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기 민주정부'가 성공한다면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딴지일보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김어준이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 1인씩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인터뷰 주자는 단병호 전노협 초대 위원장. 그 인터뷰 에서 김어준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발모제를 바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고, 단 위원장의 대답은 발모제를 바른다면 자신은 아마도 더 이상 단병호가 아니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김어준이 남긴 코멘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은 그의 '계급'이고, '백성'은 그의 '노동자'며, '구세제민'은 그의 '노동해방'이다. 그를 깨운 건 인간에 대한 연민. 무인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그 세력을 전국으로 규합하고 관에 맞선 '적두장군 단봉준'. 누군들 거저 사는 사람 있겠냐만 제 살을 깎아 남의 몫까지 대납하는 그 정도 삶 앞에선 주댕이 살짝 닥쳐 주는 게 예다.”

   이렇게 써 놓고, 그는 코멘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지난 17년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노동계 야전사령관의 강철 화이바, 빨간 머리띠가 풀리는 날, 축배 대신 발모제를 도포해 주리라. 내 몫의 부채는 그렇게 변제하련다. 꾸벅.”

   이 인터뷰가 나간 후, 감동먹었다는 댓글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존경한다니까 권영길(필자주-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3.9%를 얻었고 이 당시는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대표로 재임 중이었음)이 다시 보이는군요.”


   2.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한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노무현을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아이를 불러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 투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 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살기 위해서는 삶이 분열되어야 한다. 이 분열의 빈틈에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 엉킨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삶을 보여 주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던 날 노무현은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고 읆조렸다고 한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통치자의 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 집권 중에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는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났다.”

   앞의 두 텍스트가 보여주는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 이 텍스트들이 대상이 되는 두 사람과 각각에 얽힌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텍스트들의 밑에 깔린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등등.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이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충분히 추출해 낼 수 있을 듯 하다. 단병호는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노무현은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을 자임하는 이들의 삶과 관련이 크다고 말이다. 여기에, 설령 ‘존경’은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존경’을 하기에, ‘발모제’같은 ‘세련’을 덧붙이고자 한다는 것까지도 짚을 만 하겠다.



   3. 

   대선 기간 막바지에 문재인 후보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미담’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런 트윗이 나왔다.

   “경고한다. 정의당&노동당은 문재인 대통령님 앞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논하지 말라. 니네들 입으로 싸울 때 우리 문재인 대통령님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오신 분이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긴 해도, 분명한 것이 이 케이스가 ‘극소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극소수’였다고 하더라도, ‘극단’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류’도 저런 식으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속칭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지 마라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문재인’과 같은 (유능한) ‘인권변호사’, 즉 지원자의 자리가, 당사자를 대변하려 하는(그렇지만 힘이 약한) ‘정의당/노동당’보다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성 싶다. 물론 저런 언설과 이런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노동 문제’라는, ‘객체’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41%에 달하는 그의 대선 때 지지자들만은 아닌 듯한 요즘인데, 그렇다면 그 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지원자’의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권익을 향상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그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나 외교 관계의 호전 등도 물론이고. 그런 결과를 통해서 지지를 유지하고 재집권을 이루어낼 때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조금 덧붙인다면,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의 친구’가 15년 전에 집권했을 때도 하고 싶었을 터일 테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그의 친구’의 완벽한 복권일 것이란 기대도 있을 것이다. 그의 추모식에서 그를 ‘앞서서 간 임’으로 모시며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 불러도 정당할 그런 완벽한 복권. 그렇다면, 그런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되는 것일까.


4. 

   한국 사회 비정규노동 영역의 대표적 이슈 중 하나인 KTX 해고승무원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이런 반응들이 꽤 있다. 정규직 자리를 공정한 경쟁으로 따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우기는 ‘샛길’을 뚫어서 차지하려는 욕심이라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행보로 주목받았던 것이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들이 이에 호응해서 정규직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화’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 재임 내내 이어질 것 같고.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도, 적어도 고용불안이라는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성과와 진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무기계약직’과 ‘자회사의 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가 본격화되면 어쩌면 이 ‘구분 기준’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도 본격화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차별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로 앞에 언급했던 KTX 해고승무원 관련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에 따른 결과’라는, ‘합리적 차별’의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실 KTX 해고승무원 케이스에 드러난 저런 시선은 저 사건이 처음 벌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시선이기도 하다. 당장 얼마 전의 ‘교육공무직법’ 관련 사태가 딱 이런 경우이기도 했다. 능력이 있어서 공무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이라는 시선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보여 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마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나 그 정부에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그 지지자들이 꿈꾸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레토릭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기도 하겠고 말이다.


5.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이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같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주익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죽어서 내려오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김진숙은 ‘희망버스’와 함께 살아서 내려왔음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만들려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차별’이고, 그것에 ‘능력’을 갖거나 선망하는 ‘보통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사회적 연대’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보다는 같은 ‘민주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과 가깝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때는 후보였던 지금 대통령 본인의 문제발언도 있었고, 지금 당장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군인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으면서도,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비난이 오히려 벌어지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의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기우’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실마리일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잘못할 때’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적어도 그 때 ‘비판’에 깔린 뉘앙스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비판’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필요한 마인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합리적인 차별’과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접’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라면, 그 바램을 제대로 비판해 내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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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토핑에서 민중신학까지–신은 명사일까 동사일까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세탁소 일을 두어 달 정도 했던 적이 있다. 세탁소에 처음 일하러 갔던 날 이것저것 일을 배우다가 어색한 단어 하나를 들었다. ‘배깅’이란다. 대충 bagging쯤 되겠거니 하고 이해했고 세탁물 포장하란 이야기인 줄이야 알아듣긴 했는데, bagging이라니 bag이 동사라도 된단 말인가 싶은 느낌.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현상이 부지기수다. 피자 토핑(topping) 같은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말일 터이고, 요즘 한국에서도 건설회사들이 하우징(housing)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모양이다. 교통 벌금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을 doubled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럴 듯 하다. 작년 미국 대선 관련 기사를 읽다 보니 back이라는 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트럼프 지지자를 두고 those who back Trump 뭐 이렇게 쓰는 식이다.

   그래도 이런 단어들은 영어 사전을 뒤지면 동사로서 쓰는 경우가 있다고 나오긴 한다. 그런데, 식품점에 장을 보러 갔더니, 야채를 쌀알 비슷한 모양으로 잘라놓고 파는데, 포장에 Riced라고 써 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싶은 느낌. 아마 한국어로 직역하면, ‘쌀한’ 혹은 ‘쌀된’쯤 되려나? 그러니까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되겠다. 명사나 형용사가 그대로 동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언젠가 서울시가 I seoul you라는 홍보문구를 내밀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적이 있었는데, 위와 같은 상황을 깔고 보면 이해가 전혀 안 가지만도 않겠다. 물론, 그래서 저 문구에서 정작 ‘seoul’이 뭔 뜻인지가 아리송하다는 게 문제겠지만. 


  2. 

   Bag, house, rice 같은 말을 저렇게, 명사를 그냥 동사같이 쓸 수 있다니까, 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본다면, 이런 용례를 God이라는 단어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려니 속에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God, 즉 신이라는 말은, 어쩐지 굳이 따져 본다면 명사를 동사같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도 아마 이런 이야기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물론 ‘성서’나 ‘교회의 전통’ 등을 통해 더 많이 파악을 할 수 있다고도 하겠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결국은 ‘불가능’이긴 마찬가지다. 그 말은 곧 신에 대한 이해를 ‘명사’적인 방법으로 할 경우 그 ‘명사’의 내용을 완벽히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되지 않겠는가. 필자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최근에 내신 책 제목마따나, 신은 ‘알 수 없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명사로서의 신이 ‘알 수 없는 분’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실제로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니, 종교와 신앙이란 것 자체가 바로 그 ‘어떤 사건을 두고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행위’의 집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집적된 행위들을 성찰해 가면서, ‘신’이라는 ‘명사’의 내용을 완벽하게는 불가능해도 더 많이 채우게 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신’이란 단어의 1차적 의미에 가까운 품사는 명사라기보다는 동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고, 명사로서의 신은 그런 동사의 집적에서 명사의 요소를 뽑아내고자 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 

   신이라는 단어가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면, 당장 직면하는 현실은 그 ‘동사’가 정말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할 때, 그 ‘어떤 사건’이라는 것이 정말 제각각이고, 그 제각각의 내용이 쉽게 타협이나 조정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제각각 중에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가능한 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면서 어떤 국면에서는 전자가 나타나고 어떤 국면에서는 후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필자는 굳이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전자를 고르고 싶긴 하다).

   그런데 만약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릴 수 있다면, 그 때 그 ‘맞는 것’이 되는 ‘동사’로서의 신은 인간에게 ‘모범’이 되는 그런 ‘동사’일까. 일단 이 글은 ‘그리스도교인’ 대상이니까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이야기해 본다면, 그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예수’는, 더도 덜도 아닌 정치범 사형수다. 게다가 그는 생전에는, 그 당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율법’이나 ‘전통’을 두고, 그런 것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래 그게 맞어라고 뻗댔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를 두고 묻는 적절한 질문은, 흔히 생각하곤 하는 이런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닮을 것인가” 혹은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오히려 그런 질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런 질문 아닐는지. “예수가 신이라면, 정말 ‘저런’ 예수가 신이라면, 도대체 ‘신’이란 건 뭔가? 아니, ‘저런’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세상이라면, 대체 그 세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 즉,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범’이나 ‘절대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예수를 ‘신’이라고 밀어붙임으로써 세상을 당혹스럽게,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당혹과 난감을 풀어내기 위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도록 강제하는 일이라는 뜻도 되겠다.

