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아(청소년극 연구자)
이 연재는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중고등부의 91년 예술제인 뮤지컬 “그대 버려졌나”의 참가자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이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당시 공연 체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40대가 된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탐색하는 작업이다. [경동 예술제, “그대 버려졌나”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초반에 소개한 바 있다.]
Y는 “그대” 당시 고2 였고 고등부 회장이었으며 공연의 전 과정을 기획, 총괄하였다. 뉴욕에서 브랜드를 만들고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도록 마케팅 하는 일을 하고 있다. Y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인터뷰는 2019년 12월 28일 화상 통화로 실시하였다. 아래 대화에서 A는 나다. 나 또한 “그대”에 참가하였으며 청소년 시절 Y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이지만 Y와 편안하게 대화하였다. 내가 녹취록을 작성한 후 Y가 확인, 보완한 내용을 소개한다.
A: 영상 보니까 어땠어요?
Y: 뭐 민망하지. 근데 신기하게 마침, 크리에이티브한 인간들의 새싹들이 모여 있었네-그런 생각이 들고. 말하자면 크리에이티브 회의 같은걸 했었던 것이 나에게는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어. 아이디어가 나오면 회의하면서 그걸 발전시키고, 방법적인 솔루션이 곧 나오고… 아이디어가 실체화 되는 것 까지의 굉장히 성공적인 케이스였달까…
초반에 고민했던 것이, 우리가 2000년 전 얘기에 대한 뮤지컬 대본을 지금 다시 연기하는게 뭐가 중요하냐, 지금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버려진 거 아니냐, 옆에 있는 어떤 루저를 도와야 되냐,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현실을 담겠다고 우리가 대본을 다 다시 쓰고 그랬잖아. D가 썼는데, 회의를 하고 에피소드나 현실적인 이야기 소재를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내면, 다음 주에 그게 대본으로 나오고 그런 상황이었거든. D한테 내가 그 때 정말 깜짝 놀랐는데, 대본을 써 오는 속도랑 완성도에 완전 감탄을 하고 감동을 하고… 아이디어가 결과물로 빠르게 전환되는 그런 경험이 아주 멋졌었던 것 같애… 나는 D의 뭐랄까, 비범한 면이랄까 천재적인 면을 봤던 것 같아. 리스펙트(Respect) 이런 느낌. 그 때는 D랑 친하지도 않았어 별로. 하면서 친해졌지. 친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뭔가 통하고 뭐가 막 되는 느낌, 회사 생활이나 사업하면서도 말 통하는 사람이랑 일하면 되게 좋거든, 결과물도 좋고. D가 그랬던 것 같애. 말도 통하고 뭐가 되가는 느낌. 이런게 좋아서 서로 좋아하면서 같이 했던거 같고.
A: 얼마나 자주 만났어요 그 때?
Y: 주말에… 아니다 주중에도 만났지. 야간 자율학습 안하고 지하철 타고 교회에 가는게 학교 친구들한테는 좀 특이해보였나봐. 나 스스로도 난 자율학습 안하고 연극 연습하러 간다 이러면서 또 껄렁껄렁하고 가고. 쿨한 척. (웃음) 학교에서 쉬는 시간, 자율학습 시간에 막 줄 그으면서, 대본 리뷰하고 그랬던 것 같애. 재미있었던 것 같애. 약간 학생 입장에서 작은 일탈을 하는, 그런 쾌감이 있었고, 아까 말한 창작의 쾌감 같은 것도 있었고.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일들도 팀원, 팀... 각각의 전문 기능과 역할을 가진 사람들이 협업하는게 일상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공개적으로 결과물이 나오고 대중에게 피드백을 받는 경험을 그때 한번 제대로 해 본거지. 내 직업이 프로덕션 같은게 많거든. 백 평 짜리 갤러리 하나 빌려놓고 전시 기획해서 몇 일간 이벤트하고, 그걸 또 영상으로 남겨서 브랜드 비디오를 만든다든지. 그런 프로덕션의 경험을 그 때 처음 해본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 우리끼리 인쇄물도 디자인하고 그랬잖아. 초대장 디자인에… 토탈 프러덕션을 했구만.
