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미 없는 나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8




 김정원*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1948 

   

    고개는 빳빳이, 보폭은 넓게, 표정은 당차게. 나는 지금 런던의 번화가를 걷고 있다. 부는 바람에 보라색 스카프가 흐느적댄다. 스카프가 날아갈까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걸어야 한다. 이미 몇 번이고 왔던 길이라 헤매지 않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지나가더라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 저 모퉁이만 돌면 익숙한 곳이고, 거기에 가면 나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좀 전의 그 거리보다 익숙한 곳, 학교의 건물이 보이자 나는 안도하며 3층 교실로 향한다. 계단마다 서 있는 조각상들은 그야말로 유럽풍이다. 현대적 조형물은 간데 없고, 중세풍의 것들만 진열 돼 있다. 게시판엔 공지들이 다닥다닥하다. 손글씨로 써 낸 대자보들은 며칠 째 제목도 읽어낼 수가 없어, 나만 공지를 못 알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친다. 교실 앞에 다다르자, 잠깐 숨을 고르고 문을 연다.

    먼저 온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향한다. 교실 안 모든 풍경이 오감을 건드린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낯선 그 냄새.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인데, 섬유 유연제 향과 초콜릿 냄새가 섞인, 달달 하면서도 느끼한 그런 냄새다. 다음으로는 나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그들의 말소리. 언뜻 들어서는 알아챌 수 없기에, 언어이기 보다는 마치 그네들만이 섭렵한 기호 같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모인 이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서로의 에세이 주제를 묻는다. 내 옆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바디우에 관해 연구 중이다. 내 주제와 동일하여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맞은 편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칸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칸트를 다시 읽었기에 몸을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이제 나도 입을 떼보려 하는 찰나, ‘바흐’를 진실로 사랑하는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이 칸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빠르게 진행되는 그들의 말소리에, 하려던 이야기를 접고 그냥 경청하기로 한다. 중간중간 고개도 끄덕이고, 눈도 맞추며 ‘굿 리스너’가 따로 없다. 강제된 경청인지 자발적 경청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경청이 다시 시작됐다. 

    교수가 들어오고, 현상학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후설을 지나 하이데거 이야기가 한창이다. 나는 하이데거가 너무 좋아 교수의 말소리에 애를 써가며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는 건 그가 쓰는 귀족적인 영어 강세(posh English accent)뿐이다. 속으로 그의 악센트를 따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사러 줄줄이 나가는 그들을 따라가본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무리들처럼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듯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다시 철학이거나 신학이다. 나는 그네들이 거론하는 모든 유럽 철/신학자들의 이름을 들어보았고, 심지어 그 중 많은 책을 이미 다 ‘읽어제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릴까 하다, 오늘은 집에 가기로 한다. 나풀대는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자 한결 편하다. 어깨에 들어간 힘도 빼고, 보폭도 줄이고, 표정도 풀고 나니 한 번 더 편해진다. 삼십여 분을 걸으며 그들을 고발한다. 고발자도 나고 듣는 이도 나다. 깊이깊이 속으로- 죄 없는 그들의 죄를 뇌까려댄다. 나 말고는 유색인종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학교의 폐쇄적 수용성을 까고, 신학함의 근본이 백인들에게 있다고 믿는 그네들의 결핍된 식견을 까고, 세계랭킹을 들먹이면서 유럽의 전시물만 죄 갖다 놓은 그들의 오만함을 깐다. 헤겔을 헤젤로, 아이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틀이라 주저 없이 발음하는 영어 중심의 사고를 까고, 워킹 클라스와 구분 짓기 위한 포쉬 영어를 끝내 구사하는 그들의 교만함을 깠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유럽철학뿐인 그들의 무식함을 까고, 마지막으로 유로센트리즘, 그러니까 서구를 본질로 생각하는 대학가의 망상가들을 힘주어 깐다.

