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



류헌조

(GTU Ph.D. Candidate)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기독교인들이 즐겨부르는 복음성가의 1절 가사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주저 앉고 싶을 때, 희망이 보이지 않아 낙심과 염려가 몰려 올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고 이 노래의 가사가 호소하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다시금 힘을 내는 경험을 합니다. 기도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된 기도,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는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기도(prayer)와 명상(meditation)을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행방법의 하나로 생각하고 이를 수련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기도를 빼고서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기독교에서도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는 자주 호흡에 비유되곤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조직신학자이자 영성신학자인 사이몬 찬(Simon Chan)에 의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성숙을 위해 실천해야 할 수덕(修德)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도는 정말로 효과(effect)가 있는 것일까요?

   기도의 효과에 대하여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한 쪽 입장의 맨 끝에는 기도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기도를 마치 만병통치약, 만능열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기도를 더 오랫동안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이러한 입장의 반대쪽 끝에는 기도 무용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도는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민중의 아편”이요, 인간이 “심리적 투사”로 만들어낸 신에게 말하는 자기 독백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니체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박탈하고 결국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기도는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가지 극단적 입장 사이에는 기도의 효과를 긍정하고 실제로 경험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Dorothee Sӧlle)는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반 디빅(Abraham Van De Beek)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일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해방신학자들처럼 기도와 사회정의의 불가분리성을 크게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최근의 영성신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고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데 집중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의 주장은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에 관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정당하게 짚어주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신학자들 사이에는 참된 기도는 분명히 효과가 있고, 제대로 기도하면 무엇인가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기본적인 믿음, 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기도는 특별히, 인간의 내면(정신 또는 마음)에 어떤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하고 통제하기 힘들며 또한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을 가진 것도 드물 것입니다. 한 인간의 마음은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가득 찬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불의와 폭력이 가능한 죽음의 장소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죄와 고통이 발생하는 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선(善)으로 지향(志向)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종교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서 기도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쳐 왔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니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절)

   한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의 마음(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성서, 특히 히브리 전통에서 마음은 인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 중심 기관이며 또한 도덕적인 판단이나 선택을 하는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목사님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내적 삶의 모든 심층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마음은 한 인간의 중심이요 핵심이며 중추(中樞)입니다. 오늘날 뇌과학(brain science) 또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연구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뇌의 활동에서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정신을 뇌세포들의 물리적 메카니즘으로 단순하게 환원시키거나 축소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불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뇌(brain)라는 용어와 뇌의 활동을 통해 창발적으로(emergently) 나타나는 인간의 의식/정신을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식/정신)은 뇌세포들의 물리적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를 생물학적 관점, 특히 인간의 뇌의 활동과 관련지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경과학자(neuroscientist)이자 신경신학자(neuro-theologian)인 유진 다퀼리(Eugene d’Aquili)와 안드류 뉴버그(Andrew Newberg)는 Why God Won’t Go Away (한국어 책 제목은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라는 책에서 자신들이 시도했던 획기적인 실험과 그로 인해 도출된 흥미로운 결과들을 소개합니다. 티벳불교의 승려들이 기도(명상)을 시작합니다. 기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혈관에 방사성물질을 주입한 후 SPECT(Single Photon Emission Computed Tomography,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을 위해 제작한 특수한 카메라로 승려들의 뇌를 촬영합니다. 카메라의 촬영에 의하면, 기도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이들의 뇌는 아주 활성화되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촬영영상은 뇌의 색깔을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나타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가요? 그것은 OAA(Orientation Association Area, 물리적 공간 안에서 방향과 거리, 각도 등을 인식하고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뇌의 영역)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유진과 뉴버그는 프란시스코회 소속의 수녀들을 상대로도 같은 실험을 하였고 비슷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은 기도의 절정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할 만큼 자신들이 어떤 무한한 실재와의 연합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티벳승려들의 경우 온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고 프란시스코회 수녀들은 하나님과 말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약하면, 기도와 명상은 사람들의 의식에 분명히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고 그것이 실험을 통해 관측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을 했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자신있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실험은 일정 그룹의 아주 훈련된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기도나 다른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그 결과를 동일하게 적용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촬영영상을 통해 뇌의 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God)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실험을 통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기도와 명상으로 지칭되는 이 특정한 종교적 활동이 인간의 뇌, 그리고 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정신에, 부인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empirical evidence)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퀼리와 뉴버그는 이후 The Mystical Mind 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는 일곱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연산자(operators)를 가지고 있고, 이 중 이항 연산자(the binary operator)는 뇌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사건)들을 두 가지 대조적인 그룹으로 범주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뇌는 이 이항 연산자의 기능에 따라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선과 악, 참된 것과 나쁜 것, 정의와 불의, 행복과 슬픔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현실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악(evil)의 신화(myth)가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뇌는 이항 연산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 -- 선한 사람에게 왜 악한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 왜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 을 신화의 형태로 바꾸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악은 이제 실제적인 것(as real)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악의 신화가 작동하게 되면 인간의 뇌는 불안(anxiety)을 느끼게 되고 이 불안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특히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불안을 해소하려 할 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죄와 기도 그리고 종교적 신비에 대한 논의의 타당성’을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George Tsakiridis는 최근 이 주제와 관련하여 Evagrius Ponticus and Cognitive Science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뇌가 느끼는 불안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이 부작용으로부터 죄(sin)가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이 죄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방법이 바로 기도와 명상입니다. George Tsakiridis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명한 심리학자 Kenneth Pargament의 임상실험결과를 예로 들며 “기도를 동반하는 영적 치료(spiritual therapy)가 영적인 면을 배제한 심리치료보다 훨씬 더 탁월한 치료효과를 보여준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기도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인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아마도 신앙인들의 삶에서 기도를 제거한다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를 뿌리부터 뽑아내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희망, 용기, 위로, 지혜와 평온함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삶이 보다 더 건강하고 가치 있게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효과는 경험으로 느껴지는 실재(reality)입니다. 오늘날 인지과학과 심리치료의 발전은 이러한 기도의 효과를 예전보다 더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의 작동 메카니즘, 기도의 유효성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과학으로 완벽히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실재가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인 저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초월적인 종교 체험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얻게 되는 이론들보다 때때로 삶의 궁극적 실재를 더욱 더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계속적인 과학 연구의 발전을 통해 이 종교적 신비가 더욱 효과적이고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신학과 과학(또는 종교와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하는데 협력하고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인류의 삶과 나아가 온 세상이 더욱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어 가도록 함께 힘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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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마음을 돌이킬까?



