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말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주일예배 후 교우들과 함께 자리한 식탁의 대화가 그날따라 유난히 불편했습니다. 큰 길 하나를 두고, 우리 교회는 ‘소망교회’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론 골목 안쪽에 자리한지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이웃이며, 함께 지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입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성수대교 남단에서부터 도산공원 사거리까지 양 쪽 끝 차선에 주차된 고급승용차들과 외제차들을 봅니다. 건널목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성경책을 들고 소망교회로 향하는 것을 또한 봅니다.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 중 몇 명이라도 우리 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교우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해본적도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일도 있습니다. 주일아침,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들을 보는 일만큼 목사에게 좋은 광경이 또 있겠습니까. 이름이 다르고, 교파가 다를지라도,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라는 고백은 50명이 5백명, 5천명, 5만명이 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도 소망교회로 교적을 옮긴 교우들이 여럿 있는 터, 올 초 제직임명을 앞두고, 그분들의 이름을 교인명부에서 지웠습니다. 아팠습니다. 이런 제가, 그리고 교우들이 ‘소망교회가 아니라 실망교회’라는 세간의 비난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저마다 일성을 토해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윤리의 마지노선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상식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어느 시사주간지가 뽑아놓은 기재의 제목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주먹이라’(시사in 174호)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썩고 또 썩고 또 썩어버린 겁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고, 작금의 교인들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이제 신물이 납니다. 교회가 피로감을 더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다가, 시장하시어 바라본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나무는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교의 상징만은 아닐 것입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그 나무를 보시고, 그분은 얼마나 분개하셨던지요. 이튿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 “하나님을 믿어라”(마가복음 11:20-21) 소망교회 사건을 두고, 저마다 하실 말씀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통탄의 소리, 자조의 소리, 분노의 소리, 빈정거림도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이 만약 여기까지 읽혀졌다면, 저도 여기에 한 소리 보태고자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형제교회가 그 모양인데, 그 교회를 두고 기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소망교회로 가겠다는 교우에게 왜 그 교회로 가려 하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크고, 사람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한 교회에서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그분에게 ‘그런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라고 말한 목사입니다. 소망교회뿐입니까. 최근 몇 개월 사이, 우리는 이른바 한국교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몇몇 교회의 이름이 신문지면과 인터넷상에서 몰매를 얻어맞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섣부른 영적 우월감이 빛은 타종교에 대한 무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을 무심코 보아 넘기며, ‘나는 아닌데......’라고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를 두고 한마디 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제2의 종교개혁’ 운운하며 예리한척(?) 정직한척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제2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제2의 계몽주의’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바벨탑처럼 쌓아놓은 교회의 권위, 성서와 하나님의 이름을 검과 방패삼아 구축해 놓은 요새가 완전히 포위당해 버린 것 같단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무너뜨린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스스로 불신해버린 믿음의 자리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더 이상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온갖 허식과 탁상공론, 신학적 언어들의 유희가 퍽퍽한 목회현장을 더 힘겹고 씁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교회 담장안의 언어와 행위들로 축소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느 교파 때문이라고, 어떤 신학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이에, ‘만민’이 우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사실이지 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읽고, 체계적으로 분석할 여유가 제게는 없습니다. 당장, ‘그 몇몇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아니냐’며, ‘기운 빠진다’고 한숨을 내쉬는 교우들을 마주해야 하는 저입니다. 우리입니다.

굶주린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음식섭취를 거절하다가 아사해 버린 ‘시몬느 드 베이유’를 존경합니다. 그이처럼 순결하고 진실한 행동의 정점까진 못가더라도, 더 이상 한국교회를 저기에 두고, 나와 우리 교회를 여기에 둔 채 말하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바로 나이고, 소망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일부교회가 한국 개신교회를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판단보다는, 나의 ‘믿음없음’과 ‘영적미성숙’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진보이고, 그들은 보수라 말하지 말고, 나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은 기도만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단정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인정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호세아처럼 말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호세아는 개인의 삶으로 놓고 본다면, 참으로 괴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절,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모두 영적인 병자들이 되어 있었고,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한마디면 족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알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한다는 결의로 가득한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에게 바알신전의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신전의 창녀는, 왕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든 사람이 성적관계를 맺음으로써 바알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바알신앙의 매개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세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아들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입니다. 둘째아들은 ‘로루하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아들의 이름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저주해야 하는 운명, 그 삶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괴로운 사람을 두고, 고멜이 도망쳐버립니다. 신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고멜은 신전이 아닌 어느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가까스로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구해 그 집 주인에게 지불한 뒤, 자신과 자식들을 버린 아내를 데리고 나옵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호세아가 보입니다. 조금 뒤쳐져 호세아의 뒷모습을 따라 걸어가는 고멜도 보입니다. 그때 호세아가 불쑥 고개를 돌려 말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마시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호세아 3:3)
호세아가 무얼 했습니까? 고멜처럼 방탕했습니까?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도망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 호세아가 고멜에게 약속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 뜻 안에서, 호세아는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고멜이 호세아에게 방탕한 여인이었다면, 호세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 같은 작은 교회 목사 하나가,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이 거대한 몸집의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냐? 돈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교회’라는 괴물과 ‘스스로 더 높아져버린 돈이라는 괴물’과 싸워야합니다. 그러하기엔, 저도 우리도 참 작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인 박노해가 전해준 ‘희망의 말’하나를 간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이 말이 있다면
“나 하나 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 박노해, ‘꽃피는 말’

