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를 묻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2014년 4월 16일 그 날부터 사람들은 집에 있거나 길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하거나 모두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나라가 아니야!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이 나라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작년 4월 13일 매우 분명한 신호를 보았다.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노라는 결연함의 신호였다. 지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넉 달도 넘게 촛불은 차가운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고, 식은 가슴에 뜨거운 생명의 율동을 되살려냈다.


    신영복 선생은 주역(周易)에 있는 ‘석과불식’(不食)을 풀이하면서, 겨울 찬바람을 견뎌낸 씨과실(碩果)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나무로 숲으로 키워내는 일이 석과불식의 정신이라 했다. 바로 이 희망을 위해 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어 자신의 뿌리를 두텁게 덥고, 오직 뿌리만은 살려 내겠다는 일념으로 벌거벗은 나목으로 겨울 추위에 맞선다고 했다.


    촛불 시민혁명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은 헌법 1조가 살아 있음을,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확인해준 사건이었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사람이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케 해준 사건이었다. 그 점에서 광장의 촛불은 가장 평화롭고 명예로운 혁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탄핵의 성취만으로는 결코 다 설명될 수 없는, 오래 묵은 깊고도 간절한 희망의 계시였다. 지난 넉 달 반의 과정을 생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 가릴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어내고, 오직 뿌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북풍 한설 앞에 맨 몸으로 선 겨울 나무의 모습이 촛불 가운데 있었다. 인간과 생명의 존엄과 가치라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의 바탕을 다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은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가 있기 이전부터 참사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최순실과 박근혜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이 있기 이전부터 공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은 우리 눈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던 일이 아닌가? 저성장, 고용둔화, 노령화, 대기업 위주의 독식체제가 유지되면 청년층의 중산층 진입 경로가 차단되고, 양극화가 고착화 되고 저변도 넓어지게 되어, 그 결과 각종 범죄와 자살, 사회불신의 고조, 잃을 게 없는 청장년층의 묻지마 범죄 급증 등 사회병리 현상의 확산과 악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과 경고는 하루 이틀 들어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절제한 사유화와 독점의 논리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점령해 들어와 있었고, 그 깊이에서 삶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이처럼 권력과 부의 사유화와 독점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체계, 문화상징들의 체계, 그리고 개념들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 아닌가?


    촛불은 결코 최순실의 구속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발표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정작 일어서 뛰거나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하고 있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걸어온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이 보였고, 앞으로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할 긴 여정이 보이는 듯 했다. 아직은 가야 할 먼 길이 있기에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음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탄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향한 출발점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같았다.


    보수 언론은 지금 조급하다. 최순실과 박근혜로 꼬리짜르기 하기 위해서, 촛불을 울타리로 둘러치려고 할 것이다. 촛불은 탄핵을 위한 것이었고, 탄핵은 미르.K스포츠 두 재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뿐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그 보수언론과 박근혜 정부가 했던 대부분의 일은 지극히 정당하고,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모두 정당했던 것이고, 오직 미르.K스포츠만 문제라는 사실을 헌법재판소가 명백히 판단해 놓았다고 강변할 것이다. 이렇게 촛불, 미르.K스포츠 재단 운영 문제, 최순실구속 박근혜 탄핵으로 문제 해결, 이라는 폐쇄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급하게 서두르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즐겨 사용해 왔던 안보프레임을 재가동 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통합이 적폐청산을 압도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 통합의 이야기는 박근혜의 사면이야기로 이미 옮겨가고 있다. 정말로 통합이 사면 논의로 옮겨 간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한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의 생각과 만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달 반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조급하게 울타리를 쳤다 해도, 그 안에 갇히는 촛불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때를 분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순간의 의미를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읽어내려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16: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시대를 읽는 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때를 묻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가치와 질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질서와 가치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그것들에 대항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실천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소명의 문제다. 촛불혁명은 시대의 실상과 우리의 소명을 한꺼번에 드러내 준 사건이었을지 모르겠다. 촛불이 드러낸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향한 부름에 기뻐 응답하는 삶이 되고, 신학적 실천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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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허락되지 않은 삶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진실이 갖는 허무함


    그렇다. 실로 진심으로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밝혀졌다. ‘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다. 7시간 중 90분의 행동이 나왔고 나머지 시간을 캐는 건 의미 없다. 이미 90분 머리한 게 이미 7시간을 대표하고 있다. 나머지 5시간 반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그냥 ‘그’는 머리를 하기 전에 전날 고질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수면제를 먹었거나 평소 즐겨하던 약물을 맞고 그 기운에 취해서 자고 있었을테다. 그리고 일어나서 머리하고 옷 입고 중대본으로 나갔다. 돌아와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던 일과를 보낸 기념으로 ‘보약’인 밥을 한그릇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7시간 동안 취해 있었던 주사가 마늘 주사든 태반 주사든 프로포폴이든 수면제든 마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듯 싶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머리하기 전에는 잤고, 머리하고 난 뒤에는 옷 챙기고 메이크업했다. 상의는 정해졌으니 바지 고르고 화장하고 나간 것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만진 것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다. 옆에서 참모들이 너무 평소대로 화려한 “육여사 올림머리” 하고 가면 좀 그래 보이니까 적당한 연출을 하자는 것 뿐이었다. (평소 참모들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 그는 청와대의 해명 그대로였다.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를 "받.고.만 "있었다. 보고를 받는 순간의 그의 대사를 예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 그런가요. 아이들이 빠졌군요. 하던 대로 조치하세요.” 


