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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The Queen of Hearts] 시대적 성찰과 멀어진 욕망의 칼자루 <퀸오브하츠 (메이 엘-투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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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9. 11. 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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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성찰과 멀어진 욕망의 칼자루 <퀸 오브 하츠 (메이 엘-투키, 2019)> 

이희승*

청소년기를 벗어나 사회에서 제 몫과 자리를 찾기 위한 준비에 분주한 대학생들과 매일 마주하는 일을 하다보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그들의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물론 저도 모르게 “요새 대학생들은... 쯧쯧” 하며 꼰대스러운 한탄이 툭 튀어 나오는 순간도 있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그치곤 합니다. 베이비 부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속성장의 수혜자가 되고, 윗세대가 감당한 진통 끝에 민주화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서실체적 희망과 꿈의 성취를 경험할 기회를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의 이십대가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잊지 않으려고 말이죠. 

끝이 안보이는 장기 불황과 양극화, 이해타산을 앞세운 미디어와 결탁하여 빠르게 진행되는 정치적 우경화,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추구해야 마땅한 제1과제가 되어버린 시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소수가 아니라면, 주류사회 진출과 중산층 진입이라는 환상이 산산이 부서진지오래인 오늘을 살면서, 고단할 일 밖에 없는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의 이십대들.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는 것에대한 기대와 희망은 커녕,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이미 만성적 피로로 쳐진 그들의 어깨를 캠퍼스에서 거리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음세대의 생존을 담보로 일궈낸 경제 성장의 뒷처리로 떠넘긴 환경문제까지 보태어 생각하면, 남들보다 더 누리려는 욕망을 무기삼아 살아 오지 않았다해도, 왠지 미안하고 죄스러워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올해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으로 주목받은 덴마크의 여성감독 메이 엘-투키의 <퀸오브하츠 (Dronningen, 2019)>는 언뜻 보면 북유럽식 파격 로맨스-멜로 드라마로 보기 쉽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성세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혼하고 새로 가정을 꾸민 아버지를 다시 찾은 십대후반의 문제아 아들과 새엄마 간의 육체 관계와 파국을 다룬 이 영화는, 우리와 결이 다른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성문화로 인해 한부모밑에서 자라는 것이 보편화된 북유럽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흔히 성숙한 복지사회로 부러워만 하는 북유럽의 젊은 감독이 가진 문제의식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센세이션널한 설정을 통해, 기성세대가 공감하는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가치는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세대적 감수성에 갇혀 있는 그들의 한계와 내부에 자리잡은 위선을 지적하죠. 사회지도층의 이중성을 들춰내며 이 영화가 기성세대에게 던지는 윤리적 요구는 분명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비추어 자신들의 가치를 재고하고 성찰하지 않는 세대의 '낭만과 열정'은 다음 세대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도있다는 경고는 문화적, 정서적 차이를 넘어서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곧장 연상시키는 단정적이고 선명한 영어 타이틀 (The Queen of Hearts)과는 달리, 다소 모호한 영화의 원제인<Dronningen (여왕)>은 당연시 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특권안에 내재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에 대한감독의 날선 비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덴마크 어느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 북유럽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키 큰 나무 사이로 햇살이길게 비추는 숲길을 개와 함께 가로지르는 안느 (트리네 뒤르홀름). 로펌의 파트너이자 열정적인 청소년 인권변호사인 그녀는 성공한 의사이자 다정한 남편인 피터 (마그누스 크레페르), 그리고 구김살 없이 자라는 쌍둥이 두 딸과 함께 행복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축복받은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느날, 스웨덴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나, 키우던 친엄마도 두손 들어 버린 열여덟살 구스타브 (구스타브 린드)가 안느의 새 가족이 됩니다. 오빠가 생겨서 마냥 신바람이 난 쌍둥이들에게 눈길 한번 안주고, 아빠와 새엄마에게 대답 한번 곱게 안하는 구스타브는 자신의 욕망을 쫓아 당당히 가족을 버린 아빠 피터와 본인의 불행을 어린 아들에게 전가한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똘똘 뭉친 전형적인 십대 반항아입니다.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어른들의 폭력에 상처받은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온 인권변호사 안느에게 구스타브의 분노와 방황은 낯설지 않죠. 능숙한 솜씨로 상처받고 닫힌 구스타브의 마음을 서서히 열어 가던 안느. 하지만 부모 세대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초여름 햇살처럼 밝아지는 구스타브의 표정과 함께, 안느는 어느새 소멸된 줄 알았던 청춘의 열정이 되돌아 오고 있다고 느끼게 되죠. 구스타브도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얼었던 마음이 녹자, 어느새 말이 통하는 “쿨”한 새엄마에게 점점 호감을 느낍니다. 일과 가정을 돌보느라 잃고 잊었던 것을 되찾아야 겠다고 결심한 안느는 당당하게 구스타브의 침실로 들어가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정서적으로 깊어지기보다는 육체적으로 대담해져가고 결국 안느의 여동생에게 들켜 버립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지언정 늘 가까운 사람들의 영혼을 해치는 언니의 타고난 성취욕에 질려 여동생은 괴로워 하고, 아직 어설픈 애어른일 뿐인 구스타브는 점점 커져가는 죄책감에 고통받죠.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번지자 당황한 안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모두가 부러워하는 중산층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도덕적으로 넘지 않아야 하는 선을 넘게 됩니다.  

