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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당신들의 신국] 당신의, 당신을 위한, 당신에 의한 (박만희)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06.28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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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당신을 위한, 당신에 의한

(당신들의 신국 / 김진호 외 / 돌베개 / 2017)



박만희

(함께. 걷는. 교회)

 


당신들의 천국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이청준 작가가 197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소록도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군의관이었던 한 장교가 소록도의 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좌절과 실의에 빠진 한센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간척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 원장은 한센인들을 위해 소록도에 낙토(樂土)를 건설하고자 하지만, 간척사업에 동원된 한센인들과 원장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소설을 이루는 치밀한 구조와 깊은 사고, 유려한 문장 등을 다 제쳐두고 나면, 소설은 원장이 세우고자 했던 낙토가 과연 누구를 위한 천국인지를 묻는다. 한센인들에게 낙토건설은 과연 희망이었을까? 혹시 원장 자신의 주체성을 위한 욕망의 투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 제목이 3인칭 ‘그들’만의 천국이 아니라 2인칭 ‘당신’들의 천국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원장과 한센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3인칭 ‘그들’은 1인칭 ‘나’와 멀리 떨어져 무관한 타자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나와 가까이에, 내 앞에 있다. ‘당신’은 이미 나와 무관한 타자가 아니다. ‘당신’은 ‘나’를 전제하며 나와 직접 관련한다. 당신들과 우리는 마주 보며 대립하고 또한 관계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당신들’에게서 분리되고 은폐된 ‘우리’의 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묻는다. ‘당신들’과 ‘우리’는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과연 ‘당신’들은 당신인 채로 ‘우리’를 위할 수 있는가. 당신이 끝내 당신으로 머문다면, 당신들의 천국은 ‘우리’에게 폭력의 나라가 되어 임할지도 모른다.

내게는 말 꺼내기 조차 버거운 한국의 보수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크고 작은 건물 안에서 뭘 하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보수 기독교는 ‘그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기엔 보수 기독교는 여전히 ‘우리’를 발판 삼아 ‘당신’들의 나라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보수 기독교를 연구하고 분석한 책이 『당신들의 신국』이다.


당신들의 신국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당신들의 신국』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약 2년간 열린 포럼 ‘한국 사회 보수주의 형성과 그리스도교’에서 발표된 글들을 수정 보완하여 엮은 것이다. 포럼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신들의 신국』은 한국 정치 우파와 보수 기독교가 맺고 있는 관계를 분석하여 그려낸다.

  『당신들의 신국』은 보수 기독교를 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내부적인 시선으로 반성을 촉구하는 신학서적이 아니다. 『당신들의 신국』은 보수 개신교의 형성과 우파 정치의 결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비판적 연구서다. 강력한 군사독재와 급격한 산업발전 시대, 그리고 민주화 시기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파 정치와 보수 기독교가 어떻게 긴밀하게 협력해 왔으며,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속하기 위해 보수 기독교가 어떤 전략을 취해 왔는지를 『당신들의 신국』은 다룬다. 간단히 말해 『당신들의 신국』은 보수 기독교가 어떻게 자신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책은 포럼에 참여한 발제자 10명이 개별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한 권으로 묶은 모음집의 형태로 되어있다. 책의 각 장(章)은 보수 개신교를 대표하는 대형교회에 관한 분석을 시작으로, 이단, 선교, 복지, 가정, 젠더, 성소수자, 타 종교(불교) 등의 영역에서 보수 기독교가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하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상대화하는지를 냉철하게 파악해 내고 있다. (덕분에 선택적 읽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을 다루면서도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파악하는 보수 기독교 전략은 위기 담론이다. 1960-80년대 한국인의 고단한 삶과 급격한 산업발전을 교회성장의 동력으로 삼은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맞이하면서 큰 위기에 직면한다. 끝없이 상승할 것만 같았던 성장 곡선은 완만해지고, 교회의 심각한 윤리적 결함이 드러나는 등 한국사회에서 차지했던 교회의 위상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또한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가정, 성윤리, 경제 등 절대적이던 윤리 규범들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내외부적 상황을 교회는 위기로 파악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당신들의 신국』은 그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보수 개신교의 전략을 드러내고자 한다.