 

민기욱
(GTU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내가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저널에 글을 한 꼭지 올려서도 아니요, 번역이든 학술적인 글의 출판도 아닌 일반 독자와의 만남과 “쉬운(소통하는)” 글을 통해 글이 나누어지고 응답을 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현란한 어휘와 사고의 생산에 버금가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쉬운” 글이 되길 바라며 과거 어느 지면에 썼던 글의 1.01판 정도 되는 글이니 독자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 

       종교인들이든 아니든 우리는 “기도”라는 걸 하곤 한다. 기도는 물론 대상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 기도의 효력에 대해 상대적이기는 하나 분명 어느 정도의 믿음 내지는 “기대”를 하게 된다. 과연 신은 기도를 들어주시나? 종교인이라면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하여,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이 닥치게 되면 누구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마련이다. (잠깐 사고실험을 해보자!) 기도의 순간 잠깐 멈추어 보자. 왜 기도하지? 그렇다. 기도의 효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가? 항상 신이 들어주셨나? 아니다. 들어주시지 않았던 적이 많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크다. 어떤 이는 항상 들어주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신앙의 정도를 키재기 당할 때가 많다. 기도의 효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닌, 기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두 반응 사이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재단된다. 이럴 때 목회자들은 흔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혹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대답하곤 한다. 나도 목회자지만 답답하다. 그것 말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만일 신께서 마음을 굳건히 정하셔서 우리의 기도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절대불변하시다면 그 때는 어쩔 셈인가?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다면? 더 나아가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그러나 다행히 어느 누구도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가끔 과학자 중에 기도와 과학의 관계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허나 교회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변두리일 뿐이다.  

       나는 한국과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출판한 적이 있다. 기초적인 전제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해 오고 있다는 것인데, 양자물리학의 발견 이후 신학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도대체 양자물리학이 무엇이기에 신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물리학적 세계관이 바뀌었는데 왜 신학의 렌즈가 바뀌는가? 또한 “변화”했다면 무엇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기도에 대해 말하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양자물리학을 운운하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양자물리학과 더불어 아이작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과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17세기부터다. 그러니까 철학과 과학이 각각의 분과로 나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다. 서로 나뉘어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칸트의 철학이 뉴튼의 물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따라서 뉴튼의 물리학을 알게 되면 칸트의 철학이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신앙의 뼈대가 되는 신학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학도 당시의 사회, 문화, 사상,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의 영향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신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은, 신앙의 색깔은 어땠을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포탄을 예로 든다. 실제로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여 전쟁에서 서로 대포를 쏘아댔다. 정확한 위치에 캐논볼이 떨어져야 한다. 여러 가지 초기 조건, 즉 대포의 위치, 포탄의 무게, 바람의 방향, 바람의 속도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필요한 모든 조건을 알게 되면, 그래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런 기초적인 과학적 전제와 산물이 철학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필요한 초기 조건을 알게 될 때, 나중의 결과를 알게 된다는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이를 신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이, 그리고 신학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될까? “결정론적 세계관”이 낳은 신에 대한 생각(신론)을 일컬어 오늘날 “고전적 군주모델”이라 한다. 즉, 고정된 계급 질서 속에서 신의 절대 주권과 전지하신 계획 아래 모든 것이 통합된다. 신의 전능과 신에 의한 예정은 불변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 신에 대한 기존의 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고전적 군주모델”을 통해 신을 이해할 때가 많다. 마치 오늘날에도 화성 등에 우주왕복선을 보낼 때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운행할 때 뉴튼의 고전 물리학만을 사용했다간 큰 사고를 당할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세계를 또한 다뤄야 하는데 이 영역에는 다른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신앙도, 신학도, 교회도 더 이상 예수가 살던 시대 속에 있지 않고,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 속에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질서가 변했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빨리 변해도 문제고, 너무 변하지 않고 고집할 때도 문제다. 그렇다면 변화의 속도만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변화의 방향도 문제 아닌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변화로 인해 뭔가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나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게 아닐까?  