   이런 예수 이야기의 양상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데 대한 지혜를 빌어온다면,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해답’일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이고 ‘출발’일 것이다. 또한, ‘신’을 이야기한다고 어떤 ‘권위’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직 그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삶에서의 ‘사건’에 다가가서, 자신의 출발점을 잡아내고 그것을 자신 스스로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권위’나 ‘보장’이 없으니, 그 밀어붙임이 낳는 빛과 그늘에 솔직해야 할 뿐. 또한, 자신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닐 터이므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맞닥뜨리는 것을 감당해야 할 뿐.


   4. 

   민중신학 연구자 중 한 명인 필자의 사견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방식의 신 이야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신학 중 하나가 민중신학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즉 ‘구원을 주는 존재’라면, 이 지점에서 나올 수 있는 적절한 반응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기보다는 “아니 그런 게 구원이에요? 그럼 도대체 그런 구원을 왜 받아야 해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구원이라고, 그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뜻이리라. 나는 이 자본주의 혹은 이 민주주의 세상에서 잘 살고 있으니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따로 구원이 필요없겠다 싶은 사람들에게, ‘잘 산다’는 것이, 그래서 ‘구원이 필요없다’는 것이, 착각일 뿐이라고 밀어붙이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효과라는 것이다. 이 말을 출발점으로 하여 조금 더 나가 본다면, 그런 ‘잘 산다는 착각’이야말로, ‘사람’이 ‘강도’를 만나게 되는 세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지금은 어떤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일단 권력의 자리에서 막 떨구어 낸 시간이다. 아마도 6주 정도 지나면, 저런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 보인다. 이른바 ‘정권교체.’ 뭔가 ‘진보적’인 일들을 할 거라는 정권이 들어선다는 ‘정권교체.’ 그 ‘정권교체’가, 다른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재생산하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민중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권력을 잡든지 간에,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당혹해 하고, 그 당혹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라는 강제를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갈 때까지 가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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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4)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4) 남한 사회의 내부합의의 동요와 붕괴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3. 남한 사회에서의 ‘무능력자’와 ‘무자격자’ 형성의 구조

     (1) 민주화 시대 ‘시민’의 출현

     (2) 남한 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변화

     (3) ‘시민’ 내부의 사회적 배제와, ‘무능력자’와 ‘무자격자’의 낙인이 찍힌 ‘비시민’의 출현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의 야당은 반공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고, 박정희 정부 때부터 등장한 민중운동은 반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포용했던 반면에,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거래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인 자유주의적 ‘시민’은,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야당과 민중운동 양자 모두에 대해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한 ‘시민’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사회의 규칙으로 수용하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과도한 반공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기존의 사회운동, 특히 민중운동에도, 자신들에게 과도한 도덕적 부담을 강요한다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각주:1] 그리하여,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상식’을 아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표준의 담지자임을 자처했다.[각주:2] 이 ‘시민’들은, 정부가 자신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불순한 것으로 비난했을 때, 즉 자신들의 ‘상식’이 정부에게 거부당했을 때, 촛불 시위나 인터넷 청원 등의 사회적 의례를 개발하고 실행함으로써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해 냈는데, 김진호는 이런 의례들을 ‘한국적 시민 종교’[각주:3]라고 칭했다. ‘시민’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은 이러한 ‘한국적 시민 종교’를 개발해 내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했다. 자유주의적 입장의 ‘시민’들에 의해 이러한 ‘시민 종교’가 개발된 이후, 보수주의적 입장의 시민들도 저런 ‘시민 종교’를 모방하여, 친미 시위를 개최하거나 카톡을 통해 루머를 퍼뜨리는 등의 의례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1) '무자격자' 창출 현상


   그런데 이러한 ‘시민 종교’ 의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무자격자’로 치부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광범위한 대중을 포괄하는 인터넷에서의 의례가 반복되는 중에, 이명박이나 박근혜 등의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일본식 이름으로 칭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그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외부인”, 즉 남한 사회 바깥의 인간으로서 남한 사회에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으로 간주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보수주의적 정당과 언론에 대한 자신들의 과거 조사를 통해 그들의 과거 식민권력에 대한 협력 사실을 찾아 내고 이에 근거해 그 정당과 언론들을 “친일파”로 칭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적 ‘시민’과 정당들은 상대편을 “친북주의자”로 칭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심지어는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호칭을 쓰는 경우도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을 ‘적’으로 간주해 증오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종북주의자’라고 욕하는 자유주의적 ‘시민’들 역시, 북한을 ‘이상한 타자’(식민주의적 뉘앙스까지 담긴)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 양쪽 모두 상대편을 ‘친일’/’친북’으로 딱지붙임으로써, 상대편을 ‘외부인’, 즉 한국에 살 자격이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윤형은 남한의 사회구조가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각주:4] 이는 남한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 모두,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상대편을 ‘북한인’과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런 ‘외부인’ 창출 현상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주의적 시민들이 이전부터 그런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에게도 그러한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적대감의 주된 명분은 그들이 ‘불법체류’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민’들만 받아야 하는 복지혜택을 일정하게 받는다(혹은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경우에 따라서 결혼 이주자들에게까지 확대되는데, 이자스민의 경우가 한 예이다.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자로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이자스민은 그의 당적과 전 국적으로 인해 비난받았다. 그가 이주노동자들의 ‘불법’체류 여부에 상관없이 그 자녀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주권과 복지를 보장하고자 하는 법안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이 법안이 ‘불법’ 이주노동자들이 합법 신분을 얻는 데 악용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보수주의적 시민들도, 그의 당적에 대한 비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비난을 그에게 퍼부은 것은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은, 그들의 상대편이나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 등을 남한 사회의 ‘합법적’ 주체로서의 ‘국민’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져서는 안 되는 ‘무자격자’로 간주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남한 사회의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해 내는 기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자격자’ 창출 현상은 젠더편향적이기도 한데, 이를 드러내는 현상으로는, 여성들이 특히 병역 문제로 인해 남성들(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양쪽 모두)에게 동등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 


   2) '무능력자' 창출 현상


   남한 사회의 직업 안정성이 약화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노동시장의 경쟁이 극심해졌다. 그에 따라 남한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직업을 가질 만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대한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었고, 특히 생계 전선에 막 뛰어든 청년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중해졌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상당히 힘들지만, 그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힘든 것은 자신들의 능력부족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능력을 푸대접하는 사회에 저항하기보다는 더 많은 능력을 갖추는 데 집착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리하여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직난을 자신들의 능력부족으로 돌리게 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자신들이 불의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즉, 어떤 이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고용이나 노동 조건 등을 요구할 때, 많은 남한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할 능력이나 자격도 안 되는 주제에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개선이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할 때, 많은 청년들은 그들은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며, 만약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반응한다.[각주:5]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장애인, 노숙자, 실업자, 노동빈곤자 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의 ‘능력 부족’을 명분삼아 정당화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능력 부족자’로 간주되는 이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적 상태는 점점 더 많이 중첩된다. 필자는 이러한 중첩을 “무능력자”의 창출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정된 고용의 감소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변화에 기인한 경제적 양극화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더 많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안정된 직업을 얻기는 상당히 어려우므로, 그들이 “무능력자”라는 딱지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무능력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효율성을 성취할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되므로,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없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게 된다.[각주:6] 그러므로, 이러한 “무능력자”와 “잉여인간”의 딱지는, 흔한 생각대로 장애인이나 실업자 같은 소수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경제에 깊게 연루된 한국 사회의 누구에게라도 붙을 수 있는 딱지임을 알 수 있다. 


   3) "비시민"들의 공통점


   “무자격자”와 “무능력자”의 공통점은 둘 다 “시민”들에 의해 배제당하는 존재라는 점이며, 이 때 그 배제가 “외부인”이나 “능력 부족” 등의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범주를 “시민”에 의해 배제되는 “비시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합치고자 한다. 이 때, 앞에서 “무능력자”를 다루면서 언급했듯, “비시민” 현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무자격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무자격자”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어떤 이가 “비시민”으로 간주될 때, 그가 어떤 일을 겪는지를 살펴 보는 데에는 소수자들의 고통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참조가 될 수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각주:7] 


  • 소수자의 고통은 사회적 문제로 인정된다. 

  • 그러나 그런 인정이 존재한다고 해서, 소수자들에 대한 불법적이고, 위험하며, 무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한 배제의 정당성이 의문에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 심지어 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일부 시민들에게 그러한 배제의 정당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므로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 역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을 확고하게 정당하고 있다. 

 


   4) 남한 사회와 민중신학에 대한 탈식민적 고찰의 실마리인 "비시민"


   한국 민중신학의 독특한 언명 중 하나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서남동에 따르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이유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등의 진면목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의 고통 앞에서 폭로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구원받을 지 못 받을 지가 바로 그 고통 앞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각주:8] 서남동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원이란 오직 고난받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걸림돌이 되어, 그 걸림돌에 걸린 사람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구원의 길을 탐색하는 핵심 통로는 고난받는 이들, ‘민중’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각주:9] 

   앞에서 논의했던 ‘비시민’은 민중신학이 증언하고자 하는 ‘강도 만난 사람’, 곧 ‘민중’의 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시민’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이들이 ‘비시민’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광범위하게 공유한다는 점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비시민’으로 규정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은 배제를 폭로하고 그 배제의 명분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일이 되고, 거기에서부터 배제의 시스템이 깨지기 시작한다. 즉, 증언은 ‘비시민’을 배제하는 바탕 위에 서 있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의 시작인 것이다.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이 “사회를 보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라”라면, ‘비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은 “사람을 보호하고 사회를 폭로하라”이다.[각주:10] 