    한참을 까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후련해짐과 동시에 아주 또렷하게 나를 덮쳐오는 것 하나, 다름 아닌 ‘나’였다. 다 까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롯이 아주 그냥 나 하나였다. 하루 종일 밖을 향해 있던 내 의식의 전반이 이제 나를 향한다. 나를 비추는 의식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자아 하나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관계의 경계 밖을 서성대며 낯설어 했던 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눅들던 나. 하하, 호호 웃을 수 없어 외로워 하던 나.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나. 소외에 맞서느라 잔뜩 긴장하던 나. 누구도 나의 의미를 물어주지 않아 절망하던 나, 내 지식을 드러내지 못해 억울해하던 나…... . 태생적으로 예민한 탓에 보다 야무지게 생채기가 난 내 가엾은 자아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도착도 못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마트에 들려 찬거리도 사고, 택배도 찾아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거짓 이성이 퇴각하자 진실한 몸이 사건의 진정을 드러낸다. 몸이 놓여 있는 ‘여기’-‘지금’의 진실은 눈물이고 절망이고 불안이었던 것이다. 내 몸에 새겨진 내 언어, 내 분위기, 내 역사를 꾹 누르고서,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려 애쓰던 몇 주의 시간이 눈물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무너졌으니 이제 세울 때가 왔다. 텅 비워냈으니 이는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존재(existence)의 어원이 ‘밖에 나가 서다’라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다면, 숱하게 경계 밖에 있었으니 실로 나는 ‘존재’했다. 나를 밖에 두기도 하고, 안에 들이기도 하며 남루한 나 자신 앞에서 엉엉 울어 봤으니, 나는 제법 실존적이었다. 이제 시불시불을 멈추고, 쫓던 것의 무상함과 그 안에 머물던 나 또한 얼마나 무의미 했는지를 응시하면 된다. 나를 일으킬 명제는 간단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와 ‘나는 무의미하다’면 충분하겠다. 나는 델포이 신전 앞에나 선 듯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해야만 한다’를 넘어, ‘하고 싶다’를 넘어 ‘나는 존재한다’로 나아가길 꿈꾸며 기도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내가 신봉했던 가치와 의미들이 찢겨 나간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깊이와 충만함이 내 안에 있음을 굳건히 믿어본다. 결핍된 존재인 것을 자각했으니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그 무의미성을 뚫고 들어가 가능성을 건져내 오면 된다. 암만 이 낯선 세계에 내팽개쳐져 있다고 하나, 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나의 외부로 존재를 몰아내고, 순간순간을 쥐어짜며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구토)” 때가 왔다. 정해진 것은 없다. 본질도 없고, 필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는 것은 ‘저주 받은 자유’로 들어 찬 몸뚱이 하나. 이 몸뚱이로 낯설고 불안한 생활세계를 단독자로서 기어이 살아내면 된다. 내 몸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고독에 그대로 고통스러워 하며, 내 몸의 한계와 유한성을 솔직하게 토해내면 된다. 낯선 세계 속에 단독자로 서게 됐으니 외롭고 불안했던 그 기분에 차라리 감사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로캉탱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다. …… 나는 눈 속을 걸어와 완전히 얼어붙었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온 사람과 같았다.”(구토)


    이토록 비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 가까스로 세워 놓은 나의 결단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파란 눈의 격차가 나를 다시 주눅들게 할 것이고, 나와 낯선 냄새의 격차가 나를 다시 불안하게 할 것이다. 빨간 2층 버스가, 기호 같은 말소리가, 고상한 악센트가 다시 나를 자극하면, 나는 다시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으려 머리를 빳빳이 들고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게 된다 한들, 부지불식간에 나를 덮치는 격차감으로 나는 다시 발버둥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발버둥은 빤히 예고 되어 있다. 세계 속에서 미래로 나를 던져가며 살아가는 한,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아프고- 초월하고-의 과정은 계속 될 것이고 그로써 나는 다시 비장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위의 고백은 이미 2년 전의 것인데, 그간 나는 무수히 무너지고 다시 비장했었다. 나를 만나고, 나의 외부를 만나고, 다시 밀려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은 지독한 ‘의미 물음’의 과정일 것이다. 무의미성과 의미성 사이에서의 발버둥. 시인 조은의 성찰이 나의 것이 되기를 간구해본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 조은, 생의 빛살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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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둘. <으스름달밤에 나는 너와 걸었다.>




