기가 지나고 나면, 그 죽음의 사막이 거짓말처럼 들꽃으로 화려해진다. 그 메마른 땅에서 비 몇방울에 간절하게 피어나는 온갖 꽃들은 나에게 자유, ‘스스로 말미암음’을 가르쳐주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를 좀 괴롭힌다. 물을 너무 잘 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열매맺는 일에는 딴전이다. 너무 비옥한 땅도 좋지 않다. 뿌리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더 깊게 내리게 하여, 이상적으로는 땅이 지닌 고유함을 포도알에 담아내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못 살게 하면 나무가 죽어버릴 테니 ‘약간의 스트레스'라는 발란스가 중요하겠다. 포도나무 뿌리는 대개 땅속 1미터 정도인데, 6미터 이상 뻗어나가기도 한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빙산은 1할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9할이듯, 와인을 만드는 포도송이 하나하나는 포도나무 뿌리가 흙과 자갈 속 깊이 더듬더듬 생명을 찾아 뻗어나간 간절함의 정수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이스라엘에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리라는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 뒤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나온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마른 뼈들이 살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살아있는 기운(생기)이 바람처럼 불어와 죽은, 완전히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생명을 준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알려진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엘니뇨 덕에 비가 넉넉히 내려, 지금 온통 장미빛 꽃으로 물들었다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955
Today : 57 Yesterday :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