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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함석헌의 자리(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5. 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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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자리

서보명

함석헌은 1961<성서의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개정판을 내면서 책의 제목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 바꿨다. 책의 내용에서도 어려운 한자를 줄이고 한글로 풀어서 쓰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순히 독자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은 그 고유의 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요즘 표현을 따르자면)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변한 그의 사상과 한국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철학적 입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책의 개정판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가 61년 개정판을 위해 쓴 서문의 원고는 미처 책에 실리기 전에 소실되었고, 그 전체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65년 넷째 판 서문에서 하게 된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한 가지 구체적인 변화는 함석헌이 관점이라는 단어를 개정판에서는 자리로 바꾸어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 의미를 단어 하나의 변화에 국한시키지 않고 거기에 함석헌 사상의 한 부분을 조명하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만약 그의 철학적 정체성이 1960년대 초중반 저술한 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면 자리라는 단어에 대한 고찰은 이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자리란 단어가 과연 함석헌의 사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모든 관점이 보는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함석헌의 생각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갖는 관점이 결국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위치에서 출발한다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에게 존재하는 아니 있는모든 것은 어떤 자리에 있고, 그 자리는 갈 수 있는 곳이고 때로는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함석헌이 자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각의 섭리가 이 당연한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고 자리를 통해 이를 기억하자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자리에 있다면 자리의 의미는 당연히 존재론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생각도 자리에서 하고, 뜻도 자리에서 찾는다. 자리에서 살고, 자리를 얻으려 싸우고, 자리에서 죽는다. 하지만 변하는 게 생명이라 믿었던 함석헌에게 자리는 고정적인 숙명도 별자리도 아니었고 오히려 더 높은 참의 자리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사람으로서 가야 할 자리인 절대와 궁극 또 전체의 자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 자리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리에 까지는 가야 한다고 믿었다

함석헌에게 자리소리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라도 결국 누군가의 소리이고 모든 소리의 바탕에는 생명의 외침이 있듯이, 그 개념은 어떤 자리에서 출발했고 그 자리를 대변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그 개념에 대한 비판도 어떤 특정한 자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함석헌의 의도를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역사를 얹고 그 위에 자리를 더했다 할 수도 있다.

함석헌은 실제 많은 자리를 말한다. 역사의 자리, 종교의 자리,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 구경(究竟)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 예수의 자리, 구원의 자리, 믿음의 자리, 참의 자리, 절대의 자리, 성경의 자리, 전체의 자리 등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개념들을 자리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함석헌에게 자리는 이런 개념들의 성격을 상징이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믿음이나 참이나 전체가 상징일 수는 있지만 그 자리는 우리가 설 수 있고 앉을 수 있는 자리이고 실제의 자리였다. 자리는 표현이 불가능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용어가 아니라 반대로 그런 개념들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초월이 자리라면 그 초월성은 자리라는 조건과 한계 속에서 다가감이 가능한 곳이 된다. 그에게 자리는 서있는 자리였고, 따라서 여기가 내 자리라는 생각으로 앉아 머무를 수 없는 자리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리에 있다면 신에게도 그 자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신앙은 바로 그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곧 삶의 모순을 극복하고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차원의 높은 자리가 있음을 믿어야 하고 그런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모순을 넘어서는 자리가 종교였고, 참의 자리로 가자는 길이 종교였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자리가 바로 종교의 자리, 믿음의 자리였다.

만약 함석헌에게 존재가 자리라면 그의 사상에 대해 자리의 존재론을 말할 수는 없을까. 아니 서구사상의 존재론이 대게 변화하는 생명의 본질을 등한시 하는 개념이었다면 함석헌의 자리는 존재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자리란 무엇일까? 자리는 공간이 아니고 장소와도 다르다. 장소와 공간은 오랜 철학적 개념의 역사를 갖고 있고 그만큼 그에 대한 이해도 복잡하다. 함석헌 자신이 자리를 장소나 공간과 비교해 설명한 예는 없는 것으로 알지만, 자리는 장소나 공간의 개념사와 분리해서 생각될 수도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공간의 특징을 표현한 허공이라는 개념이 그의 스승 유영모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 비슷한 얘기를 먼저 하자면 유영모의 허공(빈탕한데)은 서구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동양사상의 특수성을 대안으로 등장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험석헌의 ‘자리’는 스승의 용어인 ‘허공’을 염두에 두고 이를 보완하여 발전시키기 위해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먼저 서구의 근대사상에서 공간에 대한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공간은 시간과 더불어 서구사상의 중요한 개념에 속했다. 그렇다고 시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온 건 아니다. 특히 영원을 지향해온 신학에서의 공간은 불편한 개념이었다. 자연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그 역사에서, 공간이 장소가 되어 만들어진 역사는 마지막 날 새로운 시간 속에서 사라질 대상이었다. 역사의 의미는 시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과 장소에 대한 집착은 우상의 숭배를 낳고 분쟁과 이념을 낳는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헤겔과 같은 철학자에 의하면 역사는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했고,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었다. 공간과 분리된 시간의 승리가 서양의 역사에서 19세기를 역사의 세기로 만들었다. 공간은 영원한 시간의 은혜를 입어야만 따로 구분된 성스런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서구에 의해 식민지가 된 땅에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간의 정신이 비껴간 땅으로 치부되었고, 근대라는 시간의 정신이 내미는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이런 서구의 공간이해와 함석헌의 자리 또는 유영모의 허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하기 전에 함석헌과 유영모 사상의 성격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사상이 당시 서양의 철학과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으로 이해되어야만 그 정신사적인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영모의 철학은 믿음과 지식, 물질과 정신, 주관과 객관, 상대와 절대, 유와 무, 몸과 마음의 분리가 당연하게 취급되는 시대에 그 분리의 정당성을 캐묻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역사와 사상의 시계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담론 중심의 철학을 그 이전 수양과 수행과 실천의 학문으로 재고해보고자 했다. 서구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무의식을 찾지 않았고, 그 모순을 즐기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허공을 찾자고 말했다. 허공은 그에게 위에서 말한 분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그런 분리의 조건을 넘어 모든 존재의 조건이었다. 유영모의 허공에 대해 그리고 그 허공과 함석헌의 자리의 관계는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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