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포비아, 그 오역과 치욕의 역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동성애 광풍이 한국교회를 뒤덮다
올 여름 한국개신교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지난 6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이단대책위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에게 ‘이단사상 조사연구에 대한 자료요청의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 한국교회 8개 교단 이단대책위원장 연석회의는 ‘퀴어신학'을 내세우며 동성애를 감싸는 임보라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8월8일 기장 ‘교회와 사회위원회’에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퀴어신학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중세시대나 있을 법한 보수개신교단들의 임보라 목사에 대한 여론 몰이식 ‘마녀사냥’이 21세기 한국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난 주간에 열렸던 대부분의 교단 총회에서 동성애 이슈는 예상한 대로 가장 센세이션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최대교단인 장로교를 양분하는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동일했다. 분열되었던 장로교가 동성애 문제로 다시 하나로 뭉칠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장통합의 결정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은 교역자는 물론 교회 중직(장로, 집사)자가 될 수 없을뿐 아니라, 신학생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진보적인 교단인 기장은 총회 마지막날(9월 22일)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한 연구위원회 구성과 활동 헌의’의 건이 올라왔다. 이 안건은 찬성 159와 반대 90표로 기각이 결의되었으나, 총대 총수가 682명이며 과반수는 341명이다. 그러므로 찬성표 159는 341명의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하고 미달인 것이다. 성소수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거나 세례를 주거나 교인으로 정식으로 인정하자는 헌의안도 아니었다. 교단차원에서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해 공부를 해보자는 모임도 만들 수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들 조차 동성애 문제를 피해가려는 경향이 역력하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남한 땅에서 개신교의 권위와 종교성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지는 오래된 사실이다. 특별히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고, 다름을 배제와 제거의 메커니즘으로 삼는 능력에 있어서 한국의 극우적 개신교도가 보이는 강도와 민첩성은 강하고도 빠르다. 빨갱이 혐오, 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이슬람 혐오, 그리고 동성애 혐오까지. 한국 사회를 휩쓰는 온갖 종류의 혐오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한국의 대형 극우 보수개신교회들이 있다. 사랑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는 혐오와 적대의 종교가 되었나?
아니, 그들은 원래 그랬다
해방 후 한국개신교는 빨갱이 혐오의 메카였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월남한 개신교도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에 앞장섰던 기억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개신교는 나름의 체제정비와 내부 결속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외부의 적을 상정하면서 자신들의 균열과 부조리를 감추고, 희생양을 선정해 제거함으로 내부의 문제를 일단락짓는 극우적인 한국 개신교의 문법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남북한 사이 이데올로기 대결과 군사정부의 개발독재와 맞물리면서 개인구원과 축복일변도의 신앙으로 고착화되었다.
지난 20세기에 자행되었던 빨갱이 혐오와 종북 몰이가 한국개신교의 정체성의 정치를 위한 토대였다면, 동성애 혐오는 가히 21세기 한국형 종교재판, 혹은 마녀사냥이라 부를만하다. 중세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 정점에 달했던 마녀사냥의 열풍이 한국교회의 위기가 선언되는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나타났던 고전적 방식의 체제유지법, 혹은 위기타개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의 부도덕과 부패로 자초된 교회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동성애 혐오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또한 그 동력으로 이탈하고 있는 신도들을 다시 결집시키고자 한다. 마치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페스트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전 유럽을 휩쓸 무렵,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상을 회복시키고자 마녀사냥을 통해 체제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던 중세교회의 발악처럼 말이다.‘마녀사냥’식 동성애혐오는 쇠락하는 한국 보수 개신교의 위기감와 초조감이 드러난 성급하고 서투른 결정이라 볼 수 있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동성애를 혐오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만약 성서의 일부 구절들이 동성애 혐오를 위한 각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성서를 모독하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이고, 성서의 하나님이 동성애를 벌하는 신이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성서는 동성애를 혐오하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니고, 일부 보수적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를 벌하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걸어갔던 삶을 기억하면서 예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항상 본인에게 다가오는 실존에서의 선택과 갈등, 그리고 행위의 순간마다‘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물어야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에게 나는 이 질문을 되돌려 들려주고 싶다: “예수라면 과연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동성애를 저주하는데 동원되는 성서의 구절은 대략 손으로 꼽는다.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로마서 1:27, 고린도전서 6:9~10, 디모데전서 1:10, 히브리서 13:4 등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성애 혐오를 주장하는 데 끌고 들어오는 성서구절 중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한 구절도 없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하는 사실은 성서에는 게이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나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성서가 쓰여지고 편집되던 시대가 가부장제적인 시절이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서무오설, 즉 문자적으로 쓰여진 성서의 기록만을 맹신하는 사람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적혀 있지 않으니 그것은 괜찮은 것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문자적으로 성서를 믿는 그들은 뭐라 답을 할까.