   ‘비시민’의 배제에 동참하는 ‘시민’들은, 그 배제를 정당화하는 근거, 특히 내셔널리즘이나 자본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미국/일본이나 북한을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주된 근거의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세계화된 경제에 참여하려는 ‘제국의 눈’을 갖고 있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내면화한 자본주의는 ‘무능력자’의 창출과 배제에 주된 근거가 된다. 따라서, 남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배제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배제 안에 뿌리박혀 있는 남한 사람들의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적 욕망 양쪽을 모두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식민 사상과 운동은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을 모두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각주:11] 천 꽝싱의 주장은 남한 사회의 현실을 분석, 비판하는 데 좋은 참조점이 된다. 특히, 천 꽝싱이 제안하는 ‘비판적 혼합’과 ‘타자 되기’의 방법론, 즉 식민화를 겪은 주체들끼리의 상호 동일시를 통해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론은 민중신학에도 좋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각주:12]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비시민’은 남한 사회 내의 ‘강도 만난 사람’들, 즉 민중이며, 따라서 구원의 시금석이 된다. 따라서 남한 상황에서의 민중신학의 주 임무는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남한 사회의 타자인 ‘비시민’의 배제의 현실을 증언함으로써 그 배제를 거부하고 그 타자와 연대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비판적 혼합’의 방법론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4. 결론


   노암 촘스키의 한 강연에서 어느 MIT 학생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바람직한 발전의 모델을 이룬 나라가 현실 세계 중 어디라고 보십니까?” 촘스키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한국(South Korea)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딛고 일어나서,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동시에 독재 정권에 항거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해 냈습니다.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와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할 정도로 첨단 기술이 온 국민들에게 골고루 퍼졌고, 2002년에는 네티즌의 힘으로 개혁적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정도로 풀뿌리민주주의가 발전했습니다.”[각주:13] 

   이 에피소드에 촘스키의 반응이라고 소개된 내용에서는, 남한 사회의 자유주의적 ‘시민’의 관점인, 탈식민국가로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소망하는 나라로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소망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비전 중 하나로 공식화되어 있기도 하다. 민주화 역사 속의 많은 사건들이 현재 공식적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민소득 4만 달러로의 성장을 위한 경제적 기반 구축”이 공식적인 경제적 비전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마리 토끼 쫓기는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비시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비시민’의 출현은, ‘비시민’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도 ‘두 마리 토끼 쫓기’가 가능한 것인가라는 비판적 의문의 실마리가 된다. ‘비시민’의 존재가, 그들의 배제에 근거하여 남한 사회의 식민 이후의 경제적/사회적 구조가 유지되는 주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한, ‘비시민’은 남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실존의 가장 심층을 건드리는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비시민’에 대한 배제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실존의 급진적 변화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며, 이런 의미에서 ‘비시민’은 신학적 주제가 된다. 민중신학이 타자로서의 ‘비시민’의 이슈에 신학적으로 응답한다면, 남한의 타자로서의 북한이라는 이슈와, ‘시민’에게 내면화된 제국주의적 욕망이라는 이슈와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민중신학의 ‘비시민’ 증언 작업은 필연적으로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동시 추구라는 탈식민의 관점과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한윤형. 안티조선운동사(서울: 텍스트, 2010), 249~250 [본문으로]
  2. 위의 책, 247 [본문으로]
  3.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4. 한윤형 “종북과 극단적 민족주의의 차이는?”, 프레시안 2015년 3월 12일 게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610 [본문으로]
  5.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고양: 개마고원, 2013). 19 [본문으로]
  6. 최태섭. 잉여사회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3), 82~84 [본문으로]
  7. 졸고,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이다”-민중신학적 관점의 주체성 탐구”, 김진호/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서울: 삼인, 2013). 387 [본문으로]
  8.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07 [본문으로]
  9. Kim, Jin-Ho. "The Hermeneutics of Ahn Byung-Mu."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s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s, ed. Yung Suk Kim and Jin-Ho Kim.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3, 22 [본문으로]
  10.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1). 192~193 [본문으로]
  11. 천꽝싱, "세계화와 탈제국,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이정훈, 박상수 편, 동아시아, 인식지평과 실천공간(서울: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2010), 89 [본문으로]
  12. ______, 제국의 눈(창비: 2003), 153 [본문으로]
  13. 이원재,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서울: 원앤원북스, 2005), 177~1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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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3)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4) 남한 사회의 내부합의의 동요와 붕괴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3. 남한 사회에서의 ‘무능력자’와 ‘무자격자’ 형성의 구조

     (1) 민주화 시대 ‘시민’의 출현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성취되기 이전에는, 남한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들을 ‘국민’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이따금 민주화운동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으나, 대체로 국가에 대한 복종의 함의를 갖고 있는 말이었다. 그 경우, 국민은 개인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단일한 실체로 이해되었다.  

   1987년 민주화 성공 이후에는 ‘시민’이란 용어가 출현하여 ‘국민’과 공존하게 되었다. ‘시민’의 출현은 민주화과정을 통해 시민사회의 제도적 기능이 정상화되었다는 한 증거이다. 김진호에 따르면, 그러한 정상화로 인하여, 남한 ‘시민’은 이제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1] 이 ‘시민’은 일반적으로 ‘국민’과는 다르게, 개인 각자의 혹은 개인들의 집합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민중’이 일반적으로 하층 계급 사람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사회운동의 지평에는 종종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담지하는 것으로 이해된 반면, ‘시민’은 국민국가 내부의 자유민주주의의 주체로 이해된다. 민주화의 진전과 사회주의 붕괴가 겹치면서, 남한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류가 되었다. 

   남한 사회에서 ‘시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은 분리불가능한 상태로 사회적 정당성을 담지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두 명분 중에 어느 쪽에 중점을 둘 지를 놓고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에 심각한 논쟁이 있긴 하지만, 이 두 명분을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화 이후 남한 국가의 기본 합의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병 치료’와 ‘문민정부’를 함께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의 슬로건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두 명분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의 슬로건을 앞세워 경제개혁을 시도했다가 심각한 실패를 겪었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정책들이 경제정책에 의해 제어당하면서 시민사회의 저항을 불러와, 민주주의에 대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각주:2] 김영삼 정부가 IMF 구제금융과 함께 마감되면서, 그 이후 정부들의 목표는 경제개혁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경제에 의해 민주주의가 제어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앞에서 논의한 대로,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가속화시킨 것은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정부들이었다. 금융/산업/노동 영역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상당수의 기업과 은행이 사라졌고, 정리해고와 파견 노동 등이 일반화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우나 현대 등의 일부 재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LG 등의 대재벌, 특히 삼성은 IMF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은행이 산업 자본의 이해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실물 경제 바깥에서 자립하는 금융자본으로 자신을 재구축하게 되었다.[각주:3]  

   이런 모든 변화로 인해, 남한 사람들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종신고용 시스템에 기반을 둔 라이프스타일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는 계속 가속화되어, 비정규직 노동이 고용의 주류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대부분의 청년 노동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청년빈곤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중년 노동자들은 상당수 정리해고되거나, 정리해고를 모면한 경우라도 그들의 고용주들이 과거와 같은 이윤이 나오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게 되었다. 국가 경제 지표가 향상되고, 김대중 정부가 예상보다 일찍 IMF 구제금융을 상환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경제적 양극화 상황은 심화되고 노동계급의 삶은 더 불안정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의 남한의 자유주의 정부들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초래된 대중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 복지 시스템과 경제 구조의 동시 개혁을 시도했다. 이 정부들의 사회복지 개혁의 노선은 ‘생산적 복지’였는데, 이는 복지 수혜자들이 구직활동에 적극적일 것을 요구하는 등의 ‘생산적 태도’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노선이었다. 한편, 이 정부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외부의 충격을 경제 구조 개혁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외부 충격을 경제 구조 개혁의 지렛대로 활용한 예로 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한미 FTA를 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선진통상국가’가 되겠다는 기조 하에, 이를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로 성취하려 했다.[각주:4] 한미 FTA는 중국의 빠른 산업화에 대응하여 경제 구조를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원래 계획되었던 시기보다 당겨서 추진되었다.[각주:5] 이 때 정부의 논리는, 가장 발달된 서비스 산업을 구축한 나라인 미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그에 따른 외부 충격이 남한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가속화한다는 것이었다.[각주:6] 자신을 ‘실용적 진보주의’의 추구자라고 정의했던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가 담지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적용이라는 외부 충격을 활용하여 재벌과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복하고 재벌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특권(물론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노무현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각주:7] 하지만 삼성과 같은 대재벌들 역시, 한미 FTA가 초래할 영미적 자본주의 노선으로의 격변 속에서 일어날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잡고자 하는 의도 속에 FTA 체결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삼성의 경우, 노무현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 증언한 대로, 한미 FTA 체결을 앞장서 제안하기까지 했다.[각주:8] 

   한미 FTA에 대한 수많은 찬반 논란은 대체로 민족주의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한미 FTA 반대 담론의 대부분은 협상 결과의 대부분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쪽으로 편향되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미 FTA가 ‘미국의 경제 침략’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이는 이 반대 담론들이 남한 사회운동의 전통적인 반미 경향 속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 준다. 반면, 한미 FTA 찬성 담론의 대부분은 한미 FTA가 “1조 7천억불 상당의 미국 시장”에 “한국의 경제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만들었던 한미 FTA 추진 관련 광고를 보면, 한국 기업을 상징하는 기마부대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영토를 행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장면들은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정부 지도자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보여 줌과 동시에, 남한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한미 FTA 추진에 동원하려는 의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민족주의적 욕망이 제국주의적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 때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은 한미FTA를 비롯한 갖가지 FTA를 통해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장면들은 미국에 대한 식민주의적 선망을 통해 내면화된 남한의 “제국의 눈”[각주:9]을 보여 주며, 이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협력하는 하나의 양상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이 한미 FTA를 추진한 노무현 정부가 사회운동 일각의 지지와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리버럴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자신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실용적 진보주의’의 추구자로 정의했음을 짚어 본다면, 이는 민주화운동 지지의 입장에 선 리버럴들의 대다수도 제국주의적 욕망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2007년 보수주의 정부가 재집권하면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이끈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끈 10년 동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했다. 이 정부들은 이전 자유주의 정부들의 경제개혁 정책을 전면적으로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 변화를 지속하고, 4대강 등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통해 내수 경제를 진작하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 정부들은 이전 자유주의 정부 이상의 경제 지표 향상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수립에 참여한 일부 보수주의적 지식인들이 ‘선진화’[각주:10]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리버럴들을 포섭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2008년 촛불 시위 이후에는, 보수주의 정부는 반정부적 입장의 대중들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고, 그들을 불순하다고, 더 심하게는 ‘종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서는 시민들과의 소통을 포기했다는 반대쪽의 비난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과 경제적 양극화 등으로 인해, 지금의 남한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1. 김진호, “시민, 민주화-시장화 사이에서 ‘자기분열’”, 2010년 4월 14일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128.html. [본문으로]
  2. 그 한 가지 예로, 김영삼 정부는 1996년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노동법 개정을 시도했다가 노조의 총파업과 야당의 반대에 부딪쳐 개정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헤게모니를 상실하는 결정적 지점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서울: 책세상, 2011), 276 [본문으로]
  4. 앞의 책, 398 [본문으로]
  5. 앞의 책, 400 [본문으로]
  6. 앞의 책, 403 [본문으로]
  7. 앞의 책, 400 [본문으로]
  8. 앞의 책, 400 [본문으로]
  9. Chen, Kuan-Hsing, Asia as Method: Toward Deimperializ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0, 17 [본문으로]
  10.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서울: 북21,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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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포항제철을 부인할 수 있을까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단상



황용연

(본 연구소 객원연구원, GTU Interdisciplinary Studies 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박사후보생)


 

1. 