       신학과 신앙은 뼈와 살의 관계다. 뼈가 없이 살로만 살 수 없다. 또한 역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군주모델”이라는 신학은 어느새 우리의 신앙이 되었고, 교리가 되었다. 뉴튼의 물리학으로 인해, 철학으로 인해, 더욱 탄탄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신학은 또한 살이 되어 신도들을 먹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도 중에 비만이 생기는가 하면 배탈이 자주 나서 피골이 상접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체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음식 상태가 문제였다. 물론 같은 음식을 먹어도 탈나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하면 모든 사람이 탈나겠지만.  

       그렇다면 음식의 상태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이 뭘까? 수많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계관과 세계의 변화 상호간에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겠지만)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단 말이다. 토마스 쿤이 지적하는 “과학혁명”이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다방면에 정말 큰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원리의 발견이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는 개인에 의해 발전된 상대성원리와는 달리 양자물리학은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됐고,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혁명일까?  

       “양자물리학을 접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실로 놀랍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가 양자물리학의 영향 하에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다 처음 만나게 되는 용어는 아마 “불확정성 원리”일 것이다. 뉴튼의 영향 하에 포탄을 쏠 때는 몰랐던 사실이 미시 세계에서 발견됐다. 실험기구의 발달로 인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시세계에 이르러 철저하게 무너졌다.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불확정성 원리”다. 우리는 단지 불확정적으로, 통계적으로 세상을 알 뿐이다. 그것이 자연의 성격이다. 이런 과학정신이 시대에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다. 이를 교회가, 신학이 비켜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전자장비와 통신기기는 교회에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 과학정신이 교회에 스멀스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과학기술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적 군주모델”을 깨뜨리고 새로움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불편하다 하여 무시할 수만은 없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 아닌가? 그렇다면 대화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지난 2월 초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를 이곳 GTU에 초청하여 “과학으로 이해하는 창조세계”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학우들보다는 외부인들이 훨씬 많았던 강연이었다. 과학을 전공하고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도전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신앙인이자 과학자인 우 교수의 열정과 진지함은 실로 존경스러웠다. 그랬다.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 독서 모임”을 꾸리고 신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아우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때가 된 것이었다. 하여 특별강연을 빌미로 취지를 설명하고 홍보하여 드디어 소수이지만 지난 3월 12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가 21세기를 살아갈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지배적이며, 냉정하고 통제적이며 이성적으로서 군주적 모델에 기반을 둔 “하나님 이해”와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과는 상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교인이 겪는 혼돈과 갈등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교회에 대한 신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포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의 음악도, 문화도 이성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교회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교회에서 “역사”가 해석되어야만 하듯이 시대 정신인 “과학”도 말해져야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마켓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계신 분들을 보게 된다.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묻고 싶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과 진지하게 세상에 대해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대화”는 결과를 예상하지만 미리 결과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 “대화”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전제와 비슷하다.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살펴 본 자연의 “실재”는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미래를 결정하지 않으신다. 정해놓은 각본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뉴튼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빚어놓은 산물일 뿐이다.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미래를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양자물리학이라는 체계에 의해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양자물리학도 한 시대의 산물이겠지만 과거의 어떤 도구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게 현대 자연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거 같다. 물론 일관된 범주로 구성된 단 하나의 집합이 인간 경험의 풍부한 다양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는 뉴튼을 극복한 양자물리학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지니고 있고 부분적일 뿐이다. 다만 “모델”일 뿐이다. 그렇다. “하느님에 대한 모델과 생각”이 “하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도 마음을 돌이키는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기도를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배웠다. 그렇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해야 한다. 한 쪽이 마음을 닫아 놓는다면 대화가 되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지, 그분이 닫고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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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내 마음의 이중성을 마주하기


도홍찬
(면목고 교사)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화자가 존경하던 ‘선생님’은 평생 은둔의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까지 증오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이유는 그의 불행한 인생 경험 때문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걱정 없이 공부를 하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황이 바뀐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의 숙부가 성심껏 그의 뒷바라지를 해준다. 그는 숙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숙부가 재산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서 그와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쫓겨나면서 다시는 고향땅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배신감에 인간을 믿지 못하던 그의 마음은 동경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숙집 안주인의 보살핌에 다시금 가족의 평온함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하숙집 딸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서 그의 마음은 다시금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다시금 비극이 찾아온다. 그의 친한 친구가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지자 하숙집 주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나누어 같이 하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보다 더 세상에 대한 벽을 쌓고 살아가던 친구가 어느날 고민을 털어 놓는다. 하숙집 딸을 몰래 연모한다고. 그는 내심 당황한다. 친구에게 자기 마음을 말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서 있지도 못해 안절부절 한다. 친구와 하숙집 딸의 일상적 관계도 이제 예민하게 바라보게 된 그는 결국 조바심에 친구 모르게 하숙집 여주인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을 하고 허락을 얻게 된다. 그는 사랑을 얻게 되지만 친구를 잃게 되고 만다. 친구는 이 일의 충격으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의 비밀은 오직 그만 알 뿐이기에 하숙집 딸과 결혼을 하였지만, 평생 그는 홀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과 절연한 채 살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다.  