<그렇다, 그는 졸려 보인다>


   멍했다. 자다 일어나서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말한 걸 번역하자면 ‘나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변형이다. 즉, 사고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보고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치를 해야할 순간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얌전한' 광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우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정윤회 문건 수사를 막아야 했고,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워야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매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이라고. 중대본에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는 손가락 물어 뜯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광인’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통영함과 미군 함대의 출동을 막았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수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매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그러한 ‘얌전한’ 광기와 더불어 참모들도 그의 광기와 그닥 다르지 않았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윗선에서 아무 지시가 없는데 구조한답시고 움직였다가 뭔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내각과 관료들이 출동을 막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기춘이 바로 ‘그’ 옆에서 이 모든 정황들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시대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된 이가 김기춘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부터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이가 김기춘이다. 자기 죽은 아들을 팔고서도 결코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괴수가 김기춘이다. 그런 이가 ‘그’ 우편에서 호위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참모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그렇게 아무 일은 없었다. 그들은 보고했고, 그는 보고를 받았다. 점심도 먹었고, 저녁도 먹었다. 머리도 했고, 자기 리듬에 따라 출근한다. 급박한 상황은 바닷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갇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몇몇에게만 급박했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심기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좋겠다. 삼성의 이재용을 비롯한 9명의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에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장면 말이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더 잘하겠다’를 마치 ‘자동응답기’마냥 되풀이하는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질책 아닌 질책을 받는데 괴롭지는 않을까, 자기에게 추궁을 저리도 하는데 심란한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그 와중에 건조한 입술에 립밤을 바른다>


    우리가 글의 앞에서 ‘그’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생물의 눈빛은 매우 일관되다. 삼성의 전(또는 현) 주인 이건희를 비롯하여 그 일가와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최순실을 비롯하여 그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기계적이고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닮아 있다. 깜빡임도 별로 없고, 사람의 희로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일단 ‘죄송하다’고만 선수를 친다. 묘하게도 이 생물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증인 장시호에게 안민석 의원이 ‘나 밉죠?’라고 물어보았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김기춘의 ‘신중한’ “모릅니다.”, “부덕의 소치입니다”와는 대비된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질게 단련이 되어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는 요령에 도가 텄다. ‘대의’라는 큰 그림에는 절대적으로 소인배처럼 행동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간신 눈빛을 하다가도 바로 그 즉자적인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고(故) 황유미씨의 500만원 이야기에는 꿈쩍 않다가도 자기 상속세 이야기에서는 동공이 지진 나는 게 그런 생물들의 특징이다. 후일에 벌어질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과 '아버지'를 비롯한 후견인이 있으니 자기는 그 상황만을 넘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 사람에게나 한껏 짜증을 내고도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의 눈만 속이고 형제들 몇몇만 제거하면 8조의 재산이 내 통장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쉽고 간편한 ‘e-편한세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패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거대한 실패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먹이를 포착하는 맹수와 같은 살기가 있지만, 그 외의 상황 자체에 대처하는 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생존과 관련하여 특화된 몇몇 상황에만 기가 막힌 대처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멍한 채로 구명조끼를 이야기할 수 있고, 바닷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사를 맞을 수 있고 엄중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를 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실제로 거대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대타자’라고 명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는 실로 막강한 권력과 막강한 대통령과 재벌 총수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남한 사회의 영웅이었고, 말 한 마디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삿일이었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다. 부하의 배신에 스러졌지만, 전쟁의 잿더미에서 국가를 일으킨 불멸의 영웅 아니던가.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는 20세기 말과 21세기 들어 휘몰아친 경제의 흥망성쇠간에 꿋꿋이 살아남은 삼성 재벌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소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선의 화신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 또한 경쟁자들을 뚫고 아버지의 권력과 부의 옷을 입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겠는가. 한 번의 실패는 곧 낭떠러지이며, 죽음이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실패 그 자체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쳐야만 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고 우리는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그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통의 멘탈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재용 또한 지금의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를 제쳐야 했고, 수많은 외척들과 싸워야만 했다. 빈 틈은 죽음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눈물 흘릴만한 '시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에 종국적으로 붙여진 이름표는 ‘살인마’다. 박근혜 살인마는 304명을 죽이고, 5천만 대한민국 시민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인류의 존엄을 모욕했다. 이재용 살인마는 고(故) 황유미씨를 죽이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을 짓밟았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돈 귀신을 심었다.


우리 아이들을 실패하게 하라      

 

    우리는 촛불을 오랫동안 들었고, 국회에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앞으로도 먼 길이 남아 있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따질 것은 따지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실패를 가르쳐줄 때다. 넘어지기를 가르치고, 무너지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넘어지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것을 아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세밀한 셋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넘어져도 괜찮다, 잃을 것은 강냉이 몇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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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촛불집회는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큰 맘 먹고 아이들과 집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촛불집회에 가보고 싶다는 여섯 살 첫째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하긴 했는데, 갑자기 남편 일정에 변동이 생겨 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로 광화문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승하기 직전 잠이든 두 녀석들. 첫째는 겨우 깨워 손을 잡고, 깊이 잠든 십팔 킬로그램의 둘째는 어깨에 둘러업고 환승을 합니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고,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내가 이러려고 집회가나 싶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남편과 일행을 만나 서대문에서 광화문,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 걷고 다시 광화문으로 청계광장으로 두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큰 아이는 곧잘 걸었지만, 낯선 분위기 때문인지 둘째 아이는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런 아이들을 안고 업고 목마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 아이들이 집회에 나온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는 어른들이 초콜릿, 사탕, 귤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LED 촛불을 얻었는데, 그걸 본 첫째 녀석이 자기는 왜 촛불이 없냐고, 촛불집회인데 촛불은 언제 주냐고 혼자만의 시위를 시작합니다. 아빠를 이리저리 끌고 동동거리며 '나에게도 촛불을 달라'는 촛불시위를 시작한 거죠. 한참을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지친 남편은 결국 광화문에서 천원을 주고 촛불을 삽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형님의 진짜 촛불이 갖고 싶은 아우가 또 울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집회가 다 이런 거 아니겠냐며 저희 부부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어루만지며 따끈한 음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율아, 오늘 촛불집회 어땠어?" 아이는 언 몸이 녹는 중인지 그저 멍하니 아무 대답도 안합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집회가 어땠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는 그저 촛불을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기대보다 싱거운 반응에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큰 아이의 친구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노는 아이들이 조용하다 싶더니, 태극기를 그려 나와서는 흔들며“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며 밥상 주변을 뛰며 돕니다. 한창 어수선한 세상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른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른들이 집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집회에서 본 건 있어서 참견하려면 뭐라도 적어 들고 해야겠는데 두 녀석 모두 까막눈이라 태극기라도 들고 나가보자 했나봅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물으니, 박근혜가 누군지도 ‘하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답니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뛰느라 숨이 찬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묻는 말에 “몰라,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그린 태극기를 다시 봅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합니다만 제법 건곤감리도 흉내 낸 모양입니다.(어쩌면 순서가 뒤바뀐 모양이 꼭 지금의 우리나라 같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흔적입니다. 집회 때 어른들의 모습도 그렇게 살폈겠지요. 어른들이 무엇을 외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태극기의 색과 모양을 새기듯 마음에 새겼을 겁니다. 광장 곳곳에 나부꼈던 태극기. 태극기가 우리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여섯 살 꼬마도 압니다. 엄마, 아빠가, 그리고 많은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고 짐작해주길 바랄뿐입니다. 