   지난 해 말 한국-일본 외교장관 간에는 이른바 ’12.28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얼마 전 그 합의에 따른 재단이 출범했고, 조만간 그 합의에 따른 10억엔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 합의에 대한 서경식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 사이의 지상논쟁이 지난 3월에 한겨레신문을 무대로 벌어졌다. ’12.28 합의’에 대한 서경식의 부정적 입장과 와다 하루키의 긍정 후 개선의 입장이 시종일관 엇갈리는 이 논쟁에서 특히 필자의 주의를 끌었던 엇갈림의 지점은 이 곳이었다.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은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성공했다고 와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피해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이름을 밝히고 나서서, 끊임없이 일본 국가가 저지른 일을 비판한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은 기금 쪽에 신청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성공’을 자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일본 국가가 가장 진지하게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고, 그녀가 용서를 해야만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서경식) 

   “네덜란드에선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비판해온 얀 루프 오헤른이 기금을 거절했다.”고 한 서씨는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헨슨을 언급하며 “철두철미하게 일본국가에 유린됐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속죄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헨슨은 기금을 받을 때 “지금까지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습니다.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와다 하루키)  


   아시아 여성기금이 ‘반관반민의 모금 형식을 취한 위로금/사죄금’ 지급을 통해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배상을 대체하려는 시도였음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기금에 대해 ‘얀 루프 오헤른’을 예로 들어 비판하는 서경식에게 와다 하루키는 ‘마리아 헨슨’ 같은 경우도 있는데 ‘얀 루프 오헤른’만 부각시키는 것은 부당한 비판이라고 대답하는 셈이다. 확실히 ‘마리아 헨슨’ 같은 케이스는 한국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긴 하고, 와다 하루키의 글에서는 이런 케이스가 적어도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적지 않았다는 뉘앙스도 받을 수 있다(사실은 한국에서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이미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얀 루프 오헤른에게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여성기금이 그것을 수용한 피해자들에게 ‘불가능한 꿈의 실현’일 수 있었음을 인정하더라도, 수용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아무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지점에서, “적어도 일부의 피해자들에게는 정의의 실현이 되었으니 그만큼은 성공하고 진전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이 때 ‘성공’과 ‘진전’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일까.


2. 

   와다 하루키의 입장에서 보면, 서경식이 아예 ‘반동의 물결’에 몸을 담갔다고까지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느낄 만도 할 것이다. 한일협정 때문에 법적 배상의 길이 막혀서라고 하든, 현재의 일본국이 전전의 일본 제국과 연속성을 갖는 국가이고, 과거 전쟁 범죄를 자기 손으로 심판해 본 적이 없는 국가라, 지금 와서 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는 실제로 여성기금 출범 당시,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찬성 측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왔던 이야기다)이라고 하든, ‘국가의 법적 책임’이라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어렵다면 다른 해결책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란 생각과 행동을 했을 테니. 그리고 앞에서 보듯이 그 여성기금을 ‘해결’로 받아들인 당사자들도 상당수 있으니, 그 당사자들의 선택을 “법적 배상을 피하려는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났다”고 폄하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부분, 위안부 당사자들이 바라는 정의를 실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역시 ‘얀 루프 오헤른’ 앞에서는, 그리고 그녀와 같은 거부의 입장인 한국의 피해자들 앞에서는, 와다 하루키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여성기금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일 수 있다고 한다면, 혹시 그 해결은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서경식의 표현을 약간 수정해서 빌리면 “일본인 자신들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가.”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일본국과 일본 제국의 연속성에 관해서 간단히 짚어보자. 잘 알려졌듯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미국이 일본을 태평양 지역의 하위파트너로 활용하는 동맹 체제 위에서 가능했고, 그 동맹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처 중 하나가 일본 제국의 핵심구조인 ‘천황제’를 ‘상징’으로서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동맹체제의 핵심요소인 군사력을 ‘오키나와’에 집중시켜 본토는 ‘평화헌법에 기반한 군사력 청정지대’로 유지하고, 사회적으로는 ‘재일조선인’과 같은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등장함으로써, 이 문제가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토대 중 하나인 ‘제국의 핵심구조를 비무장이라는 조건으로 존속시키는 대신 전쟁 책임을 면제한다’는 점에 대한 직접적인 폭로가 됨을 의식하고, 전후 책임 문제를 통해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는 지식인 그룹이 생겨났다.

   최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큰 논쟁을 촉발한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이 상황을 탈냉전 이후 할 이야기가 궁색해진 일본의 좌파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이야기거리를 찾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 전체의 개혁과 연관시키기보다 ‘그 문제 자체에 집중했더라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제국의 위안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앞에서 와다 하루키에게 던진, 거부하는 당사자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여기서도 유효하게 될 것이다.



3.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과거사 청산’ 작업이 꾸준히 이어질 당시, 그 작업에 대한 이런 비평이 나온 적이 있다. “도대체 역사나 과거라는 것은 ‘청산’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마치 결산서를 작성하여 집행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런 것인가?”(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중에서)

   이미 벌어진 일을, 있었던 피해를, 되돌릴 수 없으니, 역사나 과거라는 것이 ‘청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 바로 그 가해자에게 계속 항의하고 있으니, 그 항의가 이어지는 한은 당연히 청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설령 그 항의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라도 이 피해의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결산’해 버린다고, 그런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자기 마음대로의 결산’이 벌어지는 경우, 대체로 그 밑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국가간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문제가 되는 ‘12.28 합의’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예 대놓고,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면서 ‘결산’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짚어 본다면, 이 문제를 ‘한일화해’로 풀길 바라는 의견들도, 이미 ‘한일’이라는 ‘국가간’의 구도를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국의 위안부]처럼 ‘한국과 일본’이라고 하든, 와다 하루키처럼 ‘조선 민중과 일본 민중’이라고 하든.

   그런데, 사실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문제’로 보는 것은 위안부 당사자들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위안부 당사자들을 “민족이 당한 피해”로 인식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 방식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최근 위안부 피해 관련 운동의 상징이 된 ‘소녀상’도, 대다수 피해자들이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고, 식민지 조선에서 어린 여성들을 동원하는 것이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관련 전략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이미지를 집약한 측면이 강함을 부정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말은, 위안부 당사자들이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그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 해방 후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학자에게, 그 문제제기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꽤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말이 그 ‘민족’ 내부에서 똑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도 된다. 상황이 이렇다면,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패러다임이, 위안부 당사자들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어떤 긍정적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렇다면 ‘국가간’ 문제라는 시각 말고, 위안부 당사자들과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 사이의 관계라는 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피해자들을 굳이 ‘한국인’으로 제한할 필요도 없이,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이 져야 할 책임을 요구하는 주체들로서의 위안부 당사자들이라는 시각으로 말이다. 물론 이렇게 볼 때, 당사자들 각각이 일본국의 책임 완수를 어느 선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얀 루프 오헤른’과 ‘마리아 헨슨’이 갈라졌고, 한국에서도 여성기금 거부자들과 수령자들이 갈라졌듯이 말이다), 위안부 관련 운동의 입장에서라면, ‘수용’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그것대로 존중하되, ‘거부’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끝까지 그 거부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게끔 도우는 것이 운동의 본질이지 않을까.


4. 

   위안부 당사자들과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 간의 관계라는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그 일본국의 전후 책임 문제와 깊이 관련된 미일동맹구조에 현재의 한국도 발 담그고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한국의 ‘현재까지의 번영’에 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도 외면할 수가 없게 된다. 국가간 법적 문제는 다 끝났다는 법적 핑계나, 미일동맹구조를 깨는 건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핑계 양쪽으로 활용이 될 만한 ‘한일협정’으로 받은 ‘독립축하금’이, 다름아닌 포항제철의 건설 기반 자금이 되었다는 것은 미일동맹구조와 현재의 한국 간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장 아메리는 이런 몽상을 했다고 한다. 독일인 스스로가 나서서, “굴욕의 날들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심지어 동시대의 소산인 아우토반마저도 예외 없이, 가능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집단”이 되는 몽상이다. 이 몽상이 실현된다면, “피해자의 원한이 주관적으로는 풀릴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장 아메리의 몽상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모든 것을 부인한다면, 한국인은 어떠할까. 방금 이야기한 대로 한일협정의 산물이 포항제철이라면, 한국인은 포항제철을 부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애당초 시작점인 장 아메리부터가 ‘몽상’이었고, 결국 그 몽상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하지만 여기서 나는, 체 게바라가 말했다는 그 유명한 문구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리얼리스트도 될 수 없다.” 

