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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리더십』
- 성경을 통해 깨닫는 여성주의 리더십

지은이 : 구미정

펴낸날 : 2010년 5월 28일
페이지 : 254쪽
정  가 : 13,000원
펴낸곳 : 생각의 나무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성경 속 여성 리더들을 통해 섬김과 이끔을 하나로 화합시킨 ‘핑크 리더십’을 살펴보는 책. 저자인 신학자 구미정은 《주간 기독교》에서 ‘성경 속 핑크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2008년 1월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이 책은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성경 속 9명 여성 리더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성경 속 인물들을 주제로 한 고전 명화들을 추가해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핑크 리더십’이라는 제목을 걸고서 일차적으로 성서에 나타난 여성 리더들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처한 특수한 실존적ㆍ역사적 상황 아래서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들의 사례를 풀어보고 그들의 리더십이 기존의 리더십과 어떻게 다른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리더의 자질도 챙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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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특별기고[각주:1]
: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해체론적 독법 (II)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호에 이어)

 

해체론, 비어있는 중심을 꿈꾸다

세상에는 우리가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거나 드러내보일 수는 없으나, 그 집단의 성원들이 모두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광의적으로 인간일반 전체에 형성되어 있는 것을 고르라면 종교라고 할 수 있겠죠. 일정 지역, 일정 거민들에게 통용되는 그것을 분석하려면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났던 일제식민지 시절, 광복, 분단, 한국전쟁,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 반공, 빨갱이, 좌파……이런 격동 속에서 한 평생을 요동치며 살아온 한국보수층의 눈으로 볼 때, 북한이 천안함을 타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확실히 물증을 제시할 수 없고 밝힐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북한이) 거기에(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것)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 보수층들이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충돌론, 이슬람 강경테러분자, 헤즈볼라, 9.11, 오사마 빈라텐, 사담 후세인……이런 기표들은 부시로 상징되는 미국 보수층들에게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지만 진실은 그것이(대량살상무기) 그곳(이라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설정하고 있는 천안함과 이라크를 둘러싼 그들의 진실은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유래합니다. 결과와 양상은 다르지만 미지의 어떤 것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해체론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메시아적인 것이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메시아로 상징되어져서 무엇인가를 정초하고 토대 지어 깃발을 펄럭이며 그 아래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것은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수많은 메시아주의를 낳아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의과정, 이라크 침략을 둘러싼 미국의 그것은 해체론과 동일하게 알 수 없는 어떤 것’(저의 용어로는 메시아적인 것’)에 기인하나, 그것들은 해체론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빠르고 확고하게 중심을 가득 채우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해체론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목입니다.

저에게 있어 메시아적인 것이란 멈추지 않고 의혹에 휩싸여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곳은 누구나 들어 올 수 있으나,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입니다. 설사 그곳에 일정 기간 동안 시대를 대표하는듯한 지배적 정서가 있어 호령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 예외적 사건의 예로 기록되어진 후에 다시 괄호밖으로 미끄러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백악관이나 청와대와는 다른 해체론의 수사학입니다. 어떤 미지의 것에 기대어 이라크의 살상무기, 북한의 천안함 타격을 당연시하는 그들의 논리는 언뜻 해체론과 방법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있는 듯 하나, 해체론에서 담론 너머의 가능성의 형태로 남기고자 하는 부분을 그들은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해체론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광기 안으로 미지의 타자를 끌어들이고 그 미지의 타자를 다시 투사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해체론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출몰을 꿈꾸는 광기의 욕동을 부단히 경계하면서 그 요소들을 미지의 타자에 기대어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를 부단히 반성하고 수정도록 합니다. 바로 이점이 해체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My Autobiography, 나는 왜 해체론으로 세상을 읽는가?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레닌의 동상이 붉은광장에서 철거되는 것을 지켜보며 저는 적잖은 충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저에게 두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현실 사회주의는 왜 좌절되었는가? 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 물음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자본주의의 발전과 승리)에서 찾기보다는 사회주의 내부의 문제, 즉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압으로 전도되었는가? 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과 관계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시점에서 어떻게 다시 혁명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무렵 출판된 책이 Specters of Marx (1993)입니다. 이 책을 전환점으로 하여 저는 윤리적,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문제들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Gift of Death (1995), Of Hospitality (2000), Acts of Religion (2001), For What Tomorrow…(2004) 등이 그런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저의 후기 사상에서 우선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전과 같은 강렬한 유토피아적인 열망도 아니고 그것을 위한 가열찬 투쟁의지도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유토피아적인 것들의 실현에 저는 솔직히 관심이 없습니다. 역사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 주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늘 우리에게 판단력을 요구하고, 기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흔들어 놓습니다. 따라서 항상 자신을 새로운 실험적 상황에 던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저의 요즘 관심사는 이와는 정반대로 진보에 대한 신화를 비신화화하는 것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처럼 쓸쓸하고 공허한 탈 중심화된 상태, 즉 기표가 사라진 혼돈을 사랑하고, 큰 타자의 부재를 인정하는 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텅 비어 있는 실재의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모든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불법)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3세계 민중이라는 이유로, 늙었다는(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은 채 참된 민주적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다시말해, 텅 빈 실재의 공간에 어떻게 하면 공적 자유의 바람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입니다. 다시는 그 무엇에 의해 점거당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갈구하던 니고데모를 향한 예수의 답변,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 3:8)’라는 경구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또한 이 성전을 허물라시던 예수 자신의 외침과 후대 사람들이 했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라고 하는 예수에 대한 평가 또한 해체론이 추구하는 그것과 전략적 제휴의 가능성을 띄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신학과 해체론과의 대화는 현재 제가 하고픈 가장 매력 있는 작업이자 저의 최후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에필로그: 오바마에 대한 추억……그리고 악몽 꾸다