        어른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사태를 아이에게 나쁜 임금의 허튼 짓쯤으로 설명하기엔 저도 이제 더 이상 화가 나서 못 하겠습니다. 겨울 추위 속에 더 이상 많은 사람 고생 않게 하루 빨리 정신 차리고 방 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세월호 7시간! 박근혜를 구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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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각주:1]


 

권오윤[각주:2]



       현실 사회에서 범죄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금기시 하는 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범죄자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이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케이퍼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값진 물건을 절도하거나 현금성 자산을 강탈하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마치 자기가 그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스릴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 즉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엇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대결을 펼치는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요.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동일시 할 관객은 거의 없을 테지만, 강간범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여성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호감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갈등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흥미와 집중도를 높여 줍니다. 이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런 식의 양가 감정을 잘 활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확보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과가 화려한 형 태너(벤 포스터)와 차분한 성격의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서부 텍사스의 미들랜드 은행 지점에 연쇄적으로 침입해 현금을 강탈합니다. 이 은행에 저당 잡힌 가족의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맡은 베테랑 수사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이들의 범죄 수법을 간파하고 곧바로 추적에 나섭니다.

       황량한 텍사스를 무대로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냉혹한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 형제의 감정과 상황을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주력합니다.


       벤 포스터와 크리스 파인의 앙상블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그런 부분들입니다. 두 배우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말썽꾸러기 형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냉정한 성격의 동생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진짜 형제 간에 있을 법한 감정의 교류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은 이 어설픈 무법자 형제들이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은퇴를 앞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는 보수적인 텍사스 남자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늙은 수탉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하면서 현실감을 높여 줍니다. 베테랑 특유의 직감과 혜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그의 존재감은 주인공 형제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면서 극에 스릴을 더하지요.

      <영 아담>(2003), <할람 포>(2007)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영국 감독 데이빗 맥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됐던 <스타드 업>(2013)으로 상업적인 아이템에도 자신의 연출력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끌어 올려 결말까지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줬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각본으로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죄 행위와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재현합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 모두 텍사스 주의 법 집행관인 ‘텍사스 레인저’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초반부는 다소 심심하지만, 형제의 진짜 동기가 제시된 이후의 전개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세련되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돋보이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는 ’안빈낙도’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으로 칭송받는 공자의 제자 안회는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가 불과 서른 한 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안 되어 늘 쪼들리는 사람에게 ‘도’를 논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 속의 형제는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 은행 강도를 저지릅니다. ‘빈곤은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데, 그걸 내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주인공 토비의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과 기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빈곤과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개개인이 자력 구제 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냥 저절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용인해 온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멋대로 사회의 룰을 바꾸려 한 사람들과, 자기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빌붙고 떡고물을 얻어 먹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썩은 고름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다수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혜실 게이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지옥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벌판에 석유 시추기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텍사스의 풍경이 바로 그런 세상의 미래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9일자 기사 <빈곤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8964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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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근본원인은 아직도 얼굴을 감추고 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뉴스가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막장드라마와 리얼리즘의 간격이 일순간 무너진다. 한 두 번만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또 마지막 결론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개는 그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측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막장 드라마다. 뉴스를 보는 것인지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이미 막장 드라마 같은 뉴스에 충분히 중독되어 버린듯하다.  


    그리고 깊은 의심이 생긴다.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가 사실로 드러날 때 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막장드라마를 이해하는 상식이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인가? 왜 묻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까? 막장드라마가 리얼리즘이 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럽다. 최대한 앵글을 좁혀 최순실이라는 막장드라마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아니면 최태민을 연결고리로 해서 박근혜와 최순실이 맺고 있는 관계구도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거나, 그와 같은 초점의 집중과 시계의 한정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과 목소리와 행동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 의심스럽다. 


    어쩌면 “집단 유체이탈 국가”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이 국정농단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니 그들의 국정 농단에 충분히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아무도 말이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호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졌던 정치인들, 박근혜 개인에게 권위의 휘광을 둘러 보수와 애국민족정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온 언론인들, 감시와 사정의 책임을 버리고 박근혜 권력과 재벌의 시녀가 되어 온 판.검사들, 자존심도 책임감도 없는 관료들, 이들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두 재단에 돈을 기부한 기업관계자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들은 어둔 밤 길가다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복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여기며 노골적으로 이념과 색깔 놀이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온 기독교 교계가 이제 와서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가짜 목사라고 하면서 일종의 선 긋기를 하고, 자신의 흑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다. 사실은 이들,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관료, 종교인, 재벌들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의 엄청난 혜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아마도 최순실 자신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 개인이나 기업이나 집단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 의심스러운 상황전개는 이미 예정된 어떤 결말을 향해서 작동중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관이 원하는 완벽한 범죄 서사를 다 구성해 주고, 또 범인에 대한 분명한 논리적.서사적 근거를 다 제공해 주고,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와 사라지는 진짜 범인. 대표적인 반전영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의 이야기다. 우리들에게 그럴듯한 원인과 결과의 서사를 제공하고, 그래서 처벌하거나 응징해야 할 범인을 정해 주고는, 진짜 원인은 슬그머니 얼굴을 감춰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원인을 교묘히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을 가능하게 한 그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돌려 놓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분노가 아직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구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한 깊은 탐색이 진행되지 못하고,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다면, 새로운 비젼 혹은 새로운 대안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결국 분노가 창조적 저항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향한 희망을 만들지 못한다면 시민사회와 대중은 다시 현실과 타협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지금 여기서 현실이 되고 있고, 미래가 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마찬가지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에 그 사태의 뿌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면 또 다시 미래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87년 이후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는 성취감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는 턱없이 부족했고, 오히려 기성의 보수적 가치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박정희 신화에 기초한 보수정권 재창출의 명분을 제공했고,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은 그 박정희 신화 혹은 신드롬 안에서 풍부하게 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난 괴물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앞으로도 배불리 먹여줄 것이라는 신화다. 배불리 먹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기에 유신체제도 정당했다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다. 말하자면 배를 채우고 채워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권력자에게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포기하거나 양도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화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였다. 예수는 배불리 먹여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무리를 냉정히 뿌리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셨다. 가난하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 특정한 사람들만 배불리 먹여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떻게 먹느냐에 딸린 문제, 곧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문제다. 예수는 먹여주는 것을 담보로 자신에게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미래, 곧 먹고 사는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요구하셨다. 


