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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축사

동성애자들과 민중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멀리 미국 쉬카고에서 방한하신 쉬카고 신학대학원의 제닝스 교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방한을 계기로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출판사 동연이 공동으로 하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제닝스 교수님의 역작인 2003년도 판, [The Man Jesus Loved]를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참 좋은 일 하셨다고 치하하고 싶습니다.

저는 1950년, 61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만난, 미국 해군 친구의 도움으로 1956년 미국 서부에 있는 작은 기독교 인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공부를 시작해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공부를 뉴욕에 있는 유니언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목사 아들로 성장하면서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교육 받은 사람으로, 유니언에서 180도 다른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 개론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창조설화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성서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 억압과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에 회의와 함께 분노를 느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튼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의 신학적 꿈을 키웠습니다. 저의 목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만주에 망명한 항일 목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분자로 낙인 찍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이념적 탄압,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독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은 미국 흑인들의 꿈 만이 아니라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독재 정권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 민중이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 된 나라를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우리 신학의 선배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과 후배인 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위해서 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민중 연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신학화한 것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민주화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민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민중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의 친구이며, 동시에 민중입니다.

"민중"이 누구냐? "민중"을 정의하라는 학문적인 압력을 안과 밖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민중"을 관념적인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삶을 보고, 연대함으로써 알게 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구지 서술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릴 만 한 사람들은, 게급과 계층,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람들,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윤곽 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가난하고 병든자들, 여자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오클로스, 구약성서의 하피루라고 했습니다.

저희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정치적으로 억압 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의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의 연대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닝스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또다른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방한하셔서 바로 이자리에서 강연하신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읽게 되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민중 중의 민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사회에 발 붙일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극한상항에 처해 있어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타자 (Others)"거나, 싸구려 관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민중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시대의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분명한 구절들을 읽지 못했을까? 어려서 부터 수십번 읽은 성경, 신학교에서 시험까지 보고 합격한 성경말씀들, 대학에서 교회에서 수십번 설교하면서도-- 눈 먼 사람처럼, 예수 역시 성적 주변인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발견한 정치적, 문화적 반항아 이상의 혁명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관용과 기쁨을 설파한 선지자라는 것을, 이책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받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를 유교 문화와 접목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엄하고 강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도덕군자 연하는 유교적 아버지로 알고, 교회의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모시라고 강요하고 절대 복종을 명령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며 재국주의적인 선교사의 기독교와 유교가 힘을 합친 종교권력은 어느 나라 기독교 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인간 해방의 복음을 우리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로 왜곡해 왔습니다.

"예수는 게이였는가?" 이 질문 만이 아니라, 차마 질문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철통 같은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지진의 굉음이 들리는 책입니다. 제닝스 교수님의 신학, 성서 읽기는 신학적 상상력을 넘어서, 신학적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 용기는 이단의 눈으로, 종교적 순교자, 지적 순교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는, "queer" 즉 이상한 사람, 색 다른 사람, 괴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읽은 그대로 말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제닝스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난생 처음으로 번역하시노라고 수고하신 박성훈 선생님에게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혁명적이며 체제 해체적인 무서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연구소 김진호 실장님과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사장님의 신학적 상상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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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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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마가복음 15:33-35]

 
1.

1962년 미국의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을 때에 전 미주의 TV 방송은 한 시간 동안 흑색 화면에 “SHAME” (수치)이라는 자막만 띄워서 전국에 방영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일어난 마지막 일주일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의 체포 - 재판 - 처형의 과정을 그의 고난/수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고난주간 중에는, 즉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활동하신 마지막 일주일 기간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단 한 건의 기적을 행하지도, 단 한 건의 자연계의 기이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예수의 저주 한 마디에 말라버렸다 (마가복음에는 그 이튿날에, 마태복음에는 당장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도함)는 예수의 기적 능력의 과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생명을 산출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영화 벤허에서처럼 예수의 운명 시각에 천지가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천둥번개와 더불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자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 바록 그것이 마가복음의 보도대로 예수의 주관적 체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 울리지 않았습니다. 낮중에 가장 밝은 시점인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현상은 처형 현장의 사람들에게 경외심이나 두려운 감정을 일으킬 자이한 자연현상으로 제시되었기보다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참한 끝장에 접하여 눈앞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당혹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의 이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도한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실의에 잠겨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길손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들이 무슨 일을 두고 그렇게 침통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하고 길손에게 핀찬을 주었습니다. 그 길손은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활동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품고 가슴이 벅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기대와는 달리 바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벅찬 꿈은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는 벅찬 가슴으로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허탈한 심경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그의 허망한 죽음 때문에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유독 이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 - 더 정확히 표현해서 죽임 당하신 사건 - 은 예수를 따르던 처음 제자들이 극복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최대의 걸림돌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도된 대로 사흘 만에 일어난 부활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의 거리낌이 하루아침에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감추어서 없애야 할 거리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십자가 처형 때문에’ (becaus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해석 작업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렇게 덧붙여진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들은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의 핵심으로 구축한 긍적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지마는 지나친 신학적 해석 일변도가 역사적-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은폐시키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3.

예수에 대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예언된 종말적 구원자 상(像)의 대표적인 칭호는 ‘메시야’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칭호로 지칭되든지 상관 없이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는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또는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존재였습니다. 종말적 구원자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패배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 상과 절대로 부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적 구원자로 믿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종말적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는 논리를 펼쳐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낯선 얼굴로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 (The Christ should suffer these things and enter into his glory.) 는 것을 증언하고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종말적 구원자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데는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그 일 자체를 필요불가결한 요건으로 설정하셨면 그러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디즘(sadism)에 사로잡힌 분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이 인간 구원 사업의 필수요건이라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룟 유다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는 구원 사업의 필요불가결한 일등 공신으로 찬양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유다복음서> 같은 위경(僞經)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수행한 참된 제자로 내세웠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視角)으로 십자가 처형을 그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감사합니다. 멈추지 말고 좀 더 피를 계속 흘리시고 죽으셔서 구원 사업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과히 사디즘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4.