  타인의 욕망으로 상처를 받지만, 똑같이 타인에게 악한이 되는 우리 마음의 이중성을 나쓰메 소세키는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드러내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에서도 이렇게 우리의 불편한 내면을 끄집어낸다고 한다. 소세키는 유학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서 강자의 논리를 따라서 승리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서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문학 원리를 체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본위’의 삶을 위해서는 우리 안의 허위와 가식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응시가 세상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관념적인 자기 결백성에 치중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선악이 자명하고 이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저쪽 편이 되는 옹졸한 현실에서 우리가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기실 근대의 윤리학은 순수한 인간의 선의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선악이 자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도덕법칙을 수립하고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선악의 대립보다는 양자의 침투와 뒤섞임, 상호 혼종을 경험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천사나 악마가 된다기보다는 경계선에서 양자를 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의 윤리적 상황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바로 자기 응시일 것이다. 선함의 이면에 위선이 숨어있을 수도 있고, 악역 속에 정의가 내재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악이 일상의 안주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변혁 또한 작은 자존심 하나 지켜내는 것에서 촉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 역시 마음에서 악을 몰아내고 순수한 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 선과 악이 고투하는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자기 정당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확신에 물음표를 붙이는 과정이 아닐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기도하는 시간이 내 욕망을 확인하는 동어반복의 시간이라면 차라리 기도에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평생 상처받고 상처주는 삶이 반복되겠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책하겠지만, 세월을 통해서 최소한의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나와 타인을 응시하는 눈길이 깊어지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선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이었기에 고민하였고, 그러한 갈등과 고민으로 이른 새벽 자주 기도를 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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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죄책감
- 한 여성의 물질을 드리는 기도

 

위희진
(한백교회 교인)

 

저희 부부는 작년 529일에 혼례를 올렸는데 올 해 529일 첫 결혼기념일엔 아기가 태어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관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통제와 감시를 있는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었고,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을 왜 국가에 신고해야 하냐 하는 반사회적 심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집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저희 부부는 지금 결혼 전 신랑이 신청해서 마련한 스무 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해서 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는데, 저희가 혼인신고를 해버리면 가구당 소득이 임대아파트 입주 기준을 초과해버립니다. 박봉이라는 출판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맞벌이를 하다 보니 부부소득으로는 임대아파트 입주 조건을 초과해버리는데, 1인당 가구 소득 기준이나 3인 가구 소득기준이나 같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해서 아기가 태어나서 세 식구가 된다고 하더라도 임대아파트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임대아파트에서 나가 살만한 집을 구할 형편도 안 되고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아기를 낳으려니 임대파트 문제뿐 아니라 이래저래 걸리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아기 출생신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신랑한테 올려야 할지, 저한테 올려야 할지도 어렵습니다.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혼인 신고할 때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엄마 성을 따를지 아빠 성을 따를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자 성을 따르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 되도록 강요하는 ''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이 싫긴 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이름 앞에 성은 있어야 하고, 또 남편의 성을 받아야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 제가 아기를 낳았다는 어떤 증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아휴직도, 국가에서 받을 수 있는 육아휴직수당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여자라는 것이 살면서 억울하고 불리할 때가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기를 가진, 가진 것 없는 여자는 이 사회에서 참 살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오는 중년 부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1톤 트럭도 텅텅 비어 있을 만큼 별 것 없는 세간, 그나마 그 세간이라는 것도 남들이 보면 버려도 그만일 것 같은 낡디 낡은 것들이었습니다. 부부 얼굴에 행복같은 사치스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삶에 찌든 얼굴이었습니다. 그 중년 부부를 보면 제 마음 한구석에선 죄책감이 듭니다.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과연 여기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쪼들리고 힘들더라도 단칸방 월세라도 얻어서 나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한편으론 화가 납니다. 이 사회는 왜 우리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이런 죄책감까지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일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셨다지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은 계속 힘없이 살아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드리는 것들이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길 바라지만, 그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글 가운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함께 가난해지고 함께 힘없는 자가 되는 것밖에 없다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혁명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임대아파트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 정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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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4 14: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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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을 앞둔 저에게는 참으로 공감되는 글이네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근근히 생활할 손바닥 만한 공간을 구하기가 왜이리 골치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소득이 적은 다른 이들은 이 나라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걸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요. ㅈㅈ 거창한 인류애도 좋지만 저같은 별볼일 없는 사람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궁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건가보죠. ㅎㅎㅎ 한바탕 웃고 힘냅시다!