저부터 고치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삶이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걸어가겠습니다.
‘그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아이의 교사로 확신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2: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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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아직도 어렵다. 아무리 돌이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종종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전율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용서는 결국 다 잊는 것’이라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젠가 읽었을 때에도, 오늘 다시 읽어도 이 말씀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기도를 하는데 명치끝으로부터 아주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분노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 비로소,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임도. 기도를 마치고, 다시 본문을 읽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입고도 예수를 ‘강도’라고도 하고, ‘반역도당의 수장’이라고도 하는 ‘바라바’와 맞바꾼 어리석은 유대인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너나 구원해 보아라!’ 하고 빈정거리던 사람들, 어리석고 천박한 식민지 노예들끼리 서로 죽이고, 욕하고,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보며 로마시민의 우월감을 느꼈을 백부장들과 병사들. 제비를 뽑아서 그분 입으신 옷들을 나누어 가진 지독한 군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렇다. 그분은 용서마저도 아버지께 맡겨버렸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맡겨버리셨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물으셨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갔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단 한사람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인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그분이다. 그런 예수님도 이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잔인한 로마인들을 놓고서는 아버지께 맡기신다. 마치 깔데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진액처럼, 주님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 당신의 호흡으로 생명이 된 열매들입니다” 치유의 지점이 아닐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입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바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이라크의 한 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본 뒤 쓴 글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아버지 위대하신 하나님! 혹은 아브라힘, 무싸, 아이싸의 위대한 알라여! 어떤 사람들은 정말 더러운 영혼을 지녔습니다.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건, 그들의 피부가 어떤 색깔이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그들은 모두 같은 세상, 이 거대하면서도 작디작은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단 하나의 민족,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이것은 결코 계명 또는 의무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사람의 행위의 윤리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복한 정도에 의존한다’고 그의 윤리학에서 거듭 말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상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느슨해진다면, 그 삶은 자연 비윤리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았다. 사랑도 용서도 결코 명령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혹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사랑 받고 용서 받는 대상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타율적인 것은 윤리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독일의 설교자 ‘헬무트 틸리케’가 전한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레마르크가 쓴 세계1차대전에 관한 책, ‘서부전선의 적막’의 한 장면이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는 거기서 영국군 하나를 보았다. 깜짝 놀라 총을 겨눴지만, 잠시 후, 영국 군인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영국군인의 상처가 독일군인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물병을 꺼내 부상병에게 마시게 했다. 영국군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다음, 자기 옷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가 그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봉투가 떨어졌다. 영국군인은 죽기 전에, 그 사진을 다시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다. 독일군인도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사진 속 영국군인의 아내와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처음 이 둘은 서로 싸우는 적이었다. 죽든지, 살든지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가 구렁텅이에 누워있는 이 부상당하고,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이 영국군인은 더 이상 원수나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두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쪽은 살기를 띤 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한 존재’이며 ‘인격’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의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께서 보시는 시선이었다. 그분은 늘 그랬다. 지금 주님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 일들’을 하고 있는 저들도,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예수의 목적’ 아니었던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서 진흙을 닦아내 밝고 윤기 나는 얼굴과 눈빛을 보신 분이다. 그래서 삭개오도 만나주셨고, 문등병자도 만져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변호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귀하듯, 저들도 귀하다.


여중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길태라는 사람의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어떤 사람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국 카메라는 너무 저속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장난으로 ‘초상권이 존중받거나, 존중받지 않을 조건들’을 나열하는 경찰의 대변인은 비열했다. 그를 용서하는 몫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가족들이며, 광의의 범주에서 온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나쁜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카메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더러운 영혼들!