제2 이사야 (사 40-55장)에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한 시가가 네 개 들어있습니다. 특히 넷째 번에 나오는 시가 (사 53장; 정확하게는 사 52:13-53:12)는 고난을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어느 특정한 미지의 역사적 인물을 지칭한다고도 보며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유대교의 주석에서는 이 여호와의 종과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와 결부시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서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전도자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인 한 내시가 귀국하는 마차 안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장면과 마주칩니다. 그가 마침 읽고 있던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내시는 빌립에게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입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은 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이샤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결부시켜 해석했음에 틀립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4절a)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5절a)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8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1절c)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12절e)
“그는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10절b)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겪었으며 그의 목숨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응보로서의 형벌과 죽음의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우리는 이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만으로 다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서 불의와 폭력의 희생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떠나서는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뜻매김이 내 이웃의 문제 해결에 적절하지 않다면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는 왜 그의 삶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성서의 어느 곳도 그의 예루살렘 행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에서, 무슨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또는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신학적, 종교적 목적 이외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의 신약신학의 거장 R. Bultmann의 주장처럼 예수의 처형은 순전히 사법적인 오판(誤判)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이 예수를 제거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는 그의 생애 초두에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막 3:6) 예수의 적대자들의 이러한 모의는 마가복음 1:14-3:5에 전개된 예수의 갈릴리 선교 활동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이 자기네의 지배질서와 조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사정은 예루살렘의 지배층에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막 12:12; 14:1). 집권자들은 예수의 요구에 순응할 수도, 묵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현 사회의 무권자들에게 삶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선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사회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밑바닥 무지레기들이 하나님나라 잔치의 주빈으로 영접되는 것은 현 사회의 지배층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의 주동자인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6.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통, 고난, 재난, 불행 등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죄와 관련지어서 너무나 근원적인 차원에만 국한하여 다루기 때문에 이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고통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통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마땅한 응보로서 내리신 징벌이기 때문에 고통의 당사자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죄인에게 그의 죄를 각성하게 하여 그를 회개시키고 순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통의 매저키즘(masochism)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고난은 인격을 단련시키는 교육적 기능도 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 만연한 수 많은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것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성서는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우리의 우리의 인간됨의 주요한 임무로 명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있든지, 다른 누구에게 있든지 상관 없이 - 따져 본 후에 도우라 하지 않고 그저 도우라고만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노역으로 신음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생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고통과 고난을 용인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현 세상의 지배자인 파라오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7.

알베르 까뮈가 1947년 발표한 소설 <페스트>가 생각납니다.

알제리아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병은 급속히 번져갔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도시는 불가항력의 이 재난 앞에서 큰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문은 폐쇄되고 외부와의 왕래가 차단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특히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예수회 신부 파늘루 신부가 이 재난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극명하게 대조되는 처신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리외는 페스트라는 재난을 막기에 인간은 역부족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환히 알면서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하는 데 투신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내리는 천벌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라고 설교하면서 페스트와의 투쟁에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그들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의사 리외: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소. 그런고로 하나님 편에서도, 인간 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 소? 하늘로 눈을 돌리지 않고 말이오. 보시오,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 않소.”
신부 파늘루: “그래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나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 않소.”
의사 리외: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중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요.” 

리외의 투쟁은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보고 더욱 고양됩니다. 그리고 신부도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입장의 변화를 일으켜서 리외를 도와보건소에 봉사하게 됩니다. 리외는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얻게 되고 결국에 페스트도 일단 정복됩니다. 그렇지만 리외의 아내도, 늘루 신부도 페스트의 희생자 되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페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성문은 다시 열리고 오랑 시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뤼는 이 질병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할만한 것 보다는 감탄할 만한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글로 써서 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재난과 불행은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맞서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문제 해결과 관계 없는 한 한가한 관념의 유희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신론자인 의사 리외의 자세가 신부 파늘루의 자세보다 훨씬 친인간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한다는 아이로니를 배우게 됩니다.