살처분, 생매장 당한 190만 생명을 위한 기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은
높은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나
낮은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은
천년을 사는 학이나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모두 형제요 자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조화롭게 이끌어야할 책임을 주신 인간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모든 피조물들 위에 군림하며
마치 자신이 창조주라도 된 듯이
천지만물을 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창조의 하나님,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안식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일을 마치고 쉬신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주 만물의 안식이고
세상이 조화와 평화를 누려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아버지의 가슴을 도려내고
어머니인 강을 파헤쳤으며
자매인 물고기에 몸에 콘크리트를 드리붓고,
집에서 함께 마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형제인 가축들을 산채로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강산은 수려한데 골골을 원망의 곡소리로 채워 버렸습니다.

눈 마주치고 정을 나누던 생명들인데
단지 감염의 위험이 있다하여 그리했습니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주사마저도 번거러워
칼이 달린 기계로 사지를 잘라내고
아직 숨이 벌떡이는 모가지를 썰어 버렸습니다.
자식같은 생명이라 말했지만
마지막 여물한번 챙겨주지도 못한채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웅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마지막 발버둥......
그 마저도 보이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대신한
한스런 비명마저도 들리지 않도록,
아니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덮어버렸습니다.

말 못하는 벗님들,
우리만 바라보고 살던
190만의 생명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끊어 버렸습니다.
단지 보다 우월한 무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단지 구제역 청정지역이라는 상품의 딱지가 그리워서

오 하나님
그들의 넋 앞에 머리숙여 참회합니다.
다하지 못한 발버둥을
외치지 못한 울음들을
여기 이 기도로 대신합니다.
영들이여 편히 가소서.

오 하나님 이들의 생명을 당신의 품에 맞아주시고
다시는 이러한 배신과 왜곡이 없는 세상으로 불러주옵소서.

그들이 빼앗긴 것이 어디 죽음뿐이겠습니까?
초원을 뛰어 놀며 꼴을 먹고
만나고 사랑하고 새 생명을 이어가야할 삶조차도
나면서부터 거세되고 인공수정으로 앗아갔습니다.

축산물 공장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대량 사육되며
단지 인간의 먹이감으로 제조되는
반 생명의 비정함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속성사육을 위해
네 번 되새김할 뱃속에
식도만 넘어가면 바로 흡수되는
사료로 성장촉진제로 채워넣어
창조질서를 거역한 죄를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마아블링 일등육 품질을 위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밀집사육을 하며
움직이는 동물에게 도저히 못할 죄를 행한 것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하마 스트레스 받아 병들까봐 항생제 범벅이 된 먹이로
아프고 죽을 권리도 빼앗겨 버린 반 생명의 사육을
이 비정한 탐욕의 폭력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동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를 무참히 짖밟은 사육인데
한꺼번에 살처분 되든, 하나씩 도살되든
언젠가는 그렇게 가야할 운명이라면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새와 짐승을 손수 빚어 만드셨다는 것은
그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미지,
당신의 형상대로 빚으셨다는 것이지만
막내로 세상에 온 인간이
먼저 있던 형님이며 언니인 생명들에게 행한
반 인륜의 죄악들을 오 하나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데
그 몸은 사람의 몸 뿐만이 아니라
또한 씨앗의 몸, 짐승의 몸, 새의 몸, 물고기의 몸으로 오심을 믿습니다.

오 하나님,
그 몸들이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나고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우주 만물의 부활을 믿습니다(고전 15장).

오 하나님,
우리들의 무한한 욕심에 토대한 이기심이
서로 공존하고 함께 평화를 누리는 관계로
오직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관계가
서로 돕고 존중하는 성숙한 관계로 변화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불균형적인 관계가
서로 사랑 안에서 완성하는 관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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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일곱 번째

청년들과 나누는 말씀 한 자락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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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엔 자유분방한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이 많다. 목사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들먹이면서 교회공동체에 동참하라고 했다가는 바로 정의의 날쌘 검을 들이대어 잘못된 권력행사를 꼬집어 주거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라며(요한 8:32) 새처럼 멀리 날아갈 청년들이다. 이런 청년들이 매 주일 모여서 뭔가를 한다. 그리고 당시 전임전도사였던 나에게 주일청년모임 자리에서 함께 나눌 것들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든, 기도든, 뭐든 해 보자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뭔지 늘 고민하는 나는 뭔가 하느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슴프레한 새벽 같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왔다. 이른 새벽, 저 멀리서 어둑어둑 밝아오는 여명(黎明)은 밤의 스산한 공기를 바꾸고 생명의 싹을 틔운다. 그 때 우리 몸은 깨어나고, 모든 존재들이 기지개를 편다. 생의 약동이 일어난다. 명징한 언어로 이런 모든 것을 설명해 내기란 참 어렵지만 뭔가 거기서 그 때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참(眞理)”이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희미하고 모호하겠지만 주일청년모임에서 말씀 한 자락 가지고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 아니겠나 싶어 함께 하기로 했다. 신학을 전공했고, 목사가 되는 길을 밟고 있지만, 갈수록 신앙이 뭔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헷갈리는 일개 전도사가 제 멋을 추구하는 청년들과 떠드는 수다 속에서 뭔가 일어나길 기대하며 그 첫 시간을 열었다. 주제는 “종교체험!”  
 
