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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Toni Erdmann] 두개의 시간이 충돌하면서 멈춰 선 속도계 < 토니 에드만 (마렌 아데, 2016)>(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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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9. 2. 2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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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시간이 충돌하면서 멈춰 선 속도계 

< 토니 에드만 (마렌 아데, 2016)>




이희승*



2016년,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고편을 찾아 보고는 그만 두었죠. 할일이 많이 줄어든 심심한 아버지, 할일에 치어 죽을 것 같은 바쁜 딸. 이들의 소원해진 부녀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소 식상한 가족 드라마 정도가 아닐까 싶어서였습니다. 각종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에도 별로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본 독일 출신의 동료에게 영화가 어땠냐고 묻자, ‘느리고 길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걸 듣고는 더더욱 찾아 볼 생각이 없었죠. 그리고 2년이 훌쩍. 남반구에 이민와서 사는 여느 가정이 다 그렇듯, 연말은 가혹한 북반구의 겨울을 뒤로 하고 찾아 오는 가족과 함께 하는 계절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 가는 가족들은 쉽게 시차를 적응하지 못하고, 함께 했던 옛 시간만 되짚다가 아쉽게 헤어지게 마련이죠. 그리고 각자의 시간대로,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리듬을 찾아 돌아 갑니다. 휴가가 그렇게 끝나고, 미지근한 국물에 말아 놓은 식은 밥을 허겁지겁 삼키듯 여름동안 밀린 일들을 하나 둘씩 해치우던 어느날, 예상치 못하게 느적지근한 오후를 만났습니다. 마침 스트림 서비스 시작화면에서 발견한,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은 이네스 (산드라 휠러)의 상반신이 담긴 포스터는 2년전하고 다른 울림이 있었습니다. 2시간 30분이 훌쩍 넘어가는 상영시간이 부담스러웠지만, 끊었다가 아무때고 이어서 보면 어떠랴 싶어서 클릭. 과연 영화는 느리고 길었습니다. 그날, 제 퇴근시간도 여름 오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습니다.


독일의 한적한 교외에 모여 사는 가족들에게 다국적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면서 세계 곳곳을 누비는 ‘잘나가는’ 딸 이네스는 집안의 자랑이지만, 가물에 콩 나듯 얼굴을 보일 때조차 연신 핸드폰을 붙든 채 옆눈으로 고개나 까닥이는 인사 몇번 남기고 곧장 일터로 달아나 버리는 신기루같은 존재입니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는 아빠 빈프리트 (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느닷없는 다중인격 장애 흉내로 택배 배달원을 줄행랑치게 만들고, 저승사자 분장을 한 채로 노모를 방문해서 놀래키고, 이혼했지만 이웃사촌으로 잘 지내고 있는 전부인의 집에 불쑥 찾아가 낡은 분장용 틀니를 영구적으로 이빨에 붙여 달라고 떼를 쓰는 구제불능의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소식없는 바쁜 딸을 대신해 자신에게 생일축하 전화를 해 줄 ‘수양딸’을 돈주고 고용했노라는 말을 딸 앞에서 서슴치 않는 아빠의 정신세계가 이네스에게는 거대 오일회사 인수합병 문제보다 훨씬 난해하기만 합니다.


어느날 오랜 동반자이자 노모보다 더 살뜰하게 돌보던 반려견이 자연사하자, 안그래도 느리게 흘러가던 일상에 큰 구멍이 생겨 버린 빈프리트는 예고도 없이 딸의 직장으로 불쑥 찾아 갑니다. 이네스는 유럽 통합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파도에 휩쓸린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파견근무 중입니다. 루마니아는 오스만 제국과 재정 러시아, 다시 소련과 나치독일 사이에 끼어 오랜동안 신음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겨우 독립을 이뤘나 했지만, 곧장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습니다. 20년이 넘는 차우세스쿠의 독재, 그에 항거하는 수많은 시위를 통해 민주화 혁명을 이루었지만, 2007년 유럽 연합으로 편재되고, 2014년 선거에서는 다수인 루마니아계가 아닌 독일계 대통령이 당선되는 등, 굴곡 많은 역사로 치자면 대한민국와 맞먹는 나라입니다. 원래 산유국으로 유명하지만, 독재 정권의 실패한 경제정책과 유럽통합 이후 급속히 유입된 글로벌 자본의 기세에 밀려 국내 정유회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루마니아의 실재 상황을 [토니 에드만]은 에두르지 않고 직시합니다. 이네스가 소속된 컨설팅 회사는 미국의 거대 정유회사가 루마니아 오일회사를 인수합병하고 루마니아 노동자들을 대량해고 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짜는 일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고, 이네스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핵심멤버입니다. 팀내 2인자인 이네스는 마침 부쿠레슈티를 방문한, 우아하게 갑질하는 법이 몸에 밴 미국인 정유사 회장과 그의 새파랗게 젊은 러시아 출신 부인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낮에는 회의자료 준비, 밤마다 접대와 파티, 그리고 휴일엔 사모님 모시고 쇼핑까지. 게다가 이네스의 기를 꺾으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남성우월주의자 팀장의 압력으로 이네스는 그야말로 폭발 직전입니다.


