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난민들에 대한 짧은 생각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유엔 난민 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s for Refugee])의 통계에 의하면, 2014년 한 해 동안 전세계적으로 오천 오백만명의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오랜 내전과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들이다. 대한민국 인구수와 맞먹는 오천 오백만이란 숫자는 국제 난민들의 규모와 다양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실제로 유엔 난민 기구는 2015년 현재 약 7천만명의 사람들이 무력 충돌과 환경 재앙으로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각주:1] 
          내전으로 인하여 대규모의 시리아 난민들과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콩고, 소말리아 출신의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탈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지금, 우리는 난민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국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교회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난민 인권 문제, 특히 전쟁 난민은 국경, 국적, 국가 간 이익 문제 뿐만 아니라, 종교와 인종 문제, 성차별 문제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있다. 특히 “인종”이란 관점에서, 난민 문제를 살펴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에 옛 유고 연방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국제 정치 무대에서 리더쉽을 보여주려한 클린턴 행정부는 십육만구천여 명의 옛 유고 연방 출신의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중 대부분이 내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였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이였다. 현재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난민을 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태도와 비교해 볼 때, 유럽에 거주하던 보스니아 난민들은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서방 국가에 이주하였다.
          미국에 정착한 가장 큰 난민 그룹은 옛 소련 연방 출신들로, 이들 중 상당수가 유대인들이다. 현재 미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약 칠십만명인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 중 30%가 옛 소련 연방이 붕괴되기 전에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이고, 나머지 70%는 그 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난민들의 수는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수 보다 많다.
         보트 피플 (boat people)로 알려진 베트남 난민들은 국제 사회에서 난민들의 대표 얼굴이 유색인종으로 바뀐 사건이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베트남 정부나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약 14만 명 정도의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로 떠났다. 그러나 1978년 호치민 정부의 과거 청산 정책이 가속화 되면서, 화교 출신 등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 남베트남 정부에 가담했던 사람들 등등이 핍박을 피해 베트남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변 공산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사람들도 난민 행렬에 가담했다. 1975년과 1995년 사이 약 이백만명의 사람들이 베트남을 떠난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며, 이들 중 약 팔십만명이 해로를 통해 베트남을 탈출하여 안전하게 다른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 수의 사람들이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거나, 조악한 배가 파도에 뒤집히거나, 해적떼에게 약탈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보트 피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한 찬공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즉각적 종료를 원했다. 전쟁은 모든 베트남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 상처는 보트 피플로까지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베트남 주변국들은 보트 피플의 상륙을 허락하지 않아서, 난민들이 탄 배는 공해상에 머물러야 했다. 공해는 위험한 공간이다. 해적떼들과 높은 파도 때문에, 지치고, 양식도 부족하고, 병약한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베트남을 떠났지만, 살 수 있는 희망이 너무 적었다….호주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지 않아서, 미국은 비자를 내주지 않아서, 유럽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주변국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두 난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 주변국들은 유럽과 미국 국가들이 나서서 난민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유엔이 제한된 지역에 난민촌을 만들어 주고 나서야, 보트 피플의 일시적 상륙을 허락했다. 호주는 이민법을 바꾸어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면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미국과 캐나다, 북유럽 국가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무력 분쟁 지역을 탈출하여 국외로 간 모든 사람들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이주 자격을 허락한다. 이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은 난민 캠프나, 임시 수용소와 억류소 (detention center)에 머물러야 하며, 이 기간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영국과 같은 나라는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의 경제 활동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난민들은 영국에 이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호주는 지금도 해로를 통해 도착한 난민들을 심사 기간 동안 구금 센터에 머물게 하는데, 여기에 머무는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난민들이 난민 심사에 떨어지거나, 심사 기간이 길어져, 더 안전한 곳, 경제 활동이 가능한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지난 여름 터키 해안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세살 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 알랜 쿠르디 (Alan Kurdi)의 사진 한 장은 시리아 난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국가들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유럽 난민을 이야기하며, 시리아 난민에 대한 자국민들의 감정이입을 호소했다. 자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난민 쿼터를 늘리고, 난민 인권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동안, 미국은 올해 일만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2017년까지 삼만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몇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여기에 속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한국 언론들 뿐만 아니라 서방 언론들은 시리아 난민 발생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러시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정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발발 후,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중동 지역에 정세불안을 가져왔고, 군사화된 이 지역을 더 군사화시켰다. IS와 같은 극이슬람 주의와 군사화가 결합한 반군조직 (para-military)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러시아 무기를 수입하여 세를 불려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와 미국은 현재 IS에 대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고 있는데, 이 공습으로 인해, 난민들이 더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난민들을 받아 들이고, 난민 문제 해결에 앞장 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랑, 또는 국제 정세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한 난민들, 특히 시리아 난민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내 이웃으로 보기 위해서는 기독교 안에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우선 광범위하게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엔과 유럽 정부들, 그리고 언론들은 ‘난민 문제’에 대한 ‘짐 (burden)’을 전 세계가 함께 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를 종종 한다. 이러한 관점은 ‘난민’을 만들어 낸 전쟁, 미국과 러시아의 군수업자들, 독재 정부 등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즉, 난민들이 문제가 아니라, 난민들이 발생하도록 만든 국제 정치 구조와 전쟁이 세계 시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인 것이다.
          또한 난민들의 이주 비용에 유럽과 북미국가들이 막대한 사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난민들의 장기 이주와 이민이 오히려 이주 국가의 경제에 도움을 주거나, 최소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들의 이주가 마치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도, 이 보도에 의하면 오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 장벽 때문에 난민들이 당장 전문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당수가 소위 3D 업종으로 불리는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오히려 이 업종의 임금이 올라가고, 지역 경제가 살아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난민들을 받아들인 덴마크의 여러 지역들은,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이 난민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다. 난민들을 억류하거나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국가가 난민 관리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사용하여, 국가 예산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각주:2]