  본 서평에서는 10개나 되는 글을 전부 살필 수는 없다. 여기서는 세 가지 연구를 임의로 선택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 웰빙 우파와 대형교회(김진호) 

글쓴이는 대형교회를 “시간적 변수로써 해석”(34)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며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를 구분한다. ‘선발’에 해당하는 사회적 시간을 “권위주의적 군부독재 체제의 발전주의와 상응하며 교회적 성공주의 신앙이 제도화”(35) 되는 시기로 정리하며 선발대형교회의 대표적인 예로 순복음교회를 제시하여 분석한다. 이어서 저자의 논의는 후발대형교회로 향한다. 후발대형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이른바 ‘웰빙’(wellbeing)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때 정치 영역에서 우파의 주요 담론이 ‘뉴 라이트’였다면, 웰빙은 일상 영역에서 솟아오른 담론이다. 웰빙은 “검약하고 실용적이며 미니멀”(32)하기 때문에 서민적 삶을 지향할 것이라는 흔한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중산층 친화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웰빙은 먹거리를 필두로 하는 생활 습관, 사적·공적 관계 양식에까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일상의 중상층 신사화 현상이다. ... 웰빙 담론은 진보와 결합되기보다는 보수와 더 잘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의 취향이 구현되는 장소가 압도적으로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 대형교회가 바로 중산층적 일상의 문화가 집단적으로 실행되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장(field)이기 때문이다.”(32)


  글쓴이는 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를 후발대형교회의 예로 든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웰빙은 고정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발대형교회와 결합된 웰빙은, 선발대형교회의 성장지상주의 또는 천민적 개인주의 등과 자신을 차별화함으로써 재주체화 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재주체화 양상은 각 교회 나름의 ‘신앙적 미학화’(51), 쉽게 말해 세련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세련됨은 중소형 교회들에게 새로운 모델로 떠오르지만, 그들처럼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후발대형교회가 이끄는 신앙적 미학화는 인적·물적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발대형교회는 헤게모니를 지속하고 권력적 주체로서 자리매김한다.


  · 복음주의 지성은 근본주의의 인큐베이터인가?(김현준) 

글쓴이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관계를 묻고 추적한다. 흔히 복음주의는 근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고 여겨지지만(191) 과연 그럴까?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다르며 그것과 구별되는 자리에 위치할까?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 이유는,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의 비판적 계승이 아니라 근본주의를 지성으로 포장하여 은폐하고 있을 뿐, 사실상 보수 기독교의 헤게모니를 여전히 지속하게 하는 담론적 역할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지식 담론이 단순히 근본주의와 동일한 지식 체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복음주의 지식 담론이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도 결국엔 근본주의 세계관이라는 중핵을 유지시키는 보호대 역할을 함으로써 근본주의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193)


글쓴이는 분석을 위해 복음주의를 “진보 개신교와 보수 개신교 사이에 위치한 중도 진영”(195)으로 한정하면서, 복음주의의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근본주의 진영의 반지성주의와의 차별화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지성’(Intelligence)이다.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 위기를 가져온 반지성적 근본주의와 자신들을 구분해내고, 자신들을 지식층과 동일화함으로써 세련된 지성인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은 “개신교 성장 과정에서 잃어버린 사회적 영향력과 공신력, 상징적인 권력을 회복 또는 강화하기 위한 노력”(197)인 것이다. 의 일환이다.


 복음주의의 두 번째 전략은, 문화의 세속화를 교회와 세상의 위기로 진단하고, 복음주의 지성을 그 위기를 극복할 수호자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 역할에 사용되는 복음주의 지성의 생산물이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세계관’이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성서를 중심에 두고 그 외의 것들을 주변화 시킨다. 문화, 정치, 예술, 철학 등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참여하지만, 실상은 그들을 변혁과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세계를 기독교 vs 비기독교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로 바라보게 하는 틀이다. 지성이라는 세련된 옷을 입었을 뿐, 복음주의는 여전히 보수 기독교를 주체화하고, 그 밖의 것들을 타자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 지성은 여전히 자신 안에 근본주의를 은폐하고 있으며, 동시에 보수 기독교가 헤게모니를 지속하도록 하는 담론이 되어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 포스트-오이디푸스 시대 한국 교회의 아버지 담론과 신보수주의(이숙진) 

