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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덜어내고 덜어내야 남는 나만의 취향 <소공녀 (전고운, 2017)>(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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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8. 5. 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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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고 덜어내야 남는 나만의 취향 

 <소공녀 (전고운, 2017)>




이희승*



지난 주 제가 사는 뉴질랜드의 대척점(보다도 더 멀리)에 있는 북유럽 도시 헬싱키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 차, 왕복 일주일정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라고는 하지만, 총 여섯 차례 비행기를 갈아 타는 여정동안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내는 3일 반나절을 빼면 약 4일정도의 일정이었지요. 평소대로라면 학회 준비에 밀려 떠나기 전날 밤에 허술하게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집어 넣을 수 있는 23킬로짜리 여행가방에 행장을 꾸렸겠지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라고도 하고, 헬싱키 공항에서 여행가방을 잃어 버리고 망연자실하던 영화 <카모메 식당>의 캐릭터를 상기하며 7킬로짜리 기내 수화물만으로 버텨 보기로 결심했죠. 평소대로 ‘필요할 만한 것’만을 꺼내 놓았는데도, 오도막하게 작은 여행가방 옆에 쌓인 짐은 도저히 다 함께 갈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결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덜어내고 욱여 넣고 온몸의 무게로 내리눌러서 겨우 기내용 가방만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헬싱키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이었죠. 여행지 지도, 미술관 방문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카달로그들, 학회 기념품, 제가 없는 동안 불편을 감수해 준 식구들에게 하나씩 주려고 산 선물들이 도통 자리를 못 찾고 호텔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침대 옆에 서있는데 문득 전고운 감독의 데뷔작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실없이…


제 22회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된 영화 <소공녀>는 대학 중퇴 후 가사도우미를 하며 살아 가는 이십대 중반의 미소가 사회적 가치와 타인의 취향에 떠밀리지 않고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켜내는 과정을 세련되고 엣지있게 보여 줍니다. 스스로 감당못할 만큼 크고, 화려하고, 어수선한 누군가의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주는 일이 싫지 않은 ‘청소와 가정식의 달인’ 미소는, 일당 4만 5천원의 수입에서 월세, 세금, 식비와 약값의 최소 생계비를 지출하고 남은 돈으로 즐기는 담배와 위스키 한잔만으로도 자신의 자그마한 서식지에서 양심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소공녀 (A Little Princess)>의 주인공 세라가, 하루아침에 부잣집 아가씨에서 무산자가 되어 기숙사 다락방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와중에도 예의와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제목에서 연상되는 멜로드라마틱한 소공녀 세라와는 다르게, 영화의 첫 장면은 잘 사는 친구에게 어렵사리 얻은 쌀이 바닥에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담배를 맛있게 피워 물고 씩씩하게 서울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미소를 애처롭게 불행하지도 강렬하게 행복하지도 않은 인물로 소개합니다.




아무 것도 채워 놓고 쌓아 놓지 않아서 더욱 견고해 보이던 미소의 미니멀하다기보다는 마이크로한 라이프는 월세와 담배값 인상이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담담히 가계부를 정리해 보던 미소는 결국 월세방을 쿨하게 포기하기로 합니다. 가방에 다 못 담는 옷가지는 한 일곱겹 쯤 레이어해서 입고, 과거의 추억을 담은 몇가지 아이템들을 골라 재활용 수거함에 내려 놓고, 살던 방을 다음 세입자를 위해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미소는 자발적 홈리스, 길위의 삶을 선택합니다. 이십년이 훌쩍 넘는 미소의 삶은 커다란 트렁크 하나에 단촐하게 담기고, 생계를 책임질 청소도구를 넣은 가방과 크로백 하나를 맨, 남루하지만 찌들지 않은 행색으로. 물론 영화는 눈에 잘 띄는 글씨로 깔끔하게 정리된 가계부를 클로즈업함으로, 미소가 살던 월세방을 지키려했다면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선택임이 분명한 포기라는 것이 명백한 이상, 관객은 무심한 얼굴로 서울의 거리를 당당히 표류하는 이 젊은 여성을 N포세대의 비애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동정할 수도, 현실을 망각하고 무리한 소비로 자아 실현을 하는 철없는 이십대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애매한 처지가 되죠.


