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화읽기 : 버닝] 타오르지 않는 분노 <버닝 (이창동, 2018)>(이희승)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8. 12. 20. 11:32

본문

타오르지 않는 분노 <버닝 (이창동, 2018)>




이희승*



한해를 마감할때면 올해 가장 인상깊은 영화 체험은 무엇이었나 되짚어 보게 됩니다. 새해 둘째날, 다들 휴가를 떠나고 낯설게 한산한 시내를 가로질러 텅빈 극장에서 마주했던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는 연말 분위기로 흐트러진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도와준 올해의 첫 영화였습니다. 찬반이 다소 갈리는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건드리기 쉽지 않은 소재를 뚝심있게 밀어붙인 장준환 감독의 <1987>. 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들떠서, 뉴질랜드 국제 영화제 기간에 제일 먼저 찾은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 Shoplifters>를 보고나서는 변화없이 비슷한 주제와 영화적 질감을 고집하는 감독의 매너리즘을 탓하며, 함께 영화를 본 동료들과 다소 냉랭한 평가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달후 접한 기키 키린 (영화에서 할머니 하츠에 역할을 맡았던 배우)의 부고를 접하고, 이 영화가 - 제 편협한 취향과 일종의 지적 허영이 읽어내지 못했던 – 오랫동안 자신의 영화세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아름다운 배우를 향한 고레에다 감독의 따뜻한 작별인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난민 문제를 빌미로 염치없이 이기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우리의 21세기가 아직도 식민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각인시켜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자마 Zama>. 디지털 마스터링 덕분에 30년만에 거대 스크린에서 다시 보게 된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는 냉전시대의 아픈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다시 만난 남과 북의 오늘과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프렌치 뉴웨이브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와 젊은 사진예술가 JR의 로드무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Visages, Villages>로 확인한 영화예술의 온기.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면서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가 묵직했던 김의석 감독의 <죄많은 소녀>. 지아장커의 에서 개발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숨가쁘게 변화하는 중국의 변방, 남성주의 무협 영웅들이 사라진 빈 자리에 우뚝 서서 무너지는 구세계의 가치를 묵묵히 지키는 여걸 차오 (자오타오 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근래 스크린에서 만난 커플 중 제일 깜찍한 커플로는 미국의 독립영화 의 주인공인 사라와 데이비드를 꼽고 싶네요. 이런 ‘취향저격’ 영화들뿐만 아니라 스르르 기억에서 빠져나간 영화, 지루한 영화, 실망스러운, 심지어 원망스러운 영화들까지 합해서 한해가 촘촘하게 모자이크처럼 채워졌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가 주는 공감각적 체험과 정서적 감흥, 지적 자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적 도전 등을 지극히 주관적 기준으로 평가해 볼 때 저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체험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 Burning>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3년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얼개 삼고 있지만 이야기의 끝은 매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혼의 소설가인 화자는 친척의 결혼 피로연에서 알게된 백지같은 매력을 지닌 젊은 ‘그녀’와 쿨한 자유연애를 하고,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 중에 만난 부유한 보이프렌드인 ‘그’를 만나, 셋은 우연한 기회에 나른한 오후를 함께 합니다.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던 중, 게츠비처럼 신비스러운 젊은 남자는 느닷없이 버려진 헛간을 태우는 자신의 별난 취미를 화자에게 털어 놓죠. 권태로운 일상에 솜뭉치처럼 젖어 있던 소설가는 ‘그’와 헤어진 후, 미스테리한 취미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매일 새벽 동네 곳곳의 빈 헛간들을 순찰하지만 “세계는 변함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서서히 이 특별한 이벤트에 무관심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심한 화자와는 달리, <버닝>의 종수(유아인 분)는 정기적으로 버려진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특별한 취미를 가진 젊은 부자 벤 (스티브 연)에게 호기심 이상의 질투와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해미 (전종서)가 사라지자, 질투와 적대감은 의심과 분노로 번져가고, 조용한 소실과 소멸로 마무리한 원작과는 다르게, 마치 종수 자신이 스스로의 분노에 불타는 헛간이 된 것처럼 영화는 비극적 파국으로 끝을 맺습니다.