8.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죄악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전히 종교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중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의 권리를 쟁취하고 수호하려는 데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어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경우에 우리는 그 희생되는 짐승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심정에 사로잡히지 그 짐승을 나쁜 놈으로 학대하거나 미워할 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수현씨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사회는 그를 의인이라 칭송합니다. 이사야 53장 12c,d에 “그는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맡겼다. 그래서 그는 죄인으로 셈해졌다/여겨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그는 죄인들을 중재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 의인으로 칭송받아야 바땅하지 왜 죄인으로 셈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목숨을 바친 것은 인간 일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따돌림 받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지배자층은 그 사람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의 하나로 지목하여 배척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도 이와 꼭 마찬가지 이치였습니다. 그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지목 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남의 고난을 퇴치하기 위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한다는 것을 뜻하지 인격도야를 위한 육체적 학대나 나 신비주의적 고행을 수행하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도들을 선동하는 그의 적대자들을 겨냥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갈 6:17) 라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상처 자국’은 예수가 당하신 고난의 길을 뒤따르는 데서 얻은 육체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승리의 상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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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달리야
민족이냐 민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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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민족’이라는 사회적 결속체는 역사적으로 대개의 경우 종족보다 커다란 범위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결속을 보증하는 정치제도적 장치는 종족적 혈연성 범주보다 훨씬 복잡한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많은 경우에 민족과 쌍개념을 이루는 역사적 실체다. ‘국가’가 영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통치형태로서, 기본적으로 폭력수단을 통한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이라는 것이 소수에 의한 자원의 전유 및 그러한 전유를 위한 폭력 수단의 독점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결속체로서 역사적으로 형성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민족은 상징의 공유 및 문화적 동질성을 결속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즉 문화적 상징적 유대가 없다면 민족은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동질감이 작은 공동체의 범주가 아닌 민족처럼 거대한 공동체적 범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상징적 소통기재를 거대 영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민족-국가를 통한 사회적 결속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적 결속의 정당성을, 역사적 필요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초역사적 당위성의 차원에서 사고하게 한다. 즉 민족-국가는 선재적(先在的)으로 주어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현존하는 민족-국가에 대해서 문제시하더라도, 그는 민족-국가의 결속의 초역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이런 것인 한, 민중문제는 항상 잠재되어 있게 된다. (물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으로 인한 배제의 문제를 둘러싼 이해의 차이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때로 소통 불능의 상황, 즉 긴장과 갈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단순한 일탈적 반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국가의 초역사적 당위성의 코드를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의 코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의 형태로 나타난 민중운동을 전정치적(pro-political)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변혁적 저항(political resist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국 후기 및 식민지 시대 이스라엘의 경우, 이러한 재코드화는 ‘남은 자’ 사상과 ‘신정통치’ 사상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재코드화의 실현은 항상 변혁적인 것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는 민중적 의제가 반영된 역사적 타협물을 탄생시키곤 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한 군주국 초기 시대의 반다윗-솔로몬 혁명은―비록 민족적 동질감이 아직 매우 허술하던 때임에도―반국가적인 지파동맹 시대의 비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로 구현되었다. 한편 요시아 개혁의 경우는, 민중적 저항의 에너지를 중앙정부가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여,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을 이루어낸 사례다. 두 경우 다 민중적 동기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에 대한 위기의 요소였다. 반면 전자는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의 재형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후자는 (창조적 재해석을 통한) 연속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모두 기존의 코드화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인식론적 지반을 같이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민족-국가’라는 결속의 코드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이 장에서 다룰 게달리야 이야기는 정치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민족주의’와 ‘민중문제’를 둘러싼 왕국 말기의 복잡한 논쟁의 컨텍스트를 이해해야만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다. 여기에도 ‘민족-국가’라는 코드는 전제사항이다. 단 그것의 구체성을 둘러싼 상이한 입장이 갈등을 빗고 있다. 편의상 한편을 ‘민족-국가-민중’의 코드화로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을 전통적 ‘민족-국가’론이라고 하자.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엉뚱한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텍스트 자체는 교란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저자의 관점과 게달리야의 관점이 요시아 개혁의 승계자라는 점에서 입장이 공유되고 있다. 반면, 게달리야와 대비되는 인물인 여호야긴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런데 텍스트는 오히려 여호야긴에게 더 우호적인 반면, 게달리야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민족-국가’라는 전통적 코드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룰 때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바로 이 점을 초점을 두고 게달리야에 얽힌 역사를, 특히 민중적 관점에서 복원하고자 한다.

2

요시아 개혁은 이스라엘 역사 및 야훼 신앙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유다 왕국 말기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개혁적 역사신학 운동은, 성서의 본격적인 대단위 편찬이 이 개혁의 신학화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야훼신앙사의 지성사적 차원을 풍부하게 채웠을 뿐 아니라, 위기 극복의 사회적 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 운동을 구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관심 갖는 왕국 말기와 식민지 초기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시아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동맹을 맺은 세력은 다양한데, 특히 우리는 성서에 ‘암하아레츠’라고 표기하고 있는 민중세력도 그 중에 하나다. 그리하여 요시아 개혁은 ‘위로부터의 민중적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시아 개혁이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을 무렵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그것은 에집트 제26왕조가 들어서면서 잃었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이 과정에서 바빌론과 메대 군의 동진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출병을 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사건이다. 요시아 정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바빌론-메대 연합군과 동맹을 맺으며 개혁을 펼쳤는데, 에집트의 팽창주의는 그러한 요시아 개혁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므기또라는 천험의 요새를 통해 요시아는 에집트 군의 출병로를 가로막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전사였다.

이런 갑작스런 사건은 유다로서는 중대한 위기였다. 아마도 이 시기 예루살렘 궁중에는 비상한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다. 요시아의 장자인 여호야킴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여호아하즈가 즉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즉위에 개혁파, 특히 암하아레츠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정(北征)에서 실패한 느고2세는 여호아하즈를 폐위시켜 본국으로 끌고감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의 지지자들로 유다의 조정을 개편하고자 했고, 그 소임을 맡고서 즉위한 자가 바로 여호야킴이었다.

이후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 왕으로 이어지는 유다의 조정 내에는 크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친에집트파가 그 하나이고, 친바빌론파가 다른 하나다. 여기서 전자가 전통적 귀족주의를 고집하는 세력이라면, 후자는 요시아 개혁의 광범위한 지지세력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수구파라면, 후자는 개혁파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후자는 어느 정도의 스팩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대체로 민중적 편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야킴과 여호야긴 치하에서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시드키야 왕 시절에는 전기에는 친바빌론 세력이, 후기에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킴 시절 가장 대표적인 재야 급진파 인사였던 것 같다. 그는 왕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비판의 소리를 드높였다. 아마도 이 시기 그의 명망이 크게 상승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요시아 왕 시절 개혁의 주도세력의 하나이던 힐키야 대사제의 아들이었다(「예레」1,2; 「열하」22,4․8). 동시대에 유력한 사제 가운데 동일한 이름의 사람이 두 명 있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살룸이라는 그의 삼촌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 당시 핵심세력의 하나였던 여예언자 훌다의 남편이다(「예레」32,7; 「열하」22,14). 즉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을 주도했던 사제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요시아 개혁을 지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요시아 말기 피상적인 개혁에 그치고 마는 현상을 간파했고 그것을 비판했다(「예레」4,3이하; 8,4~7). 그는 요시아가 죽은 직후 암하아레츠가 주동하여 일으킨 정변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인해 즉위한 여호아하즈가 강제로 폐위당한 것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예레」 22,10

