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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불화(不和)의 왕”이 오신다(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8. 12. 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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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不和)의 왕”이 오신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눅2:14)


Intro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만의 절기가 아닙니다. 특정 종교의 절기 가운데 유례없이 일반인 모두에게 뿌리내린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 연말연시까지 한달 사이가 1년 중 가장 큰 대목입니다. 그날을 위해 적금을 붓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하고, 여행을 가기 위해서이지요. 통계에 의하면 그 기간동안 매출이 일년 매출의 40% 가량 된다고 합니다. 세계 전체 자원의 60% 이상을 미국이 소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미국의 한달 소비량을 반으로 줄여도 세계의 많은 기근과 가난과 난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한 사람들이 2000년이 지난 후 크리스마스가 일년 중 가장 많은 돈을 들여 선물을 주고 받으며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라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는 현 시점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마음을 한 번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격적으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조금은 뜬금없지만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 아니 트럼프로 대변되는 오늘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1. 2017. 1. 21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사


미국에 있었을때는 한번도 미국 대통령 취임사에 대해 들여다 본적이 없는데, 요즘 제가 ‘한반도 평화체제와 한국교회’ 관련 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반도의 평화무드를 만들어가고 있는 세 인물,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중 트럼프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를 한번 파헤쳐보자라는 취지에서 제일 먼저 본 그와 관련된 텍스트가 바로 트럼프의 2017년 대통령 취임사.

좋은 대통령 취임사가 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희망과 감동, 미국의 세계 평화를 위한 헌신과 사명 (이것은 미국의 선민주의, 예외주의로 가는 우를 범해왔다), 연방제이지만 하나 되고 단결하는 미국이 되자는 호소, 무엇보다 앞으로의 미국에 대한 비젼 등이 취임사 안에 잘 드러나야 합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취임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 (Pause) ‘자유’라고 합니다. 미국의 독립정신이 자유죠. 미국을 만든 것이 자유였고, 현실 정치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높은 차원의 문제로 고양 승화 시킬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가 미국에서는 자유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인 제스쳐였던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듯 자유는 미국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자유라는 말을 취임사에서 어떻게 녹여낼지 고민합니다. 트럼프보다 앞선 대통령이었던 오바마 취임사에서 자유가 10번 쓰였다고 해요. 하지만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단 한번 사용합니다.

자유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정의, 평화,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개념입니다. 트럼프의 취임사에는 지구를, 그리고 미국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겠다, 라는 다짐과 선언이 없습니다. 미국의 평화와 정의가 정치적 제스쳐이고 미국 대통령이 던지는 뻥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도 많이 속아와서 우리는 이제 그들의 말에 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염치불구 그 뻔한 거짓말을 계속 취임사에 담아왔었는데, 트럼프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는 거죠. 염치같은 거, 말치레 같은 것 하지 않고 솔직하게 미국의 민낯을 취임사에서 드러냅니다. 오직 그가 한 말은 위대한 미국의 재건, 몰락한 미국을 구하겠다, 라는 것입니다. 오직 미국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내 트럼프 지지층만을 향한 선동의 언어임과 동시에, 세계시민을 향해서는 알아서 기어라, 는 협박과 공갈의 언어입니다. 미국이 먼저이고, 미국이 제일이고, 미국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America First!)