          조금만 더 깊이 살펴 보면, 난민들이 부유한 국가들의 사회 보장제도에 무임승차한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사를 넘나들며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고 여러 국경 지대를 통과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아온 난민들이, 이주 국가에서 사회 보장 제도나 바라는 사람들로 머물거란 생각은, 이들의 생존능력을 무시하는 편견이다. 더구나 난민들도 서구 국가들이 낙원이 아니란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본국의 분쟁이 끝나면 또한 많은 수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세계화된 인종 차별 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맞물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들이 환영받지 못 하는 시대에, 국제 사회의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각 국 정부들이 꺼내드는 카드가, ‘자국민을 위한 일자리 보호, 사회 안정 유지, 국가 예산 문제’ 등이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치인들이 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거나, 자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난민 문제를 감춰서,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은폐하려고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이 난민 발생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세계 정치를 분석해야 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하느님 나라는 국경이 없지만, 인간이 만든 나라들은 국경이 있고, 이 국경을 지키는 군대와, 국경을 다스리는 정부가 존재한다.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과 해외 여행의 자유화로 마치 우리와 타인을 구별짓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무역품들이 여러 나라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때, 각 국 정부는 오히려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통제하면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세계 시민들을 구분하였다. 시리아 난민들과 같은 대다수의 난민들이 종교와 인종, 출신국 때문에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고 있다. 난민 문제가 세계화되고, 전쟁이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는 ‘국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 안보의 중심이 국경이 되고, 국경을 지키기 위한 전쟁, 마치 국경이 없으면 국민의 안전도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안보 (human security)로 생각을 전환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마치 하느님의 나라가 국경으로 이루어지고 지배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국제 난민 인권 문제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가 ‘이슬람 혐오주의’이다. 이슬람 혐오주의는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트루쿠 제국, 이슬람 제국들과 국경 분쟁 등의 역사적 경험때문에 서구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이제 이 혐오주의는 유럽과 북미를 넘어, 기독교 세력이 강한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지 못 하는 것에 대해 집단적으로 혐오하고, 그 혐오에 편견을 더 하고,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테러리스트로, 여성혐오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은 기독교 사랑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퀴어 문화 축제가 준비되던 지난 여름,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영국의 ‘나라를 걱정하는 기독교인들 Christian Concern for Our Nation’의 대표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Andrea Williams)가 한국에 전하는 메세지라는 동영상이 공유되었다. 윌리암스의 메세지는 간단했다. 한국이 차별 금지법을 받아들이는 순간 동성애자들과 이슬람교도들이 거리에 넘쳐나서, 한국도 영국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지옥이 될 거라는 경고였다. 동성애와 이슬람이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로 표현하는 것도 비논리적이지만, 이슬람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살게 될 거란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화권 안에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기독교의 이슬람 박해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팽배해 지기 전에는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오히려 윌리암스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 무슬림들에겐 지옥이다. 기독교와 같이 제도화된 종교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항상 만들어져 가는 것인데,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제도의 노예가 되어서, 사랑이 아닌 증오를 전파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 (Aloysius Pieris) 신부는, 진정한 개종은 기독교라는 종교로의 개종이 아니라, 모든 부조리한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 (liberation)’으로 개종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1988) 이슬람이 가르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 칼럼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 모두,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집단들에 의해, 테러리스트의 종교도 될 수 있고, 서로에게 위협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다.
          지금은 종교와 폭력이란 주제에 대해 필독서 중 하나가 된 “Exclusion and Embrace”에서, 옛 유고 연방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Miroslav Volf)는, 현대 사회에서 죄악이란 타인을 배척 (exclusion)함으로써, 현실을 뒤틀어서 바라보고, 이렇게 뒤틀려진 현실 속에 살면서, 공포심을 가진 채, 타인을 향해 증오와 폭력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볼프에 의하면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타인과 평화로운 공존을 통해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어려운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열어 보이신 것처럼 타인도 똑같이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서도 온다.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1996) 볼프의 구원이란 관점에서 보면, 난민과 우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난민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들을 끌어 안으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독교인들 모두는 이 세상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자들이 아니라, 국경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려고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고, 이 땅에 주인이 아니지만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난민들 말이다. 우리가 난민들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국경을 폐쇄하고, 지구의 주인처럼 살면서,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난민이라 부르고, 우리 땅에 발을 딛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신분을 져버리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 교회가 난민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종교적 인종적 타자들을 끌어 안으면서, 스스로 사회에서 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열린 구원의 길이다. 