여호야킴 왕에 대해서는 항상 그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왕의 시해를 충동하기까지 했다(「예레」22,13~17). 그래서 그는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를 후원하는 일단의 고위층 인사들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곤 했다. 그의 후원자들은 주로, 사반이나 악볼처럼, 과거 요시아 개혁의 주도세력을 형성하던 인물들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 36장 11~32절의 예레미야 필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 급진파 인사의 과격한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시드키야 왕 시절,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는, 왕의 국정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드키야 정부가 후기에 친에집트 편향을 띠자 강력한 정책 비판을 가한다. 한번은 시리아-팔레스틴의 6개국(암몬, 모압, 에돔, 띠르, 시돈, 유다)이 예루살렘에 모여 반바빌론 연합전선을 모의할 때, 그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당대의 유력한 사제의 하나였던 하나니야와 논쟁을 하면서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27~28장).

이상과 같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초점은 국가가 바빌론에 우호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우리가 길게 그에 관해서 주목한 것은, 그의 활동이 당시의 친바빌론자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당시 바빌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공지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론과 싸운다는 것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자주적 주권정부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예레미야의 판단으로는 그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더 중요시한 것은, 전쟁의 승패에 대한 판단 문제가 아니라(어쩌면 친바빌론 파의 일단의 세력은 이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 치하든 아니든, 민중적 개혁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대적으로 반출하고,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식의 정책을 중단하는 것은 개혁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결국 시드키야는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예루살렘은 정복당하고 불타 없어지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또 수많은 촌락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여러 성읍들의 파괴의 흔적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참화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처참한 잔해를 볼 수 있다.

바빌론 당국은 유다 같은 작은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띠로와 시돈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원세력인 에집트를 제압하는 데 그들의 서방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친바빌론 입장의 유력인사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면, 이 사소한 지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 그달리야였다.

그는 유다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하나인 사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가문은 친바빌론 노선의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이다. 또 그달리야는, 라기스에서 출토된 한 인장에 의하면, 시드키야 당시 군부 지도자의 하나였던 같다. 즉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재로 그의 정부 내에로 과거 유다 군의 잔존 세력이 속속 투항해 왔음이 분명하다(「예레」40,8).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의 직위는 아마도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의 공식 직위를 한번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1장 10절의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나 41장 1절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왕이 게달리야를 지칭할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진행을 나타낸다. 아마도 텍스트 저자들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게달리야는 바빌론으로부터 왕으로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재로 바빌론의 입장에서, 총독부라는 새로운 관리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할 때, 가장 손쉽게 이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게달리야(Gedaliah)는 자신의 새 도읍을 미스바로 정했다.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 예루살렘을 이미 잿더미가 됐으니 도읍으로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러 대안이 나올 수 있는데, 그는 그 중에서 미스바를 선택했다. 우선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니, 위치상 적합했다. 그밖에 요새도시들은 필시 바빌론 군에 의해 거의 완파됐을 터이니 예루살렘과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 가운데 그는 왜 하필 미스바를 택했을까? 그런데 독자들은 이 지명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지파동맹 시절 유명한 성서가 있는 곳이다(「판관」20,1~3; 21,1~8; 「삼상」 7장; 10,17).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스바는 국가로 이행한 뒤,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달리야는 옛 전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정부의 특징이 드러난다.

더욱이 정황은 개혁을 펴기에 매우 유리했다. 구왕족 치하에서 귀족노릇하던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주인 없는 토지와 재산이 매우 많았던 것이다. 토지와 재산의 재분배가 가능했고, 이는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추구했던 신명기 개혁의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이 엄청난 국난은 동시에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민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모종의 개혁정책의 대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정부의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단, 그가 노령이었고,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당시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건강상태는 퍽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책 자문역을 활발히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게달리야의 정부가 채 꽃을 피우기도 전, 그는 측근 장교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주범 이스마엘은 구왕족의 방계친척으로, 아마도 다윗 혈통이 아닌 자가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게달리야가 민족을 바빌론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민족-국가의 자주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열광적 민족주의 당파에 속했던 귀족 출신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유다 지역에서 도망해서 목숨을 건진 그 당파에 속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이 망명인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암몬 왕 바알리스가 있었을 것이다.