“종교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청년주일모임의 포문을 연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더 이상 종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시대에 여전히 교회에 오고,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 종교는 아편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여전히 진리의 맥락에 설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체험 또는 종교체험이 인생에 아주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종교 장사꾼들에 의해 맘몬과 결탁되어 있고, 심리적 위로와 조작된 감성에 주로 호소하는 왜곡된 하느님 체험과 종교체험을 성찰할 기회를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체험, 또는 실제 경험한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그날의 모임을 열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시간이라 청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고, 여기에 그 풍경을 그려본다.
한문덕: 종교체험을 한 적이 있나요? 뜨거웠던 경험?

ㄱㅅ: 저는 그렇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종교체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이야기를 하면 힘을 받고 좋아져요. 그래서 교회를 더 나오게 되고...

ㅈㅇㅇ: 저는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주변에서 병이 낫거나 한 경우 말이죠. 의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제 어머니 같은 경우도 암이 걸리셨는데 수술 없이 신앙으로 나시기도 하는 등의 경험이 있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참 저도 모태출석(모태신앙이란 말은 어불성설인 느낌이 들어서 모태출석이라는 말을 사용)인데, 어렸을 때 사소한 경험들이 있어요. 혼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갑자기 손님이 오신다던가 하는 경험.... ^^(웃음).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참석률은 저조했지만 교회 안다니던 애들이 ‘마음이 편해진다’, ‘눈물이 난다’ 그러더라고요. 대학교 가서는 내가 선택한 종교가 아니다는 생각에 교회를 안 나갔었어요.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신문사에서 일할 때, 회사에 뻥을 치고 교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부활절 예배. 그런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교회를 가는 게 좋다고 느껴지더라고요. 향린교회 나오기가 부담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너에게 기도를 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어’라고 하시면서 내 상황에 너무 잘 맞게 기도를 해 주셨어요. 이런 것들이 제가 느꼈던 종교체험 같아요.

ㅅㅈㅇ: 저는 여러 교회를 등록 안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다른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교회 나가게 되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떠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종교는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ㅅㅁㅈ: 저는 엄마의 체험의 결과물이에요. 신앙 좋으신 엄마가 기도해서 얻은 아이니까~ 어렸을 때 방언도 받았어요. ‘한얼산 기도원’ 같은데도 다니고. 초등학교 때 방언을 받았는데, 방언을 구분해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맞다고 해 주더라고요. 중학교 쯤 이게 가짜가 아닐까 생각되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안 되더라고요. 어머니는 꿈을 잘 꾸세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어머니는 귀신같이 아세요. 그리고 작은 사소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체험을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느낌이 친구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고요.

문덕: 여러분이 이야기 하신 것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종교체험은 분명 삶의 위로가 되었고, 변화를 주었다. 둘째,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참 낯선 것이고 이해가 안 되는데, 사실이다. 방언, 영의 분별 등과 같은 현상이 그런 것 중에 하나인데, 이런 것을 통해 하나님이 있나보다 라고 느꼈다는 것 같아요.

