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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해방과 해방의 사이 : 가까이 와야 할 것 같은데 먼(황용연)

시평

by 제3시대 2021. 3. 2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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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해방의 사이 : 가까이 와야 할 것 같은데 먼

 

황용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민중신학 박사)

 

0.

[딸들아 일어나라](괄호 안은 2절)

어두웠던 밤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 버리고(더 이상 벼랑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사랑도 행복도(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 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여성전사]

남성전사 산 오를 때 함께 오르며(궂은 일도 마다않고 해방을 위해)

불철주야 훈련하던 여성전사가(전쟁 같은 투쟁전선의 선봉에 서서)

총을 맨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여라(총을 맨 모습이 너무도 의연하여라)

아아아아아 해방의 진달래꽃

그대는 자랑스런 해방조국의 딸이어라

흙가슴 열어젖히고 민족의 염원 안고

혁명의 의지 불태우는 총을 맨 여성전사

 

1.

'정의당/우상호 사태와 관련하여 (586세대) 조직 문화와 젠더 폭력에 관한 글'을 써 달라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586세대라고 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586세대라는 말 뒤에 '직후'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하지요. 그래서 '586세대 직후'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서두에 인용한 노래들은 제가 운동권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접했던 노래들입니다. 아마 추측컨대 1980년대말~1990년대 초에 만들어진 노래들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노래 가사들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일단 첫 번째 노래도 그렇고 두 번째 노래도 그렇고, 여성해방이라는 과제를 의식하고는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노래의 경우 성차별이라는 단어도 등장하구요. 하지만 뭐랄까요. 이 노래들에서 여성해방과 성차별은, '해방의 여성 부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회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해방'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 해방을 '여성 부문'에서 실현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다. 이런 식의 생각으로 쓰인 가사들로 느껴진단 말이죠. 여성해방이란 것을 고려하게 될 경우 그 해방이란 것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달라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은 제기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노래들을 접하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 '부문운동'과 '전체운동'이라는 말, 그리고 '부문운동'은 '전체운동'에 '복무'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네요.

 

그래도 막상 이 노래들을 부를 때는 여자와 남자의 반응이 조금은 달랐다는 기억입니다. 특히 첫 번째 노래는 여자들은 상당히 열심히 불렀고, 남자들은 부르면서 가끔씩 짓궂은 추임새를 넣었죠. "딸들아 일어나라 밥해라". 두 번째 노래에서는 "흙가슴 열어젖히고" 다음에 "완전히!" 이런 추임새를 넣었고요. 그러고 보니 두 번째 노래에서 궂은일도 마다않는다는 말이 꽤 수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2.

또 하나 할 이야기는 제가 민주노동당 당원 생활을 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민주노동당은 제도적 차원에서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상당히 많이 보장하는 당이었습니다. 당 대표단과 회의기구에 여성 비율 30%(50%가 아니긴 합니다만)를 의무 보장했고, 비례대표 의원 후보를 낼 때도 여성 후보 50% 보장은 물론 이론적으로는 50% 이상도 가능한 선거제도를 마련한 정당이었죠.

 

그런데 민주노동당 내에서 여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하면 할수록 그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게 되던 말이 있었습니다. 여성/소수자 관련 의제를 제기하고 싸우면, 그게 틀렸다고 말은 못 하는데, 그렇다고 그 의제를 당 조직 전반으로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여성/소수자 의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 의제의 전담반이라도 되는 양 그 사람들만 바라보더라는 거였습니다. 당연히 이런 말을 할 때의 분위기는 답답해 죽겠다는 것이었죠.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여성/소수자 주제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운동 아니냐 이런 식의 말들을 많이 듣기도 했고요.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소수자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주력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여성/소수자 운동과 계급운동이 왜 상호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소수자 운동이 계급성을 담보하는 것이 당연하고, 반대로 여성/소수자 운동과 결합하지 않은 계급운동은 정당성도 적절성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익숙하게 듣고 다녔던 입장에서, 10여년쯤 뒤에 '교차성 페미니즘'이란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 말이 꽤 당연하게 들리더랍니다.

 

3.

'조직 문화와 젠더 폭력'이라고 했는데 '조직 문화'에 대해서만 겨우 이야기한 글이 된 셈이지만, 해방을 추구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젠더 폭력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조직 문화가 이런 식이어서 그렇기도 할 거다라는 말씀을 드린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직 문화'라는 차원만으로 이야기할 건 아닌 것 같아요. 하나의 해방을 추구하는 사람이 다른 해방으로 옮겨 가기가 쉬워야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어렵다는 현실의 한 예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도 싶네요. 그래서 그런 조직 문화가 생길 수 있기도 할 것 같고요. 해방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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