3

본문의 내용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텍스트에서 여호야긴 왕에 대한 아련한, 그러나 애틋한 기조의 기억을 남긴다. 마치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37년간 수감된 이후에는 바빌론 왕과 더불어 식사하고 후대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슬쩍 지나가는 듯한 문투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마감하는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인물은 불과 3개월간 등극했다가 제대로 왕권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빌론으로 유배된 인물이지만, 유다의 적어도 한 당파에 의해서 정통적인 유일한 왕처럼 여겨졌었다.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가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대파들은 여호야긴이 유일한 합법적 왕이라고 생각했고, 게달리야가 그 뒤를 이어 임명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시드키야나 게달리야가 바빌론에 의해 임명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주적 주권을 갖지 못한, 아니 오히려 주권을 외세에 양도함으로써 왕이 된 인물들이라는 혐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한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여호야킴 왕도 외세인 에집트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여호야킴이나 그의 아들 여호야긴의 정통성도 의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저자는 이 정파와는 대립적 입장에 있던 신명기 학파의 일원이다. 그러니 이들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달리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개혁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드키야처럼 별 성과 없는 통치자에 비해, 게달리야는 분명 뚜렷한 공적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텍스트가 게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여호야긴을 합법적 왕으로일 뿐 아니라 희망의 전거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족-국가’라는 코드가, 신명기 학파든 귀족당파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공지되고 있었던 전제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국가란 ‘다윗의 왕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다른 이가 왕권을 승계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재코드화인 것이다. 재코드화가 이루어지더라도 허용 가능한 코드화는 다윗의 혈통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훗날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노력도 이러한 유다인들의 이해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초역사적 상징성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 통치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실천을 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화된 정당성 메커니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유다인의 민족주의라는 늪을 헤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텍스트의 정황에 허우적거리며 야훼신앙의 의미를 재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텍스트가 사건을 읽고 있는 정황을 해체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게달리야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물론 영웅 만들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역할을 간소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텍스트의 의미화 전략을 밝혀냄으로써, 야훼신앙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의 시좌는 ‘민중의 눈’이다. 즉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데, 장애가 되었던 하나의 요소인 유다 민족주의를 거두어 냄으로써, 민중적 읽기 전략을 더욱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듯이, 성서 읽기 또한 시간의 대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텍스트 읽기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 시각을 민중의 눈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한, 모세사건이나 예수사건은 바로 그러한 눈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와 성서와의 대와가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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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예수, 민중의 상징.민중, 예수의 상징』

권진관 지음

동연 펴냄

출간일 : 2009-04-02
정   가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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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완성된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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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한사람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놓고도 정부는 “테러리스트다, 떼쓰는 폭도들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모함이라는 것을 너무 잘안다. 고 이상림 씨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계속 성경 필사를 하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렇다. 다른 희생자들도 장사를 하거나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민들이었다. 벌써 두 달 넘게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다. 얼마나 힘이든가? 그런데도 가족들은 이대로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누구보다도 강경하다. 그들은 분명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자기 부모들의 참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가족들이 장례를 미루며 투쟁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이기도 하지만 고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번 희생으로 나머지 재개발지구 세입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고인들의 희생을 모든 세입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지리한 싸움은 그 분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입자들이다. 그 지역은 상가라 대개 권리금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인테리어에도 적잖게 든 비용은 모두 무시된다. 단지 2천만원 정도의 이사비용만 지급된다. 그리고 가해지는 용역들의 무차별한 인간 모독과 폭력, 이런 것들이 세입자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가족들은 정부가 발표하는 터무니없는 모함을 딛고 자신들의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제거하신 제물이요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의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찾았듯이 예수의 제자들, 가까이서 따르던 갈릴리 민중, 여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덧 씌워진 죽음의 이유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중을 선동하는 폭도, 정치적 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왕, 로마의 정치범, 신성모독자, 성전난동자.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일 수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의 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찾아낸 의미는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신 분” 이었다.

예수께서 단번에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말을 한국교회는 주술적으로 이해한다. 마치 주문처럼 이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우리의 존재가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단번에 제물이 되신 예수의 신적 마술은 그 주문을 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컴퓨터에 걸려있는 비밀번호처럼 새 일을 불러들이는 주문으로 작용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드리대면 하늘에서 신비한 변화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천박함, 이런 맹랑함은 예수를 한낮 도깨비나 부뚜막 귀신 정도로 추락시킨다.

어떻게 한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도말할 수 있는가? 누가 반문할지 모른다. 왜 목사님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믿는 바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 당연한 믿음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하고는 상관없는 종교, 민중의 아픔과 무관한 종교, 한낮 종교로, 주술로,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고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취해있는 그 주술의 요소를 거두어 내야지만 신앙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걸인, 병자, 장애인, 이방인 차별로 한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나라,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나라, 그 꿈에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펼치기 전에 그분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죄 몫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와 자신들의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그 갭이야 말로 바로 ‘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분의 죽음이 단번에 모든 죄를 도말했다고 외치는 그 고백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야 예수의 십자가가 거룩한 죽음이 되겠는가?
 
죽음 자체는 말이 없다. 더구나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 어떤 메시지를 남길 여유가 없다. 그냥 억울함과 고통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군천사가 하늘 문을 열고 내려와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말없이 초라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제물이었다고 하는 고백은 무엇인가?

그가 살아계실 때는 “그가 하려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서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끝장나 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안에 새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죽음의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다. 그들은 단번에 모든 악의 세력을 묶고 승리하신 결과를 본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과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그 제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동일한 아픔이 있는 현장에서 예수의 몸을 찢고 그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아닐지 그 결과를 모르는 긴장된 제사는 아니다. 이미 단번에 결정적인 제사를 받으셨던 하나님의 판결이 선행된 제사일 뿐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는 거룩하지 않다. 그냥 평범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거룩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 그 죽음 안에 숨어있는 거룩한 뜻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치 아들, 딸의 구속을 통해 처음에는 망설이던 어머니들이 최고의 투사가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모든 인류가 가진 죄를 도말시키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 어디이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능동과 수동은 도치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힘입을 뿐이다. 신앙의 능동이 빠지면 한낮 주술이 되지만, 수동이 빠지면 그것은 단지 제 자랑일 뿐, 신앙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서는 단번에 완성된 제사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 결론 부분에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제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사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곧,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 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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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심장이 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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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원께서 연구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게 그 선물인데, 심장을 닮은 자작나무 조각입니다.
그분께서 선물하면서 하신 말씀이 "민중신학의 심장이 돼 주세요"였습니다.