종교체험이 무엇이냐?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하면 참 어려워집니다. ㄱㅅ 교우가 “종교체험이란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종교란 무엇이고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의 궁극적인 핵은 어디에 있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오전에 교회학교 진급예배를 드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한 어린이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을 등치시키죠.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서구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보았고 예수님도 도적적인 모델로 생각했죠. 계몽주의 이후 특히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말한 후, 여러 종교학자들이 종교체험의 특성과 종교의 본질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토가 성스러움을 말한다든지, 요아킴 바흐가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를, 윌리암 제임스가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등을 종교체험의 특징 또는 본질로 말한 것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말한 종교체험도 이들이 말한 어떤 것과 연결되기도 하지요.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시도했던 멀치아 엘리아데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시간의 변화, 세월의 흐름을 무척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군요. 그렇겠지요. 오늘 현대인들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고대인들이 큰 나무나, 바위, 놀라운 자연환경 등 어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시간이 정지되고, 변하는 가운데 불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그 때 그 순간, 또는 장소는 거룩한 곳이 드러나는 곳이 되는데 이것을 엘리아데는 히에로파니(聖顯)이라고 불렀고, 고대인들의 이러한 거룩함의 체험을 통해 불안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고대인들이 느꼈던 어떤 거룩한 공간 또는 시간을 창조해 주는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종교체험과 오늘 성서에서 여러 인물들이 만났던 하느님 체험과는 무엇이 다르고 또 성서는 하느님 체험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모세와 이사야, 그리고 예수와 바울의 종교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남용하고 있는 종교체험을 살펴보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4명의 하느님 체험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종교체험이 반드시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종교체험이 삶과 유리된 황홀경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야기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 종교체험 후의 삶의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 공적 영역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이야기는 이들의 종교체험을 매우 극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로 꾸미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의 삶의 변화는 상당히 점진적이었으며, 이성적인 반성을 동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40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집트 사람이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다 그만 살인을 저지릅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40년간 목동으로 살다가 타지 않는 가시떨기의 현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히브리의 해방이라는 엄청난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갖게 됩니다. 태양신 라를 섬기던 이집트 제국 밑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히브리들은 태양의 힘에 의해 한 순간에 자연발화 되어 타버리는 가시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가시떨기는 태양의 힘으로 불사르려 해도 타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모습을 모세가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다가 실패했던 과거의 경험과 노숙한 신앙의 단계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고 하는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의 종교체험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40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민족의 사활을 고민해야 했던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하는 천상회의를 듣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민족을 놓고 오랜 동안 고민한 사람이 아니면 즉 준비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긴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와 광야에서의 시험, 그리고 갈릴리에서의 첫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나 마태와 누가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광야 시험은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요구하는 사탄의 시험, 어찌 보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영원한 욕망을 극복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갔다고 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보신 예수의 이성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직접 쓴 편지에서는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자신이 예수 체험 이후 아라비아 선교에 곧 바로 뛰어든 사실을 언급합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교를 다각도로 분석하였고, 처음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가, 스데반의 죽음과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과의 부단한 갈등을 겪은 후에 결국 예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종교체험을 보면 분명 놀라운 데가 있고, 그 종교체험의 진정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문제는 종교체험이 감정의 고양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혹 넘어선다고 할 때에도 그 행동의 변화가 교회에서 원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간증에서 머물고 말지요. 오늘 제가 택한 4명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 모두 종교체험이 역사적 현장과 연결된다는 사실이고, 역사적 현장과 연결되는 것은 이 사회와 문화와 정치경제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이성적 반성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신비경험이 있고, 예수님도 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면서 존재론적 변화의 경험이 있지만 결국 그 분들이 활동한 장소는 산 아래 낮은 곳이며, 이 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 만나는 먼 길을 가슴 -> 손발 -> 머리 -> 가슴 -> 손발로 표현했지요. 신영복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손발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깨달음의 진정성과 실천을 말씀하신 거지요. 그런데 종교체험은 가슴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가슴을 때리기 때문에 바로 손발로 실천하지요. 그런데 손발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슴을 울린 감동이 절에 들어가서 불상에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행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합니다. 중세 신비주의와 영성을 대표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만 해도 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졌고, <팡세>라는 수상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파스칼도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교신 선생 같은 분은 사람들이 성령체험을 한다면서 뜨거워질 때 마다 거기에다 찬물을 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슴에서 손발로 손발을 움직이되 머리로 성찰하고, 다시 가슴이 울리고, 그래서 손발로 내려가는 순환 속에서 차츰 신앙은 성숙할 것입니다. 뜨거운 감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명의식으로 체화되고 소명의식을 계속 떠올리면서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뜨겁지 않다는 거지요? 하느님 체험 자체가 없다는 것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고, 이전엔 뭔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자체가 없어서 종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것! 이것이 고민된다 이겁니다. 특히 뭔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더욱 더 그렇지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 체험은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오늘은 이 정도 하지요? 혹시 질문이나 추가로 함께 나누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고요~

ㅇㅎㅎ: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것도 종교체험 중에 하나 아닙니까?

한문덕: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은 아주 중요한 종교체험 중에 하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민족의 문제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행위 자체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간구와 기도는 있게 마련이고 그 종교전통에서도 문제해결이 되지요.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무속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요. 심지어 종교전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혼자서 자기 암시 비슷하게 계속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이 종교체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기도를 드렸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 기도인가 하는 문제지요.

ㅇㅇㅈ: 성경에서 종교체험이 있으면 공동체가 변하잖아요. 그럼 그처럼 공동체에 변화를 이루면 제대로 된 종교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요?

한문덕: 삶의 변화, 행위의 변화 궁극적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종교체험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했느냐’이겠지요. 성서의 언어는 고백적 언어이기 때문에 다소 과장되고 급격한 면이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끝나지요. 전혀 모르는 여성과 남성이 극적인 상황에 만나서 어려움을 겪고 결국 사랑하고 결혼하잖아요. 영화는 거기서 끝나죠.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그 때부터 지지고 볶고 하는 가정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하루에도 3천명씩 변화를 받았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은혜롭고 감동이 되지만 변한 3천명의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선 성화(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의 문제라고나 할까요.
 
ㅅㅁㅈ: 차라리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직접 만나 주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고 말씀해 주시면 정말 편할텐데~

ㅇㅌㅇ: 그 때 당시 사도 바울도 우리처럼 고민 많이 했을 걸!

한문덕: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지금 세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한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특히 종교인들이 그렇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시나요? 바로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진리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지요.  

ㅇㅎㅎ: 제가 종교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 그 것은 고등학교 때일 거예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의사가 된 것이거든요.