 김정원*



         희끄무레한 으스름달밤이다. 약간 찬바람이 코를 훔치고, 두어시간 전에 비는 그쳤지만 땅은 충분히 젖었다. 그야말로 런던의 밤 같은 그런 밤에 사람도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함께 걷는 이’는 말이 없다. ‘함께 걷는 이’가 말이 없으니 ‘걷는 이’도 말이 없다. 둘 다 말이 없으니 손에 든 봉다리가 바지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비니루봉다리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봉다리 속 아이템들끼리 부대끼는 소리마저도 또렷해진다. 또각또각하는 구두가 젖은 땅을 때리는 소리는 그 소리들의 중심이 된다. 여러 소리들이 쟁쟁한 가운데, 걷는 이 둘은 말이 없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둘은 말이 없다. ‘걷는 이’는 말수가 적은 여자가 아니지만 지금 이 밤에는 잠깐 침묵하기로 한다. 어색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하여 그런 것이다.

         이들의 친밀함은 ‘이해’를 그 근거로 한다. 의미가 결여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둘은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침묵한다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은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서로에게 개방시켜 나간다.

         이 둘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비단 침묵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말하고 듣고’, 또 ‘말하고 듣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서로의 사정과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즉, 서로 많은 말을 나누던 사이가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땐, 아마도 틀림없이 더 본래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해의 정도는 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들이 침묵하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내용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저 둘이 나누었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그 둘은 조만간 닥칠 미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수차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지점에 이르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큰소리가 오가기도 하고, 분노가 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말함과 들음’의 과정에 성실히 참여한다. 비록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화제를 이해하게 된다. 대화를 마친 이 둘은 이제 으스름달밤을 걸어간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이들은 더 많은 낱말을 쏟아낸다고 해서 서로의 주장이 보다 명료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요~ 땡! 지금부터 침묵 시작!’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충실한 대화 후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의 대화 속에 동의, 순종, 협조가 들어차 있지는 않았지만, 진실한 대화와 경청은 이 둘 모두를 침묵으로 이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침묵에 없는 것은 단지 소리 일뿐, 이해나 관계 맺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성실하고 진실하게 ‘진정성 있는 말’을 주고 받았다면, 둘은 본래적으로 침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각주:1] 자신을 활짝 열어서 보일 때(開示), 둘은 침묵의 달밤을 어색함 없이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대화는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너는 나와 달라. 나는 너를 통제할 수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야. 결론이 나지 않아 너는 오늘도 속상해 하고 있어. 네가 속상하니까 나도 속상해져.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지.’


         어쩌면 그 둘은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보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남자를 원하는지를 아름다운 어구를 사용해가며 부단히 설명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쉬 믿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개시한다. 서로 듣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여자와 남자는 ‘새로운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자는 ‘그 남자를 간절히 원하는 여자’라는 새로워진 존재로서 그 남자 앞에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간절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한 남자’로서 그 여자 앞에 나타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롭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즉, 이 둘은 여자의 진실한 ‘말하기’와 남자의 ‘경청’을 통해 새롭지만 ‘공동의 존재’들로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이 서로의 의도나 욕망 혹은 거절 등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녀의 애달픈 마음을 그가 단박에 받아들여줬음 더 없이 좋겠지만. 또, 으스름달밤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이겠지만 여하튼.) 즉, 두 사람은 ‘둘만이 알고 있는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그 남자를 원하는 여자로, 그 여자의 고백을 들었던 남자로, 그 둘은 관계를 맺어간다. 