A: 이렇게 기울임체로 썼던거 누런 종이에.
Y: 어어 맞어. 그 캘리그라피도 내가 쓰고… 리플렛 표지에 대사 인용을 한다던지… 표지와 마지막 장이 댓구가 이루게 한다든지… 크크. 결과물과 과정이 중고등부 예술제 치고 퀄리티가 좀 있지 않았어? (웃음) 그리고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던거지….. 선배나 전문성 있는 사람들한테 배우면서 제대로 해보는 게 값진 경험이었고,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 동참한 모두에게 주는 동질감과 만족감.
당시 고등부 회장이라는게 나에게는 뭐랄까… 해야만 해서 했지만 (할 사람이 없어서) 평소 내 성향으로는 맞지 않은 역할을 해봤던 건데. 나서는거 싫어하는 내가 지금도 어쩌다 조직의 리더를 하고 있네. 워낙에는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하는 성향이었는데. 예술제 경험이 여러모로, 자아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나?
A: 언니 그러면 그때 그걸 왜 그렇게 열심히 했어? 안 맞는 옷인데도?
Y: 모르겠어. 나는 이렇게 뭔가 만들어내고 생각한 것을 구현하는 거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일 할 때, 도파민이 나오는 거지…) 당시에 꽤 종합적인 면의 창작을 해볼 수 있어서 몰입할 수 있었고, 책임감도 있고. 그래서 좋아서 한 건 아니지만 재미있게 했던 것 같애.
A: 맞아. 언니가 여기저기 다 있었던 기억이 나. 혹시 창의적인 쪽으로 진로를 결정한다던지 지금 하는 일을 하게 된 데 이런 것이 어떤 영향이 있어요?
Y: 결정에 영향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를 재미있어하고 내가 좋아하는구나, 이런게 나는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각성이 진로나 내가 조직에서 내 역할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거 같고. 일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 할 때 뭔가 처음 해보는 일인 경우가 많거든. 브랜딩이나 마케팅이라는게 시장이나 소비자는 언제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아이템도 바뀌고, 협업하는 팀도 그렇고,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인데, 항상 맨땅에서 또 시작해야하네… 하는 막막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그게 겁나지는 않거든. 잘 하는 사람이랑 같이 하면 되지. 해결하면 되지. 답은 다 있지. 예술제 토탈 프러덕션 경험이 그런 이해나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것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큰 일을 할 때나 모르는 팀이랑 일을 할 때도 뭐 그렇게 겁 없이 하고 있지 않나…
A: 그럼 그 때도 맨 땅에서 했다고 기억이 되요?
Y: 허허벌판에 아무 도움없이 막 그런건 아니고. 그냥 그 형체가 없잖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이디어들이잖아. 근데 그게 이렇게 눈을 굴려가지고 모양도 만들고. 남들한테 전달이 되는 실체가 나온거잖아. 그런 맨 땅이라는거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인 브랜드 만드는 것도 처음에 뭐가 나올지 모르고. 사람들 얘기를 계속 듣고 지금 뭘 하면 시장이랑 소비자한테 소통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면 인기가 있을 수 있겠다 계속 연구하면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걸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거든. 컨셉도 만들어야 되고 모양새도 만들어야 되고 카피도 써야 되고…… 공연이라는 종합적이고 공감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좀 비슷한거 같달까…
A: 잘하는 사람하고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당시 경험과 어떤 연관성이 있어요?
Y: 그 때 여기 있는 친구들이 멋진 사람들이구나, 각자의 재능이 반짝 반짝했다, 그런 기억이거든. 우연인지 필연인지 각각 기능과 장점이 다양한 우리가 마침 같이 있어서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얘는 이렇고 쟤는 저러니까 얘네들이 이런걸 할 수 있겠다고 봐줬던 선생님 역할이 아주 컸을 것 같네… W 선생님이나 H 선생님. 약간 다정하게 케어해주던 선생님들 있잖아. 하….. 그 때 W 선생님, H 선생님인가, 회의 시작하기 전에 신문기사며 대학학보 펼쳐놓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해 주시기도 했었거든. 시도 소개해 주시고.