<에필로그>
          인천 국제 공항에 가면, 난민들을 위한 임시 수용소 (detention center)가 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앙 아시아에서 어려움 끝에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고, 난민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한국의 난민 심사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까다롭고 기간도 길며, 이 임시 수용소는 침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감옥같은 곳이다. 그나마 난민 자격을 얻지 못 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으로 쫓겨 나거나, 다시 지루한 법정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한다. 기독교 교회는 오랜 동안 난민들을 보호하고, 정착하는데 도움을 준 전통이 있다. 미국의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미국 정부에게 시리아 난민들을 더 받으라고 압력을 넣고 있고, 자신들의 공간을 난민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서원했다. 한국 교회가 이들 교회 운동에 동참하여, 난민 인권 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한국 국경 안에 들어와 있는 난민들의 이주에 적극적 관심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면, 한국 정부도 쉽게 난민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전쟁 동안, 우리도 수많은 난민들이였음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남 난민들을 바다로 내보낸 책임이 있음을, 중동지역 전쟁에 우리도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nhcr.org/5575a78416.html [본문으로]
  2. (Anna Swanson, “The Big Myth about Refugees: Refugees Can Be an Investment Rather Than a Burden,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blog/wp/2015/09/10/the-big-myth-about-refugees/?postshare=20714458158194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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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가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그것들이 내는 젖이 넉넉하여 버터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7,21~22a

 

    온 국토가 르신의 말발굽에 난도질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뿐이다.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이사야서〉 7,2) 장인(스가랴 왕)의 나라 이스라엘은 연이은 쿠데타로 갈가리 찢겨진 채 다마스커스의 국왕 르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르신이 주도하는, 아시리아의 침공에 대항하는 동맹에 베가는 적극 참여했다. 한데 사위의 나라이자 봉신국이던 유다국이 이 동맹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자 베가를 비롯한 동맹국들이 사방에서 유다국을 향해 진군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군대에 유다국 왕자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 그리고 총리대신 엘가나가 죽임당했고, 수만 명의 백성이 끌려갔다.(〈역대기하〉 28,7~8) 동맹에 참여한 나라들은 여기저기서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했으며, 여자들을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게다가 궁 안에서는 동맹 참여파에 의한 궁중 쿠데타 시도까지 있었다. 밖에서는 사방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안에서는 국론이 갈라질 대로 갈라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서 유다 국왕 아하스는 극단의 선택을 한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왕자를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운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저 모든 침략자들이 정복을 눈앞에 두고 철군하였다.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야훼께서 돌보아주셨다. 왕자님의 죽음을 보고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던 병사들도 소리친다. 만조백관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왕도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확신했다. 그들에게 이 구원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죽은 아들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서 구원의 징조를 이야기한다. “젊은 여자(알마, עלמה)가 아이를 잉태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이사야서〉 7,14)  

