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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다시 만난 세계(김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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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9. 6. 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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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김난영(한백교회 교인)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 2016년 이화여대 본관에 울려 퍼진 소녀들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 중

 

 스물넷 다섯 무렵 남자친구를 따라 인권모임에 나가면서 생애 첫 집회에 참석했다. 세상 위정자들에 대한 불신을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터라, 정치는 물론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내는 것에 막연히 편치 않은 감정이었다. 얼떨결에 일행과 함께 차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선두에 선 누군가의 쉰 목소리를 따라 외쳤지만, 절실해야 할 구호는 곱씹을수록 날선 느낌에 몸이 경직됐다. 나의 첫 집회는 그랬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하며 나의 일상에도 낯설고 불편한 세계가 찾아왔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한다고 하면서, 정작 둘씩이나 낳고 나니 알아서 키우라는 정부. 나의 커리어와 중년을 넘어선 친정엄마의 마지막 체력을 두 아이의 육아에 갈아 넣었다. 둘째를 낳은 지 백일 쯤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힘겹게 버텨온 초보 엄마의 일상도 세월호와 함께 깊은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상식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편인 아기엄마에게는 휴대폰이 광장이었다. 가끔 올라오는 온라인 서명을 퍼 나르고, 공감하는 기사나 댓글에 ‘좋아요’버튼을 누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2016년 큰 아이의 일곱 살 생일에 시작한 촛불집회, 아이들과 함께 광장에 섰다. 얼떨결에 엄마를 따라나선 아이들에게 어색함은 없었다. 촛불을 맘껏 태울 수 있는 불장난만으로도 신나는 경험이었으며, 긴 행진을 이어가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며 간식을 손수 쥐어주는 어른들의 따뜻함이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그 겨울 광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대통령을 바꾼 엄마는 이제 세상을 바꾸는 ‘정의로운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2년여가 흐른 제주에서 다시 아이들과 촛불을 들었다. 아름답고 평온한 일상을 꿈꾸며 왔건만, 영리병원, 제2공항, 비자림로, 송악산 오션타운, 동물테마파크 등 난개발의 중심이 된 제주는 더 이상 평화의 섬이 아니다. 정의로운 엄마라면 모름지기 이를 아이들에게 알리고 함께 나서야하는 법, 날선 어른들의 목소리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들려줄 수 있는 현명한 어른들의 지혜를 빌려 밖으로 나선다. 

 아이들은 더 단단해진 발로 제2공항 부지로 깎여나갈 위기에 처한 열 개의 ‘성난’ 오름을 오르며, 그 오름을 놀이터 삼아 놀던 어른들의 즐거운 추억을 듣는다. 도청 앞 도로에 색색의 분필을 들고 제2공항이 들어서면 더 이상 함께 살지 못 할 생명의 모습을 펼친다. 삼나무가 흉하게 잘려나간 비자림 터에는 숲을 지키는 나무집을 세우고, 아직 남아있는 나무들 사이사이 밧줄을 엮어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든다. 그리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오름과 생명의 이름들을 불러 위로하는 노래를 부른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친절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세상의 부조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 

독자봉에 흩날리는 벚꽃을 주워 머리에 심은 솔
비자림로 숲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제2공항 부지의 철새도래지에서 서식하는 멸종위기 저어새의 탈을 쓴 율
도청 앞 도로를 스케치북 삼아 그리는 아이들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투쟁 현장을 이해시키려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부조리함을 차단하지 않은 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세계에서는 일상을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약자의 입장을 나누고, 진지하지만 유쾌하고 쉬운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영리병원 반대 촛불집회 참석한 날, 율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촛불 들면 우리 또 지난번처럼 상 받는 거야?” 아마도 2017년 촛불시민에게 수여된 에버트 인권상 이야기를 기억하나보다. “그래, 율이는 그런 상 많이 받을 거야. 힘내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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