    아마도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박정희 신드롬의 흉측한 속내는 박근혜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도 명운을 다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 또 어떤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도 겉옷만 바꾸고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박근혜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 신드롬을 지키기 위해서 박근혜를 버리는 수순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방어 프레임에 걸려 다시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만들지 않으려면,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근본뿌리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세와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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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에 대해

: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 ( Reinhold Niebuhr)는 중앙으로 집중된 힘은 쉽게 타락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 권력은 다양한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사회는 윤리적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정치적 이익 집단들이 사용하는 힘을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버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련의 중앙통제식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삼권분립의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며, 대통령이나 어느 이익집단이 정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미국의 실용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주들과 임금 협상, 자신들의 권리 등을 논의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에 반해, 니버에 의하면, 소련의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이 힘을 견제할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 남용이 쉽게 이루어진다. 중앙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반 민중들이다. 그러므로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익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강대국들 또는 거대 사회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보다는 민중들이 힘을 되찾아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신학자들과 제3세계 중심으로 국제 정치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탈식민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앙권력형 정치구조가 억압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반민주적이란 니버의 주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덧붙여,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약자의 폭력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니버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급진적인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20세기 중반의 기독교 윤리학자 니버를 떠올리게 되었다. 니버가 활동하던 1930~50년대는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세계 대공항과 두번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죄성을 뼈져리게 느끼고, 노동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당시의 노동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힘은,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 노동자들와 민중의 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가 주장하는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자본가들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노동자들와 일반 시민들에게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은 라인홀드 니버가 끔찍해한 자본가들을 위한 미국, 책임을 회피하는 미국 고립주의, 그리고 미국 패권주의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미국의 모습도 문제지만, 현재 한국에서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니버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이다. 니버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정치 권력이 한 개인과 정당에 집중되는 것은 견제하고 두려워 하면서, ‘자본’은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보았다. 자본은 정치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권력형 비리는 자신들이 가진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재하고, 그 부를 사용하여 다시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한국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시국 선언과 광화문 광장을 밝히는 시민들의 촛불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유화한 권력이 실제로는 한국 민중들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지금의 대중 시위는 니버가 이야기 한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민중들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였던 힘을 되찾아 와서,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혁명의 몸짓이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의 죄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니버는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 이익 추구는 결코 윤리적 중립 상태로 존재할 수 가 없다. 이익 추구가 극대화 되면, 인간은 쉽게 이기적이 되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은 도덕적 양심이 있어서, 자비심, 동정심, 이해심 등의 감정을 통해,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이나 국가는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타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 가능한 방법은 힘의 균형을 통하여, 한 집단 또는 한 국가가 이익 추구를 위하여 다른 집단이나 다른 국가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여성 신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우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특히 여성)은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관계성을 통해서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이기적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이란 존재 전체를 규정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 집단 또는 국가가 그 집단과 국가 전체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국가의 이익이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동일시 되는 것은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국가의 이익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생각들—비록 그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끊임 없는 자기 반성, 윤리적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간과될 수 없다. 어떻게 주가 조작과 유령회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이 이타심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록 그 사람이 일요일 마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으로 봉사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일생을 공주처럼 떠받들여 살면서, 남에게 섬김만을 받고 그 섬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봉사와 희생정신을 찾고,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아무리 국가 구조가 삼권 분립과 권력의 분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일반 국민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 한다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도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즉 국가나 특정 집단이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집단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타집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버는 종교가 정치를 해석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치적 혼란과 윤리적 혼란을 일으킨다고 했다. 정치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할 때,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미국 패권주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억압하거나, 정치인들을 무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치 세력과 떨어져서, 비판적 관찰자의 입장을 갖는 것이 세상의 고통을 훨씬 더 덜어주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설명하려는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민중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세계 민중들은 도덕적으로 흠없는 정치자들을 원하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를 현실적으로 기대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쓰지 않는 것은 도덕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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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뜻


박정상

(IT 관련 직장인, 아파트 동대표, 한백교회 교인)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일 매일 최순실 비선 실세가 대한민국의 모든 화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에 나올 듯한 사실들이 밝혀 지며,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공주가 사는 세상에 자의든 타의든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식탁 위에 다양한 가십거리가 되어 오르내리는 사실에 씁쓸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의 51.6%가 뽑은 대통령, 가까이는 박정희/육영수 초상화 핸드폰 고리를 달고 다니시는 부모님, 박근혜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현하신 친지 분들, 대구가 고향인 외가 친지들...  박근혜를 지지한 이분들에게만 원망과 비난의 화살을 던질 수 있을까요? 나는 48.4프로 편에 있었기에 오늘의 사태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제가 태어난 1979년은 박정희 독재자가 그리고 2016년 그의 딸, 박근혜 불통령과 한 시대를 살았던 이 역사의 현장이 마치 운명의 장난인 듯 싶습니다.


  뒤돌아보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까지 반세기 동안 존경할 만한 대통령이 손에 꼽을 정도 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는 건지..