이런 지경에 갑작스런 사차원 아빠의 등장으로 이네스의 숨막히는 일상은 아수라가 되고, 참다못한 이네스는 야박하게 빈프리트를 쫓아내듯 독일로 돌려 보냅니다. 이네스는 아빠를 보냈다고 믿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리며 돌아섰건만, 느닷없이 더벅머리 가발을 눌러 쓰고 틀니를 낀 채 다시 나타난 아빠는 자신을 비즈니스맨 ‘토니 에드만’이라고 소개하며 이네스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네스는 종이 한장 밀어 넣을 틈 없이 빡빡한 자신의 일상을 헤집고 들어와서 안 끼는 데 없이 난입하는 빈프리트의 거짓말 대잔치에 슬쩍슬쩍 장단을 맞추기까지 합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만나는 사람마다 새로운 아이텐더티를 만들어내는 빈프리트에게 충분히 사기를 칠 시간을 주려는 듯, 늘 급하게 다음 행선지와 다음 일정으로 이동해야 하는 이네스의 초조함따위는 아랑곳없이 마음껏 늘어집니다. 핸드핼드 카메라는 목적지없이 발닿는 데로 내딛는 빈프리트를 터덜터덜 따라 가고, 이네스는 하는 수 없이 이 하릴없는 속도에 끌려 다니는 형편이죠. 합병 직전의 루마니아 오일회사 사장을 만나기 위해, 60년대 풍경 그대로인 도시 외곽의 오일필드를 방문한 부녀는 그곳 노동자들에게서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습니다. 낙후된 동네를 현대화시켜 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말이죠. 자신이 작성하는 보고서를 토대로, 인수합병 후에 지역 주민들을 모두 해고할 회장의 계획을 알고 있는 이네스는 도통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 와중에 수풀에서 화장실을 급하게 찾던 빈프리트는 루마니아 촌로의 도움을 받게 되죠. 요상한 분장을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거구의 독일인 빈프리트에게 선선히 안방 화장실까지 내어 준 노인과 화장실 사용료로 내민 1유로를 받고는 갓 딴 사과 한자루로 살뜰하게 보답인사까지 하는 순박한 청년에게, 인생이 거대한 장난이자 위대한 농담인 빈프리트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유머감각만은 잃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헤어집니다. 거스르기 힘든 큰 파도를 만나면 힘을 쭉 빼고 파도를 타는 것이 인생의 지혜일 수 있다는 어깨 처진 68세대의 충고라고 생각하기엔,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이네스를 무장해제시킨 빈프리트의 ‘유머감각’은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강력해 보입니다.


과연, 아빠의 괴상한 삶의 리듬과 템포가 끼어들면서 이네스는 인생의 속도를 재고하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축하해 줄 가족과 친구들 대신, 자신의 생일 파티조차 팀원들을 초대해서 단결을 다지는 공적 이벤트로 준비하던 이네스. 이벤트 회사가 출동해서 완벽하게 장식한 거실 한복판에 센스있게 차려 놓은 부페 테이블을 살피고, 빈틈없이 몸에 딱 붙는 파티용 드레스에다 발목이 부러질 듯한 하이힐을 신으면서 매무새를 점검하던 그녀는, 장기까지 조여 오는 드레스와 부러진 발톱을 아프게 찍어 누르는 신발을 제대로 입을 수도, 시원하게 벗어 버릴 수도 없이 갇혀 버린 자신을 발견합니다. 뭔가를 깨달은 듯, 매순간이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고 효율과 결과를 우선시하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커다란 구멍을 내기로 결심합니다. 오늘의 컨셉은 누드 파티라면서 전라의 상태에서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을 맞이하는 이네스는 어색하지만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끼죠. 오늘도 어김없이, 불가리아 민화 속의 악귀 쫓는 쿠케리로 변신해서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털북숭이 분장을 하고 나타난 빈프리트는 모두를 놀래키더니, 우둔하게 뒤뚱거리며 아무말 없이 아파트를 빠져 나갑니다. 급하게 목욕가운만 걸친 채, 맨발로 아빠의 뒤를 쫓던 이네스는 감동의 포옹을 하죠. 예상과는 달리, 한차례의 짧은 포옹 뒤에 이네스는 어색하게 뒤걸음질 치며 자신의 시간대로 복귀합니다. 그 후로도, 시대와 세대가 다르고,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 가는 부녀의 시간은 여전히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 갑니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듣고 고향집을 방문한 이네스는 할머니의 유품인 모자를 쓰고, 아빠의 트레이드 마크인 틀니를 낀 채 뒤뜰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영화 초반 반려견의 죽음이 신자유주의의 개입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죽박죽된 부쿠레슈티로 빈프리트를 이끌었던 것처럼,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이네스의 새로운 근무지인 상하이에서 이 둘의 시간이 다시 충돌해 잠시의 공백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칩니다. 두개의 시간이 엇갈리고 서로를 간섭해서 만들어진 그 공백을 혼돈이라고 해야 할지 휴식이라고 해야 할지, 영화 속의 이네스처럼 저 또한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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