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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막대사탕과 똬리 1(이성엽)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8. 5. 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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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사탕과 똬리 1



이성엽

(한백교회 교인, 성공회대 NGO대학원 실천여성학과에서 공부 중)

 


비린내와 썩은내가 진동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능한한 오래 참아야 했다.


강제철거후 성남으로 가는 이주권을 받지 못한 우리 가족이 성미산을 떠난건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였다. 우리는 가좌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의선 출발지이자 종착역인 문산으로 갔다. 가좌-수색-화전-강매-능곡-곡산-백마-일산-운정-금촌-파주-문산. 종착역에서 기차는 멈추고 꼬리가 머리가 되어 다시 서울로 되돌아 가지만 철로는 북쪽으로 쭉 이어져 있다. 낮에 기차에서 내릴 때는 역사 출구에 서있는 역무원에게 차표를 내고 나가야 한다. 역사로 나가면 읍내 쪽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집으로 가는 시간이 더 걸렸다. 이른 아침이나 어두운 저녁에는 역무원들도 대충 허용을 해 주었기 때문에 차표를 보여 주지 않고도 기차를 뒤에 둔 채 그저 북쪽으로 철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기차길 양편으로 낮고 구멍이 숭숭난 회색 벽돌담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집들이 있었다. 그 지역의 지대는 문산역을 등지고 걸어갈 때 기차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았다. 왼쪽엔 큰 집도 있고 문산읍 중심과 연결되는 넓은 길도 있다. 오른쪽은 문산읍의 가장가리 끝으로 낡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집들의 가장 오른 쪽으로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넘쳐 동네로 들이친다. 부엌을 낮게 만든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장마철엔 하천에서 넘친 물로 부엌 바닥이 질척질척 했다. 하천물은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사는 그런 시냇물이 아니었다. 수세식 화장실도 없고 하수 처리시설이 없던 동네의 온갖 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하천바닥은 깊지 않고 폭도 넓지 않았다. 하천 안쪽 물이 흐르는 곳에는 시커먼 이끼가 끼고 억센 풀들이 제멋대로 자랐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시궁창 냄새가 방안까지 제대로 들어 왔다. 철도청이 철도부지와의 경계를 긋기 위해 쌓은 철로 쪽 벽돌담을 제외하고는 동네안에 담이라는게 따로 없었고 한 집의 방이나 부엌의 벽과 다른 집의 벽 사이가 길과 작은 골목을 만들었고 가로등은 없었다. 밤엔 창으로 느릿하게 기어나오는 촉수가 낮은 백열등 빛에 의존해 다녔다.


나는 선유리로 엄마를 따라 다녔다. 엄마는 주로 어스름한 저녁에 양키물건을 사러 갔고 돌아올 무렵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엔 어둠이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 늘 그 골목의 어둠을 두려워했지만 선유리를 같이 다녀 오는 날은 엄마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E동에 내다 팔 밑천이 생겨서 좋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선유리도 단속을 받을 때가 있었고 그런 날은 사올 물건이 없어서 헛탕을 쳤다. E동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냄새는 많이 역겨웠지만 그건 참아야 했다. 어떤 때는 낮에도 양키물건 쇼핑을 하러 갔는데 엄마가 K씨 아줌마네서 물건 사러 온 동종업계 아줌마들과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동네 구석구석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를 하나 사귀게 되었다. 우리집은 문산 읍내였고 선유리는 버스로 이 삼십 여분 가야 하는 거리였는데도 자주 가다 보니 그 친구와 꽤 가까워졌고 가끔 집에도 놀러갔다. 중학교 2학년때쯤 이었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가슴골이 다 보일 듯 한 진분홍 티셔츠를 입은 채 어떤 백색피부 남자를 보며 ‘허니’라고 불렀다. 그 백색피부는 별 말없이 벌겋게 웃었다. 그 친구가 입은 아슬아슬한 옷과 ‘허니’라고 부를 때 나는 코맹맹이 소리 그리고 그 백색피부 남자는 모두 그 친구 언니의 것이었다. 난 그 애가 언니 흉내를 내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행동의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정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흉내내기의 대상, 원본이 된 언니의 본래 모습이 이상한 건지 흉내내기 장난이 나쁜 건지 혼란스러웠고, 그 백색피부 남자 앞에 서 있는 키가 작은 친구의 가슴이 보일락 말락 할 때 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거북했다. 그 친구도 커서 공주가 되었는지 일찌감치 그 동네를 떠났는지 뒷소식은 듣지 못했다. 문산에 살던 또 다른 나의 친구 C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스무 살이 채 안되었을 때부터 미군부대 내의 스낵바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가끔 맛있는 걸 갖고 와서 나와 나눠 먹었다. C는 거기서 만난 백색피부 남자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 미국으로 떠가기 전에 C는 나에게 그 남자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되지도 않는 발음과 어색한 표정으로 나는 “미국사람을 미워하진 않아요. But 난 미국을 증오hate해요.” 라고 떠듬떠듬 영어로 말했다. C는 나중에 그 백색피부가 매우 당황했으며 C 자신도 기분이 나빴다고 말해 줬다. C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 한참이 되어서야 나는 그 날의 일을 후회했다. C에게 ‘네가 미국으로 가는게 싫었어’라는 말을 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널 미군부대로 보낸 너희 엄마가 원망스러웠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미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라는 말로 C를 안아주지 못한 것은 가장 오래 속을 아리게 했다. C를 기억할 때면 내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에 그 날의 저녁식사를 장면을 불러 온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일자리와 돈벌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었다. C는 미국으로 간 지 2년 만에 이혼을 했다.