합조단의 발표가 있은 지 며칠 후 (5 24),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과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경고를 내용으로 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한국정부의 대응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보냈다고 합니다. 반 백 년 넘게 이어온 온 한미간의 공조로 미루어 볼 때 별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개인적으로는 오바마 역시 다른 미국의 대통령들이 했던 보편적인 나쁜 짓을 어느 정도는 다 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각주:2]

저는 꿈을 잘 꾸지 않지만, 그 날은(이명박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던) 간만에 꿈자리가 사나왔습니다. 영화 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텔레비전 밖으로 악령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기어 나오는 장면과 유사한 꿈이었습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주방으로 나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잠이 깼는데, 정신이 차려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 군사독재 시절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었던 음습하고 공포스런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더군요. 정말 기분 엿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구천을 떠도는 잡다한 유령들이 다시 출몰하는 겁니까? 어디서 용한 무당 한 분 모셔다가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잡귀야 물러가라!’하면서 말입니다. <>

추신> 엊그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말에 한국을 방문해 한기총(?)에서 주관하는 무슨 집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대형운동장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국을 찬양하고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집회였고 은혜롭게 행사가 마무리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라크전을 일으켰던 유령과 천안함을 둘러싸고 있는 유령간의 극적인 회합이었겠군요. 재미 있었겠네요. 누가 후일담 좀 들려주십시오.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2004년 세상을 떴습니다. 물론, 졸고는 가상입니다. 필자가 이해한 데리다의 시선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북한의 천안함 침몰간의 상동성을 밝히는 것이 지난 호 웹진 내용이었다면, 이번 웹진에서는 실재에 대한, 아니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론적 독법이 갖는 함의에 대해 다룹니다. [본문으로]
  2. 필자가 현재 재학중인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이하 CTS) 교수, 동문, 학생들이 느끼는 오바마에 대한 애정은 남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이고 삶과 사상의 근거지입니다. 오바마의 집이 CTS와 5분 거리이고, 오바마가 20년 동안 다니며 결혼하고 자녀들도 세례받고 선거운동 직전까지 출석했던 시카고 트리니티 UCC교회가 CTS가 속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UCC 교단이라는 점. 지난 대선기간 중 ‘갓 뎀 아메리카’논쟁으로 선거초반 최대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냈던 시카고 트리니티 UCC교회 담임목사이자 오바마의 멘토인 제레마이 라이트 목사와 오바마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현존하는 흑인 인권의 상징이자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제시 잭슨 목사등이 모두 CTS 출신이라는 점, CTS교수님 중 몇 분은 오바마와 같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몇 가지 이슈들(예: 동성애, 낙태문제등에 있어 기독교적 대응)에 있어 오바마캠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CTS는 마치 집안 사람이 대통령이 된 듯한 착각과 황홀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번 여름학기에도 제레마이 라이트 목사가 일주일간 ‘미국정치와 인권, 기독교’ 뭐 그런 내용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새삼 그 모든 것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군요. 미국 진보세력의 희망이라 불리웠던 오바마 역시 미국의 국익에 충실한, 보통의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물론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미국 진보진영의 숙원사업이었던 의보개혁안을 통과시키고, 동성애자의 군복무에 대한 평등권을 추진하는 등 전직 대통령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외교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미국의 대통령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프간 전쟁이나 이번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입장 표명에서 보듯이) 미국의 정의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유령의 등장을 묵인하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그런 대통령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미리 유령들이 짜놓은 판대로(매트릭스) 말판을 놓는 역할만을 담당하는 허수아비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오바마에게 큰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또 속았군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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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0 15: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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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결코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영이 임의로 분다'에 대한 오역입니다. 이 책을 추전합니다. "하나님의 양으로 태어나라"


