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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성미산 증후군 (이성엽)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8. 4. 1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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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 증후군



이성엽

(한백교회 교인, 성공회대 NGO대학원 실천여성학과에서 공부 중)

 


그는 하루 중 해질녘이 제일 좋다고 했다.


영어회화 공부를 한답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영어로 한 두 마디씩 떠들던 시절이 있었다. “이걸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그가 영어로 물었다. “Sunset?” “No, it’s twilight.”. 그리고 다시 물었다. “넌 하루 중 언제가 제일 좋아?” 나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암튼 난 twilight을 좋아하진 않아.” 아마도 그 때 나는 twilight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날의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남자친구 앞에서 그 단어를 모른다는 걸 애써 숨겨야 했던 알량한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사방의 대기가 품어내는 그 애매한 분위기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었던 부끄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그랬다. 언제부터인지 난 저녁이 되는게 싫었다. 해가 뉘엊뉘엊 지고 날이 어두워 질 쯤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친구들 이름을 불러대며 저녁먹으러 오라고 재촉할 때, 날 부르는 엄마가 없어서 마지막 친구를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혼자 남아있을 때부터 였는지, 겨울이면 빨갛게 언 손으로 저녁밥을 짓고 있는 어린 언니를 상대로 사춘기 폭력성을 거침없이 발산하던 오빠를 피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언니옆에 같이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오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던 나는 그 시절의 저녁 날들을 생각하면 언니에 대한 미안함을 지울 수가 없다. 어른이 되어서 언니가 내게 오빠로부터 구타당한 얘기를 꺼냈을 때에도 난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언니의 목소리에서 배어나오는 공포감이 너무 생생했다. 방관자였던 나의 몸은 기억하지 않는 일들이 언니에게는 끔찍한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거나 뭘 해야하는지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빚을 덜어낼 수 없다. 언니 나이 예순을 바라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그 때 일이 아무일도 아닌 것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오빠로부터 언니의 용서를 비는 말이 나오고 언니의 몸에서 흔적이 하나 지워지길 기다린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나이가 어렸고 그 학교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자기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의 학생이 하루종일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도 아무말도 거들지 못했다. 난 쉬는 시간마다 담임 선생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렸다. 왜 거기에 그렇게 있느냐고, 뭘 잘못했길래 그런 벌을 받느냐고 물어봐 주길 바랬다. 담임 선생님은 내 옆을 지날 때마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까맣고 긴 출석부를 어색하게 만지막 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을 베풀었다. 중학교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나와 같은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우리 옆동네에 살던 학생이 가출을 했다. 그 애가 오래 결석을 하자 그 반의 담임선생님이 그 학생과 친한 애가 누구인지 찾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날 지목했다고 한다. 나는 그 애가 우리 동네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있는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집에 가는 길에 몇 번 동행을 한 적은 있지만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 애가 사는 곳이 대충 어디쯤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정확한 집의 위치도 몰랐고 가족이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 애의 담임 선생님은 날 교무실로 불렀다. 나에게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대라고 했다. 난 모른다고 했고 그는 날 때렸다. 열 번을 물었고 열 번을 모른다 답하고 열 번을 맞았다. 수업시간 종이 치자 교무실에 무릎을 끓고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쉬는 시간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내 앞을 지나칠 때 마다 너무 창피했다. 내가 큰 잘못을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일텐데 난 그 잘못을 어떻게 만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하고 빨리 그 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면 말이다. 난 중학교 1학년 학생이 가출을 했다는게 믿겨지지도 않았고 선생님이 뭘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만약 그 애가 진짜 가출을 했다면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기도 했다가 슬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애의 담임선생님도 걱정이 너무 커서 날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이 하나 둘 짐을 싸서 퇴근을 할 때까지 난 하루 종일 교무실에 있었다. 그 애의 담임선생님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고백을 하라는 말투로 같은 질문을 했다. 난 그 날로 그 악몽을 끝내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 선생님의 마음을 돌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H는 다시 집에 돌아올 거에요” 나는 맞았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오면 교실로 가지 말고 바로 교무실로 오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왔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사흘이었는지 나흘이었는지 고맙게도 이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일을 지우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운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덮어두는 거다. 살기 위해서. 그 기억을 그대로 갖고는 정상적으로는 살아낼 수 없어서. 내 몸의 전율과 그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과 증오는 희미해졌지만 그 일은 지워지지 않는다.


난 선생님이 H의 집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안다.