    이사야의 구원 해석이 왕과 만조백관, 그리고 백성과 다른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이는 이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우유와 꿀’을 먹고 자랄 것이라고 말했다.(7,15) 묘한 뉘앙스의 말이다. 왕궁 아이의 음식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광야 족속들의 음식이다. 그렇다고 우리말의 나무껍데기 씹어 먹는 것과 같은 처절한 민중의 음식도 아니다. 가난한 광야 백성들이 먹는 평범한 식사다. 요컨대 그 식사는 ‘풍족한 가난’을 상징하고 있다.  

    이어지는 18~25절의 말도 재앙을 얘기하고 있다. 적군이 쳐들어와 온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붙잡혀 간다는 것이다. 한데 그 재앙 한 가운데에, 21~22절의 말, 모두가 몰락한 상황에서 맞는 ‘소박한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사람들은 넉넉하게 버터와 꿀을 먹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풍족한 가난, 그것은 일종의 이미 주어진, 하지만 ‘아직은 유보된 구원’과 같은 것이다. 적의 군대가 물러갔어도 아직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이다. 구원은 유보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도래했다. 풍족한 가난으로 말이다.  

    일종의 ‘전후’ 체험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며, ‘새로운 전쟁’, 마음의 전쟁 체험이기도 하다. 해서 전쟁이 끝나기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애절하게 기도했듯이 여전히 간구하며 견뎌내야 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전후’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전후’, 유보된 구원의 시간에 대해 묘한 구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풍족한 가난이라고 말이다.

    나는 여기서 지난 2011년을 떠올린다. 수차례의 전후 체험이 있었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했던, 하지만 그때 우리를 당혹하게 했고, 성찰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더 큰 재앙으로 우리를 덮쳐올 것이 예상되는 사건이 그 해에 태풍처럼 거세게 지나갔습니다. 거의 4백만 마리에 달하는 소와 돼지를 몰살시킨 전대미문의 사건, 그 참혹함의 시간이다. 죽을만한 질병이 아닌 병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병을 ‘죽음의 낙인’으로 간주했다. 이유가 있는 낙인이 아니다. 인체에 전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도 아니고, 치사율도 5~10%에 지나지 않으며, 병증도 경미한 질병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것을 ‘죽음의 낙인’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청정국 지위를 박탈당한다는 이유 하나로 각국은 구제역이 발생하면 학살을 시작한다. 그리고 2011년 한국처럼 국가가 방역에 실패하면 그 학살은 재앙으로 돌변한다. 그렇게 한국에선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죽음의 낙인’이 찍혔던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은 “말 한 디에 죽음 하나”라는 참혹한 시어를 썼다. 열정을 다해 세계를 숙고하며 인생을 논했던, 가치와 이념과 진리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고자 사력을 다해 살아왔던 이들이 독일 장교가 호명하는 숫자 하나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수용소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구제역 살상의 현장에서는 그런 것도 없다. 일단 발병한 동물이 있으면 인근 지역의 모든 소와 돼지 등을 가리지 않고 생매장하는 학살의 참혹함만이 있을 뿐이다.  