   역사와 과거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포항제철을 부인할 수 있다는, 포항제철을 가능하게 했던 미일한 동맹체제를 부인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 그 역사와 과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일 수 있단 말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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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2)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근대화 이론은 남한 사람들의 경제적 근대화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근대화 이론에 근거하여,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사례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이기백은 한국 역사를 ‘지배계급의 확장’의 역사로 파악하였으며, 그 귀결점이 ‘민중’이라고 주장했다.[각주:1] 이기백의 관점에서는, ‘민중’은 ‘자유민주주의의 주체’였으나, 민중신학에서는 그의 ‘민중’ 개념을 급진화하여 남한의 사회적 저항 전통으로서의 ‘민중 전통’을 정립하는 근거로 활용했다.[각주:2] 또한, 자본주의와 신분제 철폐 등의 맹아가 이미 조선 말기에 존재했었다는 내재적 근대화론을 주장한 역사학자 강만길 역시, ‘민중’을 한국사에서 그들의 저항을 통해 근대성을 진전시키는 주체로 규정했으며, [각주:3]민주화운동에도 이기백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다. 

   민중은 잘 정의된 개념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모호성이 다양한 사회운동을 포괄하는 데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각주:4] 그래서, ‘민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사회적/문화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 경제 발전의 이익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었다.[각주:5] 

   또한, 민중은 한국 민족의 ‘실체’로 이해되었는데,[각주:6] 이는 ‘민중’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되었음을 시사한다.[각주:7] 이 때, 민중은 박정희 정부가 구축한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적 민족주의의 주체로 상상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모호성과 더불어, 이 ‘한국 민족의 실체’라는 이해 또한, 민중 개념이 다양한 사회운동을 포괄할 수 있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민중을 ‘한국 민족의 실체’로 이해할 때, 이는 민중이 “식민주의, 외세 개입, 내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의 권위주의, 남한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 그리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계속되는 대립과 갈등”[각주:8] 등의 한국 근대성의 부정적 효과에서 야기되는 ‘실패’[각주:9]를 직접 겪어온 주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저항 엘리트 대다수는, 민중이 경제적/사회적 진보를 달성할 생산력의 주체이나 한국 경제의 종속적 구조와 이 구조를 유지하려는 정부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진정한 힘을 억압당하고 있다는 견해를 견지하기도 했는데,[각주:10] 김보현은 이런 견해를 이 저항 엘리트들이 박정희 정부와 근대화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 증거라고 비판했다.[각주:11] 이 때, 민중 개념은 남한 근대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반영하긴 하나, 근대화의 긍정적 측면까지 거부하는 개념은 아니게 되며, 도리어 박정희 정부 하에서 남한 사람들이 경험하던 ‘종속적’ 근대화와는 다른 ‘진정한’ 근대화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는 개념이 된다. 또한, 민중론자들은 민중과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를 구별하는데, 이 구별의 주 목적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몰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만,[각주:12] 동시에 이들이 일정하게 반공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각주:13] 

    여기서, 앞에서 지적한 민중 개념의 모호성을 남한 사회운동의 발전과정과 연관지어 살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남한 사회에서 분단과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까지의 사회운동이 붕괴한 이후, 흔히 ‘민중운동’이라고 불리우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새롭게 형성될 때, 이 운동들은 정당, 노동조합, 농협 등의 국가/시민사회의 제도 바깥에서 형성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논의한 대로, 남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와 근대화에 대한 의식과 담론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형성되는 동안, 그 담론들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민중운동의 출현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민중운동의 대표적 사건 중의 하나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박정희 정부의 ‘종속적’ 근대화에 맞서는 이상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에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태일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이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주화 담론이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들의 고통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14] 민중운동이 이렇게 국가/시민사회/학계의 제도 바깥에서 형성되는 현상을 민중운동의 ‘외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외부성’이 민중 개념이 ‘모호성’을 띠는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민중 개념에 내재한 이러한 ‘외부성’은 남한 사회의 저항 담론이 앞에서 논의한 ‘미국의 범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 준다 하겠다.


     (4) 남한 사회의 내부 합의의 동요와 붕괴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그의 정권이 붕괴한 후,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은 출발선부터 그 정당성에 심각한 하자를 갖게 되었다. 또한, 광주항쟁 이후, 미국은 남한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신군부의 진압과 학살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후원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반미운동이 한국 사회운동의 주요 주제로 떠올랐고, 이에 따라 남한 사회 내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남한 사회운동의 담론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호감도 보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학생운동가들 중 상당수와 노동운동가들 중 일부는 남한 사회의 대안을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 등에서 찾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은 대다수의 사회운동가들 역시도, 반공주의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주의 성향의 통일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남한 사람들의 민족주의적 경향에 영합하여 헤게모니를 구축하려 했는데, 영합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은 경제성장을 지속시키고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전두환이 그의 동료 노태우에게, 당시 민주화운동 측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를 하지 않고도 정권을 승계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의 이러한 시도는 6월 항쟁으로 좌절되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으며, 그 직후 7월부터는 3개월간 전국적인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자유주의 야당과 사회운동의 분열로 인해1987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또한 1991년 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이후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정부의 억압이 약해졌다. 이로 인해 1987년은 일반적으로 남한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된 연도로 인정받고 있다.

     민주화로 인해 시민과 노동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계속된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재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남한의 정부 통제 경제 시스템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각주:15] 또한, 남한의 국제경제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재벌과 미국 등의 양편에서 시장개방과 규제철폐의 압력이 심대해졌다.[각주:16] 군사정부의 후계자들과 자유주의 야당 일부의 협력으로 형성된 김영삼 정권은 “한국병 치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개방경제와 세계화의 경향에 조응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 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금융산업 규제 철폐를 틈탄 재벌의 과잉투자와 과잉확장을 막을 수 없었다.[각주:17] 결국 1997년 김영삼 정권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IMF의 프로그램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붕괴는 양면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이며 오랜 기간 ‘빨갱이’로 치부되기도 했던 김대중이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안에 ‘경제성장을 성취한 지도자’로 각인되어 있던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자유주의 세력의 첫 집권이었던 1997년 김대중의 집권은 반공발전주의의 합의에 근거한 과거의 경제/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자유주의 정부조차도 IMF의 요구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수행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과 김대중의 집권이 있은 후,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양 편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다. 보수주의 진영이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산업화세력’이라 규정한 반면, 자유주의 진영은 자신들을 ‘민주화세력’이라 규정했다.