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여섯번째

의심 많은 목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 새번역 요한복음 20장 24-25절

목사가 되기 전, 평신도 시절에 나는 많은 목사들에게 실망을 했다. 보통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목사들의 잘못된 신학, 권위주의적인 목회방식, 믿음을 가장한 고집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된 지금도 난 역시 목사인 내가 못마땅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가장 골칫거리는 목사 자신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수제자 베드로가 순식간에 사탄의 대열에 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마가복음 8장 33절) 잠시 멈추어 어쩌다 목사가 되어버린 나를 돌아본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한국인들에게 꽤 친숙한 이탈리아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의 입을 빌어 이런 충고를 하고 있다.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목사가 되는 과정은 교단마다 교파마다 다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리스도교 진리와 목회에 대한 열정을 가슴과 몸에 아로새긴다. 그래서 목회지에 가서는 그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그 열정이 바른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살펴볼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성찰의 시간을 일부러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지한 회의주의자는 어쩌면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지한 회의주의 없이 함부로 자신이 예수와 함께 간다고 확신할 경우 목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가!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마치 기업가가 자신의 기업을 세우고 확장하듯이 하고 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탐욕과 성취욕을 채우려 한다. 이것은 평신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를 찾기보다는 세속적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관리하고 성장시킬 지도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리는 유진 피터슨은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책에서 목회자가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첫 장을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의심 많은 도마처럼 나의 목회에 대해 차근차근 따져보고 싶다. 기존에 해오던 것을 모두 다 내려놓고 차분히 점검하고 싶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현장을 깊이 살피고 싶다. 내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다. 내 욕망과 아직 걸러내지 못한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고 싶다. 내 행동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다.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어떤 점들을 발견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목회는 하느님이 하시도록 하기 위해 나는 살짝 빠지면 좋겠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 구상하고, 서로 나누고 의논하면서 한걸음씩만 가고 싶다. 성큼성큼 앞으로 가 놓고 왜 못 따라 오냐고 윽박지르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오늘 대뜸 물위를 걷다가 이내 빠져 버리는 베드로가 되기보다 따져보고 믿겠다는 의심 많은 도마가 되고 싶다. 오히려 그의 불신앙을 배우고 싶다. 이런 불신앙을 가진 목사를 받아주는 교회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교회는 건강해지고 더 성숙할 것이라 믿는다. 신앙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본질적인 물음을 묻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맹목적인 기독교, 저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독교에 만족하는 당시 사람들을 위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러분! 이 말과 함께 이 강의를 마치면서 내가 이 강의에서 제시한, 첫 시간에 말한 나의 과제가 그렇게 어긋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앙인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내세의 후보자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기독교인 자신의 고백과 자백에 따르면 ‘반은 동물이고 반은 천사인’ 기독교인에서 인간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과제이다.”[각주:1]
포이어바흐의 강의가 당대의 사람들을 얼마나 깨우쳤는지 나는 잘 모른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포이어바흐의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아마 포이어바흐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신앙인이야말로 아래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신의 친구이자 인간의 친구, 사유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노동자, 새하늘 새땅을 가슴에 품은 현세의 학생, 인간의 불완전함을 기억하면서 노력하는 인간!”