    유다국에 쳐들어온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하루 만에 유대병사 12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의 백성을 끌고 갔다는 재앙 묘사(「역대기하」 28,7~8)가 떠오른다. 얼마 후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이스라엘 국의 유민이 대거 남하하여 인구가 급증하였을 때도 유대국의 총 인구가 12만 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위의 수치는 터무니없는 과장임에 분명하지만, 이 구절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가 유다국 전 주민에게 죽을 만큼 혹독한 고통을 선사하였다는 얘기에 다름 아닐 표현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즉 말 하나에 죽음 하나, 아니 말 하나에 수십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을 그냥 무덤덤하게 ‘그땐 그랬지’라고 말해버리는 ‘영혼 없는 말’처럼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구제역 사태로 소와 돼지를 학살하기로 결정했다고 냉랭하게 말하는 정치당국자들의 말과 비슷하다. 또 그런 뉴스를 보면서 무덤덤했던 우리도 별반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질병을 이렇게 학살의 낙인으로 둔갑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직접적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근원적인 대답은 가능하다. 축산 시스템이 대규모로 기업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제역 학살의 근원적 배후라는 것이다. 가축을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떼어놓고 대량사육하는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가축과 사람 간의 공동체적 유대가 사라진 것이다. 대량사육의 시스템이 규정한 글로벌스텐다드는 이렇게 생명체간의 관계 파괴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고 나서 황폐해진 소규모 축산업이 몰락하고 나면 그 지역에 방대한 축산단지가 개척되고, 그 지역의 농민을 강제이주시키며, 또한 인근 지역에서 거대한 사료농지가 조성되는 방식의 기업화된 축산시스템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 2천 마리에 인부 1명이 일하면 되는, 그런 곳이다. 사육하는 가축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목숨을 걸고 맹수와 싸우던 그런 목동이 아니라, 2천 마리를 기업화된 시스템에 의해 기계적으로 사육하는 기업가가 있는 곳이다. 소를 팔아서 학비를 대었다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아니라, 거대기업이 사육한 고기를 먹으며 성장한 사람들의 사회, 사육현장과 삶의 현장이 분리된 기업축산시스템이 바로 구제역 학살을 무덤덤하게 실행하는 세계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축산시스템 덕분에 ‘육식’은 가장 저렴한 섭생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육식은 우리의 식사 매뉴 가운데 가장 많이 개발된 음식종류를 가지고 있다. 해서 우리의 일상에는 이러한 기업화된 축산시스템에 맞추어진 육식문화가 스며 있다. 소농이 몇 마리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던 사회의 음식문화가 아닌, 기업적 축산업에 맞춘 음식문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축산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대부분의 채식주의는 중산층적 웰빙 취향의 고상함을 벗어날 수 없다.  

    한데 아직 이런 기업농이 덜 발달한 한국에서 엄청난 구제역 살상이 있었고, 축산업의 3/5이 몰락했다. 그리고 가장 친근했던 음식인 육식 시스템이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하지만 그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사야 예언자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아직 끝나지 않은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아직 유보된 재앙의 복원을 빠르게 앞당기고 싶어 한다. 저렴한 고기를 먹고 그 맛을 향유하고 싶어 한다. 한데 기업화되지 않은 중소규모 축산업자들의 상당수는 회복할 수 없는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고 커다란 심리적 상처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에 의한 빠른 회복은 요원한 일이다. 결국 기업화된 축산업의 도입만이 가능한 대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소축산업자들의 몰락, 그리고 기업화된 축산업의 등장, 나아가 기업화된 전지구적 축산업 체계에의 완전한 종속. 이러한 사육과 섭생의 지구자본주의적 시스템에 종속되면, 운동부족과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면역력이 약화된 동물들에게 부작용이 강한 약제를 마구잡이로 쓰게 되며, 그럼에도 변형된 새로운 질병에 감염되어 무수한 살생이 반복되는, 2011년 같은 사태가 거듭 재현될 것이다. 그런 가축이 우리의 육식문화에 자리잡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우려되는 것은 소나 돼지의 질병이 인체에도 중대한 위해를 가하는 사태가 이미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상생하라고 위임한 소명을 간과한 결과는 동물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재앙 이후를 ‘우유와 꿀’을 먹는 삶으로 표현하였다. 말했듯이 그것은 ‘풍족한 가난’의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값비싼 고기를 기꺼이 먹고 조금 천천히, 조금 절약하며 먹는 섭생의 태도, 그것이 바로 재앙 이후를 현명하게 맞는 ‘풍족한 가난’을 향유하는 지혜일 것이다. ‘일상의 임마누엘’은 아마도 여기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을 넘어, 그러한 지혜를 우리사회가 공유하고 전지구 시민이 공유하여, 동물과 식물과 돌과 나무와 새, ......, 모든 하느님의 피조물과 공존하고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구적 임마누엘’의 실현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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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 담긴 생명의 기운

 



박여라




    어려서 교회에서 배운 노래 중에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를 참 좋아했다. 히브리민요 곡조에 오소운 작사로 알려진 이 노래는 흔한 서구의 찬송과는 음색이 달라 묘한 매력이 있었다. 되돌이표도 없는데 노래가 무한히 반복될 것같은 느낌이었다. 이십여 년 뒤 미국에서 나의 라틴어 선생 도미니칸 수사에게서 배워 족히 수백 번은 외웠을 주기도문(Pater Noster)처럼 주술같은 기운이 있었다. 곡조도 곡조이지만, 이사야 35장 말씀으로 그린 ‘그 나라'의 모습이 참 좋았다.

