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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Another Child]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혹은 아직도 어른이 아닌 <미성년 (김윤석, 2019)>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9. 7. 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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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Another Child]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혹은 아직도 어른이 아닌 <미성년 (김윤석, 2019)>

이희승

배우 김윤석은 남성의 시각, 남성의 세계, 남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 영화 중에서도 특별히 견고하게 남성 중심적 세계관을 담보하는 인물들을 연기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타짜>나 <도둑들>에서 보여준 세련되고 도회적 범죄자,  <황해>와 <1987>의 원초적 남성성과 야수적 권력욕을 가진 악인, <범죄의 재구성>, <추격자>, <거북이 달린다>, <극비수사>, <암수살인>의 거칠지만 속깊고 정의로운 형사, <완득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서 연기한 다양한 모습의 부성. 그래서인지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에 대한 일종의 선입관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저기서 호평이 나온 후에야 찾아 보게 된 그의 연출 데뷔작 <미성년>에서, 뜻밖에 이전의 어느 영화에서도 보여 준 적 없는 비전형적  남성상을 연기하고, 스케일은 작지만 속이 꽉 찬 스토리를 지어내는 섬세한 이야기꾼 김윤석을 새로이 만나게 된 듯 합니다. 불륜이라는 식상한 소재와 청소년 영화의 전형성을 정면 돌파하는 뚝심, 네 명의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담아낸 잘 설계된 미장센, 그리고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깔끔한 편집으로,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담백하지만 묵직하게 전달하는 저력있는 신인 감독 김윤석에게 적잖은 기대마저 걸게 만드는 영화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세월을 기다려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미성년인 자신을 의지적으로 성장시켜야 비로소 미성년에서, 그 어설프게 정체된 시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죠. <미성년>에서 갑작스런 위기 상황을 통해 만난 나이와 처지가 완전히 다른 네 명의 여성은, 스스로를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부가된 고통을 겪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각자의 고통으로 처절한 순간에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의연한 네 인물들은, 관습적 이미지와 감정의 과잉으로 위기의 여성을 그려내지 않고, 오랜 관심, 관찰과 이해로 잡아낸 절제된 디테일로 요동치는 내면의 갈등을 소란스럽지 않게 승화하는 순간을, 그 성숙과 연대, 그리고 확장의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단단하고 예민한 연출력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시작은 여고생 주리(김혜준)의 훔쳐보기로 시작합니다. 늦은 시각, 무르익은 회식자리가 거나한 술판으로 번져 가는 오리전문점 실내를 들여다 보는 주리는 자신의 아빠인 대원 (김윤석)이 오리집 주인 미희 (김소진)와 다정하게 속삭이는 장면을 숨죽이고 목격하죠. 결국 뒷걸음 치다 미희에게 들켜버린 주리는 핸드폰도 떨어 뜨린 채 줄행랑을 치고, 미희의 딸이자 같은 학교 동급생인 윤아 (박세진)는 다음날 학교에서 주리를 만나 핸드폰을 돌려 주려 합니다. 이미 불륜은 한참 진행 중이고, 미희와 대원의 늦사랑은 둘만 빼고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랩니다. 윤아는 때마침 주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주리의 엄마 영주 (염정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맙니다. 이제 영화는 불륜이 아니라, 불륜의 파장에 집중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드러낸 셈이죠.

대원과 미희의 불륜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단정한 교복에 백팩을 메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모범생 주리와, 철없는 아빠와 대책없는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학교 공부나 친구 관계 따위엔 관심을 가질 여력없이 자립과 생존의 문제로 나이보다 웃자란 윤아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사이가 됩니다.

이미 각방을 쓰는 냉랭한 부부 사이지만 딸 주리를 키우고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결혼 생활을 유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전업주부 영주는 남편의 불륜을 놓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죠. 대원도 이제 가족들이 다 알게 된 상황을 인지하고는 집 밖을 배회하며, 일시적 회피와 어설픈 핑계대기 외에는 어떤 대응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어설픈 중년의 회사원입니다. 영주는 미희를 만나기 위해 오리집을 찾아 가고, 의도치 않게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미희를 밀쳐 조산에 이르게 합니다. ‘못난이’란 태명의 미숙아가 어색하게 꼬여 버린 다섯 인물의 관계에 더해져, 법적 미성년인 여고생  둘, 정신적 미성년인 중년 셋이 세상에 너무 일찍 나온 이 생명을 가운데 놓고 어쩌지 못하는 상황극으로 진행하죠.

