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지난 3월 29일, 65년의 긴 영화 만들기 여정을 마치고, 90세의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렌치 뉴웨이브의 대모’라 불리던 아녜스 바르다의 예술세계는 짧은 지면을 통해 다 소개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습니다. 그녀의 창작활동은 사진으로 시작해, 기존 내러티브 영화의 문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형식과 감각으로 빚어낸 극영화, 일상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늘 새로움을 길어 내는 다큐멘타리, 비디오 아트와 설치미술을 접목하는 전시 예술까지, 이미지와 소리로 담아 낼 수 있는 세상의 너비와 진실의 깊이를 향한 지치지 않는 탐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1950년대부터 영화를 만들어 온 바르다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행복>,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방랑자> 등을 통해 여성의 삶과 내면을, 조심스럽고 섬세한 탐색을 통해 혹은 도발적이고 강력한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스크린에 담아 내었죠. 간혹, 바르다 감독은 여성의 사회 활동, 더구나 여성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뻔뻔하고 이기적인 나르시즘의 표출이라 여기던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유머러스하게 개인사를 풀어 내는 여유있는 노감독의 기억에 비춰 볼때, <쉘부르의 우산>으로 유명한 자크 드미 감독의 부인이기도 한 아녜스 바르다의 삶이 과격하지 않지만 결코 물러서는 법도 없는 투쟁의 연속이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치 투쟁으로 문화적 향유가 금기시 되었던 80년대가 지난 후, 90년대 초 한국의 대학가 풍경에서 이탈리안 네오 리얼리즘, 프렌치 뉴웨이브, 뉴저먼 시네마 회고전은 빼놓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하지만, 그 무렵 신촌, 대학로, 종로에서 열렸던 세 편, 많게는 네 편을 한회에 상영하는 뉴웨이브 영화제를 부지런히 찾아 다녔던 저에게도 아녜스 바르다는 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다의 작품세계는, 명예의 전당에 진작부터 이름을 올린 동시대의 남성 감독들의 그늘에 가리워 있다가, 2000년대가 되어서야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국내에서도, 2001년 서울여성영화제의 ‘프랑스 특별전: 아녜스 바르다’를 기점으로, 많은 영화 행사에서 바르다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예술적 협업을 시도한 의미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88세의 바르다 감독은 젊은 사진작가이자 도시 아티스트인 제이알(JR)과 함께 프랑스의 곳곳을 누비며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얼굴을 흑백사진에 담고, 스스로 존재감을 확인할 여유없이 살아온 이들의 초상화를 거대한 사이즈로 프린트해, 살고 있는 지역의 거리 벽면을 장식합니다. 제이알은 버려지고 잊혀진 도시 공간, 스쳐 지나치는 일상의 공간, 혹은 미국-멕시코 국경처럼 이데올로기와 인간이 조우하는 공간에 초대형 사진 이미지를 설치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예술가입니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분야가 다르고, 세대가 다른 두 예술가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하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관객은 둘의 만남이 필연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천진한 호기심과 애정어린 시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끝내 보아 내려는 예술가적 집요함으로 뭉친 이 평범하지 않은 듀오의 여정은, 예술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뭔가를 지어 내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창작 행위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숨은 결을 찾고 경험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그래서 누구나에게 허락된 열린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하죠.
소재나 주제를 정하지 않고, 둘은 제이알의 포토트럭에 몸을 싣고 프랑스의 시골, 공장지대, 항만 등을 여행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르다 감독과 제이알은 어떤 인물을 따라 가지도 않고 특정한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하는 듯 보이지만, 포토 트럭이 멈추고, 둘의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삶의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볼거리라고 여겨지지 않는 평범한 얼굴들, 굳이 찾아가 볼 필요없다고 여겨지는 초라한 삶의 공간들이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입니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카메라에 담았던, 열차가 도착하는 기차역의 분주함과 여행에 대한 설레임, 그리고 공장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고단함과 집으로 향하는 총총한 발걸음을 다시 찾아가는 순례자처럼 말이죠. 한때 프랑스의 산업화를 이끌었고, 세계대전의 참화에 무너진 프랑스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탄광촌. 철거 명령으로 모두가 떠난 골목길에 홀로 남은 재닌은 삼대의 가족사가 깃든 삶의 터를 간단히 허물어 버리려는 염치없는 세상을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항의합니다. 그녀의 외로운 투쟁을 위로하듯, 재닌의 단단한 내면에서 영감을 얻은 바르다 감독과 제이알은 이 탄광촌 범부의 결기어린 얼굴을 담은 흑백 사진으로 그녀의 집 외벽을 장식합니다. 오랜만에 대문 밖을 나선 재닌이 벽면을 가득 채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목구멍에 뜨겁게 차오르는 감정은 재닌만의 것이 아닌 듯 합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이어가는 듯 보이지만, 거장의 예리한 시선은 현대 사회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수장해 버렸던 얼굴들과 마을들을 다시금 스크린으로 초대합니다.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보통사람들의 얼굴을 거대한 사진이미지로 확대해 공공 외벽을 장식함으로써, 만족없는 소비의 무한반복을 부추기는 상업적 이미지들이 점령한 현대사회의 일상과 공간에 새로운 얼굴을 찾아 주는, 그 과정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자의식없는 작업. 묵묵히 살아 온 이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바르다와 제이알의 작품은,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쾌락을 쫓아 생각없이 휩쓸리는 동안 세상이 어디로 흘러 오고야 말았는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지적합니다. 목장에서 염소들끼리 싸우면 가축에 상채기가 난다는 이유로 염소뿔을 몽땅 잘라 버리는 인간 본위의 잔인함을 지적하는 목장주인의 철학. 대를 이어 항만 노동자 조합에 헌신하며 자본주의의 부당함에 용기있게 맞서지만, 증오와 분노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하는 부두노동자 아내들의 현명함. 21세기의 기술 편의가 도달하지 않은 소외된 공동체 구석구석을 챙기고 살뜰히 보살피는 집배원의 근면함. 갑작스레 지역 개발이 취소되어 벌판 한가운데 유령타운으로 버려진 구조물 폐허에 자신들의 사진을 붙여 생기를 불어 넣고 음식을 나누며 축제를 벌이는 시골 사람들의 너그러움. 그리고 즉흥과 우연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편견없이 매순간을 새로이 발견할 줄 아는, 세상과 인간 앞에 겸손한 두 예술가. “이제 잘 보이진 않아요. 그렇지만 난 당신을 보아요.” 노안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을 위로하는 제이알을 향해, 이 영화가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이지 않을까 염려하며 안타까워 하는 관객들을 향해,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노쇠함과 임박한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세기 넘게 이어온 자신의 예술관을 간결하게 함축합니다.
시네마가 미디어 산업에 종속되고, 일상과 이미지가 구분없이 한덩이로 뭉게진 21세기. 우리의 눈과 귀는, 끊임없이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서 단 일초도 놓여 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이는 이미지와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이야기에 파묻혀 살아 가는 동안, 정작 우리가 귀기울어야 할 이야기를 품은 얼굴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얼굴들이 살아 숨쉬고 노동하는 공간을 체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르다 감독의 마지막 영화로 기록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집중하는 그 얼굴들을, 잘 보이진 않지만 유심히 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르다 감독이 생을 바쳐 사랑한 얼굴이 바로 스스로 잊고 지내온 나 자신의 얼굴이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