K씨 아줌마네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그곳은 일대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의 집하장이었고 초저녁부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아줌마들이 모여드는 도매상이었다. 선유리에는 그런 곳이 몇 집 있었는데 엄마는 주로 K씨 아줌마네로 갔다. 그 집은 컸고 대로 변에 있어서 언덕을 올라다녀야 하는 M씨네 보다 드나들기가 수월했다. K씨 아줌마는 양키물건과 양공주들을 관리하며 담배와 갈색 유리병에 든 중독성 있는 음료를 끼고 살았다. 니스가 반들반들하게 칠해진 크고 묵직한 나무 대문 양쪽으로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었고 거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양키물건을 실어 나르는 양공주들의 아지트이도 했다. 여공을 여공이라 부르고 양공주를 양공주로 부르던 시절 선유리에서 ‘양공주’는 직업이었다. 양키물건의 공급과 몸의 유통으로 벌어 들이는 수입의 크기와 그에 비례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소비수준으로 인해 적어도 그 마을안에서는 손가락질보다는 부러움을 더 샀다. 그 몸에서 양키의 검은피가 섞인 ‘튀기’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만 말이다. 아기 몸에서 시뻘건 핏물을 채 씻어 내기도 전에 드러나던 그 짙은 색은 마을에 괴물 같은 재앙처럼 드리웠다. 공식적인 결혼, 사실상 결혼, 장기 혹은 일시적 동거, 짧은 연애 등 사연은 다양했지만 양공주의 출산은 이제까지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를 꿈꾸게 하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도 하는 등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좀 더 복잡한 것 하나. 그 안에서도 상대의 피부색에 따라 출산한 엄마와 아이에게 보이지 않는 서열이 매겨졌다.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K씨 아줌마네 살다시피 하는 토미였는지 지미였는지 하는 서너 살짜리 곱슬머리 남자애가 있었다. 영어이름과 까만 손 그리고 하얗고 슬픈 이빨사이 물려 있던 무지개 막대사탕이 그 아이 몸 위에 뭉툭뭉툭하게 얹혀져 있었다. 그 날도 엄마를 따라 선유리에 갔는데 K씨 아줌마네 문간방에서 한 여자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 여자의 울음이 잠깐 잠깐 잦아드는 사이, 주변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있던 다른 양공주들의 넋두리가 위로인지 질책인지 신세타령인지 모를 의미들을 집어 삼켰고, 울던 여자가 내뿜는 담배연기에 섞여 다시 뱉어지고 있었다. 튀기는 양공주의 몸속에서 튀어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양공주의 손에서 튕겨져 나갈 때에도 재앙인 듯 했다. 몸에서 나올 때는 재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가올 재앙의 전주곡이었을 뿐. 나는 그날 토미인지 지미인지가 미국으로 갔다는 것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토미가 미국으로 갔다’고 하는게 아버지와 손을 잡고 ‘인종차별이 없는 자유의 나라’ 미국의 품에 안겼다는 말인지 순혈주의적 민족주의에 흠집이 생길까 두려워했던 애국자들의 손에 의해 순결한 조국 대한민국 땅에서 치워졌다는 말인지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선유리에서 사온 양키물건들은 다음날 새벽 남대문시장에 있는 ‘양키시장’으로 배달된다. 남대문 E동 지하상가는 수입자유화가 되기 전 서울 중상류층들이 외국식품이나 장식품들을 살 수 있었던 곳이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양키물건의 매매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남대문 시장에 버젓이 양키물건 시장이라는 이름의 상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부의 단속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단속자들의 배를 불리는 다른 유형의 단속 방법이 있었거나. 하지만 담배는 달랐다. 언젠가 전매청 직원들은 멀리서 담배연기만 봐도 그게 양담배인지 국산담배인지 알아볼 수 있다고, 귀신같다고 엄마가 알려 줬다. 언니와 나는 엄마의 시다였다. 언니 가방에는 주로 ‘양담배’가 그리고 내 가방에는 m&m 초콜릿이나 오색젤리, MJ커피, TANG오렌지쥬스용가루 등 가볍고 안전한 물건들이 담겼다. 우리에게 전매청 직원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남대문 시장 근처에서 그들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경의선을 타고 와서 서울역에서 남대문시장까지 걸어갔다. E동 지하상가에 있는 가게들이나 그 가게 주인이 지정하는 어딘가로 물건들을 배달한 뒤 학교로 향했다. E동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D동과 E동 사이에 있었다. D동은 생선 도매시장이었는데 계단 내려가는 내내 숨을 참아야 했다. 언니와 나는 아침마다 거기 가는 게 싫었다. 엄마의 물건을 주로 사주던 단골 가게 주인들이 우리에게 알은 체를 하는게 싫었다. 이른 아침 그 시간에 교복을 입고 양키물건 가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애들은 우리 자매 뿐 이었다. 난 D동 지하의 생선 썩은내와 비린내가 역겨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언니는 옷 수선집에 가서 교복 치마단을 줄이거나 허리 부분을 더 잘룩하게 만들고 싶어할 그런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엄마는 우리 식구의 먹을 거리를 사왔다. 오빠가 먹지않는 육류는 전부 빼고. 내가 어렵지 않게 간헐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되는 건 이렇게 뛰어난 환경 탓이다. 오빠가 성인이 되어 닭고기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내 몸은 역사를 고스란히 추억하며 치맥을 아주 좋아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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