난 이제부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용서와 사랑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용서받아야할 수많은 기억들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위무해줄 것이다. 하긴, 진정으로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의지만을 쫓아 함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그러자 사형찬성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을 창살아래 가두어 둘 권리를 주었는가?"

다시 또 사순절 한복판에 섰다.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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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큐메니칼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최근 우리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판에서 두 개의 굵직한 뉴스를 받아 들었다. 하나는, 새로운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총무로 노르웨이 출신 신학자이며, 에큐메니칼 운동가인 올라프 F. 트베잍 목사가 한국교회가 추천한 후보자를 제치고 피선되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단체의 2013년 차기 총회(10회) 장소가 사도바울이 회심한 곳으로 알려진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부산’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두 사안은 지난 8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에서 함께 다루어졌다.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여기에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해서는 관심 밖이다. 다만, 투표가 있기 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까지 교회협의회(KNCC) 회장 자격으로 제네바를 방문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그와 국내 주요 교단 지도자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는 자못 궁금하다. 최초의 한국인(혹은 아시아인) 총무 배출의 기대도 컸을 것이고, 더하여 차기총회 유치라는 성과를 기대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절반의 성공이다. 걱정은, 사분오열을 넘어 수만여 개신교회가 각각의 하나인 듯 존재하는 한국교회 풍토에서 과연 ‘에큐메니칼 총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을까. 준비과정에서 빚어질지도 모를 여러 형태의 상황 예측이 비단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절반의 성공이었을지 모르나, WCC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사이에, 공통적으로 이 운동이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열망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총무 올라프 목사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대의 조직과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내의 다양한 교파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에 미온적이거나, 참여를 거부해온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과 대화와 관계증진을 추진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교회’야말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네크워크가 지역교회 현장(local church-grass root)까지 닿아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한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며, WCC는 ‘와이드 에큐메니즘’의 가치를 내걸고, 로마가톨릭, 복음주의권(Evangelical), 심지어 성령운동(Pentecostal) 교회들과의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 내에서 이들 교회들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성장을 나타낸 곳 또한 이들 교회들이다.

냉전 해체 이후, WCC가 표방하던 여러 진보적 가치들이 퇴색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위기를 맞이한 듯 보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무기력’이 하나의 보기라 하겠다. 운동의 새로운 추진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에큐메니즘은  한국 상황(context)에서 이해되는 범주보다 훨씬 다양하고 넓다. 당장, 조직신학과 선교학, 기독교윤리학, 성서신학/해석학, 실천신학까지 전 분야에 걸쳐져 있다. 이를 기껏해야 진보적 기독교운동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고 보면, 에큐메니칼을 표방하는 교회들조차 그 범주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보수적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에큐메니칼을 여전히 이념적 차원에서 이해하며, 그 활동들을 ‘좌경’으로 분류한다. 그뿐인가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운동으로 매도하며,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편협하다. 선출된 신임 총무의 말대로, WCC는 보다 강하고, 풍부하고, 넓어지는 방향으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연대와 선교를 위한 지평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때문에, 부산에서 열릴 차기 총회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세계교회 모임이 될 것이라 예측된다. 개최지 결정 후, 중앙위원회 대표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관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한국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의 저변에 복음주의 교회와 성령운동 교회들의 중추적인 역할이 있었다. WCC는 한국교회의 사례를 통해, 대화를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벌여온 통일을 향한 다방면의 노력과 화해의 증언들을 수집할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것’이 있다. 성령운동 교회로 분류되는 순복음교단(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이 정식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교회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다만, 몇 차례 조용기 목사 주도로 국제적인 에큐메니칼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개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와이드 에큐메니즘’을 통해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확장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WCC의 열망이,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모두에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이다. 이 뉴스가 목사인 나의 사역과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애초에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 해도, 좀처럼 이해되지도, 이해를 시킬 수도 없다. 이러다가 영원히, 이 단어는 진보적 교회운동, 예언자적 참여운동과 동의어 수준에서, 저들이 구호로 사용하는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념어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정죄를 위한 하나의 기준어가 되거나!

