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ness: 허구의 실체를 드러내다!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영어를 주로 쓰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한국 디아스포라 학자의 어려움 중 하나는 번역이다. 특수한 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와 이슈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많은 용어들이 있고, 그 용어는 특정 사람들의 경험을 표현하고 반영하는 그릇으로, 학문적 담론으로, 비판적 대중의 분석 도구로 쓰인다. 그런데, 그 용어를 다른 상황에서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번역이 요구된다. 많은 경우 번역이 쉽지 않다. 어떤 용어의 경우 번역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불가능하지 않아도 불충분한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번역되지 않은 원용어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한국의 토착신학인 민중신학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용어, “민중” 그리고 “한” 이 용어들은 영어권에서, 영어로 번역이 안되고 그냥 “Minjung” “Han”으로 쓰는 것이 그 예이다. 오늘 필자는 역으로 영어권에서, 특히 북미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한 용어, whiteness에 대해 소견을 나누고싶다. 이 소견의 배경을 설명하려면 종교교육학회 이사회 퇴수회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해야한다. 그리고 초대 전, 종교교육학회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필요할 듯 싶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학회는 종교교육학회 (Religious Education Association, 이하 REA)이다. 1903년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이론가였던 존 듀이를 포함한 시카고대학 학자들 중심으로 공적 신학교육을 표방하면서 기독교적 정신을 담은 민주주의적 평등교육을 지향하면서 이 학회는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작한 REA는 곧 이어 카나다학자들을 포괄했고, 지난 50년간 유럽 나라에 속학 학자들도 REA 에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래서 존듀이와 창립멤버들의 의도와 달리 종교교육학회는 국제적 학회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미국 중심이고, 북미중심이고, 백인중심이고, 기독교중심이지만, 2016년 벨기에 출신 학자를 회장으로, 2017년엔 처음으로 이슬람 종교교육 학자이 여성이 REA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2019년 회장은 이스라엘의 한 대학 학장으로 있는 유대교 종교교육학자이자 랍비를 선출한 상태이다.
매년 11월에 있는 종교교육 학회는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따라 다양한 학술논문들이 발표되고, 특별한 강연을 포함해서 현장견학과 교육의 기회가 학회기간에 이루어진다. 2018년 올해 학회 주제는 “Beyond White Normativity” 이다. 매년 3월 이사회가 퇴수회로 모인다. 이 퇴수회에서 이사회가 하는 일 중 한가지는 바로 선출된 회장을 도와 그 다음해 있을 학회 주제를 심도있게 토론하고 그 주제에 맞는 교육적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지난 해 3월 이사회는 선출된 회장이 Whiteness 에 대해 다루고 싶다고 제안했다. 필자를 포함해서 유색인종 이사회원들과 이미 이 주제 관련으로 수업을 하고 글을 쓴 백인 이사회원들은 그 주제를 대환영했다. 그 때 유럽출신 전회장이 고개를 저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이 회장은 벨기에 출신이고, 자신의 모국어와, 네덜란드언어와 독일어, 그리고 영어까지 4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소위 언어가 탁월한 학자이다. whiteness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벨기에어, 화란어, 독일어 그 어느 언어로도 북미에서 말하는 그 뜻을 담는 번역이 안된다고, 그래서, 유럽권 학자들에게 흥미있는 주제가 못되니 whiteness 용어를 삭제하고, 다른 용어를 쓰자고 제안했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열띠고 긴장되는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whiteness 라는 용어는 제외되고, 이 내용을 풀어서 white normativity 라는 용어로 주제가 정리되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난 whiteness를 한국말로 하면 어떻게 번역이 될까 궁금해졌다. 인터넷 구글로 ‘whiteness 한국어로’ 치니, ‘흼’이라고 나온다. 으악…전혀 그 의미가 아니다. 제대로 번역이 안 되어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한국사회에서는 소통될 수 없을까?