ⓒ 웹진 <제3시대>


  1.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강대석 옮김, 한길사, 401.&#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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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6 10: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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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리 선생은 <사반의 십자가>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한없이 의심했다고 말합니다.예수는 주님이고,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케뤼그마는 성령에 의해 갑자기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지 고민한 결과라는 말이지요.
    개신교 신학자들인 마틴 루서 킹 목사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그분의 평전을 읽어보니까 예수가 정말 부활한 것인지, 노아의 홍수는 정말 있었는지, 마태복음서에 예수가 태어났을때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을 드렸다는데 왜 프롤레타리아로 살았는지등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고,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도 평생 하느님이 계신 것인지 고민했다지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우리네 평범한 그리스도 교인들은 어찌 회의가 없겠습니까? 의심과 회의와 씨름하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갈 뿐입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성공회의 표현을 빌리면 성서와 전통을 이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성격이 급한 것 같다는 겁니다.
    신앙이 성숙하면서 성서에 대해 의문과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한데, 그래서 루터, 깔뱅, 존 셸비 스퐁 성공회 주교(Episcopal Bishop John Shelby Spong),구스따보 구띠에레즈, 레오나르도 보프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도 읽고, 필요하면 리처드 호슬리처럼 그리스도교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맑스주의까지도 응용하는 노력이 용인되고 장려되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한문덕
    2010.07.17 16: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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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200년이 넘어간다지만 유대-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볼 때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집만 비대하게 할 것이 아니라 속을 튼실히 해야할텐데요.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자란다는 것은 겪을 것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 같아요. 그래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있고요. 답글 감사합니다.

 

어린이들의 예술적 <자기만의 방>

김현화
(연구소 회원,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내놓은 이후, 많은 여성들은 남성지배문화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넘어서고 탈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다양한 사적문화로 가득 채워진 많은 방들을 만들어내기에 분주했다. 이런 흐름은 지배문화에서 배제된 수많은 주변문화를 가진 이들에게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상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 아니 적어도 자격이 주어진 듯 보이며, 중심과 주변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중 많은 부분이 지배 문화가 내는 확성기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만 적어도 이들은 발설할 장소와 기회를 가졌고 들어줄 마음이 있는 청중들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해서 내가 하려는 말을 꺼내보자. 나는 아동들이 ‘예술의 봉사’를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미술, 특히 조각의 기초재료인 진흙으로 무언가 빚어내는 시간 사이사이에서 그들 삶의 중요한 흔적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돕고 싶다. 여러 핑계로 현재는 아이들이 아니라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조각 수업을 소개하고 그 강한 영향력에 대해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성인인 교사들 몸과 마음에 오롯이 살아있는 그들의 유년을 실감나게 만나는 중이기도 하다.

앞서 지배문화에 저항하며 ‘자기’를 찾아나서는 많은 목소리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 저항문화의 내용에도 역시 ‘성인’이라는 지배적 입장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청소녀/소년 문화를 걱정하는 제스쳐들이 나오고, 각종 아동권리선언문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내용은 이들의 의식주를 채워주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영위되도록 하기 위한, 그리고 아동들을 사회화할 교육을 위한 걱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 성인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를 아동들의 ‘자아 조우’(encountering the self), 자기만의 방 혹은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한 사유나 논쟁 등은 필자의 얕은 정보력 때문인지 그 시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통상 아동들은 시간을 두고 자라나야 할 대상, 그리하여 미래에나 의미를 갖추게 될 존재로 취급되는 통에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들이 현재 얼마나 섬세하고 드라마틱하게, 얼마나 깊고 심각하게 자아와 대면하며, 말하자면 예술의 서비스를 통해 자기만의 집 한 채를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지 관심을 갖는 이가 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아동들의 권리 문제가 의식주와 돌봄, 미래의 삶과 사회를 위한 교육에만 집중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들의 깊은 내면을 제대로 무시하는 길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에 대해 작지만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 이야기해 보자. 이것은 우리에게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벽에 걸려 구경 당하는 죽은 미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조력자로서의 미술이 가능한지, 아동과 청소년의 삶에 불가피한 예술 체험이 교실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를 타진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흙으로 지어 올리는 빈 방 혹은 집