     이 두 진영 사이의 갈등의 주 이슈 중 하나는 과거사 문제였다. 친일 문제, 군사 정권 하에서의 의문사와 민간인 학살,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폭력/살인 등이 과거사 진상 규명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보수주의 정부의 악행들이 드러났고, 해방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지식인과 언론의 친일/친독재 행위들도 역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보수주의 진영의 많은 인물들이 자유주의 진영에 의해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통일세력’, ‘극우 보수주의자’ 등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비난의 언어들은 그 비난 밑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임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비난에 직면한 보수주의 진영은 이 비난들이 자유주의 정부가 자신들을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의심을 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보수주의 진영은 반공주의를 강조하고, 북한이 더 이상 남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기본 인식 하에 북한에 대한 포용을 강조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이 핵실험을 자행하는 상황에서는 위험한 정책이 된다는 비판을 가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남한의 첫 대통령인 이승만을 “친일파와 함께 정부를 수립한 대통령”으로 비판하고, 박정희를 “일본 제국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장교 출신 대통령”으로 비판하는 자유주의 진영의 비판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불순한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주의 진영의 이러한 비판들 중에, ‘뉴라이트’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의 시도를 살펴 볼 만 하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공유하는 기본 이데올로기인 반일민족주의와 분리된 남한 역사를 성립시키려고 시도한다.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영훈은 남한의 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반한 서구 문명의 수용사로 볼 것을 제안한다.[각주:18] 이영훈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대는 근대적 법률, 시장 경제, 근대적 관료제 등의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으며,[각주:19] 이승만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이러한 근대적 유산들을 잘 계승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 남한을 건국함으로써 오늘날 남한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각주:20] 반면 북한은 그 근대적 유산들을 “친일 잔재”라고 매도하며 거부하고 민족주의 기반 위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국함으로써, 오늘날 북한의 쇠망의 실마리를 열게 되었다.[각주:21] 하지만 이영훈이 보기에는,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는 것을 과도한 민족주의가 방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하게 되었고,[각주:22] 심지어 민족주의의 명분 아래 북한 독재를 비판 없이 관용하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영훈의 제안은 ‘현재’의 번영을 명분 삼아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그는 남한의 건국 과정이 현재 남한의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공’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건국 과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또한, 이영훈은 남한이 북한의 존재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국민 국가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가 남한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남한의 건국 과정을 높이 평가하고 남한 국가의 현재의 성공을 크게 강조함으로써, 민족주의의 대상에서 북한을 배제하고 남한에만 그 대상을 한정한 일종의 ‘남한 민족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의 주장은 종종 “친일 반민족주의”로 비난당하는데, 이는 그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영훈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러한 비난이 벌어지는 상황은 남한 사람들 대다수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데, 그 “민족주의”에 깔려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주목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 반민족주의”라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남한 사람들의 민족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등이 쳔 꽝싱이 지적하듯이 그 자체로 냉전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온 측면[각주:23]을 밝히는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2000년대부터는 자유주의 진영 사람들의 민족주의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변화는 주로 반미 이슈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2002년 미군의 군사 행동 중 부주의로 살해된 두 명의 소녀를 추모하는 촛불 시위가 남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 반미감정이 폭넓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 반미감정은 소녀들을 살해한 미군이 한미간의 불평등한 행정협정으로 인해 한국 법정에서 심판되지 못함으로서 한국의 주권이 훼손되었다는 감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의 반미감정은 그 동안 사회운동에서 견지되던 반미감정과는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자가 미국이 남한을 통제하고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지배자’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전자는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이 미국과 마땅히 가져야 할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감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자유주의적 시민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자리잡게 되는 기원이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혈맹’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미국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1. 이기백, 한국사신론(제2판, 서울: 일조각, 1976), 442. [본문으로]
  2.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64-66 [본문으로]
  3. Brazinsky, Gregg.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ocracy.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184 [본문으로]
  4. Koo, Hagen.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143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38 [본문으로]
  7. Koo, ibid. [본문으로]
  8. 이남희 지음, 유리/이경희 옮김, 민중만들기(서울: 후마니타스, 2015), 25 [본문으로]
  9. 위의 책, 23. [본문으로]
  10. 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서울: 갈무리, 2006), 315~318 [본문으로]
  11. 위의 책, 321 [본문으로]
  12. Koo, ibid, 143 [본문으로]
  13. 김보현, 앞의 책, 323. [본문으로]
  14. 안병무, 앞의 책, 257~258 [본문으로]
  15.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서울: 책세상, 2011), 131 [본문으로]
  16. 위의 책, 133~137 [본문으로]
  17. 위의 책, 166 [본문으로]
  18.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서울: 기파랑, 2007), 318 [본문으로]
  19. 위의 책, 173~179 [본문으로]
  20. 위의 책, 233~249 [본문으로]
  21. 위의 책, 174 [본문으로]
  22. 위의 책, 315~316 [본문으로]
  23. 쳔 꽝싱, 제국의 눈(파주: 창비, 2003), 1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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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1)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왼쪽의 만화는 2012년 12월 10일, 그러니까 제 18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경향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이다. 이 만평은 현재 남한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분열 과정과 그 분열로 인해 현실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고도 심도 깊게 보여준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논리는 남한의 사회적 분열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양쪽 진영, 즉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서로 상대방과의 분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제이다. 말하자면,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정권을 지지하고 경제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산업화”의 논리가,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정부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민주화”의 논리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 두 가지 정당화 명분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성공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건 자유주의자들이건, 예를 들어 현재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양쪽 진영 사이의 갈등이 젊은이들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 사람들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자신들 주장의 정당성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남한의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이러한 분열 과정을 촉진시킨 사회적 합의의 붕괴는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한국 전쟁 이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가 남한의 정치를 지배했고, 반공주의의 물결과 군사독재적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군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을 이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민족주의다. 그리하여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 과정은 민족주의와 결합한 반공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흔들기 시작했고 1997년 외환 위기는 그것을 완전히 두 조각으로 붕괴시켰다. 그 결과, 외환 위기 이후 남한에는 더 이상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반 조각의 합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를테면,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사회적 합의 중에서 반공주의라는 조각을,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라는 조각을 붙들고 있는데, 이는 현재 남한의 사회적 분열 상황을 대표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열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른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나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격 없는 사람들,” 혹은 정상적인 사회적 주체가 될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무능력자”로 간주되는 사회적 고통이다.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지만,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 한국이 두 나라로 분열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분단 이후 민족의 분열과 민족주의라는 모순을 해결하고, 일제 식민지 기간에 형성된 민족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한과 북한 정권은 모두 서로를 “민족/국가의 적”으로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민족/국가의 진정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반제국주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해 이 투쟁을 이용하고 있는 반면,[각주:1] 남한 정권은 북한 정권이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민족/국가의 적이라고 라고 비난하면서,[각주:2]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자신들이 “유엔에 의해 승인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국가”[각주:3]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자기 정당화의 수단일 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더 고착화되고 심화되었다. 남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은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흉이고,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 한국전쟁의 원흉이고 남한 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 이승만은 일민주의(一民主義)가 남한과 장차 통일될 국가의 민족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각주:4] 일민주의의 요점은 반공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증오, 분리될 수 없는 국가 정체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5] 신기욱에 따르면, 일민주의는 혈통민족주의에서 보여지는 파시스트적 경향이 반공주의와 결합된 형태이다.[각주:6] 토지개혁이 시행되고 정부가 행정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이 시기에, “한국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구분되는 “대한민국(남한)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각주:7]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물질적 기초는 박정희 정권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박정희는 국가를, 개개인을 위한 중재자가 따로 필요 없는 한국 국민의 자연적인 모임으로 이해했고,[각주:8] 이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개념과도 공통점을 갖는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각주:9]와 “민족중흥”[각주:10]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슬로건들이 보여주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더 능동적으로 개발주의를 활용하였고,[각주:11] 한국 “국민”이 국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단결해야 하며 모든 국민(國民)은 생산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12]

     그러므로, 일민주의가 그러했듯이,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던[각주:13]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열을 증오했다.[각주:14] 한편,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적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남한에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형성이나 자본의 축적 등과 같은 근대화의 조건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구식 근대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의 근대화를 주창하였다.[각주:15] “한국적 근대화”라는 이 개념은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이념적 기반이었다.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중 개발주의는 남한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북한을 남한 정권이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통한 북진통일을 내세운 반면, 박정희 정권은 한국전쟁과 같은 또 다른 미래의 전쟁 없이도 북한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는 흡수통일 논리를 내세웠다.[각주:16] 여기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는 경제발전인데, 이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제안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남한 국민들이 단결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7]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 동안, 남한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빠른 경제 발전 과정에서 북한을 향한 남한 국민들의 증오는 일정 부분 그들의 능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환되기도 했는데, 독재정권은 이러한 변환을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각주:18] 그리고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남한 국민들은 국가적 성취감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성취감은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이러한 변화들이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한 국민들은 박정희를 남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까지도 남한 보수 진영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반으로 남아있다.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미국의 군사개입은 남한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탈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보수적인) 한국인들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혈맹’이라 부른다.

     박명림의 ‘미국의 범위’[각주:19]라는 개념은 1945년 이후 미국의 남한 개입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개념이다. 박명림에 따르면, 남한에서의 ‘미국의 범위’는 공산주의 혁명의 방지와 파시즘의 방지 사이이며 구체적인 미국의 정책은 이 범위 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한다.[각주:20] 그리하여, 이 진자운동의 범위 내에서, 미국은 어떤 때는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재자를 지원하기도 하였다.[각주:21] 물론, 이러한 ‘미국의 범위’는 남한이 미국의 영향권 내에 머물러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므로, 이 범위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편향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한편, 남한 정부의 수립과 한국전쟁에서의 생존은 물론이고,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 자체도 미국의 막대한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의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은 직후,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 주력한 일은 근대적 교육 제도와 관료제의 수립과 언론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이 제도들을 통해 미국의 이상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남한인들에게 이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각주:22] 또한, 미국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세우고,[각주:23] 사관학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여러 연수 과정을 통해 남한군의, 특히 장교단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각주:24] 그 결과, 남한군 장교단은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관료제 운영의 노하우와 지식도 갖추게 되면서, 자신들을 국가 안보뿐 아니라 경제 발전도 지도할 능력이 되는 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고,[각주:25]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근대화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은 미국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각주:26]

     1950년대의 미국의 개입이 위에서 본 것처럼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시스템 – 교육, 관료제, 군대 등 – 을 확립하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미국은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주력 지원을 했다. 미국이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제안한 것은 ‘근대화 이론’이었는데,[각주:27] 이 이론은 남한과 같은 ‘저발전’ 국가의 근대화는 오직 전통적 요소를 배격하고 미국과 같은 ‘발전된’ 서구 국가와 연계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각주:28] 이 이론에서, 근대화는 저발전 국가가 기술적 지식을 모방하고 흉내내어 익힌 뒤 그 기술적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걷게 되는 발전의 보편적인 길로 이해되었다.[각주:29] 그리하여, 미국이 제안한 근대화 이론은 탈식민 국가들에게 공산주의적 발전경로에 대한 대안의 구실을 했다.[각주:30]

     남한의 지식인들은, 비록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요소의 적극적 역할을 더 많이 찾으려 하긴 했어도,[각주:31]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은 근대화 이론을 널리 수용했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각주:32] 그 결과, 박정희 정부를 근대화의 리더로 인정하는 지식인 그룹도 형성되었다.[각주:33] 그러나, 근대화 이론을 수용한 다른 지식인들 중에는, 근대화 개념이 독재정치를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다.[각주:34] 짚어 볼 점은 근대화 이론에 대한 이 두 가지 반응이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범위’ 안에 이미 포함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미국이 근대화 이론을 제안한 의도 자체가 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남한인들의 열망을 불러일으켜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각주:35] 요약하면, 미국은 남한 사회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으며, 특히 제도적, 지성적 측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 웹진 <제3시대>


  1. Shin, Gi-Wook.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155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이기백, 한국사신론. 제2판 (서울: 일조각, 1976), 442 [본문으로]
  4. Shin, ibid., 101 [본문으로]
  5. Ibid. 102~103 [본문으로]
  6. Ibid. 78 [본문으로]
  7. 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서울: 갈무리, 2006), 83~88. [본문으로]
  8. Ibid., 122~123 [본문으로]
  9. Shin, ibid., 103~104 [본문으로]
  10. 김보현, ibid., 122 [본문으로]
  11. Shin, ibid., [본문으로]
  12. 김보현, ibid., 140~144 [본문으로]
  13. 김보현, ibid., 153 [본문으로]
  14. Shin, ibid., 107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160 [본문으로]
  17. Ibid. 162 [본문으로]
  18.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1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제2권(서울: 나남, 1996), 523 [본문으로]
  20. Ibid. 523~524 [본문으로]
  21. Ibid. 524~526 [본문으로]
  22. Brazinsky, Gregg.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ocracy.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41 [본문으로]
  23. Ibid., 73 [본문으로]
  24. Ibid., 79 [본문으로]
  25. Ibid. 100 [본문으로]
  26. Ibid. 118 [본문으로]
  27. 정일준, "한국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원용진, 김덕호 엮음,아메리카나이제이션(서울: 푸른역사, 2008), 339~340. [본문으로]
  28. Ibid. 348~349 [본문으로]
  29. Ibid. 351~352 [본문으로]
  30. Ibid. 350 [본문으로]
  31. Brazinsky, ibid, 172 [본문으로]
  32. Ibid. 177 [본문으로]
  33. Ibid. 178 [본문으로]
  34. Ibid. 184 [본문으로]
  35. Ibid, 186~1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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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인가?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민중신학이 성립되던 초기에 나온 민중신학 비판 글의 제목이었다. 당연히 저런 질문을 던져 놓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글의 내용이야 굳이 돌아볼 필요가 없다 치더라도 저 글의 제목에는 뜯어 볼 것이 조금은 있다. 비판 글을 쓰면서 제목을 저렇게 달았다는 것은 ‘신학’과 ‘한국적’이라는 요소가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라고 봐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민중신학은 좋든 싫든 간에 ‘한국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니, 저 비판 글을 쓴 사람이 헛다리 짚은 것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저 질문에 대해서 적절한 답은 어떤 것일까. 과연 민중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인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일까.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 있는 답들이 있다. 민중의 고난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언했기에 ‘신학’이며, 특히 한국 민중의 고난에 주목하고 그 고난의 흔적을 한국 특유의 개념(대표적인 예로 ‘한’)과 문화 유산 등에서 발견해 냈기에 ‘한국적’이라고. 이러한 답들이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의 질문들에 접근해 보려 한다. 