2010년 <시>를 발표한 이후, ‘지금 이 시대에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씨름하던 이창동 감독은 개국이래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못살게 된’ 양극화 저성장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초상인 <버닝>을 8년만에 내놓았습니다. 칭찬 일색의 해외 영화계와 다르게, 국내에서는 스토리의 모호함, 주연배우들에 관한 영화외적 논란 등으로 반응이 엇갈렸지만, 빅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이창동의 영화세계는 분명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줄거리와 인물전개의 아귀가 딱 들어 맞는 탄탄한 이야기 위에, 시적 여백을 담은 이미지들이 꼭 필요한 만큼의 메타포 역할을 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성기게 짜여진 <버닝> 의 내러티브와 캐릭터들은, 몽환적 이미지와 존재감이 뚜렷한 사운드 트랙이 주조한 공감각적 체험 위에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서서히 이동하는 듯 합니다. 컨텍스트가 텍스트의 중심에 자리잡은, 주제의식과 리얼리티가 분명한 이야기 속에서도 시종일관 논리적 모호함을 유지하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지금 내 눈앞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야” 맛볼 수 있는 유와 무가 공존하는 찰나인 영화라는 매직 그 자체를 구현한 흔치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인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와 무 사이의 경계에 놓인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맘대로 흘러 가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저주와 빼앗긴 것들에 대한 분노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아버지와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가 남겨 놓은 어수선한 집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뚜렷한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로 근근히생계를 유지하며 미래없는 현재를 살아갑니다. 잃어 버릴 것조차 없는 과거를 가진 종수에게, 가졌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상실’의 경험은 차라리 사치인 듯 합니다. 꿈꿀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이 세대에게 미래는 희망없는 현실의 무한반복에 지나지 않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다시만난 어린시절 동네친구 해미 또한 종수의 처지와 다를바 없습니다. 점포정리를 위한 세일 행사에서 나레이터 모델일로 모은 돈으로, 가족조차 반기지 않는 자신의 존재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딱 알맞을 것 같은 아프리카 한가운데로 여행을 떠난 해미는 아무일도 안하지만 모든 걸 다 소유한 벤을 만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고 울어본 기억이 없는 벤은 자신의 탐욕과 소비가 타인의 고통과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망각한 이 시대의 직접적 수혜자인 듯 하지만, 욕망의 동력인 ‘상실’의 기회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벤에게 이 세상은 거대한 권태의 늪인 듯 합니다. 세 인물들을 한번의 술자리에 모아 놓은 원작과는 달리, <버닝>의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은 유사 삼각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관계에 대한 관습적 정의를 자꾸 의심하게 만들죠. 해미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종수에게 “진실을 말해 보라”며 성큼 다가가지만,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부자 청년 벤과의 관계를 굳이 종수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연정을 느끼기 시작한 해미를 가로챈 벤과 만남을 거듭하는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며 그가 속한 세상을 엿보는 일에 집착합니다. 벤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문학도 종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별취미인 비닐 하우스 태우기에 관해 종수에게만 털어 놓습니다. 이 다층적 다의적 관계는 욕망과 만족이 손에 잡히는 대상없이도 가능하다는 영화의 전제 위에서 사랑과 질투라는 단선적 삼각관계, 혹은 주체와 타자를 연결하는 욕망의 일대일 고리를 성공적으로 해체합니다. 벤은 판단하지 않는 자연의 모럴 속에 자신의 범죄행위 – 즉, 타인의 소유인 비닐하우스를 소거하는 취미 – 를 편재시킴으로, 쾌락의 주체로써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도구화합니다. 종수는 해미 혹은 해미로 대변되는 소유의 판타지와 상실의 간접체험에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지극히 수동적인 피해자/관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내러티브의 결말을 계획하고 이끌어내는 주체적 역할을 경험합니다. 물론 영화는 종수의 라스트 액션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창작인지 확정짓지 않지만 말이죠. 영화가 해미라는 인물을 이용한 방식에 대한 비평적 이견을 감안하더라도, 해미 역시 존재와 무의 경계에 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뚜렷한 자각을 가진 주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존재에서 무로 이동하는 영화의 흐름 자체가 해미의 귤먹는 마임을 실현하는 구조이고, 해미가 석양을 바라보며 춤을 추는 클라이막스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아프리카 부족의 그레이트 헝거 의식을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 짜인 스토리보드와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 사이에서 마술적인 모멘트들을 잡아낸 홍경표 촬영감독의 영상, 나르시스트적 소유욕과 유아독존적 만족 너머, 울림을 통한 공유와 공감의 쾌락을 구현한 모그의 사운드 트랙, 세필화같은 리얼리즘과 추상화를 닮은 몽환적 분위기를 적절히 배치한 신점희 미술감독의 감각은 <버닝>이 궁극적으로 담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설명하지 않고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인 미학적 매개로 작동합니다. 이 시대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애쓴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통해, 태울 것이 없어 타오르지 못하고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분노는, 많은 것을 덜어내고 비워낸 영화의 여백을 관객 스스로의 적극적 성찰로 메꾸려 노력하는 그 순간에야 발화점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