  2008년 한미 FTA로 촉발된 촛불집회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순신 장군이 내려다 보는 곳, 백성들이 올바르게 살려면 왕과 관료들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린 세종대왕 앉아있는 그 곳, 2016년 11월 5일 어제입니다. 아이러니한 그 곳, 광화문 광장에 다시 한번 성난 촛불 20만의 민심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고사리 손, 갈라진 손 가리지 않고 들려진 촛불 하나하나는 이내 거대한 물결로 변해 청계천과 광화문을 에워쌌습니다.    


    어제 그 시간 저는 아파트 내 작은 도서관 개관식을 진행하느라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가지 못했습니다. 지난 한달동안 많은 시간을 거기에 할애했고, 아파트 내 첫 공동체 행사이었기에 그만큼 준비도 많이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도서관은 주로 이용하게 될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바른 역사의식의 싹을 틔우는 곳입니다. 때문에 비록 저는 광화문 그 역사의 자리에 있지 못했지만, 광화문에 모인 그분들과 함께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이 탄이, 우리 아이들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대통령, 비정상적인 세상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자그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정정당당 경쟁이 아닌 빽을 통해 뒷문으로 들어가는 세상, 

 같은 일을 하지만 비정규이라 당연히 차별받아도 되는 세상, 

 시민을 죽여놓고 유족에게 그 원인을 넘겨도 분노하지 않는 세상,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수장되어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상, 

 독재자의 자녀가 다시 독재하는 당연한 세상, 

 비정상의 정상화를 박근혜 대통령이 외치는 세상  


  이렇게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순수, 본심,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제가 어제 도서관 개관식 축시로 낭송했던 워즈워드 시의 무지개를 읽으며 마치겠습니다.  



무지개                             

워즈 워드 


 하늘에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나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아니면 차라리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건대 내 인생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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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취지_

18대 대선 이전의 박근혜는 ‘스타 정치인’, ‘선거의 여왕’, ‘독보적인 대통령 후보’라는 타이틀을 교체해 온 노련한 정치인이다. 여성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정치적 기반을 넓게 구축한 그는, 여성정치를 기획하는 여성엘리트들에게는, 여성정치세력화의 디딤돌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 늘 의문거리였다. 설령 여성에게 디딤돌이 된다 할지라도 그와 연대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성엘리트 진영 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의 과거사 이력 때문이다. 박근혜에게 ‘박정희의 딸’ 혹은 ‘유신의 조력자’라는 표상은 그의 정치 입문(1998)을 도운 ‘날개’였지만, 대선(2012)에 도전하는 그에게는 절대 풀릴 것 같지 않은 ‘족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족쇄에서 빠져나와 그는 ‘여성’대통령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누가 그에게 여성대표성의 날개를 달아주었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 물음은 여성정치세력화를 추진하던 여성들이 지난 10년 동안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여부를 두고 벌인 논쟁을 규명하는 작업과 맞닿아있다.
-2002년에 느닷없이 시작된 박근혜 지지론과 박근혜 불가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형성된 박근혜의 이미지와 이 논쟁이 한국의 여성정치 담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를 다룬다.
- 18대 대선 당시 보수와 진보 진영의 논객들이 어떠한 논리로 박근혜에게 여성대표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는지를 밝힌다. 특히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과 박근혜의 여성기호를 둘러싼 성(sex/gender)논쟁을 조망하면서 정권획득을 욕망하는 남성들과 여성정치를 기획하는 여성엘리트들이 박근혜의 여성기표를 각각 어떤 방식으로 담론화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논쟁이 여성정치 담론의 공간에 미친 효과는 무엇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 여성대통령 시대의 여성정치세력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여성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한국교회의 여성주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살펴본다.  
 

발표자_ 이숙진 (성공회대 연구교수)