    찬송가 중에선 ‘빈 들에 마른 풀같이'를 특별히 좋아했다. 에스겔 34장 26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씀으로 만든 찬송이다. 어린 시절 무슨 갈급한 마음이 있어 성령의 단비가 내게 쏟아지기를 기도했던 것 같지는 않고, 지금 돌아보니 메마른 땅에 비가 내려 사방이 촉촉하게 젖고 생기가 도는 메타포가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흙냄새가 피어오르면 좋아서 하던 일을 멈춘다. 무언가 이루어진 것 같은 편안함이랄까.

    어른이 되어 꽤 긴 세월을 캘리포니아 북부 (교포들 말로는 ‘북가주')에 살았다. 거기서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다. 실제로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하늘과 태양, 바람과 땅도 그 곳이다. 그 곳은 사계절이 아니라, 일 년이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와인지역에 갈 때면 어느 계절이든 모습이 달라 다 장점이 있다. 포도를 거둬들이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는 때엔 그 냄새가 온통 진동하니 해가 뜨거워도 좋고, 좀 더 지나 가을이 되면 포도나무가 종류별로 화려하게 단풍이 져서 이쁘다.

    난 우기의 끝 즈음이 좋다. 날이 아직 추워 포도나무에 순이 나오기 전이다. 잎이 무성한 여름과는 달리 벌거벗은 나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비는 거의 그쳐서 다니기도 크게 불편하지 않고, 줄줄이 늘어선 포도나무들 사이사이로 머스터드 노란 꽃이 가득하다. 비단 와인지역 뿐 아니라 북가주를 관광하기엔 산과 들에 머스터드, 주황빛 양귀비, 싱싱한 들풀까지 더해져 그 때가 가장 아름답다. 건기가 다시 시작되어 6월쯤 되면 풀이 다 말라 구릉의 골에서 자라는 나무들만 푸른 빛이고 온통 건초다. 다시 비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해엔가부터 매일 사하라 사막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사막에서 정처없이 걸어가는 내 모습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주어진 하루를 세어가며 언제고 사막에 가리라 새로 다짐했다. 아침저녁으로 주기도문 챈팅을 몇번씩 읊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을까.

    나에게 당장 ‘비교적' 가까운 곳은 데스벨리(Death Valley)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여행지는 좋으면 질릴 때까지 계속 가곤 하는데, 그런 여행지들은 대개 아무리 반복해서 가도 질리지 않는다. 데스벨리가 그렇다. 죽음의 골짜기라니, 이름 참 무섭다. 19세기 중반,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향하는 무리 중에서 이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떼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살아서 이 계곡을 빠져나간 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안녕, 죽음의 골짜기!” 했다나. 

    이 이야기로만은, 그리고 그 곳엘 가기 전까지는, 왜 거기가 미국의 59개 국립공원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여름 휴가철에 캘리포니아를 찾은 이들이 그곳이 유명하니 가겠다고 하면 늘 뜯어말렸다. “덥고 황량해. 가지 마!”