         이윽고 둘은 침묵하며 으스름달밤을 걷는다.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둘 모두가 듣게 되는 신비의 순간에 머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서로의 존재가 아주 또렷하게 드러나버리는 침묵의 공간에서- 두 남녀는 대화를 이어간다.


         결국 진정성 터지게 ‘말하고 듣기’ 후에 찾아오는 침묵에 관한 이야기이다. 긴밀하고도 본래적인 침묵 뒤에 오는 대화는 보다 커진 이해를 틀림없이 동반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본래적 침묵은 결국 사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각주:2] 속이 ‘빈말’ 역시 걸러지게 된다. 생떼를 쓰며 주장했던 것들도 침묵 속에서는 이내 사그라져버린다.

         그러니까- 그 날 밤에, 그 으스름달밤에, 겨울비가 내린 그 밤길에, 또각또각 소리가 나던 그 찬거리에서 그 두 남녀가 침묵 속에서 들었던 것은, 비니루봉다리의 버석거리는 소리가 아닌, ‘함께 걷는 이’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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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p 224~ 참고. [본문으로]
  2. p 229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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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3)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요약, 그리고 방향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기인한 죽음에 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이 쓰여지고 있던 기간에도 우리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 구약학자 김찬국 교수의 죽음, 그리고 영화배우 장진영의 죽음을 경험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톱스타 최진실의 자살, 좀 오래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을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재벌, 스타, 심지어 대통령까지 자살에 대한 압제와 억압에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챤으로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글을 시작한다고 밝힌바 있다.
필자는 자살에 대한 논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자살 역시 인간이 맞는 죽음의 방식(형태)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두 차례의 (웹진 9호, 11호) 글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세계관과 근대철학, 현대 실존주의 철학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간략하게 진술하였고, 오늘 하이데거와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에 이르렀다.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자살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데 그 부분과 자살이 만연하는 한국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부분은 다음달 마지막 주제를 위해 남겨둔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I: 하이데거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적 인간유형은 하이데거에 와서 그 절정을 맞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 그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향한 일방적 포획으로서의 서구 근대철학은 고전시대(그리스시대)가 지녔던 존재체험을 상실했다고 비판한 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근원적 존재체험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그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의 확장이자 경계지움이다.”[각주:1]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신전과 신상, 그리고 신화는 그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들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신화는 그들에게 있어 기억의 반복이자 현실의 원칙이었다. ‘신전을 세웠다’함은 근대적 의미로 궁극적 대상을 향한 인식론적 분투라 표현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인들에게 있어서는 근대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태초에 신이 먼저 있었고, 그 신이 임재하는 신전을 세움으로 대상과 의식의 합일을 도모했던 근대적 인식론이 아니라,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비로소 신이 존재하게 되었고 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구절의 의미이다.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의 세계가 열린 것(개시 開示)이다. 고대 헬라스인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을 그 안에 안치시켰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세계, 하이데거적 의미로 ‘생활세계’를 건설하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생활세계는 실천적 해석을 전제로 하였고, 하이데거는 특별히 사물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실존적 주체를 ‘현존재 Dasein’라 불렀다. 