저는 트럼프가 했던 취임사의 모든 말들 중에서 다음의 표현에 시선이 꼿혔습니다. “(지금 미국은) 새로운 천년이 탄생하는 순간에 서 있다 We stand at the birth of a new millennium.” ‘새로운 천년’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이어서 얼핏 복음적이고 은혜롭게 들리는 말일 수 있겠으나. 미국의 역사에서 드러낸 천년사상, 즉 천년사상이라는 구호가 작동했던 시기, 이유, 원인 알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말하는 새로운 천년 a new millennium은 19세기 미국부흥 운동의 용어인‘세대주의 전천년설’에서 기원합니다. “종말이 멀지 않았다. 예수의 재림 이후 새롭게 다스려질 천년이 곧 온다.” 그 예수가 재림하는 공간이 미국이고, 그 공간에서의 주역이 미국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서부개척을 가능하게 하고, 19세기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의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트럼프는 그 용어를 다시 소환한 것입니다. 누구도 미국을 막을 수 없고, 경찰과 군대가 미국을 지킬것이고, 신이 미국을 지킬것이기에 우리는 두려워 할 수 없다, 고 말합니다. 미국의 제국화를 선언하면서 트럼프는 미국민에게는 제국의 시민이 될 것을, 세계인에게는 제국 미국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트럼프 취임사에 담긴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본인들의‘이드(Id)’를 드러냈던 경우는 없습니다. 슈퍼에고(자유, 정의, 평화, 민주주의 등)를 작동하면서 그것을 감춘 채 교묘히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그 ‘이드(Id)’를 생으로 날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눈치를 안보는 거죠. 안하무인입니다. 지금 미국이 보이는 태도는 역사에서 등장했던 무자비한 제국들이 보였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제국은 본인의 충동을 감출 필요를 못 느끼는 집단이고, 자신들의 욕망이 다 충족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집단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시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 최고, 최장수 제국이었던 로마의 장악력이 유대땅에서 절정을 향해 치닫던 시기와 겹칩니다. 팍스 로마의 광기가 절정에 다달했을 때 예수가 태어났고, 그날 밤 평화의 메시지가 울려퍼집니다. 그후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 팍스 로마는 팍스 이코노미카로 대체되었고, 팍스 이코노미카의 배후에 팍스 아메리카가 있습니다. 2천년전 울려 퍼졌던 로마의 평화, 21세기 오늘 울려퍼지고 있는 자본에 바탕한 평화!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뭔가 비슷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평화”를 마냥 기쁘고 우호적으로만, 목가적이고 낭만적으로만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크리스마스의“평화”를 이해해야 할까요.


2. 비극적이었던 최초의 크리스마스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주전 63년) 이스라엘은 로마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성전을 교두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3개월간 저항을 했는데 그때 처형당한 사람이 12,000명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위해 이용한 집안이 헤로데 집안입니다. 헤로데 역시 로마를 이용해 자기들의 권력을 잡고 유지하였습니다. 로마의 이스라엘 정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헤롯대왕(예수 탄생 후 2세 미만 영아학살한 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안티파터’입니다. 그 후 로마에 의해 헤로데(주전 73-AD4)가 유다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주전 40). 로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투철한 민족성을 감안해 괴뢰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헤로데가문인 것이고요. 헤로데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희생된 이스라엘 백성이 10만명이 넘었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헤로데(주전 73~74년) --     아켈라오스(유대와 이두메 지방)                 -- 아그리빠 (초대그리스도교 박해자)

                                    안티파스(주전 4~39년, 갈릴래아와 베뢰아)

                                    필립푸스(북요르단)


주전 4년에 헤로데가 죽으면서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 세 명에 의해 분할됩니다.(아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푸스) 아켈라오스는 헤로데 사후 귈기한 이스라엘 백성 3천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켈라오스의 거듭되는 실정으로 인해 로마는 이스라엘에 총독을 파견하게 됩니다. 총독정치는 예수가 세상에 온 시기와 겹칩니다. 헤로데가 죽자 이스라엘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그것을 아켈라오스가 잘 관리 못한 것이죠. 그래서 시리아 준둔 총독이었던 바루스를 파견 합니다.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방의 봉건영주였고, 갈릴리를 배경으로 했던 예수와 겹치는 인물입니다. 이복 형제인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고,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여 세례요한을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죠. 아그리빠(Agrippas)는 헤로데의 손자죠. 주로 사도행전을 배경으로 한 초대교회 박해의 장본인. 이렇듯 헤로데부터 그의 아들 아킬라우스, 안티파스, 그리고 손자인 아그리빠까지 이어지는 100년이 남짓했던 기간에 예수가 탄생했고 활약하다 승천하고 예수의 제자들이 고초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특별히 당시 로마군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과 노예징발은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전후에 절정을 이룹니다.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저항의 본거지인 나사렛 부근의 세포리스를 초토화시키고 그곳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로마군은 반란에 관여된 지역을 모두 소탕했으며, 많은 사람을 가두었고, 약 2천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사라지고 나서 AD 60년 경부터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잔인한 로마의 살육이 100년 가까이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쓰여진 것입니다.