미소는 예전에 함께 밴드활동을 했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하룻밤 묵을 곳을 청합니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과중한 업무에 예민해진 성격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시댁식구와 남편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을 책임져 준 고마운 친구는 헤어날 수 없는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힌 신세 한탄으로 미소의 마음을 어지럽히죠. 더이상 폐가 될 수 없기에, 미소는 음식솜씨 없는 친구를 위해 정성스레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드럼 치던 남자 후배의 신혼집으로 향합니다. 결혼 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을 당하고 장기 대출로 산 아파트에 덩그마니 남아 매일밤을 술로 지새우는 후배를 따뜬한 아침밥으로 위로하고는, 남자 후배 집에 얹혀 사는 것이 못마땅한 남자 친구 한솔의 소심한 불안을 달래 주려고 미소는 다시 선배 록기의 집으로 향합니다. 부모님과 한집에 사는 노총각 록기는 미소를 며느리감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이 시크한 방랑자를 억지로 잡아 두려고 하죠. 가까스로 강제결혼의 올가미를 탈출한 미소는, 부자 남편을 만나 여유있는 삶을 즐기는 선배언니의 저택 한구석에 편안히 자리를 잡습니다. 오랜만에 안전한 장기 투숙이 가능한 보금자리를 만난 미소를 보는 관객의 마음이 잠시 평온을 찾는 듯 하죠. 이제야 돈을 좀 모아서 다시 자신만의 월세방을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에 미소와 한솔은 자못 여유있게 맛집 데이트를 즐겨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치기어린 열정이 금수저 남편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되어버린 선배에게는,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즐겁기만 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환기시키는 옛 친구 미소가 단절과 망각 그리고 무기력한 나르시즘으로 지탱해온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여겨집니다.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빌어 미소의 방관자적 삷의 태도를 비난하죠.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에 불안해하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존재론적 불안을 개인적 불행으로 인식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가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채우려고 버둥대지 않는 미소는 위험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선배의 집에서 또다시 거리로 나선 미소는, 고고한 유배자처럼 물질적 풍요에 취해 밤마다 뭔가를 게워 내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철벽처럼 단단하게 자신이 선택한 소소한 행복 – 담배,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 – 을 지켜 냅니다. 그렇다고 미소가 인생의 고단함과 매서움을 마냥 피해갈 수만은 없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이 무심한 듯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던 도시의 방랑객은, 웹툰 작가 지망생인 공장노동자 한솔이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확보를 위해 중동으로 2년간 해외 파견 근무를 떠나면서 개인적 선택과 포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냉정함과 마주합니다. 영화 <소공녀>는 한솔과의 이별장면에서 매정하게 푸른 새벽빛과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미소의 흐느낌을 통해, 일곱겹의 옷으로도 막아지지 않는 서슬 퍼런 가난의 칼날을 견뎌야 하는 이 세대 젊은이들의 현실을 정서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죠. 한솔이 떠나고 벼랑 끝에 온 것만 같았지만, 이천원이나 가격이 오른 위스키를 마시던 미소는 첫눈 오는 풍경과 코 끝에 묻은 위스키 향으로 다시 평정심을 찾습니다. 부와 명예를 회복한 소공녀 세라의 해피엔딩 대신, <소공녀>의 미소는 덜어내고 덜어내야 발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취향과 달팽이처럼 짊어진 마이크로 서식지를 기꺼이 선택합니다.


다시 와보지도 못할 헬싱키에서 다음달에나 시작하는 전시회 카달로그를 호텔 책상에 가만 올려 놓고 나니, 딸아이 방에 붙여 놓으라고 챙긴 핀란드어로 된 헬싱키 지도가 좀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선물을 선물스럽게 만들어서,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의 체면과 생색을 위한 요란한 포장도 좀 벗겨 봅니다. 대학 로고가 박힌 학회 기념품 중에서 쓸만한 볼펜과 메모지만 꺼내 챙겨 넣으니 작은 여행 가방이 그런대로 잠깁니다. 부치실 짐이 없냐고 묻는 데스크 직원에게 이게 전부라며 핸드캐리 가방을 살짝 들어 올려 보는데 빡빡한 일정에 찌든 얼굴에 살짝 미소가 퍼집니다. 괜시리…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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