ㅅㅁㅈ: 그런 것도 있는데.... 좀 디테일 좀 주시면 좋겠어~

ㅈㅇㅇ: 디테일은 자신이 계속 찾아가는 거고, 계속 찾는 과정 속에서 그와 같은 계시가 필요하고, 또 실제로도 있다는 것이지. 나는 일상 속에서 그 같은 경험을 많이 체험하거든.

ㅅㅁㅈ: 나도 그런 경험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것이 힘들더라고.

문덕: 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것이 있죠. 기도와 말씀. 이건 다음 주에~ 숙제 꼭 해오시고요~. 오늘은 이것으로 마칠까요~
짝짝짝~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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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용하였던 청년신도회 주일 모임 자료
제 1 강 종 교 체 험
 
2월 3일 한문덕 전도사

1. 기도(위대한 기도문을 통한 성숙한 기도 배우기)            

Pa,ter( 아버지, (누가복음 11장 2절 일부) [각주:1]
Pa,ter h`mw/n o` evn toi/j ouvranoi/j(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장 9절 일부)[각주:2]


2. 마음 열기
- 교회 나온 이야기 나누기
-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

3. 하나님을 만나는 먼 길: 가슴→손발→머리→다시 가슴으로→손발   
1) 성서의 인물들
- 모세(출애굽기 3장 1-10절)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태양신 라(Ra)도 스네(가시떨기)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르지 못한다. 
- 이사야(이사야 6장 1-13절) : 천상회의를 듣고 자기를 보내달라고 하는 이사야(소명의식)
- 예수(마가 1장 9-15절) : 하늘과 소통(11절 참조 마 3;17), 세 가지 시험, 삶의 세계로 투신.
- 바울(갈라디아서 1장 11-17절) : 바울의 열성, 종교체험, 선교활동
- 성서 인물들의 하나님 체험의 특징: 성스러움의 체험(전체성, 두려움, 궁극성, 강렬성 등등), 소명의식(이성적 차원), 행위로 연결(실천) 
2) 하나님 체험(종교체험)에 대하여:
- 쉴라이어마허: 절대의존의 감정(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다):
-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 - 두려움(Tremendum)과 매혹(Fascinas)의 신비(mysterium)
- 요아킴 바흐: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
- 윌리암 제임스: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 멀치아 엘리아데: 히에로파니(聖顯), 고대인의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변하지 않는 무엇 즉 본질 추구-> 시간이 멈춘 순간의 경험 
- 이길용: 종교란 세계설명 체계와 인생문제 극복체계, 완전함의 추구-완전함의 발견-완전함의 고양

4. 보살핌과 결단   
- 현재 나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의 강렬함은 어느 정도인가? 냉장고인가? 용광로인가?
냉장고 ---------------------------------------------------------- 용광로

5. 삶의 적용 모색/기도   
- 자신의 소명을 찾아보자. 하나님이 이 시대에 나를 왜 부르셨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본다.
- 어떻게 하면 나를 추동하는 하느님 체험을 계속 할 수 있을까?

6. 다음 모임 알림(2월 10일) “주제: 기도”  

- 자신의 기도체험을 반영하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도란 이런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적어오세요.
- 자신이 요즘 드리고 있거나 이전에 했던 기도제목들을 모두 적고, 하나님에 관한 것, 자신에 관한 것, 이웃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봅시다.
※ 참고문헌
『종교론』슐라이어마허/최신한, 대한기독교서회, 2002.
『기독교신앙』슐라이어마허/최신한, 한길사, 2006.
『성스러움의 의미』루돌프 옷토/길희성, 분도출판사, 1987 초판.
『Religionswissenschaft: Prolegomena zu ihrer wissenschaftstheorethschen Grundlegung』<종교학: 학문이론적 토대를 위한 서설> Joachim Wach, 1924 초판.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김재영, 한길사, 2000.
『종교학의 이해: 쉽게 풀어쓴 종교학 입문서』 이길용, 한들출판사, 2007.
  1.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나? 우리의 존재 근원에 대한 성찰(인간성의 문제). [본문으로]
  2. 하늘에(초월성, 전적타자, 낯섬, 구원의 가능성) 계신 우리(내재성, 친밀함, 근접, 돌봄과 배려), 예수의 아버지 개념과 어머니 마리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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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2(일) 한백교회 '물질을 드리는 기도'

나를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나상윤
(본 연구소 회원)

「에스더기」에 나오는 에스더 왕후는 죽을 각오를 하고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재난 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 민족을 구합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연거푸 이렇게 묻습니다. “에스더 왕후, 당신의 간청이 무엇이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당신의 소청이 무엇이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민족의 평안을 도모하길 바라는 유다 민족의 염원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한 치도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기면서, 유다 민족은 이 이야기를 읽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에스더의 처지를 생각하며 에스더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에스더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의 미모는 왕의 인정을 받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상하기에 그의 미모는 왕과 왕에게 잘 보이려는 유다 민족의 욕망에 의해 꾸며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은 고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이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하기보다는, 소리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그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를 추구하기보다는, 소리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그 소리와 한몸 되는 연주를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언가를 드리기보다는, 드리는 행위와 나 자신이 일체가 되어, 나를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살길 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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