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평] 사과하는 일도 비대칭적이다(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9. 9. 20. 21:52

본문

사과하는 일도 비대칭적이다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40대 후반의 ㄱ씨는 이제 뉴스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슬금슬금 휴대폰을 쳐다본다. 돌아가는 얘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사람들과 얘기할 때 혼자 뒤처지기 싫어서다. 하루 만에 모든 매체에 도배하다시피 떠돌던 얘기가 이튿날 허구에 가까운 것으로 내팽개쳐지는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난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이 스펙터클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이른바 ‘조국뉴스’에서 눈을 떼면 시대에 뒤떨어져 버린다. 게다가 세상이 뒤엎어질 듯 불타오르던 뉴스에 불이 꺼진 뒤 되짚어보면 별것도 아닌데 흥분한 일이 허다하다.

그는 수치스러웠다고 말했다. 청소년 시절 포르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마음 같다고 했다. 찝찝함이 씻겨지지 않는데, 그 잔상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리플레이되고 있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세상의 구질구질함을 아직 덜 겪은 순수한 청년들은 다를지 모르지만, 오십 가까이 살면서 누군가를 완벽히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절감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해서 더욱 의심의 해석학이 자신의 인간관계의 원칙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데 ‘조국뉴스’에 상처받고 화를 내는 자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 만에, 마음을 그렇게 책동시켰던 그 뉴스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확인해보니 믿을 수 없는 뉴스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데 공감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났다. ㄱ씨는 자기가 생쥐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고양이를 피해 미친 듯이 쥐구멍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몇 초 안되어서 대가리를 불쑥 내미는 생쥐라고 말이다. 그것이 창피했다고 했다.

11시간짜리 기자간담회를 보면서 그의 창피함은 한 단계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조국 후보자가 자신이 ‘금숟가락’이라고 자인하면서, 금숟가락에게 부여된 기회를 그것이 특권인지도 깊이 생각 않고 누려왔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 말이 정치인의 영악한 제스처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ㄱ씨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조국 후보자보단 못하지만, 자신도 자기 숟가락의 품격을 자신들의 리그 안의 특권으로 활용했음을 새삼 떠올렸다.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않았지만 무심하게 활용했음을 조 후보자의 사과를 보면서 절감했다.

한데 누구에게 사과한단 말인가. 누가 피해자인지 알지도 못하니 대상이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SNS에 공개사과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ㄱ씨는 이 뜬금없는 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두려웠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적 착함’을 과시하면서 조 후보자를 우회적으로 지지하는 이상한 행동이라고 누군가 댓글을 다는 것이 싫었단다. 어쩌면 ㄱ씨는 혼자 나서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버스에서 내가 목격한 한 사건이 있다. 노령의 할아버지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내심 선뜻 자리를 양보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싫어서 망설였다. 몇 초의 시간이 지체됐다. 그리고 그 지체된 시간 때문에 더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니 혼자 온 세상 사람에게 노출될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겠다.

다음날 ㄱ씨는 나를 찾아와 딸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공범자였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결국 ㄱ씨가 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목사니 자기의 고해성사를 받아달라는 것이다. 법적으로 목사 자격은 사라진 셈이니 내가 그럴 공적 자격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람에게 내 자격이 살아 있지 않다는 얘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느 기사에서 ‘조국뉴스’가 70만건이 넘는다는 얘길 들었다. 기자들 스스로 ‘언론 대참사’라고 할 만큼 제대로 취재도 안된, 미리 답이 정해진 뉴스가 대량 쏟아졌다는 것을 기자 스스로 인정하는 얘기겠다. 물론 지극히 평범한 ㄱ씨 같은 소시민들도 일부 성찰적 기자들이 고백한 것을 알아차렸다. 해서 그는 언론에 대한 신뢰를 철회했다. 사회의 뿌리 깊은 부조리함을 이런 식으로 특정인에게, 그것도 70만건만큼의 문제들로 둘러싸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냥 좀 잘난 혹은 되바라진 정치인을, 그의 가족과 함께 톡톡 터는, 그리하여 분노를 쏟아부을 대상으로 온 세상에 지목하는 짓을 ㄱ씨는 ‘보지 않겠다’는 말로 응징했다. 그러고는 조국 후보자의 정치적 사과인지 아닌지 하는 말이나, 사과조차 않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정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성찰해내는 소시민들이 있다. 부조리의 비대칭만큼이나 사과의 행위도 비대칭적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할 시간이다.


*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9062037015&code=990100#csidx7d5114cf81591a99cd683166f142a97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