번역이 안되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whiteness 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아니다. 이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번역이 완전하게 안되는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즉, 번역의 한계, 어떤 용어도 그 지식이 담고 있는 의미도, 그 용어가 탄생된 그 상황을 벗어날 때 갖게 되는 부분성(partiality)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충분한 한계를 상정하고, whiteness 그 의미를 한국말로 쉽게 설명하면, whiteness는 하나의 이념이고 권력과 특권을 말한다. 단지 개인적 힘이 아니라, 이념화된 제도적, 역사적, 식민주의적 그리고 구조적 권력을 말한다. 다시말해 whitnesss는 백인 개인을 가리키고 그들을 지칭하고 탓하는 용어로 국한되어선 안된다. 백인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 지니는 특권 (white privilege)을 포괄하지만, whitenss는 백인 특권을 넘어서서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 안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racialized whiteness). 즉, whiteness의 영향은 피부색깔의 농도로 인해 차별과 계급화 (hierarchy)로 그 폭력의 실체를 드러낸다. 우선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예를 보면 이렇다. 1
한국에 수백만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들, 이주 결혼자들, 한국인이 아닌, 백인도 아닌 유색인종들이 많이 살고있다. 시골에 가면 한국사람들만큼 비한국인 (종족) 이주자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비한국인 비백인 이주자들이 겪는 삶의 고통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삶이 쉽지 않은 이유들을 따지자면 복잡하다. 언어, 문화의 차이, 종교적, 경제적 차이, 등 한가지로 정리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고통, 어려움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일 것이다. 즉, 유색인종 이주자들은 그들이 백인이 아니어서 차별을 받는다. 더 나아가 피부색이 덜 진할수록 한국인들에게 차별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왜 한국인들은 어두운 피부색을 싫어하고, 피부색이 연한 걸 선호하는 것일까? 왜 미국 흑인 출신을 폄하하는 용어가 한국말로 검둥이, 피부색깔로 표현되었을까? 왜 이런 인종차별적 언어가 피부색깔을 지칭할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자성적으로 바라보기를 바람으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사람으로서 난 한국사람만큼 피부를 태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등산을 가고, 여행을 가고, 자연으로 나가는 것은 좋지만, 피부색이 햇볕에 그을리는 것이 싫어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보면 한국사람들의 기발한 발명정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완벽하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창을 두른 모자, 목피부를 감싸주는 수건, 팔 전체를 두르는 이상한 밴드, 가능하다면 햇볕에 닿을만한 모든 피부를 완벽하게 덮도록 동원된 이 발명품들은 각양각색이고 보편화, 대중화되어 있다. 이 발명품들은 한국이 아닌 카나다 록키산을 가도 보이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가도 보인다. 국제도시 어디를 가도 한국여행객들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한국사람들이 입고 차고 두르는 오색찬란한 햇볕가리기 의상때문이다. 피부암이 두려워서일까?
햇볕가리기 상품을 넘어서 화장품이야기를 해보자. 매년 개발되는 화장품을 보면, “백미” (피부가 하얗게 되어 아름다워지는)를 가능하게 한다고 선전하고 그 원료 (백미원료가 있는가?)가 가미되어 있다고 선전하는 화장품들이 있다. 아니 번역도 안하고, 바로 화이트닝(whitening)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능성화장품도 비일비재하다. 이 화장품을 볼 때마다 정말 피부를 연하게 해준다고 믿고 이 상품들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상품을 팔고자 하는 기업의 욕구를 읽지 못하고, 그 광고에 유혹을 당해 이런 제품을 사는 한국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많은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한국화장품이 국제적으로 좋다고 알려져 수출이 되는 이 상황에서 백인 이 아닌 피부색이 진한 비한국인들에게도 이 화이트닝 화장품 선전이 구매욕구로 이어질 지도 모르겠다. 난 바로 이런 예가 유색인종들 안에도 존재하는 whiteness이고, 그 힘이 발휘되는 예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넘어서 whiteness 와 racialized whitenss 에 대한 국제적 예를 한가지만 들어보자. 르완다 종족말살 사건이 그 예이다. 르완다 학살을 모르는 분들은 최소한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그 영화에서 그렸던 것처럼 1994년 약 100일 동안 거의 백만명에 달하는 투치종족이 살해된다. 수년에 걸쳐 육백만명의 유대인과 다른 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성소수자 포함)들이 나치에 의해 살해된 것을 생각해보면,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난 최악의 폭력으로 르완다 종족학살을 꼽는다. 이 학살의 요인은 비한국이주자들의 고통, 차별, 억압의 엉켜있는 고리처럼 복잡하다. 탈식민주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한가지로 딱 부러지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국내적, 국제적 관계들이 연관되어 쉽게 말할 수 없다. 르완다 문제도 그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이는 바로 르완다를 정복했던 독일과 벨기에 식민주의 정책이다. 식민주의 지배 논리는 바로 피부색이 연한 투치족을 후투족보다 선호한 정책이었다. 이것이 바로 또다른 racialized whiteness이다. 공공연하게 피부색이 연한 것을 인종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표방했다.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백인처럼 피부색이 연한 종족이 우월하므로 그들이 정치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논리가 그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투치족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렇게 유럽식민주의자들은 투치족을 식민지배의 꼭둑각시로 이용했고 후투족을 무시하고 차별했다. 