    2. 

    우선 민중신학이 ‘신학’인가라는 질문부터 뜯어 보기로 한다면, 이 질문에 따라올 수 있는 다른 질문이 있을 것이다. 과연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민중신학은 스스로를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냥 놔 두면 사방팔방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다할 수 있게 될 테니 일단 여기서는 ‘구원’이라는 한 가지 지점에 집중하기로 한다. 즉,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민중메시아론’이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 용어는 통속적으로는 “(예수와 동일한) 민중이 메시아다” 혹은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이해되며, 그 때문에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민중신학이 과연 신학 맞냐는 보수적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난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대답은 일반적으로는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해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 즉 구원사건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말하건,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이라고 말하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과연 ‘메시아’란, 즉, ‘구원’이란 무엇이냐고 말이다.

     민중신학의 태두 서남동 목사는 일찍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겠냐고 말이다. 그리고 서남동 목사 자신은 그 대답을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말을 민중신학의 다른 태두인 안병무 박사도 한 바 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는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럴 터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구원’은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을 바꿔 본다면,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이 때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서남동 목사의 말을 빌리면,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 앞에 불러 세운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됨을 발뺌할 수 없게 드러낸다. 함께 하느냐 외면하느냐. 그래서 각자의 인간성이 실현되느냐 아니면 질식되어 버리느냐.

     이렇게 본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할 때, 구원이란 말은 어떤 ‘성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게 된다. 차라리 ‘폭로’와 ‘걸림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와 ‘우리’, 그리고 그 ‘나’와 ‘우리’가 만드는 ‘사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폭로’함으로써, 지금까지 가던 길에 브레이크를 걸게 되는 ‘걸림돌’ 말이다.

     구원을 폭로와 걸림돌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구원은 어떤 안정적인 예측과 파악이 가능하다기보다는 갑자기 일어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구원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구원사건’으로 파악될 것인데, ‘사건’으로 파악된다면 그 사건은 사건 참여자들의 속성에 의해 파악되기보다는 그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은 그러한 ‘구원사건’을 두고 ‘민중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민중사건’을 ‘신이 현존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어떠한 ‘집단’으로 이해되고 민중신학 안에도 그러한 이해 경향이 꽤 강하게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하게 되면 민중이라는 말을 이러한 사건들에 나타나는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최근의 한 민중신학 글에서는 “민중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은 어떻게 출현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이 주목하는/주목해 온 ‘속성으로서의 민중’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체로 합의할 수 있는 대답은 “사회 체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기/거부하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복음서에서는 “오클로스”라는 귀속성 상실의 현상으로 나타났고, 1970년에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한다던 정부나 민주주의에 일로매진한다던 야당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전태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경제력”과 “능력”이라는 정당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배제’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무능력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는 ‘세월호 사건’이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해 사건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하는 정부와 지배자들에 의해 ‘욕심많은 불순분자’로 취급당하는 ‘세월호 유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거부’라는 속성을 문제삼는 것은 곧 ‘거부’라는 현상을 낳은 ‘체제’를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원이 ‘폭로’와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체제’를 문제삼는 것은 그 체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이라는 것이 특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고, ‘죄’라는 것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거부’와 ‘체제’와 ‘사람들’을 문제삼는 이 지점은 ‘죄’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부’를 문제삼으면서 ‘죄’의 문제를 묻는다면, ‘거부’함으로써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상황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질문은 ‘거부’당한 ‘죄인’과 ‘거부’하는 ‘죄인 아닌 사람’들의 자리를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술이 가능하다. 구원이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고, 반대로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구원은 ‘거부당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 해결의 능력을 발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굳이 ‘능력’을 발휘했다면 차라리 ‘살아남는’ 능력을 발휘한 것일 터이다. 그래서 그들의 ‘살아남음’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됨으로써 구원이라는 것이 발생한다는 말일 터이다. 따라서 이렇게 볼 때 ‘민중메시아론’이란, ‘민중’이 예수 ‘대신’ 혹은 예수’와 함께’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민중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방법 말고는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구원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 뒤따르는 것은 민중신학에 의하면 ‘증언’이다. ‘증언’은 어떠한 일이 일어난 뒤에 나오는 ‘응답’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응답’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응답’을 하는 주체의 ‘변화’이기도 하다. 각 사람(그리고 어쩌면 ‘신’까지도)은 이러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어떤 지점에서는 촉발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증언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그 증언을 듣는(그리고 다른 이에게 말하는) 자로 연루될 것이다.


     3.

     민중신학의 ‘신학’성이 이렇게 해명될 수 있다면, 다음으로 ‘한국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때, ‘한국적’이란 말의 의미는 어떠한 ‘요소’로 이해되거나, 혹은 신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한국적’이라고 이해되는 어떠한 (주로 문화적인) ‘요소’를 신학에 도입하거나, 혹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려 할 때 그것을 ‘한국적 신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닐 터이다.

     방금 짚어 본 두 가지 의미에서의 ‘한국적 신학’이란 기준으로 민중신학을 살펴 본다면, 우선 후자의 차원, 즉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은 거의 자명한 수준에 가깝다. 전자의 ‘한국적 요소’에 관련된 차원에서 보더라도, 민중신학이 한국적인 사회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신학에 도입해 온 신학이라는 점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민중신학은 한국적 요소를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로 ‘번역’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신학의 형성 요소로 삼아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동등한 대당을 이루는 방식(‘두 이야기의 합류’) 혹은 그 둘이 형성하는 또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방식(‘화산맥’)으로 신학을 했다는 점과, ‘한국적 요소’를 찾으려 할 때에도 그 ‘한국적 요소’에서 ‘한국적’이라는 점만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요소 안에 담겨 있는 사회적 갈등과 균열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는 점은 지적해 둘 가치가 있다.

     ‘한국적’에 대한 이러한 의미의 계보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적 요소’에 대해서 묻는다면, 지금 현재 ‘한국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를 들어, 판소리와 소녀시대의 노래 중에서 지금 더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쪽이든 답을 고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의 변화와 그 변화의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답을 고르든지 간에, ‘한국적’이란 말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답을 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오히려 어떤 것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어떤 맥락에서 ‘한국적’이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가를 해명해내는 것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답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한국적인 것’의 두 가지 차원, ‘한국적 요소’를 찾는다는 차원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차원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된다.

     이 점을 전제한다면,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이런 물음으로 바뀔 수 있다.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과연 한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 본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성취’와 ‘회복’보다는 ‘폭로’와 ‘걸림돌’에서 구원의 현상을 읽어 내려는 경향에 있었다. 그리고 그 ‘폭로’와 ‘걸림돌’이 겨냥하는 것은 ‘거부’라는 현상을 낳는 체제였고, 그 체제에 연루되어 ‘거부’를 실제로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에서, 한국 사회의 갈등에서 어느 편이 옳은 편인지를 식별하고 그 편을 든다는 방식보다는, 그 갈등까지도 ‘거부’를 낳는 한국 사회의 체제의 구성 메커니즘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거부당하는/거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탐색하는 방식 쪽이 민중신학의 신학성에 더 친화적이게 된다.

     이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는 가장 흔한 용어 중의 하나가 된 ‘갑을관계’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물론 갑을관계라는 말이 일상적/미시적 관계 안의 권력의 문제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긴 하며 거시적 권력 관계와의 연관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도 상당 부분 효용이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갑을관계’라는 말이 애당초 ‘계약관계’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권력 관계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끼리의 관계로 묶어 두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체성의 변화를 탐색하는 핵심 고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을 민중신학은 주목해 왔다. 민중신학적 시각에서는, 이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개인과 국가와 거래할 수 있고, 그 거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진전을 말할 수 있으나, 이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심화와 동시에 진행됨에 따라 욕망의 거래 구조에 낄 자격이 있는 ‘개인’과 끼기를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거부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불법체류자’,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노동자의 경우(최근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에서 전체 노동자의 경우로 확장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등 – 이러한 거부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상당히 만연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들 속에서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길로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을 찾기가 힘들다고 점점 더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무능력자’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이들을 거부하는 ‘합리적’ 이유 – 경우에 따라서는 그 거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 있는 ‘나’조차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는 – 에 대한 성찰까지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이 ‘무능력자’들이 현실적으로 취급받는 방식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 가령, ‘비정규직’과 ‘양극화’ 등의 언어 자체를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 않은가 – 오히려 이들을 ‘사회적 문제’로 인지함으로써 “나도 그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라는 개인/체제의 자기정당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 가령, ‘서민’ 혹은 ‘민생문제’라는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상기해 보자 – 것임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노동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필요한 자세는 ‘무능력자’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무능력자’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설령 ‘무능력자’의 편을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능력자의 편은 이렇게 드는 것이다’라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한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앞에서 지적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무능력자’가 처한 위치가 ‘강도 만난 사람’이 처한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 즉 그 사람을 직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민중신학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써 온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효력에 공명이 일어난다면, 그 공명이 일어나는 만큼 민중신학은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이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이런 신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이란 어쩌면 ‘버티기’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죄인임을/죄인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만드는 체제도, 죄인이라고/죄인이 아니라고 바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아니, 사실 구원이란 것이 근원적으로 ‘약한 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면, 그러한 구원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버티기’를 시작한 이후의 삶이 그 이전의 삶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삶의 크기만큼, 그 삶이 다른 ‘버티는’ 삶과 연결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그 삶에 직면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구원의 시작이라고, 이 시작점을 거치지 않고는 구원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고, 그렇게 구원을 얻는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한국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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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들만의 '5.18'?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야구팬인 필자가 미국에서 주로 찾는 한국 인터넷 사이트 중에 하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로 구경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사이트 A에서는 최근 특이한 현상 하나가 벌어지고 있다. 이 사이트와 규모에서 경쟁 관계에 놓이는 다른 야구 관련 사이트 B에서 시시때때로 A사이트를 게시판 도배와 욕설, 비꼼 등의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내용이 주로 '호남 비하'인 것이다.

