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함석헌의 소리(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5. 30. 17:01

본문



함석헌의 소리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은 글보다 말을 선호했지만 그에게 말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현상은 소리였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소리가 있다고 보았고, 모든 소리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말씀은 생각의 소리였고, 생명의 소리는 말씀이었다. 생명의 소리는 무엇보다 먼저 고통의 소리였고, 고통의 소리는 모든 소리의 시작이었다. 소리의 원형이자, 모든 소리의 첫소리는 ‘아’라고 했다. 이는 고통과 감탄의 소리였고 또 깊은 생각이 남기는 소리였다. 그에게 인간은 소리를 듣고 소리를 내는 존재였다. 함석헌의 사상을 소리의 발견과 연결 지을 수 있을까? 그가 소리를 통해 발견한 것은 자기 소리를 낼 수 없는 민중이었지만, 여기서 그의 철학적인 비판과 방법론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함석헌의 글에서 ‘소리’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먼저 그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문장의 문법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불필요한 상황에서도 ‘소리’라는 단어가 쓰이곤 한다. 어느 순간 함석헌의 의도가 소리의 회복 내지는 소리의 사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난 받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은 그가 언급하는 의도였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의 생명을 소리로 이해해서 등한시 되었던 생명이해의 한 축을 보강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쉽게 드러난다. 그의 글에서 ‘소리’의 또 다른 의도는 익명성 뒤에 숨어 있는 난해한 개념이나 논리를 누군가의 소리로 그 뜻을 이해하려 한 것이라 본다. 이를 철학적 비판의 예로 삼는다면, 철학이 삼인칭의 학문이 되었다는 비판과도 연결이 된다. 철학이 개념과 논리의 작업이 되면서 일인칭의 소리가 배제되어 왔기에 철학의 자전적 목소리를 되찾자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의 첫소리가 ‘나’라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학의 소리가 모든 사람의 소리를 대신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말이기도 했다.


    20세기 서양에서 철학을 소리의 차원으로 이해하려 했던 사람은 임마누엘 레비나스였다. 레비나스가 소리에 주목했던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그의 철학의 중심적이 주제가 시각중심적인 기존 철학의 개념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사유 또는 이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고 나누는 개념으로 타인을 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에게 타인과의 만남은 인식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차원의 문제였다. 듣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관찰은 찾기 어려웠다. 레비나스는 서구 사상의 관점에서 타인이 내 시선의 대상이 될 때, 그 사람은 나의 대상이나 나의 일부로밖에 판단되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레비나스는 나의 이해나 의도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나의 비전에 가둬둘 수 없는 타인의 얼굴에서 소리를 들었다. 그 얼굴은 우리가 보고 이해해야 할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었다. 그 첫 소리는 함석헌이 동의할 만한 “나를 죽이지 말라’는 생명의 외침이자 요구였다. 그에게 윤리는 그 소리를 듣는데서 시작했다. 만약 윤리가 소리를 듣는 것과 연관이 있고, 윤리가 첫 번째 철학이라면 철학 자체도 소리로 재구성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타인의 소리에 의해 일깨워지는 자아, 이성의 빛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받는 존재의 울림과 떨림을 들으면서 시작되는 사유를 펼치면서, 빛에 이끌린 생각을 거부하고 소리에 의지한 철학의 근거를 추구했다. 이런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 자크 데리다는 소리를 빛보다 위에 두고,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우선시 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서구사상의 오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임과 동시에 레비나스의 그런 철학이 신학적인 근거 밖에서 성립될 수 있는가 묻는 비판적 질문이었다.


    레비나스가 소리로 생각하는 사유를 펼치면서 서양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든 배경에는 시각과 보는 것을 우선시해온 오랜 역사가 있다. 이 역사에서 생각은 언제나 빛의 영역이었다. 빛의 도움으로 제대로 보아 나오는 것이 생각이었다. 생각의 순간을 빛이 발하는 순간으로 비교하기도 했고, 반면에 무지는 어둠이라 여겨졌다. 생각을 낳는 이성도 역시 빛의 현상이었다. 서양의 언어에서 생각과 사유를 뜻하는 단어들은 주로 빛이나 보는 행위와 연결된 것들이었다. 태초의 말씀까지도 소리가 아니라 빛으로 보아야만 했다. 특히 근대라는 시간은 시각과 인식이 함께 승리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대 지식의 기준을 마련한 증언이나 증거와 같은 개념은 모두 눈으로 보는 행위를 뜻했다. 하지만 진리가 보는데서 출발한다는 생각은 서구 사상의 시초가 된 플라톤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생각이 보는 행위와 연관이 있고, 보기 위해선 빛이 필요하고, 빛은 진리의 원천이기에 참이고 선이라는 논리는 이미 그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빛에 맞추어진 생각은 소리를 멀리하고 소외시켜야만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내 밖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것은 주체적이거나 자율적이지 못한 행동이었다.