텍스트를 근거로 어떤 대상을 논하고 반박할 때 텍스트에 적혀있는 문자와 내용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 다음 텍스트가 구성되고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와 해석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텍스트 안에 있는 다양한 결을 살피고 성찰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텍스트를 대면하는 자세이고 원칙이다. 텍스트는 학과의 교재일 수 있고,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이나 시집일 수 있고, 내가 만나고 있는 애인일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일 수 있다. 성서는 인류의 소중한 텍스트이다. 텍스트인 성서에 적혀있다는 동성애 관련 구절 몇 개를 끌어와 일방적으로 교회의 동성애 혐오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보수적 그리스도교인들의 행태는 텍스트 읽기와 해석의 원칙조차 모르는 천박하고 후진 한국교회이 민낯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고, 성서에 기록된 동성애 관련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동성애를 둘러싼 성서의 정황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성애를 반대할 때 인용되는 성서의 구절은 여섯 곳이다(창19:1-11; 레18:22, 20:13; 롬1;18-32; 고전6:9, 딤전1:8-11). 구약에 세 곳, 신약에 세 곳이 나온다. 1) 창세기 19장은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이고, 2) 레위기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규례가 적혀있는 장인데, 그중에서 18:22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라고 적혀있다. 3) 레위기 20장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의 항목이 나열되는데 그 중 20:13에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면 ... 사형에 처한다”라고 쓰여있다.
남성 동성애와 비슷한 급들의 죄의 항목들이 레위기에는 적혀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상을 섬기는 것(지금으로 따지면 자본을 섬기는 것), 근친상간을 하는 것, 불륜을 저지르는 것,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것,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쓰는 사람(레20:27)도 이 항목에 들어간다. 즉 남성끼리 동침하는 것에 특별한 강조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쏟는 것(우상을 섬기는 것),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 더 자주 빈번하게 강조되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동성애에 대한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발언은 바울서신에 딱 세 번 나온다. 신약성서의 동성애 발언 역시 구약성서와 같은 맥락이다. 동성애가 그 수많은 죄악들 중에 one of them이라는 것이다. 4) 롬1;18-32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들 중에 하나로 동성애가 나온다. 그 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한 사람,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한 사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 불손한 사람, 오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꾸미는 묘략꾼,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신의가 없는자, 무정한 자, 부자비한 자 ... 그리고 욕정에 불타는 자인데, 그 욕정에 불타는 자에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5) 고전6:9 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 구절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 간음을 하는 사람들, 도둑질을 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는 사람, 술 취하는 사람, 남을 중상하는 사람,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과 더불어 동성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등장한다. 6) 딤전1:8-11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장면인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 경건하지 않는 자, 죄인과 거룩하지 않을 자,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같은 라인에 남색하는 자를 두고 있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마찬가지로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남을 중상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맹렬하게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오만하고, 비겁하고, 신의 없고, 시기와 분쟁과 미움으로 가득 찬 인간들 모두를 똑같이 비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우리는 동성애만을 부각시켜 모든 악행의 끝판왕 인양 거품을 물고 짖어대는 것일까? 한국의 모든 수구적 근본주의 세력들이 자기들의 허물과 죄악을 다 털어 동성애 포비아에 덮어씌워 번제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호모포비아의 자리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기독교 역사에서 정당화되어 왔다. 첫째, 동성애자는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정상 Vs.비정상’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며,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상 Vs.비정상’의 범주들은 많은 경우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닌 주류 집단들에 의하여 결정되곤 한다. 만약 불변의 ‘정상-비정상’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존중이이야말로 ‘절대적 정상’이며, 반대로 그들에 대한 ‘혐오’야 말로 ‘절대적 비정상’ 아닐런지?
둘째, 도덕적 순결에 대한 유지와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동성애 혐오는 요청되어 졌다. 역사적으로 ‘순결주의’ 논리는 인종학살의 도구로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다. 나치의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내내 지속되었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도 마찬가지다. 나치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을 펼 때 등장한 것이 ‘도덕적 순결성’과 ‘기독교정신’이었고, 그 구호 아래 동성애자들로 의심되는 독일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사살하거나 가스실에서 죽였다. 표면적으로는 ‘도덕적 순결성’강화가 동성애 혐오의 근거였으나, 실질적으로 동성애 혐오는 ‘인종적 번식’의 측면에서 다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독일인 게이들을 향해서는 독일의‘출산 잠재성’을 감소시키는 ‘인종적 위험’으로 간주한 반면, 레즈비언들이나 비독일인 게이들은 박해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에서 작동하는 창조보존의 법칙과 순결주의는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어딘가 오리지널한 원본과 원형이 있으며 그것들은 훼손되지 않게 잘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incarnation) 했다는 것 자체가 순수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신의 원형에 불순물을 주입하고, 흠집을 내고, 틈과 균열을 조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오히려 당신의 완정성과 순수성과 순결성을 세상에 내어주고 훼손함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정직한 신에 대한 고백 아닐까?
나는 성서에 나오는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라는 말 대신 다수자, 소수자라는 말로 그것들을 대체하고 싶다. 성서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과 평등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꿈꾼다. 도덕적 순결성, 관습과 전통,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다수에 의한 소수를 향한 혐오와 폭력은 그래서 성서적으로 죄이다. 성서가 지니는 해방적 전통이 작동되는 지점은 차이가 차별이 되어 왜곡과 폭력과 불평등이 정당화 되는 그곳이다. 성의 차이, 인종차이, 계급의 차이, 종교의 차이, 부의 차이, 학력의 차이, 지역의 차이...등 온갖 차이와 다름으로 인한 적대와 차별이 이루어지는 그곳을 향해 변혁적인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달려왔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저항은 이러한 성서가 지닌 해방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맨끝, 즉 화살촉과 같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을 둘러싼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Are You 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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