3. 천사들이 노래한 "평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늘 ‘하늘 뜻 나누기’를 준비하면서 문득‘제주 4.3과 크리스마스’가 2천년전 최초의 크리스마스와 닮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4.3 사건을 아시죠. 저희 아버지(1939년생)가 당시 초등학교 시절이었다고 합니다.(1947~54년, 3만~6만 사망 추정)

(아버지 회고) 사살당한 공비의 사령관 이덕구 목이 제주도청 앞 광장에...그 앞을 지나 다녔다. 제주도청 앞에 있었는데 공비로 추정되는 되는 사람들의 시체가 가마니에 싸여 놓여있었다고 ... 교회 갈 때 그 앞을 지나다녔다고. 저의 아버지 원초적 기억 속 크리스마스는 공비들의 시체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던 크리스마스 였다고...

어제 ‘하늘 뜻 나누기’를 준비하는데 4.3 사건이 일어날 무렵 제주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아기 예수가 탄생 할 당시 이스라엘 상황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수 천 수만의 로마에 의해 희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검들 사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평화가 울려퍼졌다는 거죠. 저는 오랫동안 아기 예수 탄생시 한 밤중에 나타난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개역성경, 눅2:14)"라고 노래한 것을 그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서는 이들의 노래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로마군의 살육으로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들이 쌓여있는 거리에서, 한 가닥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참혹한 나날들만 지속되던 때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탄생 설화에서 평화를 전하는 메시지는‘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시대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의미심장한 전승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이 개역성서과 새번역성서 간 번역상의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개역)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새번역) 

 “Glory to God in the highest heaven, and on earth peace among those whom he favors!”(NRSV)


개역성경에 언급되는 “평화”는 마치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편만하게 임하는 평화 같다는 인상입니다. 하지만 새번역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문제해결의 키는‘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Pause) 이 대목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복음서를 편집한, 누가복음을 쓰고 편집한 사람들의 고도의 정치술, 내지 수사학입니다. 지금 당장 답을 알 수는 없지만 복음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그 답을 압니다. 복음서를 다 읽고 나면 예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이 누군지 독자들은 압니다. 그 사람들에게 임하는 평화입니다.

복음서를 다 읽었다 치고, 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사람들,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평생 자신들이 지녔던 한과 고통과 설움 때문에 몸부림쳤던 사람들, 로마의 법과 유대교의 법 밖에 살았던 사람들, 그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 아니었을까요. 예수가 아니었더라면 단 한번이라도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을 사람들, 예수의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 속에는 ‘주님께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들립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구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라고 할 때 그 ‘평화’랑은 성격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런 밋밋하고 무던한 평화가 아니라, 당파성이 강하고, 비타협적이고, 날이 선 평화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본문이 쓰여지던 시절, 아니 아기 예수가 탄생하던 무렵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공간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그림이나 달력에 나오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이고 안락한 환경이 아닙니다. 어쩌면 온통 시체로 뒤 덮인 산과 들에서, 온갖 서러움과 원한과 통곡이 산천에 가득 울려퍼지는 중심에서 천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며 평화를 외칩니다. 절망 가운데 도래하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오늘 노래에는 서려있는 것입니다. 마치 80년 광주사태가 끝나고 계속 불려졌던 ‘임을 향한 행진곡’처럼 말입니다.


4. 해방적 성서읽기


우리가 성서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서의 사건을 "그때-거기"에서 발생했던 어제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사건으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복음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역사적 맥락과 당시 민중들이 아기 예수 탄생 전승을 통해 간절히 말하고자 했던 평화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것을 오늘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읽어낼지는 밝혀야 할 것입니다.