매번, ‘에큐메니칼’을 주제로 한 대화나 세미나의 결론은 ‘교회 현장 속으로’이다. WCC도 마찬가지이다. 늘 ‘Go to the grass root, share with the local church'를 외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실, 우리는 매주일, 아니 매일, 설교를 하거나 성도들과 대화하면서, 성경공부나 각종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면서 부지불식간 이 운동의 여러 주제들과 마주치고 있다. 교인들은 여전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궁금해 한다. 왜 교회는 분열되었는가? 이를 궁금해 하고, 각 교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이해는 다분히 피상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교파에 대한 이해나 관심도 식어가고 있다. 어느 상가교회 간판을 보니 교회 이름 밑에 이렇게 써있다. ‘우리교회는 사당동 총신대학교가 속한 교단의 교회입니다.’ 맙소사!!! 교인 중 한 사람이 내게 한 말이다. “사람들이 요즘은 성당이 훨씬 더 쿨(?)해 보인대요. 그 쪽 교인수가 늘어나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이 짧은 문장 안에도 어떤‘에큐메니스트’가 들으면 두세 번 정도 탄식할만한 단어들이 있다. 뿐만 아니다. 현장 안에는 여전히 ‘전도’와 ‘선교’가 혼재되어 있고, ‘해외선교’와 ‘세계선교’가 아무 성찰 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문화선교’는 기껏해야 ‘경배와 찬양’ 주위를 맴돌며, 대형마트 문화센터와 비슷한 제목의 강좌들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교회당 외벽에 나부끼고 있다.

기왕에, 2013년 WCC 총회가 결정되었으니 말인데, 난 정말 에큐메니칼 운동이 먼저 내 안을 관통하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 속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표방하는 여러 주제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고, 실천되어서 하나의 건강한 교회운동으로 ‘흐름’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에큐메니칼’이라는 ‘거대한(?)’ 단어로부터 교회협의회, 총회, 노회, 교회, 현장(grass root)으로 나아가고,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다양한 활동들이 목사들과 선생들을 통해 ‘에큐메니칼적’으로 해석되어, 노회, 총회, 교회협의회로. 나아가 연합과 일치로. 종국에 요한복음 17:21과 에베소서 4:4-6 말씀에 이르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한복음 17:21).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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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0)

힘든 교우들이 많다. 가장 많은 이유는 물질적인 어려움이고, 그 다음 이유는 직장생활이다. 덧붙이면 자녀걱정인데, 그 또한 물질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비밀스레 건네지는 교우들의 고민과 기도제목은 솔직히 ‘노골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놓는 ‘목회 노트’속 하나님은 풍요의 신이며, 수호신이고, 가끔 두려운 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설교강단은 한층 더 현실 언저리를 맴돈다. 삶과 신앙을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복음이 관념이 되고, 추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설교자의 고뇌는 더욱 깊어간다. 늘상 ‘생활신앙’을 외치고, ‘생명윤리’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즘’ ‘문화와 과학’ 등 21세기 신학적 화두들을 붙잡고 늘어지지만, 이를 설교와 목회로 추구되는 교회현장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엔 더 진지하고, ! 끈기 있는 ‘우려냄’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는 ‘삶과 신앙’을 평행시키는 ‘철로’가 되고, 목사는 점점 더 교인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아직 젊기 때문일까...’ 혼자 되묻는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직장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교인들에게 ‘잘 될꺼다’ ‘기도해보자’ 정도의 대답을 하고나면 찜찜하다. 그러나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 한번은 40대 후반 집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가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단다.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었는데  간부가 아니다보니 언제 정리해고를 알리는 이메일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에서 느끼는 불안이 고스란히 가정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들도 불안해 한다. 가장으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아내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도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은 ‘기도해주세요’였다. 


요즘 영화를 자주 본다. 대학시절 학보사 문화부기자를 맡으면서 취재를 빌미로 거의 매주 영화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장르불문. 닥치는 대로 보았다. 그 덕에, 나는 나만의 아마츄어 영화독법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 ‘감독은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영화 속 인물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심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사나 행위를 통해 설(說)을 푼다’ 요즘은 영화관련 사이트마다 관객이 적어놓은 ‘극중 명대사’들이 있어 재미가 감소됐지만, 1시간 30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물’이나 ‘대사’를 긁어내는 ‘숨은그림찾기’는 참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최근에 ‘도쿄소나타’라는 영화를 봤다. 예상대로 개봉관은 없었고, 1시간 가까이 골목을 헤매다 겨우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포스터는 헐리우드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연상케 한다. 어린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한 회사의 홍보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통해 본 이 영화의 일본판 포스터는 달랐다.  부모와 두 아들,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있다는 사실 말고, 그들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어떤 다른 이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일본가정, 일본사회, 21세기’를 함께 언급한다.
  
