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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Joker] 이미 폭력의 이유가 없어진 세상 < 조커 (토드 필립스, 2019) >(이희승)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20. 1. 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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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폭력의 이유가 없어진 세상 

<조커 (토드 필립스, 2019)>

이희승*

수년만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2주도 안되는 짧은 일정, 아쉬움으로 허덕이며 하루하루 분주하게 그간 소원했던 가족, 친지, 친구들과 만나 쌓였던 이야기를 나누며 떠나온 자의 거리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죠. 매일 코끝을 매캐하게 자극하는 미세먼지. 일상이 되어버린 도로 위의 아슬아슬한 레이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더욱 인색해진 미소. 더이상 “왜”를 묻지 않고 생존을 위해 질주하는 중년의 친구들. 상상하기 힘든 입시 압박으로 연말연시임에도 학원으로 사라진 친구들의 자녀. 살아 내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간 나만 다치기 쉬운 팍팍한 환경이 모두의 신경을 갈아 세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웠습니다. 되돌려 생각하면,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내가 속한 사회도 결국 같은 모습이겠구나 하는 깨달음도 피할 길이 없었죠. 영화가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여 표현하고 인간성의 심연을 파헤쳐 드러내는 예술적 매체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저로써는, 한파보다 혹독한 이 시대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영화를 알아보는 일이 변치 않는 새해 목표가 되어야 함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조커>가 그리는 고담시의 모습이 과연 영화가 만들어낸 환상 속의 디스토피아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과잉의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극단적으로 소외되고 자아가 분열된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랙 (호아킨 피닉스)이 위협적인 반영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의 서사에 대한 관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음울한 현대 사회를 꼭 닮은 고담시의 어두운 초상이 극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합니다. 영화가 담지한 정치적 메세지 또한 영화적 공간이 확보한 리얼리티를 토대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아서가 잔인한 폭력의 발현을 자기 발견의 매개로 삼는다는 영화의 설정을 지나친 폭력의 미화로 해석하는 평도 있지만, 아서가 수없이 이유없는 폭력을 경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영화 전반에 걸쳐 느린 화면, 클로즈업, 센티멘탈한 음악을 사용해 감정적, 감각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아서/조커의 개인적 폭력은 이미 사회에 만연한 이유없는 폭력에 대한 저항, 혹은 사회적 폭력의 반사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관객을 설득합니다.

아서 플랙은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이죠. 병들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는 홀어머니 페니를 부양하는 아서는, 아침마다 얼굴에 진한 분칠을 하고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광대입니다. 깊은 우울을 분장으로 가리고도 남들을 즐겁게 하는 광대 노릇에 영 적응하지 못한 아서는 도심가의 불량청년들, 지하철에서 여성승객을 희롱하는 취객들, 심지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죠.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된 삶을 참아 내던 아서는 어느날 손에 넣게 된 권총으로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향해 반격을 시작합니다. 한차례 우발적 살인을 경험한 아서는 점점 폭력이 주는 희열에 눈을 뜨고, 아서의 살인 행각은 차별이라는 사회적 폭력을 견디던 고담시의 하층민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광대 복장의 시위자들이 우발적 살인자 아서를 추종하고, 생방송 토크쇼에서 진행자에게 총을 쏘고 연행되는 조커를 “구출”하면서 끝을 맺는 <조커>는 사회적 약자 아서 플랙에서 출발한 반영웅 조커의 탄생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악역으로 대상화되고 정형화된 조커라는 인물을 영화 중심으로 끌어 들여 개인적 서사를 부여하는 <조커>는 여러가지 위험부담을 안고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조커가 가지는 상징성을 해체하면서 조커라는 절대악의 상징 안에 응축된 에너지를 소멸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잃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영화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과장된 연기와 춤을 뮤지컬의 문법을 차용해서 서사 밖의 요소로 승화함으로써, 조커가 악의 아이콘에서 평범한 인물로 축소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시시함”을 요령있게 피하죠. 영화의 카메라는 삐에로 분장을 한 아서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클로즈업하면서, 광대라는 사회적 역할과 지독한 망상 속에 사는 엄마 (페니 플랙)가 강요하는 “행복”이라는 명제가 만들어낸 이중의 억압이 서서히 폭발점에 이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주조된 인물의 내적 긴장감이 디스토피아인 고담시를 현실성있게 재현한 영화의 배경과 합쳐 지면서, 개인의 분노와 절망감을 후반부의 사회적 무브먼트와 연결하려는 영화의 의도가 분명히 보이죠.

조커라는 정형화된 악인의 탄생에 호기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이 영화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의구심을 두 가지로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첫번째, 이 영화가 과연 리얼리즘과 기시감의 차이를 치밀하게 고민했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쌓여 가는 고담시의 거리. 불나방처럼 화제성있는 뉴스에 달려 드는 저급한 미디어. 이미 화해 불능의 상태로 치달은 빈부의 격차.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재료들을 적당히 배열하고 언급함으로써, 영화의 고담시는 관객이 사는 현실과 아서의 현실 사이에 거리감을 지우려 애를 씁니다. 즉, 영화가 표현한 고담시의 이미지는 이미 관객이 충분히 알고 있는 현실의 일정 요소를 가미한 반사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예술의 역할이 거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명작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조커>가 적극적으로 오마쥬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플린이 희화적으로 묘사한 산업사회의 단면은 익숙한 기시감보다는 시각적 상징을 통한 차원 높은 리얼리티를 지향하죠.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현대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절절하게 전달하기 위해, 익숙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영화만이 담을 수 있는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관점에서, <조커>가 암울한 고담시의 “이미지”를 통해 담아낸 신자유주의의 실상이, 관객으로 하여금 “왜”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힘이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당히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참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조커>가 드러낸 이미지에 대한 맹목이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풍부하다 못해 화려한 표정연기와 표현력 넘치는 신체 이미지는, 말수가 적고 어눌한 아서라는 인물이 가진 특징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아서라는 평범한 인물을 조커라는 메타포로 다시금 승화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영화는 명배우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전적으로 기대어, 강렬한 이미지들을 탄탄히 엮는 섬세한 서사를 짜넣기보다는 설명이 필요없는 배우의 아우라를 통해 시각적 쾌감을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듯 합니다. 배경음악은 이런 영화의 쾌감을 공감각적으로 증폭하느라 서사를 끊임없이 침범합니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서의 자아도취적 댄스 장면은, 극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주인공 아서에서 잠시 “탈피한” 주연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퍼포먼스를 철저히 계산된 앵글과 편집을 통해 상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손색 없는 이미지로 만드는데 전념하죠. 인물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더하지 않은채 불필요하게 강조된 뮤지컬적 시퀀스들은 타인과 소통할 길 없는 아서의 심리 변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라고 보기엔 무리일 정도로 감각적인 영상미에 집착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맹목때문에, 영화 <조커>는 고담시를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매스미디어의 센세이션널리즘을 겉으로는 비판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조하는 듯 보이죠. 아서를 조커로, 소외된 소시민을 잔인한 파괴자로 만든 세상의 차별과 폭력은 뚜렷한 원인과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냉혹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없는 폭력의 숨겨진 메카니즘을 치열하게 파고든 흔적을 통해 관객과 교감하고 시대를 고민하는 것이 영화라는 예술이 지닌 저력이라고 볼 때, 서사의 깊이를 포기하고 이미지의 쾌락을 추구한 영화 <조커>의 미학적 선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미 폭력의 이유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묵직한 울림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로 풍성한 2020년을 기원해 봅니다.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영화와 텔레비젼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라캉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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