중앙아메리카는 90년대 이전에는 (지금은 좀 편차가 있으나) 거의 모든 나라가 미국이 세운 괴뢰정부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대부분 독재국가였죠. 해방신학적 성서읽기는 이러한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니카라과 소모사정권은 소모사 가문이 정권을 잡은 이래로 1933- 1979년까지 46년간 지배했습니다. 마치 로마시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헤로데가문처럼 말이죠. 소모사정권은 마치 개인농장처럼 니카라과를 운영하였고, 국민들은 농장의 농노였습니다. 소모사 정권은 46년장기 독재를 하면서 약 40만명의 니카라과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의 비호와 군사적 원조가 뒤받침 되었기에 가능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소모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산다니스타 반군이 생겨나고 산다니스타 반군이 소모사를 1979년에 내몰고 정권을 잡고 나서는 미국이 산다니스타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 반군을 뒤에서 조정하고 물자를 후원하죠.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해방신학적 성서 읽기”는 독재자 소모사를 헤롯과 동일시했고,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2살 미만 남자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소모사 정권이 반정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해 제거하는 것으로 등치시켜 읽었습니다. 헤롯이 죽은 뒤에도 헤롯의 아들과 손자로 권력이 세습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핍박을 받았죠. 이것을 소모사가 죽고 소모사의 자식들이 권력을 잡고 니카라과의 민중들이 계속해서 핍박하는 것으로 읽어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성서를 읽었을 때, 성서가 담고 있는 의미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민중신학적인 성서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괴로정부와 이들에 저항하는 사람들, 그들을 향한 고문과 살인, 전태일을 우리 시대 예수로 읽어내면서 메시아적인 사건의 도래를 선언한 점 등은 성서가 화석화된 훈고학의 대상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읽고 함께 쓰여지는 텍스트임을 밝힌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현실과 상황의 유비(analogy)시키는 힘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적 성서해석에는 있습니다. 민중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성서 읽기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씀으로만 다가오던 성서를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우리들 이야기로 바꾸어 이해하게 만드는 "해방의 해석학"을 제공합니다.


5. Pax Romana , Pax Economica(or Pax Americana),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평화”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지난 주간에 마포구 아현2 재개발 지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쫒겨난 철거민 박준경(37)씨가 한강에 투신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박씨와 그의 어머니는 함께 살던 월세방에서 3차례 강제철거를 당해 쫒겨났다고 합니다. 그의 유서에는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어머니께서는 임대아파트 가서살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최고로 번영을 누리고 최악의 폭정으로 치닫던 ‘로마의 평화 Pax Romana’시기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로마를 다스리는, 로마의 다스림에 굴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에게는 폭력과 착취를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죠. 로마제국의 힘은 자본으로 대체되었고, 그 자본이 바로 제국이 되었습니다. Pax Economica 는 경제가 평화라는 뜻이죠. 부에 대한 무한증식에 바탕한 평화라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평화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폭력과 억압을 당하는 고통의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이러한 자본의 원칙을 충실히 수행하는 집행관이라 할 수 있고, 그런 미국의 절친 우방인 한국, 미국을 닮지 못해 안달 나 있는 한국은 Pax Economica 의 원리가 신자유주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더 확실하게 작동되는 공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로마의 억압이 가장 심했던 갈릴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Pax Romana, Pax Economica, Pax Americana, 아름다운 대한민국...등은 강제된 평화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평화가 온 세계 사람들에게 모두 편만하고 공평하게 임하는 보편적, 낭만적, 낙관적, 긍정적 평화에 대한 메시지도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새번역본문 해석처럼“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이기적, 당파적, 실존적 평화해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세 가지 대응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상업적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 흘러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마스를 이상화 낭만화 시켜 무난하게 두루두루 모두랑 잘 관계하면서 1년을 마무리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 사회 고통의 중핵을 외면하지 않고 대림절 기간에 거기에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2018년 대림절 기간에 하시겠습니까? 이렇듯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2018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둘러싼 만만치 않은 고민과 과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묵상하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12.9.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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