아빠인 피터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은 구스타브를 배은망덕한 거짓말쟁이로 몰아 집에서 쫓아 내고, 모든 것을제자리로 돌리려는 안느. 이해심많은 전문직 새엄마에서 격정적인 연상의 연인으로, 그리고 다시 매몰차고 위선적인 기성세대의 대표로 돌변하는 안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퀸입니다. 본인은 나름 이성적으로 사태를 수습했다고 자위하지만, 열정의 대상과 처음 느껴본 가족의 포근함까지 일시에 빼앗긴 구스타브는 계속해서 안느를 찾아와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합니다. 영화는 줄곧 관객이 안느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잔인하고 자기방어적 시각에서 사건을 따라가도록 하죠.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인된 욕망의 해제를 꿈꾸고, 죄책감을 누르기 위해 육체적 쾌락에 집착하다가, 위기의 순간에 타인을 제물삼아 안정된 현실로의 무사 복귀를 꿈꾸는 안느의 이기적 본능에 십분 공감하게 됩니다. 

사실을 알아 버린 양심적인 여동생과 아빠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겠다는 순진한 구스타브의 “협박” 때문에 느끼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구스타브가 이제 조용히 사라져 주길 바라는 안느의 변화는 극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변호하는 미성년 성범죄의 희생자를 집으로 불러 딸들과 함께 지내게 하고, 수치심에 두려워 하는 어린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함께 싸운 정의로운 안느는 어느새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던 가해자의 자리에 서서, 누구보다도 철저히 그 사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사과나 속죄의 기회도 거듭 외면하죠. 자신을 의심하는 남편을 더욱더 가열차게 몰아붙여 자신의 편을 만들고, 주변을 돌며 질척거리는 구스타브를 매몰차게 내칩니다. 그녀는 쓸쓸히 겨울숲에서 동사한 채로 발견된 구스타브의 죽음 앞에서도 끝내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이 무엇을 희생하며 어떤 것을 지켜낸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차가운 결말을 맞게 되죠.  

관객은 그제서야 무슨 나쁜 꿈에서 깨어난 듯, 이 모든 소동에 조용히 희생된 구스타브가 자주 올려 보던 가지많은 나무가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두번이나 자신을 버린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어린 청년이 원했던 ‘정의’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죠. 이 영화의 결말은, 의문 투성이로 남겨진 구스타브의 쓸쓸한 죽음이 스토리 중심으로, 화면 안으로 초대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잊혀질 운명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나 저에게는, 세월호 참사처럼 우리사회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억울한 어린 죽음들을 상기하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나 기성세대는 헌신과 열정을 다해 다음 세대에 좋은 세상을 물려 주었노라 자부하기 쉽죠. 운좋게 사회의 중심에 선 세대가 약간의 일탈과 조금의 특권, 특별한 배려를 당연한 보상으로 여기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고, 뼈아픈 성찰을 통해 세대적 한계성을 극복할때 비로소, 아직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어린 세대를 더 큰 악, 더 큰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영화는 역설합니다.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영화와 텔레비젼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라캉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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