심장은 여러 상징으로 사용되지요.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심장은 상징이기도 하고, 몸의 기관이기도 하지요. 저희에게 민중신학의 심장이 돼라는 말씀은, 단순히 상징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시대와 민중의 아픔을 심장으로 느끼고 그 아픔을 신학을 통해 이야기하라는, 그리고 그 아픈 민중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많이 응원하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가 잘못하거든 엄하게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죽은 나무심장이 아니라 펄떡펄떡 뛰는 산 심장이 되겠습니다.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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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리야의 꿈에서 위기를 보다
- 재앙을 넘어서는 길에 관한 신학적 역사적 상상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재앙

재앙에 관한 설(說)들이 난무했다. 쌀을 제외한 곡물자급률이 5%를 넘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서 국제곡물가격의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Agriculture+Inflation) 재앙설은 더 이상 남의 얘기일 수 없다. 환경에 관한 각종 재앙 시나리오들에 낯설어하는 이는 이젠 없을 정도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2008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상승하는 유가 소식을 접하면서 에너지 재앙설 또한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국제기축화폐라고 할 수 있는 달러화의 붕괴 가설에 관한 책 몇 권이 번역 출간되면서 그런 것도 치명적 재앙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에 난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가능성들과는 다소 다른 시나리오로 구성된 재앙이 우리는 사납게 덮쳐버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에서 시작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낳은 경제재앙. 이미 그 파괴력이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들에서 현실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우리의 존재 조건들을 무참히 짓밟아 버릴지,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한다.

많이 개선되긴 했어도 미국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여전히 큰 상황에서 미국발 재앙은 우리에게 남다른 위기로서 다가온다. 특히 가계부채가 무려 660조가 넘는 부채과다현상은 매우 치명적이다. 경기침체로 인한 채무불이행사태가 속출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가계수지가 적자인 가정이 거의 30%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상하향 분해 추세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특히 빈곤층의 크게 늘었으며, 상류층의 부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이 현저한데, 최근의 경기침체는 이러한 사정을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소득 양극화 문제는 최근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요소다.

한국의 MB 정부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감세와 규제완화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 종합부동산세의 사실상의 폐지 등, 그리고 수도권 규제완화,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금융ㆍ산업 분리의 폐지 등이 추진 중이다. 또한 공기업 민영화, 지상파방송의 민영화, 한ㆍ미 FTA 같은 고강도 세계화 정책 등에 대해서도 강력한 시행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박정희식 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를 결합한 위기대처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득양극화를 크게 심화시켰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들보다 훨씬 더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가운데 조세부담율이 가장 낮은 한국사회에서 감세정책을 펴고, 역시 가장 낮은 사회안전망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할 국가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이 위기요법이 초래할 계층분화의 방향이 어떨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설사 이러한 정책이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경기부양 효과가 있어 낮은 성장률의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도 성장 혜택의 분배를 공정하게 할 의지가 정부에게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미 불공정 게임룰이 제도화된 터에, 배분할 ‘파이’가 커지든 안든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양가적인 면이 있듯이 재앙 또한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평소라면 좀처럼 시행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개혁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감한 정책이 때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경우 당면한 재앙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징조가 되어버릴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MB 정부의 위기관리 전략은 심히 우려스럽다. 우리는 바로 이런 우울한 교훈을, 하여 우리를 비판적으로 점검할 안성마춤의 사례를 성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선택
   
그 때에 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들이 너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염병에 걸려 죽을 자는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을 자는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갈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네 가지로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들을 칼에 맞아 죽게 하며, 개가 그들을 뜯어먹게 하며, 공중의 새가 그들의 시체를 쪼아먹게 하며, 들짐승이 그들을 먹어 치우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서」 15장 1~3절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재앙 시나리오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것이다. 두 번의 침공(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 때; 주전 586년 시드기야 왕 때)으로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불타 사라졌고, 수많은 농촌마을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려 85%의 거주지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급부상한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한때 인구가 일만오천 명에 이르는, 요시아 왕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되었으나, 전란 후 오랫동안 그 십분의 일인 일천오백 명을 넘지 않는 소읍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농촌의 경작지들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유민이 되어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마을은 거의 비어버렸다. 유대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재앙이 기회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눈알이 뽑힌 채 바빌로니아 중원으로 압송되어 구금됨으로써(「열하」 25,7) 유다 왕국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물론 바빌로니아는 이 지역을 직할통치지역으로 삼지 않았다. 그보다는 대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토착인사를 통치자로 위임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보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정복지역에 대한 이런 방식의 체제재편을 선호하였다.

유대 지역의 통치자로 위임된 이는 ‘그달리야’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이라고 한다(「열하」 25,22). 사반은 요시아 개혁 당시 사관 등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고(「열하」 22,8),1) 그의 아들 그마리야와 손자 미가야는 반개혁의 시대인 여호야김 왕 때에 반왕당파인 개혁파의 주요 인사로, 종종 왕에 반하는 필화사건을 일으킨 급진적 인사인 예레미야를 음으로 양으로 비호하곤 했다(「예레」 36,11~20). 그리고 사반의 또 다른 아들이자 그달리야의 부친인 아히감 또한 개혁당파의 핵심인물이었다(「예레」 26,24). 요컨대 이 가문은 요시아 개혁을 지지하는 유력한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아 개혁은 왕당파와 민중세력(‘암하아레츠’)이 연대하여 귀족세력을 위축시키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그 이전까지 유다 왕국은 고대 팔레스티나에서 약소국으로 국가발전이 매우 더뎠던 나라다. 인구도 적었고 토양도 척박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왕권제로의 제도화도 뒤쳐진 후진국이었다. 오므리-아합 왕 치하의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국이 된 기원전 9세기 초 이후 왕권은 조금 더 발달하게 되지만 여전히 주변정세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후 왕당파와 귀족간의 본격적인 정쟁이 계속되었고, 약소국이 대개 그렇듯이 이 정쟁은 주변의 나라들이나 제국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힘의 균형이 깨지곤 했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이 궁중 암투로 살해되거나 감금되어 명목상의 왕위만을 유지하는 등,2) 왕권은 여전히 잘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열왕기」에는 이러한 정쟁 과정에 ‘암하아레츠’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있다.

