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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Van Manen과 홀란트 급진성서비평(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9. 4. 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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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Manen과 홀란트 급진성서비평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 본 연구소 연구기획위원)

홀란트 급진주의자들 혹은 홀란트 비평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끝 무렵 및 20세기 초반의 홀란트의 신약성서 학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의 역사성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이견을 보였지만 이들은 대체로 현재의 바울 서신들 중 그 어떠한 것도 진정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현재의 바울 서신들을 대체로 2세기에 써진 것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유명한 튀빙겐 학파들이 주장했던 네 개의 바울 서신조차 불신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극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널리 알려진 사람은 A.D. Loman, W.C. van Manen and G.A. van den Bergh van Eysinga이다. 하지만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Van Manen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네 개의 바울 서신들에 관해 연구를 착수한 사람은 Loman이었다. 하지만 1874년 이래 그는 눈이 멀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그는 학문적인 논문들을 출판했다. 안타깝게도 네 개의 바울 서신에 관한 연구를 완성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실명은 어둠 속에 남아있던 기원 후 첫 두 세기의 교회의 역사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1882년과 그다음 해에 그는 튀빙겐 학파가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 바울의 네 개의 서신들이 사실은 진정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튀빙겐 학파가 그 어떠한 증거도 없이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바울 서신들은 가정된 것보다 좀 더 후대의 시기임을 보여주는 문헌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가 하나의 독립적인 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좀 더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증거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홀란트 급진주의자라는 용어는 Loman의 한 리뷰에서 기원했다. 1887년 그는 Edwin Johnson의 Antiqua Mater: a Study of Christian Origins에 관한 리뷰를 썼다. 이 리뷰에서 그는 Johnson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특히나 영어권 신학자들 가운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는 급진주의자라고 칭했다. 여기서 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급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신약성서의 서신들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들은 급진적이어야 했다. 물론 어떤 다른 이들은 이들이 너무나 급진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Loman과 그의 동료들은 '급진'이라는 용어를 일종의 명예로운 별칭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교회의 경전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았으며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에 관해 자유롭게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연구는 어떠한 진정성이 있는 바울 서신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홀란트 급진주의자들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개혁교회에 속했다. 이 교회에서 급진주의자들은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해 우선 19세기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의 상황을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그 뒤에 네덜란드의 급진주의자들의 모범인 Van Manen에 대해 살펴보자.

역사적 상황

1813년 11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패배했다. 며칠 후, 윌리엄 왕자가 네덜란드의 왕으로 등극했다. 1816년 윌리엄 1세는 교회를 시민 정부에 종속시키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교회의 행정에 관한 것이었다. 왕 그 자신이 교회의 최고의 명령권자이며 따라서 그의 승인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되어버렸다. 종교에 관한 이 왕의 계몽주의적 견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자유롭게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교리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며 교리적 논쟁들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점이 모호했는데 이것은 경전에 따른 신조라는 말에 포함된 교리와 관련한 문제였다. ‘경전에 따른’이라는 용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전에 부합해야 하기에' 혹은 ‘경전에 부합하는 한' 이라는 점을 의미하는가? 첫 번째 경우에는 신조에 포함된 모든 것을 목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어떠한 신앙이 경전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년 동안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내홍을 치러야 했다. 문제의 발단은 왕은 최고의 명령권자이며 따라서 교리나 믿음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교회가 어떠한 권한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리더십 부재는 각각의 목사들은 신앙이 경전에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그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는 이상한 상황을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제한하고자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 이것은 신념을 강제로 부과하거나 자유로운 견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권위인 왕에 복종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래 교회 구성원들은 목사들의 이성주의적 설교에 불만을 표시했다. 종종 불만을 나타낸 구성원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적 욕구들을 충족시켜주는 작은 모임을 구성해 함께 모였다. 이들은 교회에 너무 많은 교리적 자유가 팽배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우려를 나타낸 교인들의 불평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1834년에 정통주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개혁교회로부터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다수의 정통주의적 성향의 교인들은 개혁교회에 남아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1840년대에 윌리엄 2세는 교회와 관련한 기존의 법들을 수정하는 계획을 채택했다. 이 수정안은 교회 자신의 책임성, 지역 교회의 영향력, 그리고 신학교의 교수진을 임명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수정안이 약간의 개선책은 될 수 있었지만 교회 당국자들이 교회 내의 긴장들을 통제하기엔 이미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몇몇 교수들, 특히 라이덴에서 가르치고 있던 사람들은 독일의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와 페르디난트 크리스챤 바워(Ferdinand Christian Baur)의 연구들을 승인하길 촉구했다. 여기서 Jan Hendrik Scholten (1811-1885)을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쳤으며 역사-비평적 방법에 따라 신약성서를 연구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많은 반대를 낳았다. 게다가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회의는 교회에서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Van Manen은 굳세게 저항했으며 곧 이러한 조치의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하지만 정통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여전히 성서에 대한 근대적 견해들이 지닌 자유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1886년에는 많은 이들이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그 사이에 라이덴과 암스테르담에서는 좀 더 근대적인 연구를 지향하는 교수들이 임명되었다. 반면에, 우트레히트에서는 정통파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통주의적 성향의 교수들이 임명되었다. 1864년 이래 좀 더 보수적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문을 Stemmen voor waarheid en vrede에 게재했지만 근대적인 자유주의 성향을 취한 사람들은 1867년 이래 자신들의 견해를 Theologisch Tijdschrift에 실었다. 아무튼, Loman과 Van manen에 의한 급진적 견해들은 암스테르담과 라이덴의 근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의 출현

네덜란드의 급진주의 학파가 신약성서의 주석학 분야를 점령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 학파는 기원 후 첫 두 세기의 교회사와 바울 서신들의 진정성 문제와 같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초반 페르디난트 크리스챤 바워에 의해 주도된 독일의 튀빙겐 학파는 단지 네 개의 바울 서신만이 진정성이 있으며 다른 서신들은 2세기에 쓰였다고 주장했다. 바워는 1845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 바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네덜란드에서 바워의 주장들은 다수의 학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따라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자유주의적인 근대적 당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근대적 학문의 결과에 따라 신약성서 문헌들의 진정성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육의 부활과 같은 다른 신학적 문제들도 토론하기를 원했다. 19세기 중반에 생겨난 이 근대주의는 정통파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며 긴장을 촉발시켰다. 다음 몇십 년간 특별히 독일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스위스의 루돌프 스텍(Rudolf Steck) 같은 몇몇 학자들은 바울의 네 개의 서신조차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루돌프 스택(Rudolf Steck)의 책은 네덜란드에서 주목을 받았다. Loman 뿐만 아니라 Van Manen도 이들의 책을 연구하고 검토했다. 그러나 그가 이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Van Manen의 죽음 이후 이러한 급진적 견해들은 라이덴 대학에서 유지되지 못했다. Van Manen의 제자인 G. A. Bergh van Eysinga에 따르면 좀 더 온건한 영국인인 Kirsopp Lake가 Van Manen의 뒤를 이었다. G. A. Bergh van Eysinga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G. A. Bergh van Eysinga의 은퇴 이후 더 이상 네덜란드의 급진적 학파들은 네덜란드 대학을 대표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이 급진적 학파들은 기원 후 첫 두 세기의 교회사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개관을 제공해주었으며 신약성서 학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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