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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수평적 조직문화'가 '평등'이 아닌 이유(조경숙)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1. 3. 2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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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조직문화'가 '평등'이 아닌 이유

 

조경숙(갱) (11년차 직장인으로, 《아무튼 후드티》를 썼다. 테크-페미 액티비스트, 만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업한 나는 이십 대 초반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내 바로 위 사수가 삼십 대 초반으로 팀 내에서 나와 그나마 가장 나이 차가 적은 편이었다. 열 명 남짓한 팀 안에서 20대는 나뿐이었고, 팀장과 본부장은 4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다소 어린 나이에 입사한 탓에 나는 "첫사랑에 성공했다면 지금 경숙 씨만 한 딸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시시때때로 들어야만 했다. 그런 조직 안에서 나는 주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주로 눈치 없는 척 위 직급 상사에게 격의 없는 농담을 던지는 '되바라진' 막내를 연기하면서였다. 나는 "아 뭐야 부장님, 그런 말 하면 '아재'예요"라든지, "앗 부장님은 모르시겠다, 이거 요즘 세대 얘기라서요!" 하며 은근히 아저씨들을 면박 주었다. 그러면 남성 상사들은 그런대로 즐거워하며, 막내에게 져주는 상사 역할을 편안하게 수행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아마 내가 그들과 공모했던 '수평적 조직문화'였던 것 같다. 나 자신도 이보다 더 좋은 조직문화는 없다고 생각하며 회사에 다녔으니까. 물론 그곳에도 납득가지 않는 업무 지시와 불공평한 업무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렇지만 공과 사가 불분명한 영역에서 내 농담이 받아들여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 회사를 수평적이라고 손쉽게 생각해왔다.

 

수평적인 문화는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렇지만 기실 수평적 문화가 곧 평등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평등은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위치에 처할 수 없을 때 조직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회사는 막상 어려운 시기가 닥치자 가장 먼저 육아휴직자들을 지목했다. 나뿐만 아니라 조직에 10년 넘게 근무하며 어려운 프로젝트들을 도맡아 했던 여성 선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등한 일터란 어떤 곳일까. 세 차례의 이직으로, 나는 형태가 다른 여러 조직을 두루 경험하게 됐다. 대기업을 나와 간 곳은 군대만큼이나 수직적인 중소기업이었다. 모두 사장님과 그 이하 이사들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그 이후엔 이전 회사와 정반대로 모두에게 '~님'을 붙이며 직급 없이 닉네임만을 사용했던 스타트업을 다녔다. 스타트업을 퇴사하고 나서는 직급과 서열이 분명한 공공기관으로 이직해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완벽한 평등은 없었다. 어느 직장이나 특정인에게 일이 과하게 쏟아졌고, 보상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계획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개중엔 민주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수립하고 실행하려 했던 조직도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일터의 모든 일에 있어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가? 모두가 꼭 같은 결정권을 쥐고 매사에 의견을 표결해야 하는가. 그게 맞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내가 일터에서 원한 평등은, 스스로 위험하거나 불공평하다 여겨질 때 언제든 'SOS'를 외칠 수 있는 긴급 버튼이다. 한쪽으로 불평등하게 기울어졌을 때, 저울추를 움직일 수 있는 사후조치인 셈이다. 사전에 이미 모두 불평등한 처사를 받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그런 조직을 본 적은 없어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나는 언제든 내 의견을 제출하고, 그것이 안전하게 토의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절차가 명문화되고 원칙으로 보호되어 있다면, 내겐 그곳이 바로 '평등한 일터'다.

 

다행히 지금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는 이런 시스템이 희미하나마 있다. 바로 노동조합이다. 지금까지 네 군데의 회사에 다녔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입사하고 수습직원 딱지를 떼자마자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지금은 내가 노동조합 집행부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노조의 갈 길은 멀다. 노조 안팎에 노동자들의 따끔한 시선과 불만족한 목소리도 많은 상황이다. 노동조합이 최소한의 혹은 최후의 시스템으로만 존재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만 볼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조라는 체계 자체가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건, 노조가 바로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통해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누른 긴급버튼은 조직에 있어 빨리 해치워야 할 예외상황에 지나지 않지만, 노조엔 그 사람의 용기가 조직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언제 '긴급버튼'을 누를 것인가. 불평등한 권고사직과 부당한 업무 지시만 해당하는 것인가. 나는 소위 말하는 '막내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 같이 일하는 동료끼리 막내가 어디 있고 선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많은 회사가 '업무로 쳐 주지 않는' 수많은 일을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미뤄놓는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 말이다. 행사가 끝난 후 뒷정리하기. 부서 회식 장소를 알아보고 예약하기. 메뉴를 신청받아 도시락을 준비하기. 부서 내 생일을 맞은 사람을 챙기는 것. 사무실 공용 비품을 마련하기. 회의에 필요한 문서를 복사하여 철하기. 회의가 끝난 문서를 파쇄하기. 부재중인 사람의 전화를 당겨 받아 용건을 메모하기. 우체국에 방문해 택배 부치기. 여름휴가철에 가장 마지막에 남은 날로 휴가를 가야 하는 것. 상사가 퇴근하기 전까지 사무실에 앉아있는 일 등. 모든 불평등은 사소하지 않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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