동시대 문헌들의 용례에 따르면 이 용어는 비하적으로 표현되건 아니건 ‘농민 일반’을 개략적으로 지칭하고 있다.3) 한데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사용된 17회 중 식민지 시대를 다루는 2회4)를 제외한 15회가 유다 왕국의 정쟁과 관련된 텍스트에서 사용되고 있다.5) 다시 말하면 유다 왕국 역사와 관련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암하아레츠는, 무정형적인 농민 일반이 아니라, 정치세력화한 농민세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시아 왕을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는 농민세력을 가리킨다.  

요시아 왕은 이들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과감한 개혁정책을 편다. 농민의 몰락을 억제하고, 이미 몰락한 이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과감하게 시행된 것이다. 땅의 소유권을 옮기는 것에 대한 금령(「신명」19,14), 고리대금과 악랄한 부채 회수에 대한 금령(24,6‧10~13‧17), 정의로운 재판 강조(16,18~20), 뇌물수수 금령(16,18~20), 정량화된 도량형(25,13~16) 등이 이 개혁의 주요 내용들인 것이다. 이는 정치세력화한 농민세력을 가정할 때, 이들이 요시아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는 가정을 할 때 가장 타당하게 설명되는 조치들이다.

다시 그달리야로 돌아가자. 그는 이러한 민중적 개혁의 관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물이다. 통치자로 위임되자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빈민화된 주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식량을 배급해준다(「예레」 39,10; 40,10). 또한 그가 도읍으로 삼은 미스바는, 전란 중 파괴되지 않은 성읍으로, 바로 이러한 민중주의적 정책에 안성마춤인 도시다. 과거 지파동맹 시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성읍으로(「사사」 20,1), 그의 민중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줄 만한 전통이 살아있는 고도(古都)이다. 그리고 유다 왕국에서 그러한 민중적 전통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읍락인 아나돗 출신의 명망가 예레미야(「예레」 1,1) 또한 그달리야를 지지하고 나섰다(「예레」 40,6). 뿐만 아니라 세겜, 실로, 사마리아 같은 오래된 지파동맹의 전통을 간직한 또 다른 지역 출신 인사들도 그의 체제 속으로 속속 귀의하고 있었다(「예레」 41,5).

재앙을 맞아 모든 생산기반이 붕괴된 상황에 놓인 사회에서, 지도자 그달리야는 이렇게 대중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펴고자 했다. 엘리트집단을 강화함으로써 붕괴된 체제를 재건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중사회의 활력을 통해서 체제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꿈은, 그의 비전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구왕족 출신의 군부인사였던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그를 암살한 것이다(「열하」 25,25). 이스마엘이 보기에 그달리야의 꿈은 그토록 불온해보였던 모양이다.6)

지도자를 잃어버린 체제는 동시에 그 꿈도 잃어버렸다. 그달리야에게로 귀하한 구왕국의 귀족들은 그가 죽자 어찌할지 몰라 허둥댄다. 그들은 예언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도 그렇게 한 듯하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예레미야서」 43장 2절 하반부~3절

 이 텍스트는, 그달리야의 정책을 계승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갈등하고 있다. 하나는 ‘이집트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바로의 길’이다. 미스바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달리야의 비전이고 대중의 꿈이다. 대중과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이고, 함께 식탁을 나누는(「예레」 41,3) 평등주의 사회의 지향을 담고 있다. 반면, ‘이집트로의 길’은, 오래된 모세 설화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출애굽한 대중이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꿈으로 회귀하고픈 퇴행적 갈망을 상징한다. 바로 ‘풍요에 대한 노예의 꿈’이다. 주인들의 풍요로운 식탁을 꿈꾸며 자기들도 그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바로 ‘이집트로의 길’인 것이다. 또한 전자가 대중의 삶에서 시작하는 정치를 시사한다면, 후자는 누가 누리든 어떻게 나누어지든 풍요 그 자체에 주목하는 정치를 암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스바와 이집트를 지향하는 두 길, 혹은 그달리야와 이스마엘로 나뉘는 두 길은 역사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상징이다. 어떤 정치가 진정 야훼의 길이며, 어떤 정치가 진정 야훼의 백성이 꿈꾸어야 할 길인가. 바로 이 선택 앞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결국 그달리야가 죽은 이후, 예레미야 같은 이의 간곡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남은 지도자들은 예레미야 등을 볼모로 하여 이집트로 간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이 길이 바빌로니아의 보복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가 재앙을 상징한다면, 바로 재앙을 벗어나는 길은 과거 회귀적인 퇴행적 꿈, 풍요주의/발전주의를 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얘기다. 그 길로 예레미야를, 대중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3. 위기를 보는 시선


재앙에 대한 MB 정부의 대응책은 어느 길을 택하고 있는가. 어느 길로 시민을 인도하려 하는가. 지난 20년간의 민주주의적 기조를 뒤흔들면서까지 강권을 휘두르며 대중을 이끌려는 그 길은 어디인가. 그토록 절박하게 그들을 부르는 그들 식의 유토피아는 어디인가. ‘이집트’인가 ‘미스바’인가.

내가 만난 한 경제학자와 또 한 명의 목사는 내게, 나의 이야기 라인을 따라 선택의 문제를 고려한다 해도 ‘미스바로의 길’은 단지 ‘도덕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고를 하였다. ‘미스바로의 길’이란 결코 현실 속에서 재앙 타개책으로 검증되지 않은 방식에 불과하다고. 반면 IMF 식의 구조조정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나 박정희 식의 성장주의는 위기를 해소한 방식임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MB식 성장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표준은 재앙을 대처하는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한데 과연 그런가. 1990년의 ‘워싱턴 컨센서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의 정치학, 그 시장근본주의적인 정치경제학은 국제무역을 자유화하고, 이를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금융의 국제적 이동의 자유를 절대화하고, 공공적인 것을 민영화하는 등의 기조에 따라 세계은행(WB)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는 국가들의 개발정책을 강제하였다. 그런데 이런 개발정책은 과연 재앙에 대처하는 국제표준이라고 해도 무관한가.