일시_2013.5.1 (수) 오후 7:30~9:30

장소_ 안병무홀(한백교회당)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문의_ 02-363-9190,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3era@daum.net
참가비_ 3천원(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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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내재화, 그 순박한 열정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40년쯤 전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유다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각주: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중모반까지 일어났다.[각주:2] 영토는 예루살렘과 그 남쪽 일부만 남았고, 국론은 분열될 대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결정을 내린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이다. 도성 남서쪽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의 성소에서 아들을 불태우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Ahaz the King of Judah" by Otto Elliger (18c 초) 아하스 왕은 재물로 불타고 있는 아들을 보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시리아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쳐들어와 다마스커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국도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유다국 백성에게 아하스의 피눈물 흘리는 제사를 야훼께서 들어준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제 유다국은 전례 없는 초고속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침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대거 유민들이 남하한 결과, 산지인데다 척박하여 인구가 적었던 유다국 영토에 새로운 마을들이 속속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백 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도성인 예루살렘의 크기도 15배 이상 늘어났으며, 도성의 인구도 그만큼 증가했다. 하여 이들이 바친 공납물로 왕실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고, 유다국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무력화된 블레셋 영토였던 서부 평야지대로 영토가 확장되어 식량생산이 비약적으로 불어났고, 소읍이던 라기스 성은 예루살렘에 필적하는 도시로 발돋음했다. 또 산악지대에서 생산된 올리브를 압착시켜 추출한 기름을 이집트와 아시리아로 수출하는 등 국제무역도 크게 증대하였다. 이제 유다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팔레스티나의 신흥 강대국 반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다. 아하스는 유다국의 진정한 군주로 떠받들어졌고, 아하스적 신앙은 많은 이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각주:3]
한데 아하스 시대의 국가의 번영은 동시에 사회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대규모 땅을 소유한 부자들이 등장했고, 땅을 상실한 몰락농민들 또한 속출했다. 조정에는 이들 부자들의 대표들이 관료로 들어와 대지주들의 농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치를 폈고,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국가의 성공 정책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던 것이다. 대지주들 또한 왕을 열렬히 환호했다. 대도시의 시민들과 시골 농민 대다수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지역의 성소들이 대지주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성소들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낸 기부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들 지주들이 낸 제물 덕에 제사도 드릴 수 있었다. 지역의 성소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한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에 따라 위상이 결정되었고 인근의 작은 마을들의 성소를 복속시키는 유력 성소가 될 수 있었기에 대지주들의 기부능력에 점점 의존적이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위계질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성소에서 드린 풍성한 제물은 그 지역에 대한 신의 돌봄의 정도를 결정짓는다고 믿어졌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운이 대지주들의 기부 덕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는 그런 식으로 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채 10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 유다사회는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고, 사회 전 영역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대지주들로 구성된 기득권 집단의 보수주의적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강자 독식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그 체제가 백성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히스기야 왕이 아하스를 승계했다. 그런데 새 왕은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한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면서 왕실 중심적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것은 기득권세력과 연동하여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선왕의 정책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개혁의 기반은 선왕이 구축한 풍요한 왕실재정이었다.[각주:4]
히스기야의 개혁은 농민들의 몰락을 막는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야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대지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왕실의 개혁이 친 서민정책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을 백성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중앙의 메시지가 백성에게 전달되는 주된 통로는 지역 성소들인데, 이곳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것이 야훼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했다.[각주:5]
하여 히스기야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백성을 왕실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암하아레츠’, 즉 민중적 농민정치세력이 개혁세력에 가담했다.[각주:6] 그리고 조정에도 귀족출신임에도 개혁을 지지하는 신주류 인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골의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아하스와 그 시절 형성된 구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해서 왕실의 개혁은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이것이 히스기야-요시아 개혁이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주된 이유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29년간의 재위기간 중 후반기는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개혁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된 시기였다. 서부 평야지대는 인구가 70%나 줄었고 마을 수는 85%나 사라지고 말았다. 하여 왕실재정은 고갈됐고 그 와중에도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무려 55년간이나 재위에 있었던[각주:7] 왕 므낫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이 왕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히스기야의 개혁 흔적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이때 므낫세의 정치는 아하스의 방식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대지주 중심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자식들은 땔감을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고, 어머니들은 ‘하늘 여신’에게 줄 빵을 만들려고 가루로 반죽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나의 노를 격동시키려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친다. ―「이사야서」 7,18 (작은 따음표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이 구절은 므낫세 시대의 강도 높은 반개혁 현상에 관한 하나의 유의미한 특징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 평민 가족이 벌이는 가족 제사 장면이 스케치되어 있다. 본문에서 ‘하늘 여신’이란 아스다롯(Ashtaroth)을 말한다. 금성의 신으로 이 시기에 아세라(Asherah)를 대신해서 야훼 신의 부인으로 신앙되던 여신이다. 원래 이 여신은 아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아닷(Adad)의 부인이다. 즉 아시리아가 지배하던 므낫세 치하의 유다국에서 아닷 신과 야훼가 동일시되면서 아스다롯 여신이 야훼 신의 부인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 아닷의 별칭이 멜렉이다. 이하스가 아들을 바친 바로 그 신의 이름말이다.[각주:8] 즉 아하스를 칭송한 백성의 신앙이 므낫세의 반개혁의 기틀이었다는 얘기다.

므낫세는 부왕 히스기야의 개혁 세력을 말살하고자 했다.