학생 기록부에 있는 우리집 주소는 마포구 성산동 산 11-1번지 였고 언덕 너머 H의 주소는 아마 산 20번지나 아니면 30번지 정도 였을거다. 그 주소라면 담임선생님이 학생을 찾아갈 필요가 없는 곳이다. 그 주소는 거기에 살고 있는 학생을 몇날 몇일 교무실에 꿇어 앉히거나 이유없이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한 실마리였을거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학생기록부에 뭐라고 적혀있든 간에 그 일이 있던 그 해 성산동 산 11-1번지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20번지나 30번지도 마찬가지다. 그 선생님이 H의 집을 찾아 갔었더라면 H가 가출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을 거다. H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아느냐고 먼저 물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H의 집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H의 장기결석이 가출로 인한 것이라는 그의 추론도 틀렸을 수도 있다. H가 가출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학생기록부에 나와있는 주소뿐이다. 성산동 산 20번지. 그 선생님에게 있어서 그 주소에 사는 아이들은 다른 주소에 사는 아이들처럼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결석을 할 수 없다. 그 주소의 아성이들은 가출을 하는 아이들이다. 뉴턴이 사과를 봤고 헤겔이 정신을 봤고 맑스가 구조를 봤다면 그는 주소를 봤다. 물리를 가르쳤던 그 선생님도 과학자로서 뭔가 하나쯤은 몸소 증명해 보이고 싶었나 보다. 주소가 존재를 결정한다고.


성산동 산 11번지


성미산자락에 더덕더덕 붙어있던 무허가 집들이 헐리면서 일부 동네 사람들은 보상을 받아 성남으로 이주를 했다. 내 친구 해진이네가 제일 먼저 동네를 떴다. 당뇨병으로 퉁퉁 부은 정강이를 꾸욱 눌렀다가 손을 떼면 살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최씨 아저씨는 무슨 마술이라도 하듯이 그걸로 우릴 웃기곤 했다. 아저씨가 삼발이 용달차 짐칸에 앉아서 마지막 마술을 보여줬다. 나는 웃으려다가 갑자기 눈두덩이 뜨거워져서 눈을 비비느라고 차가 떠나는데도 아저씨한테 인사를 못했다. 그 날 이후 동네에는 우리집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는 남의 집 옆의 자투리땅에 빠듯이 덧대어 만든 방 한 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보상 대상이 아니었고 성남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늦 여름 오후 햇볕이 부드럽게 등짝에 업혀 간지럽힐 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철거요원들이 갑자기 들이 닥쳐서 우리집을 헐고 갔다. 난 해진이네 집터로 갔다. 그 집터에 있는 벽돌이며 남기고 간 잡동사니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많지도 않은 우리집 세간살이를 부지런히 날라다 놓았다. 내가 제발 우리집을 헐지 말아 달라고 철거요원들에게 간절히 울며 애원했던거며, 해진이네 집터를 치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등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엄마, 오빠, 언니는 허탈함과 좌절감을 보였지만 난 속으로 무척 뿌듯했다. 해진이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마루가 있고 방이 두 개나 되는 제대로 된 집이었고 나는 늘 거기 사는 해진이를 부러워했는데 이번에 해진이네 집터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엄마와 오빠가 급히 가서 천막을 구해왔고 그날 저녁 우리는 해진이네 마루 자리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다. 며칠이 지나자 철거요원들이 또 나타나서 해진이네 집 구들장을 곡괭이로 다 부수고 갔다. 거기서는 누워 잘 수가 없다. 우린 해진이네 집 다음으로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다음날은 철거요원들이 와서 그 집의 방구들을 부순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구들장이 남아있는 집들 중 크기가 큰 순서대로 우리 천막을 옮겨 갔다. 그 가을 친구도 없는 동네에서 혼자하는 놀이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때의 훈련덕에 나는 집에서 큰 가구를 옮길때나 회사에서 무거운 물통을 정수기에 올릴 때 주변의 남자를 부르지 않는다. 동네 모든 집터를 다 돌고 불을 땔만한 구들장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어느 덧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 사이 천막에서 우리 식구랑 동거하던 누렁이는 새끼를 여섯 마리 낳았다. 마지막에 나온 강아지는 태내 발육부진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몸이 어찌나 작고 가벼웠는지 언니가 그 녀석을 ‘가뿐이’라고 불렀는데, 꼭 우리 식구의 모습 같았다. 내가 살던 산동네에도 길만 건너면 이층집 삼층집이며 ‘식모’ 언니와 검은 승용차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 소망의 크기는 그 길을 건너지 못했다. 너무 먼 세계였다. 내 기도는 ‘해진이네처럼 큰 집에 살게 해주세요’에서 ‘성남으로 가는 보상을 받게 해주세요’로 바뀌거나, ‘우리 집이 철거되지 않게 해주세요’에서 ‘한 집이라도 구들장이 남아있게 해주세요’ 로 바뀌는 정도였다. 철거는 도시 정화사업과 강제이주의 일환이었고 난 친구들과 동네에서의 놀이를 잃었다. 마포구 성산동 산 11-1번지와 20번지, 30번지의 집들과 사람들은 그렇게 없어졌다. H의 담임 선생님은 몰랐지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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