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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과학] 흩어짐을 면하려던 사람들(이성호)

신앙과 과학

by 제3시대 2017. 7. 1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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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짐을 면하려던 사람들




이성호

(GTU Ph.D / 현 명지전문대 교목)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1~9)



   이번 주일은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이 환경선교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을 먼저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날로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안타까운 현실도 우리 안에 있지요. 그래서, 환경선교 주일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러한 문제를 돌아보고, 참회하며, 그리스도인이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흩어짐을 면하려던 사람들”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본문을 통해 환경선교의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혹시 엔트로피라는 말을 아시나요?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잘 모르시더라도 열역학 제1, 2 법칙이라는 얘기를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 제1법칙이고, “엔트로피의 총량은 계속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 제2법칙이지요. 예전에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어렴풋이 기억날 듯 말 듯 하실 텐데요. 제가 갑자기 물리학 법칙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시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은 “엔트로피”이고 제리미 리프킨이라는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유명한 문명 비평가가 쓴 책입니다. 최근에,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이라는 시리즈로 된 책들을 내놓으면서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지요.

   열역학 법칙에 대해 좀 더 얘기하면, 듣기에는 굉장히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간단한 법칙입니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는 얘기는 우주의 역사 속에서 수 많은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주가 최초에 시작된 이후로 발생한 에너지들이 모여 지거나 흩어지는 등의 방식으로 그 형태들이 변해가지만 그 전체를 합쳐놓은 양은 같다는 것입니다. 지구라는 행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구의 기후가 계속 변해도, 수많은 생명이 태어났고 죽어도, 초대형 건물이 세워졌다 부서진다 해도, 형태만 달라진 것일 뿐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시작 이후에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된 적은 없다라는 것이지요. 전도서에 나와 있는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이 자명한 진리라는 것을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에너지의 양은 일정해도 에너지가 한 가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 일정액의 벌금과 같은 것을 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2법칙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쉽게 말하면,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라는 옛말들이 모두 열역학 2법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예들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지요. 그 기름은 자동차라는 기계를 통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는 운동에너지가 되는데, 그 뒤에 배출되는 것이 뭐죠? 배기가스지요. 그런데 그 배기가스를 잘 모으면 나중에 기름이 되나요? 절대 그럴 수 없지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매일 올라오는 맛있는 음식들은 동물, 식물들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가공하고 요리해서 식탁에 올라온 것이지요. 또, 이 음식이 몸 속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물질로 분해되어서 에너지가 되고, 나머지는 배설됩니다. 분해된 물질과 배설물의 에너지 합은 음식물의 에너지와 갖겠지만 그것이 다시 음식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음식물이 다시 원래의 동, 식물로 되돌아가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에너지가 변환되면 무언가 손실되는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엔트로피”입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시간이 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데 이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다,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에 우주는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에 처음과 나중, 태초와 종말이 있다고 얘기하는 성서말씀은 여기서도 진리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레미 리프킨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이 피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라면, 그 우주에 있는 지구라는 행성도, 또, 지구의 역사 속에서도 최근에 등장한 인류도, 인류가 일어낸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류의 발달된 문명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근대 이후에 현대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인류는 “인간 문명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한다, 그리고 인류의 지식과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인류는 발명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해낸다”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인류는 어떠한 것을 새롭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어떠한 것을 새롭게 조합해서 다른 형태로 바꾸고 분배된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인류가 발전했다고, 최첨단이라고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가만히 놔두어도 증거하는 엔트로피 법칙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쓰는 에너지들이 석유에서 주로 오지만, 과거에는 석탄이었고, 더 오랜 옛날에는 나무였었지요. 이렇게 바뀌어오면서 더 효율적으로 발전해왔다 생각하지만, 사실 석유를 생산하는 과정 자체만 봐도,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운송 수단이 말, 마차, 기차, 자동차, 비행기로 변화되어오면서 속도도 빨라지고, 효율성이 증가했다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인류 문명은 발전해 가는 듯 보이지만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써버리고, 또 폐기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는 그래서 지구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릴 태세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전 세계의 많은 환경학자들은 인류 사회가 만들어낸 오염 물질이 결국 온실효과를 만들어내 지구 전체의 온도를 높이게 될 것이고 전 지구적 기후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을 예측했습니다. 