    사하라사막은 아니지만, 내가 꿈에도 그리던 사막을 데스벨리에서 드디어 처음 만났을 때에야 사람들이 왜 그곳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사막엔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 나를, 사람을 뛰어넘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죽어있는 땅이 결코 아니었다. 악조건을 버텨내는 생명으로 가득했고,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적막함이 품고 있었다. 이내 그 간절함에 매료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모습일텐데, 이 곳에선 비가 하나님의 축복이다. 소낙비처럼 내려주마 약속하신 에스겔 34장 말씀처럼 말이다. 데스벨리의 연평균 강수량 60밀리미터다. 우리나라에서 봄 가을 건조할 때 한 달 강수량이다. 그것도 대부분 우기, 그러니까 11월에서 3월에 내린다. 비가 좀 넉넉히(?) 내린 우기가 지나고 나면, 그 죽음의 사막이 거짓말처럼 들꽃으로 화려해진다. 그 메마른 땅에서 비 몇방울에 간절하게 피어나는 온갖 꽃들은 나에게 자유, ‘스스로 말미암음’을 가르쳐주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를 좀 괴롭힌다. 물을 너무 잘 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열매맺는 일에는 딴전이다. 너무 비옥한 땅도 좋지 않다. 뿌리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더 깊게 내리게 하여, 이상적으로는 땅이 지닌 고유함을 포도알에 담아내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못 살게 하면 나무가 죽어버릴 테니 ‘약간의 스트레스'라는 발란스가 중요하겠다. 포도나무 뿌리는 대개 땅속 1미터 정도인데, 6미터 이상 뻗어나가기도 한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빙산은 1할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9할이듯, 와인을 만드는 포도송이 하나하나는 포도나무 뿌리가 흙과 자갈 속 깊이 더듬더듬 생명을 찾아 뻗어나간 간절함의 정수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이스라엘에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리라는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 뒤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나온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마른 뼈들이 살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살아있는 기운(생기)이 바람처럼 불어와 죽은, 완전히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생명을 준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알려진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엘니뇨 덕에 비가 넉넉히 내려, 지금 온통 장미빛 꽃으로 물들었다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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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알린스키(Saul D. Alinsky)와 실용주의적 급진주의(II)

 



서명삼

(University of Chicago, 종교사회/인류학 박사과정수료)




    1. 지난번 글에선 알린스키를 ‘도덕교사’ 혹은 ‘평화의 사도’로 환언해서 소개하려는 일군의 흐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공동체조직 운동론은 급진적 실용주의 전통과의 연관성 속에 보다 다양/다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알린스키가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 중 ‘수단과 목적’을 다루는 두번째 장을 집중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2. 먼저 알린스키가 ‘수단과 목적’이라는 글을 쓴 시점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이 단행본으로 처음 출판된 건 1971년이다. 그런데 이 책은 본래 알린스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이곳저곳에서 발표한 강연문이나 기고문들을 엮어놓은 일종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단과 목적’에 관한 장은 그가 1966년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시간상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씌여진 글이라 할 수 있다.


    3. 이는 곧 다시 말해서 알린스키가 이 글의 초고를 완성한 때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이 출판된 시점 사이에 약 5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바로 이 기간 사이에 1968이라는 격동의 시기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시간차로 인해 생기는 전후 컨텍스트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알린스키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의 서문과 마지막 장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지 말고 섣부르게 폭력행사에 나서지 말라고 충고한 대상은 엄밀히 말해1968 이후의 신좌파 학생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수단과 목적’의 초고는 ’68 이전, 그러니까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가 차례로 암살당한 후 민주당 전당대회를 맞아 시카고에 모인 대규모의 시위대가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기 이전,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여파로 신좌파 학생운동이 격렬한 내부 노선 투쟁을 겪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그중 일부 분파가 본격적으로 과격해지는 시점 그 이전에 씌여진 글이 되는 셈이다.


    4. 그렇다고 한다면, 알린스키가 1960년대 중반경에 왜 새삼스럽게 이 고전적이다 못해 상투적이기까지 한 ‘수단과 목적’이란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의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출발했던 것인가? 또 그는 누구를 대화 혹은 논쟁의 상대로 상정해 두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했단 말인가?

 

    5. 아쉽게도 알린스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자신의 글에서 펼치고 있는 논지를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알린스키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의 좌파 운동판에서 다시금 활발하게 불붙기 시작한 한 논쟁에 나름대로 개입하고자 했다는 점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6. 당시 이 논쟁의 핵심 주제가 바로 사회변혁운동에 있어서 수단과 목적간의 괴리와 일치에 둘러싼 윤리성에 관련한 것이었는데, 다소 거칠게 구분해보자면, 이 논쟁은 크게 구좌파와 신좌파간의 노선갈등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싶다.