교과 과정으로 진흙 조소(clay modelling)수업을 하는 학교가 있다. 1학년(만 7세)은 2차원 평면 위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진흙 조각들을 한 점 한 점 붙여가며 원형과 직선 형태를 만들어간다. 점차 이 형태를 발전시켜 집이나 성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 성의 문이나 집 창문은 진흙을 붙이지 않고 비워두어 비록 평면상이긴 하나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을 잊지 않고 하게 된다.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볼륨감 있는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만족할 만큼 두터운 벽을 만드는 동시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며 채움과 비움 사이를 오가는 행복한 숨을 쉰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평면위에서 채움과 비움을 반복해 창조한다. 그러다가 아홉 살, 3학년(만9세)이 되면 평면에 있던 공간에서 좌-우, 위-아래, 앞-뒤가 있는 3차원적 공간,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으로 들어가게 된다. 평면 바닥에 누워있던 기둥들은 작은 발바닥을 굳게 땅에 대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는 일어선 두 기둥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아치형 다리가 놓여진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기를 몇 고비 넘긴 후 문틀이 준비된다. 벽체는 더욱 단단하게 그러나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두 기둥에 붙어있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드디어 돔 같은 지붕이 무겁게 내려앉으면서 가로질러 하늘을 잘라낸다. 드디어 진짜 공간, 내부와 외부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이때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온 존재를 동굴 같은 그 집 안으로 들여 놓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멜랑콜리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누워있던(horizontal) 기둥들을 일으켜 세우는(vertical) 일은 인간 직립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만)아홉 살 인생’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실제 이 시기의 아동들은 신체적으로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다. 오랫동안 학교 주치의로 지내며 조사를 해온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이들은 유독 이 시기에 맥박이 갑작스럽게 증가하여 심장의 중요성이나 그 역할이 어느 시기보다도 올라가게 되며, 이와 함께 혈중 당의 양이 급감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동들은 성장과 함께 서서히 혈당이 올라감에도 유독 이 나이가 되면 상승 곡선이 일시적으로 하강하게 된다. 이는 병적 증상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치 않은 자연스런 감소로, 이 시기를 지나면 다시 자연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를 원인으로 혹은 그 결과로) 자주 우울감과 허약함, 고독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감정을 감출 수 없게 되며 급기야 죽음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이 시기 아동들의 성향이다. 물론 다양하게 표출되고 (학교거부, 복통, 짧은 호흡, 어지럼증 호소 등),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재미나게 시선을 빼앗아가는 게임과 TV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표현을 막아서기도 하지만, 주의 깊은 귀와 눈을 잠시라도 그들에게 고정한다면 그들이 토해내는 급박한 단어와 몸짓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이들은 이러한 신체적 위기와 함께 자신이 누구누구의 딸, 아들이 아니며 오직 ‘자기 자신’임을 처음으로 직감하게 된다.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그런 길에 자신이 외롭게 들어섰음을 감지한다. 아직까지는 유아기의 흔적이 남아있던 1, 2학년 시기에 보았던 것과는 무섭도록 다르고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다. 혼자이고 싶다. 집을 짓고 싶다.

누구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을 듯한 상황, 모두에게 버려져 내동댕이쳐진 숨 막히는 상황에서 그러나 다행이도 예술은 아이들을 기억과 자유의 공간,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이끌며 사랑스런 조력자가 되어준다. 더 이상 ‘인간’이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서서히 나타난 예술은 사마리아인처럼 아홉 살 인생들을 일으켜 세워준다. 그러다가 드디어 3학년이 끝날 무렵 문을 열고, 내/외를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 혼자 들어가 침묵으로 세상을 맞으며 버티게 했던 자기만의 방은 당장은 빈 집 혹은 해체된 방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후, 아이와 함께 같이 변하고 자라나 수많은 이웃들이 초대되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임이 분명하니 여기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예수를 떠올려 봄직하지 않은가.

현란하게 눈속임하는 듯 펼쳐지는 미술교육에 제동을 걸고, 소리 없이 의미 없는 듯 무심히 다가와, 행하는 자가 예술가인지 예술이 예술가인지 모르는, 예술주체가 전복되는 드라마가 아무 일 아닌 듯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시끄러운 미술 교과서를 뒤로하고 소박한 나무판 하나와 진흙 한 덩이만 남겨놓으라. 그러면 그들이 모두 조각가 될 것이다. 아마도 요셉 보이스는 여전히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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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 기행 - prologue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각주:1]

 




경계(境界).








[각주:2]






그곳은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기도 하고,








[각주:3]






중심을 향한 욕망이 가장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 상품, 돈이 넘나드는...
경계, 그곳은 ‘흐르는 공간’이다.

 





 

‘사잇섬’(간도, 間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연변 일대는 지금,
‘개혁․개방’, ‘지구화’... 이름이야 어찌됐든,
사회․경제적 변화를 극렬하게 겪어내고 있다.