“내가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그것은 왜 우리가 이전 세기에 가졌던 미래의 모습과 크게 다른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는 그것이 나에게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현대 도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드라마를, 가능한 작은 과장과 함께 묘사하려 노력했다.” (무비위크 2009. 3)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켄지는 엄마가 건네준 급식비 봉투를 들고 피아노교습소를 찾는다. 엄격한 가장인 아빠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형은 출구 없는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외국인의 입대를 허용한 미군에 지원한 뒤 ‘신원보증서’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입대지원서를 들고 온 큰 아들의 질문에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녀는 외롭다. 빈 집, 쇼파에 홀로 누워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읖조린다. ‘누가 나를 좀 잡아줘’ 한편 제법 큰 의료기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아빠는 고학력 저임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직원들에 밀려 실직 당한다. 하지만 매일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동네 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백화점 청소용역 노동자가 된 아빠가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는 바다로 간다. 더 이상 길이 없는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운 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겼으면 좋겠어’ 같은 시간, 지나던 트럭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아빠가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그날 두 시간 여 동안, 나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큰 아들이 되고, 막내아들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가 우리의 분신 같았고, 미래 같았다. 권위를 상실해가는 아버지는 불안하다. 무관심에 길들여져 버린 엄마는 외롭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은 무기력하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말은 그들의 행동과 다르다. 켄지는 고립되어 간다.

결국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다시 묶어주고, 이들 각자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순간으로 엔딩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시작’은 혁명적이지도, 격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느리고 긴 호흡’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뱀은 몸이 자라고, 비늘이 닳게 됨으로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새 비늘옷이 낡은 비늘옷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동안, 뱀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눈꺼풀도 허물을 벗어야 하므로, 이 무렵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껍질이 완성되면, 낡은 허물을 장갑 벗듯 벗어버린다. 그제서야 눈도 다시 뜬다. 살아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때, 말하자면 낡은 허물을 벗거나, 벗어야 할 때 눈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았고, 내적변화를 겪었다. 이때 그는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던 순간,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변화가 필요할 때, 새로움이 간절할 때,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내 시선을 기다리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구고 있었다. 이어질지도 모를 죽음의 연좌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상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침묵과 공포의 순간, 이 폐쇄된 공간속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진 상황, 제자들에게 ‘평화(평강)’는 역설 중에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곤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령을 받아라’.

나는 이것을 ‘두번째 숨’이라 이름 짓고 싶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성령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의 혀’같이 찾아온 그 성령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때 그들 속으로 성령이 들어갔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반면 사도행전의 그 영은 ‘능력’이었던 것 같다. ‘생명’과 ‘능력’은 공존한다. 생명이 있어야 능력이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있음으로 생명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앞선다. 예수는 먼저 생명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형상 지어진 사람의 모양에 첫 번째 숨을 불어넣은 야훼처럼, 그도 두려움과 공포로 빚어진,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폐쇄된 자아들을 향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환상체험이었든,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겁고 답답한 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혹시라도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모든 분들께 ‘성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조심스레 건네 보는 것이다. 호흡을 불어넣은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언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 20:23)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평온히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낸 그 집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집사님 부부 데이트 한번 하시죠. 영화 어떠신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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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린 그 헤아림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대로 하나님도 너희를 헤아리실 것이다"(누가복음 6:3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가 새 ‘웹진’을 발간하며 ‘목회’ 카테고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청탁을 받고, 자세한 내용을 듣고자 찾아간 그 날, 한백교회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곧바로 책을 빌려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발발 6일전, 평양을 대표하는 교회지도자 14명이 북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그 중 12명이 총살되고, 2명이 돌아왔다. 풀려난 두 사람 중 30대 중반의 한 목사는 정신병자가 되었고, 또 한 사람, 신 목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날의 처형사건을 미궁에 빠뜨린다. 살해된 12명의 목사는 하루아침에 순교자가 되었고, 그들이 맡고 있던 교회들은 폐허더미가 되었으나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너진 중앙교회 종루에는 아직도 종이 매달려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거칠게 혹은 은은하게 종은 허공을 가르며 파동을 일으킨다. 살육과 분노의 땅에 신의 임재를 갈망하듯. 평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돌아온 한 목사와 신 목사를 의심하고, 그들을 향해 ‘유다! 유다!’라고 외치며 손가락질한다. 실성한 채, 폐허가 된 중앙교회를 찾아 괴성을 지르곤 하던 한 목사마저 죽자, 이목은 신 목사에 집중된다.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죽음의 지경을 탈출할 수 있었는가? 정말 그는 12명의 동료목사를 죽음으로 내몬 배신자인가? 평양을 점령한 한국군 정보부대는 이 사건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성을 폭로하고자 소설의 주인공 이 대위를 신 목사에게 보낸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 신 목사에게 대위가 묻는다.