    7. 일단 60년대 초 이 논쟁의 포문을 먼저 열어제낀 쪽은 대학가의 젊은 학생 운동가들을 주축으로 한 신좌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사안에서 — 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철폐,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종식, 미소 양 강대국을 주축으로 한 냉전 갈등의 해소, 그리고 맥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 — 구좌파 세력이 공감할 만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신좌파 운동의 서막을 알린 ‘포트 휴런 선언 (Port Huron Statement)’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196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신좌파의 주류 세력은 원칙적으로 폭력을 통한 사회변혁에 철저히 반대했으며, 운동조직을 꾸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레닌식의) 전위조직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구조보다는 (일찌기 존 듀이식의 실용주의 전통에서 강조해온) ‘참여 민주주의 (participatory democracy)’의 원리에 따른 수평적 구조를 채택했다. 즉 60년대 초중반의 신좌파 운동은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좌파 운동과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적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수단과 방법만을 고집했다는 측면에서는 구좌파와 차별된 행보를 걷고자 했다.


    8. 이에 반해 구좌파측에서는 인간해방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가설을 상정해 윤리적 문제를 역사적 발전 법칙의 종속 변수 중 하나로 취급했다. 예컨데, 1965년 미국의 사회주의 이론가 조지 노박 (George Novack)은 그보다 약 30년 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Leon Trotsky)와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 (John Dewey)간에 있었던 논쟁을 다시 소환해 내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실용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노박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윤리적 규준이라는 건 기실 당대의 계급 관계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따라서 운동의 수단과 방법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각각의 역사발전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효과적이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의 타당성을 상당 부분 수긍하면서도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끝끝내 자유 민주적인 윤리성을 버리지 못하는 듀이식의 실용주의는 결국 ‘중산층 지식인’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노박은 과거의 논쟁을 60년대로 소환해 듀이의 입장을 (암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68이전의 신좌파 운동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


    9. 그렇다면, ’68 이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알린스키는 구좌파와 신좌파간에 벌어지고 있던 이 수단과 목적에 대한 논쟁에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기본적으로 알린스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공허한 질문 대신 늘“이 특정한 목적이 저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고 질문을 바꿔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항상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 놓은 상태에서 알린스키는 (단기적) 목적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역시 항상 가변적이고 대체가능한 것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그는 전쟁같은 상황 속에서, 특히나 아군에 비해 적군의 화력이 월등하게 앞서 있을 경우, 윤리적 선악의 구분을 따지기 이전에 일단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변화시켜 나감에 있어 운동의 역량이 점차 축적되어 가용한 자원이나 채택할 수 있는 수단이 점점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새로운 상황에 걸맞게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고려도 점차 증가시켜 나가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당면한 상황과 피아의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 없이, 어떤 고정된 이데올로기—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든 참여 민주주의든 상관없이 —에 근거하여 원리원칙적으로 일관되게 폭력 투쟁만 일삼거나 혹은 비폭력 저항만 고집하는 건 둘다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운동 방식이 되고 만다. 즉, 알린스키는 다분히 전략전술적이고 급진적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사회변혁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유연성있게 변화시키고 적용시켜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던 것이다.


    10. 결론적으로, 알린스키는 이 ‘수단과 목적’에 대한 논의를 통해 당시 구좌파와 신좌파의 입장을 나름대로 변증법적으로 종합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에 참여한 모든 당사자들 사이에서 인간 해방에 대한 궁극적 목적에 대해선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운동의 수단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 계급투쟁에 의한 역사 발전 법칙에 따르려했고, 반면 듀이식 실용주의와 60년대 초의 신좌파 운동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모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철저히 존중해야 한다는 다소 유토피아적인 운동방식을 옹호했다. 알린스키의 경우, 그는 이 양측의 입장을 어느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부하면서 이 둘의 조화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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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알린스키, 사울 D. 1968. “수단과 목적.” 기독교사상 12 (11): 73-82. 

Alinsky, Saul David. 1971. Rules for radicals; a practical primer for realistic radicals. New York: Random House. 

Dewey, John, and Jo A. Boydston. 1987. The later works: 1925-1953 11 11. Carbondale u.a: Southern Illinois Univ. Press. 

Dewey, John, Larry Hickman, and Thomas M. Alexander. 1998. The essential Dewey. Volume 1, Volume 1.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SDS, “The Port Huron Statement,” 1962. 

Trotsky, Leon, John Dewey, and George Edward Novack. 1966. Their morals and ours; Marxist versus liberal views on morality. New York: Merit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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