A: H 선생님이 김수영 풀잎 이런거 나도 읽어주셨어.
Y: 어. 김중식, 기형도…. 시집 소개해주고 당시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던지, 사회적인 문제도 얘기를 해주시면서 생각할 꺼리를 주셨던거 같고. 선배 어른들은 이런 사건을 이렇게 보는구나, 이렇게 봐야 하는 거구나 배운 기억. W 선생님이랑 H 선생님은 약간 지적 자극을 하면서 뭔가 우리를 애들 취급하지 않고 좀 성인처럼 생각하고 대해 주셨던 것 같고… 우리가 알아듣는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자기들이 생각하는 철학과 고민을 나눠주셨던 것 같지 않아?
A: 나도 W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조영래 변호사 얘기를 하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사람이 되기 보다는 더불어 같이 사는 사람이 되야 된다고… 기억이 많이 나는데
Y: 어, 맞아. 완전히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거야, 헐….. H, W 이분들 진짜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것 같아… 그 분들 뭐하시나 진짜 궁금한데? 뭐하셔? 아 그 분들 그때.…… 그렇네. 당연히 우리 교회에 강 목사님 이런 영향이 제일 크고 기장스러운 교육을 받은게 아주 컸지만 선생님들이 우리한테 영향을 많이 미친 것 같군. 어떻게 세상을 봐야 되는지. 그 분들이 얼마나 전문성이 있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고등부 친구들한테 교육적으로 도움을 줘야겠다고 고민을 많이 하시고 나름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민주적인 리더가 되려고 노력하셨던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 나는 성향상 감수성이 그런 쪽에 훨씬 있어서 그런 것들이 더 기억이 나는 것이겠지만. 멘토링 이랄까.
그 분들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나 화두를 던져주고 그 답을 잘 찾아내고, 그걸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로 풀어냈던 건 거기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능과 가능성이었겠지만, 근데 그렇게 이끌어준 선생님들이 영향이 컸던 것 같네. 당시는 그 분들 입장 생각도 안 해봤고, 내가 해야 되는 일만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되돌아보니, 통찰력 있는 리더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던 것 같네. 뭔가 북돋워줬던거같애. 내가, 우리가 알아서 참 잘 했었다가 아니라. 이거 네가 해도 돼. 이거 네가 해야 돼. 내지는 너 이거 잘 하고 있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해줬던거 같음. 말이든 말이 아닌 방식의 피드백이든.
A: 맞아, 그랬어. 나도… 교회에 가면 내 생각을 말할 기회가 많고... 나도 말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할 수 있고. 학생이라서 얌전히 있어야 하는게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당연히 뭘 해야 되고 그런게 기억이 나 지금 얘기 듣다보니까.
Y: 응, 그게 기억나네. 어쨌든 경동… 진보적인 사상과 우리가 어릴 때 받은 교육 이런게 나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액티비스트였고 진보주의자인 예수에 감동하고, 그것이 내 삶과 가치관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이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교회니까. 경동교회의 자유주의라고 해야 하나? [...] 내 가치관과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정말 좋은 선생님들 덕분이었네. 아휴, 그렇네. 선생님들 만나봐. 우리끼리 한게 절대 아니었을거야.
A: 선생님들이 평등하게 대해주고 나를 어린애 취급하지 않았다는거는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보통의 상황과 교회가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로도 들리는데…
Y: 아까 말한 나의 감수성이 자극되는 부분이라는게 이런 것인데, 자아에 대한 철학적 회의와 사회적인 갈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그런 고민을 했었던거 같애. 이고(Ego)에 대한 고민. 예민성. 이런 것을 좀 더 높은 수준으로 고민을 하고 싶었는데 주변에는 그런 얘기를 할 사람도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교회에 가면 뭔가 그런 지적인 자극과 철학적 사유의 맛보기가 가능했달까.. 그래서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나 사회 현상에 대해 선생님들이 해주는 말씀이, 혼자 고민하던 것의 답처럼 들렸달까 그런게 좋았던 것 같고. 우리 겨울 성경학교도 굉장히 진보적이었지.