1990년대 말 지구를 휩쓴, 특히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을 휩쓴 외환위기는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국제적 실험의 장이었다. 그리고 세계은행은 1999년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한다.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할 만한 이 모델의 기조는 시장근본주의적 개발정책은 세계의 빈곤화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또 다른 지구적 위기를, 재앙 위의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하여 시민사회의 빈곤화를 억제하고 빈곤화된 대중의 회생 프로그램을 통해 저들을 다시 시장으로 진입하게 하는 방식의 새로운 개발모델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세계은행그룹 내부에서 제시된 것이다. 2006년 노벨상을 수상한 그라민 은행이 거둔 마이크로크래디트 운동의 성과는 전체 운용기금의 97%를 제공한 국제 금융기구 등의 개발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세계 각 곳의 시장주의자들과 거대자본들이 운용하는 연구기관들은 막대한 기금을 투자하여 빈곤화된 대중의 시장진입을 위한 프로그램의 가능성에 대해 조사 연구를 시행하였다. 요컨대 IMF식의 신자유주의적 표준은 더 이상 국제표준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작은자들의 회생프로그램이 오늘의 시장이 선호하는 표준적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미스바와 이집트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의 정부를 돌아보고, 그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묻는 자리로 돌아가자. 나의 관심은 시장이 선호하는 선택의 적실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문제의식을 낭만적 도덕성으로 폄하하는 신자유주의적 독선에 대해 반론을 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관심은 오늘의 재앙을 보면서, 재앙 위의 재앙을 막는 선택에 관한 신학적 판단 혹은 해석에 있다. 나는 그 해석의 준거를 말하기 위해 요시아 개혁을 경유해서 미완으로 끝난 그달이야의 비전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쳤다. 미스바의 길은 요시아 개혁과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달리야를 통해 정책적 실험에 돌입한 방식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빈민의 회생에서 몰락한 국가의 회생을 꿈꾸는 한 지도자의 비전을 통해 역사화된 것이다.

이스마엘의 암살로 이 실험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예레미야와 대중을 강제로 이끌고 이집트로 갔다. 그것이 결국 재앙 위의 재앙이 되었는지, 역사학은 그것을 판단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학은 그것에 판단을 내린다. 그것은 야훼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를 통한 그달리야 에피소드에서 ‘야훼의 길’은 명백하게 미스바를 향하라고 권고한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빈민의 희망은 곧 야훼의 희망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주]

1) 최근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충실한 학자들은 유다 왕국에서 처음으로 왕실의 역사가 기록되던 시기를 히스기야 왕 시절이거나 요시아 왕 시절로 본다. 바로 그 시기에 사관, 즉 왕실 이데올로기를 펴는 역사서술 책임자의 위상은 대단히 중차대하였을 것이다.

2) 아하시야 왕(「열하」 9,27)은 이스라엘 왕국에서 벌어진 예후 쿠데타 때에 살해되었고, 그의 부인이자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던 오므리의 딸인 아달랴가 남편 아하시야 사후 권력을 장악했으나 궁중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살해된다(11,16). 이 쿠데타로 즉위한 요아스도 피살되었으며(12,20), 그의 아들 아마샤도 정변으로 희생되었다(14,19). 이렇게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국이 되면서 발달된 왕권제에 관한 관념이 도입되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국제관계 망 속에 흡수되면서 연속된 네 명의 통치자가 정변으로 죽임을 당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또 그를 승계한 아사랴(웃시야)는 「역대기하」 26장 19절에 의하면, 사제들과의 갈등 이후 문둥병자가 되어 평생을 밀실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궁중암투의 상황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까지 네 명의 통치자는 명껏 왕으로 재임하였지만, 그 이후인 아몬부터 마지막 시드기야까지 6명의 왕중, 여호야김을 제외한 모든 왕이 정변으로 죽거나 전사하거나 제국통치자에 의해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요컨대 선진적 왕권제가 도입된 아하시야부터 마지막 시드기야까지 15명의 왕 중, 네 명을 제외한 모든 통치자가 불의(不意)의 최후를 맞았다. 

3) 무지랑이 농촌 대중을 가리키거나, 지주 혹은 씨족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을 가리킨다.

4) 「느헤」 7,6; 「에스겔」 12,19.

5) 「열하」 11,14・18・19・20; 21,20・24; 23,30; 24,14; 「역하」 23,13・20・21; 33,25; 36,1; 「예레」 11,9; 52,25.

6) 여기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하여 부연하면, 그달리야는 바벨로니아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이지만 그렇다고 그는 식민주의자이고, 이스마엘은 자주파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유다 왕국이 선진화되면서, 왕실은 끊임없이 국제관계 속에서 체제를 해석하면서 발전하였다. 왕국 말기만 하더라도, 정부 내에는 친 아시리아-친 이집트 노선의 세력과 친 바벨로니아 노선의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정쟁을 벌였다. 말했듯이 그달리야는 친 바빌로니아 세력이었는데, 아마도 이스마엘은 친 에집트 세력인 듯하다. 한편 고대의 제국들은 점령지역에 봉신국 지도자를 위임했지만, 이들 봉신국 지도자들은 제국에 무조건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마큼 제국의 영향력은 촘촘하지 못했다. 사실상 봉신국 왕들은 제국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영토에 대한 거의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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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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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달훈
    2013.09.04 17:0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학과 역사의 끝없는 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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