[각주:5]




이러한 ‘변화’는 부모들의 ‘노동이주’와 청년층의 ‘교육이주’라는 유출을, 그리고 엄청난 ‘자본’의 유입을 초래했다. 늦은 밤, ‘경계도시’ 연길에는 ‘남겨진 청소년/녀’의 물결이 자본이 밝힌 ‘불’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변화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불안’을 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각주:7]








‘일송정’과 ‘해란강’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들 필요가 없는 청소년 세대를 보며 “떼놈 다됐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중국 중앙정부의 동북지역 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조선족은 유출되는 반면) 한족 유입이 많아져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위상, 나아가 자치주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언어, 기억, 공간...
‘조선족’의 정체성/경계를 담보하던 것들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게
불안의 근원이었다.

그들의 불안과 기억은
그리고 연변이라는 공간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중국 연변 기행>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고작 5박6일의 경험으로 무언가를 아는 척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없을 것이다.

이 기획은 우리가 그간 잘 몰랐던
연변의 어떤 ‘본질’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와 ‘조선족 정체성 위기’라는 두 항 사이에서
‘오늘, 여기’에 사는 나의 삶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일종의 스케치 작업이다.

때문에 이 시리즈는 여행 중 얻은 인상들을
다시 끄집어내 반추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끌어 모아
그 의미를 되묻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기억을 구성하는
계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본격적인 작업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연변에서의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중국 연변 기행’에
다소 재미가 없더라도 함께해 주시길... ^^;


[다음호 제목...]

‘연변 처녀’에 대한 기억과 ‘북간도’라는 상상의 공간

 

  1. 중국과 북한의 국경 다리 위에서. 여기서 한발을 더 내디디면 북한이다. [본문으로]
  2. ‘장암촌 학살현장’ 기념비 부근에서. ‘3.13 반일운동’으로 ‘시체 살해’까지 당한 33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를 찾았다.(이 역사는 아직 한국에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사진에 작게 나온 할아버지는 올해 85세인데, ‘걸어다니는 역사책’이라 불러도 될 만큼 비상한 기억력으로 일제시대 간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셨다. [본문으로]
  3. 연길시 숙소 창문에서 찍은 연길 시내 사진. 개발광풍이 불고 있다. 어딜 가도 아파트 건축현장과 타워크레인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돌아온 이들은 아파트를 서너 채씩 매입하고 있다고 한다.(공산국가라 땅은 사유하지 못하나, 건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수년 이내에 땅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소문도...) [본문으로]
  4. 연길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부르하통하’ 강. 러시아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강 주변엔 유원지가 조성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청소년들이 이곳의 주고객이다. 사진은 ‘디스코팡팡’과 그 앞에 몰려든 사람들. 중국어와 조선족어를 섞어 말하는 DJ가 인상적이었다. [본문으로]
  6. 용정 가는 길 터널. [본문으로]
  7. 일송정 터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일송정이 사라진 터에는 시멘트로 만든 정자가 서있었고, 해란강은 하천 정비사업을 하는지 한참 파헤쳐지는 중이었다. 지리적 ‘지문’은 조금씩 바뀌는 중이지만, 용이 내려앉은 것 같은 용정의 풍광과 그 풍광이 주는 숙연함은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용정에 가시거든 꼭 일송정 터에 올라 보시길... [본문으로]
  8. 길림시의 새벽시장. 많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아침을 사먹거나 조리가 끝난 음식을 사다가 집에서 가족과 간단히 먹고 출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출근 전 아침부터 시장에 인파가 넘친다. ‘아침 외식’ 문화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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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0.07.16 03: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주 신선하고 재미있는 기획기사가 될 것 같군요. 만져지는 촉각적 느낌만큼 사람들에게 훅 다가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연길에 대한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옴을 느낍니다. 아마도 내 몸 구석 어딘가에 연길, 간도, 용정을 매개시키는 칩이 저장되어 있나? 김재준, 안병무, 문익환, 강원용 이런 분들이 그 지역 출신이라 관련된 전설들(?)도 많이 듣고 자랐고, 특별히 지금 제가 사역하는 시카고교회에 있는 유학생청년중 연길에서 미국으로 유학온 조선족 유학생이 있는데 지금 방학을 맞아 연길에 가 있습니다. 문득 위에 제공된 연길 밤풍경 사진에 찍힌 젊은이들 모습을 보니 그 청년이 생각나네요.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중에 오면 물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좋은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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