A사이트에는 일반적으로 광주 연고의 KIA 타이거즈 팬이 가장 많다고 여겨지며, 또한 A 사이트의 정치적 성향은 주로 '반한나라당'으로 인식된다(이 사이트는 2008년 촛불시위와 연관되어 언급된 사이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A사이트가 공격받을 때, 공격하는 B사이트 이용자들은 A사이트를 호남 사람들에 대한 비하어인 '홍어'들이 주로 모인 '홍팍'이라고 지칭하며, 공격하는 날짜는 예를 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일이라거나 전두환의 생일 등이고, 공격내용은 전라도에 대한 비하, 5.18 항쟁에 대한 '폭도' 비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등이다. A사이트의 회원들은 5월 18일이 또다른 공격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지경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호남차별과 5.18 항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구적 입장의 표출이다. '민주화 이후'의 시기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되고 비판되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이라는 나쁜 행태의 지속이라고만 일축하기에는 생각할 여지가 남는다. 왜냐하면, 위에서 서술한 B사이트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의 행태에 대해서, 그 행태가 어떤 굳건한 신념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싫은 대상인 A사이트에 대한 편가르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 위키사이트의 설명은 필자의 이런 의문을 뒷받침하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B사이트의 경향이 보수적이고 호남차별적이 된 것은, '반한나라당' 성향이고 KIA 타이거즈 팬이 많다는 A사이트와 경쟁 관계에 놓이다 보니 A사이트의 반대 성향을 추구하게 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신념이라기보다는 편가르기일 뿐일지라도 '나쁜 생각'을 선택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의문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잡아 보고 싶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편가르기'에서 자유로울까.

경북 지역 대학의 어느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진술을 한다. 1980년대 이후 5.18 항쟁이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면서 국가적으로 기념되자, 다른 지역에서는 '우리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찾아 기념하는 의례들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각 지역별로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5.18 항쟁은 '호남'의 것일 뿐이니 그것보다는 '우리 지역'의 것이 더 좋다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A, B 사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5.18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은 '우리 편'이 아닌, '호남'이나 '운동했다는 사람들' 등의 '저 편'의 것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민주화운동'이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상대편'이 그 의미를 접하지 않으려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민주화운동 지지'나 '반한나라당' 동의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가장 흔한 어휘부터가 '반한나라당'인 것에서 보듯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는 '한나라당'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여기에다가 '한나라당'을 일단 몰아내고 봐야 한다는, 마치 악당을 최후의 한판으로 쓰러뜨린다는 식의 무협지 내지는 액션영화스러운 상상력이 덧붙여진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물론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도나도 '보편적 복지'라는 답을 내놓고 있긴 하다. 그런데, 지금 너도나도 외치는 '보편적 복지'란 말 속에는, 그 '복지'의 기반이 되는 사회구조와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다르고 그래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하면 이렇게 좋아요"라는 프로파간다만이 보이고, 그래서 '답'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에 대한 '얼버무림'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상황이 이렇다면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가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반복의 의도가 어떻든 또다시 '편가르기'에 빠질 테니까. 오히려 필요한 것은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던 사람들의 '자기 해체'일지도 모르겠다. '민주화운동'을 해왔다는, '수구세력'과 싸워왔다는, 거기에 덧붙인다면 그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 중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더 '왼쪽'으로 가서 '진보운동'을 했다는, 그 코드 외의 다른 현실과 맞닥뜨리기 위한 '자기 해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5.18 항쟁이야말로, 바로 그 '운동'을 해 왔다는 사람들의 코드 밖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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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학규
    2011.05.19 17: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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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이렇게 웹진도 발간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계셨군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요즘 필자의 살림 걱정 중에 하나는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달러 환율이 좀처럼 그 때 수준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계속 떨어지던 환율이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후 다시 떨어지긴 했어도 예전 수준으로까지는 돌아오지 않으니, 지금 환전하면 그 때 환전했던 금액보다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한 달 전 환율이 확 올라갔을 때 터졌던 사건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신 독자분들도 있으실 테다. 그 때가 바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던 때였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어찌 보면 오랜만에 북한을 남한 사회의 중심 논란거리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사건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군사훈련을 둘러싼 '본때를 보여 주어야 다시는 안 그런다' vs '안 그래도 긴장 분위기인데 계속 불 지르면 평화란 어디서 찾으란 말이냐'라는 논쟁부터, 이미 소위 햇별정책을 쓰던 정권이 물러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햇볕정책이 맞니 틀렸니라는 식으로 벌어진 논쟁까지.
각자 자기 입장은 뚜렷할 수 있어도, 아니 오히려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쉽게 승복할 수 없이 벌어졌던 논쟁들 속에서, 문득 제목의 질문을 한 번 던져 본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쉬웠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북한은 적이었다. 그것도 실제로 총을 맞대고 싸우기까지 했던, 그래서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적 말이다. 그리고 그 적은 동시에 남한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거울 구실도 했다. '야만스러운 공산주의 독재사회'라는 북한의 이미지를 구축해 놓고, 남한은 이 이미지와는 반대이므로 살 만한 사회이다라고 말하기 위한 거울로서의 구실.
그런데 정작 그 거울을 많이 써 먹었던 남한의 정부도 '공산주의'는 아닐지 몰라도 '야만'과 '독재'이긴 마찬가지였음이 폭로되면서 북한에 대한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이런 견해들은 '동족'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적 측면에 관한 호감이 거기에 덧붙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다는 '민족의 원형'이라는 이미지가 덧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견해들이 수다히 제기되었어도, 다른 한 편에서는 여전히 북한은 적이었다.

이런 두 방향의 견해는 여전히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유력한 견해로 자리잡고 있지만, 80년대 말 이후 남한과 북한의 행보가 상당히 엇갈리면서 새로운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붕괴된 영향과 홍수/가뭄 등의 심각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북한 사회가 식량 걱정까지 해야 되는 지경이 된 반면, 남한 사회는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개최하면서 그 동안 지속되어 온 경제성장이 마침내 국제적인 성공의 증표가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물론 중간에 IMF라는 좌절을 겪기는 했어도).
그리고 이 시기에 초등학생들이 "통일되면 거지떼가 몰려 올 까봐 싫어요!"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북한을 '적'으로 여기던 '동족'으로 여기던 간에, 양편 모두에게 북한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갖는 존재였다면, '거지떼' 운운하는 초등학생에게는 북한은 별 비중이 없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어쩌면 월드컵 때 시청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대~한민국"은 바로 그 무시의 완성형이었을지도. 이제 '남한'만으로도, 그 '남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국가가 되었다는 외침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무시는 사실 연평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난다고 해야겠다. 연평도 사건을 일으킨 북한의 이미지는 무서운 적이라기보다는 '양아치'에 가깝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그런 양아치를 혼내 줄려면 얼마든지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물론 미국이라는 '큰 형님' 허락이 필요할 수도 있긴 하지만) '안 혼내 주고' '퍼주기'만 했던 게 문제지, 혼내 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못 혼내 준 건' 아니었다고들 하니 말이다. 물론 연평도 사건 직전에 있었던 '3대 세습' 등의 얼빠진 행위가 이런 '양아치' 이미지에 일조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그 동안의 대북정책을 두고도 북한을 적대시했다기보다는 북한을 무시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협상이든 적대든 북한에 대해 어떤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기보다 북한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면 도와줄 것이라는 입장만 계속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평도 사건은 적어도 국가 운영의 차원에서는 이런 '무시'만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햇볕정책'은 과연 자유로울까.
물론 '햇볕정책'은 북한을 무시해서는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기본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보자는 정책이니 말이다. 어쩌면 본격적으로 그 일치의 지점을 찾기도 전에 일단 급한대로 '퍼주기'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 햇볕정책의 현실적 난관이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햇볕'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결국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 '햇볕정책'의 정식 명칭은 '대북포용정책'. 즉 남한이 북한을 포용한다는 이야기지 그 반대는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을 남북평화 쪽으로 어필하려 했던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에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남한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트위터에서 이야기했단다. 그렇다면, 햇볕정책과 그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북한은 적어도 '동등한' 위상의 주체는 아니란 이야기이니, 이것 역시 '무시'의 흔적이지 않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연평도 사건은 이제 이런 '무시'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제목의 질문을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북한이란 무엇인가"에 앞서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는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북한을 새삼스럽게 '겁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남한 사회의 자신감,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올림픽과 월드컵 등의 계기로 표출될 수 있었던 그 자신감, 도대체 이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묻게 된다면, 북한 말고도 다른 '무시'의 대상들이 그 물음의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아마 이 글의 제목도 바뀌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우리'라고 할 때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냐, 그 자신감을 주도한 사람들 이야기냐 그 자신감 때문에 어쩌면 무시당했던 사람들 이야기냐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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