묘하게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독일의 저 유명한 <슈피겔>지(Der Spiegel)는 이번 대선을 “독재자의 딸이 인권운동가를 이기다”(Diktatoren-Tochter schlägt Menschenrechtler)라는 카피로 소개하였다.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배연합을 지지한 무수한 대중이 있었다. 더구나 그 독재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서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 또한 지난 MB 정부를 거치면서 기득권세력에게 바닥까지 털려버린 서민층에게서도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대중은 독재를 갈망하는 것일까? 확신컨대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도 독재자가 아닐지 모른다. 또한 나의 소견으로는 그녀가 독재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독재정부가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강력한 기득권 세력인 거대자본들조차 독재정부가 자신들의 이해에 유리하지 않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정치화된 강력한 군부세력도 없다.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메이저 보수언론들이나 법률권력, 그리고 보수지식인들도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면 <슈피겔>의 카피는 단지 과거사를 들먹이는 야유에 불과한 것일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독재정부는 불가능할지라도 이번 선거는 대중의 독재정치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을 가득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거 직후 도처에서 보복이 횡행한다. 한진중공업의 자살한 해고노동자도 그런 보복의 희생자였다. 또 다시 징계를 당한 복직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MBC 노조원들에 대한 무더기 징계도 그렇다. 무수한 영역에서 힘을 남용하는 법률적 혹은 탈법적 폭력들이 속출하고 있다. 일인치하의 독재자는 없지만 무수한 독재자들이 법률적 혹은 탈법적 힘을 남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문제로 보았던 민주주의적이고 인권적인 감수성이 퇴조된 현상이 시민사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하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반개혁적 폭력의 체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발전국가 한국을 이룩한 독재자에 대한 대중의 갈망도 민주화 이후 겨우겨우 세워가던 인권의 질서를 곳곳에서 산산이 부수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대중은 독재의 영성에 취해 버렸다. 독재자가 보여주었던 힘에 대한 그 순박한 열정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기원전 735~734년 경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은 다마스커스를 거점으로 하여 르신 대왕이 다스리던 아람국이었다. 르신(Rezin)은 이스라엘의 베가(Pekah) 왕과 더불어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막는 시리아-팔레스티나 군사동맹을 주도했다. 한데 이 동맹에 동참하지 않는 소국들 중 아하스(Ahaz) 치하의 유다국이 있었다. 이에 르신-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유다국을 침공하였다. 이 연합군은 유다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나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철군하였다(기원전 734~732). 본문에서 “40년 전”이라는 표현의 시점은 히스기야 왕이 죽고 므낫세 왕이 반개혁 정책을 펴는 어느 시기를 가리킨다. 즉 이 시점은 반개혁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 시점에서 40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 7,6에 따르면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궁중모반 사건이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3. 히스기야-요시아 정부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몰아치는 담론을 적극적으로 유포시킨 것은 아하스 왕의 지지세력을 견제하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를 연상하고 있다. 아하스와 박정희, 이 두 인물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인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장본인이다. 동시에 이 둘은 그 성공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아니 적극적으로 그 희생을 활용했던 통치자였다. 그럼에도 백성/국민은 그이들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본문으로]
  4. 현대의 많은 국가들의 민주화를 연구한, 폴란드 출신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가설에 따르면,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그 사회를 민주화로 이행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 경우 전(前) 민주주의적 체제가 축적해 놓은 경제적 기반은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비용으로 활용된다. 한데 흥미롭게도 고대국가인 히스기야의 민중주의적 개혁도 아하스의 귀족주의적 국가가 이룩한 재원을 기반으로 해서 실행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마치 우리사회에서 주류 언론들이 복지가 국가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문으로]
  6. 고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사용된 ‘암하아레츠’에 대한 용례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농경사회가 지역의 대지주에게 예속되어 있으니 이들을 지방토호세력으로 해석했던 종례의 관점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열왕기」에 몇 차례 등장하는 이 용어는 위의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는 용례 해석과는 다르다. 이들은 유다국의 정변 상황에서 등장하며 특히 요시아 개혁의 중심세력의 하나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열왕기」의 암하아레츠는 정치화된 농민개혁세력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 그리고 오랜 식민지를 거친 뒤 수백 년 만에 건국한 하스모니아 왕국이나 헤롯 왕국에도 이렇게 긴 시간을 왕으로 재임한 이는 없었다. [본문으로]
  8. “그는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the Valley of Ben Hinnom)에 있는 도벳(Tophet)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어떤 사람도 거기에서 자녀들을 몰렉에게 불태워 바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그는, 유다의 왕들이 주님의 성전 어귀, 곧 나단멜렉 내시의 집 옆에 있는, 태양신을 섬기려고 하여 만든 말의 동상을 헐어 버리고, 태양수레도 불태워 버렸다.”(「열왕기하」 23,10~11) 이 구절에서 요시아 왕은 아하스의 제사를 바벨로니아 지역에서 유래였고 암몬의 주신(主神)이기도 한 불의 신 ‘몰렉’ 제사로 해석하면서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한데 그 다음 구절에서 이것을 ‘나단멜렉’(Nathan-melech)이라는 인물과 연계시키고 있다. ‘멜렉’은 「열왕기하」 17,31에 나오는, 불에 태운 인신재물을 받는 스발와임(Sepharvaim, 아시리아의 지명)의 신 아드람멜렉(Adram-melech)과 관련된 구절로 보인다. 즉 나단멜렉은 아시리아의 아드람멜렉 신과 관련이 있는 아시리아의 내시인 것이다. 여기서 아드람은 아닷 신(Adat)을 가리킨다. 즉 멜렉은 이 시기에 아닷을 가리키는 호칭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요시아 왕실은 이 구절을 통해 말렉을 몰렉(Molech)과 동일시하면서 말렉에 대한 모독을 꾀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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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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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통신> : 미국 대선을 통해 본 한국 대선 읽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Hyde-Park 사람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11월7일) 시카고 신학교 채플에서 시카고 대학 역사학 교수로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저자이기도 한 부르스 커밍스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미국 대선이 어제 진보진영(?)의 승리로 끝났고, 이제 남은 우리나라 대선에 대한 전망을 듣기 위해 학교로 가는데, 학교 진입하는 골목마다 경찰들이 깔려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오바마가 지금 하이드팍에 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시카고 남부 하이드팍(Hyde-Park)이 그 중 하나다. 시카고대학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라 여겨지는 흑인인권 운동의 대부 제시 젝슨 목사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담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미국진보 진영의 몇 안 되는 거점이다. 오바마의 집이 바로 이 하이드팍에 위치한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상원의원시절부터 이곳 하이드팍에 살았고, 오바마의 부인 미셀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 병원 행정부원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바마의 아이들은 시카고 대학내에 있는 부속 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가끔 아이들을 학교에 ride해 주는 오바마의 모습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었다. 우리학교 지하에 위치했던 서점에서 갓 출간된 오바마의 책에 대한 사인회도 열렸고… 이렇듯 하이드팍에는 오바마의 흔적과 추억이 곳곳에 서려있다.

미국 대선의 계산법

대선이 있기 전 하이드팍 사람들은 오바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론조사의 추이만을 따져보자면 만만치 않은 접전이 예상되었었다. 미국은 주마다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다르고, 주단위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면 그 주 선거인단 수 전체가 모두 해당 대선 후보의 표가 된다. 이런 이유로 전국단위 선거인단 투표율에서 승리했지만, 선거인단 수 확보에 실패하여 대통령이 안된 케이스도 있다. 2000년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맞붙었을 때가 그랬다. 이번에도 오바마와 롬니 간 투표율에서는 별 차이 없었는데, 선거인단 수에서는 오바마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늘 그랬지만 경합주들의 표심의 향배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나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우리나라보다 더함). 그래서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남부 바이블벨트로 상징되는 지역에는 민주당이 선거운동을 포기하고,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뉴욕, 시카고, 샌프란 같은 대도시의 표심에 공화당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당락의 관건은 소위 Swing State라 불리는 경합주들의 향배다. 이것이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라 볼 수 있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위스콘신, 버지니아, 아이오하, 뉴햄프셔, 콜로라도 등이 대표적인 Swing State이다. 대부분 미중서 백인 밀집지역에 몰려있다. 오바마는 초접전이 되리라고 보았던 지역들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의원수를 확보하여 332명(오바마가 얻은 선거인단수)대 206명(롬니가 얻은 표)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오바마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오바마 승리의 요인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었다. 막판에 몰아친 허리케인 샌디가 롬니의 열기를 식혔다는 의견에서부터 여성결정권(낙태)을 둘러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망언이 롬니의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번 선거 역시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남겼다. 사실 이번 대선은 4년 전 과는 달리 오바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커서 오바마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롬니에 대한 경계와 불안 때문에 오바마를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오바마 1기는 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전쟁으로 엉망이 된 경제상황, 그로 인한 국론분열, 전쟁 종주국이라는 국제사회에서 추락한 미국의 위상 등 어느 것 하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이 없었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나름 소신껏 경제회생의 의지를 관철시켜 실업률을 선거막판에 7%대로 떨어뜨린 점, 의료보험과 이민법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나마 오바마의 자존심을 세워준 부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7%후반에 머물고 있는 실업률,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는 실물경제, 미국민들이 갖고 있는 강한 미국에 대한 미련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불신 사이에서 어떻게 대외정책을 지혜롭게 풀어가야 하는지의 문제, 이번 선거에서도 하원 장악에 성공한 공화당, 풀리지 않는 난제인 이스라엘과 중동평화 등등 오바마 집권2기 역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그렇다고 특별히 뾰족한 돌파구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바마의 지난 4년을 학점으로 따지만 B- 정도, 그리고 앞으로의 4년도 전체적으로 흐림의 상황인데 미국민들은 다시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민들은 왜 다시 오바마를 선택했고, 이번 미국 대선의 메시지를 한국대선에 어떻게 감정이입을 시켜야 할까?