A: 그런거 있었어 맞아… 생각지도 못했던 사회적인 이슈들 수련회에서 접하면 평소의 사고가 뒤집어지고 그런게 되게 많았어
Y: 맞아. 가치관 형성에 확실히 많은 영향을 끼친거 같애.
나는 그런 선생님[당시 교회 교사]의 역할을 내가 조직에서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열어놓고 아이디어를 듣는다던지. 내가 이렇게 던져주면 그걸 해결하는 친구들을 더 북돋워준다던지. 그 아이디어를 살려내는 방법을 내가 또 조언을 해준다던지. 그런 식으로는 일할 때 계속 적용이 되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 중고등부와 예술제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리더, 선배이자 선생과 같은 롤모델을 그 이후에는 별로 가져본 적이 없긴 해.
A: 진짜?
Y: 인터렉티브한 멘토링을 해주는 선배나 리더 롤모델이 별로 없어.… (단체 활동을 안 좋아해서, 중고등학교 특별활동반이나 대학교의 동아리 활동 등을 거의 하지 않은 탓) 여튼, 나 완전히 잊고 지냈었네 우리 선생님들…. 흠.
[…]
당시 체험과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A: 언니 크리에이티브 얘기를 많이 했는데… 여러 기억 중에 그게 되게 강렬한거지?
Y: 그게 가장 뚜렷하게 기억되는 것이라. 팀웍… 그룹 크리에이션, 좋은 결과, 그런 전체 과정을 통해서, 나 혼자로는 할 수 없는데 우리의 총합이 나의 한계를 넘는 더 좋은 것을 만들었다 그 느낌. 그런 만족감, 충일감은 결과물만이 아닌 함께한 팀원, 협업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도 포함해서.
당시로 말하자면, 어쨌든 연습하고 밥 먹고 밤에 모이고 헤어지고 그런 과정에서 다 같이 재미있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동참하고 서로에게 포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던 것 같네.
A: 그게 왜 중요했어요?
Y: 왜 중요했냐구? 원래 그게 중요한거잖아. 두루두루 다 챙겨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
A: 되게 많이 챙겼어 언니가.
Y: 챙기고 재미있게 해줘야 되고 다 기분 좋아야 되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애. 우리가… 우리 교회 공동체나 중고등부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배운게 그런 것 아닌가…
[…]
공동체와 신/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A: 그러면 지금 언니의 패러다임에서 예수는 말하자면 유일한 신이라기보다는 불교 그 다음에 젠(ZEN)… 그 다음에 여러가지…신성? 윤리? 이것들 중의 하나인거지?
Y: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한 존재. 내가 배우고 감동받고 할 수 있는 어떤 역사일 수도 있고 철학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나는 내가 교회에서 배운게 결국 나를 교회를 떠나게 한 이유가 되었는데 신이 교회 안에 있는게 아니고 구원이 하늘나라에 들림받는게 아니고. 그런거 다 배웠잖아. 현실의 각성이고 실천이고 그런걸 교회에서 배웠기 때문에 교회를 떠날 수 있었고. 자신의 믿음을 극단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예수였다고 믿고. 예수나 기독교가 유일한 신이나 종교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
Y: 그럼 A의 경험에서는 우리 공연 내지는 어린 친구들의 커뮤니티랑 그 안에서 신적인 경험이 있어? […] 경지를 넘어선 것 같은 신적 존재가 주는 포근함? 내지는 받아들여짐의 느낌. 이런게 그런거잖아. 그런게 뭐가 있었나보다..
A: 어, 맞어.
Y: 어떤 만족과... 그게 신에 대한 체험이이라고 생각하는거지?
A: 신도 포함이 돼 나는. […] 나는 기독교에서 성장 했기 때문에 그걸 기독교의 언어로 이해하고 표현을 하지만 어쩌면 다른 문화나 다른 어떤 제도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비슷한 체험인데 다른 말로 표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더 해봐야 알 것 같아.
Y: 그렇네…
끝.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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