“목사님! 당신의 신 - 그는 자기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을까요?”

내게 소설 ‘순교자’(김은국 작)를 추천한 사람은 김 장로였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70년대, 이 책이 일으킨 센세이션을 설명하며 연일 교회 안에서 책의 내용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했다. 그는 왜 내게 이 책을 추천했을까?

김 장로는 1년 전 아내를 잃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의 아내는 남편의 장로 피택 소식을 듣고 얼마 후 호스피스 병동에서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 유독 사랑이 깊었던 부부의 별리(別離). 김 장로는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아내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장로임직이냐며 사양하기를 몇 번. 그는 깊은 절망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노회에 제출할 장로임직 청원서류 중 하나인 ‘신앙고백서’라며 대학노트에 적은 삐뚤빼뚤 글씨의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몇 일 동안 고민했지만 그것뿐이었다며 전날 밤 어렵게 적었노라고 했다.

‘저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낳고 자라,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고,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아픔과 고통가운데 하늘나라의 소망을...’

그는 내게 부족한 부분을 고쳐 달라 부탁했고, 나는 먼저 그의 글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나서 한 줄 한 줄 임직할 장로의 신앙고백문에 어울리는 용어들을 섞어 손을 보았다. 그는 고맙다며 그가 쓴 종이와 내가 쓴 종이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조용히 교회 사무실에 있는 직원에게 그가 쓴 종이의 내용을 타이핑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아들 또래 밖에 되지 않는 젊은 목사에게 그는 유난히 친근한 마음을 드러내곤 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늘 담백하고 진솔했다. 그가 어째서 나와 그토록 수사(修辭) 없는 대화를 하곤 했는지 헤아릴 순 없지만,  ‘순교자’를 추천한 일도 신앙고백서를 보여준 일도 이제 생각해보면 모두 하나로 통하는 어떤 뜻이 흐르고 있다.

다시 순교자로 돌아가 보자. 실성한 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은 한 목사는 늘 찾아오던 중앙교회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신은...없어...신은...없어’였다. 여전히 진실을 감추고 있던 신 목사는 마침내 입을 열었고, ‘그가 선택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밝혔다. 신 목사를 이해하고 존경하면서도, 그의 발언을 못마땅해 한 이 대위는 다시 한 번 신 목사에게 묻는다.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통을 정말 알고 있을까요?’ 신 목사가 입을 열었다.

‘평생토록 난 신을 찾아 헤맸소. 이 대위!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죽음,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뿐이었소. 그 다음은 없소...아무것도 없소...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내 백성을, 불쌍하고 고통 받는 내 교인을,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괴로움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는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과 환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요. 무의미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은?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난 혼자 그걸 짊어져야 하오. 모두가 다 십자가를 질수는 없어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요’

신 목사는 전쟁의 고통과 살육의 현장에서 인간이 희망을 잃었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며,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 자신, 한평생 신을 찾아 해맸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고 했다. 절망과 싸우고 있는 괴로운 인간들 말이다. 그것을 본 이상, 그는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십자가를 져야 했다.

김 장로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나보다. 모든 비밀을 다 알기라도 하듯, 자신에 차 외치는 강단의 선포보다 차라리 당신의 아픔, 당신의 고통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랑 깊은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고. 아내를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보내고, 안수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으면서 그의 귓가에 닿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소설 속 전쟁으로 무너진 중앙교회의 종소리처럼, ‘거룩한 아픔’을 실어 그의 영혼을 만지고 있었나보다.  

새로운 임지로 떠나기 앞서, 당회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식탁으로 이동하던 길. 김 장로는 어김없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목사님!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조바심 내지 마세요. 교인들도 다 알아요. 그 사람들이 왜 주일 아침마다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교회에 갈까요. 위로 받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내 맘 알아주시겠지. 주님은 내 고통 알아주시겠지. 목사님은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세요. 그림자라도 보게 해 주세요’

오늘(2월 17일), 김수환 추기경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예수의 그 삶을 살아보지도 못했노라는 그의 고백이, 땅에 남은 빈가슴들을 채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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