    레비나스와 함석헌는 이런 역사에 대한 재고를 요구했다. 함석헌은 이성을 빛이라 분명히 말한다. 그가 얘기하는 이성의 모순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비춰질 수 없는 곳까지 비추겠다는 ‘당돌한 등불’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성의 빛이 할 수 없는 소리에 주목했다. 그것은 이성의 힘만으로는 낼 수 없는 생명의 소리였다. 함석헌은 빛과 바람을 함께 언급했다. 빛과 바람,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잠시 생각하면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바람은 빛과 함께 더불어 생명의 또 다른 조건인 공기가 움직이면서 만들어진다. 바람은 소리를 동반한다. 함석헌은 생명을 위해 빛과 공기가 함께 필요한 것처럼, 생각이 있기 위해서 빛과 소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성을 바로잡기 위해 소리가 필요하고, 그 소리는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레비나스는 소리에 대한 함석헌의 생각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빛과 시각을 우선시 하는 철학에 반대하고 소리의 사유를 각기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위해 눈으로 듣는 모습을 상상했고, 함석헌은 맛으로 듣는 소리를 얘기했다. 내 옆 타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나를 부르는 소리이고, 그 부름이 나의 책임을 일깨운다는 레비나스의 생각은 소리의 원형이 숨소리에 있고, 그 소리의 본질은 살고자 하는 절규라는 함석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소리에서 의미나 형상으로 규정되지 않은 윤리의 출발점으로 파악했던 레비나스는 소리에서 이성이 담아내지 못하는 생명의 외침을 들었던 함석헌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차이도 지적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소리의 사유가 존재론의 철학을 넘는 자신의 윤리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면 함석헌의 소리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씨알의 소리’라는 함석헌 고유의 개념이 담고 있는 고난의 이해를 더하면 그 차이는 더욱 더 분명해진다.


    <나도 인생이야>라는 함석헌의 시가 있다. 땔감으로 잘려나가는 나뭇가지, 파리채에 맞은 파리, 총에 맞은 산새, 더 이상 수레를 끌지 못하고 쓰러지는 늙은 말, 도살장의 암소는 모두 ‘나도 인생이야’라는 마지막 절규를 남긴다. 함석헌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인생이 있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다를 수 없었다. 그 인생들은 제각기 ‘나도 살자고 태어난 인생’이란 외침을 남긴다. 함석헌은 묻는다. “그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는가? 문명이란 이 무거운 괴물의 무거운 사슬에 꿀려가다가 거꾸러지는 이 인류의 소리를 그대는 들었는가? 상아탑에 꿈을 꾸고 단 위에 이론을 펼 때 티끌 속에서, 하수도 밑에서 들리는 그 소리, 나도 인생이야!”


<벗이야 나를 보셔>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보오 벗, 내 눈 건너다보지 말고 

내 말을 들어주셔요 


말만 들어주셔요 

맘만 말이야요 


들어도 소리를 말고 

울림에 귀를 기울이셔요 


들어도 귀청으로 말고 

혀 아래 맛을 들으셔요 


울려 울려 

속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을


    함석헌은 벗에게 고한다. 나를 볼거리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그리고 내 말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들어달라고 하고, 내 마음을 소리가 아니라 울림으로 들어달라고 부탁한다. 또 내 마음소리의 울림을 귀가 아니라 혀 아래 맛으로 들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함석헌은 보기보다는 듣기, 입의 말보다는 마음의 소리, 소리보다는 소리의 울림이 우선이라 보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귀가 아니라 맛으로 소리를 들으라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울림을 느끼고 맛을 보는 행위의 차이는 우선 거리에 있다. 예컨대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더 멀리 볼 수 있다. 울림은 들을 수도 있지만 피부로 느낄 수도 있다. 함석헌에게 울림이 있는 소리는 말이었다. 그 말의 울림은 의미가 전달된 후에도 여운으로 남는다. 울림을 철학의 용어로 활용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레비나스였다. 그가 다양한 의미로 활용하는 용어지만, 여기서 울림은 나의 말이 죽은 과거의 소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전달되어 그의 말소리를 청하는 환영의 소리라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소리의 울림이 남기는 여운은 ‘나도 인생이다’라는 외침일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맛으로 들으라’는 절이다. 거리로 말하자면 맛으로 느끼는 것만큼 대상과 가까울 수는 없다. 그런데 소리를 맛으로 들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맛의 미각은 울림의 촉각과도 다르다. 내 입 안에 있지 않으면 맛을 느낄 수 없다. 울림의 여운이 반복된 움직임에서 나온다면, 맛의 미각은 반복해서 씹고 음미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입안에서 맛으로 음미될 수 있는 소리만큼 나에게 가깝게 들릴 수 있는 건 없다. 소리의 울림이 우리를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다면, 소리의 맛은 (소리가 맛있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영양을 공급해 준다. 미학의 시작이 맛에 대한 고찰로 시작했다면, 소리의 맛에 대한 상상은 시각을 선호하던 전통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미학의 시작일 수도 있다. 함석헌이 소리의 원형을 생명의 자기주장과 고난과 고통의 외침에서 찾았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내가 맛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가 고난 받는 씨알의 소리라면, 그 소리는 내가 소화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나를 윤리의 관계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인생들이 다르지 않다는 생명의 연대의식으로 이끄는 소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