영화의 장점은 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훨씬 더 미성숙하게 대처하는 인물들이 바로 중년의 부모들이라는 설정에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하고 세상의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는 듯 하지만, 결국 현실적 대책이란 조금도 없는 미희는 인큐베이터에 생존을 위해 힘겹게 싸우는 미숙아 못난이를 한번 들여다 보지도 않습니다. 결국 아이의 출생 신고며, 불륜의 뒷수습을 모두 미성년자인 윤아에게 내팽게치고는 자신을 떠나 버린 대원을 향한 감정을 추스리는데만 집중합니다. 두 가정을 발칵 뒤집어 놓고도, 상처 받고 기만 당한 아내, 딸, 내연녀와 그녀의 딸을 피해 서해 끝까지 도망가 버리는 대원. 피하다 피하다 갈 데가 없어진 대원은 일찌감치 은퇴해서 펜션하는 친구의 소식만 듣고 이삼일 혼자 시간을 갖겠다며 찾아가지만, 이미 폐업 상태로 버려진 펜션 근처에서 만난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지인들에게 혼쭐이 나고 만신창이 상태로 집으로 돌아 옵니다. 이 둘보다는 감정적으로 조금 성숙한 듯 하지만, 오랜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명의로 된 것을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이혼을 결심하지 못한 채 속만 끓이는 영주.  영주는 전복죽을 끓여 미희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옵니다. 그리고는 여기 왜 왔냐는 미희의 질문에 “갈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왔”노라 대답하죠. 남편의 명의로 이루어진 세계에 이름없이 존재해 온 자신의 아직 홀로 서지 못한 인생을 실토라도 하듯 말이죠.

불륜의 책임과 결과를 외면한 어른들과는 달리, 두 여고생 주리와 윤아는 틈틈이 병원, 학교 그리고 각자의 집을 오가며 ‘사고 처리’에 분주한 모습입니다. 성숙의 잣대로 보자면 어설프게 갈팡질팡하는 어른들에 비할바가 아니죠. 못난이를 동생으로 받아 들이고 돌봄을 준비하는 주리와 윤아. 다른 세계에 속했던 두 소녀는 이제 뜻밖의 위기를 연대의 계기로 전환하고,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두 개의 세상 (한쪽은 신가부장적 핵가족이라는 경제단위에 종속된 중산층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한쪽은 주류에서 밀려난 어른들과 보호막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역할이 뒤엉킨 세계) 사이에 일종의 다리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건너 다닙니다.

이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위태로운 혼란을 체험하는 네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를 밀어 내지 않고 수용하는 빛나는 순간들은 제가 발견한 이 영화의 미덕입니다. 영주가 오리집에 처음 찾아 온 날, 남편의 전화를 다정하게 받는 미희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식당을 박차고 나옵니다. 미희는 영문도 모른채 2인분 식사를 주문하고 선불까지 낸 영주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식당을 떠나자 걱정스레 따라 나옵니다. 마치 오지 않을 애인을 기다리다가 쓸쓸히 돌아 서는 영주의 처지를 잘 안다는 듯이, “이러고 운전하고 가면 안돼요.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해요”라며 영주의 손목을 다정하게 붙잡죠. 열아홉에 윤아를 낳고 도박꾼 남편이 떠난 후 딸을 홀로 키운 “여자로썬 불행”한 인생을 산 미희는 낯선 타인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인물입니다. 살갑진 않았지만 믿고 살아 온 남편의 외도를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소란을 떨지 않던 영주는, 어설픈 변명을 늘어 놓는 남편 대원에게 날카롭게 쏘아 붙입니다. “너는 두 사람을, 아니 네 사람을 기만한 거야!”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주장하지 않고, 불륜 상대인 미희와 그녀의 딸인 윤아까지 모두 떠안고 고민해온 영주의 심정을 고스란이 드러낸 장면인 것이죠. 한심하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성숙을 도모하고 있는 엄마들의 고통을 측은하게 바라본 소녀들은 “너희 엄마 잘 챙”기라며 서로의 엄마를 엇갈려 걱정하고 엄마한테 잘하라며 친구를 다독입니다. 영화 <미성년>은, 성숙이란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 아니라 홀로 고민하고 투쟁하며 얻어낸 세상과 타인의 대한 이해라는 주제를,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혹은 아직도 어른이 아닌 여성 캐릭터들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 은은하게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필자 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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