Episode:  개시開示 의 기억, 87년 6월

진리가 실존적 삶의 현장에서 개시되었던 사건은 역사상 무수히 많다. 문제는 그 이름없는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신이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의미는 기독교식으로 ‘말씀이 육화되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의 현전을 봐버린 개시의 사건 말이다.
87년 6월이 그러했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신촌에 있었는데, 학교와 집을 오갈 때 맡았던 매캐한 췌루탄 가스와 버스 밖 풍경들, 예들 들어 푸른 옷의 전경들, 닭장차, 괴물 같았던 페퍼포그가 질서 있게 혹은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현재의 전황에 내기를 걸곤 했었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이었는데 그날 나는 학교에 안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신촌 일대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날 임시로 하루 가정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학교를 땡땡이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고3은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다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이한열 장례식에 있었다.
장례식 도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등장하셨다. 아버지의 대학시절 스승이셨다는데, 아버지는 문목사님이 엄격하고 학문에 열중하셨던 구약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하신다. 유년시절 수유리 고모네 집에 놀러갈때마다  아버지는 고모네 옆의 옆집이었던 문목사님 댁에 먼저 들르셨다. 그 집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나도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는데, 문목사님은 집에 계시던 때보다는 안 계셨을때가 훨씬 더 많았다. 아버지께 ‘목사님 어디 가셨어?’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감옥에 갔어’라고 말해주었다. 바로 그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하자 마자 이한열 장례식 연사로 나오신 것이다.
단상에 오르시더니 문목사님은 사자후를 토하시며 “장준하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독재정권하에서 죽어간 20여명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면서 그 넋을 하나씩 불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렸을때 보았던 만화영화중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폴이 4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때 화면 전체가 빙글빙글 돌면서 폴이 무슨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상한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데 마치 그와 같았다. 문목사님이 죽어간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폴처럼 새로운 세계로 빙글 빙글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모였던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로 엮어지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에네르기가 그곳을 휩쓸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열하고, 가슴을 치고,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내가 무엇을 알았을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 인지에 대한 이데아가 선재하고 있다가 우연히 87년 6월의 역사적 상황이 그것과 맞아떨어져 내가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와 정의와 자유라는 의미가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가 87년 6월에 불현듯 솟아올라 왔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87년 6월 한복판에 내가 우연치 않게 그곳에 서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 그 외침과 울음과 노래를 듣고 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확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니 현전이니 개시니 하는 암호와 같은 말들을 만날 때 마다 87년 6월의 사건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반추한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

궁극적 진리의 현전에 참여하는 주체, 즉 실존론적인 주체개념 하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현실적삶이라는 것 안으로 끌어들여(선취하여)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시간의 궤적을 따라 산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세계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고 나름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 지평을 갖는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벌어진 사건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을 삶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세상과 맞짱 뜨는 적극적인 측면과 자신이 던져진 세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어져가는 수동적인 측면을 모두 갖는다. 이런 점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자기 실존의 본질로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하고 깨어있는 본래적인 인간(존재)가 된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봄으로써 개시된 근원적 진리를 확인한 현존재가 비로소 전체로서의 진리(인간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해의 근본조건이다. 
종합하면,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 속에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開示’를 제시함으로써 대상과 사유의 일치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성립하는 파생적 진리와는 다른 진리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이해에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현존재속에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능한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V: 임마누엘 레비나스, 하이데거를 넘어서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주체가 주체로서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e>과 <시간과 타자 Time and Other>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른 죽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하이데거의 죽음은 마치 빛의 인식구조 안에 놓여있는 무엇이다: “죽음으로 향한 존재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에 있어서 최고의 밝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남성다운 힘이다.”[각주:2]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며 ‘최고의 밝음’, 즉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을 의미)이라 표현을 썼다고 지적한 후, 하이데거 역시 서구 형이상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빛의 현상학’안에 있음을 꼬집는다. 
태양(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는 변방과 주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고 빛의 영향력을 점점 상실한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복과 타도와 착취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여성/이교도/흑인/유대인/장애자/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등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당대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왔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리이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 스펠링이Enlightenment인데, 가운데에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gh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히는 의미에서의 ‘빛’이다. 이렇듯 서구 형이상학 곳곳에는 빛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짙게 베어있다. 하이데거가 서구형이상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를 하지만, 레비나스가 볼 때는 하이데거 역시 서구의 인식론적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빛의 폭력’의 수혜자(or 피해자)인 셈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폰 헤르만,「예술작품의 근원」,『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기상 옮김,(서울:문예출판사,1997), 583쪽.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문예출판사,1996), 77-7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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