글쓴이는 민주화 이전의 시기를 ‘나쁜 아버지’의 현존과 ‘좋은 아버지’의 부재(233)로 설명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아버지 담론을 호출하여 한국 사회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군사독재로 대변되는 시기를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한다면, 민주화 과정을 지나 IMF로 인한 경제 위기의 시기는 ‘갈 곳 잃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력하고 권위를 잃은 아버지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위기 담론을 불러오게 된다. 이때 아버지의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아주기 위해 구원 등판한 이가 온누리교회다.

온누리교회는 ‘두란노아버지학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아버지의 권위를 올바로 세우려 한다. 아버지의 회복이 가정과 사회의 안녕을 가져온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학교’가 회복시키려는 아버지는 일인 독재체제의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이다. 권위주의 시대 이후, 나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빈자리를 좋은 아버지가 대신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아버지의 형상을 새롭게 함으로써 기존의 성별 이분법적인 위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글쓴이는 적절하게 지적한다.


 “... 내용의 핵심은 그동안 잘못된 권위를 행사해 온 아버지들을 재교육을 통해 그들의 권위를 올바르게 세워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238)


가정 안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되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보수 기독교의 오지랖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명하고, 교회를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자청하여,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거나 사회적 권위를 되찾으려는 보수 개신교의 다른 시도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아버지학교가 다시 세우려 하는 아버지의 권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교회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기독교의 헤게모니는 서로를 지지하며 견인한다. 결국, 하느님은 아버지이며, 가정의 머리 역시 아버지여야 한다는 성별 이분법적 위계를 바탕으로 자신을 주체화하는 전략인 것이다.


나가며


『당신들의 신국』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연구는 아버지 담론에 연이어 수록된 동성애 혐오에 관한 연구, 또 동성애 혐오 연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층위를 다룬 ‘종북게이’라는 독특한 합성어에 관한 연구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서 철저하게 타자화 된 존재들을 작심하고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세 편의 연구는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논의되기 어려웠던 젠더 문제를 기반으로 ‘당신들의 신국’의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가장 좋은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신들의 신국』의 가장 큰 의미는 지금까지 개혁담론 안에서만 다뤄진 보수 기독교의 문제들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냉정하게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들의 신국』은 기독교를 난도질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게 아니라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가 눈 감아온 기독교 현실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마주하게 하며, 새로운 과제들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본서의 분석과 비판이 꾸준히 교회 내부에서도 다양한 논의를 불러 일으키는 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당신들’에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같은 이유에서 책의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진다는 점은 아쉽다. 학자들의 연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학술적일 수밖에 없고, 억지로 장벽을 낮출 필요는 없었겠지만 어떤 연구물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용어들을 나열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본서의 연구가 교회 내부적인 실체를 갖기 위해서는 대중들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배려가 필요한 듯 보인다. 보수 기독교의 ‘위기 담론’과 진보적 교회의 지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교인들을 위해서라도. 물론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싱거운 비판에 불과하다.

본 요약이 세 편의 글을 터무니없이 단순하게 정리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당신들의 신국』은 이 글보다 훨씬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분석을 담아내고 있다. 본 서평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몇몇 주제에 초점을 맞췄을 뿐, 연구자들의 의도와 분석을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교회의 오늘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한다. 더불어 충분한 토론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6.13 지방 선거가 끝났다. 필자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한 시대를 농락하던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일단락 징표이기를 바라고 있다. 보수 기독교와 긴 동맹을 맺었던 타자의 정치가 이제 막을 내렸다고 말이다. 이제 짝을 잃어버린 보수 기독교는 어떤 전략을 선택하게 될까? 단짝과 함께 그들도 갈피를 잃게 될까, 아니면 또 다른 동맹군을 찾아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끝까지 지켜낼까? 우리는 타자화를 발판 삼아 끊임없이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당신들’의 시간이 이제 종료되기를 바라지만, 예멘에서 온 나그네들을 쫓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보수 기독교를 보고 있자니, 영원히 망하지 않을 ‘당신들의 천국’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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