이들의 이른바 분열정복 정책(divide and conquer)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1962년 독립까지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 탈식민주의 국가가 된 르완다는 1960년 이후 종족간 갈등이 내전으로 이어졌고, 식민주의하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후투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94년 종족말살의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단지 멜라닌 색소의 농도차이로 나타난 피부색의 다름이 이렇게 끔찍한 폭력을 양산한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할 뿐이다. 피부색의 차이가 차별과 억압, 계급화를 정당화시킨다는 사실만큼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부정의한 논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인 논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 즉 생물학적 사실 (fact)도 진리 (truth) 도 아닌 이 허구의 실체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근대 유럽 식민주의를 가능하게 했고 수백년간 그렇게 성공적 지배와 착취를 가능하게 한 가장 무시무시한 도구였다. 아니 2018년 오늘 우리 사는 지금도 이어지는 지배의 구조적 이데올로기고 허구의 실체이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벌어진 대서양 노예 무역정책 (Atlantic Slavery), 즉, 아프리카대륙에 있던 흑인들을 유럽으로 북미, 남미, 중미, 그리고 카리비안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한 정책은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말하면, 피부색깔 농도에 의한 차별정책이었다.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그 다음은 황인종, 적인종 (원주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출신 흑인종을 가장 열등한 존재, 아니, 인간이하의 존재 (동물에 가까운)로 그려낸 그 이론은, 사실도 진리도 아닌 허구지만 물질적 문화적 실체가 되었다.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지식으로 양산이 되었고, 물질화되었고 자본화되어, 극도의 이윤을 창출했고, 인권은 침탈되었고, 그렇게 유럽식민주의는 부를 축적했다. 20세기 두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최고의 제국주의으로 등장한 미국역시 흑인들을 노예화하지 않고, 철저한 노동착취와 차별을 자행하지 않았다면 현 21세기 최대 강대국으로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차별은 단지 경제적 자본주의적 착취만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억압을 포함한다. 물론 무기를 팔고, 세계를 군사화시킨 그 효과도 크다. 2
이 말도 안되고 어이없는 비인간적 피부색 차별정책, whiteness의 실체는 철저하게 연구되었고, 과학자 (다윈), 인류학자, 고고학자, 철학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슐라이에르마허들까지 동원되어 객관적(?)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특히 철학자들의 whiteness 이론이 신학과 성서해석에 영향을 미친 것을 보면 기독교를 유럽식민주의 미국제국주의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잘 아는 아니 심지어 존경하고 학교에서 배웠던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이 이런 글을 쓰고 설교를 하고 교육을 한 것을 아는 것이 충격이다. 배신을 당한 것처럼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황당하고 화가 난다. 그 황당함, 그 분노, 그 짜릿한 감정적 반응을 잊지 말자. Whiteness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래서 보이지 않는 괴물처럼 좀비처럼 잡히지 않을 수 있기에, 감각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허구지만, 아프면 바로 반응하는 피부와 직결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자. 피부가 햇볕에 심하게 그을리면 빨개지고 열이 나고 아프다. 그 아픔처럼 whiteness의 폭력을 그 허구적 실체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인종의 문제, 식민주의의 문제, 이주의 문제를 이론화하는 노력으로 사라 아메드는 피부, 우리 몸의 제일 외부에 존재하는 피부가 home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home은 단순하게 집이 아니라, 고국이기도 하고, 정체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억이자 상실 (이주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Home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잡하다. 번역이 충분히 안되는 또 하나의 용어이다. 낯선 환경 (고통, 소외, 차별의 경험)을 만났을 때 우리 몸 중에 가장 외부에 존재하는 피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우리 정체성을, 우리의 다름을 각인시키는, 그 피부, 그래서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은 피부, 그러나 우리의 한 부분인 피부가 바로 home이다. 그 피부가 느끼는 그 경험에 관심을 두는 일이, 인종, 식민주의, 이주의 문제를 이론화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3 4
유색인종인 우리 안에 잠재한 racialized whiteness 허구의 실체, 폭력의 잔인함을 자성하고 인식하고 거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얼굴을 씻고 거울을 볼 때마다 (고백과 회개의 의식) 이 실체를 드러내는 일을 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이제 햇볕이 따스해지는 4월, 뜨거운 여름을 앞두고, 햇볕가리기를 사용하게 될 때, 백미, 화이트닝화장품을 구매 (또는 거부?)하고 사용할 때마다 각자의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의 장에서 허구의 실체인 whiteness를 드러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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