부시의 망령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오바마의 승리요인은 공화당의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막혀있는 태도에 대한 반사이익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시절 무리한 조세강요에 항거한 ‘보스톤 차사건’(Boston Tea Party, 후에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됨)에서 유래했다는 ‘티 파티’운동은 오바마가 추진하는 각종 경제개혁에 발목을 잡으며, 국가안보 최우선(테러와의 전쟁), 전 국민의료보험 확대 반대에 목소리를 냈는데, 이는 전통적 공화당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부동층을 끌어안는 데는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였다. 롬니는 오바마와의 1차 TV토론을 거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나름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중도적 이미지를 보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롬니는 선거운동기간 내내 공화당 출신의 전임 대통령 부시와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그가 말하는 공약들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부시의 악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기업들에게는 세금인하, 친재벌, 탈규제를 약속했고, 불공정무역에 대한 보복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몰아부치며 다시 냉전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한다는 점, 오바마의 어정쩡한 정책들이 미국의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켰기에 ‘강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점 등 롬니는 너무나도 Bush스러웠다.  지난 4년으로 부시를 잊기에 미국민들은 부시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많았고 혹독했다.

너무나 닮은 롬니의 사람들과 박근혜의 사람들

롬니의 지지세력은 백인, 부자, 남성들이었다. 이는 오바바의 지지층인 유색인종, 가난한 자, 여성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표심이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여성결정권(낙태)을 찬성하는 오바마에 맞서 보수적 기독교 세력들의 표를 규합하기 위해, “강간에 의한 임신도 하나님의 뜻” 혹은 “강간으로 임신이 안 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야말로 남성우월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런 구태는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쳐 20대 유권자의 60%, 30대 유권자의 55%를 오바마로 향하게 했다. 공화당의 여성비하는 여성표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여성유권자의 55%가 오바마를, 44%가 롬니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도 정치권에서 발생하는 여성비하 발언과 성추문 사건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사례가 한 두 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온도차는 미국 유권자들과는 전혀 반대다. 예전에 최연희, 박계동 같은 사람들 식당여주인, 여기자 성희롱 사건이 터졌을 때 뻔뻔하게 응수했던 것 기억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이미지에는 별반 타격이 없었다. 성희롱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던 한나라당 사람들이 버젓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로 무사히들 안착했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보면서  ‘당대표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성희롱당’ 이미지 성립이 불가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 문제는 박근혜의 ‘여성성’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의지대로) 반(反)여성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여성성은 철저히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는 한국 여성운동의 최고 수혜자일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회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운동의 열매는 투쟁한 당사자들보다는 권력에 근접한 사람들이 맛보기 마련이다. 여성운동 역시 가부장제 사회의 기득권과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여성이 최대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 여성은 힘있는 아버지를 둔 딸들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그 굴레가 딱 대통령의 딸, 재벌의 딸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2012 미국 대선 총평, 그리고 한국 대선

한국에 조.중.동이 있다면 미국에도 그에 못지 않는 수구, 보수 언론이 많다. 대표적인 것인 폭스 뉴스와 러시 림보인데, 그곳에 등장하는 조갑제 같은 보수언론인들의 땡깡과 억측과 막말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공화당의 꼴통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독설로 유명한 폭스뉴스 진행자 빌 오라일리는 6일 선거가 끝난 후 이런 말을 하였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라 할 수 없다. 미국의 인구분포가 바뀌어 백인들이 이제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말이다.  아직까지 패배의 원인을 정확하게 감지 못하는 미국 근본주의 세력의 현실감각을 잘 표현해주는 논평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미국대선은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공화당의 롬니보다 오바마의 자유로운 이미지가 아직까지 미국 유권자들에게 약발이 먹히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대선 때마다 공화당이 물고 늘어졌던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먼저 선수를 치면서 공격적으로 맞섰고, 의료보험, 이민법 문제 등에서 보여준 오바마의 제스처는 다문화 사회를 걸어왔고, 지향하는 미국의 정체성과도 부합하는 일관된 태도라 볼 수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최초로 레즈비언 상원의원이 탄생했고, 메인주와 메릴랜드 주에서는 동성결혼이 투표로 합법화되어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주의 숫자를 아홉으로 늘렸다.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에서는 마리화나가 합법화되었다. 이로서 마리화나가 합법화된 주가 19개에 이르렀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미국 사회가 망조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미국 사회가 매우 치열하게 차이와 다름에 대해 고민하고 몸부림 치면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최적의 방식을 놓고 숙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제 12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 대선으로부터 무엇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까?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오바마는 유색인종, 가난한자, 여성들에게 표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바마는 흑인의 93%, 히스패닉의 71%, 아시아계 70%, 여성55%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을 무조건 가난한 자 혹은 소수자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백인 남성 위주의 미국 주류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들은 본인들에게 덧칠된 사회적 약자라는 굴레를 극복하고 자신의 계급과 사회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그것을 배신하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이번 대선에 참여하였다. 즉 자신의 계급에 반하지 않는 정치 참여가 미국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말이다.  4년 전 이명박이 당선되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국민은 무능보다는 부패를 선택했다.” 그 다음해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서울 강북을 싹쓸이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선거에서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는 후보보다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환상을 계속 주입하는 후보에 한 표를 행사했다는 말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아 있는 대선 기간 동안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자기의 입장과 계급과 위상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각자가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날, 나의 신념에 부합하는 한 표를 정직하게 행사한다면, 우리사회가 조금 앞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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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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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20 22: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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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태씨, 이 기사는 내려주시죠. 보기싫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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