특별히, 최근 수년 동안 유엔 산하에 있는 “기후변동을 위한 정부간 패널(IPCC)”은 인간 문명에 의한 기후의 변화가 우리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리프킨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를 막을 수는 없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엔트로피 증가를 더디게 할 수 있도록 인류 문명의 체질 자체가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성경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4천년, 5천년 전에 살았던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선조들이, 제레미 리프킨이 인류 사회에 경고하고 있는 얘기를 동일하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한 번 들여다 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사람들은 다시 자손을 낳고,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벽돌을 구워, 돌을 대신하고, 오늘날의 아스팔트와 비슷한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해, 하늘에 닿을 만한 건축물을 만들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바벨탑이라 부르지요. 이러한 건축물은 단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도 중동 지역에 가보시면 지구랏트라는, 높이 쌓아 올려진, 탑과 같은 아주 오래된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탑을 쌓아 제단으로 삼고, 자신들이 믿는 신을 섬겼습니다. 아주 거룩하고 고귀한 장소이자 건축물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건축물들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였던 언어를 혼란케 하고 나누어 버리고, 또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지요. 바벨탑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바벨탑은 하나님 보시기에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4절을 보실까요.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자, 첫 번째 문제는,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데에 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목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높이 올라가서 하나님과 보다 가까이 있고 싶다는,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싶고,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바벨탑은 문명을 상징합니다. 바벨탑이 만들어진 재료가 무었입니까? 자연 상태 그래로의 돌,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손을 거친 벽돌과 역청입니다.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기를 확장하고, 정복하고,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결국 자신을 창조해낸 그리고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도전까지 하게 되는 교만한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문제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 말 자체만 놓고 보면, 흩어지지 않고 단합하겠다는 것 같아 좋은 뜻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가 노아 홍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눈 여겨 봐야 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해서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고, 다시 한 번 세상 가운데에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을 보면, 노아의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세상 곳곳에 흩어져 행복하게 살 것을 요청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높은 탑을 쌓고 건축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홍수를 경험한 이들은 홍수가 온 것 보다 더 높은 건물 위에 내가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던 것은 멸망 당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 버렸습니다. 홍수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자기들의 힘으로 쌓아 올린 문명의 힘에 의존해서 자기들이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이것은 엄청난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벨탑과 그 탑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부정되었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문명에 의지 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존재에 의존하며 어떤 존재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결점이 있음을 간과한 채 순진하게 믿기만 한다면 돌아오는 실망과 상처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부모이든, 자녀이든, 혹은 친구이든, 그들에게서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은 그 사람들 뒤에, 그들을 창조한 영원한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질은 어떻습니까? 돈에 의지 하십니까?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할까요?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가요? 명예를 얻어서 남에게 인정만 받으면 우리가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좋은 직장을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직장을 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신앙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와 국가, 민족은 어떤가요? 그 또한 절대적이고 영원할까요? 인류 문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참되고 선한 것일까요? 앞서서 제리미 리프킨 박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지나치게 기술의존적이고, 기계의존적입니다. 그 문명 속에서 살면서 혜택을 받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것이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빠르게 하여 파국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나르시시즘에 걸린 자처럼, 자신의 문명이 발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 문명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만물에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문명, 역사, 자연, 우주…그 어떤 존재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부디 영원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분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나의 존재가 나다워지는 길입니다. 나의 삶이 진정한 삶, 아름다운 삶이 되는 길입니다. 스러져 갈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영원성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결국은 사라져 갈 수 밖에 없는 사람, 돈, 명예, 권력, 인간의 문명 등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고 의존하여 나만의 바벨탑에 갇히게 되고, 그 바벨탑과 함께 흩어지는 불행을 겪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원하고 참된,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의지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 참된 축복,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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